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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음 봉씨(河陰奉氏)
하음(河陰)은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내현(冬音奈縣) 또는 아음현(芽音縣)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에 호음현( 音縣)으로 고쳐 해구군(海口郡)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에 하음현(河陰縣)으로 고쳐 개성(開城)에 속하였으나, 1413년(조선 태종 13) 강화군(江華郡)에 이속되어 현(縣)을 폐하고 강화군에 병합되었다. 하음 봉씨(河陰奉氏)의 시조(始祖) 봉 우(奉 佑)는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위위시경을 지내고 좌복야에 올라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다.
「하음봉씨을축세보(河陰奉氏乙丑世譜)」에 그의 출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기 1106년(고려 예종 1) 어느날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江華郡河岾面長井里) 하음산 기슭의 연못가에 눈부신 광채가 비치더니 이어 석함이 떠올랐다.
마침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가 이상히 여기며 살펴보니 그 속에 용모가 뛰어난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노파가 이 아이를 왕(王)에게 바쳤더니 임금은 궁중(宮中)에서 양육하라는 명(命)을 내린 후 노파가 봉헌(奉獻)했다고 하여 성(姓)을 봉(奉)이라 하고 이름을 우(佑)로 하사(下賜)했다.
그로 인하여 봉씨(奉氏)의 연원(淵源)을 이루게되었으며, 후손들은 봉 우(奉 佑)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가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하음(河陰) 땅의 지명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봉씨의 본관(本貫)은 하음 외에도 강화(江華)·경주(慶州)를 비롯하여 안산(安山)·안성(安城) 등 19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모두가 하음 봉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하음을 제외한 본관(本貫)에 대해서는 상계(上系)가 미상하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우(佑)의 7세손 천우(天祐)가 고려 때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원(元)나라에 피난가는 충숙왕(忠肅王)을 호종(扈從)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을 받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올라 하음부원군(河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질(質)은 전객령(典客令)을 거쳐 합문지후(閤門祗侯)와 판도판서(版圖判書)을 역임하였다. 한편 천우의 손자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유례(由禮:판도판서 문의 아들)는 나랏일로 상소(上疏)를 올려 극간(極諫)을 했으나 실행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學問)을 연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정몽주(鄭夢周), 이 색(李 穡) 등과 교유하며 <도학(道學>의 지종(之宗)>으로 일컬어졌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 여(礪)의 딸이 왕세자비(王世子妃:문종의 비인 순빈)가 되었고 형조(刑曹)를 비롯한 4조(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우 즙(楫 )은 세종조(世宗朝)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아들 여해(汝諧)와 함게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당대의 석학(碩學) 박중림(朴仲林:박팽년의 아버지)에게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동문수학(同門數學)한 여해는 학문이 뛰어나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처남매부간인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순절하여 공주의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그외 성종(成宗) 때 감찰(監察)을 거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을 역임한 원효(元孝:판도판서 문의 증손, 신의 아들)와 세조(世祖) 때 정난이등공신(靖亂二等功臣)로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던 석주(石柱)가 유명했고, 황간 현감(黃澗縣監) 삼산(三山:훈련원 도정을 지낸 장의 아들)의 둘째 아들 천상(天祥)은 1516년(중종 11) 생원(生員)로 <시정책십개조(施政策十個條)>를 상소하여 채택됨에 따라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운 종한(宗翰)·진한(震翰)은 학명(學名)을 떨친 성민(聖民)·경륜(景綸)을 비롯한 효자(孝子) 한정(漢鼎)과 함께 하음 봉씨를 대표했다.
봉씨(奉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5,911명, 1975년에는 1,700가구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469가구, 10,5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음(河陰)은 경기도(京畿道) 강화군(江華郡)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내현(冬音奈縣) 또는 아음현(芽音縣)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에 호음현( 音縣)으로 고쳐 해구군(海口郡)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에 하음현(河陰縣)으로 고쳐 개성(開城)에 속하였으나, 1413년(조선 태종 13) 강화군(江華郡)에 이속되어 현(縣)을 폐하고 강화군에 병합되었다. 하음 봉씨(河陰奉氏)의 시조(始祖) 봉 우(奉 佑)는 고려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위위시경을 지내고 좌복야에 올라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았다.
「하음봉씨을축세보(河陰奉氏乙丑世譜)」에 그의 출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기 1106년(고려 예종 1) 어느날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江華郡河岾面長井里) 하음산 기슭의 연못가에 눈부신 광채가 비치더니 이어 석함이 떠올랐다.
마침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가 이상히 여기며 살펴보니 그 속에 용모가 뛰어난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다. 노파가 이 아이를 왕(王)에게 바쳤더니 임금은 궁중(宮中)에서 양육하라는 명(命)을 내린 후 노파가 봉헌(奉獻)했다고 하여 성(姓)을 봉(奉)이라 하고 이름을 우(佑)로 하사(下賜)했다.
그로 인하여 봉씨(奉氏)의 연원(淵源)을 이루게되었으며, 후손들은 봉 우(奉 佑)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가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하음(河陰) 땅의 지명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봉씨의 본관(本貫)은 하음 외에도 강화(江華)·경주(慶州)를 비롯하여 안산(安山)·안성(安城) 등 19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모두가 하음 봉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하음을 제외한 본관(本貫)에 대해서는 상계(上系)가 미상하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인물로는 우(佑)의 7세손 천우(天祐)가 고려 때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원(元)나라에 피난가는 충숙왕(忠肅王)을 호종(扈從)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을 받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올라 하음부원군(河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맏아들 질(質)은 전객령(典客令)을 거쳐 합문지후(閤門祗侯)와 판도판서(版圖判書)을 역임하였다. 한편 천우의 손자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유례(由禮:판도판서 문의 아들)는 나랏일로 상소(上疏)를 올려 극간(極諫)을 했으나 실행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學問)을 연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정몽주(鄭夢周), 이 색(李 穡) 등과 교유하며 <도학(道學>의 지종(之宗)>으로 일컬어졌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 여(礪)의 딸이 왕세자비(王世子妃:문종의 비인 순빈)가 되었고 형조(刑曹)를 비롯한 4조(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우 즙(楫 )은 세종조(世宗朝)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아들 여해(汝諧)와 함게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당대의 석학(碩學) 박중림(朴仲林:박팽년의 아버지)에게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동문수학(同門數學)한 여해는 학문이 뛰어나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처남매부간인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순절하여 공주의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그외 성종(成宗) 때 감찰(監察)을 거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을 역임한 원효(元孝:판도판서 문의 증손, 신의 아들)와 세조(世祖) 때 정난이등공신(靖亂二等功臣)로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졌던 석주(石柱)가 유명했고, 황간 현감(黃澗縣監) 삼산(三山:훈련원 도정을 지낸 장의 아들)의 둘째 아들 천상(天祥)은 1516년(중종 11) 생원(生員)로 <시정책십개조(施政策十個條)>를 상소하여 채택됨에 따라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운 종한(宗翰)·진한(震翰)은 학명(學名)을 떨친 성민(聖民)·경륜(景綸)을 비롯한 효자(孝子) 한정(漢鼎)과 함께 하음 봉씨를 대표했다.
봉씨(奉氏)는 1960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5,911명, 1975년에는 1,700가구가 있었으며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2,469가구, 10,5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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