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게시물 검색
전체 588건 7 페이지
  • 부안扶安 이씨(李氏)
    부안扶安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405
  • 평산平山 이씨(李氏)
    평산平山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403
  • 사천박씨(泗川朴氏)
    사천박씨(泗川朴氏)

     사천(泗川)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다가 고려(高麗)때에는 사주(泗州)로 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의 둘째 아들 남환(男桓: 사수 군주)의 후손 인겸(仁謙)이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공부상서(工部尙書)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사주군(泗州君)에 추봉(追封)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사천(泗川)으로 하게 되었다.
     그후 인겸의 손자 자문(自文)이 충숙왕(忠肅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사천군(泗川君)에 봉해졌으며, 우왕(禑王)때 어지러운 정국을 피하여 함경남도 안변(咸鏡南道 安邊)을 둔거(遯居)하였다가 영흥(永興)에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자문(自文)을 일세조(一世組)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자문의 아들 양준(良俊)이 향직(鄕職)인 창정(倉正)을 역임했고, 손자 수도(守道)는 총경장군(摠京將軍)으로 무명(武名)을 떨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대재(大材: 양준의 현손)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정용낭장(精勇郎將) 인경(仁景: 자문의 10세손)의 아들 용계(龍桂)가 1469(예종 즉위)에 출생하여 장사랑(將仕郞)으로 의릉참봉(義陵參奉)을 지내고 영흥좌수(永興座首)를 자청하여 선원전(璿源殿) 축성 때 도감(都監)으로 공(功)을 세워 용양위부호군에 올랐으며, 함주군 상조양면 상한리(咸州郡上朝陽面上閒里)로 옮겨 살게 되어 후손들이 입함흥중조(入咸興中祖)로 받들어왔다. 그외 판결사(判決事) 창문(昌文)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던 두문(斗文)·원해(元楷)가 유명했고, 창조(昌朝)는 찰방(察訪)을 역임하여 주부(主簿)를 지낸 영주(永胄)와 더불어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270가구, 1,1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402
  • 온양溫陽 이씨(李氏)
    온양溫陽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96
  • 단양丹陽 이씨(李氏)
    단양丹陽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94
  • 연안延安 이씨(李氏)
    연안延安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93
  • 제주 고씨(濟州 高氏)

    제주 고씨(濟州 高氏)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南西) 해상(海上)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으로 일찍이 신라시대(新羅時代)부터 탐라국(耽羅國) 또는 탁라( 羅), 탐모라(耽牟羅), 주호(州胡), 섭라(涉羅) 등으로 불리우다가 1211년(희종 7) 제주(濟州)로 개칭(改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誌)>와 <영주지(瀛州誌)>의 [탐라개벽설화(耽羅開闢說話)]에 의하면 제주(濟州)에는 태초(太初)에 사람이 없었는데 한라산(漢拏山)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삼신인(三神人)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가 용출(湧出)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짐승의 고기만을 먹으며 살았는데 하루는 동(東)쪽으로부터 목함(木函)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함께 열어 보니 용모(容貌)가 미려(美麗)한 세 여자와 망아지, 송아지, 오곡(五穀)의 종자(種子)가 들어있었다. 
     삼신인(三神人)은 각각 세 미녀(美女)를 배필로 맞이하고 활을 쏘아 고을나(高乙那)가 제일도(第一都)인 제주목(濟州牧)을, 양을나(良乙那)는 제이도(第二都)인 대정현(大靜縣)을 부을나(夫乙那)는 제삼도(第三都)인 정의현(旌義縣)을 차지하여 목축(牧畜)과 농사(農事)를 지으며 살아 비로소 인간세계(人間世界)가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는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世孫)인 고 후(高 厚), 고 청(高淸)고 계(高 季) 등 세 사람이 신라(新羅)에 입조(入朝)하여 신라왕(新羅王)으로 부터 국호(國號)와 벼슬을 받아와서 탐라국(耽羅國)이 개국(開國)된 것으로 전한다. 
     고씨(高氏)는 고을나(高乙那)를 시조(始祖)로 하여 45세손(世孫) 자견왕(自堅王)까지 탐라군주(耽羅郡主)로 세습(世襲)해 오다가 서기 938년(고려 태조 21) 자견왕(自堅王)의 태자(太子) 말로(末老)가 고려(高麗)에 내조(來朝)하여 그가 곧 우리나라 고씨(高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유(維), 강(綱), 소(紹) 형제가 모두 고려(高麗)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지냄으로써 본토(本土 : 육지)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말로(末老)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시조(始祖)의 발원지(發源地)인 제주(濟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가문(家門)을 크게 번창시켰다. 

