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성씨,가정의례

본관 목천,장흥 마씨(木川,長興馬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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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2:40 조회 2,06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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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씨(馬氏)는 삼한시대(三韓時代) 부족국가에서 발원(發源)된 우리나라 토착성씨(土着姓氏)로서 마한(馬韓)의 첫 군주(君 主)인 마 겸(馬謙)이 비조(鼻祖)로 알려져 왔으며, 마씨대동보(馬氏大同譜)에는 백제(百濟) 건국의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좌보(左輔)의 벼슬을 역임한 마 려(馬黎)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소목을 밝힐 수 없으므로 마육침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보(系譜)를 잇고 있다. 그는 서기 660년(백제 의자 왕 20, 신라 무열왕 7)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신라(新羅)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百濟)가 멸망하자 군사(軍士)를 일으켜 옛 목지국(目支國)의 성거산(聖居山:충남 직산)을 근거지로 백제 부흥전(復興戰)을 도모했던 장군(將軍)이다. 그후 마씨는 육침의 10세손 점중(占中)이 고려 문종(文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목성군(木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현(鉉:예빈전 태학사를 역임)이 목천파(木川派)로, 둘째 혁인(爀仁:선종 때 개성 윤을 지냄)은 장흥파(長興派)로 분관(分貫)하여 마씨(馬氏)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충청남도 천원군(天原郡)에 속해있는 목천(木川)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에서 와서 목주(木 州)로 고쳤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으로 개칭하여 1913년 천원군(天原郡)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목천파(木川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조(貫祖) 현(鉉)의 8세손 천린(天麟)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복주 (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난가는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보리일등공신(輔理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목안군(木安君)에 봉해졌 으며, 그의 아들 경수(坰秀)는 신안군(新安君)에 봉군되어 고려 말 무신들의 방자함을 견제하다가 미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송도(松都) 선죽교(善竹橋) 옆에 살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던 희경(羲慶: 경주의 9세손)은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선조(宣祖) 때 이율곡(李栗谷)의 천거로 북부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역학(易學)과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일찍이 서경 유수(西京留守) 윤근수(尹根壽)는 송도를 지날 때 그를 찾아와 <난초는 깊은 계곡에 있어도 향기가 절로 배어난다>고 그의 깊이 있는 학문과 고결한 인품에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 효렴(孝廉)으로 극찬을 받았던 희상(羲祥: 희경의 형)의 손자(孫子) 상원(尙遠)은 문장(文章)이 뛰어나 당시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일컫어진 차천로(車天輅) 형제와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워졌다. 희경의 손자 사종(嗣宗:덕룡의 맏아들)은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에게 글을 배웠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서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문학으로는 세상에 사종이 있다.
 이는 서경(西京)의 아유(雅儒)다>라고 칭찬했다고 하며, 주자(朱子)의 가례(家禮)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게 오륜통의(五倫通義)와 사례비요(四禮備要)를 저술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예법을 정립(定立), 윤리도덕의 전서(典書)가 되었다.
 그외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른 인호(仁浩:사종의 종숙)와 영조(英祖) 때 직강(直講)을 지낸 지휘(之徽)가 학유(學諭)를 역임한 맹하(孟河)와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고려 선종(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라남도 남쪽 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오차현(烏次縣)을 신라가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고려 때 영암에 소속되고, 인종(仁宗) 때 장흥부(長興府)에 이어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충선왕조에 와서 다시 장흥부로 개칭,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에 장흥군이 되었다.
 장흥파의 인물로는 관조(貫祖) 혁인의 손자 의유(義裕)가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오르고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희원(熙願)은 희종(熙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낸 지백(智伯:혁인의 7세손)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태종(太宗)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진 치원(致遠)의 아들 영(榮)은 사마봉시경(司馬奉侍卿)을 역임하고 귀향하여 조종(祖宗)이 쌓은 수령산성(遂寧山城)을 보수하여왜구(倭寇)를 막는 한편 후학(後學)에 진력하다가 후에 곡성(谷城) 당상촌(堂上村)으로 이거(移居)하였고, 만년에 수령군(遂寧君)에 추봉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을 도와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된 천목(天牧)은 영(榮)의 아들로 1412년(태종 12) 전라도 병마절제사(全羅道兵馬節制使)를 두 번이나 역임하여 당시 해안(海岸)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항구적(恒久的)인 왜적방어책 (倭賊防禦策)으로 광주(光州)에 있던 병마본영(兵馬本營)을 도강(道康:강진)의 수인산(修因山)으로 옮겨 장수대(將帥臺)를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니, 그 후부터는 왜구가 접근하지 못했다.
 1419년(세종 원년) 북방육진(北方六鎭) 개척(開拓)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여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에 대비(對備)토록 하였고 도성수축도감제조(都城修築都監提調)가 되어 현재 서울 성곽(城郭)을 완축(完築)하는데 공을 세워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맏아들 승(勝)은 세종 때 경상도 수사(慶尙道水使)와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며 청백(淸白)한 관리로 유명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일생동안 문의(文義) 와 충절(忠節)을 지켰다.
 승의 아우 전의 6세손 하수(河秀)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비 아들과 함께 향선(鄕船) 10 여 척으로 이순신을 도우고 특전대를 조직하여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려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낸 반(珊)의 6세손 응방(應房)은 진안 현감(鎭安縣監)으로 동생 응허(應虛:병마도위), 응정(應井) 등과 남원성에서 싸우다가 순국하여 남원(南原)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한편 폭군 연산군(燕山君)의 불의(不義)와 패륜(悖倫)에 항거했던 숭조(崇祖)의 5세손 윤(倫 ), 응훈(應勳), 운종(蕓宗), 창종(昌宗) 5종형제(五從兄弟)가 모두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으로 진주(晋州)의 남강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창종의 아들 인호(仁好)는 남강(南江) 전투에서 순절하여 충의(忠義)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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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4030
  •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78
  • 황보皇甫
    황보皇甫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673
  • 황黃
    황黃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25
  • 후씨(后氏)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68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646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59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790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687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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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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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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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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