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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천택리(天澤履)
    『 강자를 따르다 』
      
     ○    세상은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겠지
     ○    만, 그러나 죽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죽는 수도  있
     ○    습니다. 하루에도 교통사고 사망자가 수십명씩 나옵
            니다. 거기에 내가 끼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    그렇지만 위험의 이치를 알면, 비록 범의 꼬리를 밟
     ○    는 것과 같은 위험에 처하더라도, 범에 물려 죽임을 
     ○    당하는 일은 피할 수가 있습니다.
      
                            천택리(天澤履)
     
        이(履)의 괘는 유순함이 굳센 것을 따르는 형상이다.
        충심으로 기꺼이 선인들을  따른다면 호랑이  꼬리를
        밟는 위험을 범하더라도 물려 죽지는 않고 뜻을 이룰
        수가 있다. 오양(五陽)은 중정(中正)의  위치에 있어
        서 강건, 중정의 덕을 나타내며 천자의  자리에 올라
        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 그 빛은 널리 천하에 빛
        나리라.
      
            履虎尾不□人. 亨. 象曰, 履柔履剛也.  說
            而應乎乾. 是以履虎尾不□人, 亨. 剛中正,
            履常位而不구, 光明也.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위험하게 하는 것들은 도
    처에 있습니다. 가만히 서있을 때는 공기가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
    을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속력을 내서 질주하면
    공기가 얼굴에 맞부딪쳐 피부가 따갑고 눈을 뜨기가 곤란해 집니
    다. 또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 수영장에서 한 일년 연습을 하여 어
    느 정도 실력을 갖추었을지라도,  막상 바다에 가서 헤엄을  치면
    파도와 수압에 의해 자신이 의도했던  목적지까지 가기가 의외로
    매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명확한 뜻을 세우고 그것을  세상에 펼쳐야겠다는 신념
    을 확고히 구축하였을 지라도, 막상 세상과  부딛치면 세상으로부
    터 오는 압력을 받게 됩니다.  이때 자기 옳은 것만 믿고  세상의
    압력을 무시하고 저돌적으로 나가면 끝내는 그 압력에 자신이 다
    쳐서 쓰러지게 됩니다. 따라서 오토바이를 타기 전에 달리는 오토
    바이가 공기의 저항을 받는 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화이바를 구
    해서 착용해야 하는 것처럼, 바다에서 수영을 하려면 파도가 치므
    로 그 파도를 극복하기 위해 오리발, 물안경  등의 장구를 갖추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처럼, 세상에 나아갈 때는 세상의 법칙를 먼저
    이해하고 느낀 다음 안전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64괘중 [풍천소축]까지는 외부로 나아가기 전 내부를 정비하는
    단계였습니다. 그래서 뜻을 세우고,  지혜를 기르고, 실력을  갖추
    어, 나가면서 자기 기반을 하나씩 하나씩 다져서  드디어 [풍천소
    축]에 이르러 작은 기반이 구축되었습니다. 이제 그  기반을 바탕
    으로 세상을 향해 뻗어 나아가는 시점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
    무리 자신이 옳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법도와 작
    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법도와 작용을 먼저 이해하고 나아가야
    지 그렇지 않으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 바로
    [천택리]입니다.
      우리의 생활반경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은 자신에게는 대
    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남들이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대
    학 입학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자신에게는  큰 일인 것같지만 통
    계적으로 보아서 큰 일도 아닙니다. 대학 입학 시험에  80만이 보
    아서 30만이 붙고 50만이 떨어져 나갑니다. 자신이  그 50만 가운
    데 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것
    을 무슨 대단한 충격으로  생각해서 그로 인해  마음이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움직이는 사람은 정말 별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주변상황에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변하는  자신의 심정에 자
    기 영혼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신을 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해괴망측하다고 하더라도 하늘은 한가지 메카니즘
    으로 움직일 뿐이지 수많은 법칙으로 운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
    문에 많은 것 안에 파묻혀서 하늘의  장난에 자기 자신이 희생되
    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자신을 구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구했을 때 주역이  말하고 있는 하늘의 세계
    를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운행은  하나의 메카니
    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그  메카니즘을 분명히 알아라
    라는 것이 천택리입니다.
      "이(履)의 괘는 유순함이 굳센 것을  따르는 형상이다." 천(天)
    은 하늘이고 택(澤)은 물입니다. 하늘 밑에 물이 있습니다. 이 물
    은 하늘을 떠나야만 합니다. 천은 모두 다 양효로  이루어진 양성
    괘이고, 택은 양효 두 개에 음효 하나로 이루어진 음성 괘입니다.
    따라서 천택이는 아래의 연못이 여성의  유순함을 가지고 하늘을
    따르는 형상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따른다는 것이  단순히 무턱대
    고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칙을  따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늘의 법칙을 잘 알아야만 따를 수 있습니다. 즉  이치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지만이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이야
    기입니다.
      물은 하늘로 오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물은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물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
    니다. 그러나 비가 오는 것은 반드시 그 이면에 비가 전부다 위로
    올라갔기 때문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즉 비가 내리는 데는 반드시
    물을 올려놓은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물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
    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분명
    히 물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물을 하늘로 올려낸 법칙, 그 법칙을
    파악하고 따라야만 물이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충심으로 기꺼이 선인들을 따른다면 호랑이 꼬리를 밟는 위험
    을 범하더라도 물려 죽지는  않고 뜻을 이룰 수가  있다." 세상은
    내가 하겠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되어지게
    끔 하는 법칙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 메카니즘을 찾는다면 아무
    리 위험한 일이 있더라도 위험에 빠지지 않고 능히 그 위험을 극
    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겠지만, 그러나 죽
    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죽는 수도 있습니다. 하루에도  교통사고
    사망자가 수십명씩 나옵니다. 거기에 내가 끼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위험의 이치를 알면,  비록 범의 꼬리를 밟는
    것과 같은 위험에 처하더라도, 범에 물려 죽임을  당하는 일은 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상. 하늘은 위로,  연못은 아래로, 이것이  [이]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상하  귀천의 신분
        제도를 밝히고, 예의를 정해서 백성에게 질서의 관념
        을 심어준다.
     
            象曰, 上天下澤履. 君子以辨上下. 定民志.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상하 귀천의 신분제도를 밝히고, 예의
    를 정해서 백성에게 질서의 관념을 심어준다." 군자가 이 괘를 보
    고 상하 귀천의 신분제도를 밝히는 것은 바로 천리(天理)에 의해
    서 나타나는 그 이치를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이치에 인
    간이 유순하게 따를 수  있도록 행동의 법도를  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도덕, 윤리, 법질서 이와같은 것들은  사실 자연의 이치에 인간
    이 쉽게 순응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도입니다. 그것은 천리
    를 바탕으로 인간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그
    래서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우주의 법칙을 알고, 그 법칙에 의해
    예의를 정하고 질서 관념을 심어, 인민의 마음을 안정시켜 세상을
    풍요롭게 가꾸어 나간다고 했습니다.
     
        첫번째 양효. 순수한 마음으로 홀로 바른  길을 걸어
        간다. 전진하여 허물이 없다.
     
            初九, 素履. 往无咎.  象曰, 素履之往, 獨
            行願也.
         
      첫번째 양효입니다. [양]의 자리에 양효가 있어 이 땅에 자기의
    뜻이 확실함을 나타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홀로  바른 길을 걸
    어간다." 그래서 뜻이 확실한 자기를 믿고  홀로 걸어가도 조금도
    거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뜻이 의당 있어야할  곳에 있는
    옳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옳은 뜻을 세상이 아무리 헐뜯는다고
    하더라도 당당히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두번째 양효. 겸손한 태도로 홀로 큰  길을 성의있게
        걸어간다. 가슴속의 바른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여
        변함이 없으면 길하리라.
     
            九二, 履道坦坦. 幽人貞吉. 象曰,  幽人貞
            吉, 中不自亂也.
           
      두번째 양효입니다. 여기는 원래 음의 자리입니다. 음의 자리에
    양이 가므로 사실은 주저해야할 때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의
    세계에서 수많은 비난이 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비난이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그 뜻을 잃지 않고  나아가면 허물이 없다는 것입
    니다.
      "겸손한 태도로 홀로 큰 길을 성의있게 걸어간다." 여기서는 겸
    손해야 합니다. 음의 자리에 양이 있기 때문에 원래  제자리가 아
    니어서 스스로를 잘 살펴야 됩니다. 그리고  "가슴속의 바른 마음
    이" 유혹이나 소란함에 흔들리지  아니하여 "변함이 없으면 길하
    다." 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음효. 애꾸눈과  절름발이 이면서 남보다  더
        잘 보며, 더 잘  걷는다고 뽐낸다. 이런자와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 자기의 비재(非才)를  돌보지 않고
        함부로 나간다면 호랑이 꼬리를 밟아 물려 죽을 것이
        다. 흉하다. 무인(武人)이  군주가 된 것같다.  너무
        강한 것만을 내세워서는 영속될 수가 없다.
           
            六三, 묘能視,  跛能履.  履虎尾□人. 凶.
            武人爲于大君. 象曰, 묘能視, 不足以有明
            也. 跛能履, 不足以與行也. □人之凶,  位
            不當也. 武人爲于大君, 志剛也.
     
      [양]의 자리에 [음]이 왔습니다. [양]의 자리에 [음]이 오면 나
    갈 것이 나가지 않고  쓸데없는게 나가기 쉽습니다. 여기는  양의
    자리이기 때문에 뭔가 내보내야 합니다. 옳바르게 되려면 뜻이 나
    와야 되는데, 음이기 때문에 음으로부터 들어 오는 자기가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잘났다고 나가게  되며, 이렇게 되면 주위
    로부터 핍박을 받아 매우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애꾸눈과 절름발이 이면서 남보다 더 잘 보며, 더 잘 걷는다고
    뽐낸다. 이런자와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 자기의 비재(非才)를
    돌보지 않고 함부로 나간다면 호랑이 꼬리를  밟아 물려 죽을 것
    이다." 애꾸눈, 절름발이 이면서 남보다 더 잘 보며, 더 잘 걷는다
    고 자만한다면, 즉 자기의 재능을 돌아볼 줄  모르고 부족한 점을
    살펴서 보완하지 않는 사람은 함부로 행동하다가 범의 꼬리를 밟
    고 교살될 것입니다.
      자만하면 그 생각이 너무 강하기만 하여 위험합니다. 잘 된다고
    언덕에서 내리막길로 있는 힘껏 뛰면 도리어 자신을 못이겨 넘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반성하며 세상에 맞추어 갈  수 있어
    야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법입니다.
      "무인(武人)이 군주가 된 것같다. 너무 강한 것만을 내세워서는
    영속될 수가 없다." 아무리 자기의 가는  힘이 강하더라도 스스로
    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조심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번째 효
    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일단 다시 점검하고,  자기 자신이 어떤점
    이 부족한가, 잘 될 때는 뭔가 위험한  상태가 아닌가를 점검하라
    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와지면 죽기 하루나 이틀전에 갑자기 생
    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촛불도 다타서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
    달아 오릅니다. 그것은 우리 몸에 있는 에너지가 몸을  빠져 나갈
    때쯤 되면 몸에서 떨어져 나가기 위해  힘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
    다. 내보내는 힘이 있기 위해서 잠시 생기가 도는 것입니다. 따라
    서 이 때를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늙은이가 갑자기 힘이 펄펄 난
    다면 곧 꺼져 버리기 직전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기분좋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또 너무  침울할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지 음양이 적당히 조화를 맞추어야지,
    양성 기운쪽으로만 나가면 몸이 망가지고, 음성  기운쪽으로만 나
    아가면 존재가 녹슬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적당히 그  상태를
    맞추어 나가야 되며, 상황에 의해서 벌어지는 세계를 면밀히 관찰
    하라는 것이 바로 [천택리]입니다.
     
        네번째 양효.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같은  마음으로
        잘못을 범하지나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두려워하면
        마침내는 길하여 뜻이 행하여질 것이다.
     
            九四, 履虎尾. 소소終吉. 象曰, 소소終吉,
            志行也.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같은 마음으로 잘못을 범하지나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두려워하면 마침내는 길하여  뜻이 행하여질 것이
    다." 이 곳은 음의 자리인데 양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양이 있
    으나 음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음의 자리에서 양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갈때 음의 상태에서 범의 꼬리를 밟지나 않을까
    하고 조심을 하면 마침내 양은 무난히  넘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
    다.
      효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여섯개의 자리를 잘 보아야 합니다. 각
    각의 효가 단편적으로 하나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
    니다. 하괘에도 천.지.인, 상괘에도 천.지.인이 있어 효가 두 번 겹
    쳐서 있습니다. 왜냐면 현상은 나에 의해서 벌어질 수도  있고 세
    상에 의해서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불쾌지수에 의해서 내
    가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고,  또 내 기분이 원래  나쁘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을 기분나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세계는 겹쳐질 수 있는  것이기에 주역은 두가지  세계를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를 잘 견뎌나가게 되면 바깥
    세계가 안의 세계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역은  역순한다."라
    도 말하고 있습니다.
      주역은 역순하기 때문에 지금 상태는 하나의 비젼을 일으킬 수
    있는 단계에 와있는 것입니다. 자기 세계와 주변의 세계를  잘 살
    펴서 조화를 이루어내면 주변의 세계가  자기 세계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고로 자연은 불평불만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자연의 불
    평불만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자연이 행복하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그걸 들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행복합니다. 자연의 행복이 나한테 오기 위해서는 결국은 누가 하
    느냐? 내가 해야 됩니다. 세번째의 효에서는 자기 세계를 잘 다스
    리지 못하면 범의 꼬리를 밟아 목숨을 잃게 된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 효에서는 범의 꼬리를 밟더라도 신중함을 잃지 않으면 위험
    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세번째  효는 위험의 요소가 내게  있었
    고, 네번째 효는 위험의 요소가 주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번째 양효. 주저없이  결단하여 이행하려  한다.
        바른 일일지라도 위험은 있는 것이다. 강한  자가 군
        주의 지위에 있으니 그 지위는 정당하다.  그러나 강
        한 처사에는 위험이 있기 마련이다.
     
            九五, 決履. 貞려. 象曰, 決履, 貞려, 位正
            當也.
         
      "강한 자가 군주의 지위에 있으니 그 지위는  정당하다. 그러나
    강한 처사에는 위험이 있기  마련이다." 다섯번째 양효입니다. 마
    땅히 [양]이 있을 자리에 [양]이 있으며  제일 높은 자리에 있습
    니다. 그러나 대응관계에 있는  두번째 자리에 같은 양효가  있어
    밀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제자리에 왕이 앉았다  하더라도 왕밑
    에 장수가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번째 양효는, 강한 자
    가 군주의 지위에 있어 정당하므로 주저없이 결단하여 행하려 하
    나, 도전하는 신하가 있어 위험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
    른 것은 강하게 갖더라도  그것을 밀어내려는 세계도  항상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법칙을 알지  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왕이라고 해서 왕의 자리가 반드시 자기 자리라고 생각
    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 반란이 일어나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 올만한 사람이 오기 위해서  왕을 제거했다는 것은 말
    이 되지만, 왕만 제거하면 내가 왕이 된다는 것은 절대 보장이 없
    습니다. 반란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면  자신이 왕이될 것 같은데,
    실제로 왕을 쫓아내면 자신도 얼마 안있다가 쫓겨나게 됩니다. 자
    연의 방정식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법칙을  알고 이
    러한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됩니다.
      천택리는 그런 법칙을 모르고 마냥  내자리라고 생각하고 앉아
    있으면 언젠가 밀려날 가능성도 있다, 단 너를 밀어낸 자가 네 자
    리에 앉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
    리는 포용력을 갖고 세상일을 자기 일처럼 아끼듯이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자기 사랑은 자기가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
    자가 시집을 가서 시부모 및 시댁과 반목을 해서는  안됩니다. 거
    기서 수용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이러한 덕을 갖추
    지 못하면 아무리 여자가  학벌이 좋고 미모가  뛰어나고 집안에
    돈이 많아도 결국 시집에서 밀려나 외롭게 되어 버립니다.  또 요
    즈음 들어 부잣집 딸 좋아하는 시댁이 많은데, 그런 것 바라는 남
    자치고 제대로 될 수 없다는 것도 이 괘는 지금 증명해주고 있습
    니다. 그런 사람은 얼마후 여자가 암에 걸려 죽든가  하여 홀아비
    가 되는 것으로 인생을 끝내게 됩니다. 신은 그런 걸 아주 교묘하
    게 만들어 놓고 황당히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
    은 인간이 뭐가 옳고 뭐가 그르다 하고 경우 따지는 것에 꿈적도
    안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 세계를 잘
    관찰해서 신의 편에 서서 인간사를 모면해 가야지,  인간 편에 서
    서 세상은 불공평하다느니 하는 얘기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
    니다.
      "강한 처사에는 위험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음성기운을 포
    용하고 있어야 하는데 음을 포용하고  있지 못하다라는 이야기입
    니다. 신은 장난하지만 그것은 공평한 장난이지 결코 어설픈 장난
    이 아닙니다.
     
        여섯번째 양효. 행동을 반성하여  길흉화복의 증상을
        상고한다. 그리하여 잘못된 것을 고친다.  크게 길하
        다. 큰 경사가 있으리라.
           
            上九, 視履考祥. 其旅元吉  象曰, 元吉在
            上, 大有□也.
           
      "행동을 반성하여 길흉화복의 증상을 상고한다." 우리가 주역을
    읽는 이유도 결국 자연의 이치를, 신의 세계의  성리를 알기 위해
    서입니다. 이곳은 음의 자리인데 양이  있습니다. 이 세계에 뜻을
    계속 펼친다는 뜻입니다. 펼칠 뿐만 아니라 음의 자리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심사숙고합니다. 특히 상응하는 관계에 있는  세번째 효
    가 음효이기 때문에 심사숙고하는 비중이 매우 큽니다. 따라서 자
    신의 기분은 마음대로 나가려 하는데 상황을 잘 살펴보고 스스로
    반성하여 상황에 맞추어 나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
    로 크게 길하고 마지막에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택리]는 이치를 따름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오는 위험과 불안,
    근심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천택리]의
    미래상은 하늘이 밑으로 내려오고, 물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
    문에 결국 내가 뜻하였던 것이 세상에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음
    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뜻을 꿋꿋이 밀고  나가면서도 세
    상으로부터의 유혹과 비난을 견디고, 또 자기 잘난 마음에 빠지지
    말며, 겸허한 자세로 자연의 법칙을 배우고 따라야만  이룰 수 있
    을 것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4790
  • 9. 풍천소축(風天小畜)
    『 가로막는 아내 』
          
    ●     조강지처를 버리는  사람은 덕이  없는 사람입니
    ○     다. 출세를 위해 어려울 때  도와주던 애인을 멀
    ○     리하고 재벌의 딸과 결혼하는  사람은 집안이 평
            안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앞만 보고 가면 바탕이
    ○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눈앞의  성공은 못하더
    ○     라도 바탕은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바탕이 그
    ○     사람을 잘 받쳐주는 것, 그것이  더 훌륭한 것입
            니다. 그래야만 그안에서  평안히 숨쉬며  살 수
            있습니다.
            
                        풍천소축(風天小畜)
     
        소축(小畜)의 괘는 그 뜻이 크게 이루어지는 것을 나
        타낸다. 유일한 유효(柔爻)가 바른 자리에 있고 상하
        의 강효(剛爻)가 전부 그것에 호응하고 있다. 안으로
        는 굳센 힘을 갖고 밖으로는 어디까지나 순종을 잃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서쪽 하늘에서 뭉게  구름이 일
        어날 뿐 아직 비가 되어 만물을 적시지 않는 때이다.
        큰 뜻이 방해를 받아 침체되어 있는  것이다. 노력해
        서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小畜, 亨. 密雲不雨,  自我西郊. 象曰, 小
            畜柔得位而上下應之, 曰小畜. 健而選, 剛
            中而志行, 乃亨. 密雲不雨, 尙往也.  自我
            西郊, 施未行也.
           
      보통 인간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에게 어떤 결
    과가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우는 것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며, 마찬가지로 남자가 여자에게 버럭 화를 낼  때도 뭔가 자
    신에게 돌아올 것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물의 움직
    이는 힘은 항상 무엇인가 되돌아 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
    니다.
      우주에는 수많은 작용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항상  안으
    로 되돌아 오는 기운을 통해서 어느  한 지점에 모아지고 있습니
    다. 그런데 보통 인간이 우주와 다른 점은 그 구심점이 바로 자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강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중용의 도를 갖춘 사람이 보통 인간과  다른 점은 구심점이 자
    신에게 고착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중용의 도를 갖춘 사람도
    자신의 움직임의 힘이 반드시 어딘가에는 되돌아 오게 하고 있습
    니다. 그러나 그는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 어느  곳에라도 모을
    수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하려는 것을
    가지고 있어서 흔히 '불화(不和)'를 일으키는 반면에, 중용의 도를
    갖춘 사람은 필요한 곳에 결과를 나타내기 때문에 불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우주에는 구심점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우주는 틀림없이  구
    심점이 있지만 또 구심점  아닌 곳도 없습니다. 지구의  구심점은
    지구의 중심축입니다. 달의 구심점은 달의 중심축입니다. 또 태양
    계의 중심점은 태양에  있습니다. 은하계의 중심축은  블랙홀입니
    다. 이렇듯 우주에는 중심축들이 어디라고 말할 수없을 만큼 무수
    히 산재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어느 한 곳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
    습니다.
      [수지비]에서는 자신의 뜻이 세상에 하나의 자리로 구축되었습
    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축되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자
    연은, 한편으로는 단편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상당히 미묘하게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어, 자연과의 상관관계속에서 또  다른 현
    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회사를 하나 건립하였다고 해서 그 회사가 잘된다는 보장은 없
    습니다. 만들어 놓고 운영을 하다 보면 어려운 점은 또 생기기 마
    련입니다. [풍천소축]은 바로 이와같이  [수지비]에서 확고부동하
    게 구축된 세계가 이제 다시 외부와 입체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8번째까지 단편적으로 쌓아왔다면  그 쌓아온
    것이 이 세상안에서 어떠한  현상을 나타내며, 또 세상의  현상을
    어떻게 하면 무난히 이겨나갈  수 있는가 라는  점을 풍천소축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주역  64괘는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괘도상의 어느 현상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
    에 설사 좋지 않은  괘라고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반드시 잘 될
    수 있는 원인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도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자체로서 이미 좋은 것
    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의 전부 다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렇게 만들어져서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완전무결한 상태로 나온
    것입니다. 자연은 미완성이라든가 불량품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제품은 아예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이미 완성된  제품으로서 견고한 어느  한 차원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행복이 곧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왜 수많은
    사람들 가운에 이렇게 못생겼을까?' '나는  왜 남들처럼 볼 수 없
    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가?' 하고  자신을 학대하거나 고민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풍천소축]은 위의 괘가 바람을 뜻하는 풍괘이고, 아래 괘가 하
    늘을 뜻하는 천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바람이 부
    는 현상을 나타내며 머지않아 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비와같이 만물을 적셔주고  영양분을 줄만
    한 단계는 아닙니다. 더불어서  바람이 잘못 불면 있는  것마저도
    떨어뜨려 버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 점을 조심하라는 뜻도 내포
    되어 있습니다.
      [풍천소축]의 효를 분석해보면, 아래 내괘가 모두 양효로서  강
    한 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뜻이 이미 하나로  구축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위의 외괘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양효가 둘이고 음
    효가 하나로서 전체적으로  음성입니다. 그래서 양괘가  기세좋게
    나가려 하나 음성에너지에 그 힘을 흡수당하여 결국 미약한 상태,
    즉 약한 바람이 되었습니다.
      여자를 사귀어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남자가 기분이 좋다고 하
    더래도 여자가 중간에 한 번 토라지면 문제가 커지게  됩니다. 고
    기압과 저기압이 있는데 고기압이 아무리 기분좋다가도 저기압을
    만나면 끝내가서는 저기압권으로 흡수되어 버리게 됩니다. 남자들
    이 결혼을 해보면 알겠지만 부인이 토라져 있을 때, 그걸 발로 짓
    밟고 강압적으로 끌고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장래
    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걸  어떻게 잘 다독거리면서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남자 안에는 여자가  둘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좀 삐쭉거릴 때  남자가 더
    삐쭉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앞이 전혀 없는 사람입
    니다. 정말 깡통차고 쌀독을 옆에 놓고 굶어죽기 딱  알맞는 사람
    입니다.
      여자가 조금 삐쭉거릴 때 화가 난다고  해서 절대로 화나는 자
    신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런 인내력이 없고서는  여자를 리드할
    수 없습니다. 천하를 제패할 사람은  여자에 넘어가지 말 것이며,
    여자를 잘 다스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여자가 삐쭉거리는  것은
    자연의 법칙상 그런 것이니까, 그것을 가지고 인간성이 어떻다 저
    떻다 따질 것이 아니라 냉철하게 '이걸 어떻하면 내 쪽으로 잘 이
    끌어 갈 수 있는가?' 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막강한
    인내력이 아니면 넘어가기 힘듭니다. 그 넘어가기 힘든 것을 무사
    히 해냈을때 그 때 비로소 풍전소축이  비를 뿌리는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자가 한번 삐죽거리고서  1정도 토라져 버리면  남자는 그걸
    다독거리는데 적어도 3정도 아니면 7, 8내지 10까지 힘이 듭니다.
    남자 생각에 1분이면 될일도 여자한테는 10분동안 달래고 달래봐
    야 들을까 말까 합니다.  아무리 하늘의 기운을 가지고  남성적인
    힘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려고 해도 이 여성적인 기운을 뚫고 지나
    가려고 하면 무한이 많은 기운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야
    기 입니다.
      풍천소축은 양괘가 위로 기세 등등하게  나아가려고 하는데 위
    에 여자가 있어서 7이라는 에너지가 나가다가 3-4는 빼앗겨 버렸
    습니다. 그래서 소축이 되어버렸습니다. 즉, 여자로 인해서 남자가
    기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 남자가 저마다 기량
    을 발휘하면 이세계는 폭발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걸  막고 있
    는게 여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여자가 반드시 있어야  됩니
    다. 그런데 여자들이 잘  몰라서 자기 남편보고 "왜  너는 나가서
    칠칠맞게 돈도 못벌어 오냐?" 하고 바가지를 긁는 여자들이 있습
    니다. 그런 여자들일수록 그 원인이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하면 틀
    림없습니다.
      풍천소축이 비록 양의 기운이 나아가려고 하다가 음성기운에게
    그 힘을 빼앗겨 소축이 되어 버렸으나, 중요한  것은 그러나 결국
    끝에 가서는 양성기운이 이긴다는 사실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싸
    우면 결국 남자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뜻이라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풀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남자가 잘 다독거려서
    일단 토라진 것이 풀어지면 여자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되돌
    아와서 다시 남성을 감싸며 잘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주역은 역순하기 때문에 외괘가 아래로 내려오고, 내괘가  위로
    올라가면, 풍천소축은 위가 하늘이 되고 아래가 바람이 되어 세상
    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어 이 세상을 풍요
    롭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잘 될  수 있음을 암시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미약하니까 무리하지  말고, 중용의
    도를 지키며 많은 덕을 베풀어 세상을 풍요롭게 하라는 것이 [풍
    천소축]의 교훈입니다.
      "유일한 유효(柔爻)가 바른 자리에 있고  상하의 강효(剛爻)가
    전부 그것에 호응하고 있다." 4번째 음효가 음의 자리에 정당하게
    위치하고 있고 첫번째와 다섯번째의 양효가  음효와 서로 호응하
    고 있으니 바람과 하늘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서로 호응하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굳센 힘을  갖고 밖으로는 어디까지나  순종을 잃지
    않는다." 내괘는 모두 양효로서  강한 양성기운을 나타냅니다. 만
    일 위의 괘가 양성  괘라면 양성기운을 배가하여 내품을  것이며,
    모두 음효이면 아래의  양성기운을 모두 흡수해버리는데,  그렇지
    못하고 음이 하나 양이 둘인 음성괘이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만
    을 흡수해서 미약한 힘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래는 강하
    고 위는 유순하기 때문에 강한 힘이 유순한 것을 통하여 그 뜻이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형통하는 것입니다.
     
