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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11
    “인간의 생존과 안락에 필요한 각종 식료품. 의복. 주택 등도 역시 변한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소비되며, 그리고 그것들의 가치는 [그것들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부여하는] 새로운 힘에 재현되어, 생산활동에 다시 사용되는 새로운 자본을 형성한다"(웨일랜드[F. Wayland], ?정치경제학개요?, pp. 31-32). 기타의 모든 기묘한 점들은 문제로 삼지 않더라도, 새로운 힘 속에 재현되는 것은 예컨대 빵의 가격이 아니라 [신체를 형성하는] 빵의 실체이다. 다른 한편으로, 힘의 가치로 재현되는 것은 생활수단이 아니라 생활수단의 가치이다. 동일한 생활수단은 비록 그 값이 반밖에 되지 않더라도 똑같은 양의 근육. 골격. 힘을 생산하지만, 이전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 힘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가치'와 '힘'을 혼동하는 것, 그리고 그의 위선적인 모호함은, 이전에 존재하는 가치의 단순한 재현(再現)으로부터 무리하게 잉여가치(剩餘價値)를 끌어내려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시도를 은폐하고 있다.)
    노동과정의 주체적 요소[즉, 스스로 활동하는 노동]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노동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 행해짐으로써 생산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해 보존하는 동안, 노동의 각 순간마다 추가적 가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등가물을 생산했을 때, 예컨대 그가 6시간의 노동에 의해 3원의 가치를 첨가했을 때, 생산과정이 중단된다고 가정하자. 이 3원이라는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 중 생산수단의 가치로부터 이전된 부분을 넘는 초과분이다. 이 가치는 이 생산과정 내부에서 발생한 유일한 본원적 가치(本源的 價値)이며, 생산물의 가치 중 이 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된 유일한 부분이다. 물론 이 새로운 가치는, 노동력을 구입할 때 자본가가 지출한 화폐, 그리고 노동자가 생활수단의 구매를 위해 지출한 화폐를 대체(代替: replace)할 뿐이다. 이 지출된 화폐 3원에 관해서 보면, 3원이라는 새로운 가치는 재생산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재생산된 것이고, 생산수단의 가치처럼 외관상으로만 재생산된 것[가치가 이전된 것]은 아니다. 한 가치의 다른 가치에 의한 대체는 이 경우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노동과정은 노동력 가치의 단순한 등가물이 재생산되어 노동대상에 첨가되는 점을 넘어 계속된다. 노동력 가치의 등가물을 재생산하는 데는 6시간만으로 충분하지만, 노동과정은 이 6시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12시간 계속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활동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再生産)할뿐 아니라 일정한 초과가치(超過價値)를 생산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의 형성에 소비된 요소들[즉, 생산수단과 노동
    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差異)이다.
    우리는 생산물의 가치형성에서 노동과정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연출하는 상이한 역할들을 설명함으로써, 사실상 자본의 가치증식과정(價値增殖過程: valorization process)에서 상이한 자본요소들이 담당하는 기능(機能)들을 특징지었다. 생산물의 총가치 중 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들의 가치총액을 넘는 초과분은, 증식된 자본 중 최초에 투하된 자본가치를 넘는 초과분이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최초의 자본 가치가 [자기의 화폐형태를 벗어버리고 노동과정의 요소들로 전환할 때] 취하는 상이한 존재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자본 중 생산수단(즉 원료. 보조재료. 노동수단)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량이 변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자본의 불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불변자본(不變資本:constant capital)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 중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가 변동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또 그 이상의 초과분,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역시 변동하며 상황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될 수 있다. 자본의 이 부분은 불변의 크기로부터 끊임없이 가변(可變)의 크기로 전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자본의 가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가변자본(可變資本: variable capital)이라고 부를 것이다. 노동과정의 입장에서는 객체적(客體的) 및 주체적(主體的) 요소[즉, 생산수단과 노동력]로 구별되는 바로 그 자본 요소들이 가치증식과정의 입장에서는 불변자본(不變資本)과 가변자본(可變資本)으로 구별된다.
    위에서 말한 불변자본의 규정은 결코 그 구성부분의 가치변동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가령 1파운드의 면화가 어느 날에는 0.5원이지만 그 다음날에는 면화의 흉작 때문에 1원으로 상승한다고 하자. 계속 가공되고 있는 종전의 면화는 0.5원이라는 가치로 구매된 것이지만, 이제 그것은 생산물에 1원이라는 가치를 이전시킨다. 그리고, 이미 방적된 그리고 벌써 면사의 형태로 시장에서 유통하고 있을 수도 있는 면화도 역시 그 원래의 가치의 2배를 생산물에 이전시킨다. {면화가격
    의 상승 이전에 방적된 면사의 가치도 상승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변동이 방적과정 그 자체의 면화의 가치증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만약 종전의 면화가 아직 방적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제 0.5원이 아니라 1원에 다시 판매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만약 면화가 이미 노동과정에 들어갔다면, 그것이 통과한 노동과정의 단계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면화의 가치가 1원이라는 것은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급격한 가치변동이 일어날 때 가장 적게 가공된 형태에 있는 원료[다시 말해, 직물보다는 면사, 또 면사보다는 면화 그 자체에 투기(投機)하는 것이 투기의 원칙이다. 이 경우 가치의 변동은 면화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면화가 생산수단으로, 따라서 불변자본으로 기능하는 과정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한 상품의 가치는 물론 그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량에 의해 규정되지만, 이 양 자체는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만약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변화한다면-그리하여 동일한 양의 면화가 풍
    작일 때에 비해 흉작일 때 더 많은 노동량을 대표한다면-이것은 이전부터 있던 상품들에 반작용한다. 왜냐하면, 이 상품들은 오직 동일한 종류의 상품의 개별적인 견본(見本)일 따름이며(주석 8: "동일한 종류의 생산물 전체는 엄밀히 말해 한 개의 총체를 이루고, 이 총체의 가격은 부분의 특수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결정된다"(르 트로느[Le Trosne]), ?사회적 이익에 대 해", p. 893).), 특정 시점의 그것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즉, 그 당시의 현존하는 사회적 조건하에서 필요한 노동]에 의해 측정되기 때문이다.
    원료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미 생산과정에서 사용되고 있는 노동수단[즉, 기계 등]의 가치도, 또 따라서 그것들이 생산물에 넘겨주는 가치부분도 변동하는 수가 있다. 만약 새로운 발명에 의해 동일한 종류의 기계설비가 더 적은 노동지출로 생산된다면, 종전의 기계설비는 다소간 감가(減價: depreciate)될 것이며, 따라서 이에 비례하여 더 적은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가치의 변동은 그 기계가 생산수단으로 기능하는 생산과정의 외부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생산과정에서는 그 기계는 [이 과정과는 관계없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이전할 수는 결코 없다,
    생산수단의 가치변동은 [생산수단이 벌써 생산과정에 들어간 뒤에도 반작용하지만] 불변자본으로서의 생산수단의 성격을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비율 변동도 이 두 종류의 자본의 기능상의 차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10명의 노동자가 [적은 가치밖에 없는] 10개의 도구를 가지고 비교적 소량의 원료를 가공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노동과정의 기술적 조건들이 개선되어 단 1명의 노동자가 한 개의 비싼 기계로 100배의 원료를 가공한다고 해보자. 이 경우 불변자본[즉, 사용되는 생산수단의 총가치]은 크게 증가하지만, 노동력에 투하되는 가변자본부분은 크게 감소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변동은 오직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양적 관계[다시 말해, 총자본이 불변적 구성부분과 가변적 구성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비율(比率)]를 변경시킬 뿐이고,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본질상의 차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제 9 장
    잉여가치율



