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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궉씨(氏)





     궉씨(氏)

      궉씨의 연원(淵源)은 문헌(文獻)이 없어 정확(正確)히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조선중기의 학자(學者)이며 명신(名臣)인  이수광(李수光)이  시문집(詩文集)「지봉유설(芝峰類說)」에<순창에 궉씨가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고 일설에 의하면 호성이라고도 한다.
    (淳昌有궉氏不知基所 自出或云本胡姓)>하고 기록되어 있고, 
      실학자(實學者) 이덕무(李德懋)의  저서(著書)「앙엽기(앙葉記)」에는 <선산(善山)에 궉씨촌(궉氏村)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때에는 경기도(京畿道) 용인(龍仁)과 충남(忠南) 보령(保寧)·청양(靑陽)·예산(禮山)·천안(天安) 등지에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1975년 인구조사(人口調査)에서는 전국(全國) 249개(個) 성씨(姓氏) 중 223위(位)였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57가구, 2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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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진碧珍 이씨(李氏)
    벽진碧珍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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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천陜川 이씨(李氏)
    합천陜川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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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주-통천(通州-通川) 김씨 金氏
    통주-통천(通州-通川)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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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 서씨(利川徐氏)
    시  조 휘(諱):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묘 소: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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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궁龍宮 이씨(李氏)
    용궁龍宮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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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산梁山 이씨(李氏)
    양산梁山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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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천春川 박씨朴氏
    춘천春川 박씨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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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림西林 이씨(李氏)
    서림西林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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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해寧海 이씨(李氏)
    영해寧海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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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하 노씨(交河盧氏)




     교하 노씨(交河盧氏)

     교하(交河)는 경기도(京畿道) 파주군(坡州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시대에는 천정구현(泉井口縣) 또는 굴화(屈火)·어을매관(於乙買串)이라 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 때 교하군(交河郡)이라 개칭하였으며, 1018 년 (고려 현종 9)에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교하현(交河縣)으로 강등하고 1687년(숙종 13)에 파주군(坡州郡)에 편입시켰으며, 1733년(영조 9) 파주군에서 갈리어 교하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다시 파주군에 편입, 그후 한두 번의 변천을 거쳐 파주군의 교하면(交河面)이 되었다. 교하 노씨(交河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둘째 아들 오(塢)가 신라 말에 아버지를 따라 동래(東來)하여 교하백(交河伯)에 봉해졌으므로 시적(始籍)을 하게 되었다. 「교하노씨세보(交河盧氏世譜)」에 의하면 오(塢)의 후손 강필(康弼)이 신라 말에 기계(杞溪)에 세거(世居)하면서 학문(學問)이 현달(顯達)하여 문명(文名)을 떨쳤고, 관향을 장산(章山)으로 이관(移貫)하였다가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功)을 세우고 통합삼한개국공신(統合三韓開國功臣)으로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랐으며 선성 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져서 교하(交河)로 복관(復貫)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교하로 삼고, 강필(康弼)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人財)를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기초를 다졌다. 가문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2세손 안맹(安孟)이 동서면 병마사(東西面兵馬使)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영순(永醇)은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후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이부 상서(吏部尙書) 영수의 아들척은 경녕옹주(慶寧翁主 : 평양공 현의 딸)와 혼인하고 충목왕(忠穆王) 때 좌정승(左政丞)으로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에 봉해졌다. 한편 창성군(昌城君) 진(척의 둘째 아들)의 손자(孫子) 한( )은 국구(國舅) 민 제(閔 霽)의 딸과 혼인하여 태종(太宗)과 동서지간으로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명나라 사신(使臣)의 방자 한 횡포를 저지시켜 명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세종(世宗)과 성종대(成宗代)의 명신(名臣) 사신(思愼)은 돈령부사(敦寧府使) 물재(物載)의 셋째 아들이며, 상신(相臣) 한( )의 손자(孫子)로서 세조(世祖) 때 익대좌리공(翊戴佐理功臣)으로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성종(成宗) 때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했다.
     특히 그는 단종(端宗)을 보필하다가 세조조(世祖朝)에 정권에 참여한 훈구파(勳舊派)의 중신(重臣)으로 영남 출신의 신진 사림파(士林派)와 대립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많은 선비들을 구출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학문(學問)이 뛰어나 세조와 성종의 두터운 신망을 받아「경국대전(經國大典)」의 <시전(尸典)>을 편찬했고,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향약집성방(鄕藥 集成方)」을 국역(國譯), 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 등과 「여지승람(輿地勝覽)」을 편찬하여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사신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공필(公弼)은 세조(世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성종(成宗) 때 6 조(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연산군(燕山君)의 단상법(短喪法)을 지키지 않고 구제대로 했다 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등용되어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그외 현감(縣監) 홍우(弘祐)의 아들 직(稙)이 선조(宣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하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도어 형옥(刑獄)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그의 아우 직(稷)은 임진왜란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왕을 호종(扈從)했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접반부사(接伴副使)로 명(明)나라와 병사(兵事)를 논의했다. 벼슬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글씨에 뛰어나 예서(隸書)와 전서(篆書)에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학행(學行)과 문장(文章)으로 가문(家門)을 중흥시킨 인물로는 경기(景麒)의 아들로 선조(宣祖) 때 이름을 떨친 계원(繼元)과 후원(後元) 형제가 유명했고, 인조조(仁祖朝)에 능주 목사(綾州牧使)를 역임한 문한(文漢)은 진사(進士) 한원(漢源), 긍(兢) 부자(父子)와 함께 충효의열(忠孝義烈)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교하 노씨의 문맥(文脈)을 이었다. 근대에 와서도 교하 노씨는 훌륭한 인재(人財)를 많이 배출시켜 나라 발전에 공헌하고 있으며, 특히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가문(家門)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932년 12월 대구직할시 동구 신용동 팔공산(八公山) 아래에서 29세손 병수(秉壽)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경북고등학 교를 거쳐 1955년 8월 육군사관학교 제 11기로 임관, 미특수전학교(美特殊戰學校) 심리전과정을 수료한 후 공수특전여단장·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수도경비사령관·보안사령관 등 군주요 요직을 지내후 후 81년 육군대장(陸軍大將)으로 예편하였다. 같은 해 정무제이장관(政務第二長官)으로 외교(外交)와 안보(安保)를 담당하였고 이듬해 초대 체육부장관(體育部長官)에 이어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 83년 서울올림픽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85년 제 12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대표위원, 87년 민주정의당 총재가 되었고, 6.29 민주화선언 후 같은 해 12월 16일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대한민국 제 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8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 보통사람의 시대를 선언하여 국민과 함께 호흡하고 국민과 함께 생각하는 대통령이 될 것을 다짐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교하 노씨(交河 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11,182가구, 45,8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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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산 탁씨(光山卓氏)
    광산 탁씨(光山卓氏)