        대상. 바람이 하늘 위로 분다. 이것이 소축의 괘상이
        다. 바람만으로는 만물을 윤택하게  적셔주지는 못한
        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자신의  문덕(文德)을 닦
        는다.
     
            象曰, 風行天上小畜. 君子以懿文德.
     
      빨리 일어나는 것이 빨리 식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젊으
    면 매사를 의기양양해서 하는데,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의기양양
    해서 하면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젊은 사
    람 몇몇이 모여 회사를 만들고  5년만에 그룹이 되었으나 십년을
    넘기지 못하고 깨어져 나간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물론 옳
    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좋아서  일도 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깨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세상은 매정합니다. 잘한다고 해서 결코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개가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해서  마음껏 자기
    세계를 이 세상에 들쳐내면은 결국 세상에 의해 자신이 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어쨋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세상
    에 강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양효. 자신의 정당한 길로  돌아가려고 한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길하리라.
     
            初九, 復自道. 何其咎. 吉. 象曰,  復自道,
            其義吉也.
           
      "자신의 정당한 길로 돌아가려고 한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자신의 정당한 길이란, [수지비]에서 이야기 했지만, 자신의 뜻을
    구축한 것입니다. 그 구축된 뜻이 정당할 수 있는 것은 [양]의 자
    리에 [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견고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하였고, 그 구축한 자기가  분명하게 있는 것이고, 분
    명한 자기 자신을 이제 이 세상에 펼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길하다라고 했습니다.
      
        두번째 양효. 지도자와 손을 잡고 바른  길로 돌아간
        다. 길하다. 중용의 도를 지켜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
        지 않는다.
           
            九二, 牽復. 吉.  象曰, 牽復在中, 亦不自
            失也.
     
      "지도자와 손을 잡고 바른 길로 돌아간다."  지도자란 다섯번째
    [양]의 자리에 있는 양효입니다. 올바른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그
    지도자는 바르고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중용의 도를 지켜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런데  두번째 양효는 [음]의  자리에
    [양]이 있으므로 자칫 잘못하면 [음]의  형태를 잃어버리기 쉽습
    니다. 때문에 중용의 도를 지켜 강한 양의 기운만  믿고 나아가지
    말고 지도자와 손을 잡고 바른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다
    섯번째 훌륭한 지도자에 의해 내가 구축해  놓은 그 뜻은 분명히
    세상에 펼쳐질 것입니다.
      만물이 이쪽을 괴롭힌다 하더라도, 또 만물에게 영향을 주지 못
    한다 하더라도, 아직 바람과 같은 상태이긴 하지만 다섯번째의 훌
    륭한 지도자가 견제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중용
    의 도리를 지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하더라도 냅
    다 뛰면 옳은 그것이 허물어져 버리게 됩니다. 달릴수록  안에 중
    심을 항상 간직하고 뛰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중용을 얻을  수 있
    습니다. 중용은 갈 때 올 것을 생각하고, 올 때 갈 것을 생각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그저 가기만 하거나 오기만  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양효. 상행을 강행하려고 수레에 발동을 시작
        한다. 그러나 사음(四陰)이 곁에서 가로막고 상양(上
        陽)이 위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닫는  남편과 억
        제하는 아내가 반목한다. 남편이  가정을 다스릴만한
        덕이 없기 때문이다.
     
            九三, 輿說輻. 夫妻反目. 象曰. 夫妻反目,
            不能正室也.
           
      "상행을 강행하려고 수레에  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사음(四
    陰)이 곁에서 가로막고 상양(上陽)이 위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닫는 남편과 억제하는 아내가 반목한다." 이제 첫번째 두번째에
    서 구축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  '한 번 해봐야지.' 하고선  굉장한
    추진력으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음이 곁에서  가로 막고
    오양, 육양이 위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세번째 양효가
    나아가려고 하는데, 네번째 음효는 단순히 한 개의 음효로 막아서
    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강한 양성 기운 두 개를 등에 엎고 전체
    적인 음성의 힘으로 막아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번째 양효는 기
    를 펼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자연이 중용을 준 것은 만물을 스스로 안정되게 유지하려 함입
    니다. 이 세상에 남자들만 있다면 남자들의 양성에너지가 서로 충
    돌하여 세상은 풍지박산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여자들만 있어
    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아내의 바가지가 없었다면 그 집안은 거
    덜나기 십상입니다. 또 남편도  밖에 나가서 자기 기분대로  마구
    행동하면 아내의 여성에너지가 그리워지게 되는 법입니다. 처음에
    는 아내의 음성에너지가  은근하고 감미롭다가  자기 양에너지가
    막 움직이려고 하면 그것이 그렇게 구속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러나 구속을 뿌리치고 나가다 보면 결국 박살나게 됩니다. 그러면
    또 그리운 것이 음에너지입니다.
      중용을 이룬 사람은 자유자재로  남성에너지를 쓸 수  있고 또
    여성에너지를 쓸 수도 있기  때문에 결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용을 얻지 못한  사람은 남자는 여자가, 여자는  남자가
    필요합니다. 남자가 한 집안을 일구어 나가기 위해서는 여자가 있
    어야 됩니다. 두 사람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바탕이 존재하기 위
    해서는 두 사람의 에너지가 균등하게 필요합니다.  만물은 그렇게
    짜여져 있습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는 것은 서로 좋아하는 이유보
    다도 그 이전에 자연이 양에너지와 음에너지가 서로 결합되어 있
    어야 안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미 바탕을 마련해놓았기 때문입
    니다.
      세번째 효에서 양성에너지가 기세 좋게  나아갈려고 하는데 음
    에너지가 한 번 막아섰습니다. 게다가 그 뒤에 두  개의 양성에너
    지가 강하게 눌러버렸습니다. 그래서  세번째는 기를 펼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기가  드센 여자와 같이
    살면 남자는 기를 못편다는  뜻입니다. 남자가 기가 세고  여자가
    기가 약하면, 남자는 활동하고 여자는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남
    자, 여자 공히 기가 강하면 서로는 매우 짜릿한 사랑을  할 수 있
    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흔히 "우리는 너무나  사랑해서 헤
    어졌다."는 말을 하면서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만일 둘 다 기가
    약하면 그 둘은 서로  만나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기가
    너무 세면 남자가 결국은 기를 펴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통상 여자가 사회적으로 저명한 활동을 하고, 남자는 허드레 일을
    하는 정도에 불과하게 됩니다.
      "남편이 가정을 다스릴만한 덕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가 강한
    여성기운을 누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덕
    (德)'입니다. 덕이란 자신에게 돌아올 손해를 생각하지 않고 남에
    게 진실한 것을 끊임없이  베풀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인위적으로
    베푸는 덕은 덕이 아닙니다.
      흔히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는 사람은  덕이 없는 사람입
    니다. 출세를 위해 어려울  때 도와주던 애인을 멀리하고  재벌의
    딸과 결혼하는 사람은 집안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앞만 보
    고 가면 바탕이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눈앞의 성공은 못하더라
    도 바탕은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바탕이 그 사람을  잘 받쳐주
    는 것, 그것이 더 훌륭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안에서 평안히 숨
    쉬며 살 수 있습니다.
      앞에서 누르는 한이 있더라도 꾸준히 덕을 베풀면, 덕을 통해서
    결국은 자기의 뜻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뜻은 인위적으로 펼치려
    해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있는 뜻에 주변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여드는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덕입니다.
     
        네번째 음효. 성의를  가지고 일에 대처하면  유혈의
        참사도 없어지고 두려움도 사라진다.  윗사람과 마음
        을 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허물이 없다.
     
            六四, 有孚. 血去척出. 无咎. 象曰,  有孚,
            척出, 上合志也.
           
      "성의를 가지고 일에 대처하면 유혈의 참사도 없어지고 두려움
    도 사라진다." 음효가 있어야 할 자리에 마땅히 제자리를 잡고 있
    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턱대고 자기 기분에  나갈려고 하지말고
    살펴서 성의를 갖고 대하면 무난히 넘어갈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무슨 일을 할 때면 통상 1,  2, 3단계까지는 잘 되어 나가다
    가 네번째 단계에 가서 장벽에 부딛칩니다. 이때 과감히  뚫고 나
    가는 마음으로 돌진하게 되면 많은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제부터
    는 냉정하게, 기운으로 나갈 것이 아니고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정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윗사람과 마음을 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음효는 다시 한 번 재정비를 하여  성의를 가지고 일에 대처하라
    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대로 튀어 나가버리면 유혈의 참사를
    당한다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음 다음에 양이  받아들이고 있어
    서 정성을 다하면 윗사람과 마음을 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기예보를 보면 저기압과  고기압이 있습니다. 날씨가  맑은게
    고기압입니다. 구름이  모여있는게 저기압입니다.  일기예보가 왜
    자꾸 틀리냐 하면 고기압의 이동속도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입
    니다. 저기압이 어느 정도 자리잡는가를 알아야만  고기압이 얼마
    만큼의 속도로 갈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주 미약한 저기압
    이 자리잡는다 하더래도 고기압이 이것을  지나가려면 오던 속도
    의 3배를 소모해야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3일  정도는
    더 저기압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기압이 자리잡
    고 있다 하더라도 비록  별볼일 없는 힘이  약한 저기압일지라도
    이 저기압이 한 번 들어오면 한 며칠 동안 날씨는 우중충한 상태
    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기압을 잘 알아야만 고기압을 정
    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한 집이 잘되는 집인가 못되는 집인가는  그 집 안주인을 보고
    서 그 집 남편을 읽으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남편은 괜찮은데 별볼
    일 없는 사람일 경우는 여자에게 문제가 있는 집입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힘이 더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자가 밖에서는  큰 소
    리치지만 집에 들어가면 별볼일 없는게 또 남자입니다. 여자가 한
    번 심지를 틀면 괜히 큰소리를 뻥뻥치면서도 끝내가서는 여보 내
    가 잘못했소 이러고 들어가는게 남자입니다. 남자는  빨리 저기압
    세계를 읽을 줄 알아야 되고 여자는  빨리 고기압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남자가 집안을 잘 꾸려나갈려면 여자를 잘 움직여
    나갈줄 알아야 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움직이지 못하여 결국 여자
    의 치마품속 안에서 녹아나게 되면 그 남성에너지는 아까운 에너
    지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양에너지가 와서 여기서 딱 막히게 되면,  "그냥 무턱대
    고 더 나갈려고 하지 말아라. 자제하고 살펴라. 성실해라. 있는 그
    대로로 되돌아가서 거기에서  그것이 드러나게끔 하라.  기운으로
    가지 말아라. 가속도로 가지  말아라. 원래 네가  가지고 있는 너
    정도를 가지고 가라."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양성과 양성이  붙어
    서 탄력으로 가지 말아라. 탄력을 제어시켜 제어된 상태에서 자기
    바퀴의 알맞는 역량만 발휘해라."라는 말입니다.
     
        다섯번째 양효. 성의를 가지고 남과 손을  잡고 나아
        간다. 부(富)를 독점하지  않고 이웃과 함께  행복을
        나눈다.
     
            九五, 有爭□如, 富以其隣. 象曰,  有爭□
            如, 不獨富也.
           
      "성의를 가지고 남과 손을  잡고 나아간다. 부(富)를  독점하지
    않고 이웃과  함께 행복을  나눈다." 다섯번째  양효입니다. 역시
    [양]의 자리에 [양]이 있고, 가장 높은 지위에  있기 때문에 여기
    에서는 모든 부(富)를 이룰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밑의 네번째 효는  음효이고, 위의 여섯번째 효는  양효로서
    음, 양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중간에 다섯번째  양효가 있기 때문
    에 성의를 가지고 남들을 움직여 나아가고 있으며, 부를 독점하지
    않고 이웃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는 상태임을 뜻하고 있습니다. 즉
    음효에게 베풀줄 알고, 또 받아서 쓸  줄도 알기 때문에, 있는 것
    을 더 번창시키기도 하고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위, 아래 음양 모
    두와 손잡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풍
    족하게 된 상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여섯번째 양효. 기다리던 비는 내려 만물을 적셔주며
        천하가 그의 덕을 숭상하고 흠모한다. 그러나 부녀자
        의 상도는 유순함에 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여
        자가 남자를 억제하는  것은 부도(婦道)에  위태로운
        것이다. 달도 보름이 되면 장차 기울게 되는  법. 이
        것은 흉조다. 군자가 이 이상 더 나아가서는 남의 표
        적을 받으리라.
           
            上九, 旣雨旣處, 尙德載. 婦貞려. 月幾望,
            君子征凶. 象曰, 旣雨旣處, 德積載也.  君
            子征凶, 有所疑也.
     
      "달도 보름이 되면 장차 기울게 되는  법. 이것은 흉조다. 군자
    가 이 이상 더 나아가서는 남의 표적을 받으리라." 우리가 잘된다
    는 것은 어느 한계점이 있습니다. 한계점에서는  한동안 머물러야
    합니다. 군대 계급으로 볼 때, 이등병부터  시작해서 하사관, 위관
    장교, 영관장교 그리고 장군에서  마지막 대장까지 가면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것입니다. 갈 데가 없는 데서 더  가려고 하면 결국
    그 동안의 명예가 손상되고 맙니다. 갈 데가 없는 데서 더 가려고
    하는 것, 그것은 흉한 것입니다.
      원래 주역은 최고로 좋은 것을 가장 걱정하고 있습니다. 최저의
    상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상태에 왔을 때는 스스로 내려
    가야 합니다. 더 가려고 하면 차원을 달리해서 가야지 그 상태 그
    대로 가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커
    진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빨리 지어진 다리는 쉽게  무너집니
    다. 그래서 어느 정도 상태까지 간 다음에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
    해 나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연산력의 장애가 있어서 내가 간다고
    해도 연산력이 따라와주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막 달려
    간다고 해서 세상이 다 딸려가지를 않습니다. 어느 선까지는 딸려
    오거 그 다음부터는 안딸려오는 것입니다.
      길바닥에 바람이 확 불면 먼지가 딸려옵니다. 먼지가  딸려온다
    고 해서 흙덩어리 전체가 딸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즉  어느 선까
    지는 딸려오지만 그 이상은 딸려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람이
    불 때 먼지가 많이 온다고 해서 이 세상이 딸려오는 것같이 생각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 바람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기 때
    문입니다. 만일 흙덩이를 딸려오게 하고 싶다면 바람의 폭을 넓혀
    야 합니다. 그 폭을 넓히지 않고 그대로 계속해서  나가면 흉하다
    는 뜻입니다.
      그래서 풍천소축은, "자기가 뜻한 바를 밀고 나가되, 거듭 거듭
    힘차게 해나가면 '음'의 괘가 있어서 딱 한 번  막히게 된다. 세상
    이 음의 괘 상태로 있어 한 번 막히면 거기서 너무 큰 것을 바라
    지 말고 성실하게 있는  자리를 구축해서 지켜라. 그래서  그나마
    있는 자리를 구축시키고 유지하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천상천하
    가 바뀔 단계가 온다.  그때까지는 자기의 있는 역량에서  더이상
    망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유지할 정도만 이끌어 가도록 하라. 그것
    만으로도 이미 성공한 것이다. 남 앞에 성공을 보일려고 더 큰 것
    을 바라다가는 망하기 쉽다." 라는 뜻입니다.
      풍천소축의 단계를 넘어서 세상을 움직이려면  기량의 폭을 넓
    혀 나아가야 합니다. 기량의 폭을 넓혔을 때 언젠가  세상의 장애
    를 뛰어 넘을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세상은 다시
    바뀌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일단 자제해야 합니다. 주역은 이와
    같이 여러가지의 곡선을 복합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양성기운이 수없이  많이 작용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하나의 음성세계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음성세계를 거슬
    림이 없이 그것을 이겨  나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다룰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다룰려면 먼저 스스로를 다루어야 합니다. 스스로
    를 다룬 자는 냉철한  자입니다. 냉철한 가운데서 세상을  다루어
    나갈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결코 비는 오
    지 않습니다. 비가 올 수 있도록 우리는 스스로를 항상 눈을 뜨고
    냉철하게 바라보면서 나아가려고 하는 끊임없는  마음을 결코 잊
    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4473
  • 8. 수지비(水地比)
    『 공존과 화합 』
           
      ●   인생이 흘러간다는 그 자체,  흐름, 바로 그것은
      ○   이미 길입니다. '어떤 길을 찾아가야 하나?'라고
      ●   생각하는 사람은  길위에서 밤낮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물이 흐르는
      ●   것을 보면, 비록 커다란 돌맹이가 물을 가로막는
      ●   다고 해도, 계속해서 뚫고 지나가면 결국은 돌에
      ●   길이 만들어 집니다. 낙수물에  서까래가 구멍이
            나는 법입니다. 돌이라서 안주할  곳이 못된다고
            '아, 이건 길이 아니다.'하고  튕겨져 나가는 사
            람은 결국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수지비(水地比)
     
        비(比)는 길한 괘다. 비는 서로 친애하고  돕는 것을
        의미한다. 덕망 높은 인자한 군주가 위에  있고 어진
        신하들이 이를 보필하여 상하 마음으로  협력하면 모
        든 인민들도 흠모하고 모여와 순종한다. 이와같이 하
        여 크게 발전하면서 길을 바르게 하여 변함이 없으면
        허물이 있을 수 없다. 중정의 도를 행함으로 상하 모
        두 호응하는 것이다. 천하의 모든 불안정한 무리들이
        찾아와 순종한다. 이러한 귀순의 대열에 늦어지는 자
        는 마침내 나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게 되어 화를 받
        게 되리라.
       
            比, 吉. 原筮, 元永貞, 无咎. 不寧方來. 後
            夫凶. 象曰,  比吉也,  比輔也. 下順從也.
            原筮, 元永貞, 无咎, 以剛中也. 不寧方來,
            上下應也. 後夫凶, 其道窮也.
     
      10살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우리가 20세가 되면  세상사는게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리다보니까 점점 자기 자
    신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잘 되어지는 일도 없고  하면
    나이 30에서 40세쯤 되서는 "인생이란  지겨운 것이다."라는 생각
    이 서서히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한 50이  넘어가고
    60이 넘어가면 지겹다고 그랬으면서도 빨리 죽지는 않고, 또 앞으
    로 "죽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생각이 들면, "지겨워도 좋
    다. 오래만 살아다오." 이러면서 이제 죽는 날이  겁나게 되는, 그
    런 불쌍한 인생을 사는게 우리 사람들입니다.
      또 살아가는 동안에도 남 못지 않게  살려고 남과 항상 비교하
    여 더 잘되기 위해 싸우다 보니까, 별로 잘 되는  것도 없이 기껏
    해야 밤낮 거기가 거기인 채로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부
    지기수로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포기하고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하면서 평범인지 무능인지 분명하지 않은
    채로 그저 무능하게 살아가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몸이 아프면  어
    떻게든지 살려고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큰 수술도  서슴없이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생의  본능(Libido)'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런데 생의 본능 이면에는 반드시 '죽음의 본능(Thanatos)'이 동시
    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음이 있으면 양이 있는 이치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기 쉬
    운데, 사실은 죽음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행위입니다. 살기위해서
    음식물을 먹지만 음식물을 씹는 것은 파괴의 행위를 통해 죽음을
    가까이 느끼려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것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입
    니다. 아주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치면 삶의 본능에  의해 악착같
    이 살아보려고 하지만 동시에 죽음으로써  모든 고난으로부터 벗
    어나고 싶은 충동도 들기 마련입니다.
      만물은 에너지만 빼놓고는 있는 형태를 바꾸려고 합니다.  사람
    들은 장벽에 부딛쳤을 때 자신을 먼저  걱정하고 살기 위해서 생
    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  중간에는 죽음의 본능이 존재하게  되어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가게 됩니다.
     
