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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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昇
    승昇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23
  • 마씨(麻氏)





     마씨(麻氏)

     마씨(麻氏)는 중국 상곡(上谷:지금의 직예성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영평(永平), 열산(烈山:강원도 간성에 속한 지명), 합천(陜川)이 있다. 영평 마씨(永平麻氏)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이등공신(二等功臣)에 녹훈된 마 난(麻煖)의 후예로 전하며, 합천 마씨(陜川麻氏)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원병(援兵)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던 명(明)나라 제독(提督) 마 귀(麻貴)의 증손(曾孫) 마순상(麻舜裳)이 명나라가 망하자 조선(朝鮮)에 귀화한 것으로, 그 후손이 합천(陜川), 함안(咸安), 창원(昌原), 거창(居昌), 함양(咸陽)등지에 살고 있다.
     마씨(麻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당시 111명이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남한에 총 118가구, 5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14
  • 의령 여씨(宜寧余氏)
    의령 여씨(宜寧余氏)

     의령(宜寧)은 경상남도(慶尙南道)의 중앙, 낙동강 하류 서안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장함현(獐含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진주(晉州)에 편입되었다가 공양왕(恭讓王)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조(朝鮮朝)에 현(縣)으로 승격된 뒤 1895년 (고종 32)에 의령군으로 개칭되어 여씨(余氏)는 본래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다.
     우리나라 여씨(余氏)의 연원(淵源)은 조(趙)·송(宋)나라 때 이르러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오른 여선재(余善才)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고려(高麗)에서 의춘군(宜春君)에 봉(封)해지고 의령(宜寧)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으면서 부터이다. 그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선재(善才)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상계(上系)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역임한 현경(玄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系代)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여씨(余氏)의 본관(本貫)은 의령(宜寧) 외에도 12본이 나타나 있으나 이는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직유가 고려(高麗)에서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검교 장군(檢校將軍)을 역임하였고, 손자 정(廷)이 군기감(軍器監)을 정(廷)의 5세손 중엄(仲淹)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예부 전서(禮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 외에도 중부(仲富)의 아들로 조선(朝鮮) 때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를 지낸 홍열(興烈)과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안주진 병마절도사(安州鎭兵馬節度使)를 역임한 원경(元暻), 이조 정랑(吏曹正郞)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낸 건(健)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령 여씨(宜寧余氏)는 남한(南韓)에 총 3,432가구, 14,110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11
  • 곡산 노씨(谷山盧氏)
     곡산(谷山)은 황해도(黃海道) 북동단(北東端)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십곡성(十谷城)이라 불리웠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진서(鎭瑞)라 개칭하여 영풍군(永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초에 곡주 (谷州)로 고쳐 성종(成宗) 때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현비강씨(顯妃康氏)의 고향이라고 하여 곡산(谷山)으로 개칭하고 부(府)로 승격하였으며, 태종(太宗)은 다시 군(郡)으로 격하, 1669년(현종 10) 부(府)로 승격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곡산군(谷山郡)이 되어 개성부(開城府)에 속하였다. 1914년 황해도에 속한 군(郡)이 되었으며, 별칭(別稱)으로는 덕둔홀·고곡(古谷)·욕천(浴川)·곡성(谷城)·진서(鎭瑞)·상산(象山) 등으로 불리웠다. 곡산 노씨(谷山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 : 한림학사)의 아홉째 아들 노 원(盧 垣)이 고려 초기에 입사(入仕)하여 곡산백(谷山伯)에 봉해지고, 그의 후손 조(兆)가 충숙왕(忠肅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곡산(谷山)으로 삼아 원(垣)을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조(兆)를 일세조(一世祖)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3세손 인철(仁哲)이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을 역임했고, 그의 손자 중례(重禮)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다.
     한편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경린(慶麟)은 부사과(副司果) 적(績)의 아들로 학유(學諭)를 거쳐 지평(持平)에 올랐으나 사감(私感)을 품었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으로 좌천되었으며,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나가 서원(書院)을 세워 유학(儒學)을 장려했고,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내금위장(內禁衛將) 오(澳)와 판관(判官) 진, 감찰(監察) 발(潑), 훈련원정(訓鍊院正) 극제(克悌), 부사과(副司果) 극겸(克謙) 등이 대표적이며, 성린(成鱗)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도정(都正)을 지낸 병준(秉俊)·우현(禹鉉)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곡산 노씨(谷山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1,704가구, 7,4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10
  • 진주 류씨(晋州柳氏)
    시 조 휘(諱): 류 정(柳 挺),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07
  • 광주 박씨(廣州朴氏)
    광주(廣州)는 경기도(京畿道)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마한(馬韓)의 일부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으로 망명하여 한왕(韓王)이 되어 세운 회안국(淮安國)의 일부였다.
     371년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남한산(南漢山: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이도(移都)하여 이곳을 한성(漢城)이라 불렀고, 553년(백제 성왕 31, 신라 진흥왕 14) 신라(新羅)에게 나라를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경덕왕(景德王)때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광주(廣州)로 고쳤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 광주군(廣州郡)이 되었다.
     광주 박씨(廣州朴氏)의 시조(始祖) 박명훈(朴明勳)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전서(典書)를 역임하고 광주(廣州)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 명훈의 아들 계징(戒澄)이 고려 때 부윤(府尹)을 역임했으며, 손자(孫子) 영준(永準: 계징의 아들)은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무명(武名)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진사(進士) 찬기(贊己: 상장군 영준의 아들)의 아들 형제 중 장남 시해(弑害)가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차남 시화(時和)는 의관(議官)을 역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동추(東秋: 참의 시해의 아들). 성룡(聖龍: 동추의 손자, 몽화의 아들) 등과 함께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박씨(廣州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426가구, 2,2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03
  • 농서 비씨( 西丕氏)
    농서 비씨( 西丕氏)

