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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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淸州 이씨(李氏)
    청주淸州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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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은德恩 이씨(李氏)
    덕은德恩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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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포 공씨(金浦 公氏)
    김포(金浦)는 경기도 서쪽 한강(漢江) 하구에  위치한 지명으로 일찍이 고구려 시대에는  검포현(黔浦縣)이라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 김포(金浦)로 개칭(改稱)되었다.
     공씨(公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노(魯 : 무왕의 아우 주공  단을 시조로 하는 주나라 때의 열국의 하나) 나라의 왕족에서부터 비롯되는데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공하수(公夏守)의 후손 공윤보(公尹輔)가 당(唐)나라 1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 14) 안녹산(安祿山 : 당나라의 장군으로 안사의  난을 일으켰던 사람)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김포에 터를 마련한 것이 우리나라 공씨(公氏)의 시초가 된다. 

     공씨(公氏)의 본관은 김포와 문천을 비롯하여  창원·개성·인천·풍곡(楓谷 : 영동지방)· 삼계(森溪 : 영광지방)·삼가(三嘉) 등 10 본(本)이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造船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김포 공씨(金浦公氏) 단본(單本)이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고, 모두가 공윤보(公允輔)의 동원혈족(同源血族)이 확실하므로 공윤보가 처음 뿌리를  내린 김포를 관향)으로 삼아  벽동파(碧潼派)·문천파(文川派)·창원파(昌原派)로 계통(系統)을 이었다.
     벽동파 명례(明禮)는 1478년 (성종 9) 계공랑(啓功郞  : 종 7품의 문관의 품계)으로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평안도(平安道) 벽동(碧潼)으로 강제  이거당하여 그 곳에서 살면서 벽동파의 시원(始源)을 이루었고,  문천파(文川派) 보언(普彦)은 조선 세조 때 불복신(不服臣)으로 몰려 함경도(咸鏡道) 문천(文川)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되며, 또다른 한 계통(系統)인 창원파(昌原派)는 정승(政丞) 의(義)의 후손들이 누대(累代)로 함안(咸安)에 살다가 창원)에 이거하면서 일파(一派)를 이루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중종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마다 실시하여 문관을 뽑는 과거)에 병과(兵科)로 급제한  규(珪)가 저작(著作)·봉교(奉敎)·정언(正言) 등을 거쳐 전적(典籍 : 성균관의 학생을 지도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 6품 벼슬)에 올랐으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고, 창준(昌俊)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만주의 홍범도(洪範圖) 군대와 합류하여 백두산을 근거지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진원(震遠)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대장으로서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임시정부의 의정의원(議政議員)을 거쳐 광복군 참모(光復軍參謀) 겸 지대장(支隊長)으로 활약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씨(公氏)는 남한에 총 420가구, 1,8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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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양 자씨(遼陽慈氏)
    요양 자씨(遼陽慈氏)

