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김포 공씨(金浦 公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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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金浦)는 경기도 서쪽 한강(漢江) 하구에 위치한 지명으로 일찍이 고구려 시대에는 검포현(黔浦縣)이라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 김포(金浦)로 개칭(改稱)되었다.
공씨(公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노(魯 : 무왕의 아우 주공 단을 시조로 하는 주나라 때의 열국의 하나) 나라의 왕족에서부터 비롯되는데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공하수(公夏守)의 후손 공윤보(公尹輔)가 당(唐)나라 1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 14) 안녹산(安祿山 : 당나라의 장군으로 안사의 난을 일으켰던 사람)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김포에 터를 마련한 것이 우리나라 공씨(公氏)의 시초가 된다.
공씨(公氏)의 본관은 김포와 문천을 비롯하여 창원·개성·인천·풍곡(楓谷 : 영동지방)· 삼계(森溪 : 영광지방)·삼가(三嘉) 등 10 본(本)이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造船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김포 공씨(金浦公氏) 단본(單本)이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고, 모두가 공윤보(公允輔)의 동원혈족(同源血族)이 확실하므로 공윤보가 처음 뿌리를 내린 김포를 관향)으로 삼아 벽동파(碧潼派)·문천파(文川派)·창원파(昌原派)로 계통(系統)을 이었다.
벽동파 명례(明禮)는 1478년 (성종 9) 계공랑(啓功郞 : 종 7품의 문관의 품계)으로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평안도(平安道) 벽동(碧潼)으로 강제 이거당하여 그 곳에서 살면서 벽동파의 시원(始源)을 이루었고, 문천파(文川派) 보언(普彦)은 조선 세조 때 불복신(不服臣)으로 몰려 함경도(咸鏡道) 문천(文川)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되며, 또다른 한 계통(系統)인 창원파(昌原派)는 정승(政丞) 의(義)의 후손들이 누대(累代)로 함안(咸安)에 살다가 창원)에 이거하면서 일파(一派)를 이루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중종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마다 실시하여 문관을 뽑는 과거)에 병과(兵科)로 급제한 규(珪)가 저작(著作)·봉교(奉敎)·정언(正言) 등을 거쳐 전적(典籍 : 성균관의 학생을 지도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 6품 벼슬)에 올랐으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고, 창준(昌俊)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만주의 홍범도(洪範圖) 군대와 합류하여 백두산을 근거지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진원(震遠)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대장으로서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임시정부의 의정의원(議政議員)을 거쳐 광복군 참모(光復軍參謀) 겸 지대장(支隊長)으로 활약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씨(公氏)는 남한에 총 420가구, 1,8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씨(公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노(魯 : 무왕의 아우 주공 단을 시조로 하는 주나라 때의 열국의 하나) 나라의 왕족에서부터 비롯되는데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공하수(公夏守)의 후손 공윤보(公尹輔)가 당(唐)나라 1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 14) 안녹산(安祿山 : 당나라의 장군으로 안사의 난을 일으켰던 사람)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김포에 터를 마련한 것이 우리나라 공씨(公氏)의 시초가 된다.
공씨(公氏)의 본관은 김포와 문천을 비롯하여 창원·개성·인천·풍곡(楓谷 : 영동지방)· 삼계(森溪 : 영광지방)·삼가(三嘉) 등 10 본(本)이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造船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김포 공씨(金浦公氏) 단본(單本)이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고, 모두가 공윤보(公允輔)의 동원혈족(同源血族)이 확실하므로 공윤보가 처음 뿌리를 내린 김포를 관향)으로 삼아 벽동파(碧潼派)·문천파(文川派)·창원파(昌原派)로 계통(系統)을 이었다.
벽동파 명례(明禮)는 1478년 (성종 9) 계공랑(啓功郞 : 종 7품의 문관의 품계)으로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평안도(平安道) 벽동(碧潼)으로 강제 이거당하여 그 곳에서 살면서 벽동파의 시원(始源)을 이루었고, 문천파(文川派) 보언(普彦)은 조선 세조 때 불복신(不服臣)으로 몰려 함경도(咸鏡道) 문천(文川)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되며, 또다른 한 계통(系統)인 창원파(昌原派)는 정승(政丞) 의(義)의 후손들이 누대(累代)로 함안(咸安)에 살다가 창원)에 이거하면서 일파(一派)를 이루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중종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마다 실시하여 문관을 뽑는 과거)에 병과(兵科)로 급제한 규(珪)가 저작(著作)·봉교(奉敎)·정언(正言) 등을 거쳐 전적(典籍 : 성균관의 학생을 지도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 6품 벼슬)에 올랐으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고, 창준(昌俊)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만주의 홍범도(洪範圖) 군대와 합류하여 백두산을 근거지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진원(震遠)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대장으로서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임시정부의 의정의원(議政議員)을 거쳐 광복군 참모(光復軍參謀) 겸 지대장(支隊長)으로 활약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씨(公氏)는 남한에 총 420가구, 1,8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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