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해평 길씨(海平 吉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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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海平) 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선산군(善山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파징(波澄)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신라(新羅) 때의 병정현(竝井懸)을 초려초에 해평군(海平郡고)으로 쳐서 복주(福州:안동의 옛 지명)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상주(尙州)와 선산(善山)으로 이속되었다가 1415년(태종 15)에 해평현(海平縣)으로 강등된 후 선산군(善散郡) 해평면(海平面)이 되었다.
길씨(吉氏)의 중국(中國) 풍익(馮翊)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당(唐) 나라에서 귀화(歸化) 해온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길 당(吉 )이 고려(高麗) 문종(文宗)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 우리나라 길씨(吉氏)의 본관(本貫)은 해평(海平)과 개성(開城)을 비롯하여 하음(河陰:강화지방)과 여주(驪州)등 28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모두가 해평 길씨(海平 吉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해평(海平)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해평 길씨는 해평백(海平伯) 길 당(吉 )의 후손에서 1백여년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래 때의 성균진사(成均進士)인 길시우(吉時遇)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일찌기 낙동강변(洛東江邊)에 터를 잡아 고려말에서부터 충절(忠節)과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일컬어진 해평 길씨(海平 吉氏)는 해동(海東)의 절신(絶信) 길 재(吉 再)가 더욱 빛냈다. 고려가 기울기 시작한 1353년(공민왕 2)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박 분(朴 :상산 박씨)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이 색(李 穡)·정몽주(鄭夢周)·권 근(權 近)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도학(道學)을 밝혔다.
그가 여덟 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보성 대판(寶城 大判)으로 임지(任地)에 나갈 때 어머니 김씨(金氏:토산 김씨 희적의 딸)가 따라가면서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우므로 재(再)를 외가에 맡겨두고 갔다.
그는 하루종일 어머니를 사모하여 눈물을 흐리며 남계(南溪)에서 놀다가 석별가(石鱉歌)를 지었다.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도다.
내가 너를 삻아 먹을 줄 알건만.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으므로 너를 놓아 준다"하고 물에다 던져주며 울고 있으니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쫓아와서 끌어안고 감동하여 울었다고 한다. 1386년(우왕 12)에 사마(司馬)에 합격하고 3년 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창왕(昌王) 때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리 사람들이 그 효도를 칭찬하였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 한 후 태종(太宗)은 일찌기 태학관(太學館)에서 시경(詩經)을 읽었던 동문(同門)인 관계로 그를 불러 정종(定宗)에게 아뢰어서 봉상박사(奉常博士)의 벼슬을 주었으나, 그는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고 말하기를 "옛 정(情)으로 부르시니 왔을 뿐 벼슬하는 것은 재(再)의 뜻이 아닙니다."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자네의 말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불역지도(不易之道)이니 그 뜻을 빼앗기기 어려우나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요.
자네에게 벼슬을 준 분은 상(上:정종)이니 상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정종(定宗)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우대하여 보내주고 그 집에 대해서는 납세(納稅)와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태종(太宗)은 "길 재에게 이들이 있다 하니 불러서 등용 시켜 길 재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하니 사순(師舜)을 불러 종묘부승(宗廟副丞)에 제수하였다.
사순이 조정에 불려갈 적에 재(再)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삼대(三代:하·은·주나라) 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니 그 은의(恩義)가 범연(泛然)한데 비할 것이 아니다. 네가 마땅히 나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서 너의 조선임금을 섬겨라." 하였다.
특히 그는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등으로 하여금 학통(學統)을 잇게 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친수를 이루었으며, 「야은집(冶隱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67살에 임종이 가가와지자 부인 신씨(申氏)가 벼슬을 하고 있는 아들 사순(師舜)을 불러 올 것을 권하자 "아비는 임금과 같은 것이다.
임금 옆에 있으면 아비 옆에 있는 것과 같다. 아들은 없어도 있는 것이다."하며 쓸쓸히 일생을 마치고 경북 칠곡군 복삼면 오태동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묻혔다.
그의 묘소 앞 강변의 단애(斷崖: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에는 지주비(砥柱碑)가 서있는데, 중국 황하(黃河)의 탁류를 이겨내는 지주비를 탁본떠와 그대로 전면(前面)에 시기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뒷면의 글을 지어 1587년(선조 20)에 세운 것이다.
그 외 해평 길시를 빛낸 인물(人物)로는 송당(松當) 박 영(朴 英)의 문인(文人)으로 이름난 면지(勉之)의 아들 겸(謙:현감을 역임)과 회(誨)가 유명했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회(誨)는 임진왜란 때 피난가는 대가(大駕) 앞에 길을 막고 엎드려 변방에 왜적의 염탐군이 있어 해침을 받을가 염려되오니 가마대신 말을 타시도록 진언했고, 뒤에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추록되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3·1운동의 주역인 선주(善宙)가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양지부(平壤支部)를 조직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침으로서 충절(忠節)의 가문(家門) 해평 길씨(海平 吉氏)를 더욱 빛냈다.