     요양(遼陽)은 중국 랴오닝성의 도시로 랴오허강(遼河)의 지류 타이쯔강(太子河) 좌안에 위치한다. 동북(東北)지방에서는 일찍이 한인(漢人)이 입식(入植)한 곳으로, 진(秦), 한대(漢代)를 통하여 요동군(遼東郡)이라고 불렀다. 당(唐)의 태종( 太宗)이 이 땅을 공략하여 요주(遼州)라 개칭하고, 요(遼)가 발해국(渤海國)의 유민(遺民)을 다스리기 위해 이 곳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웠으나, 뒤에 오경(五京)의 하나로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를 두었는데, 그것이 현 지명의 기원이다. 자씨(慈氏)는 중국(中國) 형주현(荊州縣) 동주(憧州) 사람인 자호상(慈好祥)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요양자씨세보(遼陽 慈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1557년(명나라 가정 36) 영군부장(領軍副將)으로 몽고 정벌(蒙古征伐)때 순절(殉節)하였고, 그의 아들(弘善)이 요양(遼陽)으로 이거(移居)하여 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자씨(慈氏)의 시원(始源)은 홍선(弘善)의 아들 경보(慶輔), 순직(順直), 순희(順熙), 경조(慶祖) 4형제가 명나라 신종(神宗)때 전란(戰亂)을 피해 동래(東來)하여 길주(吉州) 남쪽 설봉산(雪峯山) 밑에 정착(定着)하여 살먼서 부터이다.
     후손들은 전세거지(前世居地)인 요양(遼陽)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자씨(慈氏)의 본관(本貫)은 요양(遼陽) 외에도 해주(海州)와 중원 자씨(中原慈氏)가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시조(始祖) 및 계대(系代)에 대해서는 문헌(文獻)이 전하지 않아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요양 자씨(遼陽慈氏)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조선조(朝鮮朝)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 樞府事)를 지낸 충국(忠國)과 만선(萬先)이 유명했으며, 취덕(就悳)과 석항(碩恒), 만찬(萬贊) 등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하였으며 만흘(萬屹)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은강(銀綱)과 명은(明殷)은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요양 자씨(遼陽慈氏)는 남한(南韓)에 총24가구, 13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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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기長기 이씨(李氏)
    장기長기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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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안鎭安 이씨(李氏)
    진안鎭安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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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천 목씨(泗川睦氏)
    사천 목씨(泗川睦氏)
     사천(泗川)은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우다가 고려(高麗) 때에는 사주(泗州)라 하였으며, 조선조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목씨(睦氏)는 본래 중국(中國) 조군(趙郡: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고대 조나라)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사천(泗川)을 비롯하여 수원(水原), 계양(桂陽:부천 별호), 옥천(沃川), 전주(全州), 남평(南平), 태인(泰仁), 경주(慶州), 다인(多仁:경북 예천지방) 등 9본이 있으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사천(泗川)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일찌기 고려조에서 낭장(郎將), 동정(同正)을 지낸 목효기(睦孝基)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는 고려 말기 에서부터 가문(家門)을 융성하여 많지 않은 인구수로서도 대성(大姓)의 지위를 확보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효기(孝基)의 아들 덕창(德昌)이 1269년(원종 10) 교위(校尉)로서 역신 최 탄(崔坦), 한 신(韓愼), 이연령(李延齡)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다가 영주성(靈州城: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였으며, 덕창(德昌)의 아들 준평(俊平)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진사(進士) 충달(忠達)의 아들 인길(仁吉)은 공민왕(恭愍王)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侍從)하고, 1359년(공민왕 8) 기 철(奇轍)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다. 고려조에서 무맥(武脈)을 자랑했던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조선조에 와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명문세가(名門勢家)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시조의 11세손 세칭(世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동천(東泉) 김 제의 고제(高弟)로서 학행(學行)이 뛰어났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정 암(靜唵)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많은 사림(士林)이 화(禍)를 입게 되자 과거의 뜻을 단념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력했으며, 그의 아들 첨(詹)은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 使)를 지내고,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사청을 거절하였다고 하여 체직(遞職)되었다. 첨(詹)은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서흠, 장흠(長欽), 대흠(大欽)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했으며,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던 수흠(守欽)은 그의 청백(淸白)함이 지금도 일화로 구전되고 있다.
     인조(仁祖) 때의 명신(名臣) 서흠은 1610년 (광해군 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인조(仁祖) 초에 함경도 선유어사(咸鏡道 宣諭御史)를 거쳐 사예(司藝), 광주 목사(廣州牧使), 좌승지(左承旨) 등을 지내고 사직했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했다
     뒤에 양양 부사(襄陽府使)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참찬관(參贊官), 좌우승지(左右承旨), 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한 후 1650년(효종 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이 배다른 아우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을 죽이려 할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이를 반대하다가 청풍 군수(淸風郡守)로 좌천되었던 장흠(長欽)은 1613년(광해군 5)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향리로 돌아갔다. 그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등용된 그는 승지(承旨)와 판결사(判決事),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거쳐 1641년(인조 19)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막내 대흠(大欽)은 1605년(선조 3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나 광해군이 난정을 개탄하고 벼슬을 버린 후 낙향했다가 1624년(인조 2) 이 괄(李适)의 난에 영의정(領議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워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랐으며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고, 특히 시문(詩文)에 능했다. 장흠의 아들로 숙부(叔父)인 대흠에게 입양(入養)한 행선(行善)은 인조(仁祖) 때 등과하여 병조(兵曹)의 좌랑(佐郞)과 지평(持平), 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응교(應校)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淸)나라를 다녀왔으며,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쳐 효종(孝宗) 초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서흠의 아들 내선(來善)은 일찍이 미수 허 목(許穆)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효종 초에 문과에 올라 대사헌(大司憲)과 예조(禮曹) 및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680년(숙종 6)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한때 삭직되기도 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공을 세워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그외 장흠의 손자 창명(昌明)은 숙부(叔父)인 내선(來善)과 함께 숙종(肅宗) 때 남인(南人)의 중진(重鎭)으로 유명했으며, 조우(祖禹)의 아들 만중(萬中)은 영조(英祖)와 순조(純祖) 대에 걸쳐 대사간(大司諫)과 판서(判書)를 지냈다. 우리나라 목씨(睦氏)의 분포사항은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4167명, 1975년 때는 1192가구, 그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721가구, 70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2304
  • 초계,밀양 변씨(草溪, 密陽卞氏)
    초계,밀양 변씨(草溪, 密陽卞氏)

