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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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성陽城 이씨(李氏)
    양성陽城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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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안-선성(禮安-宣城) 김씨 金氏
    예안-선성(禮安-宣城) 김씨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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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계羽溪 이씨(李氏)
    우계羽溪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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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령載寧 이씨(李氏)
    재령載寧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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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구金溝 이씨(李氏)
    금구金溝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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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연 노씨(長淵盧氏)
    장연 노씨(長淵盧氏)

     장연(長淵)은 황해도 서단(西端)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일찌기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에서부터 장연(長淵) 또는 장담(長潭) 으로 불리웠고, 고려 현종(顯宗) 때 옹진군(瓮津郡)에 속했으며, 1106년(예종 원년)에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두었다. 1392년(태조 원년) 만호(萬戶)로 하여금 현관(懸官)인 감무를 겸하게 하다가 태종(太宗) 때 진(鎭)을 설치하여 병마사(兵馬使)로써 판현사를 겸하게 하였다. 그후 1414년(태종 14) 지금의 목감면(牧甘面) 서쪽에 있던 영강현(永康縣)과 합하여 연강(淵康)으로 개칭하였으며, 후에 청송현(靑松懸:지금의 신천군 용문면)으로 편입시켰던 해안현(海安懸)을 다시 합치고 장연으로 환원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영조(英祖) 때 현(懸)으로 강등하였다가 다시 부(府)가 되고, 순조(純祖)때 다시 현(懸)으로 강등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군(郡)으로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장연 노씨(長淵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네째 아들 노 구(盧坵:일명 점)가 고려조(高麗朝)에서 훈공(勳功)을 세워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안필(安弼)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거란(契 丹)의 침입을 토평(討平)하는데 공을 세워 장강(長康:장연의 옛 지명)군(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장연으로 하게 되었다.「장연노씨을축세보(長淵盧氏乙丑世譜)」의 기록에는 도시조(都始祖) 한림학사(翰林學士) 노 수(盧穗)로부터 기일세(起 一世)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7세손 단(旦:초명은 조)이 고려 문종(文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와 좌·우복야를 지내고 참지정사(參支政事)에 이르렀고, 최 충(崔 沖)과 함께 사숙(私熟)을 열어 후진교육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를 12공도(公徒)의 하나인 광헌공도(匡憲公徒)라 하였다. 그의 후손에서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정승(政丞)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 國崇祿大夫)에 오른 명신(命臣)은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현달(縣達)하여 장연 노씨의 3대 산맥을 이루었다. 명신의 맏아들 국주(國柱)는 충목왕조(忠穆王朝)에서 이부 판사(吏部判事)를 지내고 창녕(昌寧) 월미촌(月未村)으로 이거(移居)하였으며, 둘째 태주(台柱)는 호군(護軍)을 역임했다. 셋째 아들 성주(誠柱)는 삼한삼중대광보국벽상좌명공신(三 韓三重大匡輔國壁上佐命功臣)으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찬(贊)이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연 노씨(長淵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1,865가구, 7,4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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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산 궁씨(兎山 弓氏)





     토산 궁씨(兎山 弓氏)

