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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목씨(泗川睦氏)
사천(泗川)은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우다가 고려(高麗) 때에는 사주(泗州)라 하였으며, 조선조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목씨(睦氏)는 본래 중국(中國) 조군(趙郡: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고대 조나라)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사천(泗川)을 비롯하여 수원(水原), 계양(桂陽:부천 별호), 옥천(沃川), 전주(全州), 남평(南平), 태인(泰仁), 경주(慶州), 다인(多仁:경북 예천지방) 등 9본이 있으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사천(泗川)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일찌기 고려조에서 낭장(郎將), 동정(同正)을 지낸 목효기(睦孝基)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는 고려 말기 에서부터 가문(家門)을 융성하여 많지 않은 인구수로서도 대성(大姓)의 지위를 확보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효기(孝基)의 아들 덕창(德昌)이 1269년(원종 10) 교위(校尉)로서 역신 최 탄(崔坦), 한 신(韓愼), 이연령(李延齡)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다가 영주성(靈州城: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였으며, 덕창(德昌)의 아들 준평(俊平)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진사(進士) 충달(忠達)의 아들 인길(仁吉)은 공민왕(恭愍王)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侍從)하고, 1359년(공민왕 8) 기 철(奇轍)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다. 고려조에서 무맥(武脈)을 자랑했던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조선조에 와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명문세가(名門勢家)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시조의 11세손 세칭(世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동천(東泉) 김 제의 고제(高弟)로서 학행(學行)이 뛰어났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정 암(靜唵)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많은 사림(士林)이 화(禍)를 입게 되자 과거의 뜻을 단념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력했으며, 그의 아들 첨(詹)은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 使)를 지내고,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사청을 거절하였다고 하여 체직(遞職)되었다. 첨(詹)은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서흠, 장흠(長欽), 대흠(大欽)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했으며,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던 수흠(守欽)은 그의 청백(淸白)함이 지금도 일화로 구전되고 있다.
인조(仁祖) 때의 명신(名臣) 서흠은 1610년 (광해군 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인조(仁祖) 초에 함경도 선유어사(咸鏡道 宣諭御史)를 거쳐 사예(司藝), 광주 목사(廣州牧使), 좌승지(左承旨) 등을 지내고 사직했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했다
뒤에 양양 부사(襄陽府使)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참찬관(參贊官), 좌우승지(左右承旨), 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한 후 1650년(효종 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이 배다른 아우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을 죽이려 할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이를 반대하다가 청풍 군수(淸風郡守)로 좌천되었던 장흠(長欽)은 1613년(광해군 5)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향리로 돌아갔다. 그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등용된 그는 승지(承旨)와 판결사(判決事),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거쳐 1641년(인조 19)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막내 대흠(大欽)은 1605년(선조 3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나 광해군이 난정을 개탄하고 벼슬을 버린 후 낙향했다가 1624년(인조 2) 이 괄(李适)의 난에 영의정(領議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워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랐으며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고, 특히 시문(詩文)에 능했다. 장흠의 아들로 숙부(叔父)인 대흠에게 입양(入養)한 행선(行善)은 인조(仁祖) 때 등과하여 병조(兵曹)의 좌랑(佐郞)과 지평(持平), 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응교(應校)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淸)나라를 다녀왔으며,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쳐 효종(孝宗) 초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서흠의 아들 내선(來善)은 일찍이 미수 허 목(許穆)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효종 초에 문과에 올라 대사헌(大司憲)과 예조(禮曹) 및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680년(숙종 6)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한때 삭직되기도 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공을 세워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그외 장흠의 손자 창명(昌明)은 숙부(叔父)인 내선(來善)과 함께 숙종(肅宗) 때 남인(南人)의 중진(重鎭)으로 유명했으며, 조우(祖禹)의 아들 만중(萬中)은 영조(英祖)와 순조(純祖) 대에 걸쳐 대사간(大司諫)과 판서(判書)를 지냈다. 