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봉화 금씨(奉化 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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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奉化)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부(北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의 고 사마현(古斯馬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옥마현(玉馬縣)으로 고쳐 내령(奈靈:영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에 봉성현(奉城縣)이 되었다가 1289년(충렬왕 15)에 지금의 명칭인 봉화현(奉化縣)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금씨(琴氏)는 중국(中國) 위국(衛國:지금의 직예성 대명도지방)에 연원(淵源)을 두고 주(周)나라 경왕(景王:제24대 왕, 재위기간:기원전 544∼520) 때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금 우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금씨(琴氏)의 선계(先系)는 고대(古代)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함께 건너온 금 응(琴 應)이란 사람이 우리나라 금씨(琴氏)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하나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으며, 그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태사(太師)를 역임한 금용식(琴容式)을 시조(始祖)로 전하는 기록도 보인다.
금씨의 본관(本貫)은 봉화(奉化)를 비롯하여 계양(桂陽:김포의 별호)·안동(安東)·평해(平海)·봉산(鳳山)·문화(文化) 등 6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하나 모두가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정축보(丁丑譜:1937년판)까지 관적(貫籍)을 봉성(鳳城)으로 칭관(稱貫)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봉화(奉化)로 통칭하고 있다.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봉화(奉化)를 중심으로 하는 경북(慶北)지방에 집단세거하며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져 왔다.
일세조(一世祖) 의(儀)는 1184년(명종 14)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어사(御史)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고 누차 승진(陞進)하여 1215년(고종 2)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관의 종2품 관계)로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 책록되어 판이부사(判吏府事)에 이르렀으며, 1230년(고종 17) 향년(享年) 78세로 졸하니 왕(王)이 김포(金浦) 봉황산(鳳凰山)에 예장(禮葬)을 명(命)하고 영렬(英烈)이란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묘지(墓地)가 장릉(章陵:고려 원종의 능) 지역인 교산(喬山)의 금표내(禁標內)에 들어간다고 하여 1727년(영조 3)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奉化郡 祥雲面 下訥里)에 설단(設壇)하고 매년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고려조(高麗朝)에서 무신정권(武臣政權)의 핵심인물로 권력을 남용하던 최 우(崔 瑀)에게 죽음으로 항거했던 휘(暉)는 의(儀)의 아들로 노지정(盧之正)·김희제(金熙 ) 등과 함께 억울하게 손위 당한 희종(熙宗:제21대 왕, 재위기간:1204∼1211)의 복위를 모의하다 좌절한 절신(節臣)이며,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 규( )의 7세손 훈(薰)은 원종(元宗) 때 원(元)나라에 가서 제주도(濟州道)에 웅거한 삼별초(三別抄)의 토벌을 위해 원병(援兵)을 요청하고 돌아왔다.
조선조에 와서는 은진 현감(恩津縣監) 회(淮:시조의 12세손)의 셋째 아들 휘(諱)가 세조(世祖) 때문무(文武) 양과(兩科)에 급제하고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으며, 담양 군사(潭陽郡事) 극해(克諧)의 아들 유(柔)는 태조(太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특히 그는 4읍(四邑)의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稱頌)을 받았는데,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영동(永東)의 신관(新?)에서 그의 사람됨을 칭송하는 시(詩), <금상(琴相)의 은 풍(風)세 일대(一代)의 현인(賢人)일세, 푸른 냇가 누각(樓閣)에서 거문고가 울리도다>를 지었다.
선조(宣祖) 때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지내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연구에 몰두하던 난수(蘭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공(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성주 판관(星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재(梓)의 아들 응협(應夾)도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학풍(學風)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첨정(僉正) 원수(元壽)의 아들 보(輔)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조선 선조조(宣祖朝)에 서화가(書畵家)로 명성을 떨쳤으며, 응석(應石)은 자기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救恤)하는데 앞장서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이 「적선정(積善亭)」이라는 편액을 써 주어 덕망을 칭송하였다.