     농서는 지금의 중국(中國) 감숙성 임조부와 공창부(鞏昌府)의 서쪽에 걸쳐 있었던 진한시대의 군(郡) 이름으로 서역(西域)에 가까이 위치했다.
     비씨(丕氏)은 선성(宣城:지금의 안휘성 동남쪽에 있는 도시)에서 계출(系出) 된 성씨(姓氏)이며 주(周)나라 양왕(襄王) 때 사림인 비 표(丕 豹)의 후예(後 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비씨(丕氏)의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傳)하지 않아 상고(詳考)할 수 없고, 전해지는 본관(本貫)으로는 농서(농西) 단본(單本)이다.
     근대에 와서 비씨(丕氏)은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8가구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총 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02
  • 시施
    시施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601
  • 인제麟蹄 박씨朴氏
    인제麟蹄 박씨朴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97
  • 시씨(柴氏)
    시씨(柴氏)

     시씨는 중국 평양(平陽: 절강성 구해도 임분현의 당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고대 고신씨의 후예로 전하며 고시의 후손이 이름자인 시를 성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시씨는 고려 현종(顯宗: 제8대 임금, 재위기간: 1009 ∼ 1031) 초에 흥화진두(興化鎭頭)인 시신운(柴臣雲)이 사기에 나타난 최초의 인물이며, 선계에 대한 소목은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상고하지 못한다. 시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와『증보문헌비고』등의 문헌에 능향(태인지방)·태인·김화 등 3본이 있는 것으로 전하며, 1930년 국세조사 때 전북 정읍과 임실 등지에 94가구가 살고 있었고, 1975년 조사에서는 150가구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400가구, 1,5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96
  • 무안無顔 박씨朴氏
    무안無顔 박씨朴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90
  • 고흥 류씨(高興柳氏)
    고흥(高興)은 전라남도 남동단(南東端)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초에 고이부곡(高伊部曲)이라 하였으며, 1285년(충렬왕 11)에 고흥현(高興縣)이라 개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조선 태조조(太祖朝)에 보성군(寶城郡) 조양현(兆陽縣)으로 개편되었다가, 1441년(세종 23)에는 장흥부(長興府) 두원현(豆原縣)으로 바꾸고, 보성군 남양현(南陽縣)을 분할 편입하여 흥양(興陽)이라 칭하고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고쳤으며, 1914년 고흥군(高興郡)으로 개칭하였다. 고흥 류씨(高興柳氏)는 고려 개국 후 흥양지방의 호장(戶長)이었던 류 영(柳英)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7세손 청신(淸臣:지추밀원사 승무의 아들)이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삼한삼중대광 도첨의정승(三韓三重大匡都僉議政丞)에 올라 고흥 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고흥(高興)으로 하게 되었다. 가통(家統)을 이은 인맥(人脈)으로는 청신의 손자 장(莊)과 탁(濯), 준(濬)이 유명했다. 예빈윤(禮賓尹) 천의 아들인 장(莊)은 고려 말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부모와 함께 천안(天安)으로 내려가 일찍이 할아버지 청신이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얻어 온 호도(胡桃) 번식을 적극 장려하여 오늘날 호도는 천안의 명물(名物)이 되었으며, 판밀직사(判密直司) 유기(有奇)의아들로 고려 말에 기재(奇才)로 많은 일화를 남겼던 탁은 <장생포곡(長生浦曲)>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렸다.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준은 조선이 개국되자 검교참찬 문하부사로 고흥백(高興柏)에 봉해졌으며 정종(定宗) 때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하였다.
