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해주,태인 경씨(海州.泰仁 景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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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泰仁)은 전라북도(全羅北道) 정읍군(井邑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의 태산(泰山 : 대산 또는 대시산이라고도 함)과 고려(高麗)의 인의(仁義)를 합한 명칭(名稱)이다.
우리나라 경씨(景氏)는 중국(中國) 진양(晋陽 : 태원을 달리 일컫는 말)의 초(楚)나라 공족(公族 : 왕공의 동족, 왕족)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은(殷)나라 현인(賢人) 기자(箕子)를 호종(扈從)하여 동래(東來)해 온 경여송(景汝松)이 평양(平壤)에 정착(定着) 함으로써 문호(門戶)가 열렸다고 한다.
경씨(景氏)의 본관(本貫)은 태인(泰仁)과 해주(海州)를 비롯하여 충주(忠州), 경주(慶州), 밀양(密陽), 장연(長淵), 치등(置等 : 전북 순창지방), 능향(綾鄕 : 전북 태인지방), 복흥(福興 : 전북 장수지방)등 10여 개의 관향(貫鄕)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태인(泰仁)과 해주(海州)를 제외한 본관(本貫)은 미상(未詳)이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조(高麗朝)에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 왕명의 출납, 숙위, 군기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종2품 벼슬)를 지내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라 태산군(泰山郡)에 봉해진 경 차(景 磋)를 시조(始祖)로 하고, 사공(司空)을 역임한 상조(祥祖 : 예정의 맏아들)를 태인파(泰仁派)로,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상록(祥祿 : 예정의 차남)을 해주파(海州派)로 하여 가계(家系)를 이어오면서 고려말(高麗末)과 조선전기(朝鮮前期)에 걸쳐 무용(武勇)을 떨침으로써 가문(家門)의 성세(盛勢)를 이루었다.
특히 제조(提調 : 각 사, 또는 청의 관제상의 우두머리가 아닌 사람에게 그 관청의 일을 다스리게 하던 동 1, 2품의 관원)를 지낸 훤(喧)의 아들 세정(世貞)은 활을 잘 쏘아 명성을 날렸고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와 경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훈(功勳)을 세워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으므로 아들 일창(日昌 : 수문전 태학사를 지냄)과 함꼐 이름을 떨쳤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 희(曦)는 벼슬이 태학사(太學士 : 조선 때 홍문관 대제학을 달리 일컫던 말)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한편 응순(應舜)은 통사(通事)로서 임진왜란 때 활동하다가 왜군(倭軍)에게 죽음을 당했고, 기(耆)는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堤學 :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2품 벼슬)을 서쳐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인(寅)과 현감(縣監)을 지낸 극중(克中), 시행(時行 : 어사 청의 아들), 세성(世誠 : 거륜의 아들) 등이 유명했으며, 흔(昕)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판관(判官)을 지낸 덕윤(德潤)과 함께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씨(景氏)는 남한(南韓)에 총 885가구, 3,6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경씨(景氏)는 중국(中國) 진양(晋陽 : 태원을 달리 일컫는 말)의 초(楚)나라 공족(公族 : 왕공의 동족, 왕족)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은(殷)나라 현인(賢人) 기자(箕子)를 호종(扈從)하여 동래(東來)해 온 경여송(景汝松)이 평양(平壤)에 정착(定着) 함으로써 문호(門戶)가 열렸다고 한다.
경씨(景氏)의 본관(本貫)은 태인(泰仁)과 해주(海州)를 비롯하여 충주(忠州), 경주(慶州), 밀양(密陽), 장연(長淵), 치등(置等 : 전북 순창지방), 능향(綾鄕 : 전북 태인지방), 복흥(福興 : 전북 장수지방)등 10여 개의 관향(貫鄕)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태인(泰仁)과 해주(海州)를 제외한 본관(本貫)은 미상(未詳)이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조(高麗朝)에서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 왕명의 출납, 숙위, 군기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종2품 벼슬)를 지내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라 태산군(泰山郡)에 봉해진 경 차(景 磋)를 시조(始祖)로 하고, 사공(司空)을 역임한 상조(祥祖 : 예정의 맏아들)를 태인파(泰仁派)로,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상록(祥祿 : 예정의 차남)을 해주파(海州派)로 하여 가계(家系)를 이어오면서 고려말(高麗末)과 조선전기(朝鮮前期)에 걸쳐 무용(武勇)을 떨침으로써 가문(家門)의 성세(盛勢)를 이루었다.
특히 제조(提調 : 각 사, 또는 청의 관제상의 우두머리가 아닌 사람에게 그 관청의 일을 다스리게 하던 동 1, 2품의 관원)를 지낸 훤(喧)의 아들 세정(世貞)은 활을 잘 쏘아 명성을 날렸고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와 경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훈(功勳)을 세워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으므로 아들 일창(日昌 : 수문전 태학사를 지냄)과 함꼐 이름을 떨쳤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 희(曦)는 벼슬이 태학사(太學士 : 조선 때 홍문관 대제학을 달리 일컫던 말)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한편 응순(應舜)은 통사(通事)로서 임진왜란 때 활동하다가 왜군(倭軍)에게 죽음을 당했고, 기(耆)는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堤學 :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2품 벼슬)을 서쳐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한 인(寅)과 현감(縣監)을 지낸 극중(克中), 시행(時行 : 어사 청의 아들), 세성(世誠 : 거륜의 아들) 등이 유명했으며, 흔(昕)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판관(判官)을 지낸 덕윤(德潤)과 함께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씨(景氏)는 남한(南韓)에 총 885가구, 3,6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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