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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죽陰竹 이씨(李氏)
    음죽陰竹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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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곽씨(淸州 郭氏)
     청주 곽씨(淸州 郭氏) 

       시조 휘(諱): 곽 상(郭 祥), 시중(侍中) 

     

      시조 휘(諱): 곽 상(郭 祥), 시중(侍中) 
      청주(淸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앙(中央)에 위치하는 도청(道廳) 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馬韓)의 땅이었는데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으로도 불리우다가 서기 685년(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에 서원경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에 청주(淸州)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청주 곽씨의 시조(始祖)인 곽 상(郭 祥)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 제 49대 왕, 재위기간 : 875~886) 때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방의 석학(碩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교분(交分)을 나누었다.
     「청주곽씨대통보(淸州郭氏大統譜)」에 의하면 그의 후손 원(元)은  996년(고려 성종 15) 문과에 급제하고 현종조(顯宗朝)에 사신(使臣)으로 송나라에 가서 거란의 침입을 전하고 돌아와  형부 시랑(刑部侍郞)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 중서문하성의 종 2품의 벼슬)에  이르렀으며, 원(元)의 손자인 상(尙)은 수사공(守司空)에 올랐다.
     한편 여(輿)는 고려 예종(睿宗)과의 세자(世子) 때 친분으로 순복전(純福殿)에 있으면서 왕과  담론을 나누었고,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금주(金州)의  초당(草堂)으로 돌아가자 왕이 성동(城東)의 약두산(若頭山)에  산재(山齋)를 짓게 하고  <허정재(虛靜齋)>로 사액(賜額) 한 후 왕이 산책을 나오면 들러 함께 시(詩)를 읊고 즐겨 세칭 <금문우객(金門羽客)>으로 불리웠다. 
      그가 죽자 왕은 남호(南湖) 정지상(鄭知常)을 시켜 「산재기(産齋記)」를 써 비를 세워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1255년(고종 42) 문과에  급제한 예(預)는 문충공(文忠公)  탄(坦)의 현손(顯孫)으로 충렬왕(忠烈王) 때 좌승지(左承旨)와 국자감(國子監)의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고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성절사(聖節使 :  중국 황제의 탄일을 축하하러  보내던 사절)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병사했으며, 교서랑(校書郞) 운진(雲鎭)의 아들 인(麟)은 문과에 장원하고 문한서(文翰署)에 속하여 문장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선유사(宣諭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인(麟)의 손자 충수(忠秀)는 헌납(獻納)을 거쳐 대간(臺諫)에 올라 권신 조일신(趙日新)의 비리를 탄핵했고 뒤에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지냈으며, 평장사(平章事) 침의 아들 추(樞)는  조선이 개국된 후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 예문관의 정 2품의 으뜸 벼슬)에 이르렀다.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 충보(忠輔)는 장사길(張思吉)과 함께  문화(文化)와 영녕(永寧)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고, 열(說)은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으며 외숙인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를 남용하므로 이를  극간했으나 듣지 않자 원주로  은퇴하였고, 그의 아들 희태(希泰)는 66세에 등과하여 87세까지 벼슬에 머물렀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스승이었던 시징(始徵)은 집의(執義)  지흠(之欽)의 아들로 어려서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천거로 참봉(參奉)이 되었다.
     그 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그 무고함을 상소했으나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태안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여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한말에 와서는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에 몸바친 재기(在驥)가 경남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충렬의 가통을 후세에 전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곽씨(淸州郭氏)는 남한에  총 5,667가구, 24,4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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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경씨(淸州 慶氏)

    청주 경씨(淸州 慶氏)

      청주(淸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앙에 위치한 도청 소재지로써 원래 마한(馬韓)의 영토였으며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상당현(上黨縣) 또는 낭비성(娘臂城), 낭자곡(娘子谷) 등으로 불리웠다. 
      685년(신라 신문왕 5)에는 서원소경(西原少京)을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고, 그후 940년(태조 23)에 청주(淸州)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고려(高麗) 중기(中期) 때부터 청주지방(淸州地方)에 뿌리를 내려 경씨(慶氏)는 청주(淸州)를 비롯하여 청풍(淸風), 평택(平澤), 남원(南原), 부안(扶安), 보성(寶城), 장수(長水), 경주(慶州), 안동(安東), 상주(尙州), 하동(河東), 경산(慶山), 정주(定州), 경성(慶城) 등 14본(本)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청주 경씨(淸州慶氏)에서 분적(分籍)된 것으로 전해진다. 