     초계(草溪)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합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때 초계(草溪)로 개칭하였고, 1018 년(현종 9)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을 두었으며 1316년(충숙왕 3)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있다.
      변씨(卞氏)는 중국(中國) 천수(天水:지금의 감숙성 위천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인 숙진탁(叔振鐸)이 조후(曹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변읍(卞邑)을 하사(下賜) 받아 지명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변씨(卞氏)는 당(唐)나라 천보년간(天寶年間:742∼755)에 예부 상서(禮部尙書)을 지낸 변 원(卞 源)이 743년(경덕왕 2) 왕명(王命)을 받들어 8학사의 한 사람으로「효경(孝經)」을 가지고 동래(東來), 신라(新羅)에 정착(定着)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고려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초계(草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시조 정실의 아들 광(光:장파)·요(耀:중파)·휘(輝:계파) 3형제를 기점으로 크게 3갈래로 갈라졌다.
     그후 시조의 둘째 아들인 요(耀)의 손자 고적(高迪)이 밀양(密陽)에 시거(始居)함으로써 밀양 변씨(密陽卞氏)로 분적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초계(草溪)·밀양(密陽) 외에도 원주(原州)·팔계(八溪)·진주(晋州)·청주(淸州)·경주(慶州)·장성(長城)·남원(南原) 등 44개 파(派)로 분관(分貫)되었으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종의(宗議)에 따라 합보(合譜)를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일찍이 영남내륙과 호남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의 집안으로 명성을 떨친 변씨(卞氏)는 시조의 맏아들 광(光)의 후손인 장파(長派)가 변씨일문의 6할을 차지하여 영남과 호남지방에  많이 살고, 둘째 아들 요(耀)의 후손 중파(仲派)는 경상도(慶尙道) 지방에, 막내 휘(輝)의 후손인 계파(季派)는 합천군(陜川郡)을 중심으로 집중 세거하며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첫째 장파(長派)에서는 시중(侍中) 광의 8세손 남룡(南龍)이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직산(稷山)에 은거(隱居)한 후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아들 7형제가 현달했다.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장남 혼( )은 사복시 주부(司僕시主簿)을 역임했고, 둘째 순(純)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을 거쳐 연안 부사
    (延安府使)로 나가 장흥 부사(長興府使)였던 아우 타( ), 참판(參判) 굉(紘)과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다섯째 아들인 효문(孝文)은 태종(太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로 일본(日本)에 다녀왔고,「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했으며「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했다. 한편 효문의 증손 형량(亨良:감의 아들)은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로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무장(茂長)에 유배되었다가 효수(梟首) 당했으며, 승세(承世)의 아들 훈남(勳男)은 군수(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종(明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연안공(延安公) 순(純)의 증손 준(雋:훈련원 부정 옥곤의 아들)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사등공신( 靖國四等功臣)에 책록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를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라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으며, 참봉(參奉) 유청(惟淸)의 아들 시민(時敏)은 선조(先祖) 때 경흥부사(慶興府使)과 낙안 군수(樂安郡守)을 거쳐 남원 영장(南原營將)을 역임했고, 유명(惟明)의 아들 시환(時煥)은 수학(數學)에 정통하고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외 형량(亨良)의 둘째 아들로 선조(宣祖) 때 효행(孝行)을 떨쳐 정려(旌閭)가 내려졌던 경복(景福)과 <변충효(卞忠孝)>로 불리웠던 시익(時益:경복의  손자)이 유명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마동(麻洞) 창덕궁 부근에 살았던 변지사(卞知事)의 아들 원규(元圭)가 유명했다.원래 원규의 아버지는 북촌에서 민심이 후한 부자로 손꼽혔는데 어몽설하에 삼청동 뒷산지역을 순찰하던 순찰군사에게 쌀밥과 고음국과 용주박에 담은 술을 밤참으로 주었다는 일화가 전하며, 그의 아들 원규(元圭 : 한성부 판윤을 지냄)는 명판윤(名判尹)로 이름났다. 다시 인맥을 소급하여 시조 정실이 둘째 아들 요(耀)의 후손인 중파(仲派:밀양 변씨)에서는 공양왕(恭讓王) 때 호(戶)·병(兵)·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로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에 올랐던 옥란(玉蘭)의 아들 3형제가 대표적이다.
     조선 초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맹량(孟良:옥란의 맏아들)의 아들 필상(必祥)은 좌승지(左承旨)를 지냈으며, 이원계(李元桂:이성계의 이복형)의 사위가 된 중량(仲良)은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王子)의 난에  정도전(鄭道傳)의 일파로 몰려 화(禍)을 입었다.  태종조(太宗朝)의 문형(文衡) 계량(季良)은 옥란의 막내아들로 20여 년 간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며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손꼽혔다. 특히 그는 역대 신하들의 말이나 행실로써 경계가 되고 본받을 만한 것을 모아서 정부상규설(政府相規設)을 저술했으며, 역사상 고집(固執)으로도 유명했다.
     세종(世宗) 명조(明朝)에서 우리나라에 흰 꿩 한 마리를 보내오자 하례하는 표(表)를 계량이 쓰게 되었는데, 글 중에 흰 꿩을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특별히 행을 바꿔, 글자를 띄어서 따로 써야 한다고 하고 대신들은 윗 귀절에 붙이지 아니하고 어찌 띄어서 쓰느냐고 하였으나, 그는 그 존경의 표시로 띄어서 쓴다고 고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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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흥長興 이씨(李氏)
    장흥長興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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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인龍仁 이씨(李氏)
    용인龍仁 이씨(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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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 대씨(密陽大氏)
    밀양 대씨(密陽大氏)