      토산(兎山)은 황해도(黃海道) 금천군(金川郡)과 신계군(新係郡)에 걸쳐 있었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 또는 월성현(月城縣)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경덕왕(景德王: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765)이 토산(兎山)으로 고쳤다.
      서기 1018 년(고려 현종 9)에는 장단현(長湍縣)에 속했다가 1062년(문종 16) 개성(開城)의  직할시가 되고, 예종(睿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현감(縣監)을 두어  황해도(黃海道)에 이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토산군(兎山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일부는  신계군(新溪郡)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금천군(金川郡)에 편입되었다. 
      궁씨(弓氏)는 본래 중국(中國) 태원(太原:지금의 산서성 기령도에  속한 지명) 숙궁(叔弓)의 후손(後孫)이 이름자(字)를 성(姓)으로 삼았다고 전하며, 우리나라 궁씨(弓氏)는 태원(太原) 출신인  궁 흠(弓 欽)이 은(殷)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와 함께 동래(東來)하여 토산에 세거(世居)한 것이 시원(始源)이 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는 궁씨(弓氏)의 본관(本貫)을 토산(兎山)과 순천(順川)이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토산을 제외한 관향(貫鄕)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한편「토산궁씨세보(兎山弓氏世譜)」에 의하면 상계(上系)의 실전(失傳)으로 인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토산에 세거해온 궁계신(弓繼信)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관향(貫鄕)을 토산(兎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을 살펴보면 계대(系代)를 알 수 없는 인물인 궁 제(弓 濟)가 고려(高麗) 숙종(肅宗:제15대 왕, 재위기간:1095∼1105) 때  우문감(右門監)을 지낸 것으로 전하는 문헌(文獻)이 보이며, 시조(始祖) 계신(繼信)의 현손(玄孫) 인걸(仁傑)은 조선조(朝鮮朝)에서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외국사절의 연향과 종실, 재실의 음식 공궤를 관장하던  관청의 종4품 벼슬)을 역임하였고, 고종(高宗)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원일(元一)과 어사(御史) 석암(石岩)이 유명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몸바친 달초(達楚)와 억로(億魯)·현섭(縣燮) 등이 이름 났고, 인성(寅聖)은 독립단(獨立團) 평안남도 지단장으로 활약하면서 조국(祖國)의 광복(光復)을 위해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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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해靑海 이씨(李氏)
    청해靑海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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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탄씨(彈氏)
    탄씨(彈氏)

     탄씨(彈氏)의 성원(姓源)과 선계(先系)에 대한 소목(昭穆)은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러나 구한말(舊韓末) 무관학교(武官學校)에 탄원기(彈元基)라는 교관(敎官)이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비교적 오래된 성씨(姓氏)로 추정되며, 문헌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해주(海州), 진주(晋州) 두 본이 있다.
     193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탄씨(彈氏)는 경기도(京畿道)와 강원도(江原道) 등지에 7가구가 분포되어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36
  • 태안泰安 이씨(李氏)
    태안泰安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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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안 계씨(遂安 桂氏)

    수안 계씨(遂安 桂氏)

      수안(遂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한 지명으로 한사군(漢四郡)을 거쳐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에 장색현(璋塞縣)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때 와서 유암군(楢巖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고려초(高麗初)에 수안현(遂安縣)이 되었다가 고려(高麗) 현종(제 8대 왕, 재위기간 : 1009~1031) 때 곡주(谷州 : 곡산)에 속하였으며, 서기 1310년(충선왕 2) 수주(遂州)로 승격되었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된 후에 다시 수안(遂安)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수안계씨계축보(遂安桂氏癸丑譜)>에 의하면 우리 나라 계씨(桂氏)의 연원(淵源)을 중국(中國) 천수(川水 : 감숙성 남쪽 위하 유역에 있는 지명) 출신인 계석손(桂碩遜)에 두고 있다. 
     그는 명(明)나라에서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고려말(高麗末)에 동래(東來)하여 나라에 공(功)을 세워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석손(碩遜)을 시조(始祖)로 학고 관향(貫鄕)을 수안(遂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선천장파(宣川長派), 군현파( 賢派), 태산파(台山派) 등 22파로 분파(分派)되었고, 평안도(平安道) 선천(宣川)과  황해도(黃海道) 곡산(谷山)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관서지방(關西地方)의 명문(名門)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특히 수안 계씨(遂安桂氏)는 시조(始祖)  시랑공(侍郞公)의 아들 원우(元祐), 원조(元祚), 원제(元 ), 원겹(元 ), 4형제 대(代)에서 크게 번성하여, 맏아들 원우(元祐)가 합문지후(閤門祗候 : 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던 관청의 벼슬)을 지냈고, 그의 아들 문식(文植)은 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하며 왕명(王命)으로 궁중의 출납을 맡았다. 
     한편 원조(元祚)의 세째 아들 양춘(陽春)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사(僉使)를 지낸 후 강화(江華)로 들어가 강화파(江華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원제(元 )의 후손에서는 강동파(江東派)를 비롯한 영유(永柔), 증산(甑山), 용강(龍岡) 등 7파(派)로 분파(分派) 되었다. 
     그러나 원겹(元 )의 후손들은 평양지방(平壤地方)에 산거(散居)하며 세계(世系)를 이었으나 보첩수단(譜牒收單) 과정에서 선계(先系)를 실전(失傳)하여 12세(世)를 알 수 없다. 