     청주 경씨의 시조(始祖) 경 진(慶 珍)은 고려 명종(明宗 : 제 19대 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원수(元帥) 윤인첨(尹麟瞻)의 막하에서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가 되어 조위총(趙位寵)의 난(亂)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우고,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 서무를 총할하고 간쟁을 맡아보던 중서문하성의 종 2품 벼슬)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다. 
     그의 아들 대승(大升)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은 불법으로 모아진 것이라 하여 모두 군부(軍部)에 바치고 청렴하게 살았으며,당시 무신(武臣) 집권자들이 날로 횡포해지자 무인(武人)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정중부(鄭仲夫), 송유인(宋有仁) 등의 무단정치를 꺾어 왕(王)의 두터운 은총(恩寵)을 받았다. 
      특히 그는 1178년(명종 8) 당시 공(功)을 믿고 월권을 자행한 허 승(許 升), 김광립(金光立)의 방자함을 탓하여 그들의 목을 베어 죽임으로써 사사로움을 탐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어 명망(名望)이 높았으나, 어느 날 밤에 정중부(鄭仲夫)가 칼을 잡고 크게 꾸짖는 꿈을 꾸고 병을 얻어 아깝게도 30세에 세상과 등졌다. 
     고려 고종대(高宗代)에 와서는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청주(淸州)에 세거(世居)한 번(蕃 : 일세조)의 증손 복흥(復興)이 선조(先祖)의 의(義)로운 혈통을 이어, 공민왕(恭敏王) 때 원(元)나라 기황후(奇皇后) 족친(族親)임을 빙자하여 세도(勢道)를 남용하던 기 철(寄 轍) 일당을 퇴살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다. 
      이어 1363년(공민왕 12) 명장(名將) 최 영(崔 榮) 등과 함께 덕흥군(德興君 : 고려 충선왕의 세째 아들)을 받들고 왕조(王朝)에 반기를 든 최 유(崔 濡)를 물리쳐 문하부(門下府)의 으뜸 벼슬인 좌시중(左侍中)에 올라 다시 신 돈(辛 旽)의 세도를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어 흥주(興州)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으로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번(蕃)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청주(淸州)로 삼게 되었다. 
     특히 청주 경씨는 부패한 세도(勢道)에 용기 있는 저항으로 무맥(武脈)을 이어오면서 고려중기에서부터 조선전기에까지 가문(家門)의 성세(盛勢)를 보여왔다.
     복흥(復興)의 아들 3형제중 맏아들 보(補)는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 1388년 랴오뚱정벌에 나섰던 고려의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에 참가하여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을 세우고, 태종(太宗) 때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올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둘째 진(臻)은 정 3품 관계인 정의대부(正議大夫)에 올라 예의 판서(禮議判書)를 역임하였고, 막내 의(儀)는 서북면 병마도절제사(西北面兵馬都節制使)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가문(家門)의 중추(中樞)를 이루었다. 
     그밖에 유선(由善)의 세째 아들 준(俊)이 성종조(成宗朝)에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거쳐 판결사(判決事)와 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를 역임했고, 
     갑자사화(甲子士禍 : 1504년에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난 세창(世昌)은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호조 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여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아우 세인(世仁)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 國)의 문인으로 인종 때 집의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한 혼(渾)은 지평 세청의 아들로 명종조에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부제학과 참의를 지내고, 장례원 판결사에 올라 시성의 아들 섬(暹)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섬(暹)은 진주사(陳奏使 : 중국에 주문을 갖고 가는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를 다녀와서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지내고, 교리(校理)로서 통신사(通信使) 여우길(呂祐吉)의 부사(副使)가 되어 일본(日本)에 건너가 임진왜란 후 단절된 국교(國交)를 다시 열게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의 포로 1340명을 데리고 돌아와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다.