     고씨(高氏)의 본관(本貫)은 문헌에 제주(濟州)를 비롯하여 장흥(長興), 개성(開城), 횡성(橫城),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의령(宜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 김화(金花), 면산(免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 12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고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오늘날에는 제주(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여 중시조(中始祖) 말로(末老)의 15세손(世孫) 인단(仁旦)을 파조(派祖)로 하는 성주공파(星州公派), 13세손(世孫) 신걸(臣傑)을 파조(派祖)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15세손(世孫) 득종(得宗)을 파조(派祖)로 하는 영곡공파(靈谷公派), 11세손(世孫) 경(慶)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 10세손(世孫) 중연을 파조(派祖)로 하는 장흥백파(長興伯派), 11세손(世孫) 인비(仁庇)를 파조(派祖)로 하는 화전군파(花田君派), 13세손(世孫) 택(澤)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정공파(文禎公派), 4세손(世孫) 공익(恭益)을 파조(派祖)로 하는 상당군파(上黨君派), 4세손(世孫) 영신(令臣)을 파조(派祖)로 하는 양경공파(良敬公派) 등 아홉파(派)로 갈리었다.
     그러나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내륙(內陸)에 진출(進出)하여 명성(名聲)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성주공(星主公) 말로(末老)의 맏아들 유(維)가 처음이다. 

     유(維)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남성시(南省試)에 장원(壯元)하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우복야(右僕射 : 상서도성에 속한 정2품 벼슬)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조기(兆基)는 예종조(睿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인종(仁宗)때 시어사(侍御史)에 올라 이자겸(李資謙)의 일파(一派)로서 환관(宦官)과 결탁하여 권세(權勢)를 누리던 봉우(奉佑)를 탄핵하고 의종(毅宗)이 등극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판호부사(判戶府事)를 거쳐 1149년(의종 3)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 중서 문하성의 정2품 벼슬)에 올랐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여 오언시(五言詩)의 신인(神人)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로부터 제주 고씨(濟州高氏)는 고려조(高麗朝)에서 9상서(尙書) 12한림(翰林)의 명현(名賢)을 배출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서도 수많은 인재(人才)를 낳아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또는 학행(學行)과 충효(忠孝), 의열(義烈) 등으로 역사를 수(繡) 놓아 탐라왕족(耽羅王族)으로서의 긍지(矜持)를 세습(世襲)하며 명문(名文)의 기틀을 다져왔다. 

     조선초기(朝鮮初基)에 제주 고씨(濟州高氏)를 빛낸 인물(人物)인 영곡공파조(靈谷公派祖) 득종(得宗)은 전서공(典書公) 신걸(臣傑)의 손자(孫子)이며 상장군(上將軍) 봉지(鳳智)의 아들로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대호군(大護軍)과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 외국사절의 연향과 종실 , 재신의 음식 공괘를 관장하던 종5품 벼슬)을 거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올랐다.
     1438(세종 20)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오른 그는 사신(使臣)으로 두차례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가서는 천황의 서계(書契 : 일본 정부와 교섭하던 문서)를 가지고 돌아오는 등 외교적인 공적을 쌓았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한편 득종(得宗)의 아들 태필(台弼), 태정(台鼎), 태보(台輔), 태익(台翼)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며,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여(呂)는 나라에 공(功)을 세워 고성부원군(高城府院君)에 봉해졌고, 화전군(花田君) 인비(仁庇)의 8세손(世孫)이며 사신(思信)의 아들 형산(荊山)은 연산조(燕山朝)에 해주 목사(海州牧使), 와 병마절도사를 거쳐 중종반정 후 형조, 호조,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국난(國亂)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가문(家門)의 의맥(義脈)을 살려 충렬(忠烈)로 전쟁에 공을 세운 충렬공(忠烈公) 경명(敬命)은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자랑하는 인물(人物)이다. 

