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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 상씨(木川尙氏)
목천(木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천원군(天原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 面)이 되었다. 상씨(尙氏)는 본래 중국(中國) 상당(上黨:산서성 기령도 노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상가고(尙可孤)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상씨(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초에 목천 호장(木川戶長)을 지낸 상국진(尙國珍)이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목천상씨갑자대동보(木川尙氏甲子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太祖) 왕건(王建)이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고려를 개국(開國)하자 백제(百濟)의 유민(遺民)들이 목천 상왕산(尙王山)에 웅거(雄據)하여 백제 재건을 위해 수차에 걸쳐 반기를 들자 화가 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가축(家畜)의 이름인 우(牛)·마(馬)·상(象)·돈(豚)·장(獐)으로 사성(賜姓)하였다. 축성(畜姓)으로 사성(賜姓)된 상씨(尙氏)는 국진의 아들 득유(得儒)가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 충(崔 庶)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서 수학(修學)하면서 향역(鄕役)을 면하게 되었고, 본래의 성(姓)인 상씨(尙氏)로 회복(回復)하였다고 한다. 그후 3세손 원(愿)이 급사(給事)를 지내며 임지(任地)를 따라 주거(住居)를 임천(林川)으로 옮겨 10대를 세거하면서 조상(祖上)의 원향지(原鄕地)인 목천(木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후대로 내려와 후손들이 풍덕(豊德)·원주(原州)·부여(扶餘)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파(派)를 이루게 되었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8세손 천석(天錫)이 고려 말에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효충(孝忠)은 조선 초에 충청도 수군우후(忠淸道水軍虞侯)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에 추증되어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 중기에 명상(名相)으로 이름난 범허재(泛虛齋) 진(震)은 목천 상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의 증조부 영부(英孚)가 임천(林川) 합하동(閤下洞)에서 부자(富者)로 살았는데, 재물을 사람들에게 꾸어주고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다가 만년에 그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리며, "내가 후손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아버지 보(甫:안기도 찰방을 지냄)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친히 성주산(聖住山)에서 기도를 드렸더니, 이듬해 그를 낳았다. 그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여덟 살에 아버지마저 잃어서 매부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자랐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관찰사(觀察使), 4조(四曹)의 판서(判書)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우·좌의정(右·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관후한 인품으로 16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고, 명상(名相)으로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청렴과 구휼(救恤)로 일생을 살았던 그는 창고가 무너져서 노비가 수리할 것을 말하면 웃으면서 "네가 비록 고쳐서 완전하게 만들어 놓아도 무엇으로 채우겠느냐" 하였고, 집에 도둑이 들었다가 잡히면 도리어 불쌍히 여겨 "주리고 떨면서 쪼들리다가 부득이 하였구나"하며 훔친 물건을 도로 내어 주면서 "만약 배고프고 추위에 떨거든 반드시 나에게 와서 고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하였으며, 벌레나 짐승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인품이었다. 진의 아들 붕남(鵬南)은 학문(學問)에 깊이가 있어 경사(經史)에 능통했으며 아버지의 음덕(蔭德)으로 높은 벼슬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서(詩書)로 일생을 살았다.
그외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낸 시손(蓍孫:붕남의 아들)과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한 자산(子産)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진의 9세손 동기(東耆:통덕랑)의 둘째 아들 득용(得容)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거쳐 화량진 첨절제사(花梁津僉節制使)에 이르렀으며 경사(經史)를 비롯한 병서(兵書)·천문(天文)·주수(籌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의 전통 가문인 목천 상씨(木川尙氏)를 더욱 빛냈다.
목천(木川)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천원군(天原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 面)이 되었다. 상씨(尙氏)는 본래 중국(中國) 상당(上黨:산서성 기령도 노성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상가고(尙可孤)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상씨(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초에 목천 호장(木川戶長)을 지낸 상국진(尙國珍)이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목천상씨갑자대동보(木川尙氏甲子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太祖) 왕건(王建)이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고려를 개국(開國)하자 백제(百濟)의 유민(遺民)들이 목천 상왕산(尙王山)에 웅거(雄據)하여 백제 재건을 위해 수차에 걸쳐 반기를 들자 화가 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가축(家畜)의 이름인 우(牛)·마(馬)·상(象)·돈(豚)·장(獐)으로 사성(賜姓)하였다. 축성(畜姓)으로 사성(賜姓)된 상씨(尙氏)는 국진의 아들 득유(得儒)가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최 충(崔 庶)이 설치한 구재(九齋)의 하나인 대빙재(待聘齋)에서 수학(修學)하면서 향역(鄕役)을 면하게 되었고, 본래의 성(姓)인 상씨(尙氏)로 회복(回復)하였다고 한다. 그후 3세손 원(愿)이 급사(給事)를 지내며 임지(任地)를 따라 주거(住居)를 임천(林川)으로 옮겨 10대를 세거하면서 조상(祖上)의 원향지(原鄕地)인 목천(木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후대로 내려와 후손들이 풍덕(豊德)·원주(原州)·부여(扶餘)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파(派)를 이루게 되었다.
가문(家門)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8세손 천석(天錫)이 고려 말에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효충(孝忠)은 조선 초에 충청도 수군우후(忠淸道水軍虞侯)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에 추증되어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 중기에 명상(名相)으로 이름난 범허재(泛虛齋) 진(震)은 목천 상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의 증조부 영부(英孚)가 임천(林川) 합하동(閤下洞)에서 부자(富者)로 살았는데, 재물을 사람들에게 꾸어주고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다가 만년에 그 문서를 모두 불살라 버리며, "내가 후손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아버지 보(甫:안기도 찰방을 지냄)가 늙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친히 성주산(聖住山)에서 기도를 드렸더니, 이듬해 그를 낳았다. 그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여덟 살에 아버지마저 잃어서 매부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자랐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관찰사(觀察使), 4조(四曹)의 판서(判書)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우·좌의정(右·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관후한 인품으로 16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고, 명상(名相)으로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청렴과 구휼(救恤)로 일생을 살았던 그는 창고가 무너져서 노비가 수리할 것을 말하면 웃으면서 "네가 비록 고쳐서 완전하게 만들어 놓아도 무엇으로 채우겠느냐" 하였고, 집에 도둑이 들었다가 잡히면 도리어 불쌍히 여겨 "주리고 떨면서 쪼들리다가 부득이 하였구나"하며 훔친 물건을 도로 내어 주면서 "만약 배고프고 추위에 떨거든 반드시 나에게 와서 고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하였으며, 벌레나 짐승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인품이었다. 진의 아들 붕남(鵬南)은 학문(學問)에 깊이가 있어 경사(經史)에 능통했으며 아버지의 음덕(蔭德)으로 높은 벼슬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서(詩書)로 일생을 살았다.
그외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지낸 시손(蓍孫:붕남의 아들)과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한 자산(子産)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진의 9세손 동기(東耆:통덕랑)의 둘째 아들 득용(得容)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거쳐 화량진 첨절제사(花梁津僉節制使)에 이르렀으며 경사(經史)를 비롯한 병서(兵書)·천문(天文)·주수(籌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여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의 전통 가문인 목천 상씨(木川尙氏)를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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