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임구 풍씨(臨 馮氏)
페이지 정보
본문
임구 풍씨(臨 馮氏)
임구(臨 )는 중국 동부 황해(黃海) 연안에 있는 산동성(山東省)의 현(縣)이다.
풍씨(馮氏)는 중국 상당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열 다섯째 아들 필고(畢高)의 후손 필만(畢萬)이 진(晋)나라에서 벼슬을 지내고 위(魏)나라에 봉해졌는데, 이때 식읍(食邑)으로 받은 풍성(馮城)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며, 백가성씨첩(百家姓氏帖)에는 식읍(食邑)을 풍(馮)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우부방변을 떼어 버리고 풍(馮)으로 성(姓)을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풍씨(馮氏)의 시원(始原)은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청주부(淸州府) 임구현(臨 縣) 부정리(富亭里) 출신인 풍삼사(馮三仕)가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淸)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와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이 1645년(인조23) 귀국할 때 배종(陪從)하여 내조(來朝)한 9의사(九義士)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하여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후손들이 풍삼사(馮三仕)를 이어 시조(始祖)로 하고 본향지(本鄕地)인 임구(臨 )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始祖) 삼사(三仕)의 증손(曾孫) 경문(慶文)이 조선 영조(英祖)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으며, 경운의 아들 재검(載儉)은 선략장군(宣略將軍), 용양위부사과(龍 衛副司果)를 역임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어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학조(學祖:재검의 아들)는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임구 풍씨(臨 馮氏)는 남한에 총 112가구, 4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구(臨 )는 중국 동부 황해(黃海) 연안에 있는 산동성(山東省)의 현(縣)이다.
풍씨(馮氏)는 중국 상당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열 다섯째 아들 필고(畢高)의 후손 필만(畢萬)이 진(晋)나라에서 벼슬을 지내고 위(魏)나라에 봉해졌는데, 이때 식읍(食邑)으로 받은 풍성(馮城)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하며, 백가성씨첩(百家姓氏帖)에는 식읍(食邑)을 풍(馮)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우부방변을 떼어 버리고 풍(馮)으로 성(姓)을 삼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풍씨(馮氏)의 시원(始原)은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청주부(淸州府) 임구현(臨 縣) 부정리(富亭里) 출신인 풍삼사(馮三仕)가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淸)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와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이 1645년(인조23) 귀국할 때 배종(陪從)하여 내조(來朝)한 9의사(九義士)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하여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후손들이 풍삼사(馮三仕)를 이어 시조(始祖)로 하고 본향지(本鄕地)인 임구(臨 )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始祖) 삼사(三仕)의 증손(曾孫) 경문(慶文)이 조선 영조(英祖)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으며, 경운의 아들 재검(載儉)은 선략장군(宣略將軍), 용양위부사과(龍 衛副司果)를 역임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어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학조(學祖:재검의 아들)는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임구 풍씨(臨 馮氏)는 남한에 총 112가구, 4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