     중종(中宗) 때 남화풍(南畵風 : 당나라 왕유를 비조로 하는 문인 화파의 화풍)으로 호랑이 그림을 잘 그린 하천(霞川) 운(雲)의 손자(孫子)인 경명(敬命)은 부친(父親) 맹영(孟英)이 명종조(明宗朝)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가 이 양(李 樑)의 일파로 몰려 유배당하는 불운을 맞고 담양(潭陽)에 옮겨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고 병든 몸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丕塞)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개떼 덤비듯 한다.”로 시작되는 거의(擧義)의 격문(檄文)을 팔도(八道)에 돌려 구국(救國)의 염원으로 일어난 의병(義兵)을 이끌고 왜병(倭兵)과 싸우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도망가자는 참모의 말을 뿌리치고 차남 인후(因厚)와 함께 의열(義烈)로 죽음을 맞이했다.

     시(詩)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호남파 5대시인(湖南派五代詩人)>으로 손꼽혔던 그의 맏아들 종후(從厚)도 복수군(復讐軍)을 기병(起兵)하여“불행한 때를 만나 집안의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고(不肖孤)는 초토(草土)에 앓고 누워 아직까지 이 왜적들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아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다.(중략)”라는 통문을 돌리면서 여러 갈래로 흐트러진 의병(義兵)을 모아 영남(嶺南)으로 달려가 진주성(晋州城)을 지켰으나 성(城)이 왜병에게 함락당할 때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장사(三壯士)>라 일컬었다. 
     경명(敬命)의 두딸 노씨(盧氏) 부인과 안씨(安氏)부인도 정유재란 때 왜적을 꾸짖으며 칼을 안고 엎드려 순절하였으니 이들 일가(一家)의 절의(節義)는 높이 추앙되었다.
     선조(宣祖)는 경명(敬命) 일가(一家)의 죽음을 슬퍼하며 광주(光州)에 사당(祠堂)을 짓게하여 포충사(褒忠祠)로 사액(賜額)하고 경명(敬命)에게는 충렬공(忠烈公) 종후(從厚)에게는 효열공(孝烈公), 인후(因厚)에게는 의열공(義烈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 외 효륜(孝倫)의 아들로 최경희(崔慶會)의 부장(副將)이 되어 장수(長水), 무주(茂朱), 금산(錦山) 등지에서 왜병(倭兵)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晋州城)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박 진(朴 晋), 황 진(黃 晋), 원 호(元 豪)와 더불어 임진왜란의 4대명장(四大名將)으로 손꼽히는 언백(彦伯)은 1604년(선조 37)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으로 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으나 광해군(光海君)에 의해 임해군(臨海君 : 선조의 첫째 서자)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이렇게 충효(忠孝)의 가통(家統)을 이어온 제주 고씨(濟州 高氏)는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뿌리깊은 의열사상(義烈思想)의 본질을 밝혀주었으며, 국난의 갈림길에서 서성거리다가 비겁하게 살다간 우둔한 자(者)들의 지표(指標)가 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씨(高氏)는 남한(南韓)에 총 91,384가구, 384,0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91
  • 창녕昌寧 이씨(李氏)
    창녕昌寧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91
  • 아산牙山 이씨(李氏)
    아산牙山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88
  • 곡부 공씨(曲阜 孔氏)
     곡부(曲阜)는 중국(中國) 산동성(山東城) 제령도(濟寧道)에 위치한 고을  이름으로 일찍이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우 주공(周公) 단(旦)이 봉해진 나라였다. 
     공씨(孔氏)의 시조(始祖) 공자(孔子 : 본명은 구, 자는 중니)는 중국 노(魯)나라 추읍(곡부현)에서 태어나 세계 4성(四聖)의 한 사람으로 존앙되어 왔으며, 일찍이 인(仁)을 이상(理想)의 도덕(道德)이라 하여 효제(孝悌)와 충서(忠恕)를 이상의 근저(根底)로 삼고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치국(治國)의 도(道)를 설(說)하였고, 육경(六經)을  산술(刪述)하여 유교(儒敎)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 그의 언행(언행)을 적은 「논어(論語)」가 전한다.