     밀양(密陽)은 경상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원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駕洛國)에 속하였으며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때 와서는 995년(성종 16)에 밀주(密州)로 하였고,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공양왕(恭讓王 : 제 34대 왕, 재위기간 : 1389 ~ 1392) 때 밀양(密陽)으로 개칭되었다. 대씨(大氏)는 중국(中國) 동래(東萊  : 산동성 교동도 봉래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7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걸쳐 만주(滿洲)의 동반부에서 연해주(沿海州)와 한반도 동북에 걸쳐 있었던 발해국(渤海國)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당(唐)나라 무장(武將)인 중상(仲象)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698년 옛 고구려(高句麗) 영토였던 동모산(東牟山)에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발해국(渤海國)을 세우고 228년간 왕권(王權)을 이어 오다가 926년(고려 태조 9) 요(遼 : 거란족의 국가) 나라에게 멸망하자 발해 왕국의 세자(世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망명한 것이 우리나라 대씨(大氏)의 시초가 된다고 한다. 한편 일설(一說)에는 발해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 경왕의 아들, 이름은 대인선)의 아들 대 탁(大 鐸)이 발해국이 망하자 자손들을 거느리고 밀양(密陽)에 토착하여 밀양 대씨(密陽大氏)의 연원(淵源)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대씨(大氏)의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을 비롯하여 대산(大山 : 경남 김해지방)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선계(先系)와 연원(淵源)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밀양 대씨(密陽大氏)는 일세조(一世祖)인 이부 상서(吏部尙書) 탁(鐸)의 아들 덕세(德歲)가 조선조에서 관직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밀양군(密陽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문기(文記)는 한성판윤(漢成判尹)을 역임하여 가맥(家脈)을 이었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중택(重澤)은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한 국언(國彦)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 대씨(密陽大氏)는 남한에 총 115가구, 4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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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소씨(晋州蘇氏)
    진주 소씨(晋州蘇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리웠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손(後孫)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蘇:부소나무)를 심어 소(蘇)를 성(姓)으로 삼고,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 그 후 복해(復解)의 61세손 소 풍(蘇 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하백)에 봉해졌고, 그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신 유(申 有), 진 기(陳 岐) 등과 더불어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백손(伯孫)의 29세손 알천은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상대등(上大等)을 지내고 660년(태종 무열왕 7) 3월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에 이거(移居), 경(慶)으로 개명(改名)하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소씨(蘇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남원(南原), 진강(鎭江:강화지방) 등 12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세거 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의 손자 복서(福瑞)가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 청주 총관(靑州摠管)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억자(億滋)는 성덕왕(聖德王) 때 한주 총관(漢州摠管)을 역임했고, 11세손 격달(格達)이 고려 초에 대장군(大將軍)에 오르는 등 직계(直系)로 구세구장군(九世九將軍)이 배출되어 크케 무명(武名)을 떨쳤다. 한편 청주 도독(靑州都督)을  지낸 목(穆:시조의 8세손)은 문장이 뛰어나 「역대제왕고(歷代帝王考)」, 「유소국사(有蘇國史)」,  「유당견문기(有唐見聞記)」, 「동이씨족원류(東夷氏族源流)」를 저술(著述)했고, 그의 아들 은(恩)은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웅주 도독(熊州都督)을 지내고 저서(著書)로 「진한세가(辰韓世家)」와  「삼소변설(三蘇辨說)」 등을 남겨 문(汶:은의 아들)과 함께 「소씨삼대문장(蘇氏三代文章)」으로 일컬어졌다. 고려 문종(文宗) 때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과 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던 계령(繼 :격달의 현손)은 헌종(獻宗)이 즉위하여 딸이 회순왕후(懷純王后:헌종의 비)로 간택되자 국구(國舅)가 되어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광보(光輔)와 경보(景輔)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고, 경보의 아들 세린(世麟)은 인종(仁宗)에게 <선무팔조(先務八條)>를 상소하여 백성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와 예의렴치(禮義廉恥)를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그 외 고려 때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무신정치(武臣政治)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던 경손(慶遜:세린의 손자)과 고종(高宗) 때 몽고병(蒙古兵)과 싸우다가 순절한 함이 뛰어났으며, 정의대부(政議大夫)로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올랐던 희철(希哲)과 정당문학(政堂文學) 문철(文哲)의 형제가 유명했다.