    제 1 절 노동력의 착취도



    투하된 자본 C가 생산과정에서 생산한 잉여가치[즉, 자본가치 C의 증식분]는 우선 생산물의 가치가 그 생산요소들의 가치총액을 넘는 초과분(超過分)으로 나타난다.
    자본 C는 두 부분, 즉 생산수단(生産手段)에 지출되는 화폐액 c와 노동력(勞動力)에 지출되는 화폐액 v펄 구성되어 있다. c는 불변자본(不變資本)으로 전환된 가치부분을 표시하며, v는 가변자본(可變資本)으로 전환된 가치부분을 표시한다. 따라서 최초에는 C=C+v이다. 예컨대 투하자본 500원=410원[c]+90원[v]이다. 생산과정의 끝에 가서 상품(商品)이 나오는데, 그 가치는 c+v+s이며, 여기서 s는 잉여가치(剩餘價値)이다. 예컨대 410원[c]+90원[v]+90원[s]이다. 최초의 자본 C는 C'으
    로, 500원에서 590원으로 되었다. 이 양자 사이의 차액은 s, 즉 90원의 잉여가치이다. 생산요소들의 가치는 투하자본(投下資本)의 가치와 같기 때문에, 생산물가치가 그 생산요소들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超過分)은 투하자본가치의 증식분(增殖分)과 같다든가, 또는 생산된 잉여가치와 같다고 하는 말은 동어반복(同語反復)이다.
    그러나 이 동어반복은 좀더 상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생산물의 가치와 비교되는 것은 그것의 생산에 소비된 생산요소(生産要素)들의 가치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노동수란{예: 기계}을 구성하는 불변자본(不變資本)은 그 가치의 일부만을 생산물로 이전할 뿐이고, 그 가치의 나머지 부분은 원래의 노동수단의 형태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이 후자의 부분은 가치형성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않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무시할 것이다. 그것을 계산에 넣더라도 달라
    지는 것은 전혀 없다. 가령 c=410원은 312원의 원료가치와 44원의 보조재료가치와 과정 중에 마멸된 54윈의 기계가치로 구성되어 있으나, 실제로 사용되는 기계설비의 총가치는 1,054원이라고 하자. 이 1,054원 중 우리는 기계설비가 기능하는 동안 마멸로 잃어버리는 [따라서 생산물로 넘겨주 는]54원의 가치만을 이 생산물의 생산에 투하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직도 기계의 형태 속에 계속 남아 있는 1,000원을 생산물에 이전되는 것으로 계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양쪽에 [즉, 투하된 가치의 쪽과 생산물 가치의 쪽에] 동시에 넣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주석 1: “만약 사용되는 고정자본의 가치를 투하자본의 일부로 우리가 계산하는 경우에는, 연도 말에 가서 이 자본의 잔존가치를 연간수입의 일부로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맬더스, ?정 치경제학원리?, 제2판, 런던, 1836년, p. 269).) 그렇게 하면 그것들은 각각 1,500원{l,054원의 기계가치+312원의 원료가치+44원의 보조재료가치+90원의 가변자본}과 1,590원으로 될 것이다. 그 차액, 즉 잉여가치는 여전히 90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치의 생산에 투하된 불변자론이라고 말할 경우, 그것은 언제나 [문맥상의 전후관계에서 그 반대로 해석되지 않는 한] 생산 중에 실제로 소비(消費)된 생산수단(生産手段)의 가치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C=c+v라는 공식으로 되돌아가면, 이 공식은C':(c+v)+s로 전환되며, C는 C'으로 된다. 불변자본의 가치는 생산물에 이전되어 재현될 뿐이다. 그러므로 생산과정 속에서 실제로 창조된 새로운 가치[가치생산물(價値生産物: value-prooduct)]는 생산물(生産物)의 가치(value of the product)와는 다르며, 따라서 전자는 얼핏 보아서는 (c+v)+s 또는 410원[c]+90원[v1+90원[s]인
    듯이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v+s, 즉 90원[v]+90원[s]이다. 다시 말해, 가치생산물(價値生産物)은 590원이 아니라 180원이다. 만약 불변자본 c=0이라면, 바꾸어 말해 만약 자본가가 이전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원료든 보조재료든 노동도구든]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소재와 노동력만을 사용하는 산업부문이 존재한다면, 이 경우에는 생산물로 이전되는 불변자본은 없을 것이다. 생산물가치의 이 요소[우리의 예에서는 410원]는 없어지게 될 것이지만, 90원의 잉여가치를 포함한 180원의 가치생산물[창조된 새로운 가치액]은 c가 거대한 가치액일때와 똑같은 크기일 것이다. C=(0+v)=v로 될 것이며, 가치증식한 자본 C'=v+s로 될 것이며, C'-C는 여전히 s와 같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s=0 이라면, 바꾸어 말해, 만약 [그 가치가 가변자본의 형태로 투하된] 노동력이 오직 등가물만을 생산한다면, C=c+v이고, C'(생산물 가치)=(c+v)+0으로 되고, 따라서 C=C'으로 될 것이다. 이 경우 투하된 자본은 가치를 증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잉여가치(剩餘價値)는 단순히 v[즉, 노동력으로 전환된 자본부분]의 가치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결과일 뿐이며, 따라서 v+s=v+Av[v+v의 증가분]이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v만이라는 사실과, 그 변화의 조건들은 자본의 가변부분이 커짐에 따라 총투하자본도 또한 커진다는 사정에 의해 불분명하게 된다. 총투하자본은 이전에는 500원이었지만 이제는 590원으로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과정을 순수한 형태에서 분석하기 위해서는, 생산물의 가치 중 불변자본 가치(不變資本 價値)의 재현(再現)에 지나지 않는 부분을 완전히 제외시킬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불변자본 c=0이라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불변량(不變量)과 가변량(可變量)을 더하기(+)나 빼기(-)에 의해 결합시키는 경우, 그 결과의 변동은 불변량을 제외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수학의 한 법칙을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하나의 곤란은 가변자본의 원래의 형태로부터 발생한다. 앞의 예에서는 C'=410원의 불변자본+90원의 가변자본+90원의 잉여가치이다. 그러나 90원은 하나의 주어진 양[즉, 불변량이므로] 그것을 가변량으로 취급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90원의 가변자본은 여기에서는 실제로는 이 가치가 겪게 되는 과정의 상징일 따름이다. 노동력의 구매에 투하된 자본부분은 일정한 양의 대상화된 노동이고, 따라서 그것은 구매한 노동력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불변의 가치량(價値量)이다. 그러나 생산과정 자체에서는 투하된 90원 대신 활동하는 노동력(勞動力)이 등장한다. 즉, 죽은 노동 대신 살아있는 노동이, 정지된 양(量) 대신 유동하는 양(量)이, 불변량 대신 가변량이 등장한다. 그 결과는 v의 재생산+v의 증가분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체과정은 노동력으로 전환된 [본래는 불변적인] 가치의 자기운동(自己運動)이라는 외관을 띤다. 과정도 결과도 모두 이 가치의 자기운동 덕분이다. '90원의 가변자본' 또는 '일정한 양의 자기증식하는 가치'라는 표현이 모순(矛盾)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이 표현이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하는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불변자본을 0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얼핏보면 기이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그렇게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국 면공업의 이윤을 계산하는 경우 우리는 우선 미국. 인도. 이집트 등에 지불한 면화 가격을 공제한다. 즉, 우리는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되기만 하는 자본가치를 0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자본 중 잉여가치의 직접적 원천인 부분[이 자본부분의 증가분이 잉여가치이다]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뿐 아니라, 총투하자본(總投下資本)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윤율(利潤率)}도 커다란 경제학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제3권에서 이 비율을 상세하게 고찰할 것이다. 자본의 일부를 노동력(勞動力)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 가치를 증식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의 다른 한 부분은 반드시 생산수단(生産手段)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가변자본(可變資本)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변자본(不變資本)이 노동과정의 일정한 기술적 성격에 따라 적당한 비율로 투하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화학적 과정에 증류기나 기타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를 분석할 때에는 그 기구들을 무시할 수 있다. 가치창조와 가치변화를 그 자체로서 [즉, 순수하게] 고찰하는 한, 불변자본의 물질형태인 생산수단은 가치를 창조하는 유동적인 노동력이 합쳐지는 소재를 제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소재의 성질이나 가치는 상관이 없다. 이 소재는 오직 생산과정 중에 지출되는 노동량을 흡수하는 데 충분한 양만큼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만큼의 양이 주어져 있기만 하면, 그 가치가 올라가든 떨어지든, 또는 그것이 토지나 바다와 같이 가치가 없는 것이든, 가치창조와 가치변화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주석 2: 루크레티우스(Lucretius)가 말한 바와 같이, "무(無)로부터는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가치의 창조'라는 것은 노동력의 노동으로의 전환이다. 동력 그 자체는 무엇보다도 인간유기체로 전환된 자연소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불변자본 부분을 0이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투하되는 자본은 c+v에서 v로, 또 생산물가치(c+v)+s는 가치생산물(v+s)로 축소된다. 만약 가치생산물=180원이 주어져 있고, 생산과정에서 지출된 전체 노동이 그것으로 표시된다면, 그것으로부터 가변자본=90원을 공제하면 잉여가치=90원이 남게 된다. 이 90원=s는 생산된 잉여가치의 절대량(絶對量)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의 상대량[즉, 가변자본이 가치증식된 비율]은 분명히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즉 s/v에 의해 표현된다. 이 비율은 앞의 예에서는 90/90=100%이다. 가변자본의 이와 같은 가치증식의 비율 또는 잉여가치의 상대적 크기를 나는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 the rate of surplus-value)이라고 부른다.(주석 3: 영국인은 이 비율을 표현하기 위해 '이윤율'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잉여가치의 법칙을 알면 이윤율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의 제3권에서 알게 될 것이다. 그 순서가 반대로 되는 경우에는 이것도 저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노동자는 노동과정의 일부 기간에서는 오직 자기 노동력의 가치[즉, 자기에게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를 생산할 뿐이다. 그의 노동은 사회적 분업체계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생활수단을 직접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상품[예컨대 면사]의 형태로 자기의 생활수단의 가치와] 동등한 가치 또는 [그가 생활수단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화폐와 동등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의 노동일 중 그가 이러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소비하는 부분은, 그의 하루의 평균적 생활수단의 가치 여하에 따라, 또는 같은 말이지만, 이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평균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여하에 따라 증감한다. 만약 노동자의 하루 생활수단의 가치가 평균해서 6시간의 대상화된 노동을 나타낸다면, 노동자는 이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하루에 평균 6시간씩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가령 그가 자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독립적으로 노동한다고 하더라도, 기타 조건이 불변이라면, 그는 자기 노동력의 가치를 생산하
    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유지[또는 계속적인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을 얻기 위해 여전히 하루 평균 그만큼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1노동일(勞動日) 중 그가 노동력의 가치(예컨대 3원)를 생산하는 부분에서는, 그는 자본가가 이미 그에게 투하{지불한}(주석 4: {엥겔스: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advance를 선대(先貸)라는 의미보다는 지불(支拂) 또는 투하(投 下)라는 보통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노동자는 노동한 뒤에 임 금을 받기 때문에] 실제로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선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본가에 게 '선대'한다.}) 노동력 가치의 등가물(等價物)을 생산할 뿐이며, 새로 창조된 가치는 투하된 가변자본의 가치를 대체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3원의 새로운 가치의 생산은 단순한 재생산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1노동일 중 이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부분을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이라고 부르며, 이 시간 중에 수행하는 노동을 필요노동(必要勞動: necessary labour)이라고 부른다.(주석 5: 이 책에서는 이때까지 ‘필요노동시간'이라는 용어를 어떤 상품(商品)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해 왔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 용어를 노동력(勞動力)이라는 특수한 의미로도 사용할 것이다. 동일한 용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불편하기는 하지만, 어떤 과학에서도 이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예컨대 고등수학과 초등수학을 비교해 보라.) 이 노동이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형태와는 무관하며, 이 노동이 자본과 자본가적 세계에 필요한 것은 노동자의 계속적인 생존이 자본의 세계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노동과정의 제2의 기간[즉, 노동자가 필요노동의 한계를 넘어 노동하는 시간]은 노동자가 노동력을 지출해 노동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는 잉여가치를 창조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자본가에게는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커다란 매력을 가지고 있다. 노동일의 이 부분을 나는 잉여노동시간(剩餘勞動時間)이라고 부르며, 이 시간 중에 수행하는 노동을 잉여노동(剩餘勞動: surplus labour)이라고 부른다. 가치 일반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가치를 노동시간의 응고(凝固)로, 대상화된 노동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잉여노동시간의 응고로, 대상화된 잉여노동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경제적 사회구성체들 사이의 차이는, 예컨대 노예노동에 근거한 사회와 임금노동에 근거한 사회 사이의 차이는 이 잉여노동이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로부터 착취(搾取)되는 그 형태에 있다.(주석 6: 참으로 고트세트(Gottsched)다운 독창력 {모방에서의 독창력 }을 가지고 W. 로셔가 발견한 것은, 잉여가치는 잉여생산물의 형성,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자본의 축적(蓄積)은, 오늘날에는 자본가의 '절약(節約)'의 덕택이며, 때문에 자본가는 '이자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가장 낮은 문명단계에서는 강자가 약자에게 절약을 강요한다"는 것이다(“국민경제학원리?, p. 78). 절약을 강요하다니 무엇을 절약한단 말인가? 노동의 절약인가, 아니면 존재하지도 않는 잉여생산물의 절약인가? 현존하는 잉여가치의 취득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하는 자본가들의 어 정도 그럴듯해 보이는 변명에 근거해서 로셔와 그의 일파들이 잉여가치의 원천을 설명하는 이 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진짜 무식하기 때문일 뿐 아니라, 집권세력을 불쾌하게 할 결과를 도출 할지도 모르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과학적 분석에 대한 변호론적 공포심 때문이다.
    한편으로 가변자본의 가치는 그것으로 구매한 노동력의 가치와 같고 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일의 필요노동시간 부분을 결정하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잉여가치는 노동일의 잉여노동시간 부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은 필요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비율과 같다. 바꾸어 말해, 잉여가치율(剩餘價値律) s/v=잉여노동/필요노동 이다. 이 두 비율은 동일한 관계를 상이한 형태로, 즉 전자에서는 대상화된 노동의 형태로, 후자에서는 살아있는 [유동적인] 노동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잉여가치율은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도(搾取度: degree of exploitation) 또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도의 정확한 표현이다.(주석 7: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은 노동력의 착취도(搾取度)의 정확한 표현이기는 하나 결코 착취의 절대량(絶對量)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만약 필요노동이 5시간이고 잉여노동이 5시간이라면, 착취도=100%다. 이 경우의 착취량은 5시간이다. 다른 한편, 만약 필요노동이 6시간이고 잉여노동이 6시간이라면, 100%라는 착취도는 여전히 불변이나 착취량은 20% 증가해서 5시간에서 6시간으로 된다.)
    우리의 가정에 의하면, 생산물(生産物)의 가치는 410원[c]+90원[v]+90원[s]이었고 투하자본(投下資本)은 500원이었다. 잉여가치는 90원이고 투하자본은 500원이므로 보통의 계산방식에서는 잉여가치율[이것은 일반적으로 이윤율(利潤準)과 혼동되고 있기 때문이다]은 18%로 계산되는데, 이것은 캐리(Carey)나 다른 조화론자들을 감동시킬 만큼 낮은 비율이다. 그러나 사실 잉여가치율은 S/C 또는 S/(C+V) 아니라 S/V이며, 따라서 90/500 이 아니라 90/90=100% 인데, 이것은 외견상의 착취도의 5배 이상이나 더 크다. 이 경우 우리가 비록 노동일의 절대적 길이나, 노동과정이 계속되는 기간(일, 주 등)이나, 또 90원의 가변자본이 동시에 일을 시키는 노동자의 수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잉여가치율 S/V는 그것의 동일한 표현인 잉여노동/필요노동 에 의해 노동일의 두 가지 부분 사이의 비율을 정확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100%이다. 즉, 노동자는 1노동일의 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고 나머지 반은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잉여가치율의 계산방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먼저 생산물의 총가치 중에서 그것에 재현될 뿐인 불변자본 가치를 0으로 본다. 나머지 가치액이 상품의 생산과정에서 현실적으로 새로 창조된 유일한 가치이다. 만약 잉여가치량이 주어져 있다면, 이 새로 창조된 가치에서 잉여가치량을 빼면 가변자본을 찾을 수 있다. 만약 가변자본이 주어져 있고 찾아내려는 것이 잉여가치라면 그 반대로 하면 된다. 만약 잉여가치와 가변자본이 모두 주어져 있다면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율을 S/V를 계산해 내는 마지막 작업만 하면 된다.
    그 방법은 이와 같이 간단하지만, 몇 개의 실례를 들어 이 방법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원리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0,000개의 뮬 방추를 가지고 미국면화로부터 32번수의 면사를 뽑는데, 매주 한 방추당 1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하고 있는 방적공장을 예로 들어 보자. 낙면의 발생률은 6%다. 그리하여 매주 10,600파운드의 면화가 가공되어 10,000파운드의 면사와 600파운드의 낙면이 나온다. 1871년 4월에는 이 면화의 가격이 1파운드당 7.75펜스였다. 따라서 10,600파운드는 약 342 파운드{1971년의 통화명칭 변경 이전에는 1파운드=20실링=240펜스였다}이다. 이 10,000개의 방추는 [준비공정의 설비와 증기기관을 포함해] 방추 1개당 1파운드, 따라서 10,000파운드이다. 방추의 1년간 마멸은 10%=1,000파운드, 1주 동안에는 20파운드이다. 공장건물의 임차료는 1년간 300파운드, 매주 6파운드이다. 석탄소비량(1시간 1마력에 4파운드, 100마력으로 매주 60시간씩, 건물의 난방용도 포함되어 있음)은 매주 11톤, 톤당 8실링 6펜스이므로 매주 약 4.5파운드가 된다. 가스는 매주 1파운드가 들고, 기름은 매주 4.5파운드가 든다. 따라서 보조재료의 합계는 매주 10파운드다. 그리하여 주간 생산물의 불변가치 부분은 378파운드{342+20+6+4.5+1+4.5}이다. 임금은 매주 52파운드이다. 면사의 가격은 1파운드당 12.25펜스이므로 10,000파운드에 510파운드이고, 따라서 잉여가치는 510-430=80파운드이다. 378파운드의 불변가치부분은 가치의 창조에는 참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0으로 본다. 따라서 매주의 가치생산물로 132파운드가 남는데, 132=52[V]+80[S]이다. 따라서 잉여가치율은 80/52 = 153 11/13 %로 된다. 10시간의 평균노동일 중 필요노동은 3 31/33시간, 잉여노동은 6 2/33 시간이다.(주석 8: 초판에서 인용한 1860년의 한 방적공장의 예에는 사실상의 오류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본문에 인용한 완전히 정확한 자료는 맨체스터의 한 공장주가 나에게 제공한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이전에는 엔진의 마력이 실린더의 직경에 의해 계산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지시기(指示器: indicator)가 표시하는 실제의 마력에 의해 계산되고 있다.)
    또 하나의 예: 제이콥은 1815년에 밀가격은 1쿼터당 8실링이고, 1에어커당 평균수확은 22부셀이라는 가정 하에 다음과 같은 계산을 했는데, 이것은 여러 항목을 미리 조정한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나 우리의 목적에는 충분하다.

