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청주 곽씨(淸州 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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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휘(諱): 곽 상(郭 祥), 시중(侍中)
청주(淸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앙(中央)에 위치하는 도청(道廳) 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馬韓)의 땅이었는데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으로도 불리우다가 서기 685년(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에 서원경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에 청주(淸州)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청주 곽씨의 시조(始祖)인 곽 상(郭 祥)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 제 49대 왕, 재위기간 : 875~886) 때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방의 석학(碩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교분(交分)을 나누었다.
「청주곽씨대통보(淸州郭氏大統譜)」에 의하면 그의 후손 원(元)은 996년(고려 성종 15) 문과에 급제하고 현종조(顯宗朝)에 사신(使臣)으로 송나라에 가서 거란의 침입을 전하고 돌아와 형부 시랑(刑部侍郞)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 중서문하성의 종 2품의 벼슬)에 이르렀으며, 원(元)의 손자인 상(尙)은 수사공(守司空)에 올랐다.
한편 여(輿)는 고려 예종(睿宗)과의 세자(世子) 때 친분으로 순복전(純福殿)에 있으면서 왕과 담론을 나누었고,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금주(金州)의 초당(草堂)으로 돌아가자 왕이 성동(城東)의 약두산(若頭山)에 산재(山齋)를 짓게 하고 <허정재(虛靜齋)>로 사액(賜額) 한 후 왕이 산책을 나오면 들러 함께 시(詩)를 읊고 즐겨 세칭 <금문우객(金門羽客)>으로 불리웠다.
그가 죽자 왕은 남호(南湖) 정지상(鄭知常)을 시켜 「산재기(産齋記)」를 써 비를 세워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1255년(고종 42) 문과에 급제한 예(預)는 문충공(文忠公) 탄(坦)의 현손(顯孫)으로 충렬왕(忠烈王) 때 좌승지(左承旨)와 국자감(國子監)의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고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성절사(聖節使 : 중국 황제의 탄일을 축하하러 보내던 사절)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병사했으며, 교서랑(校書郞) 운진(雲鎭)의 아들 인(麟)은 문과에 장원하고 문한서(文翰署)에 속하여 문장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선유사(宣諭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인(麟)의 손자 충수(忠秀)는 헌납(獻納)을 거쳐 대간(臺諫)에 올라 권신 조일신(趙日新)의 비리를 탄핵했고 뒤에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지냈으며, 평장사(平章事) 침의 아들 추(樞)는 조선이 개국된 후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 예문관의 정 2품의 으뜸 벼슬)에 이르렀다.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 충보(忠輔)는 장사길(張思吉)과 함께 문화(文化)와 영녕(永寧)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고, 열(說)은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으며 외숙인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를 남용하므로 이를 극간했으나 듣지 않자 원주로 은퇴하였고, 그의 아들 희태(希泰)는 66세에 등과하여 87세까지 벼슬에 머물렀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스승이었던 시징(始徵)은 집의(執義) 지흠(之欽)의 아들로 어려서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천거로 참봉(參奉)이 되었다.
그 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그 무고함을 상소했으나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태안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여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한말에 와서는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에 몸바친 재기(在驥)가 경남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충렬의 가통을 후세에 전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곽씨(淸州郭氏)는 남한에 총 5,667가구, 24,4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淸州)는 충청북도(忠淸北道) 중앙(中央)에 위치하는 도청(道廳) 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馬韓)의 땅이었는데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으로도 불리우다가 서기 685년(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에 서원경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에 청주(淸州)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청주 곽씨의 시조(始祖)인 곽 상(郭 祥)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 제 49대 왕, 재위기간 : 875~886) 때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방의 석학(碩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교분(交分)을 나누었다.
「청주곽씨대통보(淸州郭氏大統譜)」에 의하면 그의 후손 원(元)은 996년(고려 성종 15) 문과에 급제하고 현종조(顯宗朝)에 사신(使臣)으로 송나라에 가서 거란의 침입을 전하고 돌아와 형부 시랑(刑部侍郞)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 중서문하성의 종 2품의 벼슬)에 이르렀으며, 원(元)의 손자인 상(尙)은 수사공(守司空)에 올랐다.
한편 여(輿)는 고려 예종(睿宗)과의 세자(世子) 때 친분으로 순복전(純福殿)에 있으면서 왕과 담론을 나누었고,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금주(金州)의 초당(草堂)으로 돌아가자 왕이 성동(城東)의 약두산(若頭山)에 산재(山齋)를 짓게 하고 <허정재(虛靜齋)>로 사액(賜額) 한 후 왕이 산책을 나오면 들러 함께 시(詩)를 읊고 즐겨 세칭 <금문우객(金門羽客)>으로 불리웠다.
그가 죽자 왕은 남호(南湖) 정지상(鄭知常)을 시켜 「산재기(産齋記)」를 써 비를 세워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1255년(고종 42) 문과에 급제한 예(預)는 문충공(文忠公) 탄(坦)의 현손(顯孫)으로 충렬왕(忠烈王) 때 좌승지(左承旨)와 국자감(國子監)의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고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성절사(聖節使 : 중국 황제의 탄일을 축하하러 보내던 사절)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병사했으며, 교서랑(校書郞) 운진(雲鎭)의 아들 인(麟)은 문과에 장원하고 문한서(文翰署)에 속하여 문장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선유사(宣諭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인(麟)의 손자 충수(忠秀)는 헌납(獻納)을 거쳐 대간(臺諫)에 올라 권신 조일신(趙日新)의 비리를 탄핵했고 뒤에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지냈으며, 평장사(平章事) 침의 아들 추(樞)는 조선이 개국된 후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 예문관의 정 2품의 으뜸 벼슬)에 이르렀다.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 충보(忠輔)는 장사길(張思吉)과 함께 문화(文化)와 영녕(永寧)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고, 열(說)은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으며 외숙인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를 남용하므로 이를 극간했으나 듣지 않자 원주로 은퇴하였고, 그의 아들 희태(希泰)는 66세에 등과하여 87세까지 벼슬에 머물렀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의 스승이었던 시징(始徵)은 집의(執義) 지흠(之欽)의 아들로 어려서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천거로 참봉(參奉)이 되었다.
그 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그 무고함을 상소했으나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태안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여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한말에 와서는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에 몸바친 재기(在驥)가 경남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충렬의 가통을 후세에 전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곽씨(淸州郭氏)는 남한에 총 5,667가구, 24,4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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