      생명력으로 흐르는 사람은 죽음의 본능을  넘어서게 되어 있습
    니다. 장벽에 부딛쳤을 때 내 걱정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나아갈 길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생각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저절로 느껴지
    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나 길이고, 길 아닌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면 길이 안나타나고 무덤이 보이는 사람, 눈앞이 깜깜한
    사람, 이런 사람은 生의 본능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갖다 보니까
    死의 본능이 끌어 당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세상 모든 일을 보면 대소사를 막론하고  처음 시작할 때는 으
    례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자기 욕심으로, 자기가 뭔
    가 잘되려고 하는 사람은 어려움에 부딛치면 길을 잃어버리기 일
    쑤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워줄  수
    있는 길만을 선택해서 가려하고,  일단 선택해서 뭔가 좋은  것이
    있다고 판단하면 자꾸만 그곳에 안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뜻을 가지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생명의  기운으로
    흐르는 사람은 반드시 길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늘이
    돕고, 둘째는 땅이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좋은 것이 이것이
    다."라고 생각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이루기 위해 현상황에
    서 중요한 것이 이것이니까, 이것을 지금 나로 인하여 이루어지도
    록 해야되겠다."하고 흐르는 사람은  눈앞에 아무리 어려운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능히 그것을 뚫고 길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
    다. 왜냐하면 흐를려고 하는 자는 흐름 그 자체가  이미 길이라는
    것을 가지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길이 없이 그냥  자기 욕
    심으로 가는 자는 어느 길로 가든지간에 길에 들어서면 전부다 어
    지러울 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부모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은 결코 누가 준 것이 아니고, 자연이 만들어 놓은 자연의 메
    카니즘에서,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러해
    야 된다." 혹은 "저러해야 된다."하면서 우환을 떨고 있는 것을 우
    리는 '인생'인가보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흐른다.'라
    는 것이 가장  진리이며, 그 흐름위에 기쁨이 떠있든지, 슬픔이 떠
    있든지, 떠있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 사정일 뿐 인생 그 자체는 아
    닙니다. 인생이 흘러간다는 그 자체, 흐름, 바로 그것은 이미 길입
    니다. "어떤 길을 찾아가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길위에서
    밤낮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 비록 커다란 돌맹이가 물을 가로막는다
    고 해도, 계속해서 뚫고 지나가면 결국은 돌에  길이 만들어 집니
    다. 낙수물에 서까래가  구멍이 나는 법입니다.  돌이라서 안주할
    곳이 못된다고 "아, 이건 길이 아니다."하고 튕겨져 나가는 사람은
    결국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길을 찾아갈까?" 하고 방황하
    는 사람은 이미 길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권능을 찾을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흐르는 속안에서 "어떤 길을 만들어
    낼 것인가?"가 우리에게 달려있을 뿐입니다.
     
      흐르다 보면 별의별 것들이 다 끼어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들어
    오는 것 가운데서 나쁜 것은 흘려보내고, 필요한  것은 취하여 쓰
    면 됩니다. 필요없는 것이 들어왔다고 해서 길을 바꿀  필요는 없
    습니다. 우리가 심정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은  어디에든지 동화되
    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흘려보낼 것
    은 흘려보내고, 자신은 계속해서 흐르다보면 어느 때인가 이미 넓
    은 강에 도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날이 오게 됩니다.
      흐르는 가운데 돌덩어리가 들어와서 "나는 흐르지 않고 안주하
    겠다."고 하면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돌은 끝끝내 안가겠다고
    하지만, 흐르는 흐름에 의해 자꾸 자꾸 쓸려 나가게 됩니다. 그러
    다 보면 돌은 깨어져 나가고, 닳고 닳아서 반질 반질해지고, 그래
    도 "휴! 살았다."하고 뭉쳐있는 것은 결국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
    입니다.
     
      나쁜 것이 온다고 해서  갈길을 중단하지 말며, 갈길은  가면서
    나쁘고 좋은 것을 가려서  갈 줄 아는 사람이  튼튼한 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인생을  개척해 나
    가는 것, 그런 사람에게 결국 하늘은 길을 터주고 땅이 화합을 해
    준다라는 괘가 바로 [수지비]입니다.
      [수지비]는 물이 땅위에 있어, 물과 땅이 공존하여  화합한다는
    뜻입니다. [지수사]에서는 "뜻이 있으면 하늘이 도와주니 싸워 이
    겨라."하였고, [수지비]는 "이제 세상이 올바른 뜻 하나에 화합한
    다."는 것으로, [지수사]의 과정이 지나면 반드시 이 과정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대상. 대지가 물을 담고 있다. 이것이 [비]의 괘상이
        다. 성왕(聖王)은 이 괘상을 보고 제후를  만국에 봉
        하여 대지가 물을 포용하여 물이 대지에 스며드는 것
        처럼 서로 친애하고 화합하였다.
     
            象曰, 地上有水比. 先王以建萬國, 親諸侯.
     
      우리 인간의 정(精)이라는 것은 화합이 되지를 않게 되어 있습
    니다. 정은 뭉치면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낱개와 낱개는
    뭉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뜻으로 살려면 착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뜻이 있기 위해서는 착한 것도 넘어 설 수 있어야 합니
    다. 뜻을 위해서는 먼저  착한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벨이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하기 위해서 설사 온 재산이 다 날라
    가더라도, 또 자기 동생이 죽어버릴 지라도 계속  노력할 수 있었
    던 그 뜻. 노벨이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해서 돈이나 벌려고 시작했
    더라면 재산 날리고 동생 죽은 다음에 노벨까지도 자살했어야 합
    니다. 또 노벨이 다이나마이트로 전쟁을 일으켜서 자신이 이 세상
    을 지배하려 하였다면 다이나마이트가 터졌을 때 자신이 먼저 죽
    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벨 자신은 결코 그것을 전쟁에 목적하지
    아니하고 "우리 인간 세상에 얼마만한 편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 라는 차원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또 흐르는 자는 반드시  길을 얻는다고, 노벨이 실험대
    위에서 지쳐서 쓰러졌을 때 땅바닥에  똑똑 떨어지는 다이나마이
    트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발견은 결코 실험대 위에서 이
    루어진게 아닙니다.
      인간이 성공할 수 있는 요소도 반드시 눈 앞에 있는 것이 아닙
    니다. 옆으로부터 들어 오는 것입니다. 하늘이 알려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쳤다고 생각하여 주저 앉는  사람한테는 길이 나타나지
    않는 법입니다. 노벨은 아무리 지친 것같지만 틀림없이 다시 벌떡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성공이 발견된 것입니다. 흐르는 자는 아무
    도 막지 못합니다. 신은 그냥 덥썩  안겨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
    것을 받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굽이쳐야 됩니다.  흘러야 합니다.
    그렇게 흘렀을 때 만물이  화친하며 뒤따르는 날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첫번째 음효. 성실한  마음으로 남과 서로  친화하고
        협조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마음에  가득차서 넘칠만
        한 성의가 있으면 생각지 않던 뜻밖의 길한  일이 있
        을 것이다.
     
            初六, 有孚比之, 无咎. 有孚盈缶,  終來有
            □吉. 象曰, 比之初六, 有□吉也.
           
      "성실한 마음으로 남과 서로 친화하고 협조하면 허물이 없으리
    라." 첫번째 음효는 성실한 효입니다. 왜냐면 땅으로서 하늘과 세
    상 모두를 다 수용하면서 분명한 세계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뜻을 세운다고 땅위에 서서 하늘을 망각한채 자기 고집에
    빠지면 화친이라는  현상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첫번째  음효는
    [양]의 자리에 [음]이 있습니다. [양]의 자리는  남에게 협조하지
    않고, 잘못하면  잘난척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낮춰서
    [음]의 덕을 키워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숙여서 그  뜻이 이루
    어질 때까지 세상과 화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가득차서 넘칠만한 성의가 있으면 생각지 않던 뜻밖의
    길한 일이 있을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모든 불화를 이겨낸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죽는다 하더라도, 몸이 갈라진다 하더라
    도, 나는 가리라. 침묵을 지키면서 나는 가리라."  하고 꾸준히 흐
    르면 뜻밖의 길운이 있다는 말입니다.
       
        두번째 음효. 충심으로 군주에게 친화하고 보살피니,
        길이 그 마음을 지키면 길하리라.
     
            六二, 比之自內.  貞吉.  象曰, 比之自內,
            不自失也.
           
      [음]의 자리에 [음]이 있고, 다섯번째 양효와  정응관계를 이루
    어, 위의 뜻만 거역하지 않으면 크게 길합니다. 그러나 유의할 것
    은 세상사람들과 화친하여 꾸준히 나아가 잘되고 있을때, 까닭 잘
    못하면 뜻이 자기 본위로 변해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흔히 정치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국민을
    위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자기를 위
    해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큰 정치인이 될 수 없습
    니다. 땅이 조금 따랐다고 해서 결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생
    명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진정으로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합니다. 국민은 두 번 속지 않습니다. 그
    래서 뜻을 져버리지 말고, 주관적인 자기가  개입되어지지 않는다
    면 대길하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음효. 친화하고 협조하려는  마음을 가졌건만
        주변 이웃에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 가엾은 일이다.
     
            六三, 比之匪人. 象曰, 比之匪人,  不亦傷
            乎.
           
      "친화하고 협조하려는 마음을 가졌건만  주변 이웃에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 이제 내괘에서 외괘로 비약을 할 때입니다. 그런데
    네번째 효가 음효이고, 밑의 효도  음효이고, 대응관계에 있는 효
    도 음효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효의 자리는  [양]의 자리입니다.
    [양]의 자리에 있기때문에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마음은 있는데
    [양]을 만날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외로운  처지라고 하였
    습니다.
      그러나 외롭다고 해서 노력하는 것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사람
    은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록 외로운 법입니다. 세번째  효는 내괘
    중에서 가장 정상입니다. 첫번째, 두번째에서 대길하여 위에 오르
    게 되면 이제 그것은 남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외롭다고  해서 외
    로움에 빠지면 그 자리는 허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마다 최대의 비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정상의 외로움과 함께 그 외로움  속에서 빙긋이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정을 넘어서서 하늘의 기운과  함께
    빙긋이 웃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곧 인간 세상에 아름다운
    미소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높은  지위에 올
    랐을 때 친화할 데가 없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침울하고
    우울하게 하지 말고,  여기가 양효의 자리이니까,  행하려는 것을
    잃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라고 이 효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음효. 현명한  군주를 가까이 모시어  보필한
        다. 친화하고 정성껏 도와 신하의 도리를  지켜 변함
        이 없으면 길하리라.
     
            六四, 外比之. 貞吉.  象曰, 外比於賢, 以
            從上也.
           
      "현명한 군주를 가까이 모시어 보필한다." 다섯번째  양효의 뜻
    을 받들어 신하의 도리를 지켜 계속 흐르면 강을 이룰 수 있습니
    다. 강은 물이 흘러가기 때문에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
    다. 물이 없는 강은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괄세받지
    않기 위해서는 '흐른다'고 하는 강의 뜻을 잘 받들어야 합니다.
     
        다섯번째 양효. 훌륭한  임금이 왕에 있으니  친화와
        협조의 덕이 뚜렷이 드러나 천하가 우러러  본다. 제
        왕은 사냥을 할 때 몰이꾼을 전면에 배치하고 짐승을
        쫓다가 거꾸로 자기 앞을 향하여 달려오는 짐승은 쏘
        지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법. 자기를 향한 자를 보
        호하고 자기를 등진 자를 잡는 것이다.  왕이 이와같
        은 마음으로 자기에게 순종하여 오는 자를 해치지 않
        으니 나라의 인민들이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다. 중용의 도를 지켰기 때문이다.
     
            九五, 顯比.   王用三驅失前禽. 邑人不誠.
            吉. 象曰, 顯比之吉, 位正中也. 舍逆取順,
            失前禽也. 邑人不誠, 上使中也.
           
      "제왕은 사냥을 할 때 몰이꾼을  전면에 배치하고 짐승을 쫓다
    가 거꾸로 자기 앞을  향하여 달려오는 짐승은  쏘지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는 법." 강물은 맑습니다.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흐르
    는 강물에게는 더러운 것도 많이 들어 옵니다. 그러나  강물이 멈
    추지 않고 흐르고 있기 때문에 더러운  것은 더러운 것대로 머물
    르고 흐르는 물은 맑을 수 있습니다. 더럽다고 못해먹는 사람, 어
    렵다고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흐르지 않고 안주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흐르는 사람은 더러운 것이 들어오더라도  일단은 내버려 둡니
    다. 그러면 더러운 것은 더러운 데로 따로 어디서  안주하려고 합
    니다. 물에 똥덩어리가 들어왔을 때 강물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습
    니다. 그리고 그것을 억지로 데려가지도 않습니다. 똥덩어리가 못
    가겠다고 바닥에 들러붙어 있으면 내버려 두고  갑니다. 똥덩어리
    는 결국 흐르는 물한테 조금씩 조금씩  깍여 가지고 없어져 버립
    니다.
      "왕이 이와같은 마음으로 자기에게 순종하여 오는 자를 해치지
    않으니 나라의 인민들이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생명력
    의 흐름은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흐르는  데에는 반드시
    딸려오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면서 생명력은 흐르고 있습니다. 훌륭한 뜻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겠다고 오는  사람은 다 받아주는 것,
    따르지 않겠다는 자는 그대로 두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나라의 백
    성들은 안심하고 따를 수 있습니다.
      어떠한 시비와 어떠한 어려움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
    받아주고 가야 합니다. 받아주고 가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
    다. 그러다 보면 떨어져 나갈 것은 자연히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훌륭한 군주는 그와같은 것이다라고 다섯번째  효는 말하고 있습
    니다.
      흐르는 데는 뭔가 자꾸 딸려옵니다. 집에서 부채를 들고 흔들어
    보면 별의 것들이 다 딸려옵니다. 먼지가 딸려온다고 해서 훌륭한
    뜻은 그걸 막지 않습니다. 내버려 두는 법, 쏘지 않고 두는 법, 그
    러므로 짐승이 제멋대로 달아나는 것은 쏘고 거꾸로 이쪽에 오는
    것, 즉 여기에 합류하려고 하는 것은 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흐
    르는 물에 돌맹이가 들어와서 나는 흐르지 않고 안주하겠다고 하
    면 그냥 내버려 둡니다. 돌은  끝끝내 안가겠다고 하는데, 흐르는
    것한테 자꾸자꾸 쓸려나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돌은 깨져 나가
    고 닳고 닳아져 맨질맨질해지고, 그래도 "휴,  살았다."고 해서 뭉
    쳐 있는 것, 그것은 바다로 가지 못합니다.
      "나쁜 것이 온다고 해서 갈길을 중단하지 말아라.  갈길을 가면
    서 나쁘고 좋은 것을 가려서 갈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튼튼
    한 강을 이룬다." 그렇게 튼튼한 강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바로 수
    지비의 괘입니다. 그 도중에 들어오는 것들, 좋은 것이든 나쁜 것
    이든, 좋은 일은 받아서 함께 흐르고 나쁜 일은 함께 흐르되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흐르면 반드시  이 괘 다음에는 크게
    성공한다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섯번째 음효. 친화의  길에 자신만이 뒤떨어져  있
        다. 이미 남의 손뒤에서서 친화할 것이 없다. 처음에
        남과 사귀지 못하였으니 누구와 더불어  마지막을 함
        께 할 수 있겠는가. 흉하다.
     
            上六, 比之无首. 凶.  象曰, 比之无首, 无
            所終也.
           
      "친화의 길에 자신만이 뒤떨어져 있다." 회사원중에  눈앞의 이
    익을 따라 직장을 옮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100만원을 받고
    있는데 A회사에서 110만원을 준다고 하면 그리로 가고, 또 B회사
    에서 120만원을 둔다고 하면  다시 B회사로 가는 그런  사람입니
    다. 그 사람은 당장은  10만원이나 20만원을 더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억이나 20억은 결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눈앞의 가벼운 이득을 보고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는 사람
    은 결국은 조그만 것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결코 외적으로 주어지는 조그마한 이득에  눈이 멀어서는 안됩니
    다. 그런 사람은 이미 크게 뿌리를 깊이 내려 클  수 있는 나무를
    등져버린 것입니다. 훌륭한  뜻을 갖고 뜻을  보필해야지, 이익에
    눈이 어두워 움직이는 사람은 이미 뜻을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
    에 영원히 훌륭한 자리를 구축할 수 없습니다.
      물이 흘러갈 때는 구축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물은
    흐르다보니까 강이 되었습니다.  또 흐르다보니까 바다가  됐습니
    다. 아주 커다란 세계를 구축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흐르는 생명
    력은 지구의 3/4이나 차지하고 있는 물과 다름없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뜻으로 흐르는 자가 되어  이 세상
    에 풍요를 구축해내야 하겠습니다.
     
     유성 記..…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662
  • 7. 전쟁 - 지수사(地水師)
    『  전쟁  』
           
     ●    군대의 기율(紀律)을 확립하고,  불패의 태세를
     ●    갖추며, 치밀한 계획과 작전으로 적을 스스로 굴
     ●    복하게 하는 것이 대장군이 할 일이라면, 올바른
            전쟁의 명분을 세우고, 전쟁간 천하의 인심을 수
     ●    습하고, 전쟁후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하는
     ○    것, 그것은 제왕이 할  일입니다. 따라서 전쟁을
     ●    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군주와 유능한 장군, 그리
            고 정예 군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준비되지 않으면 결코 나가 싸울 수 없습니다.
                     지수사(地水師)
        사(師)는 군대를 의미한다. 군대를  움직이려면 훌륭한 통솔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훌륭한 통솔자가 있어 확고하고  동요하지 않는 지휘로써 능히 다수를 이끌어 천하의 정의를 행할 수 있으면 그는 곧 천하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강한 신념을 갖고 있으면 서로 포용하여 일제히 협력한다. 위험한 전쟁을 수행하라. 정의의 길에 순응하는 것이다. 비록 한때 천하를 전쟁의 고통속에 몰아넣는 일이 있더라도 인민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심복한다. 그러니 전쟁에 승리할 것이다. 무슨 허물이 있으랴.
       
            師, 貞. 丈人吉无咎.  象曰, 師衆也. 貞正也. 能以衆正,
            可以王矣. 剛中而應,  行險而順. 以此毒天下, 而民從
            之. 吉又何咎矣.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퍽이나 긴 것같지만 사실은 아주 짧은 것입니다. 어제 기어다니던 애기가 어느날 보면 벌써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곧 대학교 다닐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그렇게 자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라야겠다고 결심해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순전히 자연적으로 자란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라는 것은 눈깜밖할 사이에 변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흰머리가 나고 죽을 날이 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자연은 빠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성장은 매우 느립니다. 젊었을때 그 사람의 영혼이 늙었을 때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영혼은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마음의 벽에 막혀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영혼이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한 때 기분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열심히 해 나가야지." 하고 마음 먹은 사람은  얼마 안 있어 "다 그런 거지 뭐." 하며 자포자기할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은 힘없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힘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진짜 일하는 것은 마음의 즐거움이 사라진 뒤에 그 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즐거움, 괴로움, 이러한 것들은 자기 마음에 자기가 취해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기쁨과 괴로움이 함께 공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이 세상의 존재 원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경과 곤란을 통해 나아가는 기쁨이 있다는 것은 바로 영혼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우주의 생성 발전하는 창조적 자유의식의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개인은 자기의 생명력을 갖고 스스로 자랄 줄 알아야 됩니다. 영혼이 자라기 위해서는 자신을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공부하기 싫고 귀찮아도 귀찮은 자기를 숙였을 때 비로서 조금씩 실력이라는 것이 쌓여지는 것입니다. 실력이 어느날 갑자기 올라가는 것은 다음날 덜그덕 내려갈 실력입니다.
     
      서울대학교 출신들을 보면 머리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머리 좋은 천재는 기억하는 속도보다 잊어버리는 속도가 더 빠릅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빨라야지 센스가 빠를 수 있습니다. 잊어 먹지 않고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으면 새로운 것이 눈에 잘 들어오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그것을 잊어 먹지 않아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출신들은 위대합니다. 그렇게 교과서와 씨름하며 한결같이 외워 나갈 수 있었던 것. 무언가 뜻한게 있으면 그것을 위해서 자기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하기  싫은 나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자기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면 어려운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렵더라도 해결을 위해 하기 싫은 자기  마음을 넘어 꾸준히 해야만 어려운 것이 극복됩니다. 하늘은 그렇게 꾸준히 하는 사람을 돕는 법입니다. 노벨상을 창설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만들기 위해 무수한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을 위해 돈도 다 날리고 심지어 동생마저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사람이 두 손으로 삽질을 하는데, 천명 만명이 삽질하는 것을 단 한 번에 해낼 수 없을까?" 하는 뜻으로, 그 어려운 역경이 그만두라고 노벨의 마음을 유혹했지만 거기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실험실에서 우연한 폭발이 있었고, 비록 노벨은 그 폭발로 다쳤지만, 이로써 다이너마이트는 발명되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하늘은 냉정하여 절대로 선뜻 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뜻을 가지고 꾸준히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길을 열어 줍니다. 노벨이 성공한 것도 결코 실험대 위에서 발견된 것이 아닙니다. 우연한 폭발로 노벨도 기절해서 나가 떨어졌을 때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할 수 있는  성공의 요소가 반드시 눈 앞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옆으로부터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알려 주는 것입니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어려운  여건안에서 벌어지는 자기를 숙일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스스로 자신을 숙이고 인내하는 인내력, 이것을 갖추지 않으면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수사는 자기 잘났다고 당당하게  나가기 보다는 항상 위험이 올 것을  미리 예측하면서 받아들일 자세를 가지고 나아갔을 때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인배들은 위험한 일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위험한 일들을 피하면서 좋은 일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본인은 잘살기를 원하지만 항상 결과는 서로 시기하고 싸움질 하면서 피곤하게 살게 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삼킬 수 있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 일어 나는 모든 것들을 다 받아들이고, 하늘의 세계도 다 받아들이면서, 꾸준히 해 나가는 의지를 확립하였을 때 하늘은 도와주며, 이 정도가 되어야지 비로서 나가서 싸울 수 있습니다.
     
      [지수사]는 땅을 나타내는 외괘가 모든 것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고, 물을 나타내는 내괘가 위아래로 받아들임으로써 대지가 물을 가득 품고 있는 형상입니다. 즉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갖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 힘을 어떻게 잘 쓰느냐가 남아 있습니다.  "사(師)는 군대를 의미한다." 여기서 '사(師)'는 고대 군대의 숫자를 나타내는 말로서, 지원부대 없이 단독으로  나가서 싸울만한 군대의 크기를 말합니다. 오늘날 개념으로 하면 사단급 정도의 부대 규모입니다. [지수사]는 이 정도의 세력이 있어야만 나가서 싸울만 하다고 말합니다. 조무래기 몇 명 정도만 가지고  나가서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지수사]는 전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남을  수탈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고, 하늘의 뜻에 위배됨이 없이 만물을 위해서 하는 전쟁을 말합니다. 하늘의 뜻이 이 세상에  펼쳐지려면 전쟁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에는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전쟁이 반드시 총칼로 하는 전쟁이 아닐 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창조와 파괴를  위한 전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수사]가 나타내는 그 정도는 되어야만 하늘의 도움을  통해 이길 수 있습니다.
     
      "군대를 움직이려면 훌륭한 통솔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훌륭한 통솔자가 있어 확고하고 동요하지 않는 지휘로써 능히 다수를 이끌어 천하의 정의를 행할 수 있으면 그는 곧 천하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벽에 막혀 전전 긍긍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군의 통솔자가 되어서는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확고하고  동요하지 않는 분명한 뜻을  세우고 명확한 지시로 능히 다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통솔자가 사단급 규모의 군대를 거느렸을 때 비로서 전쟁을 할  수 있으며, 이긴다는 보장이 있는 것입니다.
     
      "강한 신념을 갖고 있으면 서로 포용하여 일제히 협력한다." 마음 속에 스스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저절로 밖으로 드러나게 되며 결국 외부에서 일제히 호응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안에 분명한 신념이 있으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  열 두명의 제자를 이끌고 다녔을 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얕잡아 봐서 예수와 그의 열 두 제자들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의 몸은 죽어서 없어졌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과 싸우는 것이 보통 우리의 전쟁입니다. 그 전쟁에 이기느냐 지느냐는  외부의 호응에 있는 것이나 그 호응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먼저 내부로부터 나 자신과의 전쟁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전쟁에서 지는 사람은 한 때 외부와 싸워 이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어 없어져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나의 마음을 뚫고 나왔다면 그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금강의 힘이 될 것입니다.
     
      "위험한 전쟁을 수행하라. 정의의 길에  순응하는 것이다. 비록 한때 천하를 전쟁의 고통속에 몰아넣는 일이 있더라도 인민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심복한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명분(뜻)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전쟁은 군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가 전쟁을 하려면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합니다. 한 번 군대가 출동하기 위해서는 수 만의 무기와 수 억의 군수 물자가 조달되어야 합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곧 전쟁을  치룸으로써 발생하는 모든 고통을 국민이 흔쾌히  감수하는 국민의 지지도입니다. 전쟁의 명분이 천하의 정의에 부합되면 비록  한 때 국민을 전쟁의 고통속에 몰아 넣는 일이 있어도 국민은 그것을 이해하고 심복하는 법입니다. 상하가 단결하고 국민과 군대가 힘을 합쳐 협력하면 아무리 강대한 적이라도 능히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명분이 바르지 못하여 국민이 분열하면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대상. 대지가 풍부하게 물을 저장하고  있다. 이것이
        [사]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대지처럼
        백성을 포용하고 양육한다.
     
            象曰, 地中有水師. 君子以容民畜衆.
     
