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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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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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천寧川 이씨(李氏)
    영천寧川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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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씨(賴氏)
    뇌씨(賴氏)는 중국 영천(潁川)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명나라 당왕(唐王: 태조의 9세손, 재위기간 : 1645 ~ 1646) 때 사람인 뇌명표(참장을 역임)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뇌씨(뇌氏)의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고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충북과 경기도에 모두 5명이 있었으나,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220
  • 순천順天 이씨(李氏)
    순천順天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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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강 편씨(浙江片氏)
    절강 편씨(浙江片氏)

     절강(浙江)은 중국(中國) 동남부(東南部) 동해(東海) 연안에 위치하여 양자강(楊子江)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으며 전당강(錢塘江)에 의하여 동서(東西)로 나누어져 항주(杭州)를 성도(省都)로 하고 있다. 편씨(片氏)는 중국(中國) 당(唐)나라 종실(宗室)의 후손으로 본래 남송(南宋)때 현유(賢儒)인 이 동(李  )의 8대손 이 지(李 址)가 명조(明祖)때 한림원 태학사(翰林院太學士)로서 일편단심(一片丹心) 충간(忠諫)의 공으로 편씨(片氏)를 사성(賜姓)받았다. 우리나라 편씨(片氏)의 연원(淵源)은 편 지(片 址)의 현손(玄孫)인 편갈송(片碣頌)이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 이여송(李如松)휘하의 군무총병 유격장(軍務總兵 遊擊將)으로 들어와 평양(平壤)에서 전공(戰功)을 세우고 귀국하였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선조(先祖)로부터 노고를 치하하는 친서를 받았으며, 당시 본국의 어지러운 소식을 듣고 환국을 단념한 뒤 경주 금오산(慶州金鰲山)에 은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본국의 아들, 풍세(豊世), 풍원(豊源), 산보(山甫) 3형제가 금오산으로 와서 아버지를 봉양하다가 갈송(碣頌)의 상(喪)을 당하자 삼년간 시묘(侍墓)한 후 경주를 떠나 풍세(豊世)와 풍원(豊源)은 나주(羅州)에, 산보(山甫)는 만경(萬頃)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며 편갈송(片碣頌)을 시조(始祖)로 하고 선향(先鄕)인 절강(浙江)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게 되었다.
     편씨의 가계(家系)는 나주(羅州)에 뿌리를 내린 풍세(豊世)가 슬하에 아들 성대(成大)와 문수(文秀)를 두었으며, 풍원(豊源)은 응복(應福), 한정(漢鼎), 영표(永標) 3형제를, 만경(萬頃)에 정착한 산보(山甫)는 외아들 순당( 堂)을 두어 이들의 자손대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역사상 뛰어난 인물로는 고종(高宗)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전주 중군(全州中軍)을 지낸 기진(沂珍)과 정평부사(定平府使) 좌언(佐彦)이 있으며 독립운동가로 명성을 날린 강렬(康烈), 덕렬(德烈)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절강편씨(浙江片氏)는 남한에 총 2,607가구,
    10,9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042
  • 행주 은씨(幸州殷氏)
    행주 은씨(幸州殷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 행주(幸州)는 경기도(京畿道) 고양(高陽)의 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계백현을 신라에서 우왕(遇王) 또는 왕봉(王蜂)이라 하였고, 고려 초(高麗初)에 행주(幸州)로 개칭하여 성종(成宗) 때는 고봉(高峰)·덕양(德陽) 등으로 불리우다가 1413년(태종 13) 고양군(高陽郡)이 되었다.
     은씨(殷氏)는 중국 당(唐)나라 출신으로 신라(新羅)의 주청(奏請)에 의해 850년(신라 문성왕 12) 8학사 중 한 사람인 은홍열(殷洪悅)이 동래(東來)하여 뿌리를 내린 것이 시초이다.