    1에이커당 생산물의 가치

    종자(밀) 1파운드 9실링 10 . 1조, 지방세, 국세 1파운드 1실링
    비료 2파운드 10실링 지대 1파운드 8실링
    임금 3파운드 10실링 차지농업가의 이윤과 이자 1파운드 2실링
    ------------------------ ---------------------------------
    계 7파운드 9실링 계 3파운드 11실링
    여기서 생산물의 가격은 그 가치와 같고 잉여가치는 이윤. 이자. 10 . 1조 등등의 각종 항목으로 분할된다고 가정한다. 이 항목들은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좋다. 그것들을 합하면 3파운드 11실링이라는 하나의 잉여가치가 나온다. 종자와 비료대금인 3파운드 19실링은 불변자본 부분이며, 우리가 이것을 0으로 본다면, 3파운드 10실링이라는 투하된 가변자본이 남고, 그 대신 새로 생산된 가치는 3파운드 10실링+3파운드 11실링이다. 따라서 S/V = 3파운드 11실링/ 3파운드 10실링으로 되는데, 그것은 100%이상이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일의 절반 이상을 잉여가치의 생산에 충당하고 있는데, 이 잉여가치는 각종 구실 밑에 여러 사람들 사이에 분배되고 있다. (주석 9: 여기에 인용된 계산은 예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우리는 가격=가치라고 전제하고 있다. 제3권[제9장]에 가서 우리는 이러한 전제는 평균가격에 대해서까지도 그렇게 간단하게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제2절 생산물의 가치를 생산물의 비례배분적
    부분들로 표시