     공민왕(恭愍王) 때 개성윤(開城尹)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했던 을경(乙卿:희철의 증손, 판도판서 약우의 맏아들)과 정몽주(鄭夢周)의 고제(高弟)로 사재감 소윤(司宰監少尹)을 지낸 천(遷)은 고려말에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손자 현손(玄孫)은 성종(成宗) 때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지냈다. 한편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자파(自坡)의 일곱 아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크게 위세(威勢)를 떨쳤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둘째 아들 세량(世良)은 용담 현령(龍潭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으며, 삼사(三司)의 벼슬을 두루역임한 후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부모(父母)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내려갔다. 그의 아우 세양(世讓:자파의 다섯째 아들)은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주서(注書),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수찬(修撰)에 올라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移葬)케 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 사인(舍人), 교리(校理),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치고 사성(司成)이 되어 영접사(迎接使) 이 행(李 荇)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明)나라 사신(使臣)을 맞아 시문(詩文)으로 응답하여 문명(文名 )을 떨쳤다. 그후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하여 성주(星州)의 사고(史庫)가 불타자 왕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해서 봉안했으며, 인종(仁宗)이 즉위하여 대윤(大尹)인 윤 임(尹任) 일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명종(明宗)이 즉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윤 임 등이 제거된 후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내다가 전라도 익산(全羅道益山)에 은거했다. 특히 그는 신용개(申用漑), 남 곤(南 袞) 등과 더불어 중종조의 7대 문형(文衡)인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이 높고 율시(律詩)가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상원 군수(祥原郡守)로 부임하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세영(世榮 : 자언의 아들)은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으며, 상진(尙眞)은 임진왜란 때 성주(星州)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진주성(晋州城)에서 순절한 제(濟)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세웠고, 행진(行震 : 진산의 이현 싸움에서 순절)의 아들 동(仝)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부제학(副堤學) 봉(逢)의 손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진력했던 영복(永福)이 천문(天文), 지리(地理), 경사(經史), 병법(兵法), 의약(醫藥) 등에 정통하여 명성(名聲)을 떨쳤으며, 만선(萬善 : 세공의손자) 의 아들 동도(東道)는 청북어사(淸北御史)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효종(孝宗)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절한 응무(應武)와 함께 이름을 날렸고,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바른말을 잘 했던 두산(斗山)은 권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만 전전하다가 숙종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나갔으나 기사환국 (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배척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외 수구(洙 ), 여유(汝由), 휘식(輝植), 휘면(輝冕), 승규(昇奎) 등이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조선의 학문을 빛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휘태(輝泰)와 천술(千述), 진형(鎭亨), 진우(鎭佑), 휘옥(輝玉), 병원(秉元) 등이 구국의 충정(忠貞 )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진주 소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소씨(晋州蘇氏)는 남한(南韓)에 총 9,191가구, 38,85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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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촌수(寸數) 따지는 법