     행주 은씨(幸州殷氏)의 시조(始祖) 은홍열(殷洪悅)은 신라왕조에서 벼슬이 태자태사(太子太師)·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고 덕양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행주(幸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은씨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寶)」에 태인(泰仁)·명곡(椧谷)·행주(幸州) 등 9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본관(本貫)은 행주 은씨(幸州殷氏) 단본(單本)으로 알려진다.
     역사상 대표적인 인물을 보면 정(鼎)이 고려(高麗) 문종(文宗)때 시중(侍中)을 역임하고 학문(學問)이 뛰어나 사숙(私塾)을 열어 많은 후진을 길러냈으며, 조선조에서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한 장손(長孫)의 아들인 여림(汝霖)은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우헌납(右獻納)·경력(經歷) 등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라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오른 현(顯)과 해주 판관을 지낸 보(輔) 형제가 가문을 증흥시켰고, 그외 현종(顯宗)과 숙종대(肅宗代)의 학자(學者)로 이름난 정화(鼎和)는 최서림(崔瑞琳)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닦아 일면 「상계선생(相溪先生)으로 불리워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행주 은씨(幸州殷氏)는 남한에 총 2,975 가구, 12,130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967
  • 광천 동씨(廣川董氏)
    광천 동씨(廣川董氏)

     광천(廣川)은 중국 북부지방의 화북성(華北省) 조강현(棗强縣)에 속한 지명으로 지금의 북경(北京)근처이며, 고대 중국의 중요 산업지대로 유명하다. 동씨(董氏)의 연원(淵源)은 기원전 2,250년경 황제(黃帝)의 6세손 류숙안의 아들 보(父)가 순(舜) 임금으로부터 동씨(董氏)의 성(姓)을 하사(下賜)받은 것이 시초가 되며, 계보(系譜)는 전한(前漢)의 대학자(大學者) 동중서(董仲舒)로부터 시작된다. [광천동씨대동보(廣川董氏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대유(大儒) 동중서(董仲舒)는 기원전 179년(한 나라 문제 원년) 중국 화북성(華北省)에서 출생하여 고명(高明)한 학덕(學德)으로 유교일존주의(儒敎一尊主義)를 확립, 한 (漢)나라 유교독립의 기반을 중흥시켜 동양사(東洋史)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으며, 문묘에 배향되어 동씨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우리나라 동씨(董氏)는 동중서(董仲舒)의 43세손인 동승선(董承宣)이 고려 말에 명(明 )나라 접위사(接慰使)로 동래(東來)하여 조선개국(朝鮮開國)과 함께 출사한 후 나라에 공을 세워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군에 봉록되고, 벼슬에서 물러나 함경도(咸鏡道) 북청(北靑)의 이곡(泥谷)에 세거(世居)하면서부터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특히 동씨(董氏)는 처음에 승선(承宣)의 봉군지였던 영천(榮川)을 관향(貫鄕)으로 쓰게 되었고, 함경북도 명천(明川)지방에 살던 후손들은 원주(原州)로 칭관(稱貫)하는 등 동원(同源)이면서도 관향(貫鄕)을 달리하여 부르다가 조선 단종조(端宗朝)에 이첩(移牒: 관청으로 보내는 통첩)으로 다시 영천이라 하였으나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明)나라 제독(提督)으로 원병(援兵)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건너온 동일원(董一元)의 소장문서를 근거로 하여 시조(始祖) 동중서(董仲舒)의 출생지인 중국의 광천(廣川)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승선의 아우 인선(印宣)은 명(明)나라 홍무년간(洪武年間: 1368-1398)에 아버지 박소(搏 )와 절의지간(節義之間)인 서 달(徐達)의 천거로 태조조(太祖朝)에 지휘사(指揮使)가 되어 전공을 세움으로써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다. 그리하여 광천동씨(廣川董氏)는 강도상(江都相 ) 동중서(董仲舒)를 시조(始祖)로 삼고, 영천군(榮川君) 승선(承宣)과 이부상서(吏部尙書) 인선(印宣)을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동씨(董氏)의 본관(本貫)은 광천을 비롯하여 광주(廣州), 영천(榮川), 풍천(豊川)등 25본이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원분파(同源分派)로 추정된다. 동방의 거유(巨孺) 동중서(董仲舒)의 학덕(學德)을 이어받은 광천 동씨(廣川董氏)는 특히 조선조에서 훌륭한 인재(人財)를 많이 배출하여 도덕(道德)의 가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승선(承宣)의 손자 덕란(德蘭)은 공조시랑(工曹侍郞)을, 현손(玄孫) 보하(寶夏)와 상하(尙夏)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여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오른 학정(學政: 인선의 현손)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편 일원(一元)의 아들 창순(昌順)은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으며, 대순(大順)의 맏아들 한필(漢弼)은 인조조(仁祖朝)에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있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淸)나라 와의 굴욕적인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비분강개하며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智異山)에 은거한 후 누차에 걸친 조정의 부름에도 불응하며 자손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말도록 유언(遺言)했다고 한다. 