     그외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진(進)과 임실 현감(任實縣監) 종지(宗智), 용천 부사(龍川府使) 형, 군자감 주부 지연, 의금부사 순수 등이 뛰어났고, 양성 현감(陽城縣監) 이는 관찰사(觀察使)와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한 취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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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水原 이씨(李氏)
    수원水原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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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진양 강씨(晋州·晋陽 姜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영남(嶺南)의 고도(古都)로서 백제(百濟) 때에는 거열성(居烈城)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제30대 임금,재위기간;661~681)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고 하였다. 
     그후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 : 통일신라 때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와 5소경으로 구획한 것을 말함)의 실시로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혜공왕(惠恭王:신라 제36대 임금,재위기간;765~780) 때 청주(淸州)로 개칭했으며 고려초에 강주로 환원하였다. 
     서기 995년(고려 성종 14)에 전국(全國)이 10도(道)로 개편되면서 진주(晋州)로 되었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한때 진양(晋陽)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진주 강씨(晋州姜氏)의 시조(始祖)는 고구려(高句麗)의 무장(武將)인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수(隋 : 중국의 통일왕조, 581 ~ 618) 나라 문제(文帝 : 초대 황제, 재위기간; 541 ∼ 604)가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통일한 후 국경에 상접한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실패하자, 양제(陽帝 : 문제의 둘째 아들 2대 황제, 재위기간 ; 604 ~ 618)는 부황(父皇)의 유한(有限)을 풀기 위해 침략의  야욕으로 사신(使臣)을 통하여 
     <수(隋)나라에 지성(至誠)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 고구려 왕이 친조(親朝)의 예를 하지 않으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치겠다>는 내용을 담은 국서(國書)를 보내왔다. 
      이때 왕이 신하를 모아놓고 회답을 논의하였는데,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던 강이식(姜以式)장군이“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답해야 합니다" 하고 무력대결을 주장하자 왕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서기 612년(고구려 영양왕 23)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결심하고 113만 대군을 이끌고 재침해 올 때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출정하여 요동성(遼東城 :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옛 고구려의 요충지)과 살수(薩水 : 평안북도에서 황해로 흐르는 청천강의 옛 이름) 등지에서 수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러 지략과 용맹을 떨쳤다. 
     그후 그의 6세손인 택인(擇仁)이 서기 839년(신라 문성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 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지낸 후 진안후(晋安侯)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진(縉)은 헌강왕(憲康王 : 신라 제49대 왕, 재위기간 ; 875 ~ 886) 때 과거에 장원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와 판내의령(判內議令)을 역임한 후 진양후(晋陽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장군 강이식(姜以式)을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진주(晋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박사공파(博士公派 : 파조 게용) 소감공파(少監公派 : 파조 위용), 관서공파(關西公派 : 파조 시중 원용의 손자 원로), 은열공파(殷烈公派 : 파조 민첨), 인헌공파(仁憲公派 :  파조 해동의 명장 강감찬) 등 크게 다섯 파로 분파(分派)되었다. 

      각 파별(派別)로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박사공파(博士公派)의 파조(派祖)인 계용(啓庸)이 고려(高麗) 때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1274년(원종 15)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왔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 : 감찰사의 종6품 벼슬) 사첨(師瞻)의 현손(玄孫) 시(蓍)는 공민왕(恭愍王) 때 성균시(成均試)에 올라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다. 
     한편 박사공파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회백(淮伯)과 회중(淮仲) 형제는 찬성사 시(蓍)의 아들로서 맏아들 회백이 고려말에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정2품 으뜸 벼슬)을 역임한 후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동북면 도순문사를 역임했다. 
     그는 특히 문장(文章)에 능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저서(著書)로 <통정집(通亭集)>을 남겼다. 
     서기 1382년(우왕 8) 문과(文科)에 급제한 회중(淮仲)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거쳐 조선이 개국한 후 태조(太祖)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회백(淮伯)은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네째 석덕(碩德)이 세종(世宗) 때의 영의정(領議政) 심 온(沈 溫 : 세종의 장인)의 사위가 되었고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다. 