    이제 우리는 자본가가 어떻게 화폐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 그 예로 되돌아자. 그의 방적공의 필요노동은 6시간이고 잉여노동도 6시간, 따라서 노동력의 착취도는 100%였다.
    12시간 노동일의 생산물은 30원의 가치를 가지는 20파운드의 면사이다. 이 면사가치의 적어도 8/10(24원)은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20파운드의 면화가 20원, 소모된 방추가 4원)가 재현되었을 뿐인 것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즉, 불변자본(不變資本)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2/10는 방적과정 중에 창조된 6원의 새로운 가치인데, 그 중 절반은 노동력의 하루 가치, 즉 가변자본을 대체하며, 또 절반은 3원의 잉여가치를 구성한다. 따라서 이 20파운드의 면사의 총가치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면사의 가치 30원=24원[c1+3원[v1+3원(s)
    (역자 주:다음과 같은 대응관계를 고려하면 이하의 논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면사의 가치 30원=면화 20원 + 방추 4원 + 노동력의 가치 3원 + 잉여가치 8원
    면사20파운드 =13 1/3파운드+2 2/3파운드 + 2파운드 + 2파운드
    총노동 60시간 = 40시간 + 8시간 + 6시간 + 6시간
    노동일 12시간 = 8시간 + 1시간36분+ 1시간12분 + 1시간12분)
    이 총가치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총생산물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치요소들도 생산물의 비례배분적 부분(比例配分的 部分)들로 표시할 수 있다.
    만약 30원이라는 면사의 가치가 20파운드의 면사 속에 있다면, 이 가치의 8/10[즉, 불변부분인 24원]은 생산물의 8/10[다시 말해 16파운드의 면사]속에 있을 것이다. 그 중 13 1/3파운드의 면사는 원료[방적된 면화]의 가치 20원을 나타내며, 2 2/3파운드의 면사는 소비된 보조재료와 노동수단(방추) 등의 가치 4원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13 1/3파운드의 면사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총생산물을 만드는 데 소비된 면화[즉,총생산물의 원료]를 나타낼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13 1/3파운드의 면사에는 131/3원의 가치를 가지는 13 1/3파운드의 면화밖에 들어 있지 않으나, 그것의 가치[20원]에는 6 2/3원이 첨가되어 있으며, 이 금액은 나머지 6 2/3파운드의 면사를 만드는 데 소비된 면화의 가치와 같다. 이것은 마치 나머지 6 2/3파운드의 면사에는 면화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고 총생산물에 사용된 면화는 전부 13 1/3파운드의 면사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 13 1/3파운드의 면사에는 소비된 보조재료 . 노동수단의 가치나 방적과정에서 창조된 새로운 가치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변자본의 나머지 부분‘[=4원]이 들어 있는 다른 2 2/3파운드의 면사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총생산물에 소비된 보조재료와 노동수단의 가치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산물의 8/10[즉, 16파운드의 면사]은 사용가치로서의 현물형태에서는 [생산물의 다른 부분들과 꼭 마찬가지로] 방적노동의 생산물이지만,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거기에는 방적노동[즉, 방적과정 자체에서 수행된 노동]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면화가 아무런 도움없이 면사로 전환된 것처럼 보이며, 마치 면사라는 그 형태는 오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만약 자본가가 그것을 24원에 팔고 그 24원을 가지고 다시 그의 생산수단을 산다
    면, 이 16파운드의 면사는 면화나 방추, 석탄 등이 가장(假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생산물의 나머지 2/10[즉, 4파운드의 면사는 이제는 12시간의 방적과정에서 창조된 6원이라는 새로운 가치 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거기에 들어 있는 소비된 원료와 노동수단의 가치는 벌씩 거기에서 뽑혀 나와 첫 16파운드의 면사에 합쳐져 버렸다. 20파운드의 면사에 체현된 방적노동(勞動)은 생산물의 2/10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방적공이 4파운드의 면사를 공중에서 뽑아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인간노동의 협력없이 천연적으로
    존재하여 생산물에는 아무런 가치도 첨가하지 않는] 그러한 면화와 방추로 방적공이 면사를 만들어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매일의 방적과정에서 새로 창조된 가치 전체는 4파운드의 면사로 되어 존재하지만, 이 중에서 절반은 소비된 노동력의 가치의 등가[즉, 3원이라는 가변자본]를 대표하고 나머지 절반은 3원이라는 잉여가치를 대표한다.
    방적공의 12노동시간은 6원으로 대상화되기 때문에, 30원이라는 면사의 가치에는 60노동시간이 대상화되어 있다. 이것은 20파운드의 면사로 체현되어 존재하는데, 이 20파운드의 면사 중 8/10 ,즉 16파운드는 [방적과정이 개시되기 이전] 생산수단에 지출된 48노동시간의 물질화(物質化)이고, 2/10, 즉 4파운드는 바로 방적과정에서 지출된 12노동시간의 물질화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면사의 가치는 면사의 생산 중에 창조한 새로운 가치에 [그것의 생산수단 속에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가치를 더한 것과 같다 이제 우리는 생산물의 가치 속의 기능상 또는 개념상 서로 다른 성분들을 생산물 그 자체의 비례배분적 부분들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생산물(生産物)-생산과정의 결과-은 생산수단에 이미 들어 있는 노동[불변자본(不變資本)]을 대표하는 부분과, 생산과정에서 첨가된 필요노동[가변자본(可變資本)]을 대표하는 부분과, 끝으로 생산과정에서 첨가된 잉여노동[잉여가치(剩餘價値)]을 대표하는 부분으로 분할된다. 이러한 분할은, 나중에 그것을 복잡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적용시킬 때에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간단하면서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총생산물을 12시간 노동일의 완성된 결과로 고찰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총생산물을 그 생산단계(生産段階)를 통해서도 고찰할 수가 있다. 만약 상이한 생산단계에서 생산되는 몇 개의 부분적 생산물들을 총생산물의 기능상 구별되는 부분들로 나타낸다면, 이 방식으로도 이전과 마찬가지의 결과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방적공은 12시간에 20파운드의 면사를, 즉 1시간에는 1 2/3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한다. 따라서 8시간에는 13 1/3파운드의 면사[즉, 1노동일에 방적되는 면화(棉花)의 총가치에 해당하는 부분생산물(部分生産物)]를 생산한다. 그 다음 1시간 36분의 노동의 부분생산물은 2 2/3파운드의 면사가 되는데 그것은 12노동시간에 소비되는 노동수단(勞動手段)의 가치를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방적공은
    그 다음의 1시간 12분에는 2파운드의 면사=3원을 생산하는데, 이것은 그가 새로운 가치 전체와 동등한 생산물 가치(生産物 價値)이다. 끝으로 그는 최후의 1시간 12분에 또다시 2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하는데, 그 가치는 그의 반일분의 잉여노동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剩餘價値)와 동등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계산방식은 영국의 공장주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예컨데 그는 1노등일의 첫 8시간[또는 2/3 노동일]에는 다만 자기의 면화의 가치를 회수하고..... 나머지 시간에는....을 회수하고, 등등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이 방식은 옳은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앞의 방식을 [완성된 생산물의 상이한 부분들이 나란히 놓여있는] 공간으로부터 [그 생산물 부분들이 순차적으로 생산되는] 시간으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매우 조잡한 사고 방식을 야기랄 수도 있다. 특히 실무적으로 가치증식(價値增殖) 과정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이론적으로는 그것을 곡해(曲解)하는 편이 도리어 이익이 되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러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방적은 자기 노동일의 첫 8 시간으로는 면화의 가치를, 그 다음의 1시간 36분으로는 소비된 노동수단의 가치를, 또 그 다음 1시간 12분으로는 임금의 가치를 생산 또는 대체하며, 그리고 오직 저 유명한 ‘최후의 1시간’{1시간 12분}만을 공장주를 위한 잉여가치의 생산에 바친다고. 그리하여 이 방적공에게는 이중(二重)의 기적을 행할 의무가 부과된다. 즉, 면화나 방추나 증기기관이나 석탄이나 기름 등을 사용해 실을 뽑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들을 생산해야하며, 그리고 일정한 강도의 1노동일을 동일한 강도의 5노동일{60 노동 시간}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에서는 원료와 노동수단의 생산에는 네 개의 12시간 노동일이 필요하며, 그것들을 면사로 만드는 데는 또 하나의 12시간 노동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한없는 욕심이 이와 같은 기적을 쉽사리 믿도록 한다는 것, 또 이 기적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려는 어용학자(御用學者)들이 없지는 않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유명한 다음의 한 실례가 잘 말해 주고 있다.