희방(希芳)의 아들 응란(應蘭)은 1624년(인조 2) 부원수(副元帥) 이 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향병(鄕兵)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우봉 현감(牛峰縣監)을 거쳐 갑산부사(甲山府使)로 나갔다. 그밖의 인물로는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낸 혜진(惠震)과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한 정란(廷蘭)이 유명했으며, 하욱(夏旭)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올라 부호군(副護軍) 희경(禧景), 부사(府使) 기연(基衍), 현감(縣監) 진호(鎭鎬)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천동씨(廣川董氏)는 남한에 총 1,095가구, 4,6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960
  • 인천仁川 이씨(李氏)
    인천仁川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945
  • 영천永川 이씨(李氏)
    영천永川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794
  • 면천 복씨(沔川卜氏)
    면천 복씨(沔川卜氏)

     면천(沔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당진군(唐津郡)에 속해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 때
    에는 혜군( 郡) 또는 지비(智非)라 부르던 것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혜성군( 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운주(運州:홍주의 옛 지명)에 속하였다.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와서 면천군(沔川郡)으로 고쳤으나 1913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진군(唐津郡)에 속한 면천면(沔川面)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복씨(卜氏)의 선계(先系)는 당(唐:후당923∼936) 나라의 학사(學士) 한 분이 신라 말엽에 오계(五季:다섯 왕조에 걸쳐 문란해진 시대를 일컬음)의 난국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면천(沔川)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始初)가 되었다. 복씨의 본관(本貫)은 면천을 비롯하여 홍주(洪州)·오천(烏川)·연주(延州 : 강원도 영월의 고호)·평산(平山)·구성(龜城) 등 10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면천을 제외한 나머지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기록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다.
     면천 복씨(沔川卜氏)의 시조(始祖) 복지겸(卜智謙)은 고려창업(高麗創業)의 주역(主役)으로 본래는
    태봉국(泰封國)의 마군장수(馬軍將帥)로 있다가 궁 예(弓 裔)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민심이 어지러워지자신숭겸(申崇謙:평산 신씨의 시조)·배현경(裵玄慶:경주 배씨의 시조)·홍 유(洪 儒) 등과 함께 왕 건(王 建)을 추대(推戴)하여 고려를 세웠다. 그후 장군 환선길(桓宣吉)과 임춘길(林春吉) 등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이를 평정(平定)시켰으며,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혜성부원군( 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복지겸(卜智謙)을 시조로 받을고 본관(本貫)을 면천(沔川)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조에 10여 명의 평장사(平章事)와 관면잠영(冠冕簪영)이 끊이지 않아 거족(巨族)으로 일컬어졌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조에서 무신(武臣)으로 명성을 떨쳤던 규(奎:시조의 12세손)가 1291년(충렬왕17) 원(元)나라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 합단(哈丹)이 침입했을 때 원주 방호별감(原州防護別監)으로 이를 격퇴시켜 크게 무명(武名)을 날렸으며, 그의 아우 기(箕)는 지주사(智州事)을 역임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한편 우부승지(右副承旨) 성진의 아들 위룡(渭龍)이 공양왕(恭讓王) 대 사온서 직장(司 暑直長)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 색(李 穡) 등과 함께 친교를 맺어 교유했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홍주(洪州) 여수동(麗水洞)으로 돌아가 은거(隱居)하며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의 아들 한( )은 세종조(世宗朝)에서 호조 좌랑(戶曹左郞)에 올라 아버지 상(喪)을 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3년 동안 여막(廬幕)에서 시묘(시墓)하여 세인들의 칭찬을 받았으며, 맏아들 오(吾)가 임천(林川)과 서천군수(舒川郡守)를 거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올랐고, 막내 여(予)는 고원 군수(高源郡守)와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한편 오(吾)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는데  맏아들 승원(承元)은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으며, 