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청주 좌씨(淸州左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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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좌씨(淸州左氏)
청주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는 도청 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의 땅이었는데 백제가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 또는 낭자곡으로 불리우다가 685년(통일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고려 태조조에 청주로 고치고 그 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고종 32) 청주군이 되었으며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시가 되었다.
좌씨는 중국 노나라 때의 태사 좌구명(左丘明)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유명한「春秋左氏傳」을 주석한 대학자이자 유학자로 후배인 공자도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청주 좌씨는 원나라때 중국 변경( 京)에 살다가 고려 말 탐라 목마장의 감목관(監牧官)으로 건너와 정착하게 된 좌형소(左亨蘇)를 시조로 한다.
제주도가 발상지인 좌씨는 형소(亨蘇)가 죽음에 이르러 "사람은 그 뿌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하며 대대로 살아오던 중국 산동성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후손들이 청주를 관향으로 삼았으나, 1922년 조선 호적령에 따라 청주라는 지명이 한국에 없어 음이 이같은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후손들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며, 고려 때의 명의 자이(自以)는 고려 왕후의 중병을 완쾌시켜 이에 탄복한 왕으로부터 그가 살던 한동리(漢東里)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았는데 지금도 그 곳은 <좌가장(左哥場)>으로 불리운다.
후손 시우(時祐)는 한말의 철종(哲宗)과 고종대(高宗代)에 걸쳐 유학으로 학명을 떨쳤으며, 향교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훌륭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좌씨는 남한에 총 455가구, 1,7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는 도청 소재지로서, 원래는 마한의 땅이었는데 백제가 상당현(上黨縣)이라 하였고, 일명 낭비성 또는 낭자곡으로 불리우다가 685년(통일신라 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고려 태조조에 청주로 고치고 그 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고종 32) 청주군이 되었으며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시가 되었다.
좌씨는 중국 노나라 때의 태사 좌구명(左丘明)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유명한「春秋左氏傳」을 주석한 대학자이자 유학자로 후배인 공자도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청주 좌씨는 원나라때 중국 변경( 京)에 살다가 고려 말 탐라 목마장의 감목관(監牧官)으로 건너와 정착하게 된 좌형소(左亨蘇)를 시조로 한다.
제주도가 발상지인 좌씨는 형소(亨蘇)가 죽음에 이르러 "사람은 그 뿌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하며 대대로 살아오던 중국 산동성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후손들이 청주를 관향으로 삼았으나, 1922년 조선 호적령에 따라 청주라는 지명이 한국에 없어 음이 이같은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후손들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며, 고려 때의 명의 자이(自以)는 고려 왕후의 중병을 완쾌시켜 이에 탄복한 왕으로부터 그가 살던 한동리(漢東里)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았는데 지금도 그 곳은 <좌가장(左哥場)>으로 불리운다.
후손 시우(時祐)는 한말의 철종(哲宗)과 고종대(高宗代)에 걸쳐 유학으로 학명을 떨쳤으며, 향교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훌륭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청주 좌씨는 남한에 총 455가구, 1,7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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