오늘날 해평 길씨는 경북(慶北) 선산(善山)과 충남(忠南) 금산(錦山)지방에 집중 세거하며 1985년 인구조사 결과 총 7,360가구에 30,390명으로 전체 성씨 중 73위로 나타났다.
길씨(吉氏)의 중국(中國) 풍익(馮翊)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당(唐) 나라에서 귀화(歸化) 해온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길 당(吉 )이 고려(高麗) 문종(文宗)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 우리나라 길씨(吉氏)의 본관(本貫)은 해평(海平)과 개성(開城)을 비롯하여 하음(河陰:강화지방)과 여주(驪州)등 28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모두가 해평 길씨(海平 吉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해평(海平)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해평 길씨는 해평백(海平伯) 길 당(吉 )의 후손에서 1백여년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래 때의 성균진사(成均進士)인 길시우(吉時遇)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일찌기 낙동강변(洛東江邊)에 터를 잡아 고려말에서부터 충절(忠節)과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일컬어진 해평 길씨(海平 吉氏)는 해동(海東)의 절신(絶信) 길 재(吉 再)가 더욱 빛냈다. 고려가 기울기 시작한 1353년(공민왕 2)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박 분(朴 :상산 박씨)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이 색(李 穡)·정몽주(鄭夢周)·권 근(權 近)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도학(道學)을 밝혔다.
그가 여덟 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보성 대판(寶城 大判)으로 임지(任地)에 나갈 때 어머니 김씨(金氏:토산 김씨 희적의 딸)가 따라가면서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우므로 재(再)를 외가에 맡겨두고 갔다.
그는 하루종일 어머니를 사모하여 눈물을 흐리며 남계(南溪)에서 놀다가 석별가(石鱉歌)를 지었다.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도다.
내가 너를 삻아 먹을 줄 알건만.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으므로 너를 놓아 준다"하고 물에다 던져주며 울고 있으니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쫓아와서 끌어안고 감동하여 울었다고 한다. 1386년(우왕 12)에 사마(司馬)에 합격하고 3년 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창왕(昌王) 때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리 사람들이 그 효도를 칭찬하였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 한 후 태종(太宗)은 일찌기 태학관(太學館)에서 시경(詩經)을 읽었던 동문(同門)인 관계로 그를 불러 정종(定宗)에게 아뢰어서 봉상박사(奉常博士)의 벼슬을 주었으나, 그는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고 말하기를 "옛 정(情)으로 부르시니 왔을 뿐 벼슬하는 것은 재(再)의 뜻이 아닙니다."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자네의 말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불역지도(不易之道)이니 그 뜻을 빼앗기기 어려우나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요.
자네에게 벼슬을 준 분은 상(上:정종)이니 상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정종(定宗)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우대하여 보내주고 그 집에 대해서는 납세(納稅)와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태종(太宗)은 "길 재에게 이들이 있다 하니 불러서 등용 시켜 길 재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하니 사순(師舜)을 불러 종묘부승(宗廟副丞)에 제수하였다.
사순이 조정에 불려갈 적에 재(再)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삼대(三代:하·은·주나라) 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니 그 은의(恩義)가 범연(泛然)한데 비할 것이 아니다. 네가 마땅히 나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서 너의 조선임금을 섬겨라." 하였다.
특히 그는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등으로 하여금 학통(學統)을 잇게 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친수를 이루었으며, 「야은집(冶隱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67살에 임종이 가가와지자 부인 신씨(申氏)가 벼슬을 하고 있는 아들 사순(師舜)을 불러 올 것을 권하자 "아비는 임금과 같은 것이다.
임금 옆에 있으면 아비 옆에 있는 것과 같다. 아들은 없어도 있는 것이다."하며 쓸쓸히 일생을 마치고 경북 칠곡군 복삼면 오태동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묻혔다.
그의 묘소 앞 강변의 단애(斷崖: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에는 지주비(砥柱碑)가 서있는데, 중국 황하(黃河)의 탁류를 이겨내는 지주비를 탁본떠와 그대로 전면(前面)에 시기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뒷면의 글을 지어 1587년(선조 20)에 세운 것이다.
그 외 해평 길시를 빛낸 인물(人物)로는 송당(松當) 박 영(朴 英)의 문인(文人)으로 이름난 면지(勉之)의 아들 겸(謙:현감을 역임)과 회(誨)가 유명했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회(誨)는 임진왜란 때 피난가는 대가(大駕) 앞에 길을 막고 엎드려 변방에 왜적의 염탐군이 있어 해침을 받을가 염려되오니 가마대신 말을 타시도록 진언했고, 뒤에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추록되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3·1운동의 주역인 선주(善宙)가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양지부(平壤支部)를 조직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침으로서 충절(忠節)의 가문(家門) 해평 길씨(海平 吉氏)를 더욱 빛냈다.
오늘날 해평 길씨는 경북(慶北) 선산(善山)과 충남(忠南) 금산(錦山)지방에 집중 세거하며 1985년 인구조사 결과 총 7,360가구에 30,390명으로 전체 성씨 중 73위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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