     한편 1441년(세종 23) 25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희안(希顔)은 돈령부 주부(敦寧府主簿)와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등을 지내고 1455년(단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58년(세조 3)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특히 그는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世宗)이 지은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字)에 대한 해석을 달았고 금인(金印) 소신지보(昭信之寶)와 세조(世祖) 때 을해자(乙亥字)의 글씨를 썼다. 
     그의 동생 희맹은 1447년(세종 2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63년(세조 8) 진헌 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성종(成宗) 때는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이 당대에 으뜸이라 하여 성종(成宗)이 서거정(徐居正)을 시켜 그의 유고(遺稿)를 편집토록 하였다. 
     그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귀손(龜孫)은 음보로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가 되어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사재감정(司宰監正), 좌통례(左通禮) 등을 거쳐 1485년(성종 16)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다가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한 후 1497년(연산군 3)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으면서 김일손(金馹孫) 등을 가볍게 벌하도록 주장하였고, 1500년(연산군 6) 진원군(晋原君)에 봉해졌다. 
    그후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1506년(중종 1) 56세로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한편 명종(明宗)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사상(士尙)은 사인(舍人)을 지낸 온(溫)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로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했으며 선조(宣祖) 때는 실록청 동지관사(實錄廳同知館事)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우참찬(右參贊),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에 급제한 신(紳)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평정한 공(功)으로 평난3등공신(平難三等功臣)에 오르고 진흥군(晋興君)에 봉해졌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왜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난이 끝나자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병조(兵曹)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이르렀다. 
      소감공파(少監公派)에서는 파조(派祖) 위용(渭庸)의 아들로 검교(檢校)를 지낸 문로(文老)와 군기시사(軍器寺事) 충이 유명했으며, 상장군(上將軍) 희령(希齡)과 좌의정(左議政) 사덕(思德)이 뛰어났다. 
      그외 감찰(監察)을 역임한 중인(重仁), 뢰(賚), 순(洵) 등과 충순위(忠順衛) 육동( 東), 교위(校尉)를 지낸 휴( )가 이름을 날렸다. 
     시중공(侍中公) 원용(遠庸)의 손자(孫子) 원로(元老)를 파조(派祖)로 하는 관서공파(關西公派)에서는 8세손 국흥(國興)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된 행(行)의 아들 문회(文會)는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여 동생인 문우(文遇 : 장령을 역임)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문회(文會)의 손자(孫子) 언홍(彦弘)은 좌통례(左通禮)를, 별제(別提) 언굉(彦宏)의 아들 필문(弼文)은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여 현감(縣監) 공운(公雲), 좌승지(左承旨) 칭( ), 감찰(監察) 응황(應 ), 수찬(修撰) 호민(好敏)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의 파조(派祖)인 민첨(民瞻)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무훈을 세운 명장(名將)으로 1018 년(고려 현종 9) 거란(契丹)의10만 대군이 침입해오자 강감찬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고 개경(開京)의 싸움에서도 크게 이김으로써 <해동(海東)의 명장(名將)>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으로 책록되었으며, 지중추사(知中樞事),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되었다. 
      은열공파 중에서도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명성을 떨친 후손으로는 백년(栢年 : 문정공)과 현, 세황(世晃)의 3대(三代) 를 들 수 있다. 
      1627년(인조 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백년(栢年)은 부교리(副校理)로 있을 때 강 빈(姜 嬪 : 소현세자빈 강씨)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한때 삭직되기도 했으나, 1646년(인조 24)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이듬해 전국 향교(鄕校) 재흥(再興)을 상소하였고 대사간(大司諫 : 사간원의 정3품 으뜸 벼슬)에 올라 다시 강 빈의 신원(伸寃 : 원통한 일을 풀어 버림)을 상소했다가 청풍군수(淸風郡守)로 좌천되었다.
      현종(顯宗)이 즉위한 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서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淸) 나라에 다녀왔으며,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숙종(肅宗) 때 좌참찬(左參贊 : 의정부의 정2품 문관 벼슬)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1690년(숙종 16)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아들 현(이조 참의를 거쳐 좌참찬, 대제학, 한성판윤 등을 역임) 손자 세황(世晃)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1772년(영조 48) 61세로 늦게 벼슬에 등용된 세황(世晃)은 1776년(영조 52)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으로 기로과(耆老科)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67세 때는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서화(書畵)에 뛰어난 그가 1784년(정조 8)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北京)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청인들이 많았다 하며, 글씨는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미 불(米  ) 등의 서체(書體)를 본받아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비롯한 모든 체가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고, 산수(山水), 사군자(四君子) 등에 뛰어나 <난죽도(蘭竹圖)>, <산수도(山水圖)>, <송죽모란도 (松竹牡丹圖)> 등을 남겼다. 