     가문(家門)을 대표(代表)하는 인물(人物)로는 정원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낸 빈(斌)과 조방장(助防將)  반(斑)의 형제가 유명했으며, 준(遵)은 문과(文科)에 올라 삼화 현령(縣令)을 지내면서 청렴(淸廉)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한편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김응하(金應河) 장군(將軍)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많은 적을 죽이고 힘이 세어 북관장사(北關壯士)로 불리웠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천상(天祥), 익상(益祥) 두 아들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금도(金島)에 토성(土城)을 쌓고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지문(之文)과 적에게 잡혀가 갖은 고문에도 굽히지 않아 영조(英祖) 때 정문(旌門)이 내려진 천상(天祥)은 충렬(忠烈)로써 가문을 빛냈다.
     조선중기(朝鮮中期)의 학자(學者)로 유명한 태형(泰衡)은 노천(魯川)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후세 교육에 진력하여 선천군 대산(宣川郡臺山)의 목동서원(睦洞書院)에 주자(朱子), 율곡(栗谷)과 함께 동향(同享)되고 있으며, 1768년(영조 44) 문과(文科)에 급제한 덕신(德新)은 예조좌랑(禮曹左郞)을 역임하여 찰방(察訪)을 지낸 덕해(德海)와 함께 계씨가문(桂氏家門)은 예조좌랑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여 계씨(桂氏)는 남한(南韓)에 총 1,501가구, 5,9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34
  • 천千
    천千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30
  • 창원 구씨(昌原 具氏)





     창원 구씨(昌原 具氏) 

       시  조 휘(諱):구성길(具成吉), 의창군(義昌君)

       일세조 휘(諱):구  설(具  雪), 생원(生員)

       중시조 휘(諱):구종길(具宗吉), 직제학(直提學) 

     





     

     






     창원 구씨(昌原 具氏)