    제 3 절 시니어의 ‘최후의 한 시간’(last hour)



    1836년의 어느 날 아침 경제학적 식견과 명문(名文)으로 소문난, 이를테면 영국 경제학자 중의 클라우렌{Clauren: 문체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작가} 이라고 할 수 있는 나소 시니어(Nassau W. Senior)는 옥스퍼드에서 맨체스터로 불려갔다. 그는 옥스퍼드에서는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맨체스터에서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공장주들은 그 당시 공포된 공장법{1883년}에 대항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요구를 들고 나온 ‘10시간 노동 운동’에 대항할 투사(鬪士)로 그를 선발할 것이었다. 공장주들은 자기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실무적인 통찰력으로 이 유식한 교수가 “아직도 상당히 더 세련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맨체스터로 불러낸 것이다. 이 교수는 그가 맨체스터에서 공장주들로부터 받은 교훈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서 다음과 같은 소책자를 내놓았다: “공장법이 면공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편지”(런던, 1837년). 이 책자에는 특히 다음과 같은 교훈적인 구절이 있다.

    “현행법 하에서는 18세 미만의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어떤 공장도 매일 11 1/2 시간 이상을 [즉, 첫 5일간은 12 시간, 토요일에는 9시간 이상을] 작업할 수 없다. 다음의 분석(!)은 이러한 공 장에서는 순이익 (純利益)전체가 최후의 한 시간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공 장주가 100,000원을 투자하되 80,000원은 공장건물과 기계에, 20,000원은 원료와 노동임금에 투자 한다고 하자. 자본의 회전을 연 1회, 총이윤을 15%{감가상각 5% +순이윤 10%}라고 가정하면, 이 공장의 1년 간의 매상액은 115,000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1노동일에 들어 있는 23개의 30분 노동의 하나하나는 이 115,000원의 5/115[즉, 1/23]를 생산한다. 115,000원의 총액을 구성하는 이 23/23 중 20/23[115,0000 중의 100,000원에 해당하는 것]은 단순히 자본을 보존하는 데 지나지 않 고 1/23[즉, 115,000원 중의 5,000원]은 공장과 기계설비의 마멸을 보상한다. 나머지 2/23[즉, 매 일의 마지막 두 개의 30분]가 10% 의 순이윤{10,000원}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만약 가격이 변 동하지 않는 조건 하에서 이 공장이 약 2,600원의 유동자본의 추가에 의해 11 1/2시간 대신 13 시간을 작업할 수 있게 된다면, 순이윤은 2배 이상으로 될 것이다. 다른 한편, 만약 노동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만큼 단축된다면 순이윤은 없어질 것이며, 또 만약 1 1/2시간만큼 단축된 총이윤 까지도 없어질 것이다. "(주석 10: 시니어(N. W. Senior_, 앞의 책, pp. 12-13.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은 괴상한 주장들[예컨대 공장주들이 기계설비 등의 마멸을 보전하는 데 필요한 금액, 즉 자본의 한 부분을 대체하는 데 필요한 금액을 이윤[총이윤이든 순이윤이든]에 가산하는 듯이 주장하는 것은 문제로 삼지 않는다. 우리는 또 숫자가 정확한 것인가 거짓인가도 문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이 이른바 '분석' 이상의 가치를 안 가진다는 것은 호너(Leonard Horner)가 ?시니어에게 보내는 편지?(런던, 1837년)에서 증명한 바다. 호너는 18333년 공장조사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이었고, 1859년까지는 공장감독관[실제로는 공장검열관]이었으며, 영국 노동자계급을 위해 불멸의 공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자치의 전 생애를 통해 격분한 공장주들을 상대로 투쟁했을 뿐 아니라 [공장'직공'들의 노동시간 수보다 공장주들에 대한 하원의 찬성표 수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 내각을 상대 로 투쟁했다. 시니어의 서술은 그 내용상의 오류는 그만두더라도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 그가 본래 말하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공장주는 노동자를 매일 11 1/2시간, 즉 2/23시 간 일을 시킨다. 1년간의 노동은 이 시간수에 1년간의 노동일의 수를 곱한 것으로 구성된다. 이 러한 가정 밑에서는 23/2노동시간은 1년간에 115,000원의 생산물을 생산하며, l/2노동시간은 1/23 x 115,000원을 생산한다. 20/2노동시간은 20/23 x 115,000원=100,000원을 생산하며, 그것은 오직 투하된 자본을 대체할 뿐이다. 남은 것은 3/2동시간인데, 이것은 3/23 x l15,000원=15,000 원, 즉 총이윤을 생산한다. 이 3/2노동시간 중 1/2노동시간은 1/23 x 115,000원=5,000원을 생산 하는데, 그것은 공장과 기계설비의 마멸만을 대체한다. 마지막 두 개의 30분노동, 즉 최후의 1
    노동시간은 2/23 x l15,000원=10,000원, 즉 순이윤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시니어는 생 산물의 최후의 2/23를 노동일 전체의 부분들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것은 오류인 것 같다. 시니 어는 생산물의 총가치를 노동일 전체의 부분들로 전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이것을 '분석(分析)'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그가 노동자들은 1일 중의 대부분을 건물. 기계. 면화. 석탄 등의 가치의 생산[재생산 또는 대체]에 낭비한다는 공장주들의 한탄을 그대로 믿었다면 아예 분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다음과 같이 답변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여러분! 만약 당신들이 11 1/2시간이 아니라 10시간 공장을 가동시킨다면, 다른 사정에 변화가 없는 한, 면화나 기계설비 등의 매일의 소비는 그에 비례해 감소할 것이며, 당신들은 잃
    는 것만큼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당신들의 노동자들은 투하된 자본가치를 재생산 또는 대체하는 데 1 1/2시간만큼 적게 낭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다른 한편, 만약 시니어가 공장주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고 전문가의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노동일의 길이와 순이윤의 관계에 관련된 문제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공장주들에게 기계설비. 공장건물. 원료. 노동을 뒤섞지 말고, 한 쪽에는 공장건물. 기계설비. 원료 등에 투하된 불변자본을 놓고, 다른 쪽에는 임금에 투하된 자본을 놓아달라고 요청했어야 할 것이다. 그때 만약 공장주들의 계산에 의해 노동자는 2개의 30분 노동에서 임금을 재생산 또는 대체한다는 결론이 나왔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분석을 계속했어야 할 것이다.
    "당신들의 진술에 의하면, 노동자는 마지막에서 둘째번 1시간에 자기의 임금을 생산하고 최 후의 1시간에 당신들의 잉여가치, 즉 순이윤을 생산한다. 그는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크기의 가 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마지막에서 둘째번 1시간의 생산물은 최후의 1시간의 생산물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노동자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오직 그가 노동을 수행하는 동안이고, 또 그의 노동량은 그의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당신들의 진술에 의하면, 이 노동시간은 하루에 11 1/2시간으로 되어 있다. 이 11 1/2시간의 일부를 그는 자기의 임금을 생산 또는 대체하는데 사용하며, 나머지 부분을 당신들의 순이윤을 생산하는 데 사용한다 그는 이것 이외에는 아무 것 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들의 진술에 의하면, 그의 임금과 그에 의해 제공되는 잉여가치는 같은 크기의 가치이므로, 그는 분명히 자기의 임금을 5 3/4시간에 생산하며, 당신들의 순이윤을 나머지 5 3/4시간에 생산한다. 그리고 2시간에 생산된 면사의 가치는 그의 임금과 당신들의 순 이윤을 합한 가치량과 같기 때문에, 이 면사의 가치는 11 1/2노동시간임에 틀림없다. 그 중에서 5 3/4시간은 마지막에서 둘째번 1시간의 생산물의 가치를 나타내며, 다른 5 3/4시간은 최후의 1 시간의 생산물의 가치를 나타낸다. 우리는 이제 아주 까다로운 점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주의해 야 한다. 마지막에서 둘째번 1노동시간도 최초의 1노동시간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1노동시간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방적공은 어떻게 5 3/4노동시간을 대표하는 면사의 가치 를 1노동시간에 생산할 수 있는가? 그는 결코 그와 같은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그가 1노동시간 에 생산하는 사용가치는 일정한 양의 면사다. 이 면사의 가치는 5 3/4노동시간으로 측정된다 그 중 4 3/4노동시간은 매시간 소비되는 생산수단(즉 면화나 기계설비 등)에 [방적공의 협력없이] 이미 포함되어 있던 것이고, 나머지 1시간은 방적공 자신에 의해 첨가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임금은 5 3/4시간에 생산되며, 그리고 1노동시간에 생산된 면사도 또한 마찬가지로 5 3/4 노동시 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5 3/4방적노동시간 중에 그에 의해 생산된 새로운 가치가 1방적노 동시간의 생산물의 가치와 동일하다는 것은 결코 마술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 들이 방적공은 면화나 기계설비 등의 가치를 재생산 또는 대체하는 일에 그의 노동일의 단 한 순간이라도 낭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노동이 면화와 방추로 면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즉 그가 방적을 하기 때문에, 면화와 방 추의 가치는 스스로 면사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노동의 질(質)에 기인하는 것이지 그 양(量)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1시간에 면사로 이전시키는 면화의 가치는 1/2시간에 이전 시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은 오직 그가 1/2시간보다는 1시간에 더 많은 면 화를 방적한다는 데 기인할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이제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가 마지막 둘째번 1시간에 자기 임금의 가치를 생산하고 최후의 1시간에 순이윤 을 생산한다는 당신들의 주장은, 그가 2시간[이 2시간의 선후관계는 어떻든]에 생산i한 면사에는 11 1/2노동시간[즉, 그의 노동일 전체와 똑같은 시간]이 체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그가 전반의 5 3/4시간에는 자기의 임금을 생산하고 후반의 5 3/4시간에는 당신들의 순 이윤을 생산한다는 나의 주장은, 당신들이 전반의 5 3/4시간에 대해서는 값을 지불하나 후반의 5 3/4시간에 대해서는 값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내가 여기서 노동력(勞動 力)에 대한 지불이라고 라고 말하지 않고 노동(勞動)에 대한 지불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당 신들의 통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제 만약 당신들이 값을 지불하는 노동시간과 값을 지불 하지 않는 노동시간을 비교한다면, 당신들은 그것이 1/2일 : I/2일, 즉 100%라는 것을 발견할 것 이다. 이것은 물론 나쁘지 않은 퍼센트다. 또 만약 당신들이 당신들의 '일꾼'들을 11 1/2시간이 아니라 13시간 일하도록 강요해 [아마도 당신들은 그렇게 하기가 십상이지만] 이 추가적인 1 1/2시간을 순전한 잉여노동에 합친다면, 잉여노동은 5 3/4시간에서 7 1/4시간으로 증가할 것이 며, 이에 따라 잉여가치율은 100%에서 126 2/23%로 증가하리라는 것도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 다. 그러나 만약 당신들이 1 1/2시간의 추가에 의해 잉여가치율이 100%에서 200%로 또 심지어 200% 이상으로 증가하리라고, 즉 그것이 '2배 이상으로 되리라'고 기대한다면, 당신들은 너무나 지나친 낙관론자들이다. 다른 한편, 만약 당신들이 노동일을 11 1/2시간에서 10 1/2시간으로 단 축하면 당신들의 순이윤이 모두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걱정한다면, 당신들은 너무나 소심한 비 관론자들이다[인간의 마음은 이상하다. 특히 돈지갑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 지만]. 결코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잉여노동은 5 3/4시간에서 4 3/4시간으로 감소될 것이지만, 그것은 아직도 82 14/23%나 되는 상당히 높은 잉여가치율이다. 그러나 저 숙명적인 '최후의 한 시간'이라는 것은-당신들은 이에 대해 천년왕국설의 신자들이 세계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한 것보다 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웃기는 이야기'다. ' 최후의 한 시간'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당신들의 '순이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또 당신들이 혹사시키고 있는 소년소녀들의 '순결한 마음'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주석 11: 시니어가 공장 주들의 순이윤과 영국 면공업의 존립과 영국의 세계시장 지배가 '최후의 한 시간'의 노동에 달 려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면, 유어는 다음과 같은 것을 논증했다 즉, 만약 공장 아동들과 18세 미 만의 미성년자들을 12시간 동안 공장 구내의 따뜻하고 매우 도덕적인 분위기 속에 가두어 두지 않고 그들을 '한 시간' 더 빨리 냉혹하고 타락한 외부세계로 몰아낸다면, 나태와 퇴폐에 의해 그 들의 영혼의 구제가 불가능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1848년 이후 공장감독관들은 '최후의', '치명 적인 한 시간'에 대해 계속 공장주들을 야유했다. 그 하나의 예로, 하우엘(Howell)은 1855년 5월 21일자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다음과 같은 기발한 계산"(그는 시니어를 인 용하고 있다)"이 정당하다면, 영국의 모든 면공장은 1850년 이래 손실을 보면서 조업한 것으로 된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55년 4월 30일?, pp. 19-20). 1848년에 10시간 노동법안이 의회를 통과했을 때, 도셋주와 서머셋주의 접경지에 산재한 농촌의 아마방적공장주들은 [노동시간 제한 의 혜택을 입게 된] 약간의 노동자들에게 그것에 반대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강요한 일이 있 는데, 이 청원서에는 다음과 갈이 쓰여 있다. "자식들의 부모인 우리들 청원자는, 한가한 시간을 한 시간 더 추가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식들을 타락시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런 결과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나태는 모든 퇴폐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 이에 관해 1848년 10월 31일자 공장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덕망있고 인자한 어버이의] 어린 자녀들이 노동하고 있는 아마방적공장 내부의 공기는 원료에서 나오는 무수한 먼지와 섬유가루로 가득 차서 방적실 안에 10분만 있어도 아주 불쾌할 지경이다. 실제로 거기에 는 아마의 먼지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람의 눈. 귀. 입. 코로 들어가기 때문에 여러 분은 심한 고통 없이는 그곳에 있을 수 없다. 노동 그 자체로 말하면 엄격한 감시하에, 또한 무 서울 정도로 빨리 돌아가는 기계 때문에, 끊임없이 숙련을 적용해 노동해야 한다. 그리고 식사시 간을 제외하고는 10시간을 온통 그러한 환경 속에서 그러한 작업에 얽매여 있는 자신의 아이들 에 대해 '나태'라는 말을 쓰도록 부모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좀 잔인한 듯하다. 이 아이들은 그 부근 농촌의 일꾼들보다 더 장시간 노동한다. '나태, 퇴폐' 운운하는 잔인한 이야기는 전혀 근거 없는 거짓말이며, 가장 파렴치한 위선이라고 낙인찍어야 할 것이다....약 12년 전에 공장주의 '순 이윤' 전체는 '최후의 한 시간'의 노동에서 나오며, 따라서 노동일을 한 시간 단축하는 것은 순 이윤을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높은 권위자의 지지 하에 공공연하게 또 아주 진지하게 선포 한 확신에 대해 사회의 일부 사람들은 분개했다. 이제 이 사람들은, '최후의 한 시간'의 효력에 관한 그 최초의 발견이 그 뒤 훨씬 확대되어 이윤뿐 아니라 도덕까지도 포함하게 되고, 만약 아 동노동의 길이가 10시간으로 단축된다면 최후의 치명적인 한 시간에 달려있는 공장주의 순이윤 뿐 아니라 아동들의 도덕까지도 한꺼번에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듣게 될 때, 아마도 자신의 눈 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48년 10월 31일?, p. 101). 동일한 공장보고서 는 또한 이 공장주들의 도덕이나 덕성의 견본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이 소수의 전혀 의지할 곳 없는 노동자를 시켜 그와 같은 종류의 청원서에 서명하게 하고, 그 뒤 그것을 공업부문 전 체, 주 전체의 청원서라고 하면서 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그들이 이용한 간계. 술책. 유혹. 협약 위조 등의 견본을 보여주고 있다. 시니어 자신(그는 나중에 자기의 명예를 위해 정력적으로 공장법을 옹호했다)도 그의 반대자들도 모두 그 '최초의 발견'의 궤변을 해결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른바 경제'학'의 오늘날의 수준을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사실상의 경험 을 통해 그것이 궤변임을 알게 되었지만, '왜, 무엇 때문에' 궤변인가는 그들에게는 여전히 수 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언젠가 정말로 여러분들의 '최후의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올 때 는 이 옥스퍼드 교수를 회상하십시오. 그러면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석 12: 그러나 이 교수는 자기의 맨체스터 여행에서 다소의 소득을 얻었다. ?공장법이 면공 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편지?에서 그는 순이익 전체, 즉 '이윤'과 '이자' 그리고 심지어 '그 이상의 무엇'까지도 모두 노동자의 노동시간 중 지불되지 않은 그 한 시간에 의존한다고 말하 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1년 전 그가 옥스퍼드 대학생들과 교양있는 속물들을 위해 서술한 ? 정치경제학개론?에서 그는 가치가 노동에 의해 규정된다는 리카도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이윤 은 자본가의 노동에서, 이자는 자본가의 금욕 즉 '절제'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 다. 이 속임수 자체는 낡은 것이지만 '절제'라는 말은 새로운 것이었다. 로셔가 그것을 독일어 로 'Enthaltung'이라고 번역한 것은 옳다. 그러나 라틴어에 그만큼 정통하지 못한 그의 동료들 은 그것을 'Entsagung'이라고 승려냄새가 나는 말로 번역했다.)......
    1836년에 시니어가 발견한 '최후의 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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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지천태(地天泰)
    『  천지의 화합 』
            
