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풍천 노씨(豊川盧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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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구을(仇乙) 또는 굴천현(屈遷縣)이었는데, 고려초에 풍주(豊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1018 년(현종 9)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조선 태조(太祖) 때 처음으로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로써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였으며, 태종(太宗)이 풍천(豊川)으로 고쳤다. 그후 은율현(慇栗縣)과 합하여 풍율군( 栗郡)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송화군(松禾郡)에 합하였고, 별칭(別稱)으로 서하 (西河)라 불리기도 하였다.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셋째 아들 노 지(盧址)가 고려조(高麗朝) 에 출사하여 풍천백(豊川伯)에 봉해졌고, 그의 후손 유(裕)는 국자진사(國子進士)로 풍천( 川)에 세거(世居)한 연유로 후손 들이 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풍천(豊川)으로 하게 되었다. 풍천 노씨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세종(世宗) 때 「치평요람(治平요覽)」의 편찬에 참여하여 무명을 떨친 숙동(叔仝)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손자 문명(文明)은 정여창(鄭汝昌)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형 우량(友良), 아우 우영(友英)과 함께 진사시(進士詩)에 합격하여 <삼주(三珠)>로 불리웠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추천으로 현릉 참봉(顯陵參奉)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었다. 한편우명(友明)의 아들 4형재 중 둘째 진(鎭)은 30여 년 간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청백(淸白)하기로 이름났다.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선조조명신편(宣祖朝名臣編)>에 그에 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전한다. 들에 밭이 없고 서울에 집이 없었다.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고, 영호남에서 두번 감사를 역임하였으나 쓸쓸한 객사에서 손(客)이 와도 담요 한 장 없이 지냈으며, 출세를 즐기지 않고, 항상 은퇴의 뜻이 있어 벼슬길에 나온지 30년에 달하였으나 벼슬한 날수는 3년을 차지 못하였다. 특히 그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었을 때도 남다른 척하지 않고 <인망(人望)이 높았다>고 격찬하였으며, 모나게도 살지 말되 또 시풍에 영합하여 때에 따라 겸하였기로 일찌기 이율곡도 처신하며 살지도 말라는 처세신조로 일생을 보냈다. 함양(咸陽)의 효자로도 8도에 소문 났었고, 당대의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선조(宣祖)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증조부 숙동(叔仝)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외 임진왜란 때 동래성(東萊城)을 지키다가 순절한 개방(蓋邦:계동의 6세손)과 인조(仁祖) 때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아 <팔미군자(八美君子)>의 별호(別號)가 붙었던 형하(亨夏:진의 증손)가 유명했고, 우 량(友良)의 6세손 전(군수홍기의 세째 아들)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군비 확장과 변방경비에 눈부신 업적을 남겨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광두(光斗)와 함께 명문의 전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남한에 총 7,978가구, 33,3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 수(盧 穗)의 셋째 아들 노 지(盧址)가 고려조(高麗朝) 에 출사하여 풍천백(豊川伯)에 봉해졌고, 그의 후손 유(裕)는 국자진사(國子進士)로 풍천( 川)에 세거(世居)한 연유로 후손 들이 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풍천(豊川)으로 하게 되었다. 풍천 노씨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세종(世宗) 때 「치평요람(治平요覽)」의 편찬에 참여하여 무명을 떨친 숙동(叔仝)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손자 문명(文明)은 정여창(鄭汝昌)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형 우량(友良), 아우 우영(友英)과 함께 진사시(進士詩)에 합격하여 <삼주(三珠)>로 불리웠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추천으로 현릉 참봉(顯陵參奉)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었다. 한편우명(友明)의 아들 4형재 중 둘째 진(鎭)은 30여 년 간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청백(淸白)하기로 이름났다.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선조조명신편(宣祖朝名臣編)>에 그에 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전한다. 들에 밭이 없고 서울에 집이 없었다.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고, 영호남에서 두번 감사를 역임하였으나 쓸쓸한 객사에서 손(客)이 와도 담요 한 장 없이 지냈으며, 출세를 즐기지 않고, 항상 은퇴의 뜻이 있어 벼슬길에 나온지 30년에 달하였으나 벼슬한 날수는 3년을 차지 못하였다. 특히 그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었을 때도 남다른 척하지 않고 <인망(人望)이 높았다>고 격찬하였으며, 모나게도 살지 말되 또 시풍에 영합하여 때에 따라 겸하였기로 일찌기 이율곡도 처신하며 살지도 말라는 처세신조로 일생을 보냈다. 함양(咸陽)의 효자로도 8도에 소문 났었고, 당대의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선조(宣祖)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증조부 숙동(叔仝)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외 임진왜란 때 동래성(東萊城)을 지키다가 순절한 개방(蓋邦:계동의 6세손)과 인조(仁祖) 때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아 <팔미군자(八美君子)>의 별호(別號)가 붙었던 형하(亨夏:진의 증손)가 유명했고, 우 량(友良)의 6세손 전(군수홍기의 세째 아들)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군비 확장과 변방경비에 눈부신 업적을 남겨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광두(光斗)와 함께 명문의 전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남한에 총 7,978가구, 33,3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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