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평해 구씨(平海 丘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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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平海)는 경상북도 울진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근을어현(斤乙於縣)이었던 것을 고려 초에 평해로 고쳤다.
구씨(丘氏)는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인 강태공(姜太公)의 후예(後裔)로 산동성(山東省) 창락현(昌樂縣)에 위치한 영구(營丘)라는 지명의 <구(久)> 자(字)를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하남성(河南省)에 연원을 두고 제태공(齊太公)이 봉해진 땅이름 영구의 <구(邱)> 자를 자손들이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나라 구씨(丘氏)는 중국 당나라 사람인 구대림(久大林) 장군이 서기 663년(신라 문무왕 30, 당 고종 용삭 3)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의 월송정(月松亭) 부근에 표착(漂着)하여 해안의 남쪽 언덕 미포(美浦)에 터를 잡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후 600여 년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공민왕조에 이방실(李芳實) 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여 공신에 책훈되고 민부 전서(民部典書 : 6부에 속한 정 3품 벼슬)에 오른 구선혁(丘宣赫)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평해로 삼아 계대하여 왔다.
평해 구씨는 선혁(宣赫)의 아들 천우(天祐)가 판도판서(版圖判書 : 판도사의 으뜸 벼슬)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였는데 맏아들 춘호(春浩)는 사재지사(司宰寺사)를, 차남 춘경(春景)은 판사(判事)를, 셋째 춘서(春瑞)와 막내 춘보(春甫)는 낭장(郎將)을 지냈으며, 그들의 후손에서 가세가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전서공(典書公) 선혁의 현손(顯孫)인 종직(從直)은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등준시(登俊試 : 재상 이하의 문관을 시험하던 과거)에도 합격한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주역(周易)과 경학(經學)에 정통하였으며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일화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성종조 명신편(成宗朝名臣編)>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과거에 올라 교서관(校書館)에 입직하다가 경복궁 서쪽 강녕전(康寧殿) 연못 가운데 있는 경회루의 경치가 절승(絶勝)하다는 말을 듣고 밤중에 연못가를 구경하던 중에 남녀(籃輿 : 뚜껑이 없는 작은 승교)를 타고 산책 나온 세조와 마주쳤다.
그가 황공하여 길 아래에 엎드리자 왕은 그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묻고는 “경전(經典)을 외울 수 있느냐” 하니 “「춘추(春秋)」를 외우겠읍니다.”하고 한 권을 다 외웠다.
왕은 크게 감탄하여 술을 내려 주고서 이튿날 부교리(副校理)에 임명하였다.
하루 아침에 9품직에서 5품직으로 임명하니 삼사(三司 : 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번갈아 글을 올려 극력으로 반대하여 왕은 편전에 나가서 삼사(三司)들을 모두 불러 놓고 「춘추(春秋)」를 외우게 하니 한 사람도 능히 한 구절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종직을 시켜 외우게 하니 1권을 다 외우고 또 다른 질(帙)에서 뽑아 외우게 하니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하면서 청직(淸職)에 올라 있는데 종직(從直)과 같은 사람은 어찌 부교리(副校理)에 해당하지 못하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달손(達孫)과 숙손(夙孫) 형제도 과거에 급제하고 직제학(直提學)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각각 역임하였다.
1464년(세조 9) 춘시문과(春試文科)에 급제한 치곤(致崑)은 첨절제사(僉節制使) 차숭(次崇)의 아들로 집의(執義)를 거쳐 성종 때 강릉 부사(江陵府使)와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인재등용에 관한 부조리를 진언하고 대사헌(대사헌)을 거쳐 한성 좌윤(漢城佐尹)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치강(致崗)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랐다.
한편 치강(致崗)의 아들 영안(永安)은 선술(仙術)의 도인(道人)으로 예종조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과 공리에 뜻을 두지 않았고, 복남(福男)은 임진왜란 때 남원성(南原城)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구씨(丘氏)는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인 강태공(姜太公)의 후예(後裔)로 산동성(山東省) 창락현(昌樂縣)에 위치한 영구(營丘)라는 지명의 <구(久)> 자(字)를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하남성(河南省)에 연원을 두고 제태공(齊太公)이 봉해진 땅이름 영구의 <구(邱)> 자를 자손들이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나라 구씨(丘氏)는 중국 당나라 사람인 구대림(久大林) 장군이 서기 663년(신라 문무왕 30, 당 고종 용삭 3)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의 월송정(月松亭) 부근에 표착(漂着)하여 해안의 남쪽 언덕 미포(美浦)에 터를 잡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후 600여 년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공민왕조에 이방실(李芳實) 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여 공신에 책훈되고 민부 전서(民部典書 : 6부에 속한 정 3품 벼슬)에 오른 구선혁(丘宣赫)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평해로 삼아 계대하여 왔다.
평해 구씨는 선혁(宣赫)의 아들 천우(天祐)가 판도판서(版圖判書 : 판도사의 으뜸 벼슬)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였는데 맏아들 춘호(春浩)는 사재지사(司宰寺사)를, 차남 춘경(春景)은 판사(判事)를, 셋째 춘서(春瑞)와 막내 춘보(春甫)는 낭장(郎將)을 지냈으며, 그들의 후손에서 가세가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전서공(典書公) 선혁의 현손(顯孫)인 종직(從直)은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등준시(登俊試 : 재상 이하의 문관을 시험하던 과거)에도 합격한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주역(周易)과 경학(經學)에 정통하였으며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일화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성종조 명신편(成宗朝名臣編)>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과거에 올라 교서관(校書館)에 입직하다가 경복궁 서쪽 강녕전(康寧殿) 연못 가운데 있는 경회루의 경치가 절승(絶勝)하다는 말을 듣고 밤중에 연못가를 구경하던 중에 남녀(籃輿 : 뚜껑이 없는 작은 승교)를 타고 산책 나온 세조와 마주쳤다.
그가 황공하여 길 아래에 엎드리자 왕은 그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묻고는 “경전(經典)을 외울 수 있느냐” 하니 “「춘추(春秋)」를 외우겠읍니다.”하고 한 권을 다 외웠다.
왕은 크게 감탄하여 술을 내려 주고서 이튿날 부교리(副校理)에 임명하였다.
하루 아침에 9품직에서 5품직으로 임명하니 삼사(三司 : 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번갈아 글을 올려 극력으로 반대하여 왕은 편전에 나가서 삼사(三司)들을 모두 불러 놓고 「춘추(春秋)」를 외우게 하니 한 사람도 능히 한 구절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종직을 시켜 외우게 하니 1권을 다 외우고 또 다른 질(帙)에서 뽑아 외우게 하니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하면서 청직(淸職)에 올라 있는데 종직(從直)과 같은 사람은 어찌 부교리(副校理)에 해당하지 못하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달손(達孫)과 숙손(夙孫) 형제도 과거에 급제하고 직제학(直提學)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각각 역임하였다.
1464년(세조 9) 춘시문과(春試文科)에 급제한 치곤(致崑)은 첨절제사(僉節制使) 차숭(次崇)의 아들로 집의(執義)를 거쳐 성종 때 강릉 부사(江陵府使)와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인재등용에 관한 부조리를 진언하고 대사헌(대사헌)을 거쳐 한성 좌윤(漢城佐尹)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치강(致崗)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올랐다.
한편 치강(致崗)의 아들 영안(永安)은 선술(仙術)의 도인(道人)으로 예종조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과 공리에 뜻을 두지 않았고, 복남(福男)은 임진왜란 때 남원성(南原城)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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