     촌수는 다른말로 친등(親等)이라고도 한다(민법 985조 1항 ·1000조 2항). 촌수의 본래의 뜻은 손의 마디라는 뜻이다. 촌수가 적으면 많은 것보다 근친임을 의미하며, 또 촌자(寸字)는 친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숙부를 3촌, 종형제(從兄弟)를 4촌이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직계 혈족에 관하여는 촌수로서 대칭(代稱)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다. 촌수를 계산하여 친족간의 원근을 측정하는 입법주의를 세대친등제(世代親等制)라 한다.

    【촌수계산법】 직계친족간에는 세대수를 계산하여 촌수를 산정하고, 방계친족간에는 최근친인 공동시조(共同始祖)에서 각자에 이르는 세수(世數)를 각각 계산하여 그 합계를 친족상호간의 촌수로 한다. 민법의 촌수계산에 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① 직계혈족은 자기로부터 그 직계비속 또는 직계비속에 이르는 세수로써 촌수를 정한다(770조 1항). ② 방계혈족은 자기로부터 동원(同源)의 직계존속에 이르는 세수와 그 동원의 직계존속으로부터 그 직계비속에 이르는 세수를 통산하여 그 촌수를 정한다(770조 2항). ③ 인척(姻戚)은 배우자의 혈족에 대하여는 배우자의 그 혈족에 대한 촌수에 따르고, 혈족의 배우자에 대하여는 그 혈족에 대한 촌수에 따른다(771조). ④ 양자와 양부모 및 그 혈족 ·인척 간의 촌수는 입양한 때부터 혼인중의 출생자의 경우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772조 1항). ⑤ 양자의 배우자 ·직계비속과 그 배우자는 양자의 친계를 기준으로 하여 촌수를 정한다(772조 2항).

    * 직계: 조부·부·자·손과 같이 조부로부터 손자에로 곧바로 이어나가는 관계

    * 방계 : 형제·조카 등과 같이 공통의 조상을 통하여 갈라지는 관계

     

     

     

    남자 (直系)

     





    현조부
    (玄祖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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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촌




    고조부
    (高祖父)


     


    종고조
    (從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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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촌


     


    7촌




    증조부
    (曾祖父)


     


    종증조
    (從曾祖)


     


    재종증조
    (再從曾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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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촌


     


    6촌


     


    8촌




    조부
    (祖父)


     


    종조
    (從祖)


     


    재종조
    (再從祖)


     


    3종조
    (三從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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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촌


     


    5촌


     


    7촌


     


    9촌





    (父)


     


    백숙부
    (伯叔父)


     


    종백숙부
    (從伯叔父)


     


    재종백숙부
    (再從伯叔父)


     


    3종백숙부
    (三從伯叔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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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촌


     


    4촌


     


    6촌


     


    8촌


     


    10촌





    (己)


     


    형,제
    (兄,弟)


     


    종형제
    (從兄弟)


     


    재종형제
    (再從兄弟)


     


    3종형제
    (三從兄弟)


     


    4종형제
    (四從兄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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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촌


     


    5촌


     