      "대지가 풍부하게 물을 저장하고 있다." 대지를 양육할 수 있는 힘, 그것이 곧 대지에 숨겨져 있는 안의 물입니다. 이것이 있는가 없는가? 남을 구제하려면 먼저 자기 구제가 되어져야만 가능합니다. 안에 물이 들어가 있지 않은 사람이 남의 목을 어떻게 적실 수 있겠습니까? 땅을 파면 물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목이 마른 사람들을 동원해서 땅을  팔 수 있는 것이지,  땅에 물이 있는지 없는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사람들을 동원해서 땅을 파면, 만약 몇 번 파다가 물이 나오지 않으면 먼저 그 사람을 죽여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먼저 분명한 신념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싸워 이긴 자가 만물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지수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음효. 군을 움직이는 데는 먼저 기율(紀律)을
        엄정하게 하라. 기율이 문란해지면 일시적인 승리를
        얻었다 해도 결국은 흉한 것이다.
     
          初六, 師出以律. 否臧凶. 象曰, 師出以律, 失律凶也.
     
      "군대를 움직이려면 먼저 기율(紀律)을 엄정하게 하라." 기율이란 군기(軍紀)과 규율(規律)입니다. 군기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부딛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숙이고  의연히 대처해 나가는 군의 기강입니다. 규율은 이러한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질서와 법도입니다. 따라서 기율은 전쟁에서 적과 부딛쳐 깨어지지 않는 강인한 힘이 되는 근간입니다. 그 기율을 군 내부에 확립하는 것. 그것이 불패(不敗)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기율이 없으면 일시적으로 승리하더라도 결국 기강이 문란하여져서 곧 패배하게 됩니다. 눈앞의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승리를 위하여 그 바탕부터 확고히 다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엄정한 기율이 곧 나중에 가면 부닥쳐서 깨어지지 않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 기율은 스스로  안에서 세워야 합니다. 사사로움에 치우치지않고, 마음의 장애를 벗어나 모든 마음을 수용하고 모든 마음 위에 우뚝 설 수 있는 기운, 그것이 바로 긍지이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는 위대한 자연력 바로 그 자체인 것입니
    다.
     
      뜻이 이 세상에 펼쳐지려면 전쟁을 반드시 치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전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기강이라는  순수한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그 힘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조그만 승리는 있게 되더라도 그 승리는 곧 깨어져 버릴 것입니다.
     
        두번째 양효. 군대  안에 있어서 천자(天子)의  깊은
        신임을 얻어 길하다. 만국(萬國)을  굴복시켜 여러차
        례 상을 받는다. 무슨 허물이 있으랴.
     
            九二, 在師中.  吉无咎.  王三錫命. 象曰, 在師中,
            吉. 承天寵也. 王三錫命,  懷萬邦也.
     
      "군대 안에 있어서 천자(天子)의 깊은 신임을 얻어 길하다." 두번째 양효입니다. 양효가 내괘의 세계에서 우뚝 서있습니다. 군의 기율을 확립하니 상하의 신임을 얻어 높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외괘의 세계에 대한 깊은 신임을 얻었습니다. 천자란 하늘을 뜻합니다. 모두 음효로 이루어진 외괘가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두번째 효가 다섯번째 음효와 정응(正應)관계를 이루어  깊이 화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도움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원래 [사] 괘는 완전한 괘가 아니라 미숙한 괘입니다.  첫번째 양의 자리에 음효가 있고 두번째 음효의 자리에 양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 미숙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미숙하지만 이 정도가 되어야만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만물을 자유 자재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실력이 갖추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실력은 흙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어
    야만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가 되면 하늘은 도와줍니다. 그래서 군대안에서 천자의 깊은 신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의 깊은 신임을 얻게되는가?  먼저 자신이 자기한테 질 수 없는 확고한 기강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심정때문에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은 하늘이 도와줄 수 없습니다. 아니꼬움, 분함, 슬픔, 즐거움 등 심정에 장애받고 있지 않다면 하늘은 항상 충만과 영광과 박수갈채를  잊지않고 보내주고 있습니다.
       
        세번째 음효. 적지(敵地)에 출진하면 크게 패하여 시체를
        마차에 가득 싣고 돌아오리라. 흉하다.
     
            六三, 師或與戶. 凶.  象曰, 師或與戶, 大无功也.
     
      "적지(敵地)에 출진하면 크게 패하여 시체를 마차에 가득 싣고 돌아오리라." 나 자신이 쓰러지지 않을 기강을 자신만만하게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그때 사람은 조심을 해야됩니다. 물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모르지만 물속에 들어가면 수압을 느끼게 됩니다. 수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면 물에 빠져 죽기 십상입니다. 수압을 느끼는 사람은 물에서 물을 피할 수도 있고, 물을 갖고 놀 수도 있고, 물에서 자기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하였더라도 살피지 않으면 안됩니다. 살피지 않고 나아가면 아무리 하늘이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위의 네번째가 음효인 이  상황에 반드시 부딪치게 됩니다. 음과 음이 맞부닥치면 서로 당겨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번째에서는 "뛰어나가지  말아라" "발을 조심하고  천천히 걸어가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번째에서 공을 세우고 천자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하더라도 출전(出戰)하여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더라도 적에게 허점이  없으면 적을 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병법에, "패배의 요인은 나에게  있으나, 승리의 요인은 적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나의 준비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적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강함만 믿고 전쟁을 일으키면 전쟁에 이길 확률은 반밖에 되지 못합니다. 적이 나보다 준비가 없고 약하면 이길 것이고 적이 나보다 준비가 많고 강하면 질 것이 뻔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진정한 승리는 백 퍼센트 완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번째 음효는 양의 자리에 음효가 있으면서 대응하는 여섯번째도 음효입니다. 또 바로 위 네번째 효도 음효로서 음성기운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혀 양성기운을 받지 못하는 음입니다. 그런데 세번째가 싸우겠다고 나간다면 어떻게 되느냐? 결국 전쟁에 크게 패하여 시체를 마차에 가득 싣고 돌아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관망을 해야 합니다. 진격을 할 때는 숨어있는 양성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번째는  안타깝게도 양성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 믿고 나아가 싸우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네번째 음효. 앞으로 진격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물러난다.
        이 병법의 상도(常道)를 지킨다면 허물은 면하리라.
     
            六四, 師在次. 无咎. 象曰, 在次, 无咎, 未失常也.
           
      "앞으로 진격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물러난다."  네번째 음효는 위아래 모두가 음효로 둘러싸여 있고, 대응관계인 첫번째 효도 음효로서 나아가기가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행이 음의 자리에 음효가 있어 나아가기 곤란한 것을 알고 물러서기 때문에 허물을 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네번째 음효는 상하 관계 및 대응관계가 전부 음 대 음으로서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음의 자리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흉칙한 짓은 안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럴 때는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라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진하기 어려울 때  물러서는 것. 그것은  병법의 상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격을 고집하는 것.  그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어려울 때 물러서면, 비록 그 순간에 이기지는 못하였으나 최소한 앞으로 이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줄 알면서도 무리하게 싸워 패배한다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적을 알기 위해서는 진격에 앞서 먼저 적을 살펴야 합니다. 충분한 정보를 획득해야 합니다. 만일 적의 보안태세가 굳건하여 알 수 없다고 하면 나아가선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갔다면 불리할 때 즉시 후퇴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져야 합니다. 승리란 반드시 적을  물리적으로 파괴하여야만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적의 예봉을 피해 후퇴하지만 적으로 하여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 스스로 전투를 포기하게 한다면 그것도 이기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을 물리적으로 파괴해서  얻은 승리는 그만큼 나의 피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다섯번째 음효. 사냥에서  포획물을 얻었다.  이제야
        말로 대의명분을 분명히 내걸고 왕명을  받들어 불의
        한 무리를 토벌함이 좋다. 불의의 전쟁이  아니기 때
        문에 허물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장수에는 뛰어난 인
        물을 임명해야 한다. 실력이 없는 자를  장수에 임명
        하면 시체를 마차에  싣고 패주하는 참패를  당한다.
        비록 정의의 싸움이라도 결과는 흉하리라.
     
           六五, 田有禽. 利執言, 无咎. 長子師師, 弟子輿戶,
           貞凶. 象曰, 長子師師,  以中行也. 弟子輿戶, 使不當也.
           
      다섯번째 효는 두번째효와 음효 대 양효로 정응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양효의 자리에 음효가 있기 때문에 이기는 방식이 틀립니다. 양성에너지는 악의 세계를 쳐부수어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성에너지는 나아가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망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토끼를 잡는데 양성에너지는 돌을 던져 토끼을 맞추어 잡는 것이고, 음성에너지는  덫을 놓어 토끼가 걸려들게 하여 잡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냥에서 포획물을 얻었다."라고 비유해 놓았습니다.  "불의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허물이 있을 리 없다."  정의의 전쟁은 평화스러운 나라에 침략을 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는 침략전쟁이 아닙니다.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무분별한  침략을 일삼는 무리들을 토벌하여 평화를 지키는 방어전쟁입니다. 그래서 정의의 전쟁은 먼저 적을 공격하지 않고 적을 유인하여 격멸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사전 매우 치밀한 계획과 대담성, 철저한 준비가 갖추어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훌륭한 지략과 덕성을 갖춘 대장군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두번째 효에서 말한 그런 사람
    만이 적격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이기려면 훌륭한 적임자를 장군으로 임명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력이 없는 자를 장수에 임명하면  시체를 마차에 싣고 패주하는 참패를 당한다." 다섯번째가 음이기 때문에 전쟁에 나아가려면 양의 기운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대응관계에 있는 두번째 효의 기운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토끼를 잡으로면 덫을 쳐놓고 기다리되 토끼 몰이하는 사람을 잘 써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의로운 큰 일을 하겠다고 뜻을 세웠으면 그 밑에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을 써야 합니다.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그것을 무릅쓰고 할 수 있는 사람, 어려움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장군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섯번째 음효. 전쟁이 끝난 후 천자는  공신을 제후로 봉하고
        경(卿),  대부(大夫)에 임명한다. 그러나 아무리 전쟁에 공적이
        있다해도 소인(小人)을 이런 지위에 앉히면 안된다. 장차 반란
        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上六, 大君有命. 開國承家. 小人勿用.  象曰,
            大君有命, 以正功也. 小人勿用,  必亂 邦也.
     
      "아무리 전쟁에 공적이 있다해도 소인(小人)을 이런 지위에 앉히면 안된다." 보통 우리 주위에는 자기가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출세할 수 없습니다.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자기 혼자 아무리 똑똑해 봐야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는 지극히 미미한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이루어지게끔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똑똑한데 왜 세상이 알아주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게 필요한 것은 똑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해낸다라고 하는 뜻을 향한 희생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구할 것이며, 성공을 하게 할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사원은 상사에게 불만하고 대들기 때문에 회사를  어지럽히게 됩니다. 결국 똑똑한 사람들은 어디가서 발 붙일 곳이 없게 됩니다. 항상 자신의 똑똑한 것을 스스로 무서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노자는 "우주를 얻으려면 겸허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큰 일을 이루어 낸 다음에는 포상을 하는데  그 포상은 겸허한 사람에게 하게 됩니다. 또 사람을 선발해 쓸 때도 똑똑한 사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겸허한 사람을 써야 합니다.  왜냐면 똑똑해 보일려고 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똑똑한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정의가 천하에 두루 퍼질 수 있도록 덕 있는 자를 중용(重用)하고, 제도를 정비해야 합니다. 단순히 전쟁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종료된다면 전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 전쟁을 시작할 때 세운 대의명분, 그것이 이 세상에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전쟁을 한 목적이었습니다. 그 뜻은 절대 망각되어져서는 아니 되며 항상 가슴속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전쟁간에 한 때 어려운 역경이 닥치고, 전쟁의  희생자가 많이 났다고 해서, 본래의 명분을 망각한 채 무분별하게 적에  대한 살상을 자행하는 것, 이것은 하늘의  뜻을 대신하는 정의의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하는  전쟁입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는 결코 창조가 이루어질 수 없으며, 오로지 살륙과  파괴만 있을 뿐입니다. 군대의 기율을 확립하고, 불패의 태세를 갖추며, 치밀한 계획과 작전으로 적을 스스로 굴복하게 하는 것이 대장군이 할 일이라면, 올바른 전쟁의 명분을  세우고, 전쟁간 천하의  인심을 수습하고, 전쟁후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하는 것, 그것은 제왕이 할 일입니다. 따라서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군주와 유능한 장군, 그리고 정예 군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준비되지 않으면 결코 나가 싸울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지수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883
  • 6. 천수송(天水訟)
    『  송사와 판결 』
     
            가장 어려운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도의 인내와 지혜와  용기로써 먼저 나
            를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패배할
            수 없는 나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떠한 적이 나타나도 결코 패배하지 않으며, 이
            기되 무리하게 싸움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
            연적으로 승리가 되어지게 할  뿐입니다. 그것이
            야 말로 진정한 승리입니다.
                    
                       천수송(天水訟)
     
        송(訟)괘는 위로 하늘을 상징하고 아래로  물을 의미
        하는 괘이다. 위는 건괘로서 강하고 강한  것을 나타
        내며, 아래는 음효가 많아서 물의  위엄을 상징하는,
        즉 음험함을 나타내는 괘다. 위에 강강한  자가 있어
        아래사람을 학대하고, 아래는 음험한 자가 있어 윗사
        람과 투쟁하려고 하는 상태다. 송은 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남과의 투쟁을 말한다. 송은 자신의 성실성
        이 남에게 통하지 않고 방해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다. 그러나 싸움(소송)은 결코 좋은 일이 못된다. 잘
        반성하여 잘못을 범하지 않는, 스스로 두려워하는 마
        음으로 남에 대한 적의를 버리면 길할  것이다. 그러
        나 끝까지 싸움을 고집하면 흉하다. 중정(中正)을 존
        중하고 현자의 중재를 받는 것이 좋다. 큰 강을 건너
        가는 듯한 그런 위험을 범하면서까지  기어이 다투어
        보려고 한다면 마침내 심연에 빠져 들어 비참한 결과
        로 끝날 것이다.
       
            訟, 有孚窒. 척中吉.  終凶. 利見大人. 不
            利涉大川. 象曰,   訟上剛下險. 險而健訟.
            訟有孚窒, 척中吉,   剛來而得中也. 終凶,
            訟不可成也. 利見大人, 尙中正也, 不利涉
            大川, 入于淵也.
     
      참을 인(忍). 칼 밑의 마음. 칼로  에이는 듯한 것을 스스로 묵
    묵히 지나가는 마음. 그것이 곧  인내입니다. 인내는 단순히 주어
    진 상황속에서 오는 어려움을 참고 견뎌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10
    년 동안 취직을 못한 사람이 취직을  못해서 굶어 죽어야 되는데
    죽지 않고 사는 사람, 그러한 사람을 인내하는 자라고 말하기에는
    객관적으로 내키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평생  가난하게 살면
    서 가난을 견녀나갔다고 해서 그것을 인내라 하지 않습니다. 인내
    는 뜻이 분명한 사람이 아직 때와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때, 하고
    자 하는 의지를 간직한 채 모든  역경을 묵묵히 견디면서 끝내가
    서는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온 세상 자연 가운데 인내없이 성장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내속안에서 반드시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이지  인내 없이는
    싹, 꽃이라는게 필 수 없습니다. 봄이  되어 우리가 밖에 나가 흙
    이 있는 곳에 가면 아주 여린 싹들이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어느날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 사람도 참고 견디
    기 힘든 그 빗줄기를 싹은 묵묵히 받아내고 있습니다.  뜨거운 햇
    빛이 내리쪼여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참고 견딥니다.  어린 아이가
    밟아도 다시 지긋이 일어나며 꽃을 피우는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랍니다. 그래서 맨드라미, 채송화,  오랑캐꽃, 이런 것들이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 싹에 비하면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말도 많고, 불
    만도 많습니다. 하물며 싹도 모든 자연 여건 안에서  굳세게 자라
    는데 왜 우리 인간이, 싹보다 강한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가? 이
    것을 경고하는 것이 바로 [천수송]입니다.
      여름에 수영을 할 때, 물에 들어가기 전에 물은 아무 것도 아닙
    니다. 손으로 치면 그냥 갈라지고, 발로 밟으면 첨벙 첨벙 튀기며
    흩어지는게 물입니다. 그러나 막상 물속에 들어가면  물은 커다란
    압력으로 우리를 압박합니다. 우리는 물의 힘에 눌려 몸을 마음대
    로 놀리지 못합니다.
      이 사회도 물과 마찬가지로 뛰어들기 전에는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지만, 막상 사회 속에 뛰어 들면, 물이  압력을 갖고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이 밀려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은 힘들다고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자연이 꽃을 만든 이유는 꽃을 피우라고 만든  것이지, 꽃이 죽으
    라고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싹이 자라서 꽃이  필 때까
    지의 인내. 그러한 인내를 통해서  꽃은 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로 우리 인간도 풍요의  그 날까지, 싹이  굳굳히 자라듯이, 세상
    속에서 굳굳히 서서 풍요를 창조해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뜻을 세우고 분명한  세계를 얻은 다음  나만이 옳다고
    하는 그 세계를 막상 이 세상에 펼치려고 할 때,  이 세상은 들어
    가기 전까지는 맹물같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 그 안
    에 들어가면 엄청나게 큰 힘에 의해서 압력을 받게  됩니다. 이때
    나의 세계를 지켜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물 속에
    들어가서 물이 확 온다 그래서 바둥거리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라리 죽은 듯이 숨을 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몸이 물
    에 떠서 살 것입니다.
      그렇게 참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것이 인내입니다. 설사  자기
    자신이 옳아서 눈에 보이는 세상과 싸워서 이겼다 하더라도, 그것
    은 일시적인 승리일 뿐, 크게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승리
    는 인내가 없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천수송]이 주
    는 교훈입니다.
      "송(訟)괘는 위로 하늘을 상징하고 아래로 물을 의미하는 괘이
    다. 위는 건괘로서 강하고 강한 것을 나타내며, 아래는 음효가 많
    아서 물의 위엄을 상징하는, 즉 음험함을 나타내는 괘다. 위에 강
    강한 자가 있어 아래사람을  학대하고, 아래는 음험한 자가  있어
    윗사람과 투쟁하려고 하는 상태다." [천수송]은 외괘가 모두 양성
    기운으로 이루어진 엄청나게 강한 양성입니다. 내괘도 음효 두 개
    에 양효 하나로 양성입니다. 주역은 역순하므로 내괘가 위로 상승
    하고 외괘가 아래로 내려오는데, 모두 양성이어서  서로 밀어내려
    는 작용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두 양성기운간의 충돌은 불가피
    한 것으로 상호 알력이 생기고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송(訟)'
    은 "시비할 송"입니다.
      [천수송]은 위에 하늘이 있고, 밑에  물이 있습니다. 하늘은 위
    로 오르려 하고, 물은 아래로 흐르려 하기  때문에 서로 조화되지
    못하고 반발하게 됩니다. 즉 나의 옳은 것만 믿고  세상일을 하면
    협동이 안되고 서로 반발이 생겨서 부딛치게  되어 결국 송사(訟
    事)가 벌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싸움(소송)은 결코 좋은 일이 못된다.  잘 반성하여 잘
    못을 범하지 않는, 스스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남에 대한 적의를
    버리면 길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외괘가 내괘보다  매우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섯번째  괘 [수천수]에서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착실히 준비하여 드디어 세상에 떳떳히 나의 위치를 세
    웠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매우 강합니다. 세상과  송사를 벌려서
    혹시 내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금방 다시 세상에  의해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싸움을 고집하면 흉하다. 중정(中正)을 존중하
    고 현자의 중재를 받는 것이 좋다." 이 괘를 슬기롭게 풀어  나가
    는 핵심을 주는 것이 바로 첫번째와 세번째의 음효입니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인내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괘와 외괘가  자리 바꿈
    을 하여도 역시 그 세계를 받아들이고 참고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결국 상황은 변하니까, 내가 일부러  변화를 일으키려 하지 말고,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큰 강을 건너가는 듯한 그런 위험을  범하면서까지 기어이 다
    투어 보려고 한다면 마침내 심연에 빠져  들어 비참한 결과로 끝
    날 것이다." 우주는 지금  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안정권을
    찾는 어느 포인트를 만나는 순간까지는 참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로 이 괘가 풀려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지  않고
    위의 괘와 부딛치면 자기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역시 송사 많은
    집안이 잘될 것이 없으며,  설사 송사에서 이길지라도 위의  괘가
    강하기 때문에 결국 손해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싸움이
    벌어질 지라도 곧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다소  손해를 본다 하
    더라도 그 손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전에 가능하
    면 싸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대상. 하늘은 위를 향하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 이같
        이 서로 배반되는 것이 [송]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어떤 일이나 그 출발점에서 깊이 생각하
        여 후일에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象曰, 天與水違行訟. 君子以作事謨始.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어떤 일이나 그 출발점에서 깊이 생각
    하여 후일에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서로  화합
    하기 어려우면 강한 자신으로 인하여 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잘
    받아들이고 스스로 심사숙고 하는 자세를 간직하여야  합니다. 만
    약에 눈 앞에 강한  것이 있다고 강한 것과  싸우려고 하면 비록
    싸움에 이길 지라도 자신도 다치는 법입니다. 또 세상에는 나보다
    강한 것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단은 나보다 강한 적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가운데 심사숙고 하여 그것을 이길 수있
    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손자의 위대한  병법에 이르기를 "싸우
    기 전에 이미 이겨놓고, 싸움을 통해 승리가 나타나게 할 뿐"이라
    고 했습니다. 
       
        첫번째 음효. 싸움을 오래 끌어서는  안된다. 적당한
        시기에 그쳐라. 다소의 말썽은 있으나 결국은 사리가
        분명하게 증명되어 길하리라.
     
            初六, 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象曰, 不
            永所事, 訟不可長也. 雖小有言. 其辯明也.
           
      "싸움을 오래 끌어서는 안된다." 싸움이라는 것은 적당히 필요
    합니다. 인간 세상은 아주 묘해서 똑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사람
    은 정이 가는데, 어떤 사람은 기분이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
    를 설립하고 직원을 모집해  보면, 열심히 장사해서 회사를  크게
    발전시킬 직원인데도 기분나쁜 직원이 있고, 그리 능력이 있지 않
    아서 큰 공은 없으나 애정이 가는 직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운과 기운의 관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양성이 강
    한데 양성이 강한 직원이  있으면 서로 반발하여  기분이 나쁘게
    됩니다. 반면에 음성인 직원은 서로 끌려 호감이 가게 됩니다. 이
    것을 본인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이 벌려놓은  것이지 인
    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기운과 기운이 반발하면 싸움이
    라는 것이 반드시 생기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싸움 그 자체를 없
    애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싸움을 잘 다
    스리고 관리하는 일입니다.
      "적당한 시기에 그쳐라." 싸움이 발생하게 되면 적당한 시기에
    그칠줄 알아야 합니다. 싸움이 길어지면 내가 입는 피해도 그만큼
    커지게 됩니다. 만약 내가 약한 상태에서 강한 적과 싸울 때면 다
    소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혈전을 회피하고 적당한 시기에 그치
    는 것이 현명한 처사입니다.
      "다소의 말썽은 있으나 결국은 사리가 분명하게 증명되어 길하
    리라." 그러나 적당히 싸울 때까지는 싸워야 합니다. 손해를 감수
    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며  싸움을 회피하면,
    그것은 이미 패배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
    게 되고 나는 설 땅이 없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적당히 싸워서 저
    쪽도 어느 정도 지치고 최초의 자만이  누그러질 때 양보를 해서
    싸움을 그치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저쪽의 기운이 흐려지지도 않
    았는데 항복을 해 버리면  적은 더더욱 강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싸움은 길게 끌지는 않으나 적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 움찔하게끔
    하고 조속히 싸움을 마무리 짓는 것, 그것이  나의 옮음과 분명함
    으로 최후의 승리를 이루기 위해 먼저 싸움을 다스리는 묘미입니
    다.
     
        두번째 양효. 패소(敗訴)하게 된다. 아래  사람이 도
        리에 어긋나게 윗 사람과 항쟁하니 화를 초래하는 것
        은 당연지사다. 싸움을 피하고 적으나마 자기의 분수
        를 지켜 근신하고 있으면 화는 면할 것이다.
     
            九二, 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
            □. 象曰,  不克訟,  歸逋竄也. 自下訟上,
            患至철也.
           