     공자의 51세손인 공 완(孔 浣)의 아들 형제 중 장자(長子) 사회(思晦)는 중국에서 세거(世居)하였고, 차자(次子)인 소(紹)가 원(元)나라 순제(順帝 : 제 15대 황제, 재위기간 : 1333∼1367)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1351년(공민왕 즉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고 고려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文下侍郞平章事 : 내사문하성의 정 2품 벼슬)로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지고  관향(貫鄕)을 창원(昌原)으로 사적(賜籍)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공씨(孔氏)의 문호(門戶)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처음에 사적받은  창원(昌原)을 본관으로 삼았으나 1794년(정조  18) 공자(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개관하게 되었다.
     공씨(孔氏)의 본관은 곡부를 비롯하여 파평(坡平), 수원(水原), 부평(富平), 남양(南陽) 등  45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곡부 공씨(曲阜孔氏) 단본(單本)이다. 
     곡부 공씨는 소(紹)의 아들  녀가 고려조에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손자 부는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태학사를 거쳐 조선이 개국(開國)한 후 한성윤(漢城尹)과 보문각 대제학(補文閣大提學 :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청의 종 2품 벼슬)을 지냈으며 글씨에 능했고 당시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전횡을 논척했다.
     그의 아우 은은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교우했던 <명류구일(名流九逸)> 중의 한 사람으로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太宗)의 수차례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한편 부의 손자 성길(成吉)은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봉명(鳳鳴)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평장사)은의 손자인 전도 참판(參判)을 역임한 사문(斯文), 대사성(大司成 :  성균관의 정 3품 으뜸 벼슬)에 오른 기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특히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서린(瑞麟)은  곡부 공씨(曲阜孔氏)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친교를 맺었으며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상소하다가 관직이 삭탈당하기도 했으나, 정권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던 김안로(金安老)가 죽은  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종 2품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외 1794년(정조 1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낸  윤항(胤恒)과 성균관 대제학(成均館大提學)을 역임한 성학(聖學)이 유명했으며, 한말에 와서는  항일지사 수(洙)가 일제에 항거하여 구국 대열에 앞장섰고, 1947년에  문단에 등장한 중인(仲仁)은 신낭만주의(新浪漫主義)를 표방하여 전통적인 서정을 현대감각으로 포착하는 시(詩)를  썼으며 종군작가단(從軍作家團)의 일원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많은 작품을 남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씨(孔氏)는 남한에 총 17,207가구, 72,3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86
  • 나주羅州 이씨(李氏)
    나주羅州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84
  • 평창平昌 이씨(李氏)
    평창平昌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81
  • 울산蔚山 이씨(李氏)
    울산蔚山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80
  • 신천 강씨(信川 康氏)

