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행주 기씨(幸州 奇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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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幸州)는 경기도(京畿道) 고양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을 신라에서 우왕(遇王) 또는 왕봉(王逢)이라 하였고, 고려초에 행주로 개칭하여 성종 때는 고봉(高峰)·덕양(德陽) 등으로 불리우다가 1413년(조선 태종 13) 고양군이 되었다.
기씨(奇氏)는 중국 하남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대 기자조선(箕子朝鮮)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
기원전 1122년 중국 3대의 하나인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되자 은나라 주왕의 숙부인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나라를 세운 것이 기자조선인데, 기자의 41세손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기준이 배를 타고 금마군(金馬郡 : 지금의 익산군)으로 내려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개칭한 후 50 여 소국(小國)을 통합하여 다스리며 한왕(韓王)이 되었다.
기준의 7세손 기훈(箕勳)은 아들 3현제를 두었는데 우성(友誠)이 덕양(德陽 : 행주) 기씨(奇氏), 우량(友諒)은 상당(上黨 : 청주) 한씨(韓氏), 우평(友平)은 북원(北原 : 평양)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한다.
우성(友誠)은 백제 온조왕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고, 후손들이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도록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1688년(숙종 14) 「무진보(戊辰譜)」를 시작할 때 득성조(得姓祖) 이하의 계대(系代)를 알 수 없어 고려 인종조에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순우(純祐)를 일세조로 하였다.
기씨의 본관(本貫)은 행주와 개성을 비롯하여 풍양(豊壤 : 양주지방)·서원(西原 : 청주의 별호)· 단양(丹陽) 등 21 본(本)까지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행주 기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씨(奇氏)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명문의 기틀을 다지며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역사를 수(繡) 놓았다. 명문의 전통을 이어온 훌륭한 인맥을 살펴보면 중시조 순우의 10 세손 건(虔)이 뛰어났다.
공조 전서(工曹典書) 면(勉)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포의(布衣)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발탁되어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청렴으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지방관(地方官)으로 있을 때 치적(治績)이 훌륭해서 이도(吏道 : 관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수범을 보였다.
그가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 곳에 붕어가 나는 큰 못이 있는데 관리들이 공사간(公私間)에 백성들로 하여금 그 붕어를 잡아 바치라고 하여 민폐가 막심하자 그 못을 붕어 무덤이라고 조롱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가 말하기를 “어찌 내 입맛 때문에 염치를 상할 수 있는가”하며 자신도 먹지 않고 잔치가 아니면 그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평생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는데, 일찍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백성들이 전복 상납으로 괴로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제주에는 부모가 죽으면 언덕이나 구렁에 버리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가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棺)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하루는 꿈 속에 삼백여명이 뜰 아래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폭록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응당 금년에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하였다.
그때까지 그의 아들 3형제가 모두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장령(掌令) 축(軸)이 아들 찬을 낳아 뒤에 찬의 벼슬이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단종조에 수양대군의 야심을 낌새 챈 그가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두문불출하자,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청파 만리현(萬里峴)에 있던 그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으나 청맹(靑盲: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실지는 조금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핑계대고 나가 맞지도 않았다.
세조는 바늘을 가지고 눈을 찌를 것 같이하여 시험하매 그는 눈을 딱 뜨고 보면서도 깜짝하지 않자 세조는 마침내 그를 자신의 정권에 이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알고 돌아갔다고 한다.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진 준(遵)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건(虔)의 증손이자 응교(應敎) 찬의 아들로서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다가 기묘사화로 아산에 귀양, 온성으로 옮겨져 사사(賜死)되었다,
준이 어느날 궐내에서 숙직할 때 관외(關外)로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등 기구한 노정을 전전하면서 율시(律詩) 한 수를 읊되,
「낯선 땅 산과 물은 고향과도 같은데, 하늘 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네. 아득한 검은 구름에 강가 관문이 닫히었고, 고목 나무 잎 지는 소리에 빈 성곽이 쓸쓸하다. 들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치었고, 인가는 멀리 석양 속에 있구나.
가는 배 만리에 돌아오는 돛대 없으니 망망한 벽해에 소식 통하지 못하네」하였다.