    7촌


     


    9촌


     


    11촌




    아들
    (子)


     



    (姪)


     


    종질
    (從姪)


     


    재종질
    (再從姪)


     


    3종질
    (三從姪)


     


    4종질
    (四從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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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촌


     


    6촌


     


    8촌


     


    10촌


     


     




    손자
    (孫)


     


    종손
    (從孫)


     


    재종손
    (從孫)


     


    3종손
    (三從孫)


     


    4종손
    (四從孫)





     

     

    여자 (內從間, 고모계)






    고조
    (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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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촌




    증조
    (曾祖)


     


    증대고모
    (曾大姑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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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촌


     


    6촌





    (祖)


     


    대고모
    (大姑母)


     


    내재종조
    (內再從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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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촌


     


    5촌


     


    7촌





    (父)


     


    고모
    (姑母)


     


    내종숙
    (內從叔)


     


    내재종숙
    (內再從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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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촌


     


    4촌


     


    6촌


     


    8촌





    (己)


     


    자매
    (姉妹)


     


    내종형제
    (內從兄弟)


     


    내재종형제
    (內再從兄弟)


     


    내3종형제
    (內三從兄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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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촌


     


    5촌


     


    7촌


     


    9촌





    (女)


     


    생질
    (甥姪)


     


    내종질
    (內從姪)


     


    내재종질
    (內再從姪)


     


    내3종질
    (內三從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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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촌


     


    6촌


     


    8촌


     


    10촌




    손녀
    (孫女)


     


    이손
    (離孫)


     


    내재종손
    (內再從孫)


     


    내3종손
    (內三從孫)


     


    내4종손
    (內四從孫)





     

     

    외가 (外從間)



     







     


     


     


     


     


     


     




     


    외고조
    (外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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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촌




     


    외증조
    (外曾祖)


     


    외종증조
    (外從曾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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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촌


     


    6촌




     


    외조
    (外祖)


     


    외종조
    (外從祖)


     


    외재종조
    (外再從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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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촌


     


     


     


    3촌


     


    5촌


     


    7촌




    이모
    (姨母)


     



    (母)


     


    외숙
    (外叔)


     


    외종숙
    (外從叔)


     


    외재종숙
    (外再從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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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촌


     


     


     


    4촌


     


    6촌


     


    8촌




    이종형제
    (姨母)


     



    (己)


     


    외종형제
    (外從兄弟)


     


    외재종형제
    (外再從兄弟)


     


