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봉산·봉주 지씨(鳳山·鳳州智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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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봉주 지씨(鳳山·鳳州智氏)
봉산은 황해도 중앙 북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때 휴암군 또는 조파의·휴류성 등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 때 서암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봉주(鳳州)로 개칭하여 방서사를 두었으나 현종 때 폐하고 황주(黃州)에 속하게 하였다. 그 후 충렬왕 때 봉양군으로 고쳐 지사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봉주로 개칭하였으며, 조선조에 와서 태종이 봉산군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봉산 지씨의 시조 지채문(智蔡文)은 고려 때의 명장인데,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그는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군이 내침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고, 또 왕의 피난길을 호종하여 신변의 위기를 막아 난이 평정된 후 공으로 토지를 하사받고 무관으로서 우상시(右常侍)를 겸직했다.
후에 상장군(上將軍)·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덕종이 즉위하자 일등공신에 추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봉산(鳳山 : 봉주의 별호)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에는 지씨의 본관을 13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봉주 단본으로 전한다. 시조 채문의 증손 녹연(祿延)은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음보로 벼슬에 올라 동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고 1104년(숙종 9)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전중사어사(殿中寺御史)가 되었으며, 예종 때 내시지후를 거쳐 경상도 안무사(按撫事)·동북면 병마사(兵馬使) 등을 역임한 후 1125년(인조 3) 동지중추밀원사(同知中樞密院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득남(得男)은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 현의 별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능한산성에 들어간 뒤 전세록·김여간·계숭로·임여택 등과 함께 선천의 월봉에서 천 여명의 의병을 모아 적을 대파하였으므로 이름이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산·봉주 지씨는 남한에 총 1,158가구, 4,9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봉산은 황해도 중앙 북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때 휴암군 또는 조파의·휴류성 등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 때 서암군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봉주(鳳州)로 개칭하여 방서사를 두었으나 현종 때 폐하고 황주(黃州)에 속하게 하였다. 그 후 충렬왕 때 봉양군으로 고쳐 지사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봉주로 개칭하였으며, 조선조에 와서 태종이 봉산군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봉산 지씨의 시조 지채문(智蔡文)은 고려 때의 명장인데,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그는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군이 내침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고, 또 왕의 피난길을 호종하여 신변의 위기를 막아 난이 평정된 후 공으로 토지를 하사받고 무관으로서 우상시(右常侍)를 겸직했다.
후에 상장군(上將軍)·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덕종이 즉위하자 일등공신에 추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봉산(鳳山 : 봉주의 별호)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에는 지씨의 본관을 13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봉주 단본으로 전한다. 시조 채문의 증손 녹연(祿延)은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음보로 벼슬에 올라 동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고 1104년(숙종 9)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전중사어사(殿中寺御史)가 되었으며, 예종 때 내시지후를 거쳐 경상도 안무사(按撫事)·동북면 병마사(兵馬使) 등을 역임한 후 1125년(인조 3) 동지중추밀원사(同知中樞密院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득남(得男)은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 현의 별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능한산성에 들어간 뒤 전세록·김여간·계숭로·임여택 등과 함께 선천의 월봉에서 천 여명의 의병을 모아 적을 대파하였으므로 이름이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봉산·봉주 지씨는 남한에 총 1,158가구, 4,9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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