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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사천 목씨(泗川睦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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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2-03 12:44 조회 2,30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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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목씨(泗川睦氏)
 사천(泗川)은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우다가 고려(高麗) 때에는 사주(泗州)라 하였으며, 조선조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목씨(睦氏)는 본래 중국(中國) 조군(趙郡: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고대 조나라)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사천(泗川)을 비롯하여 수원(水原), 계양(桂陽:부천 별호), 옥천(沃川), 전주(全州), 남평(南平), 태인(泰仁), 경주(慶州), 다인(多仁:경북 예천지방) 등 9본이 있으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사천(泗川)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일찌기 고려조에서 낭장(郎將), 동정(同正)을 지낸 목효기(睦孝基)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는 고려 말기 에서부터 가문(家門)을 융성하여 많지 않은 인구수로서도 대성(大姓)의 지위를 확보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효기(孝基)의 아들 덕창(德昌)이 1269년(원종 10) 교위(校尉)로서 역신 최 탄(崔坦), 한 신(韓愼), 이연령(李延齡)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다가 영주성(靈州城: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였으며, 덕창(德昌)의 아들 준평(俊平)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진사(進士) 충달(忠達)의 아들 인길(仁吉)은 공민왕(恭愍王)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侍從)하고, 1359년(공민왕 8) 기 철(奇轍)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다. 고려조에서 무맥(武脈)을 자랑했던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조선조에 와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명문세가(名門勢家)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시조의 11세손 세칭(世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동천(東泉) 김 제의 고제(高弟)로서 학행(學行)이 뛰어났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정 암(靜唵)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많은 사림(士林)이 화(禍)를 입게 되자 과거의 뜻을 단념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력했으며, 그의 아들 첨(詹)은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 使)를 지내고,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사청을 거절하였다고 하여 체직(遞職)되었다. 첨(詹)은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서흠, 장흠(長欽), 대흠(大欽)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했으며,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던 수흠(守欽)은 그의 청백(淸白)함이 지금도 일화로 구전되고 있다.
 인조(仁祖) 때의 명신(名臣) 서흠은 1610년 (광해군 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인조(仁祖) 초에 함경도 선유어사(咸鏡道 宣諭御史)를 거쳐 사예(司藝), 광주 목사(廣州牧使), 좌승지(左承旨) 등을 지내고 사직했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했다
 뒤에 양양 부사(襄陽府使)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참찬관(參贊官), 좌우승지(左右承旨), 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한 후 1650년(효종 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이 배다른 아우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을 죽이려 할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이를 반대하다가 청풍 군수(淸風郡守)로 좌천되었던 장흠(長欽)은 1613년(광해군 5)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향리로 돌아갔다. 그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등용된 그는 승지(承旨)와 판결사(判決事),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거쳐 1641년(인조 19)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막내 대흠(大欽)은 1605년(선조 3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나 광해군이 난정을 개탄하고 벼슬을 버린 후 낙향했다가 1624년(인조 2) 이 괄(李适)의 난에 영의정(領議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워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랐으며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고, 특히 시문(詩文)에 능했다. 장흠의 아들로 숙부(叔父)인 대흠에게 입양(入養)한 행선(行善)은 인조(仁祖) 때 등과하여 병조(兵曹)의 좌랑(佐郞)과 지평(持平), 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응교(應校)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淸)나라를 다녀왔으며,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쳐 효종(孝宗) 초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서흠의 아들 내선(來善)은 일찍이 미수 허 목(許穆)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효종 초에 문과에 올라 대사헌(大司憲)과 예조(禮曹) 및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680년(숙종 6)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한때 삭직되기도 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공을 세워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그외 장흠의 손자 창명(昌明)은 숙부(叔父)인 내선(來善)과 함께 숙종(肅宗) 때 남인(南人)의 중진(重鎭)으로 유명했으며, 조우(祖禹)의 아들 만중(萬中)은 영조(英祖)와 순조(純祖) 대에 걸쳐 대사간(大司諫)과 판서(判書)를 지냈다. 우리나라 목씨(睦氏)의 분포사항은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4167명, 1975년 때는 1192가구, 그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721가구, 70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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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의 姓氏 본관(本貫)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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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賈


    간簡


     


    갈葛


    감甘


     


    강姜


    강康


    강强


    강彊


     


    강剛




    개介


     


    견堅


    견甄


    경慶


    경景


    계桂


    고高


    곡曲


    공孔


    공公


    곽郭




    구具


    구丘


     


    국國


    국菊


    군君


    궁弓





    권權


    근斤


    금琴


    기奇




    기箕


    길吉


    김金


    나羅


    남궁南宮


    남南


    낭浪


     