      창원(昌原)은 경상남도 남쪽에 위치한 산업도시이며 도청  소재지로 고대(古代)에는 금관가야(金官伽倻 : 경상남도 김해지방에서 부족국가를 형성하였던 6가야중의 하나)에 속했었다.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에 의하면 창원(昌原)은 본래 의창현(義昌縣)과 회원현(會原縣)의 합명(合名)이다. 의창(義昌)은 신라 때 굴자군(屈自郡) 또는 의안군(義安郡)으로 불리우다가 1282년(충렬왕 8)에 와서 의창으로 개칭되었고, 회원(會原)은 신라 때의  골포현(骨浦縣)을 경덕왕(경덕왕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이에 이르러서는 두 현(縣)을 합하여  창원부(昌原府)를 설치하였다.
     창원 구씨(昌原具氏)는 본래 중국 남양(南陽 : 중국 하남성 서남부의 도시)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구 목(仇 牧)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창원구씨세보(昌原具氏世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창원 구씨는  원성(原姓)이 구씨(仇氏)로 한나라 명환(名宦) 구  남(仇 覽)의 후손 구성길(仇成吉)이 동래(東來)하여 서기 945년(혜종 2) 서경(西京)에서 공을 세워 의창군(義昌君)에 봉해졌고 벼슬은 찬성사(贊成事 : 문하부의 정2품 관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창원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였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생원(生員) 설(雪)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조선 세종 때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역임한 종길(宗吉)을 중시조로 계대하여 오다가 1791년(정조 15) 현재의 구씨(具氏)로 개성(改姓)했다고 한다. 
     특히 창원 구씨는 1797년(정조 21)부터 1924년에 이르도록 127년간 수보(修譜)를 못하여 개성(改姓)한 연유와 수보를 못한 사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정조실록(正祖實錄)」과 「승정 원일기(承政院日記)」에 사성(賜姓)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가세를 일으킨 중시조 종길은  1363년(공민왕 12) 경남  의창군 북면 내곡리에서 생원(生員) 설(雪)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천품이 온화하고 어질어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한 그는 주역(周易)에 통달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진력하다가 노모의 뜻에 따라 늦게 벼슬길에 나서 1422년(세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그는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창원 구씨의 4대 산맥(山脈)을 이루어, 맏아들 복한(復漢)은 부사공파(府使公派)로, 둘째 동설(東薛)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셋째 동직(東直)은 승지공파(承旨公派)로, 그리고 막내 석훈(錫勳)은 처사공파(處士公派)로 각각 분파되었다.
     그밖에 종길(宗吉)의 7세손(世孫) 응진(應辰)은 임진왜란 때 제포 만호(濟浦萬戶)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김해·노현 등지에서 수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나 부상을 당한 채 포로가 되어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왜군에게 무참히 처형당하였다.
     그의 아우 응삼(應參)도 임진왜란 때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 군사의  시재, 무예의 연습, 병서의 강습을 맡은 관아의 종 4품  벼슬)으로 선조를 의주에까지 호종(扈從)하고 전쟁에서 순절하였으므로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한편 진사(進士) 명람(明覽)의 아들 응성(應星)은 응진의 종제(從弟)가 되는데, 임진왜란 때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로서 의병을 모아 권 율(權 慄)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순절하여 선무원종 이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의 훈작을 받았고, 그의 아들 동(棟)은 약관(弱冠)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의령·함안 등지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으나 끝내 싸움터에서 순절하였다.
     1967년 <일문4충(一門四忠)>으로 일컬어진 이들 4부자형제(父子兄弟 : 응진·응삼·응성·동)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경남 고성군 거류면 송산리에 사충기적비(四忠紀蹟碑)를 세우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친필로 제목을 써서 그들의 충절을 추모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원 구씨는  남한에 총 5,056가구, 22,12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29
  • 해풍海豊 김씨 金氏
    해풍海豊 김씨 金氏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28
  • 축문, 지방 쓰는 법

    지방 쓰는 법

    지방 쓸 때 알아 두어야 할 점




          묘제, 위령제, 추도식과 한식절사에는 지방을 쓰지 않으나 기제와 설, 추석에 지       내는 차례에는 지방이 있어야 한다. 지방은 종이로 만든 신주를 말한다.


    신위는 고인의 사진으로 하되 사진이 없으면 지방으로 대신합니다.
    기제사에서 지방을 붙이고 축문을 읽는 것이 원칙입니다.
    지방의 규격은 가로 6 cm, 세로 22 cm의 깨끗한 백지에 먹으로 씁니다. 상단 모서리를 조금씩 잘라 버립니다. 아래 예제 중 왼쪽은 할아버지 한 위, 오른쪽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양위의 지방입니다.




     



    지방을 쓰기 전에 몸을 청결하게 하여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춥니다.
    남자 고인의 경우, 벼슬이 있으면 學生(학생)대신에 벼슬의 관직(예를 들면 崇祿大夫등)을 쓰고
    그 부인은 孺人(유인)대신에 貞敬夫人(정경부인)을 씁니다.
    여자의 지방 孺人 다음에는 본관성씨를 씁니다.
    考(고)는 사후의 父(부;아버지)를 뜻하며 비는 사후의 母(모;어머니)를 뜻합니다.
    아내의 제사는 자식이 있더라도 남편이 제사장이 되어야 하며, 자식의 제사는 손자가 있어도 아버지가 제사장이 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지방을 붙일 때 앞에서 보아 왼쪽이 높은 자리, 오른쪽이 낮은 자리입니다.
    한 할아버지에 두 할머니의 제사일 경우 가장 왼쪽이 할아버지, 중간이 본비, 오른쪽에 재취비의 지방을 붙입니다.


