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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김씨(江華金氏)
강화(江華)는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우리나라 다섯번째 섬으로, 일찍이 단군신화(檀君神話)에도 등장한 유서깊은 고장이다. 문헌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불리웠다가 고구려 시대에 혈구군(穴口郡)으로, 신라(新羅) 시대에는 해구군(海口郡)으로 하였다. 그후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강화(江華)로 개칭되었으며, 고려(高麗) 시대 몽고의 침입 때와 조선(朝鮮)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임시수도(臨時首都)의 역할을 하였고, 수도의 관문에 위치한 까닭으로 근세(近世)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 1886년)·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년)·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 1875년) 등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옛날 고려 때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강화 김씨(江華金氏)는 동원(同源)인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면서도 계통(系統)을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첫째, 경순왕 김 부(金 傳)의 셋째 아들인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7세손 성(晟)이 고려 명종(明宗 : 제 19대 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참지정사(參知政事 : 중서문하성의 종2품 벼슬)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하음(河陰 : 강화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개성파(開城派)가 있으며, 둘째는 영분공 명종(鳴鍾)의 18세손 광(光)이 조선 때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堤學 : 경적과 문서를 다루고 왕의 고문에 응하던 관청의 정3품 벼슬)을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올랐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화(禍)를 입고 평안남도 숙천(肅川)에 적거(謫居)하게 되자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여 숙천파(肅川派)의 계통을 이었다. 또 다른 한 계통은 광(光)의 증손(曾孫)으로 조선조(朝鮮朝)에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지낸 송학(松鶴)을 일세조로 하는 의주파(義州派)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성(晟)이 봉군된 하음(河陰)이 강화 (江華)의 옛 지명이므로, 강화(江華)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열거하면 개성파(開城派)의 장생(長生)이 고려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 추밀원의 정3품 벼슬)를 지냈으며, 원벽(元壁)은 문하시중(門下侍中 : 문하성의 최고 벼슬, 종1품)과 찬성사(贊成事)를, 성손(性孫)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조선 때 와서는 상장군 성손(性孫)의 아들로 전라우도 수군우후(全羅右道水軍虞侯)를 지낸 인보(仁輔)와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감찰(監察)을 역임한 의보(義輔), 자인 현감(慈仁縣監) 예보(禮輔),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지보(智輔) 4형제가 유명했다. 그외 삭녕군수(朔寧郡守) 경언(慶彦), 서천 군수(舒川郡守) 경우(慶禹),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준(慶俊) 등이 뛰어났으며, 성범(成範)은 명천 현감(明川縣監)과 수원 판관(水原判官)을 거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우 성헌(成憲)을 서천 군수(舒川郡守)를 거쳐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나갔다. 숙천파(肅川派)의 인물로는 파조(派祖)인 광(光)의 아들 도순(道淳)이 나라의 의식(儀式)을 맡아보던 관청인 통례원(通禮院)의 우통례(右通禮)를 지냈고, 그의 아들 철손(哲遜)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중추원의 정2품 무관직 벼슬)를 역임하여, 부호군(副護軍) 구정(九鼎), 참의(參議 : 조선 때 육조에 속해있던 정3품 벼슬)를 지낸 여전(汝銓)·인순(仁淳)·숭흘(崇屹) 등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한편 의주파(義州派)에서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에 등용되었다가 연산군(燕山君)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禍)를 입은 계후(繼厚)와 정3품 당상관(堂上官) 무관(武官)의 관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른 봉원(鳳元)을 비롯하여 사과(司果) 지정(志禎), 부호군(副護軍) 이 순(履 淳) 등이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화 김씨(江華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343 가구 5,7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화(江華)는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우리나라 다섯번째 섬으로, 일찍이 단군신화(檀君神話)에도 등장한 유서깊은 고장이다. 문헌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불리웠다가 고구려 시대에 혈구군(穴口郡)으로, 신라(新羅) 시대에는 해구군(海口郡)으로 하였다. 그후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강화(江華)로 개칭되었으며, 고려(高麗) 시대 몽고의 침입 때와 조선(朝鮮)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임시수도(臨時首都)의 역할을 하였고, 수도의 관문에 위치한 까닭으로 근세(近世)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 1886년)·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년)·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 1875년) 등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옛날 고려 때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강화 김씨(江華金氏)는 동원(同源)인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면서도 계통(系統)을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첫째, 경순왕 김 부(金 傳)의 셋째 아들인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鍾)의 7세손 성(晟)이 고려 명종(明宗 : 제 19대 왕, 재위기간 : 1170 ∼ 1197) 때 참지정사(參知政事 : 중서문하성의 종2품 벼슬)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하음(河陰 : 강화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개성파(開城派)가 있으며, 둘째는 영분공 명종(鳴鍾)의 18세손 광(光)이 조선 때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堤學 : 경적과 문서를 다루고 왕의 고문에 응하던 관청의 정3품 벼슬)을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올랐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화(禍)를 입고 평안남도 숙천(肅川)에 적거(謫居)하게 되자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여 숙천파(肅川派)의 계통을 이었다. 또 다른 한 계통은 광(光)의 증손(曾孫)으로 조선조(朝鮮朝)에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지낸 송학(松鶴)을 일세조로 하는 의주파(義州派)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성(晟)이 봉군된 하음(河陰)이 강화 (江華)의 옛 지명이므로, 강화(江華)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열거하면 개성파(開城派)의 장생(長生)이 고려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 추밀원의 정3품 벼슬)를 지냈으며, 원벽(元壁)은 문하시중(門下侍中 : 문하성의 최고 벼슬, 종1품)과 찬성사(贊成事)를, 성손(性孫)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조선 때 와서는 상장군 성손(性孫)의 아들로 전라우도 수군우후(全羅右道水軍虞侯)를 지낸 인보(仁輔)와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감찰(監察)을 역임한 의보(義輔), 자인 현감(慈仁縣監) 예보(禮輔),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지보(智輔) 4형제가 유명했다. 그외 삭녕군수(朔寧郡守) 경언(慶彦), 서천 군수(舒川郡守) 경우(慶禹),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준(慶俊) 등이 뛰어났으며, 성범(成範)은 명천 현감(明川縣監)과 수원 판관(水原判官)을 거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우 성헌(成憲)을 서천 군수(舒川郡守)를 거쳐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나갔다. 숙천파(肅川派)의 인물로는 파조(派祖)인 광(光)의 아들 도순(道淳)이 나라의 의식(儀式)을 맡아보던 관청인 통례원(通禮院)의 우통례(右通禮)를 지냈고, 그의 아들 철손(哲遜)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중추원의 정2품 무관직 벼슬)를 역임하여, 부호군(副護軍) 구정(九鼎), 참의(參議 : 조선 때 육조에 속해있던 정3품 벼슬)를 지낸 여전(汝銓)·인순(仁淳)·숭흘(崇屹) 등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한편 의주파(義州派)에서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에 등용되었다가 연산군(燕山君)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禍)를 입은 계후(繼厚)와 정3품 당상관(堂上官) 무관(武官)의 관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른 봉원(鳳元)을 비롯하여 사과(司果) 지정(志禎), 부호군(副護軍) 이 순(履 淳) 등이 가문(家門)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화 김씨(江華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343 가구 5,7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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