     한편 철종(哲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노( )는 세황(世晃)의 증손(曾孫)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하자 위유사(慰諭使 : 지방에 천재나 지변이 있을 때 어명으로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보내던 임시 벼슬)에 중용(重用)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 :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로 피폐해진 강화도(江華島)를 다녀왔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1872년(고종 9)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대원군 탄핵상소를 올린 최익현(崔益鉉)의 처벌을 반대하다 우의정 한계원(韓啓源)과 함께 파직되었다가 1874년(고종 11) 다시 등용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인헌공파(仁憲公派)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오른 궁진(弓珍)의 아들 감찬(邯贊)이 당대에 이름난 명장(名將)으로 유명했다. 
     983년(고려 성종 2)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그는예부 시랑(禮部侍郞)을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 중추원사(中樞院使), 이부 상서(吏部尙書),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등을 지낸 후 1018 년(현종 9) 그 공(功)으로 검교태위(儉校太尉),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르고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3백호(食邑三百戶)를 하사(下賜)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謨安國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급제한 석기(碩期)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子)로 등용되었으나 문란한 정국과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 :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이자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한 일)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인조 반정(仁祖反正) 후에 다시 등용되어 예문관 박사(藝文館博士),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640년(인조 18) 61세로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한편 1593년(선조 2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항(沆)은 우계(牛溪) 성 혼(成 渾)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여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가 되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남원(南原)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군량 보급에 진력하였다. 
     남원이 함락되자 고향인 영광(靈光)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日本)에 끌려가 일본의 학자(學者)들에게 유학(儒學)을 가르쳐 주는 한편 지리(地理)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군사정보를 고국에 전했다. 
     거란(契丹)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할 때 71세의 고령으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고 쫓겨가는 적을 구주(龜州)에서 소탕하여 개선(凱旋)할 때 영파역(迎波驛 : 의흥역)까지 마중나온 왕의 영접을 받았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석빈(碩賓)은 숙종(肅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진선군(晋善君)에 봉해졌으며, 1714년(숙종 40) 절일제(節日製 : 성균관 유생들에게 보이던 시험)에 장원한 박(樸)은 이듬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수찬(修撰)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으나 노론(老論)의 집권으로 벼슬을 내놓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 외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 : 영조가 당쟁을 없애기 위해 쓴 정책)을 반대했던 필신(必愼)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저서(著書)로 <모헌집(慕軒集)>을 남겼고 시인(詩人)으로 유명한 위(瑋)는 <한성순보(漢城旬報)>를 간행하고 김택영(金澤榮), 황 현(黃 玹)과 함께 한말의 3대 시인(詩人)으로 불리웠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씨(姜氏)는 남한(南韓)에 총 227,093가구, 958,1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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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음 봉씨(河陰奉氏)
    하음 봉씨(河陰奉氏)

     하음(河陰)은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내현(冬音奈縣) 또는 아음현(芽音縣)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에 호음현( 音縣)으로 고쳐 해구군(海口郡)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에 하음현(河陰縣)으로 고쳐 개성(開城)에 속하였으나, 1413년(조선 태종 13) 강화군(江華郡)에 이속되어 현(縣)을 폐하고 강화군에 병합되었다. 하음 봉씨(河陰奉氏)의 시조(始祖) 봉 우(奉 佑)는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위위시경을 지내고 좌복야에 올라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다.
     「하음봉씨을축세보(河陰奉氏乙丑世譜)」에 그의 출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기 1106년(고려 예종 1) 어느날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江華郡河岾面長井里) 하음산 기슭의 연못가에 눈부신 광채가 비치더니 이어 석함이 떠올랐다.