     한편 맏아들 습(濕)은 태종(太宗)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예(禮)·형(刑)·병(兵)·이조(吏曹)의 전서(典書)를 역임했고 세종조(世宗朝)에서는 우군원수(右軍元帥)가 되어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의 증손 충서(忠恕)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권 율(權慄)의 막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록되어, 대를 이어 가문을 명문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구월산(九月山) 적(賊)을 토벌하여 형조판서(刑曹 判書)에 오른 세웅(世雄:효백의 아들)은 흥양군(興陽君)에 봉해졌고, 「어우야담(於于野談)」으로 유명한 몽인(夢寅)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조선 중기의 설화문학(說話文學)의 대가(大家)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역모(逆謀)의 누명을 쓰고 <상부사(孀婦詞)>라는 시(詩)로 인하여 아들 약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임진왜란 때 한산도(閑山島) 싸움에서 전사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된 의신(義臣)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한마교(汗馬橋)에서 전사한 춘필(春苾)이 유명했고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로 일컬어졌던 경인(景仁)·성인(成仁)·극인(克仁)은 정유재란 때 무공(武功)을 세워 고종(高宗) 때 명정(命旌)되어, 칠산양(七山洋)에서 일가족이 순절한 익겸(益謙)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의 형제 호당(湖堂)으로 이름났던 숙(潚)과 활(活)은 부정(不正) 몽표(夢彪)의 아들로서, 형인 숙은 대사간(大司諫)과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고 영주군(瀛州君)에 봉해졌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광해군(光海君)의 심복이었다는 죄목으로 청하(淸河)에 위리안치되었으며, 아두 활은 경기 도사(京畿都事)를 지냈다. 숙의 증손 종흥(宗興)은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가 거론되자 선비들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서 그 부당함을 주장하여 회심소(回心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구국절의(救國節義)의 인맥을 전통으로 삼은 고흥 류씨는 고종 때 척양척왜(斥洋斥倭)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중교(重敎)와 항일투쟁에 불구가 되었던 홍석(弘錫),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 구성에 항거했던 인석(麟錫)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했고, 병우(秉 禹)는 하동(河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日本軍)의 기관을 습격하다가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단식으로 옥사했다. 철종(哲宗) 때 가재(家財)를 털어 흥호학교(興湖學校)를 설립했던 중권(重權)은 3·1운동 때 관순(寬順)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하다가 아내와 함께 순절하였으며, 중화(重和)는 의병대장(義兵大長)으로 80여 명의 동지들과 은진(恩津) 왕성골에서 왜병을 크게 섬멸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으로 명성을 떨쳤던 영선(永善)과 함께 명문 고흥 류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흥 류씨(高興柳氏)는 남한에 총 15,296가구, 64,4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87
  • 장張
    장張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82
  • 옹씨(雍氏)
    옹씨(雍氏)

     옹씨(雍氏)는 중국(中國) 경조(京兆)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옹백(雍伯)이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우리나라 옹씨(雍氏)의 본관(本貫)은 파평(坡平)이 단본(單本)으로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경남 창원군 능남면 안민리(慶南昌原郡能南面安民里)에 8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순창 옹씨(淳昌邕氏)가 그 곳으로 이주(移住)해 살다가 1909년 민적(民籍)에 등재(登載)할 때 잘못 기록되었다고 한다.
     옹씨(雍氏)는 1960년 국세조사 때 50명이었다가 197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는 남한(南韓)에 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81
  • 유劉
    유劉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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