    외3종형제
    (外三從兄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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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 제갈씨(南陽諸葛氏)
    남양 제갈씨(南陽諸葛氏)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의 당성군(唐城郡)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高麗) 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고쳤고, 1018 년(현종 9) 수주(水州 : 수원)와 인주(仁州 : 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조(朝鮮朝)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대부면은 부평군(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그 후 수원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었으며, 후에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수원읍은 수원시(水原市)로 승격되었다.
     제갈씨(諸葛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남양제갈씨세보(南陽諸葛氏世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제갈 규(諸葛 珪)는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유명한 제갈 량(諸葛亮 : 제갈공명)의 아버지라 한다. 우리나라 제갈씨는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때 제갈 규(諸葛 珪)의 20대 손으로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이 시조가 된다. 고려(高麗) 고종대(高宗代)에 와서 후손(後孫) 제갈 홍(諸葛 泓)·제갈 형(諸葛 瀅) 두 형제가 복성(復姓)을 서로 한 자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 홍(泓)은 제씨(諸氏)로, 아우 형(瀅)은 갈씨(葛氏)로 분종(分宗)하였다가, 구한말(舊韓末)에 이르러 성씨 환원운동(姓氏還元運動)이 일어나자 일부가 제갈씨(諸葛氏)로 복성(復姓) 했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은(殷)이 고려에서 시랑(侍郞)을 지냈고, 훤(萱)이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했으며, 의병장(義兵將) 제갈 윤신(諸渴允信)은 한말(韓末)에 연기우(延基羽)의 부장(副將)이 되어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철원(鐵原)·평강(平康) 등지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접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戰死)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양 제갈씨(南陽諸葛氏)는 남한(南韓)에 총 830가구, 3,4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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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화 금씨(奉化 琴氏)
     봉화(奉化)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부(北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의 고 사마현(古斯馬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옥마현(玉馬縣)으로 고쳐 내령(奈靈:영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에 봉성현(奉城縣)이 되었다가 1289년(충렬왕 15)에 지금의 명칭인 봉화현(奉化縣)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금씨(琴氏)는 중국(中國) 위국(衛國:지금의 직예성  대명도지방)에 연원(淵源)을 두고 주(周)나라 경왕(景王:제24대 왕, 재위기간:기원전 544∼520) 때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금 우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금씨(琴氏)의 선계(先系)는 고대(古代)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함께 건너온 금 응(琴 應)이란 사람이 우리나라 금씨(琴氏)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하나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으며, 그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태사(太師)를  역임한 금용식(琴容式)을 시조(始祖)로 전하는 기록도 보인다. 
      금씨의 본관(本貫)은 봉화(奉化)를  비롯하여 계양(桂陽:김포의 별호)·안동(安東)·평해(平海)·봉산(鳳山)·문화(文化) 등 6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하나  모두가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정축보(丁丑譜:1937년판)까지 관적(貫籍)을 봉성(鳳城)으로 칭관(稱貫)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봉화(奉化)로 통칭하고 있다.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봉화(奉化)를 중심으로 하는 경북(慶北)지방에 집단세거하며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져 왔다. 
      일세조(一世祖) 의(儀)는 1184년(명종 14)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어사(御史)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고 누차 승진(陞進)하여 1215년(고종 2)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관의 종2품 관계)로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 책록되어 판이부사(判吏府事)에 이르렀으며, 1230년(고종 17) 향년(享年) 78세로 졸하니 왕(王)이 김포(金浦) 봉황산(鳳凰山)에 예장(禮葬)을 명(命)하고 영렬(英烈)이란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묘지(墓地)가 장릉(章陵:고려 원종의 능) 지역인 교산(喬山)의 금표내(禁標內)에 들어간다고 하여 1727년(영조 3)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奉化郡  祥雲面 下訥里)에 설단(設壇)하고 매년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고려조(高麗朝)에서 무신정권(武臣政權)의 핵심인물로 권력을 남용하던 최 우(崔 瑀)에게 죽음으로 항거했던 휘(暉)는 의(儀)의 아들로 노지정(盧之正)·김희제(金熙 ) 등과 함께 억울하게  손위 당한 희종(熙宗:제21대 왕, 재위기간:1204∼1211)의 복위를 모의하다 좌절한 절신(節臣)이며,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 규( )의 7세손 훈(薰)은 원종(元宗)  때 원(元)나라에 가서 제주도(濟州道)에 웅거한 삼별초(三別抄)의 토벌을 위해 원병(援兵)을 요청하고 돌아왔다.
      조선조에 와서는 은진 현감(恩津縣監) 회(淮:시조의 12세손)의 셋째 아들 휘(諱)가 세조(世祖) 때문무(文武) 양과(兩科)에 급제하고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으며, 담양 군사(潭陽郡事) 극해(克諧)의 아들 유(柔)는 태조(太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특히 그는 4읍(四邑)의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稱頌)을 받았는데,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영동(永東)의 신관(新?)에서 그의 사람됨을 칭송하는 시(詩), <금상(琴相)의 은 풍(風)세 일대(一代)의 현인(賢人)일세, 푸른 냇가 누각(樓閣)에서 거문고가  울리도다>를 지었다. 
     선조(宣祖) 때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지내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연구에 몰두하던 난수(蘭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공(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성주 판관(星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재(梓)의 아들 응협(應夾)도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학풍(學風)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첨정(僉正)  원수(元壽)의 아들 보(輔)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조선 선조조(宣祖朝)에 서화가(書畵家)로  명성을 떨쳤으며, 응석(應石)은 자기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救恤)하는데 앞장서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이 「적선정(積善亭)」이라는 편액을 써 주어 덕망을 칭송하였다.
     제천 현감(堤川縣監)을 진낸 응훈(應壎)은 창원 부사(昌原府使)  업, 여주 목사(驪州牧使) 개(愷), 예안 현감(禮安縣監) 상현(尙絃) 등과 함께 학문과 도덕의 전통을 지닌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남한에 총 4,693가구, 19,6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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