      "패소(敗訴)하게 된다. 아래 사람이 도리에  어긋나게 윗 사람
    과 항쟁하니 화를 초래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곳은 [음]이  있
    어야 할 자리에 [양]이 있습니다. 대응하는 다섯번째 효는 양효로
    서 주위에 강한 양의  기운을 대동하고 맞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효는 위치도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음효를 대
    동하고 나아가니 패소하여 화를 초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싸움을 회피하고 분수를 지키면서 근신하면 화는 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것. 부딪쳐서 패배하게 되면  패배
    의 원인을 잘 분석하여 대책을 세워야지, 패배의식에 빠져 있거나
    복수를 다짐하며 증오심에 차  있는 따위의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갖은 굴욕과  패배를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분노를 간직할 필요는 없습니다. 승패
    는 기(氣)와 기(氣)의 관계에서 상황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마
    음과 마음 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증오, 좌절 등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 그것은 이미 자기
    마음의 매카니즘이 잘못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설사  그러한 것들
    이 있다 해도 모두 다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란 나에게 굴욕을 준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굴욕을 당한 나를 용서하는 것입니
    다. "아픈 가슴은 내가 아니며,  아픈 상처는 내 몸이 아닌  것"처
    럼, 마음에 받은 모든 상처와 손해, 그로 인한 손익계산서를 말끔
    히 없애버리는 것, 그것이 용서입니다.
      "싸움을 피하고 적으나마 자기의 분수를 지켜 근신하고 있으면
    화는 면할 것이다." 분수를 지키며 근신한다는 것은 단순히  반성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와 기끼리 부딪쳐서 발생한 현실에 영향
    받아 자신의 마음에 일으키는  각종 상처들을 없는  것으로 하는
    것이 근신입니다. 사실 인간의 마음은 자연의  움직임에 좌지우지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평온하다고 하더라도  자연이 강하
    게 부딪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마음은 상처를 받는  것이고,
    상황이 좋아지면 마음도 즐거워지는 법입니다.
      그것을 알고 움직이는 사람은 상황에 의해 마음이 동요되지 않
    으며, 모르고 움직이는 사람은 상황에 의해 발생한 마음의 작용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근신이란 마음의 작용에  따라 움직이
    지 않도록 마음의 평온을 되찾아 동요됨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음효. 현재의 지위에  만족하면서 윗사람에게
        순종하여 굳게 공손한 태도를 지켜  나간다면 위태롭
        기는 하나 길하리라. 한 때는 영예스러운  일에 종사
        하는 일이 있겠으나 화려한 성공을 바래서 지나친 일
        을 해서는 안된다.
     
            六三, 食舊德, 貞려終吉. 或從王事, 无成.
            象曰, 食舊德, 從上吉也.
     
      이 효는 밑의 강한  기운을 스스로가 완충작용을  하면서 위의
    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천수송]이 살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세번째 효 때문이며, 주역 64괘의 대부분이  세번째에서 네번째로
    비약할 때 상황이 좋지 않지만, 특별하게 좋은 것이  바로 이 [천
    수송]입니다.
      "현재의 지위에 만족하면서 윗사람에게 순종하여  굳게 공손한
    태도를 지켜 나간다면 위태롭기는  하나 길하리라." 세번째 효는
    위태로움을 안고 있으면서도 위를 받아들여 순종하고,  아래를 받
    아들여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일은  다 위험
    합니다. 우리가 차를 타는 것도 항상 교통사고의 위험을 감수하며
    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용기있는 자는 그러한 위험을 안고 들어
    갈 수 있는 자입니다. 물 속에 들어갈 때도 물의  위험을 안고 들
    어가고, 불 속에 들어갈 때도 불의 위험을  안고 들어가는 것입니
    다. 물과 불이 위험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물과 불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위험을 안고 들어가는 자는 위험속에서 스스로를 건질 수 있지
    만, 위험을 회피하는 자는 그 위험이 닥쳤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위험을 회피하면서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자
    는 반드시 위험한 처지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도
    승리하려면 위험을 감수하고 참가해야지, 위험을 거부하고 참가하
    는 선수는 단순히 참가에 의의를 두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패자
    는 할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번째 효는 위에 양효 세개가 있는 강한 양성기운과 부딪치려
    하지 않고 공손히 받아들이면서 인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도 아래 자신의 강한 기운을 받아들여서 당당히 나가고 있습니다.
    즉 기운은 모든 위험을 감수한 채 당당히  나아가지만, 마음과 태
    도는 항상 유순하고 공손하게 하기  때문에 위태로움을 극복하고
    길하다는 것입니다.
      "한 때는 영예스러운 일에 종사하는 일이  있겠으나 화려한 성
    공을 바래서 지나친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태도가  인정받
    아 한 때 영광스러운 일에 종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나는 성공과 만족에 이끌리어 자신이 원래 품었던 뜻을 저버
    리고 화려한 성공을 바란다면 발전은 이미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필요한 것이 또 인내입니다. 만일 내가  3년간 인내했는데
    더이상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  3년간 인내한 것은 인내가 아
    닙니다. 3년간 하고 4년째 하지 못하는 인내는 인내가  아닌 것입
    니다.
      인내는 순수하고 소박하며, 누구에 의해서 혹은 자기 자신에 의
    해서 없어지거나 파괴되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내가 연약한 힘
    으로 큰 세계를 끝내 이겨 나갈  수 있는 지구력, 추진력, 저력은
    인내를 통해 생활속에서 몸에 배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만족과 화
    려한 것을 바라는 마음에 치우치지 말고, 화려한 세계가 나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손하게 받아들이면서  인내하면 승리로 가
    는 길이 보이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갑자기 마음에 힘이 생겨 양
    성에너지를 사용해 나아가면 콱 막혀서 끝내는 패소하게 될 뿐입
    니다.
     
        네번째 양효. 패소한다. 물러나와 제  분수를 지키면
        서 천명을 쫓아 지금까지의 태도를  고치고 바른길에
        안정하고 있으면 길하리라.
     
            九四, 不克訟.  復卽命,  □安貞吉. 象曰,
            復卽命, □安貞, 不失也.
           
      "패소한다." 양의 기운만  믿고 마음의 힘으로  나가면 막혀서
    패소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역은 사람이 잘되기 위해서 씌여진 것
    이지, 잘못되라고 써놓지는 않았습니다.  패소하게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며, 이 길을
    지적해 주는 것이 주역의 역할입니다.
      "물러나와 제 분수를 지키면서 천명을 쫓아 지금까지의 태도를
    고치고 바른길에 안정하고 있으면  길하리라." 자기 기운만 믿고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낮추어 재검
    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경우에 쓰는 말입니다. 물러나와 천명을 따르며 자연
    에 의해서 되어질 수 있을 때까지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자신에
    게 좋으면 하고, 득이  되지 않으면 안하는  그런 태도를 버리고,
    싹이면 언젠가 꽃이 피듯이, 꾸준히 해나가는 태도로 지나치는 일
    을 하지 않으면 길할 것입니다.
      사람이 말하고 있는 단어 가운데 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운이
    라는 것은 반드시 있습니다. 더운 여름날 목이 말라  죽겠는데 갑
    자기 소낙비가 쏟아져서 갈증을 모면했다면 운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낙비를 계속해서  너무 많이 맞으면  감기에 걸리게
    됩니다. 이것은 운이 나쁜 경우에 들 것입니다. 결국 같은 소낙비
    라도 그것을 받아들여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운이  좋은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운은 자기 자신과  자연의 관계
    에 의해서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운을 기다리면서  살면 절대로  안됩니다. 왜냐면
    최대의 운은 생명력에 의한 저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낮춰서 항상 살펴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운을 자기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역량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 역량을 갖추게 된 사람
    은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누구한테도  가난하지도 않고, 또
    부자라고 나타내지도 않으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최
    상의 복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세상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로 측
    정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길을 버리고 싹이면 언제든지 꽃이 피듯이 꾸준히 나가는
    그런 바른 마음에 지나치는  일을 하지않고 바른  길에 안정하고
    있으면 길하리라라고 말을 했습니다.
     
        다섯번째 양효. 소송에는 크게 길하다. 중정(中正)을
        지키기 때문이다.
     
            九五, 訟, 吉元.  象曰, 訟, 吉元,  以中正
            也.
           
      다섯번째 양효입니다. 양효가 앉아야 할 자리에 양효가 앉아 있
    고, 최고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강자가 정당한 위치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송에는 크게  길하다. 중정을 지키기 때문이
    다." 다섯번째 효는 맨 밑의 음효와  대응관계를 이루면서 중정을
    지킵니다. 물론 상호 대응관계를  이룰 수 있는 자리는  틀리지만
    밑의 음효가 다섯번째 효에게 영향을 미쳐서 자숙하도록 했기 때
    문에 중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중정(中正)은 인내를 의미합니다. 꾸준히 하는 것을 지키는 것
    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제 힘이 생기게 됩니다. 힘이 생기면 어지
    간히 약한 것은 쳐서 이겨버릴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꺽
    어 버릴려고 합니다. 원칙은 이루어  낼려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자꾸 꺾어 버릴려고 하게 되니  영예가 오래가지 못할 것
    입니다. 여섯번째는 이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섯번째 양효. 소송에 이기고 큰 띠를  하사받는 영
        예를 얻는 수도 있지만 그 영예는 오래  계속되지 못
        한다. 단 시일 내에 빼앗기는 결과가 온다.  본시 소
        송으로 얻은 영예는 존경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다.
     
            上九, 或錫之□帶, 終朝三遞之. 象曰,  以
            訟受服, 亦不足敬也.
           
      "소송에 이기고 큰 띠를 하사받는 영예를 얻는 수도 있지만 그
    영예는 오래 계속되지 못한다."  여섯번째에서 가르쳐 주는 것은
    "이겼다고 이긴 것이 아니다. 오래 가지 못한다." 결국  "싸움없이
    이겨라.' 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승리입니다. 흔히 우리는 동일한 상품을 파는 가게
    가 나란히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기존의
    가게가 있는데 그것과 똑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를 옆에 개설해서,
    먼저 있던 가게보다 물건 값을 싸게 팔아 끝내 먼저 가게를 문닫
    게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크게  잘살게는 되지 못할 사람입니다.
    기분은 천하를 얻은 기분이겠지만, 그래봐야 구멍가게  하나 얻은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본래  존재하던 상대와 싸워 이기는  것은
    오래갈 승리가 아닙니다. "나는 이겼다."라는 마음에 도취되어  발
    전도 못합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 져도 진  것이 아니고,  이겨도 이겼다고
    들뜨지 않는 사람이 결국  대기만성하는 자이며, 큰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자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닙
    니다. 옆의 가게 하나 문닫게 하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재벌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구멍가게 주인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 다음
    번에는 자신이 망할 차례입니다. 남 망하게 하는 자는  곧 자신도
    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강한 세상과의 투쟁에서 자신을 지키며  승리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란 내일의 승리를 위해 오늘의 패배
    에서 오는 쓰라림과 고통을 감수해 낼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
    나 진정한 인내란 증오심을  갖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증오심을
    갖고 참는 것은 한 때 반격으로 승리할 수는 있으나,  곧 다시 증
    오심을 갖는 적에 의해  패배하게 되는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사가 고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적에 대한 증오심을 버
    리는 것입니다. 적에 대한 증오심으로 덤비는 자는 증오심에 빠져
    싸움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적에 대한 사랑  혹은 증
    오심 등과 같은 감정의 차원에서 벗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자가 승리의 방도를 발견해 내는 자입니다.
      흔히 전쟁 영화를 보면 적의 총알이  무서워서 총도 제대로 못
    쏘던 자가, 인접 전우가 죽으면 갑자기 적에  대한 적개심으로 용
    기 백배하게 돌격하여 적을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면 대개 돌격하던  그 병사들은 적 앞에
    도달하기 전에 적의 총탄에  먼저 죽어 버립니다. 그러한  용기는
    진정한 용기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용감한 병사는 우군이 많든지, 아니면 모두  전사하고
    자기 혼자 남든지, 아랑곳 하지 않고 승리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두려움없이 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 사람은 한 때 이겼다고
    기뻐하지 않고, 한 때 패배하였다고  좌절하지 않으며, 감정에 치
    우침이 없이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항상 살피고
    발견해 내는 자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수 있는 자입니다.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그것은  적보다
    강한 마음과 지혜와 능력과 용기만 있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
    나 그러한 승리는 나보다  강한 적이 나타나면  반드시 패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도의
    인내와 지혜와 용기로써 먼저 나를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으로써 패배할 수 없는 나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
    떠한 적이 나타나도 결코 패배하지 않으며, 이기되 무리하게 싸움
    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승리가 되어지게 할 뿐입니
    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승리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자기 의도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투쟁과  갈
    등이 있을 수 있고, 승리와 패배가 있으며, 도처에 위험도 있습니
    다. 그러나 힘이 강하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니며, 또 약하다
    고 반드시 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힘이 강하면 이길 확률이 그
    만큼 높다는 것일 뿐입니다. 싸워 이기려 하지 않고, 심정의 애증
    (愛憎)에서 벗어나 인내와 용기로써 승리가  되어지게 하는 자는
    지금 내가 약한 상태에 있어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를 슬
    기롭게 극복하여 결국은 승리하는 자입니다. 승부(勝負)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것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5875
  • 5. 수천수(水天需)
    『  때를 기다려라  』
     
     ●    기회는 자연속안에서 언제나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    그 기회를 결실로 이루어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    사람은 기회가 주어져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다고 해서 
     ○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막연히 앉아 있는 사람은 기회가 와
     ○    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기회가 언제 오더라도
     ○    그 기회를 즉시 결실로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평상시에 준
            비를 갖추고 있는  자라야만 기회를 기회로 만들 수 있습
            니다. 흔히 "운이 좋다."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준비를
            갖춘 사람에게 그 준비를 사용할 수  있도록 기회가 닿은
            것을 말합니다. 준비가 없는 자에게 "운  좋은 날"은 결실
            이 없으므로 그저 평범한 날이 될 뿐입니다.
     
                               수천수(水天需)
     
        수(需)는 기다린다는 뜻이다. 위험이 앞에 가로 놓일 때 훌륭한
        사람은 이것을 극복할만한 여건이 완성되기까지 때를 기다리며
        결코 무모한 저돌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험에 빠지
        지 않고 물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는 곤란에 몸을 던지는 일이
        없는 것이다. 수의 괘는 단순히 기다리고만 있는다는 뜻은 아니
        다.  충분한 영양이 갖추어져 있으면서도 시기의 완전한 성숙을
        기다리는 성실을 내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장차 크게 발전할 모
        습이다. 동요하지 않는 한결같은 의지를 지키며 기다려라. 크게
        준비를 갖추어 일에 대처하며 흘러가는 흐름속안에서 순간을 잘
        포작할 수 있으면  큰 강물을 건너도 순조롭게 피안에 닿을 것이
        다.  오양(五陽)이 천자의 자리에 있어서 중용을 지키고 바른 위
        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象曰, 需須也. 險在前也,
            剛健而不陷, 其義不困躬矣. 需有孚, 光亨,  貞吉. 位乎天
            位, 以正中也. 利涉大川, 往有功也.
           
      주역은 우리가 음양의 기운에 관한 분명한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없으면 한편 재미
    없고 무뚝뚝한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 주역은 아주 재미있는 철학입니다. 사
    업이나 장사를 해보면 어떤 날은 손님이 하나도 없어 파리만 날리는 날이 있고, 어떤
    날은 느닷없이 손님이 많이 몰아닥치는  날이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봐도 성과가 나지  않지만 어떤 날은 별로 노력은 하지 않아도  아주 쉽게 일
    이 척척  잘 되어가는 날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날
    은 일진이 좋은 날 또는 운이 매우 좋은 날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군자는 자고로
    그런 얘기를 하는 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기운이 흐르고 있는 흐름의 세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결코 하지 않으며, 운이 좋았다 해서  기뻐하지도 않
    고 운이 나빴다 해서 실의에 빠지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걸 모르는 사람은 어쩌
    다 재수가 좋아지면 "이게 웬 떡이냐!" "쥐구멍에도 해뜰날이 있다." 하고 촐랑대다가,
    조금 잘안되면  "나는 역시 안돼."하고 실의에 빠지곤 합니다. 주역의 세계에 대해서 유
    심히 잘 관찰을 하면 우리는 그 세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외부세계의 변화는 그 변화
    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의 기운을 스스로 느낄 때 외부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데 그저 자기 식으로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기운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운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직관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주역이 좋은
    것을 가르쳐줘도 자기 것이 되어질 수 없습니다.
     
      "수(需)는 기다린다는 뜻이다. 위험이 앞에 가로  놓일 때 훌륭한 사람은 이것을 극복
    할만한 여건이 완성되기까지 때를 기다리며 결코 무모한 저돌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 수(需)는  '기다린다.'라는 뜻입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역량을 충전시키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잘하려고 하는 마음은 좋지만 그
    마음만 가지고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하려는 마음만 앞서서 행동하면 반드시 앞에 장
    애가 걸리기 마련입니다. 자기 혼자 아무리 잘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상황을 잘
    살펴서 나의 잘하는 것이 상황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애는  뚫고 지나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기다려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
    다. 급하게 어디 갈 일이 있어 가다보니까 앞에 홍수가 나서 물이 콸콸 넘치고 있습니다.
    가야 되겠다는 강한 마음에 그냥 물 속에 뛰어 들면 급류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 때는 물살이 약해지든지, 아니면 건널 수 있는 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며 잘 살펴
    야 됩니다. 즉 "건널 수 있는 방도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며 잘 살펴라. 길이 생기는 순간
    그 길을 통해서 가도록 하라."는 것이 수천수가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때가  자신만만하게 무엇인가를 잘 하려고 마음먹을 때입니다. 잘하려고 하는 마음
    만  믿고 나아가면 반드시 매사가 장애에 걸리게  됩니다. 그때 장애를 어떻게  하면 슬기
    롭게 극복해 내는가는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잘 살펴서 얻어야 할 부분입니다.
     
      기회라는 것은 잘 살필 수 있는 사람이 기다려서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
    에게는 기회가 주어져도 기회인 지를 알지 못합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주위에 건널
    수  있는 배라도 있는가 살펴야 되는데, "난 빨리 가야 되는데..." 그러면서 홍수앞에서 발
    만 동동 구르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기회는 자연속안에서 언제나 주어지고 있습
    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결실로 이루어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회가 주
    어져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다
    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막연히 앉아 있는 사람은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기회가 언제 오더라도 그 기회를 즉시 결실로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평상시에 준
    비를 갖추고  있는 자라야만 기회를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흔히 "운이 좋다."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준비를 갖춘 사람에게 그 준비를 사용할 수 있도록 기회가 닿은 것을 말합
    니다. 준비가 없는 자에게 "운 좋은 날"은 결실이  없으므로 그저 평범한 날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왜 노력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기회가 많이 주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평소에
    100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100의 결과를 다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한 번 기회가 주어지면
    최소한 10의 결실을 이루어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운 좋은 날만 믿고 평소에 둘 밖에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기회가 많이 주어져도 둘밖에 이룰 것이 없습니다. 하고
    자 하는 마음만 앞서면 미처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또 할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무리
    하게 나아가게 됩니다. 하려고 하는 마음, 그것을 먼저 스스로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제가 되어지지 않으면 살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잘 될 수  없는 부분을 모르는 채로 나
    가면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흔히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자기
    관찰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잘났다는 것만 알고 있지 자기 못난 부분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기 부족한 부분을 분명히 알아야지 일을 이루기 위해 준비해야할 사항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장.단점을 모두 파악함으로써 비로서 객관적인 안목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충분한 영양이 갖추어져 있으면서도 시기의 완전한 성숙을 기다리는 성실을 내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수천수]는 단순히 기다리고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충분한 영양이 갖
    추어져 있으면서도 완전한 성숙을 기다리는 성실을 내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즉 장차
    크게 발전할 직전에 있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은 의지를 지키며 기다리는 것.
    크게 준비를 갖추어 일에 대처하며, 흘러가는 흐름 속안에서 순간을 잘 포착할 수 있으면
    큰 강물을 건너 피안에 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천수]는 대기만성(大器晩成)
    을 뜻합니다. 이미 잘 될 수 있는  요소를 운명적으로 타고난 사람이 갑자기 이루려 하지
    말고 성실히 노력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상태입니다.
     
        대상. 구름은 아직 비가 되어  대지를 적셔주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수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성숙의 시기를
        기다리며 여유있는 모습으로 몸과 마음을 기른다.
     
            象曰, 雲上於天需. 君子而飮食宴樂
     
      수천수의 내괘는 양효가  세개로 하늘을 나타내는  양괘입니다. 그래서 안으로 매우 자신
    만만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괘 또한 음효가 둘,  양효가 하나로 양괘입
    니다. 내외괘가 모두 양괘이므로 자신만만하다고 무턱대고 나가다가는 큰 실수를 저지를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천수는 물의 괘 밑에 하늘의 괘가 있습니다. "하늘에
    물이 떠있다." 즉 구름이 껴있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그 구름은 아직 대지를 적실만큼 발전
    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만만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해나가려고 하는데 구름이 끼듯 앞에 장애가 가로막고 있으므로 무턱대고
    나아가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때문에 행동에  앞서서 잘 살펴라 라고 하는 것이
    이 양괘가 주는 의미입니다.
      
        첫번째 양효. 초야(草野)에  묻혀 때를  기다린다. 위험을 멀리
        피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헛된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지조(志操)를 지켜간다면 허물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初九, 需于郊. 利用恒,  无咎. 象曰, 需于
            郊, 不犯難行也. 利用恒, 无咎, 未失常也.
     
      첫번째 양효입니다. 이미 나는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제
    기회를 찾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일부러 만들려 하지 말고 잘  살피며 기다
    리면 주어져 오게 되어 있습니다. 기회를 만든다고 그냥 뚫고 들어가면 매우 위험합니다.
    따라서 아직 세상에 드러내지 말고 세상을 관망하면서, 세상을 공부할 때입니다. 만일 내
    가 독립투사로서 거사(巨事)를 앞두고 있다면 독립투사가 아닌 것처럼 구두닦이, 식당종
    업원 등 비천한 사람으로 행세하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거사하는 것에 마음만 들떠서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때가 이르지도 않았는데 섣불리 행
    동으로 옮기면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 양효. 물가에 이르렀으나 아직  물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물가의 모래둑에서 기다리고 있다. 장차 위험한 강을 건너갈 직전
        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곤란을 내포한 큰 일을 앞두면 여러가지
        서로 다른 이견이 일어나기 쉽고 말썽이 생기기 마련이다. 다소의
        비난을 받을  지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중용의 도를 지킨다면
        결국은 길할 것이다.
     
            九二, 需于沙. 小有言,  終吉. 象曰, 需于沙, 衍在中也.
            雖小有言, 以終吉也.
     
      장차 위험한 강을 건널  직전에 있습니다. 곤란을 극복해야  할 시기가 목전에 닿은 것입
    니다. 두번째 양효가 다섯번째 양효와 불응(不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번째 효
    가 위에 있어 더 기운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을 받을 수 있
    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더욱 자신을 숨기고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인내를 갖고 아직
    도 때를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독립투사로서 비천한 신분으로 위장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거사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주변으로부터 의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일수록 더욱 경거망동을 삼가고 독립투사가 아닌 것처럼 철저히 위장을 해야합니다. 섣
    불리 "이제는 틀렸다."며 자신을 노출시켜야 죽음밖에 갈 곳이 없습니다. 인내심을 갖고 수
    사망이 좁혀들어오면  더욱더 잠복하면서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는 오게 되어있습니
    다. 그러므로 인내를  갖고 아직도 때를 더 기다려야 합니다.
     
        세번째 양효. 물가의  진흙속에서 물건널 것을 기다린다. 이제 위험과
        직면한 것이며, 곧 도강을 결행해야할 마지막  순간에 다가선  것이다.
        신중한 태도와 준비와 굳은 결의로 대결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九三, 需于泥. 致寇至.  象曰, 需于泥, 災在外也.
            自我致寇. 敬愼不敗也.
     
