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풍 곽씨(玄風 郭氏)
시조 휘(諱): 곽 경(郭 鏡), 포산군(苞山君)
현풍(玄風)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달성군(達城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추량화현(推良火縣) 또는 삼량화현(三良火縣)이라 하다가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이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王郡 : 창녕군)에 속하게 하였고, 고려초(高麗初)에 현풍현(玄風縣)으로 개칭(改稱)하여 밀양(密陽)에 이속시켰으나 조선조(朝鮮朝)에서 한때 포산(苞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송(宋)나라 귀화성씨(歸化姓氏)로 알려진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중국(中國) 관서(關西) 홍농(弘農) 출신인 곽 경(郭 鏡)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 제 17대 왕, 재위기간 : 1122~1146)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으므로 처음엔 관향(貫鄕)을 포산(苞山)으로 하였으나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포산현(苞山縣)이 현풍(玄風)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현풍(玄風)을 본관(本貫)으로 하게 되었다.
일찍이 영남 내륙(嶺南內陸)에 뿌리를 내린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고려중기(高麗中期)에서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충(忠)·효(孝)·열(烈)의 가통(家統)을 이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代表的)인 도덕 가문(道德家門)으로 알려졌다.
현풍 곽씨(玄風郭氏)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始祖) 포산군(苞山郡)의 현손(玄孫) 기정(其正)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응(膺)은 충렬왕조(忠烈王朝)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냄으로써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된 부는 수사도(守司徒)에 올라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고, 제학(堤學) 원진(元振)의 9세손(世孫) 안방(安邦)은 세종(世宗) 때 해미 현감(海美縣監)과 익산 군수(益山郡守)를 지내면서 청렴한 성품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뒤에 청백리(淸白吏 : 청렴한 벼슬아치)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그의 아들 승화(承華)는 어려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당대의 양재(兩才)로 불리웠다.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특히 안방(安邦)의 현손대(玄孫代)에서 주(走)자 항렬의 8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현곽8주(玄郭8走)>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중 월(越)·율·준 3형제가 빼어났다.
1556년(명종 1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한 월(越)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선조조에서 의주 목사(義州牧使)를 지내며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고,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청송·남원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한편 율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조 식(曺 植)과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학행으로 벼슬에 등용되어 홍산 현감(鴻山縣監)과 예천 군수(醴川郡守)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초계 군수(草溪郡守)로 있으면서 왜군 방어를 잘하여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으로 특진되었으나 군내(郡內)의 유생들이 유임시켜 달라는 상소로 초계 군수에 재임되어,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팔도고을이 초계(草溪)만 같다면야 ....”하고 개탄했을 만큼 선정(善政)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김 면(金 沔)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막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과 함께 호남(湖南)의 목구멍이라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서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무저항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도 그 아버지를 안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했고, 딸 이문호(李文虎)의 아내도 남편이 포로가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일문삼강(一門三綱)>의 가문으로 일컬어져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다.
목사(牧使) 월(越)의 셋째 아들 재우(再祐)는 현풍 곽씨(玄風郭氏)가 자랑하는 인물로 1552년(명종 7) 의령현(宜寧縣) 세천리 외가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일찍이 남명(南溟) 조 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조 식이 자기 외손녀를 재우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재우는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되고 나이 40이 넘자 벼슬을 단념,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 월의 무덤을 찾아가 “아버지께서 만약 계셨다면 왜놈들의 창궐이 어찌 걱정되겠습니까?”하고 울며 하직한 후 임진년 4월 27일에 의병을 일으켜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첩리를 입고 스스로 <천강홍의 대장군(天降洪衣大將軍)>이라 칭하면서 의령·삼가·합천·현풍·창녕·영산 등지에서 크게 무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고 관찰사 김 수와의 불화로 대관(臺官)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이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려 하자 신구(伸求)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혼탁한 조야(朝野)의 기강이 문란함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 비슬산(琵瑟山 : 경상북도 달성군과 청도군 사이에 있는 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솔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밖에 재우(再祐)의 종형(從兄)인 재겸(在謙)은 임진왜란 때 금강 방어에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에는 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싸워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으며, 자방(自防)은 의병장 조 헌(趙 憲)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현풍 곽씨의 의맥(義脈)을 이었다.
고종 때의 거유(巨儒) 종석(鐘錫)은 이 황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이진상(李震相)에게 성리학을 이어받아 이기설(理氣設)을 주장한 학자로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에 은거하다가 3·1운동 때는 전국 유림들의 궐기를 호소했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장서(長書)를 지어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여 충의의 가문인 현풍 곽씨(玄風郭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현풍 곽씨는 남한에 총 30,969가구, 127,3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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