    내乃


    내奈


    노盧




    노魯


     


    노路


    뇌雷


    뇌賴


    단段


    단端


    당唐


    대大


    도都


    도陶


    도道




    독고獨孤


    돈頓


    돈敦


    동董


    동방東方


    두杜


     


    류柳


    마馬


    마麻




    만萬


    매梅


    맹孟


    명明


    모牟


    모毛


    목睦


     


    묵墨


    문文


    미米


    민閔




     


    박朴


    반潘


    반班


    방方


    방房


    방龐


    방邦


    배裵


     


    백白


    범范




    범凡





    변卞


    복卜


    봉奉


    봉鳳


    부夫


    비丕


    빈彬


    빈賓





    사史




    사謝


     


    사공司空


    사씨舍氏


    삼森


    상尙


    서徐


    서西


    서문西門




    석石


    석昔


    선宣


    선우鮮于


    설薛





    섭葉


    성成


    성星


     


    소蘇




    소邵


    손孫


    송宋


    송松


     


    수水


    수洙


    순舜


    순淳


    순荀


    순順


    승承




    승昇


    시施


    시柴


     


    신申


    신辛


    신愼


    심沈


     


    아阿


    안安


    애艾




    야夜


    양梁


    양楊


    양樑


    양襄


    어魚


    엄嚴


    여呂


    여余


    여汝


    연延


    연燕




    연連


    염廉


    염閻


    영影


    영永


    예芮


    오吳


    오伍


     


    옥玉


    온溫


    옹邕




    옹雍


    왕王


    요姚


    용龍


    우禹


    우于


     


    운芸


    운雲


    원元


    원袁


    위韋




    위魏


    유劉


    유兪


    유庾


     


    육陸


    윤尹


    은殷


    은恩


    음陰


    응應


     




    이李


    이伊


    이異


    인印


    임林


    임任


    자慈


    장張


    장蔣


    장章


    장莊


    전全




    전田


    전錢


    점占


    정鄭


    정丁


    정程


    제諸


    제갈諸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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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황보씨(黃州黃甫氏)

     黃州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冬忽)이다. 주요성씨로 황보(皇甫)·황(黃)·동(董)·변(邊)·최(崔)씨 등이 있었다. 黃州黃甫氏는 영천황보(永川皇甫)에서 분적(分籍)하여 黃州를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시조는 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으로 태위(太尉)를 지냈다.
     이들의 1930년대 분포사항을 보면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인제리에 122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78
  • 황보皇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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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씨(后氏)
    후씨(后氏)

     后氏는 본래 중국의 성씨로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났으며 본관(本貫)은〈唐寅〉단본이다.
     1930년 당시 강원도에 3가구가 있었는데, 회양군 상북면 오랑리(淮陽郡 上北面 五郞里)에 살던 후춘성씨(后春成氏)는 그의 11代祖가 중국에서 귀화했다고 전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후씨(后氏)는 나타나지 않아 정확한 가구와 인구수는 알 수 없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468
  •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 화씨(晋陽化氏)

     진양은 진주의 고호로 경상남도의 남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며,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는데 문무왕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라고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로 고쳤다.
     그 뒤 혜공왕 때에 정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다. 995년(성종 14) 전국이 10도로 개편되면서 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시대에는 한때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진주목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으며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 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39년 진주읍이 진주부가 되고 1949년에 부(府) 시(市)로 개칭되었다. 진양 화씨는 중국 낭야 사람인 화명신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명신은 본성이 화씨로서, 조상 대대로 명나라에서 벼슬하던 교목세가의 후손으로 낭야의 화촌대에 살다가 오랑캐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개탄하며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경주에 정착하였다.
     조선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겨 "화씨(花氏)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향화의 의리다"하며 명신을 예우하고 화씨의 성을 하사하고, 경성군에 봉했다. 그러나 상계의 실전으로 계대를 밝히지 못하여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진주에 세거한 후손 섭(燮)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가선대부에 오른 섭(燮)의 아들 봉상(奉祥)과 영조 때 무관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랐으며 가선대부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일취가 유명했다.
     그외 절충장군 동휘와 정릉 참봉 덕봉(德鳳), 통덕랑 윤택(允澤)은 오우장을 지낸 정한·응한, 참판 석한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양 화씨는 남한에 총 400가구, 1,59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646
  • 홍洪
    홍洪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559
  •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 호씨(巴陵胡氏)