      이제야 말로 위험과 직면하여 곧 도강(渡江)을 결행해야 할 마지막 순간에 다가섰습니
    다. 이것은 위험이 저편에서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적에게 도전하고  있는 상황입
    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신중한 태도와 철저한 준비로 대결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
    다.  주역은 역순하므로 밑의 괘가 위로 올라가고 위의 괘가 아래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
    러면 밑의 괘는 땅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위로 하늘의 기운을 받아들여서 결
    국은 안정한 지위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자기가 뜻한 바는 바깥 세상에 그대로 나
    타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괘는 상당히 좋은 괘입니다. 좋은 괘이지만 아직까지 미
    숙하므로 자기 스스로를 함부로 급하게 나타내려 하지 말고 인내를 갖고 때를 기다리면
    결국 이룰 수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세번째 정도에 이르면 벌써 상황을 살필 수 있고
    강을 건너기 위해 오는 배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얼마 안있다가 곧 기회가 주어지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세번째 효는
    위에 음의 기운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빨려들어갈 가망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빨려들
    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건널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물위에 서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뜻
    을 펼치려고 할 때 혹시 위험한 상황이 오게되면 얼른 일보 후퇴하여 그 자리를 구축시키
    면서 위험한 상황이 변화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네번째 음효. 약한 자가 강한 자와 겨루니 타격을 받고 피를 흘리며
        반성하고 있다. 자기의 힘이 약한 것을 깨닫고 솔직한 마음으로 주
        위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六四, 需于血. 出自穴.  象曰, 需于血, 順以聽也.
     
      네번째는 음효인데 위아래로 모두 양효가 있어 자기 기운은 약한데 앞뒤로 강한 기운
    이 버티고 있어서 아직 뜻을 펼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와 겨루니
    타격을 받고 피를 흘리며 반성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나약한 사람
    이 험난한 자연의 기류를 뚫고 나아갈려면 우리는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 앞에 겸손한 자세로  자연의 가르침에 주의를 집중하면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
    니다.  자연은 "이만큼 참았으면 됐겠지."하는 마음이 들 때 한번 더 강한 강도로 시련을
    부여합니다. "이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은 건방진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됐다
    안됐다 하고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조차도 일어나지 않고, 오로지 해야 되겠다라는 마음
    으로 꾸준히 해나갈 때 시련은 끝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풀리는 듯 싶었을 때 격
    는 어려움은 오히려 지금까지 겪었던 어려움보다 더 큰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잘  견뎌내야만 결실을 이룰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그만두게 됩니다.
    이 시련을 뚫고 나가느냐, 못 나가느냐 하는 것은 처음에 가졌던 네 뜻이 얼마만큼 확고
    부동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시련을 극복하는 것, 그것은 뜻이 뚫고 나가는 것이지 내가
    뚫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갖은 피박이 다 온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말고
    뜻을 펴기 위해서 안으로 실력을 간직한 채 새상 속안에 그저 존재하고만 있다가 이제 그
    뜻을 펼치려고 할 때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이 세상에 이 뜻을 분명하게
    뿌리를 내리겠다."고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은 그 역경을 극복해 낼 수가 있습니다. 하늘
    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반드시 도와주게 되어 있습니다.
     
        다섯번째 양효. 유유자적하게 몸과 마음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린다.
        충분한 영양과 덕이 있는 자가 가장 중요한  지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길하리라.
     
            九五, 需于酒食.  貞吉.  象曰, 酒食貞吉, 以中正也.
           
      다섯번째 양효입니다. 이 시점까지 오는 동안은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데 이제 부터는
    한 순간입니다. 뜻이 펼쳐지는 것은 순간적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만인위에 최고로 존
    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옛날의 그 뜻을  잊어버리면 안됩
    니다. 고생했을 때의 고생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섯번째 음효. 덕이 부족한 자가  최고의 지위에 있는 것과 같다.
        궁지에  빠지게 된다. 부르지 아니한 세명의 손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이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면 비록 자신에
        게는 과분한 지위이기는 하나 큰 실수는 없을 것이니 결국은 길할
        것이다.
     
            上六, 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來. 敬之終吉.
             象曰, 不速之客來, 敬之終吉,  雖不當位.
     
      음효이면서 최상의 지위에 있는 것은 마치 능력이 부족한 자가 최고의 지위에 있는 것
    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초양(初陽), 이양(二陽), 삼양(三陽) 시절에 세웠던 그  뜻을 저
    버리지 말고 그 도움을 받아들이면, 비록 자신에게는 과분한 지위이기는  하나 큰 실수는
    없을 것이니 결국은 길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뜻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뜻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낮은데로 내려가야 합니다. 자기 자만에 빠져서  "나는 이
    만큼 훌륭한 일을 해야 할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화려하고 금방 인정받을 수 있는 일
    만 찾아다니면  결코 결실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남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 천한 것, 어
    려운 것들을 묵묵히 성실하게 하는 것이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이며, 뜻으로 하는 것입
    니다. 모든 공덕은  하늘로 돌리고 다시 연약한  인간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주역이 역순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천수는 밑의 괘가 물이 되
    어 땅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위의 괘는 하늘이 되어 결국 안정된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미숙하다는 점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
    니다. 미숙하므로 함부로 급하게 행동하지  말고 스스로 인내하면서 착실히 때를 기다리면
    결국에 가서는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는 하고자 하는 의욕이 강하
    여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 미처 살피지 못하고 저돌적으로 나가기 쉬운 소질을 갖고 있습니
    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자제하며 수양에 힘쓰고 언젠가 도래할 기회를 위하여 준비를 갖추
    어 나아가야 합니다. 위험한 것이 있을 때 훌륭한 사람은 이것을 극복할만한 여건이 완성되
    기까지 때를 기다리며 결코 무모하게 저돌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위험
    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천수]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005. 9. 29. 유성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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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周易 講義)산수몽(山水夢)
    『  무지몽매  』
     
     ○    풍요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세계를 온전히 유지 시킬 수 있
     ●    을 정도의  범위내에서 결실을 맺도록 해야 이루어 지는 것
     ●    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크게 먹
            으려 하면, 결국은 먹지 못하고 끝내 가서는  자신이 망가져
     ●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전부다 몽
     ○    매한 사람들입니다.
     ●
                    산수몽(山水夢)
     
        산아래 험난한 물이 있다. 험난하며 갈 바를 모르고 멈춰있는 상태
        가 [몽]괘의 상징이다. 몽은 몽매하다는 뜻이다.  몽매한 상태에서
        는 오직 형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형통할 수 있는 도리를 수행한
        다면 때에 적중한 시책이  될 것이다. 선생이 어린이에게 배우기를
        강요하는 방법을 써서는 안된다. 그리하여야만 선생과 제자는 배우
        고 가르치는데 서로 마음이 호응할 것이며, 마음속에 신념을 가지게
        된다. 점을 치는 경우, 전일한 마음으로 한 번 점을  치면 최초에 점
        에서 진실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두번 세번 같은 점을 되풀이 한다
        면, 이것은 점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므로 바른 계시를 얻을 수 없
        다. [몽]의 도로서 바른 덕을 기르는  것은 장차 성인의 길에 들어가
        게 하는 공이 되는 것이다.
       
            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 象曰,  蒙山下有險. 險而止蒙. 蒙亨.  以亨行, 時中也.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志應也. 初筮告,  以剛中也. 再三瀆.
            瀆則不告, 童蒙也.  蒙以養正. 聖功也.
     
      [산수몽]은 나를 나타내는  내괘가 물로서, 위아래로  흡수하는 모습입니다.
      내괘는 굳게 자리를 잡아 안정되어야  하는데 밑에서부터 들어오는 것을 막
      지 못해 자리가  잡혀져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면서도 가운데는 자기라
      고 하는 자아 의식이 분명히 고착되어 있어 고집스러움을 보여줍니다. 또 외
      괘는 맨위의 효가 하늘을 막아 놓아서 하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늘을 향
      해 강하게 고집을 떨고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산수몽]은 자기 주관과 사
      리판단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자신만 좋으면, 이치를 따져 선후를 분별하
      지 못하고 모두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는 형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
      서 이 괘는 이제 막 싹이 흙을 뚫고 나와  어떻게 움직여야 될 지를  모르는
      상태, 자기만 좋으면 뭐가 어떻게  되든지 사리판단이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철없는 어린아이의 상태와 같은 괘입니다. 따라서 '어리석다'고 하여 괘의 이
      름이 몽(夢)입니다.  "산아래 험난한 물이 있다. 험난하여 갈 바를  모르고 멈
      춰있는 상태가 몽괘의 괘상이다." 산아래 물이 있는데  험난하여 갈 바를 모르
      고 멈춰있는 상태가 몽괘의 상징입니다. 내괘는  물로서 이것 저것 가리지 않
      고 무엇이든 자신만 좋으면 사리판단 없이 움직일 수 있고, 외괘는 산으로 하
      늘과 차단된 채 여기 저기 유혹으로 꾀는 형국이어서, 자칫 잘못하면 샘물이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산에 흡수되어 고갈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어리석어 사리판단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부단히 자신을 반성하면서
      성현의 가르침을 쫓아 행하면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몽매함이 떨어져 나가고
      드디어  바다에 이를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내포하고 있습니다. 괘는 역순한
      다는  법칙에 의해 내괘였던 물이 위로 올라가고, 외괘였던 산이 밑으로 내려
      오면 물속에 산이 있는 형상, 즉 커다란 바다를 이루게 됩니다.
     
      [산수몽]은 성현에 이를 수 있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되는 괘입니다. 다시 말하
    면 씨앗이 이제 땅위에 나와서 훌륭한 나무가 되고 훌륭한 꽃이 되고 훌륭한 열
    매를 맺어 훌륭한 종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와있는 괘입니다. 그런데 햇
    빛이 싫다고 자기가 막아버리고, 또 물이 좋다고 하루 종일 비만 맞는 식으로 나
    아가면 자기 자신이 꽃도 피기전에 팍삭 시들어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
    서 이 괘는  자기 결점을 찾아내어 보완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괘
    의 결점은 자기는 강하지만 위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산수몽]은 자
    연이 지금 몽매를 떨어뜨려 주려고 하니까 떨어뜨려 주는 그날까지 외부에서 오
    는 자기의 단점을 스스로 잘 막으면서 자기가 세운 최대의 목표를 향하여 꾸준
    히 나아가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금 잘 안된다고 실의에 빠져 술을 마시거
    나, 스트레스를 푼다고 밖에 나가 친구와 돌아다니는 등의 방정을 떨지말고 자
    기의 이상을 향하여 과감이 실천하면서  묵묵히 지나다 보면 "왜 안되는가?"하
    는 세계가 떨어져 갈 날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괘가 바로 [산수
    몽]입니다. 우리는 [산수몽]의 괘를  보고 스스로를 다시  점검하여 "자칫 분별
    없이 여기 저기에 한  눈을 팔고 있지 않는가?"를 반성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
    침을 구하여 스승이 제시하는 길을 유혹에 빠짐이 없이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
    다. 자신이 몽매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나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많은 것들이
    들어오기 쉽습니다. 그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성현의 가르침을 찾아 잘 인
    내해 가면 언젠가 몽매는 마치 딱지처럼 저절로  떨어져 나갈 날이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몽은 몽매하다는 뜻이다. 몽매한 상태에서는  오직 형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즉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리는 길만을 배워야지
    벌써부터  풀려고 해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
    아야 됩니다. "형통할 수 있는 도리를 수행한다면 때에 적중한 시책이 될 것이다."
    형통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자기가 먼저 움직이지를 말고 그 도리를 알아서 지킨
    다면 이 괘가 잘  되어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선생이 어린이에게 배우기를 강요하는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 즉 몽매한 어린이가 스스로 선생에게 배우기를 원하는 의욕이 생기도록 유
    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몽매한 제자에게 선생이 일방적으로 배우기를 강요하는
    교육법을 쓰면, 제자는 아직 몽매하기 때문에,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제멋대로 판
    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가 스스로 알아서  찾아오도록 유도를 해야 합니다.
    길을 가다가 다리가 끊어졌으면 우회해서 다른 길로도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쪽으로 가야한다."하고 강하게 가르치면 제자는 틀림없이 끊어진 다리로 물을 건
    너다가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야만 선생과 제자는 배우
    고  가르치는데 서로 마음이 호응할 것이며, 마음속에 신념을 가지게 된다." 몽매
    를 깨우쳐 주는데는 처음과 끝이 한결같이 다르지 않은 교육이 중요합니다. 그래
    야만 마음속에 신념이 생기게 됩니다. 몽매한 사람은 자기 위치가 없기 때문에
    "물이 흘러 흘러서 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강하게 주어 마음의 의심과
    혼란을 없애야 합니다. "전일한 마음으로 한 번 점치면 최초의 점에서 진실을 얻
    을 것이다. 그러나 두번 세번 같은 점을 되풀이 한다면 이것은 점의 신성을 모독
    하는 것이므로 바른 계시를 얻을 수없다." 이 괘가 나온 사람은 한 번 자기가 뜻을
    정했으면  중도에 자신의 뜻을 절대로 변경시켜서는 안된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
    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에 인간적인 과오가 벌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자기를 단속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고 한 번 펴보고, 두 번 펴보면 하늘은 완전히 막
    막해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몽]의 도로서 바른 덕을 기르는 것은 장차 성인의 길에 들어가게 하는 공이 되
    는 것이다." 이 괘의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몽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스스로 현통하게 풀어나가는 길을 터득하면
    곧 성인에 들어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괘는 잘 풀리면 우주와 하나가
    되고 바다를 이루듯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잘못 풀리면 자기의 결함이 무엇
    인지를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크게 비참해진다는 괘입니다. 양성에너
    지가 음성의 세계를 갖추지 못하고 그저 하고 싶은데로 막 움직이게 되면 사실 덧
    없이 그냥 망가져 버리게 됩니다. 이 괘는 위로는 막힌 상태에서 음성 에너지가 자
    기 고집만 떨게 되면 결국은 안에서 깨져 부셔져 버린다라는 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역은 역순하므로 안과 밖이 바뀌어  버리면 이 괘는 위로 뚫리어 하늘을
    받아들일 수 있고, 밑으로는 자기가 자리잡은 것을 형통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바로 이제부터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자신의 결점을 분명히 알아서 스스로 보완해
    나가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냥 다 하나인 것 같지만
    안으로 나누어 보면 각자는 여러 개의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짐승들은 그것을  철
    저히 지키는데 유독 우리 사람들만 그 점을 지키지 않습니다. 개미들은 태어날 때
    부터 여왕개미, 병정개미, 일개미로 엄격히 차원이 구분되어져 있습니다. 병정개미
    가 쿠테타를 일으키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일개미들은 그저 죽으나 사나 일만하
    고 살지만 그것이 일개미의 행복입니다. 우리 사람을 일개미, 병정개미, 여왕개미
    처럼 나눌 수는 없지만 자기가 지금 현재 처해져 있는 차원이라는 것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우리 인간은 차원을 박차고 전차원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
    다. 개미들은 아예 너는 여왕개미, 너는 일개미, 너는 병정개미 하고 딱 정해져버리
    면 병정개미가 여왕개미가 될 수 있는 확률은 0%, 일개미가 여왕개미가 될 수 있는
    확률은  0%입니다. 그점은 절대로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람은  지
    금 일만 죽도록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원한 일꾼이 되라는 법도 없고, 그 사람이 
    지금  대통령이라고 해도 어느날 갑자기  밑으로 끌어 내려져서 감옥에 갈 수도 있
    습니다. 주역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전 우주의 차원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산 밑에 물이 있어 산에 흡수되어 버릴 그러한 처지지만
    산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물만 잘 흘러 내려가 버리면 바다에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이
    산수몽괘의 상의입니다.
        
        대상. 산기슭에 솟아나는 샘물, 이것이 몽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바른일을 과감히 실천하면서 묵묵히 덕을 기른다.
     
            大曰, 山下出泉蒙. 君子以果行有德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바른 일을 과감히 실천하면서 묵묵히 덕을 기른다." 군자는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바른 일이 이루어지도록 묵묵히 덕을 기르는 것이지, 바르게 하
    려고 함부로 날뛰지 않습니다. 햇볕이 따갑더라도 비가 오더라도 싹은  묵묵히 견뎌내
    면서 자기의 할일만 분명히 해야지, 따갑다고 피하거나 비가 온다고 다시 땅속으로 들
    어가버리면 싹 자체가  망가져 꽃이 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첫번째 음효. 무지를 계발하는데는 형벌을 엄하게 하는 것이 좋다.
        규율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자기 단속의 형벌을  너무 적
        극적으로 지속하여 가는 것은 좋지 못하다.
     
            初六.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吝.
            象曰, 利用刑人, 以正法也.
           
      첫번째 효는 땅위에 굳건하게 서야  되는데 음효로서 굳건하게 서지를 못합니다. 이
    괘는 위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밑에 있는 자신이 분명하지 못합니다. 어디
    서있는 지 모르고, 어디가 어디인지 모릅니다. 그저 자기에게 잘 대해주면 다  좋은 것
    인줄 알고 남들이 나보고  멋있다 그러면 정말로  자신이 멋있는줄 압니다. 그러므로
    큰 시행착오가 벌어지지 않도록 자기 단속을 잘해야 됩니다. 그래서 먼저 밑에 단단하
    게 자기 자신의  세계를 구축시켜야 합니다.  "무지를 계발하는 데는 형벌을 엄하게 하
    는 것이 좋다. 규율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 자기 자신이 형벌을  엄하게 하여야 합니
    다. 밑을 단단하게 구축시킨다는 것은 자기가 갈 길을  분명히 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첫째 나보다 훌륭하거나  비슷한 이가 아니면 함께 길을 가지 않겠다."라고 하면 자신
    의 길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그렇게 먹고 나아가는 동안에 다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규율을 세우고 형벌을 엄하게 해야 합니다. 이 괘가 나온 사람은 자기
    좋은 쪽으로 규율을 세우는 경향이 있으므로 규율을 바르게 세우려면 자기 스스로 형
    벌을 엄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단속의  형벌을 너무 적극적으로  지속하여
    가는 것은 좋지 못하다." 왜냐하면 너무나 자신을  속박하면 스스로 잘 할 수 있는 능력
    이 망가져 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엄하되 해야  할 일에
    있어서는 활발하게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몽매한 사람은 자신이 신나야
    만 열심히 일합니다. 또 잘못된 일도 자신만 신나면 막합니다. 그러면서 어디로 가는지
    를 모르며 자기 즐겁지 않으면 을씨년스럽게 하는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런 사람은 첫째, 외관적인 규율을 바르게 세우고 이를 지켜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이 힘
    들고 어려울 지라도 참고 해나가야 한다는 것, 그  점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첫번째
    효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양효. 무지한  어린애를 포용하여  처와 화합하면 길하다.
        어머니를 도와 집안을  잘 다스릴 것이다.
               
            九二, 包蒙, 吉. 納婦,  吉. 子克蒙. 象曰, 子克蒙, 剛柔接也.
             
      두번째 양효 위아래로 음효가 있습니다. 양효가 양쪽으로  음을 인솔하는 형태로서 이
    것은 리더가 양쪽으로  부하를 인솔하는 격입니다. "어린애를 포용하여 처와 화합하면 길
    하다." 몽괘는  약한 자, 어린 자, 지혜가 부족한 자를  맡긴 것이므로 그 몽매한 자를 포용
    하고 혼자서 단독적으로 하지 말고 여러 사람들과 협력을 통해서 해나아가면 길하다는 것
    입니다.  화합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효는 양효이므로 화합을 위
    해서 자신을 잘  다스려가면서 나아가야지 신나서 한다고 잘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
    닙니다. 또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한다고 일이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의 마
    음에 들고 안들고를 떠나서  자신을 잘 다스려  자제하며 화합을 이루어 내는 것, 여기서
    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보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번째 음효. 이런 여자를 아내로  삼으면 안된다. 그의 행동이
        남녀간의 순서에 어긋난다. 강정한 사나이를 보고 여자로서 예
        우 바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먼저 구혼한다. 아내의  지위에 있
        는 자가 먼저  자기 자신의  재지를 자랑하면서 중용해 주기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六三,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象曰, 勿用取女, 行不順也.
           
      세번째 효는 음효로서 위에서 하는 이야기는 모두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눈에 볼 때 자기보다 조금  낫다고 싶으면 다 좋은 사람인 줄 알고 있습니다. "강정한 사나
    이를 보고 여자로서 예우 바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먼저 구혼한다." 바로 밑에 남자가 있고
    대응하는 여섯번째 효가 남자이기 때문에 아래쪽으로도 친하고 위로도 친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몽괘는 확고한 자기, 지켜야 할 세계가  없이 움직이는 괘이기
    때문에 대응하는 여섯번째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여인은 강정한 사나이를 보면 여자로
    서 예의 바른  행동을 하지 못하고 먼저 프로포즈하기 때문에 남녀간의 순서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냇물은 바다로 가야 합니다. 바다로 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데
    가다 보니까 주위에 유혹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한눈 팔다가 보면 바다를 향
    해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작은 것을 찾다가는 큰 것, 즉 바다에 이를려고 하는 자신의
    뜻과 의지를 놓치게 된다는 점을  이 효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내의 지위에 있는 자가 먼
    저  자기 자신의 재지를 자랑하면서 중용해 주기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아래 지위에 있는
    자가 먼저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면서 중용해  주기를 요구해서는 안된다라는 이야기 입니
    다. 보통  [산수몽] 괘에 해당되는 사람은 작은 일에 잘난 척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조금만 부추켜 주면 마구 좋아하며 자기 자신을 망각해 버립니다. 그러면 작은  일에 빠져
    도대체 큰 일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사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습니다.
       
        네번째 음효. 무지(無知)로 괴로와  한다.
        현명한 지도자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六四, 困蒙. 吝.  象曰, 困蒙之吝, 獨遠實也.
           
      몽괘는 천지창조가 이루어지고 난 후  네번째에 해당하는 괘이면서 현상이 벌어지는 
    것으로는 두번째이기 때문에,  세상물정을 모르고 자기 멋대로 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는 것을 경고하는 괘입니다. 그러나 이 몽괘는 큰 바다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산에서 졸
    졸졸 흘러내리는 냇물이 큰 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냇물이
    바다에 도달하기 전에 산이 덮쳐 흡수되어 버리면 그냥 끝나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어
    리석음을 저지르지 말고 항상 산에 덮여질 수 있는 위험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잘 지켜
    바다에 이르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위로 음효, 아래로도
    음효로 둘러싸여 무지 몽매한 자의 집단속에 쌓여서 홀로 고독한 형태입니다. 그래서
    궁지에서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길이 잘 보이지 않고, 일이 잘 풀
    리지 않으면 답답함 속에서 몹시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자신의 무지 몽매를 탓
    하며 자포자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몽매를 탓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현명한
    지도자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몽매를 스스로 자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몽매는 놔두
    면 저절로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아하!" 하고 아는 순간이 곧 오게 됩니다. 지금
    내가 몽매하다고 해서 몽매를 바꾸려 하지 말고, 먼저 몽매하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외부의 적들을 차단시켜야 합니다. 통상 몽매하면 자기 중심이 없으므로 마음이 약해집
    니다. 그러면 외부의 유혹에 말려들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적들을 차단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잘 인내해 가다보면 곧 몽매는 떨어
    지고 서서히 길이 보이기 시작할 때가 옵니다. "뭘 어떻게 해야 정말 잘 되는 것일까?" "이
    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여 질 때, 이 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곳에서부터 시작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멈추지 말아야  됩니다. "이제는 이런 이상(理想)을 갖고 해보자."
    하고 방향을  바꾸어서는 안되며, 이미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꽃피워 나가
    기 시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섯번째 음효. 무지한 자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공손한
        태도로 가르침을 청한다. 그러므로 길하다.
               
            六五, 童蒙, 吉.  象曰, 童蒙之吉, 順以巽也.
           
      다섯번째는 음효가 여섯번째 양성기운을 향해  따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가르
    침을 유순하게 따르면서 유능하고 신뢰있는 자에게 일을 맡기면 길해진다는 뜻입니다.
    몽매라는 것은 머리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해, 자신의 존
    재가  존속될 수 있는 그  세계의 반경을 흐트려뜨리는 것입니다. 잘 안된다고 자기를
    학대하지  말고 물끄러미 지켜보면 몽매는 떨어져 나가는 법입니다. 따라서 몽매가 떨
    어져 나갈 때까지 항상  가르침을 청하는 공손한  태도로 매사에 임하여야 길한 것입니
    다.
     
        여섯번째 양효. 모든 몽매를 퇴치한다. 몽을 퇴치함에 있어서
        피계몽자의 몽매를  원수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차라리 몽매를
        틈타 외부에서 오는 해를 막도록 마음을 쓰라. 그리하면 상하의
        마음이 서로 차분할 것이다.
     
            上九,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象曰, 利禦寇, 上下順也.
     
