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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포金浦 이씨(李氏)
    김포金浦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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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성 하씨(達成夏氏)
    달성 하씨(達成夏氏)

     달성(達成)은 대구(大邱)의 옛  지명으로, 대구(大邱)는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경상도(慶尙道)의 행정중심지이다. 본래 신라(新羅) 때 달구화현(達句火縣 : 달불성)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대구(大丘)로 고쳐서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조(高麗朝)에 들어와 경산부(京山府)에 이속되었으며 1143년(인종 21)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대구현(大丘縣)에서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되면서 수성(壽城)을 속현으로 두었고, 1466년(세조 12) 진(鎭)을 설치하여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1750년(영조 26) 대구의 유생 이양채(李亮采)가 구(丘)자는 대성공자(大聖孔子)의 휘(諱)자이므로 이를 개칭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다가 80년대부터 점차 대구(大丘)로 쓰이기 시작했다. 1895년(고종 32) 대구군으로 칭하여 대구부에 속하였고 그 후 대구부를 대구시로 개칭, 1981년 7월 1일을 기해 대구직할시(大丘直轄市)로 승격하였다. 달성 하씨(達成河氏)는 중국(中國) 송(宋)나라의 귀화족(歸化族)으로 전하는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송(宋)나라에서 대도독(大都督)이었던 하 흠(夏 欽)이란 사람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귀화(歸化)하여 달성(達成 : 대구의 옛 지명)에 정착(定着)한 것이 우리나라 하씨(夏氏)의 시원(始原)이라고 한다. 그 후 흠(欽)의 아들 용(溶)이 고려 때 나라에 공(功)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시조(始祖)를 흠(欽)으로 하고 본관(本貫)을 달성(達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주요 인물(人物)로는 흠(欽)의 현손(玄孫) 광신(光臣)이 고려(高麗) 때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하였으며, 혁하(赫河)가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조선조에 와서는 인경(仁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시우(時雨)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 외 정조(正祖) 때의 학자(學者) 시찬(試鑽)은 학행(學行)으로 유명했으며,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열암집(悅庵集)'을 저술했다.
     오늘날에 와서 하씨(夏氏)는 달성(達城)을 단본(單本)으로 하여 경북 달성(慶北達城)·경산 지방(慶山地方)과 경남 밀양(慶南密陽)·강원도 원주지방(江原道原州地方)·전북 순창(全北淳昌)·장수(長水) 지방 등지에서 많이 살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달성 하씨(達城夏氏)는 남한(南韓)에 총 713가구, 2,8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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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주星州 이씨(李氏)
    성주星州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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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흥大興 이씨(李氏)
    대흥大興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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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 나씨(羅州羅氏)
     나주 나씨(羅州羅氏)
       시조 휘(諱):나 부(羅 富)
       묘 소: 전남 나주시 송월동 
       일세조 휘(諱): 나득규(羅得규), 영동정(令同正) 

     

    나주 나씨(羅州羅氏)

     나주(羅州)는 전라남도(全羅南道) 중서부(中西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이었으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 때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다. 후백제의 견 훤(甄 萱)이 이 곳을 본거지로 삼았고 후에 고려(高麗) 태조 왕 건(王 建) 점령하여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고대 중국(中國) 백익(伯益)의 후예로 전하는 나주 나씨(羅州羅氏)는 시조(始祖)인 나 부(羅 富)가 강서성(江西省) 예장(豫章)으로부터 동래(東來)하여 고려조에서 정의대부(正議大夫) 감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역임하고 나주(羅州)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부(富)의 후손으로 영동정(令同正)에 오른 득규로부터 기일세(起一世)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특히 일세조인 득규의 증손(曾孫) 수영(守永)의 아들 5 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가문(家門)의 중흥을 크게 이루었다.
     수영(守永)의 맏아들 위(位)는 고려 때 일찍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당시 혼란한 정국을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나주에 은거자정(隱居自靖)하여 금양처사(錦陽處士)로 불리워졌으며, 그의 아들 동길(東吉)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증주 목사(甑州牧使)로 나가 자손들이 그곳에서 잉거(仍居)하면서 용강(龍岡)과 성주(成州) 등지로 이거(移居)하여 주로 관서북 (關西北) 지방에 집중세거하게 되면서 부터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일족(一族)을 이루었다.
     수영의 둘째 아들인 계(桂)는 고려에서 벼슬이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이르렀고, 자손들이 주로 경기도(京畿道)에 집중세거하며 시랑공파(侍郞公派)를 이루었다.
     그의 묘소(墓所)가 한양성내(漢陽城內)에 있는 것으로 기록에 전하나 실전(失傳)하여 1978년 후손들이 강화군(江華郡) 하점면(河岾面) 장정리(長井里) 봉천산(奉天山) 남쪽에 6대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음력 10월 13일에 향사 (享祀)하고 있다.
     금양군(錦陽君) 파조(派祖)인 석(碩)은 고려 때 사온서 직장(司 署直長)으로 나라에 공(功)을 세워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으며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나주로부터 김제(金堤)로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김제파(金堤派)라고도 하였다.
     그의 묘소(墓所)는 김제의 북조산(北造山)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후손들이 1954년 김제군(金堤郡) 금산면(金山面) 청도리(淸道里) 종산(宗山)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 향사(享祀)하고 있다.
     수영(守永)의 네째 아들로 연안군파 (延安君派)를 이룬 세(世)는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상원수(全羅道上元帥) 겸 도안무사(都按撫使)를 거쳐 나라에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고, 묘소가 실전되어 후손들이 1957년에 충남(忠南) 서천군(舒川郡) 마서면(馬西面) 옥산리(玉山里) 순제동(荀堤洞)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7일에 향사하고 있다. 수영의 막내아들로 사온서 직장(司 署直長)을 지내고 나주(羅州)에 세거(世居)했던 원(源)은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고, 묘소는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던 아들 진(璡)과 함께 나주 송현(松峴)에 있으며 3월 3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가통(家統)을 빛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조선 세종(世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세자시강원 찬선 (世子侍講院贊善)을 지낸 득강(得康)과 전농시정(典農寺正)으로 공(功)을 세워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진 공언(公彦), 명종(明宗)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청주 판관(淸州判官)으로 나간 응허(應虛), 양천 현감(陽川縣監)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군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던 흡(恰)이 유명했다.
     또한 풍덕 군수(豊德郡守) 순(恂),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된 치온(致溫),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거쳐 무장 현감(茂長縣監)으로 선무원종 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된 덕신(德愼), 인조(仁祖) 때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 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에 오른 덕헌(德憲), 정묘호란 때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군량조달에 힘썼던 위소(緯素) 등이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 나씨(羅州羅氏)는 남한(南韓)에 총 23,284 가구, 99,089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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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제麟蹄 이씨(李氏)
    인제麟蹄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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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주忠州 이씨(李氏)
    충주忠州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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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천 우씨(木川于氏)
    목천 우씨(木川于氏)

