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 계씨(遂安 桂氏)
수안 계씨(遂安 桂氏)
수안(遂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한 지명으로 한사군(漢四郡)을 거쳐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에 장색현(璋塞縣)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때 와서 유암군(楢巖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고려초(高麗初)에 수안현(遂安縣)이 되었다가 고려(高麗) 현종(제 8대 왕, 재위기간 : 1009~1031) 때 곡주(谷州 : 곡산)에 속하였으며, 서기 1310년(충선왕 2) 수주(遂州)로 승격되었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된 후에 다시 수안(遂安)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수안계씨계축보(遂安桂氏癸丑譜)>에 의하면 우리 나라 계씨(桂氏)의 연원(淵源)을 중국(中國) 천수(川水 : 감숙성 남쪽 위하 유역에 있는 지명) 출신인 계석손(桂碩遜)에 두고 있다.
그는 명(明)나라에서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고려말(高麗末)에 동래(東來)하여 나라에 공(功)을 세워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석손(碩遜)을 시조(始祖)로 학고 관향(貫鄕)을 수안(遂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선천장파(宣川長派), 군현파( 賢派), 태산파(台山派) 등 22파로 분파(分派)되었고, 평안도(平安道) 선천(宣川)과 황해도(黃海道) 곡산(谷山)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관서지방(關西地方)의 명문(名門)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특히 수안 계씨(遂安桂氏)는 시조(始祖) 시랑공(侍郞公)의 아들 원우(元祐), 원조(元祚), 원제(元 ), 원겹(元 ), 4형제 대(代)에서 크게 번성하여, 맏아들 원우(元祐)가 합문지후(閤門祗候 : 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던 관청의 벼슬)을 지냈고, 그의 아들 문식(文植)은 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하며 왕명(王命)으로 궁중의 출납을 맡았다.
한편 원조(元祚)의 세째 아들 양춘(陽春)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사(僉使)를 지낸 후 강화(江華)로 들어가 강화파(江華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원제(元 )의 후손에서는 강동파(江東派)를 비롯한 영유(永柔), 증산(甑山), 용강(龍岡) 등 7파(派)로 분파(分派) 되었다.
그러나 원겹(元 )의 후손들은 평양지방(平壤地方)에 산거(散居)하며 세계(世系)를 이었으나 보첩수단(譜牒收單) 과정에서 선계(先系)를 실전(失傳)하여 12세(世)를 알 수 없다.
가문(家門)을 대표(代表)하는 인물(人物)로는 정원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낸 빈(斌)과 조방장(助防將) 반(斑)의 형제가 유명했으며, 준(遵)은 문과(文科)에 올라 삼화 현령(縣令)을 지내면서 청렴(淸廉)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한편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김응하(金應河) 장군(將軍)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많은 적을 죽이고 힘이 세어 북관장사(北關壯士)로 불리웠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천상(天祥), 익상(益祥) 두 아들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금도(金島)에 토성(土城)을 쌓고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지문(之文)과 적에게 잡혀가 갖은 고문에도 굽히지 않아 영조(英祖) 때 정문(旌門)이 내려진 천상(天祥)은 충렬(忠烈)로써 가문을 빛냈다.
조선중기(朝鮮中期)의 학자(學者)로 유명한 태형(泰衡)은 노천(魯川)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후세 교육에 진력하여 선천군 대산(宣川郡臺山)의 목동서원(睦洞書院)에 주자(朱子), 율곡(栗谷)과 함께 동향(同享)되고 있으며, 1768년(영조 44) 문과(文科)에 급제한 덕신(德新)은 예조좌랑(禮曹左郞)을 역임하여 찰방(察訪)을 지낸 덕해(德海)와 함께 계씨가문(桂氏家門)은 예조좌랑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여 계씨(桂氏)는 남한(南韓)에 총 1,501가구, 5,9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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