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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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씨(伍氏)
    오씨(伍氏)

     오씨(伍氏)는 본래 중국(中國) 성씨이며, 우리나라에는 배천(白川)·복흥(復興) 2본이 전한다.  배천 오씨(白川伍氏)의 시조(始祖)는 미상(未詳)하고 복흥 오씨(復興伍氏)의 시조는 오윤부(伍允孚)로서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그후 국세조사(國勢調査)에는 이 성씨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61
  • 고령高靈 이씨(李氏)
    고령高靈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60
  • 송宋
    송宋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55
  • 부평富平 김씨 金氏
    부평富平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54
  • 순씨(順氏)
    순씨(順氏)

     순씨(順氏)는 중국 제군(齊郡:산동성 제남부의 진나라 때 군명)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상계(上系)가 불명하나「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922(고려 태조 5) 7월 명주장군(溟州將軍) 순식(順式)이 귀순(歸順)하여 태조(太祖)로부터 왕씨의 성(姓)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보이며, 928(태조 11)에는 대광(大匡)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평남 영원군(寧遠郡)과 함북 종성군(鐘城郡)에 3가구가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51
  • 개성 방씨(開城龐氏)
    개성 방씨(開城龐氏)

     개성(開城)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의 수도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 송도(松都), 개경(開京), 부소갑(扶蘇岬), 동비홀(冬比忽), 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웠다.
     919년(고려 태조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 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開城)과 송악(松岳)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황도(皇都)로, 995년(성종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고,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방씨(龐氏)는 중국 시평(始平:섬서성 관중도 흥평현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개성 방씨의 시조(始祖)는 주(周)나라 현왕(顯王:기원전 368-321) 때 장군(將軍)인 방연위(龐涓魏)의 원손(遠孫) 방두현(龐斗賢)으로 전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가 원(元)나라에서 직성사인(直省舍人)으로 학사(學士)에 이르러, 1351년(충정왕 3) 고려 공민왕비(恭愍王妃)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고 동래(東來)하여 개성(開城)에 정착(定着)한 것이 개성 방씨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한다.가맥(家脈)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증손(曾孫) 천룡(天龍)이 조선조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했고, 그의 맏아들 예남(禮楠)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지낸 영내(永奈:천룡의 차남)와 함께 가통을 이었다.
     그밖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낸 대건(大建)과 종일(宗逸) 부자가 유명했으며, 세진(世珍:종일의 차남)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을, 도명(道明)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 방씨(開城龐氏)는 남한에 총 179가구, 6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50
  • 광주廣州 김씨 金氏
    광주廣州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46
  • 고성 도씨(固城道氏)
    고성 도씨(固城道氏)

     고성은 경상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육가야(六伽倻) 중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이었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 고자군(古自郡)으로 불리다가 고려(高麗) 때 철성부(鐵城府)로 개칭되었으며, 조선(朝鮮) 때 고성현(固城縣)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고성군(固城郡)이 되었다.
     도씨(道氏)는 한(漢)나라 때 중국 여음(汝陰 : 지금의 안휘성 영주지방)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전해지며, 우리나라 도씨(道氏)의 연원(淵源)은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미상(未詳)하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도씨(道氏)의 본관(本貫)은 고성도씨(固城道氏 : 구허도씨) 단본(單本)인 것으로 전하며, 분포상황은 1960년 국세조사(國세調査) 당시 400여명이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75가구, 4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46
  • 광양光陽 김씨 金氏
    광양光陽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45
  • 안주 범씨(安州凡氏)
    안주 범씨(安州凡氏)