홀연히 깨어나 벽에다 꿈 속의 시를 썼다. 얼마 되지 않아서 기묘당적에 관련되어 아산으로 귀양갔다가 온성으로 옮겼는데, 도중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시에 읊은 경치 그대로였다.
말을 멈추고 전일의 꿈 속의 시를 읊을 때 처량하게 흐느끼니 따라 가던 노비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시는 그가 죽은 후에도 선비들간에 크게 애송되었고, 특히 유배지의 선비들을 무척 감상적으로 달래고 울려주는 명시가 되었다고 한다.
선조 때의 명현 대승(大升)은 준(遵)의 조카이며 영상(領相) 자헌(自獻)의 삼촌이다. 그는 어릴 때 시골 서당에 나가 글을 읽었다.
어느날 손님이 연귀(聯句)로서 그의 재주를 시험하려고 밥식(食)자를 넣어 글을 지으라고 하니 「배부르도록 먹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 (食無求飽君子道)」하니 손님이 “너의 끝의 삼촌이 사림의 영수가 되었으니 가업을 이을 사람은 너로구나”하였다.
그는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히고 이조 정랑과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광국삼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었다.
특히 스승인 퇴계 이 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8년동안이나 서신논쟁(書信論爭)을 벌인 일화가 유명하다.
그외 응세(應世)의 아들 자헌(自獻 : 광해군 때 영의정을 역임)과 윤헌(允獻 : 안악군수를 역임)이 유명했고, 정묘호란 때 선천 부사(宣川府事)로 남한산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협과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토산(兎山) 전투에서 전사란 효일(孝一)은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진 정진(正鎭)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말에 와서는 삼연(參衍)이 장성(長城)의 수록산(隨綠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였고, 우만(宇萬)은 조부의 학문을 계승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고종 때 김평묵(金平默) 등과 함꼐 유생을 이끌고 정부의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로 일컬어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 오대신(賣國五大臣)을 저격한 산도(山度)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근섭(近燮)과 함께 충절과 도학을 가통으로 이어온 행주 기씨(幸州奇氏)를 더욱 빛냈다.
오늘날 기씨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전남·북(全南北)에 집중세거(集中世居)하며, 1985년 11월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총 22,689명으로 전체 성씨 중 79위가 된다.
기씨(奇氏)는 중국 하남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대 기자조선(箕子朝鮮)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
기원전 1122년 중국 3대의 하나인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되자 은나라 주왕의 숙부인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나라를 세운 것이 기자조선인데, 기자의 41세손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기준이 배를 타고 금마군(金馬郡 : 지금의 익산군)으로 내려가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개칭한 후 50 여 소국(小國)을 통합하여 다스리며 한왕(韓王)이 되었다.
기준의 7세손 기훈(箕勳)은 아들 3현제를 두었는데 우성(友誠)이 덕양(德陽 : 행주) 기씨(奇氏), 우량(友諒)은 상당(上黨 : 청주) 한씨(韓氏), 우평(友平)은 북원(北原 : 평양)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한다.
우성(友誠)은 백제 온조왕조에서 시중(侍中)을 지냈고, 후손들이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도록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1688년(숙종 14) 「무진보(戊辰譜)」를 시작할 때 득성조(得姓祖) 이하의 계대(系代)를 알 수 없어 고려 인종조에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된 순우(純祐)를 일세조로 하였다.
기씨의 본관(本貫)은 행주와 개성을 비롯하여 풍양(豊壤 : 양주지방)·서원(西原 : 청주의 별호)· 단양(丹陽) 등 21 본(本)까지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행주 기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씨(奇氏)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명문의 기틀을 다지며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역사를 수(繡) 놓았다. 명문의 전통을 이어온 훌륭한 인맥을 살펴보면 중시조 순우의 10 세손 건(虔)이 뛰어났다.
공조 전서(工曹典書) 면(勉)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포의(布衣)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발탁되어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청렴으로 명망이 높았다. 특히 지방관(地方官)으로 있을 때 치적(治績)이 훌륭해서 이도(吏道 : 관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수범을 보였다.
