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류씨(高興柳氏)
고흥(高興)은 전라남도 남동단(南東端)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초에 고이부곡(高伊部曲)이라 하였으며, 1285년(충렬왕 11)에 고흥현(高興縣)이라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조선 태조조(太祖朝)에 보성군(寶城郡) 조양현(兆陽縣)으로 개편되었다가, 1441년(세종 23)에는 장흥부(長興府) 두원현(豆原縣)으로 바꾸고, 보성군 남양현(南陽縣)을 분할 편입하여 흥양(興陽)이라 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고쳤으며, 1914년 고흥군(高興郡)으로 개칭하였다. 고흥 류씨(高興柳氏)는 고려 개국 후 흥양지방의 호장(戶長)이었던 류 영(柳英)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7세손 청신(淸臣:지추밀원사 승무의 아들)이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삼한삼중대광 도첨의정승(三韓三重大匡都僉議政丞)에 올라 고흥 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고흥(高興)으로 하게 되었다. 가통(家統)을 이은 인맥(人脈)으로는 청신의 손자 장(莊)과 탁(濯), 준(濬)이 유명했다. 예빈윤(禮賓尹) 천의 아들인 장(莊)은 고려 말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부모와 함께 천안(天安)으로 내려가 일찍이 할아버지 청신이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얻어 온 호도(胡桃) 번식을 적극 장려하여 오늘날 호도는 천안의 명물(名物)이 되었으며, 판밀직사(判密直司) 유기(有奇)의아들로 고려 말에 기재(奇才)로 많은 일화를 남겼던 탁은 <장생포곡(長生浦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렸다.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준은 조선이 개국되자 검교참찬 문하부사로 고흥백(高興柏)에 봉해졌으며 정종(定宗)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하였다.
한편 맏아들 습(濕)은 태종(太宗)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예(禮)·형(刑)·병(兵)·이조(吏曹)의 전서(典書)를 역임했고 세종조(世宗朝)에서는 우군원수(右軍元帥)가 되어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의 증손 충서(忠恕)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권 율(權慄)의 막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록되어, 대를 이어 가문을 명문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구월산(九月山) 적(賊)을 토벌하여 형조판서(刑曹 判書)에 오른 세웅(世雄:효백의 아들)은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고, 「어우야담(於于野談)」으로 유명한 몽인(夢寅)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조선 중기의 설화문학(說話文學)의 대가(大家)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역모(逆謀)의 누명을 쓰고 <상부사(孀婦詞)>라는 시(詩)로 인하여 아들 약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임진왜란 때 한산도(閑山島) 싸움에서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된 의신(義臣)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한마교(汗馬橋)에서 전사한 춘필(春苾)이 유명했고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로 일컬어졌던 경인(景仁)·성인(成仁)·극인(克仁)은 정유재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고종(高宗) 때 명정(命旌)되어, 칠산양(七山洋)에서 일가족이 순절한 익겸(益謙)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의 형제 호당(湖堂)으로 이름났던 숙(潚)과 활(活)은 부정(不正) 몽표(夢彪)의 아들로서, 형인 숙은 대사간(大司諫)과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영주군(瀛州君)에 봉해졌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광해군(光海君)의 심복이었다는 죄목으로 청하(淸河)에 위리안치되었으며, 아두 활은 경기 도사(京畿都事)를 지냈다. 숙의 증손 종흥(宗興)은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가 거론되자 선비들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서 그 부당함을 주장하여 회심소(回心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구국절의(救國節義)의 인맥을 전통으로 삼은 고흥 류씨는 고종 때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중교(重敎)와 항일투쟁에 불구가 되었던 홍석(弘錫),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 구성에 항거했던 인석(麟錫)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했고, 병우(秉 禹)는 하동(河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日本軍)의 기관을 습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단식으로 옥사했다. 철종(哲宗) 때 가재(家財)를 털어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설립했던 중권(重權)은 3·1운동 때 관순(寬順)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하다가 아내와 함께 순절하였으며, 중화(重和)는 의병대장(義兵大長)으로 80여 명의 동지들과 은진(恩津) 왕성골에서 왜병을 크게 섬멸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으로 명성을 떨쳤던 영선(永善)과 함께 명문 고흥 류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흥 류씨(高興柳氏)는 남한에 총 15,296가구, 64,4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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