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사천박씨(泗川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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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박씨(泗川朴氏)
사천(泗川)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다가 고려(高麗)때에는 사주(泗州)로 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의 둘째 아들 남환(男桓: 사수 군주)의 후손 인겸(仁謙)이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공부상서(工部尙書)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사주군(泗州君)에 추봉(追封)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사천(泗川)으로 하게 되었다.
그후 인겸의 손자 자문(自文)이 충숙왕(忠肅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사천군(泗川君)에 봉해졌으며, 우왕(禑王)때 어지러운 정국을 피하여 함경남도 안변(咸鏡南道 安邊)을 둔거(遯居)하였다가 영흥(永興)에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자문(自文)을 일세조(一世組)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자문의 아들 양준(良俊)이 향직(鄕職)인 창정(倉正)을 역임했고, 손자 수도(守道)는 총경장군(摠京將軍)으로 무명(武名)을 떨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대재(大材: 양준의 현손)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정용낭장(精勇郎將) 인경(仁景: 자문의 10세손)의 아들 용계(龍桂)가 1469(예종 즉위)에 출생하여 장사랑(將仕郞)으로 의릉참봉(義陵參奉)을 지내고 영흥좌수(永興座首)를 자청하여 선원전(璿源殿) 축성 때 도감(都監)으로 공(功)을 세워 용양위부호군에 올랐으며, 함주군 상조양면 상한리(咸州郡上朝陽面上閒里)로 옮겨 살게 되어 후손들이 입함흥중조(入咸興中祖)로 받들어왔다. 그외 판결사(判決事) 창문(昌文)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던 두문(斗文)·원해(元楷)가 유명했고, 창조(昌朝)는 찰방(察訪)을 역임하여 주부(主簿)를 지낸 영주(永胄)와 더불어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270가구, 1,1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천(泗川)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사물현(史勿縣) 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리다가 고려(高麗)때에는 사주(泗州)로 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되었다가 현재 사천군에 이르고 있다.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의 둘째 아들 남환(男桓: 사수 군주)의 후손 인겸(仁謙)이 고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공부상서(工部尙書)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사주군(泗州君)에 추봉(追封)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사천(泗川)으로 하게 되었다.
그후 인겸의 손자 자문(自文)이 충숙왕(忠肅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 사천군(泗川君)에 봉해졌으며, 우왕(禑王)때 어지러운 정국을 피하여 함경남도 안변(咸鏡南道 安邊)을 둔거(遯居)하였다가 영흥(永興)에 이거(移居)하여 자손들이 자문(自文)을 일세조(一世組)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자문의 아들 양준(良俊)이 향직(鄕職)인 창정(倉正)을 역임했고, 손자 수도(守道)는 총경장군(摠京將軍)으로 무명(武名)을 떨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낸 대재(大材: 양준의 현손)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정용낭장(精勇郎將) 인경(仁景: 자문의 10세손)의 아들 용계(龍桂)가 1469(예종 즉위)에 출생하여 장사랑(將仕郞)으로 의릉참봉(義陵參奉)을 지내고 영흥좌수(永興座首)를 자청하여 선원전(璿源殿) 축성 때 도감(都監)으로 공(功)을 세워 용양위부호군에 올랐으며, 함주군 상조양면 상한리(咸州郡上朝陽面上閒里)로 옮겨 살게 되어 후손들이 입함흥중조(入咸興中祖)로 받들어왔다. 그외 판결사(判決事) 창문(昌文)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던 두문(斗文)·원해(元楷)가 유명했고, 창조(昌朝)는 찰방(察訪)을 역임하여 주부(主簿)를 지낸 영주(永胄)와 더불어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천 박씨(泗川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270가구, 1,1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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