     목천(木川)은 충정남도 천원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우씨(于氏)는 중국 하남(河南)에서 계출된 성씨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 우(于) 땅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가 후에 우(于)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나라 우씨(于氏)는 목천(木川) 단본(單本)이며 고려 중엽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우방녕(于邦寧)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후 그의 아들 학유(學儒)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로부터 난을 일으키고 거사에 가담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무신이 전권(全權)을 잡아 잘 된 일이 없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거절했다. 정중부가 집권한 후 그는 신상이 위태로왔으나 집권층인 이의방(李義方)의 누이와 결혼한 인척관계로 무사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술유(述儒)가 명종(明宗) 때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판형부사(判刑部事)를 거쳐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 한편 희정(熙宗)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던 승경(承慶)은 권신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다 되말려 유배당했으며, 필흥(必興)은 공민왕(恭愍王) 때 「옥룡기(玉龍記)」의 도참설을 인용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의관과 여자들의 옷을 검은색으로 입게하고, 산에 나무를 심게하여 풍토(風土)를 순응케 하라는 소(疏)를 올려 이를 시행케하여 명망을 떨쳤다.
     1985년 경제 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천 우씨(木川于氏)는 남한에 총 282 가구, 1,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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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長水 이씨(李氏)
    장수長水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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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천 상씨(木川尙氏)
    목천 상씨(木川尙氏)