     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던 곳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개칭하고 940년(고려 태조23)에 현재의 명칭인 광주(光州)로 개칭하였다. 996년(성종15)에 강등하여 자사(刺使)를 두고, 후에 다시 해양현(海陽縣)으로 강등하여 현령(縣令)을 두었다. 1259년(고종46)에 승격하여 지익주사(知翼州事)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승격하여 광주목(光州牧)으로 하였다. 그 후 여러차례의 변천을 거쳐 1501년(연산군7)에 주(州)가 되고, 1895년(고종32)에 다시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35년에 광주군 내의 광주읍(光州邑)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었다. 탁씨(卓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광산(光山)을 비롯하여 광주(廣州), 남양(南陽), 안산(安山), 양근(楊根), 가평(加平), 용인(龍仁) 등 32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광산(光山) 단본(單本)으로 알려져 있다.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시조(始組) 탁지엽(卓之葉)은 고려 선종(宣宗)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뒤에 태사(太師)에 이르러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으며, 문성(文成)이란 시호(諡號)를 제수(除授)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광산(光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켰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지엽(之葉)의 맏아들 도민(道敏)이 선종(宣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둘째 도집(道集)은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여 크게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한 원광(元光)은 대제학(大提學) 도민(道敏)의 아들로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선종(宣宗)의 부마(駙馬)가 되어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 종성(宗成)은 신종조(神宗朝)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고 해양군(海陽君)에 추봉되어, 공민왕(恭愍王) 때 내서사인(內書舍人)을 거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른 광무(光茂)와 함께 명성을 날렸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太宗) 때 지신사(知申事),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고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오른 신(愼)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유진(惟進)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산 탁씨(光山卓氏)는 남한에 총 3,672가구, 15,1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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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성-사천(東城-泗川) 이씨(李氏)
    동성-사천(東城-泗川)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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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풍 곽씨(玄風 郭氏)
    현풍 곽씨(玄風 郭氏) 

       시조 휘(諱): 곽 경(郭 鏡), 포산군(苞山君)
     





     현풍 곽씨(玄風 郭氏)