     파릉(巴陵)은 악양(岳陽)의 옛 지명(地名)으로, 중국(中國) 호남성(湖南省) 북동 끝에 있는 악양 지구의 현공서(縣公署) 소재지이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여 양자강의 수운(水運)과 경광철도(京廣鐵道) 육운(陸運)이 겹쳐 있어서 호남성의 관문 구실을 한다. 남북조(南北朝) 시대부터 있어 온 옛 도시로 악주성(岳州城) 서문(西門)에 있는 악양루(岳陽樓)는 동정호와 양자강을 전망하는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중국(中國) 안정(安定)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송(宋)나라 때 사람인 호안국(胡安國)의 16세손 호극기(胡克己)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극기(克己)는 명(明)나라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라 1643년(인조 21) 답례사(答禮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되자 "내가
    천조(天朝)에 복명(復命)치 못하고, 조종(祖宗)의 땅이 전란(戰亂)에 짓밝히니 창천(蒼天)도 무심(無心)하다. 차라리 동해(東海)에서 죽을지언정 고국(故國)에는 돌아가지 않으리라"하고 경기도(京畿道) 가평군(加平郡) 대명연(大明淵)에 은거(隱居)했다가, 함경도(咸鏡道) 북청군(北靑郡) 덕성면(德城面) 중장내(中庄內)에 초가(草家)를 지어 '치암우(恥菴禹)'라 이름짓고 여생(餘生)을 보내니, 조선(朝鮮)의 효종(孝宗)이 그의 충성심(忠誠心)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租稅)로 녹(祿)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극기(克己)의 본향지(本鄕地)인 중국(中國) 파릉(巴陵)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기(克己)의 맏아들 제백(濟伯)이 학자(學者)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후손 사룡(士龍)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녹사(綠事)를 지낸 태기(泰起), 충찬위(忠贊衛)에 오른 시악(時악)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릉 호씨(巴陵胡氏)는 남한(南韓)에 총 194가구, 76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790
  •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

     보안(保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扶安)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희안(喜安)으로 고쳐 고부(古阜)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부령현(扶寧縣)의 겸임을 삼았다. 우왕(禑王) 때 보안현(保安縣)을 설치하였으며 1415년(태종 15)에 부안(扶安)에 편입시켰다.
     호씨(扈氏)는 고려(高麗) 창업(創業)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의(扈義)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侯伯濟) 견훤군(甄萱軍)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왕(王 :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보안 호씨(保安扈氏)는 의(義)의 맏아들 호은열(扈殷說)이 광익효절정난안사공신(匡翼效節定難安社功臣)으로 보안군(保安君)에 봉해졌으므로 보안(保安)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
     전주 호씨(全州扈氏)는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明)나라 장군(將軍) 이여송(李如松)의 부장(副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난(亂) 후에 조선에 귀화(歸化)한 호준(扈浚)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보안·전주 호씨(保安·全州扈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가구, 1,2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2-03 조회 3687
  •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 형씨(晋州邢氏)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문무왕(文武王 : 제 30대 왕, 재위기간 : 661 ∼ 681)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靑州)로 개칭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995년(성종 14)에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가 되기도 하였으나 진주목(晋州牧)으로서 서부 경남 일대를 관할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진주시(晋州市)가 되었다. 진주 형씨(晋州邢氏)의 시조(始祖)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인 형옹(邢 )으로 전(傳)한다.
    옹( )은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옹( )은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나라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한 한편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3세손 방(昉)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慶南) 진주(晋州) 반성(班城)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孫子) 공미(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1280년 (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倭軍)을 정벌(征伐)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知 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방(昉)의 현손(玄孫) 찬(贊)이 조선조(朝鮮朝)에서 판도판소(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 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門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 부사(江界府使)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忠淸道兵馬使)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學問)으로 이름 났으며, 협(浹)은 효종(孝宗) 때 판중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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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玄
    현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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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許
    허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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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씨(海氏)
    해씨(海氏)

     해씨(海氏)는 중국(中國) 설군(薛郡 : 산동성 제령도에 있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오계(五季 : 중국 고대 다섯 왕조를 달리 일컫던 말) 때 사람인 해진명(海眞明)과 인종(仁宗) 때 중궁(中宮)이었던 해수자(海壽者)란 사람이 사기(史記)에 등장된 인물이다.
     우리 나라 해씨(海氏)의 본관(本貫)은 영해(寧海)와 김해(金海)가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상계 소목(上系昭穆)에 대해서는 미상(未詳)하다.
     193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전남(全南) 영암(靈巖)과 목포·나주(羅州)를 비롯한 경남 김해(金海) 등지에 7가구가 살고 있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80가구, 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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