     안주(安州)는 평안남도 북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식성(息城) 또는 한성(漢城), 한홀(漢忽), 내홀(乃忽)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중반군(重盤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태조(太祖)가 팽원군(彭原郡)으로 고쳤다가 931년(태조 14) 안북부(安北府)를 두었다. 995년(성종 14) 영주안북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라 칭하여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초에 안북대도호도부로 하여 해주(海州)에 속했다가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공민왕(恭愍王)이 안주 만호부(安州萬戶部)를 두었으며, 조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고 1712년(순조 12) 현(縣)으로 강등,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범씨(凡氏)는 중국 하남(河南:하남성 낙양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며, 우리나라 범씨는 고려 우왕(禑王) 때 문화 안집사(文化安集使)를 지낸 범영부(凡永富)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범씨의 관향(貫鄕)은 안주(安州) 단본(單本)이며,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역리(驛里)에 범기영(凡基永) 1가구가 처음으로 나타났고, 1960년에는 44명으로 집계되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36가구, 1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44
  • 흥해 배씨(興海裵氏)
    흥해 배씨(興海裵氏)
       일세조 휘(諱): 배경분(裵景分), 검교장군(檢校將軍)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36
  • 연씨(燕氏)
    연씨(燕氏)
     연씨(燕氏)는 원래 중국(中國) 범양(范陽)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주(周)나라 때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연급(燕伋)의 후손이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우리나라 연씨(燕氏)는 백제(百濟)의 8대성(姓)으로 손꼽혔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성왕(聖王)때 병관좌평을 지낸 연실(燕實) 등 연씨(燕氏)가 나오지만 시조 및 연원(淵源)을 알 수 없다.본관(本貫)은 정주(定州) 외에 영평(永平)』전주(全州)』평주(平州 : 평산의 별호) ·곡산(谷山)·덕원(德原)·장곡(長谷) 등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정평(定平)·영여흥(永興)·이원(利原) 등 이북에 22가구가 있었고 남한에 3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6가구 1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33
  • 문화 류씨(文化柳氏)
    시조 휘(諱): 류차달(柳車達), 대승(大丞)
            자(字): 응통(應通), 호(號): 아사(鵝沙)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29
  • 함양咸陽 박씨朴氏
    함양咸陽 박씨朴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28
  • 전주박씨(全州朴氏)
    전주(全州)는 전라북도(全羅北道) 중앙(中央)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古代)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리우다가 555년(신라 진흥왕 16)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그후 경덕왕(景德王: 제 35대 왕, 재위기간: 742 ∼ 765) 이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40여년 간 이곳을 도읍으로 하였으나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다가 공민왕(恭愍王)이 완산부(完山府)로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선조(先祖)의 고향(故鄕)이라 하여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개칭하였다가 1403년(태종 3) 다시 전주부(全州府)가 되었으며,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전주시(全州市)로 개편되었다. 전주 박씨(全州朴氏)의 시조(始祖) 언화(彦華)는 신라(新羅)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섯째 아들로 완산대군(完山大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전주(全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의 아들 웅(雄)이 고려창업(高麗創業)에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증손 보진(輔辰)은 정승(政丞)으로 추성협모공신(推誠協謀功臣)에 올라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고, 시령(是齡: 보진의 손자)의 아들 혁(奕)은 평장사(平章事)와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한편 평장사 혁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철견(鐵堅)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둘째 천견(天堅)은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여 시중(侍中)에 오른 셋째 지견(地堅)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좌랑(佐郞) 천익(薦益)의 아들 실(實)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과 의정부사(議政府事)를 거쳐 공신(功臣)에 올랐고, 학문(學問)에 뛰어나고 성품이 청렴강직하여 세인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사인(思仁)은 전법판서(典法判書)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한 후 공신(功臣)으로 완산군(完山君)에 추봉되었다. 그외 조선조(朝鮮朝)에서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지양(志讓: 시중 유의 아들)과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지온(志溫) 형제가 유명했으며, 진사(進士) 종수(從壽)의 맏아들 진(晋)은 군수(郡守)를 역임하여 목사(牧使) 문찬(文燦: 군수 진의 증손), 군수(郡守) 문증(文增) 등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박씨(全州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598가구, 3,0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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