차남 승형(承亨)은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세째 아들 승리(承利)는 제주 목사(濟州牧使)을 각각 역임하여 막내 승정(承貞:예조 참의와 황해 감사를 역임)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승정(承貞)의 현손(玄孫) 응길(應吉:참봉 연의 아들)은 중봉(重峯) 조 헌(趙 憲)의 문인(門人)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따라 종사관이 되어 금산(錦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종용사(從容사)에 배향(配享)되었으며, 그의 조카 정웅(廷雄:상길의 아들)은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그밖에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낸 태진(台鎭)과 장령(掌令) 태형(台衡)이 유명했으며,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도흠(道欽)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한 준흠(駿欽)·윤성(潤成)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복씨(卜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4,264명, 1975년에는 1,116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1,794가구, 7,3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786
  • 천씨(天氏)





    천씨(天氏)

     천씨(千氏)의 연원(淵源)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연안(延安) 지방에 한 기아(棄兒)가 있어 사람이 거두어 길렀는데, 그의 성(姓)을 알  수가 없으므로 만물지조(萬物之祖)인 천(千)으로써 성(姓)을 삼았다고 하며,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연안(延安)과 우봉(牛峯) 두 본이다.

     역사상에 나타난 인물(人物)로는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천명익(千命翊)이 「사마방목(司馬榜目)」에 기록되어 있으며, 근세에는 193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황해도 봉산(黃海道鳳山)과 서흥(瑞興) 지방에  14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경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97가구, 1,3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783
  • 안산安山 이씨(李氏)
    안산安山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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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성 구씨(綾城 具氏)
    능성 구씨(綾城 具氏) 

       시조 휘(諱):구존유(具存裕),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
             단 소: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 연주산

     


    능성 구씨(綾城 具氏)

      능성(綾城)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능주(綾州)의 옛 지명으로 백제시대에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 또는 죽수부리군(竹樹夫里郡)·인부리군(仁夫里郡) 등으로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敬德王) 때 능성현이라 개칭되었고, 1913년에 능주면으로서 화순군(和順郡)에 편입되었다.
     구씨(具氏)의 선계(先系)는 중국 진나라 대부(大夫) 구 병(具 丙)으로 전하며, 「동사보유(東史補遺)」와 「주청계공실기(朱淸溪公實記)」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구씨(具氏)는 송나라 출신인 구존유(具存裕)가 1224년(고종 11) 신안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 청계(淸溪) 주 잠(朱潛)과 함께 고려에 귀화(歸化)한 것이 시초가 된다. 
     「능성구씨세보(綾城具氏世譜)」에는 그가 고려조에서  벼슬이 벽상공신 삼중대광(壁上功臣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에 이르렀고, 전남  능성현(현 능주면 고정리)에  은거하던 주 잠의 딸과 혼인하여 능성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우리나라 구씨(具氏)의 터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고려(高麗) 후반기에 문호(門戶)를 연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조선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무맥(武脈)을 이어오면서 권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시조  존유(存裕)의 7세손 때부터 가세가 크게 번창하여 사재감 판사(司宰監判事) 현좌(賢佐)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사공파(判事公派), 공조 전서(工曹典書) 현로(賢老)를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侍郞) 영량(英良)을 파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派)를  비롯하여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판안동공파(判安東公派)·도원수파(都元帥派)·재신파(宰臣派)·낭장공파(郎將公派)·감무공파(監務公派)·임천군사공파(林川郡事公派)·참판공판(參判公派)·문천군사공파(文川郡事公派) 등 10여 파(派)로 크게 갈리었다.