     마침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가 이상히 여기며 살펴보니 그 속에 용모가 뛰어난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노파가 이 아이를 왕(王)에게 바쳤더니 임금은 궁중(宮中)에서 양육하라는 명(命)을 내린 후 노파가 봉헌(奉獻)했다고 하여 성(姓)을 봉(奉)이라 하고 이름을 우(佑)로 하사(下賜)했다.
     그로 인하여 봉씨(奉氏)의 연원(淵源)을 이루게되었으며, 후손들은 봉 우(奉 佑)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가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하음(河陰) 땅의 지명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봉씨의 본관(本貫)은 하음 외에도 강화(江華)·경주(慶州)를 비롯하여 안산(安山)·안성(安城) 등 19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모두가 하음 봉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하음을 제외한 본관(本貫)에 대해서는 상계(上系)가 미상하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우(佑)의 7세손 천우(天祐)가 고려 때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원(元)나라에 피난가는 충숙왕(忠肅王)을 호종(扈從)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을 받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올라 하음부원군(河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질(質)은 전객령(典客令)을 거쳐 합문지후(閤門祗侯)와 판도판서(版圖判書)을 역임하였다. 한편 천우의 손자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유례(由禮:판도판서 문의 아들)는 나랏일로 상소(上疏)를 올려 극간(極諫)을 했으나 실행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學問)을 연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정몽주(鄭夢周), 이  색(李 穡) 등과 교유하며 <도학(道學>의 지종(之宗)>으로 일컬어졌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 여(礪)의 딸이 왕세자비(王世子妃:문종의 비인 순빈)가  되었고 형조(刑曹)를 비롯한 4조(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우 즙(楫 )은 세종조(世宗朝)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아들 여해(汝諧)와 함게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당대의 석학(碩學) 박중림(朴仲林:박팽년의 아버지)에게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동문수학(同門數學)한 여해는 학문이 뛰어나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처남매부간인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순절하여 공주의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그외 성종(成宗) 때 감찰(監察)을 거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을 역임한 원효(元孝:판도판서 문의 증손, 신의 아들)와 세조(世祖) 때 정난이등공신(靖亂二等功臣)로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던 석주(石柱)가 유명했고, 황간 현감(黃澗縣監) 삼산(三山:훈련원 도정을 지낸 장의 아들)의 둘째 아들 천상(天祥)은 1516년(중종 11) 생원(生員)로 <시정책십개조(施政策十個條)>를 상소하여 채택됨에 따라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운 종한(宗翰)·진한(震翰)은 학명(學名)을 떨친 성민(聖民)·경륜(景綸)을 비롯한 효자(孝子) 한정(漢鼎)과 함께 하음 봉씨를 대표했다.
     봉씨(奉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5,911명, 1975년에는 1,700가구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469가구, 10,5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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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구沃溝 이씨(李氏)
    옥구沃溝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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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평新平 이씨(李氏)
    신평新平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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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강臨江 이씨(李氏)
    임강臨江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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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면천 곡씨(沔川 曲氏)

     면천 곡씨(沔川 曲氏)

      곡씨(曲氏)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하락(河洛:황하강 남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하·은·주나라의 도읍지) 지방(地方)에 연원(淵源)을  두며 당(唐)나라  대종(代宗:당나라의 제 8대  황제, 재위기간:763∼779) 때 협주(陜州) 안읍(安邑) 사람인 곡  환(곡 환) 장군(將軍)의 후예(後裔)로 전(傳)한다. 
     우리나라 곡씨(曲氏)는 고려초기(高麗初期)의 명신(名臣)으로 서기 918 년(태조 1) 내봉사(內奉史)로 있다가 평찰(平察)에 오른 곡긍회(曲矜會)가 최초(最初)의 인물(人物)이 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文獻)을  보면 곡씨(曲氏)의 본관(本貫)은 면천(沔川)과 용궁(龍宮)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용궁  곡씨(龍宮曲氏)는 당(唐)나라에서 귀화(歸化)한 것으로 전(傳)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正確)한 계대(系代)는 상고(詳考)할 수 없고, 서기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에서 16가구(家口) 74명(名)이 나타나 우리나라  전체 성씨(姓氏) 258성(姓) 중 209위(位)였다가 1975년 조사(調査)에서는 249성(姓) 중 210위(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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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안遂安 이씨(李氏)
    수안遂安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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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산鳳山 이씨(李氏)
    봉산鳳山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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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안淸安1 이씨(李氏)
    청안淸安1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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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瑞山 이씨(李氏)
    서산瑞山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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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해 구씨(平海 丘氏)
      평해(平海)는 경상북도 울진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근을어현(斤乙於縣)이었던 것을 고려 초에 평해로 고쳤다.