     ●    기운이 가지고 있는 성질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
     ●    는 사람은 중생입니다. 그러나 기(氣)가  가지고
     ●    있는 성질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
            추고 있으면 성현입니다. 옛날부터 성인은 3가지
     ○    능력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외부의 것을 끌어 올
     ○    수 있는 능력, 둘째는 자기  안에 응고되려는 기
     ○    운에 자신이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셋째는
            자신의 기운을 외부로 내보낼  수 있는 능력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3년밖
            에 일하지 않았지만 오늘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일하던 능력은 흘러내려 오고  있습니다. 석가모
            니가 하던 것도 아직도 흘러내려 오고 있습니다.
            중간에 누가 막는다고 막아져지지  않습니다. 이
            것이 바로 성현의 위대한 힘입니다.
                          지천태(地天泰)
     
        태(泰)의 괘는 땅의 기운이 내려오고  하늘의 기운이
        상승하는 형상이다. 이것은 천지가  화합하여 만물을
        낳아 기르는 것이요, 상하가 화합하여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것이다. 태괘는 길한 것이니 성장하고 번영한
        다. 내괘가 양, 외괘가 음이다. 이것은 속의 뜻은 강
        건하고 외면의 태도는 유순한 모습이며, 또 핵심에는
        군자를, 변두리에는 소인을 배치한 것과  같다. 그리
        하여 군자의 도는 발전하고 소인의 도는 소멸하는 것
        이다.
     