      시조 휘(諱): 곽 경(郭 鏡), 포산군(苞山君)
      현풍(玄風)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추량화현(推良火縣) 또는 삼량화현(三良火縣)이라 하다가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이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王郡 : 창녕군)에 속하게 하였고, 고려초(高麗初)에 현풍현(玄風縣)으로 개칭(改稱)하여 밀양(密陽)에 이속시켰으나 조선조(朝鮮朝)에서 한때 포산(苞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송(宋)나라 귀화성씨(歸化姓氏)로 알려진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중국(中國) 관서(關西) 홍농(弘農) 출신인 곽 경(郭 鏡)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 제 17대 왕, 재위기간 :  1122~1146)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으므로 처음엔 관향(貫鄕)을 포산(苞山)으로 하였으나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포산현(苞山縣)이 현풍(玄風)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현풍(玄風)을 본관(本貫)으로 하게 되었다.
     일찍이 영남 내륙(嶺南內陸)에 뿌리를 내린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고려중기(高麗中期)에서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충(忠)·효(孝)·열(烈)의  가통(家統)을 이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代表的)인 도덕 가문(道德家門)으로 알려졌다.
     현풍 곽씨(玄風郭氏)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포산군(苞山郡)의 현손(玄孫) 기정(其正)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응(膺)은 충렬왕조(忠烈王朝)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냄으로써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된 부는 수사도(守司徒)에 올라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고, 제학(堤學) 원진(元振)의 9세손(世孫) 안방(安邦)은 세종(世宗) 때 해미 현감(海美縣監)과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내면서 청렴한 성품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뒤에 청백리(淸白吏 : 청렴한 벼슬아치)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그의 아들 승화(承華)는 어려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당대의 양재(兩才)로  불리웠다.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특히 안방(安邦)의 현손대(玄孫代)에서 주(走)자 항렬의 8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현곽8주(玄郭8走)>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중 월(越)·율·준 3형제가 빼어났다.
     1556년(명종 1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한 월(越)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선조조에서 의주 목사(義州牧使)를 지내며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고,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청송·남원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한편 율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조 식(曺 植)과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학행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홍산  현감(鴻山縣監)과 예천 군수(醴川郡守)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초계 군수(草溪郡守)로 있으면서 왜군 방어를 잘하여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으로  특진되었으나 군내(郡內)의 유생들이 유임시켜 달라는 상소로 초계 군수에 재임되어,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팔도고을이 초계(草溪)만 같다면야 ....”하고 개탄했을 만큼 선정(善政)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김 면(金 沔)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막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과 함께 호남(湖南)의 목구멍이라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서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무저항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도 그 아버지를 안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했고, 딸 이문호(李文虎)의 아내도 남편이 포로가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일문삼강(一門三綱)>의 가문으로 일컬어져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다.
     목사(牧使) 월(越)의 셋째 아들 재우(再祐)는 현풍 곽씨(玄風郭氏)가 자랑하는  인물로 1552년(명종 7) 의령현(宜寧縣) 세천리 외가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일찍이 남명(南溟) 조 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조 식이 자기  외손녀를 재우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재우는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되고 나이 40이 넘자 벼슬을 단념,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 월의 무덤을 찾아가 “아버지께서 만약 계셨다면 왜놈들의 창궐이 어찌 걱정되겠습니까?”하고 울며 하직한 후  임진년 4월 27일에 의병을 일으켜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첩리를 입고 스스로  <천강홍의 대장군(天降洪衣大將軍)>이라 칭하면서 의령·삼가·합천·현풍·창녕·영산 등지에서 크게 무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고 관찰사 김 수와의 불화로 대관(臺官)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이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려 하자 신구(伸求)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혼탁한 조야(朝野)의 기강이 문란함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 비슬산(琵瑟山 : 경상북도 달성군과 청도군 사이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솔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밖에 재우(再祐)의 종형(從兄)인 재겸(在謙)은 임진왜란 때 금강 방어에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에는 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싸워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으며, 자방(自防)은 의병장 조 헌(趙 憲)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현풍 곽씨의 의맥(義脈)을 이었다. 
     고종 때의 거유(巨儒) 종석(鐘錫)은  이 황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이진상(李震相)에게 성리학을 이어받아 이기설(理氣設)을 주장한 학자로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에 은거하다가 3·1운동 때는 전국 유림들의 궐기를 호소했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장서(長書)를 지어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여 충의의 가문인 현풍 곽씨(玄風郭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현풍 곽씨는  남한에 총 30,969가구, 127,3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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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빈河濱 이씨(李氏)
    하빈河濱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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