우리나라 목씨(睦氏)의 분포사항은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4167명, 1975년 때는 1192가구, 그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721가구, 70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천(泗川)은 경상남도 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우다가 고려(高麗) 때에는 사주(泗州)라 하였으며, 조선조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목씨(睦氏)는 본래 중국(中國) 조군(趙郡: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고대 조나라)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문헌(文獻)에 전해지는 본관(本貫)은 사천(泗川)을 비롯하여 수원(水原), 계양(桂陽:부천 별호), 옥천(沃川), 전주(全州), 남평(南平), 태인(泰仁), 경주(慶州), 다인(多仁:경북 예천지방) 등 9본이 있으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사천(泗川)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일찌기 고려조에서 낭장(郎將), 동정(同正)을 지낸 목효기(睦孝基)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는 고려 말기 에서부터 가문(家門)을 융성하여 많지 않은 인구수로서도 대성(大姓)의 지위를 확보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효기(孝基)의 아들 덕창(德昌)이 1269년(원종 10) 교위(校尉)로서 역신 최 탄(崔坦), 한 신(韓愼), 이연령(李延齡)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다가 영주성(靈州城: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였으며, 덕창(德昌)의 아들 준평(俊平)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진사(進士) 충달(忠達)의 아들 인길(仁吉)은 공민왕(恭愍王)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시종(侍從)하고, 1359년(공민왕 8) 기 철(奇轍)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다. 고려조에서 무맥(武脈)을 자랑했던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조선조에 와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명문세가(名門勢家)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시조의 11세손 세칭(世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동천(東泉) 김 제의 고제(高弟)로서 학행(學行)이 뛰어났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정 암(靜唵)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많은 사림(士林)이 화(禍)를 입게 되자 과거의 뜻을 단념하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력했으며, 그의 아들 첨(詹)은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 使)를 지내고,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의 사청을 거절하였다고 하여 체직(遞職)되었다. 첨(詹)은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서흠, 장흠(長欽), 대흠(大欽)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했으며,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던 수흠(守欽)은 그의 청백(淸白)함이 지금도 일화로 구전되고 있다.
인조(仁祖) 때의 명신(名臣) 서흠은 1610년 (광해군 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인조(仁祖) 초에 함경도 선유어사(咸鏡道 宣諭御史)를 거쳐 사예(司藝), 광주 목사(廣州牧使), 좌승지(左承旨) 등을 지내고 사직했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했다
뒤에 양양 부사(襄陽府使)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참찬관(參贊官), 좌우승지(左右承旨), 예조 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한 후 1650년(효종 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이 배다른 아우 영창대군(永昌大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南)을 죽이려 할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이를 반대하다가 청풍 군수(淸風郡守)로 좌천되었던 장흠(長欽)은 1613년(광해군 5)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향리로 돌아갔다. 그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등용된 그는 승지(承旨)와 판결사(判決事),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거쳐 1641년(인조 19)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막내 대흠(大欽)은 1605년(선조 3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나 광해군이 난정을 개탄하고 벼슬을 버린 후 낙향했다가 1624년(인조 2) 이 괄(李适)의 난에 영의정(領議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워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랐으며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고, 특히 시문(詩文)에 능했다. 장흠의 아들로 숙부(叔父)인 대흠에게 입양(入養)한 행선(行善)은 인조(仁祖) 때 등과하여 병조(兵曹)의 좌랑(佐郞)과 지평(持平), 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응교(應校)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淸)나라를 다녀왔으며,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쳐 효종(孝宗) 초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서흠의 아들 내선(來善)은 일찍이 미수 허 목(許穆)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효종 초에 문과에 올라 대사헌(大司憲)과 예조(禮曹) 및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1680년(숙종 6)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한때 삭직되기도 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공을 세워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그외 장흠의 손자 창명(昌明)은 숙부(叔父)인 내선(來善)과 함께 숙종(肅宗) 때 남인(南人)의 중진(重鎭)으로 유명했으며, 조우(祖禹)의 아들 만중(萬中)은 영조(英祖)와 순조(純祖) 대에 걸쳐 대사간(大司諫)과 판서(判書)를 지냈다. 우리나라 목씨(睦氏)의 분포사항은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4167명, 1975년 때는 1192가구, 그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721가구, 70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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