     각 파별 인맥을 살펴보면 판사공 현좌(賢佐)의 아들 인문(人文)이 세종 때 등과하여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로 문종(文宗)의 총애를 받았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을 비관하여  눈뜬 소경으로 행세하며 고향인 봉생(鳳生)에 돌아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고, 그의 아들 효근(孝謹)은 함창 현감(咸昌縣監)을 지냈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의강(義剛)은 현좌의 7세손이며 선공감역(繕工監役) 경서(慶瑞)의 아들로 수찬(修撰)·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강원도  암행어사(江原道暗行御史)로 백성의 억울함을 다스렸으며 이조 좌랑(吏曹佐郞)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시랑중파 영량(英良)의 7세손 환(桓)은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지냈으며 도량이 넓고 준직(峻直)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392년(태조 원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이태조(李太祖)가 누차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불응하고 능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며 절의를 지켰다. 
     그의 7세손 두남(斗南)은 부사정(副司正) 정(綎)의 아들로 중종  때 효행이 뛰어나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특제(特除)되어 경릉 참봉(敬陵參奉)을 거쳐  명종 때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가 되었고, 그의 손자 희(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로 들어가 금산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진주성(晋州城) 수비에 가담, 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충효의 전통을 지켰다. 
     좌정승파(左政丞派)에서는 파조(派祖) 홍(鴻)의 손자 익수(益壽)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미리 알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사직한 후 은거하였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봉령(鳳齡)은 겸(謙)의 아들로 어려서 이퇴계(李退溪)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당시 동서(東西)의 당쟁에 시작되던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詩)와 문장과 학행의 <삼절(三節)>로  일컬어졌고, 그가 죽은 후 만년에 학도(學徒)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던 집 동쪽에 학도묘(學徒廟)가 세워졌다.
     판안동파 서(緖)는 성량(成亮)의 아들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능성군(綾城君)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아우 강(綱)은 공주 목사(公州牧使)를 거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역임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능원군(綾原君)에 봉해진 문신(文信)과 문정(文靖 : 은산 현감을 역임)·문로(文老 : 병마절도사를 역임) 3형제는 능성군 서(緖)의 아들로 유명했으며,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오른 신충(信忠)의  손자  수연(壽延)·수복(壽福)· 수담(壽聃)·수팽(壽彭) 4형제가 뛰어났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 8권 <기묘당적(己卯黨籍)>의 기록에  의하면 수복(壽福)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파직되자 갈 곳이  없었다. 그의 장인이 딱하게 여겨 보은(報恩)에 있는 자기 농장에 가서 살도록 했더니 얼마  후에 농장의 종이 그를 싫어해서 장인에게 중상하기를 “구좌랑이 농막을 차지한 후로 종들을 혹사하여 장차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장인은 자세히 알아 보지도 않고 종말만 듣고 그를 쫓아 내었다.  이 때는 겨울철이었는데 수척한 말과 허약한 종 하나를 데리고 길에 나와 갈 곳이 없어 행색이 참으로 비참했다.
     때마침 한 호걸남자가 사냥하러 갔다가  수많은 종을 데리고 사냥개와 매를  이끌고 지나가는데 수복(壽福)이 오랫동안 길에서 방황하여 잠깐동안에 두 번이나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말 위에서 읍하고 묻기를 “당신은 누구이기에 길에서 홀로 머뭇거리고 있소”하였다. 