     

    여러 경우의 지방 쓰기 사례

    초록색부분은 알맞게 수정하여 쓰도록 합니다. 지방은 백지에 붓으로 정성스레 써야 합니다.



     

    축문 쓰는 법

      축문은 신명 앞에 고하는 글이며 그 내용은 제위 분께 간소하나마 제수를 차렸으니 흠향하시라는 뜻을 담습니다. 그러므로 요즘에는 한문의 뜻을 풀이하여 알기 쉽게 한글로 쓰기도 합니다.축문의 규격은 가로 24cm, 세로 36cm 의 깨끗한 백지에 씁니다.벼슬이 있을 때의 호칭은 지방을 쓸 때와 같습니다. 學生 대신에 관직명으로, 그 부인은 孺人(유인) 대신에 貞敬夫人(정경부인)등을 씁니다.
     명절에 지내는 차례에는 축문을 낭독하지 않습니다.


    한문 축문의 예(양친별세 부친제사)
    (초록색 부분은 고쳐 쓰도록 합니다)




    축문 쓸 때 알아두어야 할 점

     維(유); 이어서 내려오다. 
     歲次(세차); 해의 차례. 
     干支(간지); 간지는 천간지지 육십갑자의 그 해의 태세를 쓴 것이며 그 예로 금년이 丁丑 (정축)년이면 丁丑 (정축)이라고 씁니다. 
     某月(모월); 제사 날을 따라 쓰며 제사달이 정월이면 正月 8월이면 八月(팔월)이라 씁니다. 
     干支朔(간지삭); 제사달의 초하루라는 뜻으로 제사달 초하루의 일진을 씁니다. 예를 들면 초하루 일진이 丁亥 (정해)이면 丁亥朔 (정해삭)이라 씁니다. 
     某日(모일); 제사 날을 쓴것이며 제사날이 15일이면 그대로 十五日(십오일)로 씁니다. 
     干支(간지); 그 제사날의 일진을 씁니다. 예를 들면 15일이 제사날이고 15일의 일진이 甲子(갑자)이면 甲子(갑자)라고 씁니다. 
     敢昭告于(감소고우); 삼가 밝게 고한다는 뜻으로 妻喪 (처상)에는 敢(감)자를 버리고 昭告于(소고우)만 쓰며 아우 이하는 다만 告于(고우)만 씁니다. 
     예제 축문은 양친이 별세한 경우 부친 제사의 축문이며 모친제사의 경우에는 청색 글의 顯考 (현고)를 顯비 (현비,비:죽은 어미비字)로 고쳐 씁니다. 
     부모 중 한쪽이 살아 계신 때에는 顯考學生府君 (현고학생부군) 혹은 顯비孺人ooo氏 (현비유인ooo씨)중 한쪽을 쓰지 않습니다. 
     조부모 제사의 경우는 顯考 (현고)를 顯祖考 (현조고), 顯비 (현비)를 顯祖비 (현조비)로 고쳐씁니다. 
     증조부모 제사의 경우는 顯考 (현고)를 顯曾祖考 (현증조고), 顯비 (현비)를 顯曾祖비 (현증조비)로 고쳐 씁니다. 
     고조부모 제사의 경우 顯考 (현고)를 顯高祖考 (현고조고), 顯비 (현비)를 顯高祖비 (현고조비)로 고쳐 씁니다. 
     孝子이름은 겸양의 표현으로 조금 작게 씁니다. 
     

     [代別 기제 축문 쓰는 법 보기]

     






    한글 축문의 예 (양친별세 부친제사)
    (초록색 부분은 고쳐 쓰도록 합니다)




    모년 모월 모일 효자 아무개는 감히 고하나이다.
    아버님 어머님, 
    해가 바뀌어서 아버님의 돌아가신 날이 다시 오니 영원토록 사모하는 마음과 하늘같이 
    크고 넓은 은혜를 잊지 못하여 삼가 맑은 술과 여러가지 음식으로 공손히 전을 드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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