제천 현감(堤川縣監)을 진낸 응훈(應壎)은 창원 부사(昌原府使) 업, 여주 목사(驪州牧使) 개(愷), 예안 현감(禮安縣監) 상현(尙絃) 등과 함께 학문과 도덕의 전통을 지닌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남한에 총 4,693가구, 19,6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씨(琴氏)는 중국(中國) 위국(衛國:지금의 직예성 대명도지방)에 연원(淵源)을 두고 주(周)나라 경왕(景王:제24대 왕, 재위기간:기원전 544∼520) 때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금 우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금씨(琴氏)의 선계(先系)는 고대(古代)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함께 건너온 금 응(琴 應)이란 사람이 우리나라 금씨(琴氏)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하나 고증(考證)할 문헌이 없으며, 그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태사(太師)를 역임한 금용식(琴容式)을 시조(始祖)로 전하는 기록도 보인다.
금씨의 본관(本貫)은 봉화(奉化)를 비롯하여 계양(桂陽:김포의 별호)·안동(安東)·평해(平海)·봉산(鳳山)·문화(文化) 등 6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하나 모두가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정축보(丁丑譜:1937년판)까지 관적(貫籍)을 봉성(鳳城)으로 칭관(稱貫)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봉화(奉化)로 통칭하고 있다.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봉화(奉化)를 중심으로 하는 경북(慶北)지방에 집단세거하며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져 왔다.
일세조(一世祖) 의(儀)는 1184년(명종 14)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어사(御史)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고 누차 승진(陞進)하여 1215년(고종 2)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관의 종2품 관계)로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 책록되어 판이부사(判吏府事)에 이르렀으며, 1230년(고종 17) 향년(享年) 78세로 졸하니 왕(王)이 김포(金浦) 봉황산(鳳凰山)에 예장(禮葬)을 명(命)하고 영렬(英烈)이란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묘지(墓地)가 장릉(章陵:고려 원종의 능) 지역인 교산(喬山)의 금표내(禁標內)에 들어간다고 하여 1727년(영조 3)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奉化郡 祥雲面 下訥里)에 설단(設壇)하고 매년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고려조(高麗朝)에서 무신정권(武臣政權)의 핵심인물로 권력을 남용하던 최 우(崔 瑀)에게 죽음으로 항거했던 휘(暉)는 의(儀)의 아들로 노지정(盧之正)·김희제(金熙 ) 등과 함께 억울하게 손위 당한 희종(熙宗:제21대 왕, 재위기간:1204∼1211)의 복위를 모의하다 좌절한 절신(節臣)이며,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 규( )의 7세손 훈(薰)은 원종(元宗) 때 원(元)나라에 가서 제주도(濟州道)에 웅거한 삼별초(三別抄)의 토벌을 위해 원병(援兵)을 요청하고 돌아왔다.
조선조에 와서는 은진 현감(恩津縣監) 회(淮:시조의 12세손)의 셋째 아들 휘(諱)가 세조(世祖) 때문무(文武) 양과(兩科)에 급제하고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으며, 담양 군사(潭陽郡事) 극해(克諧)의 아들 유(柔)는 태조(太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특히 그는 4읍(四邑)의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稱頌)을 받았는데,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영동(永東)의 신관(新?)에서 그의 사람됨을 칭송하는 시(詩), <금상(琴相)의 은 풍(風)세 일대(一代)의 현인(賢人)일세, 푸른 냇가 누각(樓閣)에서 거문고가 울리도다>를 지었다.
선조(宣祖) 때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지내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연구에 몰두하던 난수(蘭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공(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성주 판관(星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재(梓)의 아들 응협(應夾)도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심하며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학풍(學風)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첨정(僉正) 원수(元壽)의 아들 보(輔)가 일찍이 당대의 석학(碩學)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조선 선조조(宣祖朝)에 서화가(書畵家)로 명성을 떨쳤으며, 응석(應石)은 자기 재산을 털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救恤)하는데 앞장서서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이 「적선정(積善亭)」이라는 편액을 써 주어 덕망을 칭송하였다.
제천 현감(堤川縣監)을 진낸 응훈(應壎)은 창원 부사(昌原府使) 업, 여주 목사(驪州牧使) 개(愷), 예안 현감(禮安縣監) 상현(尙絃) 등과 함께 학문과 도덕의 전통을 지닌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남한에 총 4,693가구, 19,6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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