그가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 곳에 붕어가 나는 큰 못이 있는데 관리들이 공사간(公私間)에 백성들로 하여금 그 붕어를 잡아 바치라고 하여 민폐가 막심하자 그 못을 붕어 무덤이라고 조롱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가 말하기를 “어찌 내 입맛 때문에 염치를 상할 수 있는가”하며 자신도 먹지 않고 잔치가 아니면 그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평생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는데, 일찍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백성들이 전복 상납으로 괴로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제주에는 부모가 죽으면 언덕이나 구렁에 버리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가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棺)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하루는 꿈 속에 삼백여명이 뜰 아래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폭록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응당 금년에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하였다.
그때까지 그의 아들 3형제가 모두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장령(掌令) 축(軸)이 아들 찬을 낳아 뒤에 찬의 벼슬이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단종조에 수양대군의 야심을 낌새 챈 그가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두문불출하자,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청파 만리현(萬里峴)에 있던 그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갔으나 청맹(靑盲: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실지는 조금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핑계대고 나가 맞지도 않았다.
세조는 바늘을 가지고 눈을 찌를 것 같이하여 시험하매 그는 눈을 딱 뜨고 보면서도 깜짝하지 않자 세조는 마침내 그를 자신의 정권에 이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알고 돌아갔다고 한다.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진 준(遵)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건(虔)의 증손이자 응교(應敎) 찬의 아들로서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다가 기묘사화로 아산에 귀양, 온성으로 옮겨져 사사(賜死)되었다,
준이 어느날 궐내에서 숙직할 때 관외(關外)로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등 기구한 노정을 전전하면서 율시(律詩) 한 수를 읊되,
「낯선 땅 산과 물은 고향과도 같은데, 하늘 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네. 아득한 검은 구름에 강가 관문이 닫히었고, 고목 나무 잎 지는 소리에 빈 성곽이 쓸쓸하다. 들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치었고, 인가는 멀리 석양 속에 있구나.
가는 배 만리에 돌아오는 돛대 없으니 망망한 벽해에 소식 통하지 못하네」하였다.
홀연히 깨어나 벽에다 꿈 속의 시를 썼다. 얼마 되지 않아서 기묘당적에 관련되어 아산으로 귀양갔다가 온성으로 옮겼는데, 도중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시에 읊은 경치 그대로였다.
말을 멈추고 전일의 꿈 속의 시를 읊을 때 처량하게 흐느끼니 따라 가던 노비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시는 그가 죽은 후에도 선비들간에 크게 애송되었고, 특히 유배지의 선비들을 무척 감상적으로 달래고 울려주는 명시가 되었다고 한다.
선조 때의 명현 대승(大升)은 준(遵)의 조카이며 영상(領相) 자헌(自獻)의 삼촌이다. 그는 어릴 때 시골 서당에 나가 글을 읽었다.
어느날 손님이 연귀(聯句)로서 그의 재주를 시험하려고 밥식(食)자를 넣어 글을 지으라고 하니 「배부르도록 먹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 (食無求飽君子道)」하니 손님이 “너의 끝의 삼촌이 사림의 영수가 되었으니 가업을 이을 사람은 너로구나”하였다.
그는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히고 이조 정랑과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광국삼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었다.
특히 스승인 퇴계 이 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8년동안이나 서신논쟁(書信論爭)을 벌인 일화가 유명하다.
그외 응세(應世)의 아들 자헌(自獻 : 광해군 때 영의정을 역임)과 윤헌(允獻 : 안악군수를 역임)이 유명했고, 정묘호란 때 선천 부사(宣川府事)로 남한산성을 지키다가 순절한 협과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토산(兎山) 전투에서 전사란 효일(孝一)은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진 정진(正鎭)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한말에 와서는 삼연(參衍)이 장성(長城)의 수록산(隨綠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였고, 우만(宇萬)은 조부의 학문을 계승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고종 때 김평묵(金平默) 등과 함꼐 유생을 이끌고 정부의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로 일컬어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 오대신(賣國五大臣)을 저격한 산도(山度)는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근섭(近燮)과 함께 충절과 도학을 가통으로 이어온 행주 기씨(幸州奇氏)를 더욱 빛냈다.
오늘날 기씨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전남·북(全南北)에 집중세거(集中世居)하며, 1985년 11월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총 22,689명으로 전체 성씨 중 79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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