     수복(壽福)은 그 연유를 대략 말하였던 바 그 호걸남자는 즉시 말에서 내리기를 청하여 눈 위에 털요를 깔고 서로 마주 앉아 담화하면서 꿩을 굽고 술을 부어 권하기를 숙친한 사이같이 하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 호걸남자는 찰방(察訪)을 지내다가 파직되어 보은에 내려온 김태암(金泰岩)이었다. 태암(泰岩)은 수복에게 집과 밭 수십경(頃)을 주어 잘 살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수복은 부인과 아들 3형제를 데리고 편히 살면서 단장과 짚신으로 명산승지를 두루 돌면서 마음껏 탐승(探勝)했는데 속리산의 경치를 가장 좋아 했다고 하며 학풍을 일으켜 많이 배출했다.
     수복의 아우 수담(壽聃)은 일찍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에게 글을 배우고 1528년(중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박사(博士)를 거쳐 검토관(檢討官 : 이조  때 경연청의 정 6품 벼슬)으로서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유림의 서용을 청했다가 파직되기도  했으며,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서는 강직한 성품으로 권신(權臣) 이 기를 탄핵하여 갑산에 유배당했다.

     인조(仁祖) 때 증광문과에 급제한 봉서(鳳瑞)는 수복의  현손으로 이조랑(吏曹郞)에 올라 인조의 사친추숭(賜親追崇)을 반대했으며, 평안 감사(平安監事)로 재직시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 계가 잠상(潛商 : 법령으로 금하는 물건을 암암리에 팔고 사는 장사)  문제로 청나라에 가서 망군부국(忘君負國)의 고자질로 조선의 조정을 믿고 전횡을 일삼자 이를 잡아 효수(梟首)하여 민심을 통쾌하게 했다. 그가 평양에서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애도의 뜻을 표하였는데 평안도가 생긴이래 가장 큰 상사(喪事)였다고 한다.
     도원수파에서는 목사(牧使) 양(揚)의 아들 치관(致寬)의 형제 대(代)에서부터 크게 현달하여 능성 구씨(綾城具氏)의 중추역할을 담당하였다.
     치관(致寬)은 계유정난(癸酉靖難 :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에 가담하여 재능을 인정받아 일약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 :승정원에 속하였던 정3품의 벼슬)에 올랐고 좌익삼등공신(佐翼三等功臣)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진하여 능성부원군(綾城附院君)에 봉해졌다.
     뒤에 우의정(右義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으로 불안정한  북변의 야인대책에 치중하여 세조는 항상 “구치관은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치하했으며 특히 이조(吏曹)의 인재 등용에 청탁을 배제하는 신풍(新風)을 세운 조선 최초의 판서(判書)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의 기록에 어느날 참의(參議) 서거정(徐居正)이 정방(政房)에서 술이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마침 치관(致寬)이 그를 보고 꾸짖기를 “참의의 생각에는 구치관이 인물을 전형하는데 제멋대로 할 것이라 하여 간섭하지 않으려 하는가 뒷날 사람을 잘못  썼을 때에 참의는 ‘나는 집에 있어서 알지 못했다’고 하겠는가”하였다고 한다.
     치관의 아우 치홍(致洪)은 세조 때 문무겸재(文武兼才)의 인물로 발탁되어 80이 넘어서도 입궁할 때 말을 타지 않고 걸어 들어가 마치 심어 놓은 굽은 소나무처럼 서 있었다고 한다. 
     치홍의 아들이 철원 부사(鐵原府使)를 지낸 수종(壽宗)과 중종 때 정국이등공시(靖國二等功臣)으로 능성부원군에 봉해진 수영(壽永)이며  수영의 손자 한(澣)은  중종의 딸 숙정옹주(淑靜翁主)와 혼인하여 능창위(綾昌尉)에 봉해졌고 명종 때 위사워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순(淳)의 아들 사맹(思孟)은 지경연사(知經筵事 : 경연청의 정 2품 벼슬)를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갈 때까지 청렴결백하여 권세가들과의 접촉을 회피했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다섯째 딸이 인헌왕후(仁獻王后 : 원종의 비)가 되었다.