     목천(木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천원군(天原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 面)이 되었다. 상씨(尙氏)는 본래 중국(中國) 상당(上黨:산서성 기령도 노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상가고(尙可孤)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상씨(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초에 목천 호장(木川戶長)을 지낸 상국진(尙國珍)이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목천상씨갑자대동보(木川尙氏甲子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太祖) 왕건(王建)이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고려를 개국(開國)하자 백제(百濟)의 유민(遺民)들이 목천 상왕산(尙王山)에 웅거(雄據)하여 백제 재건을 위해 수차에 걸쳐 반기를 들자 화가 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가축(家畜)의 이름인 우(牛)·마(馬)·상(象)·돈(豚)·장(獐)으로 사성(賜姓)하였다. 축성(畜姓)으로 사성(賜姓)된 상씨(尙氏)는 국진의 아들 득유(得儒)가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 충(崔 庶)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서 수학(修學)하면서 향역(鄕役)을 면하게 되었고, 본래의 성(姓)인 상씨(尙氏)로 회복(回復)하였다고 한다. 그후 3세손 원(愿)이 급사(給事)를 지내며 임지(任地)를 따라 주거(住居)를 임천(林川)으로 옮겨 10대를 세거하면서 조상(祖上)의 원향지(原鄕地)인 목천(木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후대로 내려와 후손들이 풍덕(豊德)·원주(原州)·부여(扶餘)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파(派)를 이루게 되었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8세손 천석(天錫)이 고려 말에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효충(孝忠)은 조선 초에 충청도 수군우후(忠淸道水軍虞侯)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에 추증되어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 중기에 명상(名相)으로 이름난  범허재(泛虛齋) 진(震)은 목천 상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의 증조부 영부(英孚)가 임천(林川) 합하동(閤下洞)에서 부자(富者)로 살았는데, 재물을 사람들에게 꾸어주고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다가 만년에 그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리며, "내가 후손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아버지 보(甫:안기도 찰방을 지냄)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친히 성주산(聖住山)에서 기도를 드렸더니, 이듬해 그를 낳았다.  그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여덟 살에 아버지마저 잃어서 매부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자랐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관찰사(觀察使), 4조(四曹)의 판서(判書)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우·좌의정(右·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관후한 인품으로 16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고, 명상(名相)으로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청렴과 구휼(救恤)로 일생을 살았던 그는 창고가 무너져서 노비가 수리할 것을 말하면 웃으면서 "네가 비록 고쳐서 완전하게 만들어 놓아도 무엇으로 채우겠느냐" 하였고, 집에 도둑이 들었다가 잡히면 도리어 불쌍히 여겨 "주리고 떨면서 쪼들리다가 부득이 하였구나"하며 훔친 물건을 도로 내어 주면서 "만약 배고프고 추위에 떨거든 반드시 나에게 와서 고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하였으며, 벌레나 짐승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인품이었다. 진의 아들 붕남(鵬南)은 학문(學問)에 깊이가 있어 경사(經史)에 능통했으며 아버지의 음덕(蔭德)으로 높은 벼슬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서(詩書)로 일생을 살았다.
     그외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낸 시손(蓍孫:붕남의 아들)과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한 자산(子産)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진의 9세손 동기(東耆:통덕랑)의 둘째 아들 득용(得容)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거쳐 화량진 첨절제사(花梁津僉節制使)에 이르렀으며 경사(經史)를 비롯한 병서(兵書)·천문(天文)·주수(籌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의 전통 가문인 목천 상씨(木川尙氏)를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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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악安岳 이씨(李氏)
    안악安岳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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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원太原 이씨(李氏)
    태원太原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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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益山 이씨(李氏)
    익산益山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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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성丹城 이씨(李氏)
    단성丹城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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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천 노씨(豊川盧氏)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구을(仇乙) 또는 굴천현(屈遷縣)이었는데, 고려초에 풍주(豊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1018 년(현종 9)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조선 태조(太祖) 때 처음으로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로써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였으며, 태종(太宗)이 풍천(豊川)으로 고쳤다. 그후 은율현(慇栗縣)과 합하여 풍율군( 栗郡)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송화군(松禾郡)에 합하였고, 별칭(別稱)으로 서하 (西河)라 불리기도 하였다.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셋째 아들 노 지(盧址)가 고려조(高麗朝) 에 출사하여 풍천백(豊川伯)에 봉해졌고, 그의 후손 유(裕)는 국자진사(國子進士)로 풍천( 川)에 세거(世居)한 연유로 후손 들이 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풍천(豊川)으로 하게 되었다. 풍천 노씨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세종(世宗) 때 「치평요람(治平요覽)」의 편찬에 참여하여 무명을 떨친 숙동(叔仝)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손자 문명(文明)은 정여창(鄭汝昌)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형 우량(友良), 아우 우영(友英)과 함께 진사시(進士詩)에 합격하여 <삼주(三珠)>로 불리웠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추천으로 현릉 참봉(顯陵參奉)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었다. 한편우명(友明)의 아들 4형재 중 둘째 진(鎭)은 30여 년 간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청백(淸白)하기로 이름났다.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선조조명신편(宣祖朝名臣編)>에 그에 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전한다. 들에 밭이 없고 서울에 집이 없었다.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고, 영호남에서 두번 감사를 역임하였으나 쓸쓸한 객사에서 손(客)이 와도 담요 한 장 없이 지냈으며, 출세를 즐기지 않고, 항상 은퇴의 뜻이 있어 벼슬길에 나온지 30년에 달하였으나 벼슬한 날수는 3년을 차지 못하였다. 특히 그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었을 때도 남다른 척하지 않고 <인망(人望)이 높았다>고 격찬하였으며, 모나게도 살지 말되 또 시풍에 영합하여 때에 따라 겸하였기로 일찌기 이율곡도 처신하며 살지도 말라는 처세신조로 일생을 보냈다. 함양(咸陽)의 효자로도 8도에 소문 났었고, 당대의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선조(宣祖)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증조부 숙동(叔仝)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외 임진왜란 때 동래성(東萊城)을 지키다가 순절한 개방(蓋邦:계동의 6세손)과 인조(仁祖) 때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아 <팔미군자(八美君子)>의 별호(別號)가 붙었던 형하(亨夏:진의 증손)가 유명했고, 우 량(友良)의 6세손 전(군수홍기의 세째 아들)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군비 확장과 변방경비에 눈부신 업적을 남겨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광두(光斗)와 함께 명문의 전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남한에 총 7,978가구, 33,3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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