     구씨(丘氏)는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인 강태공(姜太公)의 후예(後裔)로 산동성(山東省) 창락현(昌樂縣)에 위치한 영구(營丘)라는 지명의 <구(久)> 자(字)를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하남성(河南省)에 연원을 두고 제태공(齊太公)이 봉해진 땅이름 영구의 <구(邱)> 자를 자손들이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나라 구씨(丘氏)는 중국 당나라 사람인 구대림(久大林) 장군이 서기 663년(신라 문무왕 30, 당 고종 용삭 3)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의 월송정(月松亭) 부근에 표착(漂着)하여 해안의 남쪽 언덕 미포(美浦)에 터를 잡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후 600여 년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공민왕조에 이방실(李芳實) 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여 공신에 책훈되고 민부 전서(民部典書 : 6부에 속한 정 3품 벼슬)에  오른 구선혁(丘宣赫)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평해로 삼아 계대하여 왔다. 
     평해 구씨는 선혁(宣赫)의 아들 천우(天祐)가 판도판서(版圖判書 : 판도사의 으뜸 벼슬)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였는데 맏아들 춘호(春浩)는 사재지사(司宰寺사)를,  차남 춘경(春景)은 판사(判事)를, 셋째 춘서(春瑞)와 막내 춘보(春甫)는 낭장(郎將)을 지냈으며, 그들의 후손에서 가세가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전서공(典書公) 선혁의 현손(顯孫)인  종직(從直)은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등준시(登俊試 : 재상  이하의 문관을 시험하던 과거)에도 합격한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주역(周易)과  경학(經學)에 정통하였으며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일화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성종조 명신편(成宗朝名臣編)>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과거에 올라 교서관(校書館)에 입직하다가  경복궁 서쪽 강녕전(康寧殿) 연못 가운데  있는 경회루의 경치가 절승(絶勝)하다는 말을 듣고 밤중에 연못가를 구경하던 중에 남녀(籃輿 : 뚜껑이 없는 작은 승교)를 타고 산책 나온 세조와 마주쳤다. 
     그가 황공하여 길 아래에 엎드리자 왕은 그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묻고는 “경전(經典)을 외울 수 있느냐” 하니 “「춘추(春秋)」를 외우겠읍니다.”하고 한 권을 다 외웠다. 
     왕은 크게 감탄하여 술을 내려 주고서 이튿날 부교리(副校理)에 임명하였다.
     하루 아침에 9품직에서 5품직으로 임명하니 삼사(三司 : 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번갈아 글을 올려 극력으로 반대하여 왕은 편전에 나가서 삼사(三司)들을 모두 불러 놓고 「춘추(春秋)」를 외우게 하니 한 사람도 능히 한 구절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종직을 시켜 외우게 하니 1권을 다 외우고 또 다른 질(帙)에서 뽑아 외우게 하니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하면서 청직(淸職)에 올라 있는데 종직(從直)과 같은 사람은 어찌 부교리(副校理)에 해당하지 못하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달손(達孫)과 숙손(夙孫) 형제도 과거에 급제하고 직제학(直提學)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각각 역임하였다.
     1464년(세조 9) 춘시문과(春試文科)에 급제한 치곤(致崑)은  첨절제사(僉節制使) 차숭(次崇)의 아들로 집의(執義)를 거쳐 성종 때  강릉 부사(江陵府使)와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인재등용에 관한 부조리를 진언하고  대사헌(대사헌)을 거쳐 한성 좌윤(漢城佐尹)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치강(致崗)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랐다. 
     한편 치강(致崗)의 아들  영안(永安)은 선술(仙術)의 도인(道人)으로  예종조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과 공리에 뜻을 두지 않았고, 복남(福男)은 임진왜란 때 남원성(南原城)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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