     그밖에 선조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능해군(綾海君)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성(宬)과 인조 반정의 공신 굉(宏)은 좌찬성(左贊成) 사맹(思孟)의 아들이다. 
     특히 굉(宏)은 인조조 40년간 벼슬에 있는  동안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세번,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네 번,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두 번 지냈고 별직(別職)으로  도총관(都摠官)을 비롯하여 무신직(武臣職)을 거치면서 치적(治績)을 많이 남긴 명신으로 손꼽히며, 성(宬)의 아들  인후는 인조와 고종사촌간으로 광해군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신경진·김 유 등과 함께 인조 반정을 성사시킨 인물이다.영조 때 부사직(副司職)으로 찬집당상(簒輯堂上)에 올라  「속대전(續大典)」을 찬술하고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훈석한 택규(宅奎)와 그의 아들 윤명(允明)은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윤명(允明)은 백부 몽규(夢奎)에게 입양하여 1743년(영조 19) 정시문과에 올라  사관(史官)·장령(掌令)·승지(承旨) 등을 역임했고 봉사손(奉事孫)으로 능은군(綾恩君)을 습봉했다.
     낭장파에서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철경(哲卿)과 전주  판관(全州判官) 승희(承禧), 김제 군수(金提郡守) 승유(承裕) 등이 유명했고,  현록(玄祿)은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거쳐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올라 제주 판관(濟州判官)을 지낸 정현(廷賢), 대구 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황(滉), 홍원 현감(洪原縣監) 산두(山斗) 등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그 외 감무파의 암(巖 : 현감을 역임)과  임천군사파의 충로(忠老 : 지임천군사를 역임), 참판파) 석린(碩麟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을 비롯하여  문천군사파의 순(順 : 소강진 수군절도사)과  신동(信童 : 경성 판관을 역임), 대우(大佑 : 예산 현감을 역임), 치용(致用 : 인조 때 학자) 등이  충렬의 전통을 이어 명문의 능성 구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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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順天 박씨朴氏
    순천順天 박씨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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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원 제씨(漆原諸氏)
    칠원 제씨(漆原諸氏)

     칠원(漆原)은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안군(咸安郡)에 위치했던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 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칠제(漆 )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 : 지금의 창원)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초에 칠원(漆原)으로 고쳤고 1018 년(헌종 9) 김해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선조(宣祖) 때 창원(昌原)에 속하였다가 광해군(光海君) 때 현(縣)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후에 함안군(咸安郡)에 병합되었다.
    「칠원제씨세보(漆原諸氏世譜)」에 의하면 칠원 제씨(漆原諸氏)의 원조(遠祖)는 제갈영(諸葛孀)으로 34세손 제갈 홍(諸葛泓)과 제갈 영형제 대(代) 에서 복성(復 )을 각각 한 자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兄)인 홍(泓)은 제씨(諸氏)로 낭야군에 봉해졌으며, 아우인 영은 갈씨(葛氏)로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져 제씨(諸氏)와 갈씨(葛氏)로 분종(分宗)되었다.
     그 후 낭야군 홍(泓)의 9세손 제문유(諸文儒)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될 때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책록되어 평장사(平章事)에 올랐고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에 봉(封)해 졌으므로 본관(本貫)을 칠원(漆原)으로 하여 세계(世溪)를 이어 오면서 가문(家門)의 번성을 누렸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말(沫)이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워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정조(正祖)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낙(洛)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倭敵)을 배둔역(背屯譯)에서 대파한 공(功)으로 참봉(參奉)을 지냈고 한성부 서윤(漢城付庶尹)에 추증되어 이름을 날렸다.
     그 외 선략장군(宣략將軍)에 오른 여원(汝元)은 인조(仁祖) 때의 학자(學者) 경창(慶昌), 호조 참의(戶曹參議) 달룡(達龍), 감찰(監察) 정로(廷魯), 방어사(防禦使) 경욱(景彧) 등과 함께 훌륭한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칠원 제씨(漆原諸氏)는 남한(南韓)에 총 3,927가구, 16,4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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