            泰, 小往大來.  吉亨.  象曰, 泰小往大來,
            吉亨, 則是天地交而萬物通也. 上下交而其
            志同也. 內陽而外陰, 內健而外順, 內君子
            而外小人, 君子道長, 小人道消也.
     
      자연의 법칙을 터득한 사람은 성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터득된 상태를 불가에서는 해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에서는 그와 같은 상태를 하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 즉
    하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특히 중
    국에서는 그와같은 성현의 상태를 '중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중용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에너지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호.유지하기 위해서 안으로  오므라들어 응
    고하려고 하는 기능과, 에너지가 움직여서 쓰여지게끔  밖을 향해
    서 나갈려고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것을  아낄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남의 것은  잘 안아낀다고 하더라도 자기  것은
    잘 아끼려는 마음이 누구나 있습니다. 남의 비싼 것  하나 망가지
    는 것은 그려려니 하지만 자기 조그마한  것 하나 망가지는 것은
    굉장히 아프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것은 나의 에너지가 나에게 고
    착되어 안으로 응축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자칫
    잘못쓰면 진짜 아까운 자기 것을 망가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용은 안으로 당기는 기운과 밖으로  사용하려는 기운이 균형
    을 이룬 상태입니다. 기운이 가지고 있는 성질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는 사람은 중생입니다. 그러나 기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마음대
    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성현입니다.  옛날부터
    성인은 3가지 능력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외부의 것을 끌어 올 수
    있는 능력, 둘째는 자기  안에 응고되려는 기운에 자신이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셋째는 자신의 기운을 외부로 내보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3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오늘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일하던 능력은  흘러내려 오고 있습
    니다. 석가모니가 하던 것도 아직도  흘러내려 오고 있습니다. 중
    간에 누가 막는다고 막아져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현의 위
    대한 힘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살면서 물이 짜증나면 펄쩍펄쩍 뛸 수 있습니
    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펄쩍 펄쩍 뛰면 물결을 치게 만들고, 파도
    가 일게 만들고 그래서  잔잔한 물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누군가  짜증이 난다고 우리 삶의  바탕을
    혼탁하게 만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쫓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는 바닷물안에 있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물결을 만들어 내지
    만 그렇다고 "에이 바다 노릇 못해먹겠다." 하고  그만 두는 법이
    없습니다. 바다는 일어나는 물결을 잔잔하게 다시  자기 품안으로
    받아들입니다. 바다와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물이 아니꼬와 바
    다로부터 도망쳐 나가겠지만 그래도 바다는 그 물방울을 다시 받
    아들입니다. 그것이 성현의 커다란 마음입니다.
      "태(泰)의 괘는 땅의 기운이 내려오고 하늘의 기운이 상승하는
    형상이다. 이것은 천지가  화합하여 만물을 낳아  기르는 것이요,
    상하가 화합하여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것이다." [지천태]는 전부
    양효로 이루어진 하늘을 뜻하는 천(天)괘가 아래에 있고 전부 음
    효로 이루어진 땅을 뜻하는 지(地)괘가 위에 있습니다. 하늘이 있
    어야 할 자리에 땅이 있고, 땅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늘이 있습니
    다. 그러나 주역은 역순하기 때문에 결국은 하늘은 위로 올라가고
    땅은 아래로 내려와서 제위치를 바로잡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안
    에 응고되어 있던 내괘의 양성기운은 바깥으로 흘러나가고 또 바
    깥의 음성기운은 안으로 흘러들어와서 가장  이상적인 화합을 이
    루게 됩니다.
      동시에 이 괘는 천지가 자리바꿈을 하는  큰 변혁을 일으켜 세
    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은 세상을 뒤집어 놓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에서 잘못 생각하
    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을 다시 바로하여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제
    자리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지금 인간의 마음은 자아 관념에 의하여 오히려 자연의 순리와
    는 다르게 일탈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력은  하나의 에너지체
    로서 자연의 법칙에 의해 순리대로 흘러야 하는데, 강력한 자아의
    식으로부터 비롯된 고정관념으로  생명력의 흐름을  자기 마음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몰고가면,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
    고 자기 중심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에
    생명력이 응축되어 있으면, 그것은 자연의 흐름에  위배되어 결국
    자연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생명력을 파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이 이 자연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창조력이라는 사
    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력을 터득해서 창조의 주
    재자가 되어야지, 창조를 위해 소모되는 불쌍한  인생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지천태]가 이루어 내는 세상의 대변혁은  결국 인
    간이 자연의 순리를 따라 영원한 생명력의 흐름으로 세상에 풍요
    를 창출해 내는, 조화와  균형의 안정된 세계를 구축하는  것입니
    다.
      "내괘가 양, 외괘가 음이다. 이것은 속의 뜻은 강건하고 외면의
    태도는 유순한 모습이며, 또 핵심에는 군자를, 변두리에는 소인을
    배치한 것과 같다." 외괘는  모두 부드럽고 유순한  음성기운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괘는 강한 양성기운으로 이루어져  있어 외유내
    강(外柔內剛)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갸냘프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아주 강한 기강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것
    입니다. 확고부동한 자기 세계가 내면에 당당하게  내포되어 있으
    면서, 그 내포된 세계를 끝까지 세상에 펼친다고  하는 강한 의지
    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식으로 펼치지 아니하고, 오
    히려 자기 마음을 내세우지 않고 낮추면서, 외부의 세계를 받아들
    이고 수용하여 자연의 뜻에 따라 펼쳐내는 겸양의 의미를 포함하
    고 있습니다. 동시에 6개의 효가 모두 정응관계에  있어 무턱대고
    자기 주관대로 해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우  공명정대하게 일을
    추진해 나아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상. 천지가 화합한다. 이것이 [태]의 괘상이다. 왕
        자는 이 괘상을 보고 천지의 작용에 사람의  힘을 보
        태어 천지의 원만함을  도와 대성하게 하고,  인민을
        태평성세로 인도한다.
     
            象曰, 天地交泰. 后以財成天地道, 輔相天
            地之道, 以左右民.
           
      자연의 이치는 인간의 입장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을 위한 것
    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천지 만물
    의 이치 그 자체를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생
    각속에서 나온 것을 인간에게 전파하여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인간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인간은 다만 이성을  넘어선 혜안을 통하여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왕자는 이 괘상을 보고 천지의 작용에 사람의 힘을 보태어 천
    지의 원만함을 도와 대성하게 하고, 인민을 태평성세로 인도한다."
    자연의 이치를 뜻으로 삼은  군자는 인간의 입장을  도와 자연의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운행에 인간의  힘을 보태어 자연
    의 이치를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최근 인간은 인간의 입장을 만족
    시키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인간
    의 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인간
    을 편안하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자연의 도리를
    무시한데서 온 어리석음의 결과입니다.
      진정으로 인간을 편안한 곳으로  인도할 수 있는  왕은 자연의
    순리에 인간의 힘을 보태어  자연의 운행질서를 대성(大成)시켜,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을 인간이 누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천태]가 지향하는 변혁의 세계입니다.
      
        첫번째 양효. 띠풀 한 포기를 뽑으면 뿌리가 서로 얽
        힌 여러뿌리가 함께 뽑힌다. 밖으로 향하여  호응 발
        전하는 상징이다. 많은 동지와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
        하는 것이 좋다. 길하다.
     
            初九, 拔茅茹. 以其彙.  征吉. 象曰, 拔茅
            征吉, 志在外也.
     
      "띠풀 한 포기를 뽑으면 뿌리가 서로 얽힌 여러뿌리가 함께 뽑
    힌다." 하괘는 모두 양효로서 이 세상에 강한 자기 자신이 확립되
    어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세상과 조화될 수  있는 건실한
    뜻을 세운 사람이, 그 확고한 주관으로 이 세상을 위한 일을 하면
    세상 사람이 모두 호응하여 주게 되어 있습니다. 뿌리가  얽힌 여
    러뿌리가 함께 뽑힌다는 것은 위로 이양(二陽), 삼양(三陽)이 호
    응하여 같이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치에 따르지 않아 세상과 조화될  수 없는 사람이 자
    기의 욕심으로 행동하면, 비록 남달리 비상하게 강한 의지와 신념
    으로 자신의 목표는 달성할 지라도, 영광을 같이 누려야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슬픈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흔히 큰 일을 성
    사시키고 나서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  혹은 사고를 당하여 죽
    었다라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나 듣습니다. 흔히 "끝까지
    살아봐야지." 하고 악착같이 살아서  집 장만하고 좀  살만하니까
    죽었더라 하는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내가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우리 전 식구가  먹고 살아야지"
    하고 돈을 벌면, 돈은 모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이 먹고 살
    아야 하는 식구가 죽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
    난 사람들도 대개 이런  경우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한가지  일에
    너무 전념하다 보니까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는데도, 일할 때는 그
    것을 모르고 있다가 일이  성사되자 긴장이 풀어져  병이 생겼다
    혹은 사고를 당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일하면서 긴장속에
    서 자기 스스로를 매우 위험한 상태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두려움 없는 마음으로 위험을 타고 들어가지 못하고, 근
    심과 불안을 안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이
    하면, 불안한게 안따르는 법이지만, 근심을  갖고 일을 하면 근심
    이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근심은  일을 이루
    기 위한 최소한도의 조바심 혹은  경계심이 아닌 "잘못되면 나는
    죽는다."라고 하는 강박관념적인 근심입니다.
      "밖으로 향하여 호응 발전하는 상징이다. 많은 동지와  함께 적
    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좋다. 길하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우환
    을 갖고 열심히 하면 성공은 할 수 있으나, 그  뒤에는 반드시 우
    환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이라는 것은 자연의 생명
    력이 아니고, 그 사람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장에 매
    여 있는 사람은 자연이 파괴시켜 버립니다.  "뭣 때문에", "뭣 때
    문에", "뭣 때문에" 하는 사람은 그 '때문에'가  바로 자기 자신임
    을 알아야 합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갈 수 있는 가벼운  마음은
    위험한 부분을 어떻게 극복하는 가를 먼저 생각하지만, 죽으면 어
    떻하나 하는 무거운 마음은  위험을 변명의 구실로 삼게  됩니다.
    따라서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기강을 확립한  사람은 주변이
    승복하여 많은 동지를 얻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만 그
    렇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이룩한 사회적 지위와 재산은 세상과 조화를 이
    루어낸 성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하나의 불균형이기  때문에 자
    연은 이를 파괴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받을 뿐 호응을 얻을 수 없습니다. 비록  자신의 강
    한 의지의 힘으로 작은 지위 정도는 얻을 수 있으나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두번째 양효. 오염과 혼탁을 포용하는 도량, 대하(大
        河)를 맨 발로 건너뛰는 과단,  원근(遠近)을 버리지
        않는 박애, 정실(情實)을 끊어 버리는 공정, 이런 큰
        덕을 갖춘다면 태평성세로 발전하여 크게 빛나리라.
     