    신천(信川)은 황해도(黃海道) 중앙부(中央部)에 위치하며, 단군신화(檀君神話)에 담긴 아사달산(阿斯達山) 당장경(唐藏京)이 있었던 곳으로 한사군(漢四郡)을 거쳐 고구려(高句麗) 시대에는 승산군(升山郡)이었다. 
     그후 고려(高麗) 초(初)에는 신주(信州)로 불리웠고 1413년(태종 13)에 지금의 신천(信川)으로 개칭되었다.
     우리나라 강씨(康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경조(섬서성 남부 장안현 부근 일대를 차지하는 행정구역) 출신인 주(周)나라 왕족(王族) 강 숙(康 叔)이며 그의 둘째 아들 강 후(康 侯)의 67세손 성골장군(聖骨將軍) 강호경(康虎景)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강씨(康氏)의 실질적인 시조(始祖)는 호경(虎景)의 14세 손으로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신성부원군에 봉해진 충렬공(忠烈公) 강지연(康之淵)이다. 
     강씨(康氏)의 본관(本貫)은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을 비롯하여 충원(忠原), 진주(晋州) 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하나 현존(現存)하는 강씨(康氏)는 신천(信川)과 곡산(谷山), 재령(載寧) 3본(本)이 대종(大宗)을 이룬다.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에 의하면 중시조(中始朝) 지연(之淵)은 고려 명종(明宗 : 고려 제19대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군의 개경(開京) 침략으로 이듬해 강화도(江華島)로 천도(도읍을 옮김) 할 때 왕(王)을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라 신성(信城 : 신천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신천(信川)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지연(之淵)의 6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을 파조로 하는곡산파(谷山派)와 13세손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 득룡(得龍)을 파조로 하는 재령파(載寧派)로 크게 갈리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낸 영암공(瀛巖公) 영(永)을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각 파별(派別)로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중시조(中始朝) 지연(之淵)의 6세손 윤성(允成)이 고려 충혜왕(忠惠王 : 고려 제 28대왕, 재위기간 : 1330 ~ 1332, 복위 1339 ~ 1344)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이부시랑(吏部侍郞)등을 거쳐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 문하부의 정 2품 벼슬)에 올랐으며, 그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비(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방번, 방석과 경순공주를 낳았음)가 되어 상산(象山 : 곡산의 옛이름)부원군(府院君)에봉해짐으로 후손들이 곡산(谷山)으로 관향(貫鄕)을 삼았다. 

     한편 재령파(재載寧派)의 파조(派朝)인 안정공(安靖公) 득룡(得龍)은 중시조 지연의 8세손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 고려 제 31대왕, 재위기간 ; 1351 ~ 1374) 때 삼사우사(三司右使 : 국가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맡아보던 정 2품 벼슬)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관악산(冠岳山) 
    의상대(義湘臺)에 올라가 송경(松京 : 개성)을 향해 통곡하니 이 때부터 이곳은 연주대(戀主臺)라 불리웠고, 태조(太祖)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그를  안릉(安陵 : 재령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했다. 

     또한 제주 입도시조(入島始祖)인 영암공(瀛巖公) 영(永)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사촌 오라버니로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으며, 왕자의 난(조선 개국 초 태조의 아들 방원과 방간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으킨 두 차례의 난)이 일어나자 피신하여 제주(濟州)에서 일생을 마침으로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가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고려의 무신(武臣)인 조(兆)가 도통사(都統使 : 각 도의 군사를 통솔하는 무관직 벼슬)를 지냈으며, 증(拯)은 음보(蔭補)로 벼슬에 등용되어 예종(睿宗 : 고려 제 16대왕, 재위기간 ; 1105 ~ 1122)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강령 강씨(康翎康氏)로 분적(分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증손(曾孫) 순(純)이 1453년(단종 1)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거쳐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를 지낸 뒤 1457년(세조 2)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1467년(세조 12)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홍원(洪原), 북청(北靑), 만령(蔓嶺) 등지에서 공(功)을 세워 난이 평정되자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으로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씨(康氏)는 남한(南韓)에 총 16,763가구, 69,7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71
  • 덕수德水 이씨(李氏)
    덕수德水 이씨(李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70

회원로그인

Copyright © 2001-2016 ITNANU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