      양효가 최고의 위치에 있으면서 아래의 모든 음의 몽매를 퇴치합니다. 몽매는 이제
    떨어져 나갑니다.  몽매가 떨어지면 남의 몽매를 깨우쳐 줄 수 있게 됩니다. 이 때는 이
    미  큰 물줄기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산이 덮쳐봐야  물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성인의 덕에 산은 물에 잠기어 큰 바다를 이루게 되어 세상은 성인의 덕을 공경하고 따
    르게 됩니다.  "몽을 퇴치함에 있어서 피계몽자의  몽매를 원수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몽매를 퇴치함에 있어서 피계몽자의 몽매를 원수처럼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해를  줄
    수 있습니다. 계몽자는  피계몽자의 몽매를 틈타서 외부로부터 침입하려는 해를  방어
    하여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하면 계몽자와 피계몽자가 서로 화합하게 됩니다. 자신
    의 몽매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는 샘물이 바다에 이르는 것과 같은 긴 여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곧 이루어 질 수도 있습니
    다.  어떤 사람은 30년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10년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
    은 1년만에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괘는 자기 스스로를 잘 관찰하라고 말합니다.
    몽매가 떨어지는 현상은  자신만이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몽매는 사람이 원래가 몽매해서 몽매한게 아닙니
    다. 인간이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다면 나보다 내가  살 수 있게 받쳐주고 있는 바탕의
    세계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잘 되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잘 되어지지
    않고 출세할 수  없습니다. 혹시 우연히 산 주택복권이 맞아서 크게 한 번 돈을 벌 수는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잘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혹시 누군가 수많은 땅을 나에게
    줄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풍요는 간직해서  유지시킬 수 있을 정도의 땅만을 자기가 취
    해서  그 안에서 풍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고 크게 먹을려고 하면 결국은 먹지 못하고  끝내 가서는 자신이 망가져 버리게 됩
    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몽매한 사람입니다.
     
     [산수몽]은 "물이 산에 흡수되어 없어진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역은 우주가 영
    원히 깨어지지 않듯이, 영원히 존재하는 세계로 데려가려고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
    니다. 내가 지금 몽매하지만 목표를 올바르게 세우고, 내 욕심대로 하지 않고 정도(正道)
    를 지키며 그 길을 향하여 최대의 희생과 노력으로 꾸준히 해나가면, 결국 성현의 지위
    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산수몽]이 주는 교훈입니다. 주역의 괘를 볼 때 우리가
    좋게 되려면  땅에는 양성기운으로 우뚝 서 있어야됩니다. 그래야만 땅위에서 자라고 땅
    에 기운을 펼칠 수 있습니다. 서있지 못하고 땅을 음성적으로 받아들이면 땅과 붙어있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반면에 하늘은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양성에너지로 막
    아버리면 하늘을 거부하고  자기 멋대로 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잘 될 수 없습니다. 그래
    서 좋게 되려면 대부분이 밑은 양성이라야 하고, 위는 음성이어야 합니다.  [산수몽]은
    위가 양성이어서 하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몽매합니다. 그러나 겸손으로 성현
    의 말씀을 잘 지키면 주역은 역순하므로 위와 아래가 바뀌어 위가 뚫리게 됩니다. 뚫린
    다는 이야기는 하늘의 뜻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늘의 뜻을 받아들
    이는 내가 존재한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밑으로 내려가서 하늘의 기운을 땅에 품
    어낼 수 있게 됩니다. 결국은 산이 물에 잠기게 됩니다. 바다에 가면 바다밑에 산이 있습
    니다. 산위에 물이 될 수가 있으므로 이 괘는 좋은 괘입니다. 좋은 괘이지만 아차 하면 잠
    길 수 있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나 악은 나를 침범하려
    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잘 생각하고 인내를 통해  눈이 저절로 틔어지게끔  묵묵히 자기주
    변에 있는 일을 성심성의껏 처리하다보면  언젠가 딱지가 떨어지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
    다. 
     
     2005. 9. 28. 유성 記..…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4150
  • 3.수뢰둔(水雷屯)
    『   탄생의 시련  』
              
    ●      깊이 있는 사람은 안에 간직할 것을 먼저 생각합니
    ○      다. 손자병법에도 승산이 있는 자가 이긴다고 했습
    ●      니다. 안에 간직할 세계가 분명히 갖추어진 다음에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갖추지 않고 내가
    ●      움직이면 채워지겠지 하는 막연함으로 움직이는 사
    ●      람은 망할 사람입니다. 돈이 많다고 성공하는 것은
    ○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단지 얼마동안의 시간에 그
            돈을 탕진하느냐 하는 것만 남았을 뿐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겉만 화려하지 속안에 깊이가 없는 사람
            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수뢰둔(水雷屯)
        둔(屯)은 양과 음이 처음으로 서로 교감하여 새
        로운 것을 태어나게 하는 그 고난의 때이다. 그
        러나 그 고난속에서도 꾸준히  활발하게 움직이
        고 있다. 이제 그 힘은 점차로 발전하고 확대하
        여 간다. 마치 뇌우의 에너지가  천지간에 가득
        하면 머지않아 큰 비가 되어  지상의 만물을 적
        셔줌과 같다. 지금은  고난과 암흑이  지배하고
        있다. 초조하다고  서둘러서는 안된다.  인재를
        적재 적소에 배치하고 꾸준히  노력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마음은 항
        상 불안하다.
       
            屯, 元亨. 利貞.  勿用有攸往. 利建侯. 象
            曰, 屯剛柔始交以難生, 勤乎險中. 大亨貞,
            雷雨之動滿盈. 天造草昧, 宜建侯而不寧.
     
      [수뢰둔]은 64괘중 3번째 괘이며 가장 어렵다는 4란괘(亂卦)중의
    하나입니다. [둔]괘는 천지창조가 시작되는 고난을 상징하고 있습니
    다. 모두 양효로  이루어진 [건]과 모두 음효로 이루어진 [곤] 다음
    에 음양이 상호교감하면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상태가 [둔]괘입니다.
     
      주역은 여섯 개의 효중 1, 3, 5번째 효는 양성의 자리이고  2, 4,
    6번째 효는 음성의 자리인데 수뢰둔괘는 3번째 효 외에는 나머지 효
    들은 모두 제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맨 밑에 양의 효가 자
    리잡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며, 이 괘
    는 잘 나갈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 괘의 전체적인
    뜻은 씨앗을 땅속에다 파묻었을 때 땅속에 묻힌 씨앗이 흙을 뚫고 나
    오려니 암담하고 캄캄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 싹은 결국에는 피어나온다라는 것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
    래서 만약 점을 쳐서 이 괘가 나왔다면 지금하고 있는 일이 아직 성
    숙이라는 것을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단순히 주역을 찾아보면 이
    괘는 주역 64괘중 나쁜 4개의 괘중 하나라고 나오지만 원래 주역에는
    나쁜 괘, 좋은 괘는 없습니다. 주역은 현재가 좋은 상황이면 앞으로
    닥칠 나쁜 상황에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하여 현재의 좋은 것을 지속
    할 것인가를 말하고, 현재가 어렵고 힘든 상황이면 이를 어떻게 슬기
    롭게 극복하여 미래의 좋은 상황으로 만들 것인가를 말하고 있을 뿐
    입니다.
     
      [둔]은 상괘가 물을 나타내는 괘이고 하괘는 우뢰를 나타내는 괘입
    니다. 현재는 비록 주변 환경이 좋지 않지만 언제든지 우뢰를 일으킬
    수 있는 강한 에너지가 충전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천둥
    이 치듯이 잘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맨 밑의 양효는 이 세상에
    굳건히 자신의 뜻을 세우고 이제 막 나아가려고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위로 세개의 음효가 있어 양의 기운이 나아가려는데 그 기운을
    계속 흡수해 버리니 암담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마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 땅을 뚫고 나오려는데 흙의 인력이 계속 잡아당기기
    때문에 나아가기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
    다. 그러나 첫번째 양의 기운은 꾸준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가
    장 중요한 다섯번째의 효가 양효의 자리에 양효가 위치하여 중정(中正)
    을 이루고 있으므로 첫번째 양효의 활동이 올바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흙이 잡아당길 지라도 씨앗은 결국에
    그것을 뚫고 세상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뇌우의 에너지가 천지간에  가득하면 머지않아 큰  비가 되어 지상
    의 만물을 적셔줌과 같다." 물론 지금은 우뢰가 구름밑에 있어서 번개
    와 천둥을 일으킬 수 없는 미성숙된 상태에 있고, 환경이 방해하는 것
    들로 둘러싸여져 있는 매우 암담한 상황이지만, 그 고난속에서도 씨앗
    이 모래에 자리잡은 것이 아니고 제대로 땅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
    기 때문에 그 힘은 점차로 발전하고 확대되어 결국에는 뇌우의 에너지
    가 천지간에 가득하여 큰 비를 내려 지상의 만물을 적셔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뚫고 나가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아 있습니다.
     
        대상. 우뢰가 구름 밑에 있어서  아직 진로할만한
        기세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둔]의 괘상이
        다.  군자는 이러한 질식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국가 경륜의 큰 뜻을 세운다.
     
            大象, 雲雷屯. 君子以經綸
     
      씨앗이 난관을 뚫고 세상에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것은 꽃을 피울려고
    하는 그 뜻이 옳바르고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에 우뚝 서서 세
    상을 위한 일을 하려고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뜻을 정립하는 일입니다. 뜻이 올바르고 분명하면 한 때 어려운 역
    경이 닥치더라도 미래의 영광을 위해 지혜와 인내로써 극복하고 나아갈
    것이며 뜻이 부정하고 약하면 주변의 유혹에 빠져서 이룰 수 없기 때문
    입니다.  "군자는 이러한 질식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국가 경륜의 큰
    뜻을 세운다." 이것이 곧 인재를 적재 적소에 배치하고 꾸준히 노력하면
    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부딪치고 나아가는 일은 잠시 내일
    을 기약하면서 보류하고  앞으로 일어나는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피며 서
    서히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큰 뜻은 절대 잃어버림이 없이 오히
    려 안으로 더 굳게해야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양효.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정체만하
        고 있을 수는 없다.  갈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상태
        에서 무릇 주자(走者)는 고민하고 있으나 뜻한 바는
        정당하다.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크게 민
        심을 얻을 것이다.
     
            初九, 磐桓. 利居貞.  利建侯. 象曰, 雖磐桓,
            志行正也. 以貴下賤, 大得民也.
           
      나갈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양효가 흘러 넘치는 양성기운의
    심경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비록 주저하고 고민하고 있으나 다섯번째
    양효가 중정(中正)의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뜻한 바는 정당합니다.
    또 정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분명한 뜻을 얻어 그 힘으
    로 나아갈 길을 멈추지 말고 고난을 극복해 나아가야 합니다. 위로 세개
    의 음성기운이 누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타고 넘어가야 합니다.
    음성기운은 힘으로 누르고 넘어갈 것이 아니고, 잘 달래어 극복해야 할
    기운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이기는 것은 여자를 잘 다독거려서 스스로
    따르게 하는 것이지 결코 완력으로 휘어잡는다고 여자를 이기는 것이 아
    닙니다. 그래서 몸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면 음성기운의 마음을
    얻어 넘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음효. 나가기를 주저하여 되돌아 온다. 말을
        타고 가다가 되돌아 온다. 방황하는 모습이다. 이웃
        집 남자가 사모하여 구혼(求婚)한다. 처녀는 정조가
        견고하여 함부로 유혹되지 않고 마침내 상도(常道)로
        돌아와서 올바른 상대와 결혼한다.
     
            六二, 屯如, 瀆如, 乘馬班如. 匪寇,  婚구.
            女子貞不字, 十年乃字.   象曰, 六二之難,
            乘剛也. 十年乃字, 反常也.
     
      첫번째 양효가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음효가 잡아당겨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힘을 좀 보태서 말을 타고 나갔으
    나 그 위의 음효가 워낙 강하여 결국은 다시 되돌아 왔습니다. "이웃집
    남자가 사모하여 구혼(求婚)한다." 두번째 음효는 陰의 자리에 陰이 있
    어 좋은 위치지만 첫번째 양효와 가까이 있어 유혹을 받기가 쉽습니다.
    본래 대응관계에 있는 다섯번째 효가 양효로서 이 음효는 다섯번째 양효
    를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밑의 양효가 가까이 있어 그 유혹에 망설이고
    있습니다.
     
      "처녀는 정조가 견고하여 함부로 유혹되지 않고 마침내 상도(常道)로
    돌아와서 올바른 상대와 결혼한다." 그러나 음효는 2, 4, 6번 모두 陰의
    자리에 정당하게 위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번째 음효는 내괘의 가운데
    효로서 중정(中正)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끝끝내
    정조를 지켜 다섯번째 양효와 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절개가 굳은 처
    녀는 긴 고민의 세월을 참아 넘기고 마침내는 정상적인 길로 돌아와 정당
    한 상대자와 결합을 한다." 즉 긴 고민의 세월을 참아 넘기고 마침내는
    정상적인 길로 돌아와 이루어낸다는 뜻입니다. 첫번째 효에서 시작을 해
    서 두번째에 잘 안되고 있지만 잘 안되는 것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잘
    안되는 것이지 바탕이 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탕은 될 수 있는 자질은 충분히 갖추었는데 되기 위한 장애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세운 뜻을 향해 한 때 유혹이 오더라도
    뜻을 저버리지 말고 일관하여 끊임없이 꾸준히 해 나가면 반드시 뜻을 이
    룰 수 있습니다.
      
        세번째 음효. 사냥꾼이 사슴에 정신이 팔려 안내자도
        없이 숲속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상태다. 위험한 징조
        를 보면 곧 중지해야 한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반
        드시 막다른 골목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六三, 卽鹿无虞, 惟入于林中. 君子幾不如含.
            往客. 象曰,卽鹿无虞, 以從禽也, 君子含之,
            往客, 窮也.
           
      "사냥꾼이 사슴에 정신이 팔려 안내자도 없이 숲속으로 깊숙히 들어간
    상태" 첫번째  두번째에서 꾸준히 열심히 하였으나 위로 두개의 음에너지
    가 강하게 누루고 있어 양에너지가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열심
    히 하려는 마음만 앞서 사냥꾼이 사슴에 정신이 팔려 너무 쫓다 보니까
    안내자도 없이 밀림속으로 깊숙히 들어간 상태가 되었습니다. 되어가는
    것인지 안되는 것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
    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외부를 관찰할 줄 모르고 단순히 열심히 하는 모
    습의 자기 자신에 도취되어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은 아
    닙니다. 열심히 하면서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상황을
    변화시켜서 뚫고 나아가야지 막연히 열심히만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부지런한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아침에 별을 보고 나와서 어둠이 깊어
    진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들, 새벽 네시 반에 나가서 돌 나르다가 밤 열한
    시에 들어와서 곯아 떨어지고, 다음날, 그 다음날도 똑같이 사는 사람들,
    그러다가 나이 오십이 넘어가면 류마티스, 관절염 등 골병이 들어 자기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비록 열심히
    는 살았지만 비젼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비젼 없는 노
    력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한다는 것에만 몰두해서 하지 말고, 가다가 위험하면 중지할 수 있
    는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프면 쉬면서 상처를 치료하고, 상처가 아물
    면 다시 서서히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판사판으로 그냥 무작
    정 내닫으면 결국 길이 막혀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 양에너지가 나
    아가는데 있어 가장 어려운 결정적인 상태가 바로 지금입니다. [수뢰둔]이
    '고(苦)'를 나타내는 이유는 세번째 효가 음성인데, 두번째 음성기운 뿐만
    아니라 위의 네번째 음성기운까지 받아들여 음에너지 세개로 양에너지에 밀
    어 닥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남자가 세 여인을 감당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남자가 한 여인을 잘 구슬려서 따르게 하는 것도 힘이 드는
    데 세 여인이나 모두 불화없이 이끌고 넘어가려면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세 여자를 다스릴 정도는 되어야
    장부라고 할 수  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번째 여자
    까지 다스리려면 단순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비젼을 일으킬 수 있
    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젼이 보이게 되면 위험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도를 찾게 됩니다. 길을 잃으면 되돌아 오더라도 절망
    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부딪치려 하지 말고, 세상에 머리를 숙이면서 타고
    넘는 것. 가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상황이 오게 되면 얼른 중지하고 재정
    비한 다음, 거듭 살피며 나아가는 것. 세번째 효는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음효. 말을 타고 내달았다가 주저하며 되돌아
        온다. 돌아와 혼인을 구한다. 적극적으로 추진하면 성
        취될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 독주하려 들지 말고 동지
        를 구하여 함께 나아감이 현명하다. 그리하면 모든 것
        이 순조롭고 길하리라.
     
            六四, 乘馬班如. 求婚구往, 吉无不利.
            象曰, 求而往, 明也.
     
      생물학자들은 남자와 여자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으며 그 차이는 무엇인가
    를 인체에 대한 연구, 특히 성호르몬의 성질과 그 기능 등을 밝혀냄으로써
    파악할 것입니다. 또 심리학자들은 남녀의 마음과 심리적 변화 등을 연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녀가 기하학적으로 어떻게 생겼는가하는 것을 가장 정확
    하게 말해주는 것이 바로 주역입니다. 주역은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
    대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말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유익함과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역이 이 세상에 탄생하게 된 동기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야지 행복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가? 그것은 먼저 남자는 남자가 무엇인지
    를 분명히 알고 여자는 여자가 무언지를 알고,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
    답게 사는 것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남자는 남자가 무엇인지 모르
    고 남자답게 살지 못할 때 불행해지며, 여자는 여자가 무언지를 모르고 여자
    로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해 집니다. 단순히 나는 여자이니까 남자가 필
    요하다, 혹은 나는 남자이니까 여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남녀가 같이 살면 처
    음에는 잠깐 행복한 것같지만 좀 지나면 공허해지기 쉽상입니다. 그 남자가
    다 그 남자같고, 그 여자가 다 그 여자 같아서 행복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자가 여자를 분명히 모르고 남자가 남자를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음성에너지가 두 개, 양성에너지가 한 개 있는 것이 남자입니다. 또 양성
    에너지가 두 개, 음성에너지가 한 개 있는 것이 여자입니다. 남자는 겉으로
    는 양성이지만 안으로 음성기운이 둘 있고, 여자는 겉으로는 음성이지만 안
    으로 양성기운이 둘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주역을 토대로 해
    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여자는 여자, 남자는 남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
    해서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남녀지간에 우정이 존재한다
    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남녀지간에 우정은 없습니다. 우정이라는 심
    리적인 작용도 자연은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존재하게 만들어 놓
    았기 때문에 끝내 가서는 남녀지간의 애정으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양성에너
    지는 "쉽고 친절하다."고 했으므로 처음에는 친구같이 존재할런지는 모르지
    만 조금 지나면 안에 있는 음성에너지가 움직여서 그 여자를 취하려 하게 됩
    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는 늑대라고 말합니다. 그 속셈이 나중에 드러나
    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만나다 보니까 친해져서 한 번 이불 속안에 들어가면
    변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조금 전 까지는 "미스 김 커피 드시겠어요?" 이렇
    게 친절하다가 이불 속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어이 뭐 마실 거 없어? 좀 가
    져와." 이렇게 명령형으로 변하는 남자.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 까
    지는 얌전떨고 있다가 이불 속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나 뭐 살게 있는데
    ..."  하는 여자. 이런 남자나 여자와는 빨리 헤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또 어
    떤 남자는 이불 속안에 들어가면 만족해 가지고 "미스김 다음에 꼭 다시 한번
    만나 주시는 거죠?" 하며 이상야릇한 친절을 계속 베푸는 남자, 이런 남자는
    애욕적인 심정으로 인해 언젠가 나를 버릴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좋아하는 여자, 이런 여자는 소속이 없는
    여자입니다. 즉, 절개 없는 여자입니다.
     
      그러면 어떤 남녀가 만나야 되는가? 세칭 천생연분이라고 불리우는 남녀의
    만남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서로간에 마음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런 욕심도 없이 무언가 눈에 보여지지 않는 밀착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음양의 기가 완전히 순응되는 상태의 밀착감을 느끼는 사
    람들 사이가 천생연분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 만나는 것은 극히
    힘듭니다. 한 평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거의 만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백년
    을 사는 동안에 한 번 만나기가 그렇게 힘든 사람을 못 만날 바에는 자기 자
    신이 남자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남자답게 사는 것, 여자가 무엇이다하는
    것을 알고 여자답게 사는 것, 그것이 보다 행복한 길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자신의 연분을 만나는 것보다 더 쉬운 길입니다. 여성에너지는 뒤에 남성에너
    지를 두 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자는 일단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
    니다. 안에 있는 두 개의 양성에너지가 밖으로 먼저 튀어나와 버리면 자기가
    받아들여야 할 그 부분이 쪼개져 나가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여자
    는 안주할 곳이 전혀 없게 됩니다. 남자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바깥으로 나가
    는 에너지가 있는 한은 그  뒤에 안으로 포근히 돌아오는 세계를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간직이 없는 남자, 다시 말하면 벌어야만 되겠다고 사업하는
    사람은 망하기 쉽상입니다. 남자가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뒤의 음성
    에너지를 통해 얼마만큼 잘 받아들여 안으로 차곡차곡 쌓아 놓는가? 또 그것
    을 어떻게 오랫동안 유지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이 [수뢰둔] 괘는 위아래 어느 한 쪽이 여자여야 되는데 둘다 남자입니다.
    위에 세효에서 양효가 하나이며 하래의 괘에서도 세효중에 양효가 하나이기
    때문에 위 아래가 모두 양효가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으로 여성에너
    지를 많이 가지고는 있지만 이 여성에너지를 통해 충분히 안에서 저장을 시
    킬 만한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이 괘는 굉장히 어렵게 된다라는 점을 말
    하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남자는 안에 간직한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손자
    병법에도 "승산이 있는자가 이긴다."라고 했습니다. 안에 간직할 세계가 분
    명히 갖추어진 다음에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갖추지 않고 '안이
    비었으므로 내가  움직이면 채워지겠지.'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망합니다.
    돈이 있다고 성공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단지 얼마만한 시간
    에 그 돈을 탕진하느냐만 남았을 뿐이지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말을 타고 내달았다가는 주저하며 되돌아온다. 돌아와 혼인을 구한다."
    세번째까지 극복하고 이제 네번째로 오게 되면 내괘에서 외괘로 비약을 한
    것입니다. 그동안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이제 대평원으
    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있는 줄 알았는데 행복이 있는게 아니고 "아
    무 것도 없더라," 즉 내가 얻을려고 하는게 없었습니다. 씨앗이 흙 속안에
    서 "야 이 흙만 뚫고 나가면 뭐 있겠지" 하고선 나가 보니까 아무것도 없더
    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들어와서 혼인을 구해야 합니다. 혼인을 구
    한다는 것은 음성에너지가 이제는 양성에너지의 사리판단을 필요로 해서 같
    이 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남자는 사리판단이라는 걸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는 일단 음성에너지로 받아들일려고 하기때문에 사리판단을 하지 않습
    니다. 갈려고 하는 자가 뭐가 있는가 더듬더듬 생각하는 것이지, 가질려고
    하는 자는  더듬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남자는 갈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
    에 더듬더듬 "이것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여자는 뭔가 잡
    히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혼인을 구한다라는 이야기는 첫
    번째 양효의 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나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섯번째 양효. 은덕(恩德)이 널리 미치는 경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마음이  편협하고 도량이 크
        지 못하다. 작은 일을 맡은 자는 꾸준하여 길할 것이
        나, 큰 일을 맡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이가 이러한 태
        도로 있으면,  융통성이 없어 흉하리라.
     
            六五, 屯其膏, 小貞吉,  大貞凶. 象曰, 屯其膏,
            施未光也.
           
      [수뢰둔]은 음, 양이 교감되어 나타나는 첫번째 괘입니다. 그래서 다섯번째
    양효가 중정(中正)을 지키고 있고 두번째 음효와 정응(正應)을 이루어 올바른
    위치에 있지만, 아직 은덕(恩德)이 널리 미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
    다. 남자가 크면 클수록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포용력이 확대되어야 성숙할
    수 있습니다. 포용력이 있다는 것은 곧 융통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융통성 없
    는 사람들이 세상을 욕합니다. 회사에서 자기 상관이 온전하지 못하면 자신은
    그러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융통성 없는 사람이 동료들과 허구헌날 술마시
    며 상관을 흉봅니다. 세상은 온전한 것입니다. 인간이 행위함으로써 자연적으
    로 벌어진 세상의 일들은 모두 다 의미있는 것들입니다. 나쁜 것은 나쁜 것대
    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쁜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쁜 짓을 같이
    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그 나쁜 것이 저질러질 수밖에 없는 배경의 세계를 찾
    아내어 그것을 시정할 수 있는 도량을 갖추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융통성입니다. 설렁탕 집은 설렁탕 고유의 분위기와 맛이 있습니다. 풋풋한 실
    내장식과 뚝배기는 설렁탕의 맛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융통성 없는 사람이 돈
    을 많이 벌었다고 설렁탕 집을 개조하여 대리석으로 번쩍 번쩍하게 해놓고 그
    릇을 은그릇 금그릇으로 바꿔버리면 오히려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집기를 사
    용했는데도 더이상 손님이 오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음성에너지
    로 유지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섯번째 음효. 말을 타고 떠났으나 갈 곳이 없어 되돌아 온다.
        처량하고 외로움에  피눈물을 흘린다. 앞날이 멀지 않구나.
     