            九二, 包荒, 用憑河,  不遐遺, 朋亡, 得尙
            于中行. 象曰, 包荒, 得尙于中行,  以光大
            也.
           
      "오염과 혼탁을 포용하는 도량, 대하(大河)를 맨 발로 건너뛰는
    과단, 원근(遠近)을 버리지 않는 박애, 정실(情實)을 끊어 버리는
    공정" 자연의 이치로 사는  사람은 낮은 곳으로  스스로 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뛰어나다고 높고 화려한  세계에 안주하
    지 않고, 세상의 더럽고 혼탁된 곳에 스스로  임하여 이를 제도하
    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비록 고난과 위험이 있을  지라도 이를
    회피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기강으로 태연히 받아들
    이는 과단성이 있습니다. 또 자신의 측근에서  아첨한다고 전적으
    로 신임하거나 혹은 배척하는 일도 없고, 멀리 있어 눈에 띄지 않
    는다고 관심이 소홀해 지는  일이 없이, 항상 공명정대하게  모든
    사람을 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태평성세를 이
    루는 것입니다.
      
        세번째 양효. 평평한 것도 가운데가 있고, 가는 것은
        반드시 돌아오는 법.  태평한 세상이라고 하나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불안하고 어려
        운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렵고  곤란한 가운데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한결같이 결심하고  노력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성실을 근심할 것이 없다. 먹을 때
        유복하리라.
     
            九三, 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无咎.  勿
            恤其孚. 于食有福. 象曰, 无往不復,  天地
            際也.
           
      "평평한 것도 가운데가 있고,  가는 것은 반드시  돌아오는 법.
    태평한 세상이라고 하나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
    는 불안하고 어려운 일도 있을 것이다."  지천태는 지금까지의 괘
    에서 볼 수 없었던 강한  양의 기운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운이
    나아가는 데에는 항상 조심성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평
    평한 것일 지라도 가까이서 보면 울퉁불퉁한 것이 있기 마련입니
    다. 위로는 전부다 음에너지가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의 양
    에너지와 반대되는 것이 없이 대응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 세번째
    효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라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
    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도둑놈도 많고 강도도 많고  악인도
    많습니다. 비록 세상이 아무리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세상을 증오
    하고 욕하지 말고 겸손한 가운데 세상을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자
    기 세계를 펼쳐라라는 뜻입니다. 그런 가운데 향기있는 꽃이 피는
    것이지 어려움도 없이 그냥 무럭무럭 자란 꽃은 냄새가 없습니다.
      "어렵고 곤란한 가운데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한결같이 결심하
    고 노력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중요한 것은  마음의 동요없이 처
    음의 뜻으로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연의  이치로
    사는 사람은 곧 대운하와 큰 강도 맨발로  건너 뛸 수 있는 과단
    성이 있기 때문에 동요하는 마음이 없이 한결같이 노력하는 사람
    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양의 기운으로 꾸준히  해왔던 마음가짐
    과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다면 성실을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먹을 때 유복하리라." 있을 때는 가졌다라고 하는 행복감에 젖
    어 있지 않으며, 곤란한 일이 닥칠 때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게  자연이 행복을 베푼다는  뜻입니다.
    일을 마친 후 복을 받는 것이 아닌, 매사에 성실을  잃지 않고 쉬
    지않고 노력하는 가운데 이미 행복을  느끼는 위대한 양성에너지
    의 모습입니다.
      
        네번째 음효. 새들이 떼를 지어 훨훨  하늘을 날듯이
        여러사람이 마음을 모아 전진하고 있다. 자신의 우월
        함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남과 더불어 이를 삼아 사귀
        니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기에 새삼스럽게 애
        쓰지 않아도 성심은 절로 일어난다.
     
            六四, 翩翩. 不當以其隣. 不戒以孚. 象曰,
            翩翩不當, 皆失實也. 不戒以孚, 中心願也.
           
      "새들이 떼를 지어 훨훨 하늘을  날듯이 여러사람이 마음을 모
    아 전진하고 있다." [음]의 자리에 음효가 있어 모든 것을 받아들
    이는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이 음효는 대응하는  첫번째 양효의
    강한 에너지를 구하여 결국은 일을 이루나갑니다. 이 괘의 위대성
    은 대화합입니다. 화합이기 때문에 네번째가 음의  자리에 있지만
    자신을 공정하게하여 세상에  빠지지 아니하고  올바른 판단으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남과 더불어  이를 삼아
    사귀니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기에 새삼스럽게 애쓰지 않
    아도 성심은 절로 일어난다." 그렇게 조심하는  자세로 꾸준히 해
    나가면, 주역은 역순하기 때문에, 이제 세상에 강한 나의 뜻이 서
    서히 굳혀지며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
    면서도 이 네번째 효는 음효이기 때문에 자신의 우월감에 빠지지
    않고 겸손한 태도로 남과 화합하려고 하니 더더욱 모든 사람들이
    호응하게 됩니다.
      
        다섯번째 음효 은나라 임금 제을(帝乙)은  어진 신하
        를 존경하여 누이를  그의 아내로 시집보냈다.  이런
        겸허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니 경사스러운  복이 저
        절로 이루어져 크게 길하다.
     
            六五, 帝乙歸妹, 以祉元吉. 象曰,  以祉元
            吉, 中以行願也.
      "겸허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니 경사스러운 복이 저절로 이루
    어져 크게 길하다." 다섯번째 음효입니다. 이 곳은 본래 양효가 있
    어야 할 자리인데 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음효는 이미 밑의 괘
    의 [양]의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외부를  향하여 에너지를
    펼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음]이라서 자신이  나서서 펼
    치지 아니하고 세상에 대해 최대의  겸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
    다. 여기서 겸손은 안은 꼿꼿한데  겉으로 숙이는 겸손이 아니라,
    자신이 없어지는 겸손입니다. 최대의 겸손이라는 것은  자신의 뜻
    은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게 하고 자기 자신은 스스로 사라져서,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인위적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아닌, 순리에 순화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곧 중용을 의미
    합니다.
      옛날에 예수는 세상이 죽이겠다고 하니까  최대의 겸손으로 받
    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정신입니다.
    뜻은 이제 눈에 보이게 일부러 펼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의 순
    리대로 저절로 나타나게 할 뿐입니다.
     
        여섯번째 음효. 성은 무너져서 성 밖의  도랑을 메운
        다. 태평성세도 이제  다해서 동란의 징조가  나타난
        다. 함부로 군을  동원해서 힘으로 누르려고  해서는
        안된다. 나라안이 분열하여 왕명이 시행되지 않는다.
        바른 일이라도 비난을 받아 궁지에 빠진다.
     
            上六, 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吝.
            象曰, 城復于隍, 其命亂也.
     
      "성은 무너져서 성 밖의  도랑을 메운다." 큰 것은  끝내가서는
    허물어져 밑에 뚫린 구멍을 막는 법입니다. 자연은 에너지가 크게
    있게끔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이 너무 커지면  세상은
    그를 멸망시켜 버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라지는  것은 기정사실
    입니다. 인간의 몸뚱아리는 유한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멸망된
    다 하더라도 내가 세운  올바른 뜻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상 훌륭한 인물들은 오래 살아봐아 100년
    을 못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없어져도 그 사람의  업적은
    역사속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주가 지금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깨질 수 없는 시스
    템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시스템
    은 자연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만물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따라
    서 사람도 그 사람이 이룬 업적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
    의 시스템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여섯번째 효는 [음]의 자리에 [음]이 있어 안에서 솟구쳐 나갈
    려고 하는 양성기운만 끝까지 안으로 함축하여 잘 지키고, 오히려
    세상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나는 사라지지만  뜻은 영원히 멸망하
    지 않고 뿜어져 나갈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줍니다.  수많은
    성현들은 갔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아직도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
    다. 그것은 그들의 뜻이 세상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거
    기에 순응하였기 때문입니다.
      벌되, 벌어들이되, 벌어들인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해야 합니다. 물건은 아끼되, 그  물건이 반드시 내 것이 아
    니다라는 것을 알고 아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물의  종이
    되어야만 만물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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