            上六, 乘馬班如. 泣血漣如, 何可長也.
           
      무슨일이나 너무 지나치게 궁극까지 내달으면  결국은 궁지에 빠져 오도가
    도 못하게 됩니다. [수뢰둔]의 괘상은 맨밑의 양효가 세상에 강하게 서는 자
    신을 확립하였지만  위로 음효가 겹쳐있어 길이 막혀있는 형국이라고 했습니
    다. 주역은 역순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괘가 위로 올라오고 외괘
    가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러면 맨 아래에 음효가 서서 아래로 받아들이고 맨
    위에도 음효가 서서 위를 받아들입니다. 결과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충분히
    해서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나가야 하는 부분은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깊이 뿌리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졌을 때 비로서 뇌성이 물
    을 뚫고 바깥에 나와서 온 세상에 번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받아
    들이는 것 없이 조금 잘  된다고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아가다 보면 결국 밑
    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되어 갈 곳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안으로 쌓여
    진 것이 없으니 더 오래  갈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음덕을 갖추는 것입니다.
     
      [수뢰둔]은 내괘 외괘 모두 음효가 둘, 양효가 하나로서 양성입니다. 어느
    한 쪽이 음성이어야 서로 잘 융합이 되는데 둘 다 남성이어서 서로 조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에는 여성에너지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안에서  차곡 차곡 잘 쌓을 만한 능력이 갖추어지면 잘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남자가 성숙하려면 포용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음성기운의 포용력
    이 없이 양성에너지로 꼿꼿이 서려고만 하면 집안이 분산되고 가족이 헤어집
    니다. 그래서 음성기운으로 포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포용력
    은, 세상의 모든 일은 자연이 자연적으로 저지른 일들이기 때문에 모두 수용
    할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온전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악날
    한 사람도 있고 자기에게 혹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에게 파렴치한 행위를 하
    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욕하고 하늘을 욕해서는 안됩니다. 홍
    수가 나서 봄에 피땀 흘려서 농사지어 놓은 것들을 하루 아침에 싹 거두어 갔
    다고 하늘을  욕해봐야 하늘은 꿈적도 안합니다. 그것은 자연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욕하는 인간이 잘못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살기 힘들다고 해
    서  세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온전합니다. 다만, 온전한 사람이
    드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일을 하다 보면 부딪치는 세계가 많습니다.
    그것을 모두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이 사람들이 자
    신들을 핍박한다고 말할 때,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애증(愛憎)을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없애라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씨앗은 햇빛도 필요하고 빗줄기도  필요한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씨앗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연의 힘이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핍박해도 우리는 자연의 힘이 있기 때문에 모두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싹은 야들 야들하게 나왔지만 이제 뻣뻣한 줄기로 굳
    어질 것입니다.
     
     2005. 9. 27. 유성 記..…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4675
  • 2. 곤위지(坤爲地)
    『 위대한 생명력 』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같
    이 음덕(陰德)을 길러야 합니다. 자만심에 빠져 모
    든 이루어진 것들이 자기 재주에 의해서 된 것인냥
    뻐기는 자는 자연이 주는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희생하며 일이 이
    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공을 하늘로 돌
    릴 수 있는 자. 겉으로 나서서 하는 것보다는 뒤에
    서 마땅히 해야할 바를 충실히 하는 자. 주인이 나
    를 알아 주든지 말든지 아랑곳 하지 않고 주인에 대
    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는 절개가 굳은 자. 이런 사
    람만이 천지 자연의 법칙을 터득하여 완성을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곤위지(坤爲地)
    곤(坤)의 괘는 크게 형통한다. 곤은 대지, 대지
    는 가장 위대한 생명력의 근원이다. 대지의 이
    무한한 근원적인 힘을 받아 만물은 나고 또 자
    란다. 그리하여 창조를 받아 성취한다. 대지는
    풍요하여 만물을 싣고 있다. 그 음덕의 넓고 큼
    은 한계가 없다. [곤]의 한없는 포용력에 안겨
    만물은 저마다 성장하고 번영한다. 준마(駿馬)
    는 땅과 같은 것, 암말은 유순하게 자신의 도리
    를 지키면서 무한한 힘을 간직하고 있다. 유순
    하면서도 모든 것이 마땅한 바를 얻고 굳게 절
    조를 지킨다. 그러므로 선두에 서서 나아가려
    한다면 반드시 길을 잃고 헤매지만 뒤를 따르면
    순조로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혼전에는 좋은 친구를 얻어 도움을 받으나 결
    혼한 후에는 친구를 떠나 오직 남편을 섬겨야
    한다. 최후에는 커다란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여성다운 정숙함을 항상 잃지 않는다면, 대지가
    무한한 것처럼 길이 행복할 것이다.

    坤, 元亨. 利牝馬之貞. 君子有攸往, 先迷,
    後得主. 利西南得朋. 東北喪明. 安貞吉.
    象曰, 至哉坤元, 萬物資生. 乃順乘天. 坤
    厚載物, 德合無彊, 含弘光大, 品物咸亨.
    牝馬地類, 行地無彊. 柔順利貞, 君子攸行.
    先迷先道, 後順得常. 西南得朋, 乃與類行.
    東北喪朋, 乃終有□, 安貞之吉, 應地無彊.

    [곤위지]괘는 여섯개의 효가 모두 음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음성에너지는 마치 바닷가의 파도와 같습니다. 튜부를 타고 파도
    에 가까이 가면 튜부가 밀려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점점 안으로 딸
    려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파도가 튜부에 부딪치면 밀려나
    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안으로 딸려들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음성에너지의 위대한 힘 때문입니다.
    중국사람들은 이 [곤]괘를 땅에 비유하였습니다. 인간관계에 있
    어서도 [건]괘가 남편이라면 [곤]괘는 아내와 같은 괘이고, [건]
    괘가 하늘이며 임금이면 [곤]괘는 신하와 같은 괘입니다. [곤]은
    [건]과는 떨어질 수 없으면서도 [건]과 하나가 되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필요조건을 서로 어긋나서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
    이것이 [곤]입니다. [곤위지]는 신하이기 때문에 끝까지 임금을
    모셔야 되는데, 그렇다면 셀러리맨은 항상 샐러리맨으로만 남아
    있고, 사장 노릇 한 번 못해보는가? 처음부터 곤으로 시작된 사람
    은 출세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
    다.
    [건]과 [곤]은 같이 공존하고 있지만 [건]은 [건], [곤]은 [곤]
    으로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분명히 경계가 있
    으며 땅은 땅으로서, 하늘은 하늘로서 완전히 분리되어져 있습니
    다. 그러나 하늘 없이는 땅이 존재할 수 없고, 땅이 없이는 하늘
    로부터 부여되는 모든 것들을 생성하고 창조할 수 없습니다. 그래
    서 [곤]이 없는 [건]은 힘을 쓸 수도 없을 뿐더러, 힘을 쓴다 할
    지라도 그것은 전혀 아무런 가치를 보여줄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져 버립니다.
    이 [곤위지]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면 밑의 사람은 밤낮 밑의
    사람으로 끝나버리는 것으로 됩니다. 과거에 지배층은 이것을 강
    조하기도 하였습니다. 황제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이미 정하였
    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늘이 처음부터 하늘이었고 땅이 될 수
    없듯이, 황제는 처음부터 황제고, 신하는 처음부터 신하였다는 것
    입니다. 그러면 밑에 있는 신하는 밤낮 신하로만 있어야 되는가?
    신하는 밤낮 신하로서 일만하다가 신하는 죽는 것인가? 신하도
    뭔가 출세할 방법은 없는가? 여기서부터 출세하는 것이 사실 나
    오게 됩니다. 신하가 없는 왕은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신하도 중
    요한 것입니다. [곤위지]의 여섯가지 효는 거슬러 올라가면서 출
    세하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가 40쯤 되어가지고 이제 겨우 중견사원, 다시
    말하면 부장이나 차장정도 올라갔는데 삼 년 후배를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만났읍니다. 그 후배가
    "형님 어디 가십니까?"
    "아! 나 여기 31평짜리 아파트에서 산다."
    "그러십니까? 그러면 우리 집에 한 번 놀러오십시오."
    "몇 동에 사는데?"
    "65평짜리 아파트입니다."
    "억! 너 나이도 얼마 안먹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됐냐?"
    "아이 글쎄, 나중에 얘기할테니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그래서 그 집에 놀러갔습니다.
    "너 요즘 뭐하냐?"
    "나 요즘 사업합니다."
    "무슨 사업인데? 뭐 큰 사업하냐?"
    "나 요즘 쫄닥 망하는 사업합니다."
    "아니 그건 무슨 소리냐?"
    "내가 남의 회사 말단사원으로 처음 들어가자 마자 우리 삼촌
    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자식이 하나도 없어서 유산을 나에게 물
    려주셨습니다. 그 유산이 하도 많아서 내가 다니는 회사의 월급이
    라는 것은 유산에 비하면 돈이 아닙니다. 그래서 회사 그만두고
    여태까지 사업을 여섯 번 벌렸습니다. 나는 돈만 있으면 사업이
    다 잘 되는 줄 알았는데 처음 실패하고, 두번째 쫄닥 망하고, 세
    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망하고, 지금 여섯번째 하고 있습니다. 이
    여섯번째도 내가 정신차려서 잘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
    돈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것을 빨리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빨리 없어져야지 내가 제 정신차려서 일어날 수 있기 때
    문에 나는 지금 사업에도 별로 신경도 안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빨리 망해서 자빠지기 위해서 지금 사업을 하고 있는 것입
    니다."
    "아! 너 참부럽다."
    "아닙니다. 난 차라리 형님이 부럽습니다. 그렇게 형님 힘으로
    나마 31평짜리 아파트 장만한 것, 그것이 부럽습니다. 나는 맨처
    음에 아파트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어가지고 지금
    이렇게 큰 집 쓰고 있지만, 저게 다 망해야지 비로서 내 사업이
    시작될 것이며 나는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이 괘는 이런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만한 자격을 갖추지
    않은 자가 높은 위치에 있으면 마음은 사장이 될 것같지만 사실
    은 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흔히 가장 높은 위정자만 암살하면 천
    하가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것같지만, 암살한 그 사람도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음성에너지의 충분한 기운을 갖
    추지 못하고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히려 별볼일 없는 남의 회
    사에 가서 나 자신의 힘과 아이디어와 땀으로 그 회사를 훌륭한
    위치로 올려놓았다면 벌써 그 사람은 신임을 받아서 최소한도 부
    사장자리 정도는 되었을 것이며, 거기서 사장자리를 넘보지 말고
    그때 그 회사를 나와서 자기 사업을 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다녔
    던 회사보다 더 큰 회사를 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음성에너지의 위대한 저력입니다. 이러한 음성에너지의 위대한 저
    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그냥 보기에 "저 사람이 사장이고 나
    는 사원인데 사장만 죽이면 내가 사장이 될 수 있겠지."하는 생각
    이 들 수도 있으나, 그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이야기 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의 부덕이라고 하는 것은 유순하고
    참는 가운데 음성에너지의 덕이 통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
    여자가 "이 놈의 자식!" 하면서 뒤에 숨어있는 양성에너지가 튀어
    나와버리면 양성에너지와 양성에너지가 맞부닥쳐 상호 박살이 나
    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보고 좋아할 남자는 천명 가운데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그렇게 살면 안된다라는 점을
    주역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음성에너지 없는 양성에너지는 있으나마나 입니다. 물론 음과
    양이 적절히 조화가 되어야 하는데, 이 우주의 근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음성에너지가 더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수 없이 많은 물체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고, 잘생긴 사람도 있고 뒤죽박죽 생긴 사람도 있고, 이렇
    게 여러가지가 있지만 음성에너지 세계에서는 하나입니다. 이 음
    성에너지의 속안에서 수 많은 양성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
    다. 물론 음양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냐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역량을 크게 키워나가는 데는 음성에너지가
    먼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괜히 잘난척하면서 그냥 튀
    어나가서 "거봐라, 네가 촐랑거릴 때 알아 봤다." 하며 비난을 받는
    것보다는 충분히 음성에너지를 잘 구축해 나가면서 그것을 통해 자
    기 자신의 양성에너지로 창조가 이루어지게끔 해야 할 것입니다.

    "[곤]은 대지, 대지는 가장 위대한 생명력의 근원이다. 대지의
    이 무한한 근원적인 힘을 받아 만물은 나고 또 자란다. 그리하여
    창조를 받아 성취한다." 주역은 역순하므로 밑에 있는 괘는 위로
    상승을 하고 위에 있는 괘는 밑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나 이 괘는
    끝내가서는 도로 제자리로 가게 됩니다. 때문에 아무리 변해봐야
    잃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음성에너지는 결국은 우주 그 자체와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올라가고 내려오는 과정에
    있어서 결국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위대한 힘이 바로 음
    성에너지라는 사실도 알아야만 합니다.
    "준마는 땅과 같은 것. 유순하게 자신의 도리를 지키면서 무한
    한 힘을 간직하고 있다. 유순하면서도 그리고도 모든 것이 마땅한
    바를 얻고 굳게 절조를 지킨다." 음덕에 있어 이 절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한 남자를 섬기며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이 남
    자 저 남자로 자리를 옮겨 다닌 여자는 젊었을 때는 여러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같지만, 나이를 먹게되
    면 아무도 돌보아 주는 남자가 없게 되고 자식들도 돌아보지 않
    아 의지할 데가 없어지게 되고 굉장한 공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젊었을 때 고생스럽고 남편이 속을 썩인다 하더라도
    굳게 가정을 지키며 한 남자를 섬기면 그래도 조강지처의 품으로
    남편은 돌아오게 되며, 자식들에게도 어머니로서의 지위가 확고해
    져서 효도를 받으며 그 집안의 중심으로서 확실히 자신의 영역을
    굳게 구축할 수 있게 됩니다.
    신하도 역시 마찬가지로 한 임금을 섬기면 섬김 그 자체에 자
    신이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치 않고 정권이 곧 바뀔 것같으니까
    이쪽 정치세력에 달라붙고, 다시 저쪽 정치세력에 달라붙는 등 기
    회주의로 행동하면 양쪽의 눈에 다 어긋나기 때문에 결국은 여기
    도 저기도 끼지 못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의 생에 대한 절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
    냐하면 삶은 나 자신의 음성에너지일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성에너지의 절조를 지키고 그 안에서 나의 뜻한 바를
    음성에너지를 통해서 완성시킬 수 있어야 됩니다. 그때 비로소 음
    성에너지가 하늘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인간이 먼저 인간으로 갖추어져 있는 한계내에서 음성에너지
    로 일단 자기자신의 충분한 덕을 키워나가야지, 그렇치 않고 인간
    으로 태어난 한계점에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방식과 욕심
    대로 요렇게 조렇게 간사를 떨다가는 결국 하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파랑 꽃, 빨간 꽃, 초록색 꽃, 밤색 꽃 등 여러가
    지 꽃들이 있으며, 이들은 전부다 태양과 물이 필요합니다. 그렇
    다고 해서 하늘에 있는 태양이 "나는 빨간 꽃을 위해서 이땅에
    열을 내품어야 되겠다." 또는 "나는 밤송이를 위해서 내려와야 하
    겠다."고 지상에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내려왔을 뿐입니다.
    그 상태에서 지구상에 있는 밤색 꽃도, 노란 꽃도, 빨간 꽃도, 파
    란 꽃도 이렇게 전부다 열매와 꽃을 피워갔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들이 없었다면 하늘로부터 내려온 태양의 열기가 무슨 소용
    이 있는지, 어디에 소용이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분명히 자각
    해야만, 우리는 하늘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준마는 유순하면서 사람과 잘 상부상조하므로 결국 준마가 된
    것입니다. 말이 가다가 주인의 말을 안듣고 이리저리 막 뛰어다니
    면, 사람이 말에서 떨어질 것이며, 사람들은 그 말을 좋은 말이라
    고 가만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순박하게 질서가 움직이는
    데로 받아들이면서 가는 말이 준마가 되는 것입니다. 또 준마는
    주인을 알아보고 한 사람의 주인만을 따릅니다. 이 사람에게 갔다
    가 저 사람에게 갔다가 하지 않고 한 주인만을 섬김으로써 굳게
    절조를 지킵니다. 이것이 곧 곤의 이치를 따르는 사람의 도리이
    며, 절조가 없으면 곤의 이치는 얻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선두로 달리면 길을 잃기 일쑤이지만 뒤를 따르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땅은 땅으로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파악
    하게 되면 그때 비로서 하늘과 똑같은 대등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꽃이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음덕을 키우고 그로 인하
    여 훌륭하게 하나의 열매가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하늘에서 내
    려오는 햇빛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지키지 않고 햇빛이 좋아 햇빛한테 가겠다고 땅에서 뚝 떨
    어져 나가면 그건 결국 바싹 말라죽게 됩니다. 때문에 자기의 절
    조를 지키면서 자기 음덕을 키워 땅으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알면
    그때 땅은 하늘과 똑같은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습
    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목적지입니다.

    "여성다운 정숙함을 잃치 않으면 대지가 한계가 없는 것처럼
    길이 행복할 것이다." 남편이 하늘이라면 아내는 천지와 버금가는
    위대한 그릇입니다. 여자는 여자의 도리를 지킴으로써 출세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처럼 강경하고 과격하게 나가면 그 여자는
    겉잡을 수 없는 여자가 되어 버립니다. 음덕은 스스로 지키는 것
    이지 누구와 경쟁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을 할 때는 먼
    저 자신안에서 이겨야 됩니다. 성공은 음덕이 시키는 것이지 양덕
    이 성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음덕 없는 양덕은 아무 소용이 없
    습니다.

    점을 쳐서 [곤위지(坤爲地)]가 나왔을 때, 그 사람이 충분히
    자기실력이 갖추어진 사람이라면 [곤위지]가 가르치는 가르침대
    로 하면 복이 이제 서서히 굴러들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실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곤위지]가 나오면 [곤
    위지]를 통해서 많은 인내를 함으로써 내면에 숨겨진 자기 실력
    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곤위지]는 주역 가운데 가장 좋은 괘 두가지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이 [곤위지]나 앞에 이야기했던 [건위천]은 실
    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값어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
    다. 곤위지는 전부다 음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음효
    의 뒤에는 반드시 양효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음괘가
    나왔을 때, 음괘가 가르치는 가르침대로 하지 않고 여기서 양괘로
    나오게 되면 그 양괘는 스스로를 깨뜨려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음괘의 뒤에 숨어있는 양성에너지가 튀어나오는 양괘와
    본래 겉으로 드러난 남성에너지인 양괘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권투선수가 권투 할때 보면 잽이라는 것을 던집니다. 왼손잡이
    같으면 오른손으로 잽을 합니다. 쉽고 간단하게 툭툭 치는 것입니
    다. 남자가 쓰는 양괘는 마치 권투의 잽과 같은 것입니다. 잽은
    큰 힘을 쓰는게 아닙니다. 큰 힘은 안에 내장되어져 있습니다. 이
    것이 음괘의 뒤에 숨겨져 있는 양괘입니다. 음괘가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양괘를 쓰는 것은 자신의 비장의 무기가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뒤가 약해집니다. 다시 말하면 여자가 스스로
    인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기 불화를 이겨나가지 아니하고 튀
    어나와 버린다면 여자한테서 튀어나오는 양괘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잽의 양괘를 능가해버리기 때문에 남자가 도망가 버리게 됩
    니다. 그래서 여자가 함부로 양괘를 내보이게 되면 남자가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좇아내는 결과가 됩니다. 남
    자가 좀 잘못했다고 해서 여자가 너죽고 나죽자 이런 식으로 나
    오면 남자는 다 도망갑니다. 그때 여자는 인내를 해야합니다.

    음괘의 덕을 음덕이라고 합니다. 음덕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객
    관적인 것입니다. 이 음덕은 대단히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음
    덕을 통해서 모든 양성에너지는 비로서 생명을 갖추어서 창조의
    위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되먹지 못한 자존심이라
    는걸 가지고 있습니다. 남이 뭐라 한다고 자기 자존심에 자기가
    툭툭 튀어나가 버리면 거두어 들일 수 있는 것도 못 거두어 들이
    게 됩니다. 밤 따러 가서 밤송이에 손을 찔렸다고 "에이 썅" 하면
    서 밤송이를 주먹으로 한 대 쳐버리면 밤도 못 딸 뿐더러 손마저
    망가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 방 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자기를 달래면서 그것을 잘 가라앉히면 밤송이를 내
    것으로 만들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밤송이는
    나한테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음덕입니다. 보기
    싫은 점이 있다 하더라도 보기 싫어 하는 나를 스스로 자제하고,
    그 다음에 자꾸 객관적인 눈으로 볼려고 하는 마음, 그것을 세칭
    '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음성에너지는 곧 덕을 상징하는 괘다
    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음성에너지가 덕을 잃어버리면 굉장히 강해지게 됩니다. 그 강
    해지는 것은 잽이 아니고 숨겨 놨던 펀치가 나오는 힘이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여자가 앙탈을 부릴때는 비장의 무기가 나오는 것
    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읍니다. 그때 남자가 자기의 비장의 무기
    를 내보이면 서로 충돌하여 모두 파괴되기 때문에 "내가 참고 말
    지 뭐." 하면서 대부분 피해버립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 여자는 손
    해보게 됩니다. 이제 그 남자는 좋은데 갈 때 절대로 그 여자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며, 다른 여자를 데리고 갈 것이기 때문입
    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음덕은 "여자는 일부종사" 라고 가르쳤습
    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니꼬운 점을 모두 숙이면서 한 남자를
    섬기면 결국 남자는 그 여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기 때
    문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여성의 힘입니다.

    음덕은 자기 자신한테는 굉장히 냉정하지만 상대방에게는 상당
    히 관대합니다. 사랑이 넓게 퍼져나갈 수 있는 그런 음덕을 갖추
    었을때 퍼져나간 그 음덕만큼 이 세상이 곧 그 사람의 것입니다.
    음덕은 곧 전체를 포용하는 길이며 이 우주와 하나가 되는 길입
    니다. "에이 씨!" 하고 일어나는 자기 마음에는 스스로 냉정하되
    상대방에게는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마음, 관대한 마음, 그것이 곧
    우주를 나에게 끌어당기는 마음입니다. "에이 씨!" 하고 음덕이
    바깥으로 튀어나가 버리면 만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그 사람
    은 곧 증발해서 없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곤위지]는 모두가 음효로 이루어져 있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는 충만된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양성기운으로 하
    여금 창조의 위력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 음성기운입니다. 그래서
    음성기운은 생명력에 비유됩니다. 생명력은 무엇으로든 변화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힘입니다. 씨앗이 잎이 되고, 잎이 꽃이 되고,
    꽃이 다시 열매가 될 수 있는 근원의 힘, 그것이 생명력입니다.
    흔히 성공하는 것은 모두 음성에너지로 하는 것입니다. 사전 치
    밀한 계획과 준비를 갖추는 것. 그것은 음성기운의 힘입니다. 이
    것이 없이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산에 밤을 따러 갔다가 밤송이에 손을 좀 찔렸다고 홧김에 주
    먹으로 밤송이를 한 대 쳐봐야 손만 다칠 뿐, 밤은 딸 수가 없습
    니다. 자존심에 불끈해서 어금니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는
    것, 그것은 양성에너지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 힘은 오래갈 수 없
    습니다. 밤송이를 한 방 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그것을
    잘 가라앉히는 마음. 그렇게 자신을 잘 달래면서 밤송이를 응시하
    면 밤을 딸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음성에
    너지의 위대한 덕, 음덕(陰德)입니다.
    이를 악물고 하는 것. 이것은 음덕이 아닙니다. 음덕은 순하고
    후하게,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를 하더라도 손에 힘을 불끈 쥔다거나, 목에 힘을 주고
    핏대를 머리에 올리며 경기하는 선수는 절대 정상에 오르지 못합
    니다. 정상에 오르는 선수는 항상 냉철하게 경기에 최선을 다하
    며, 한 번 이겼다고 크게 기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준결승전에
    올라가서 막 신나하며 기뻐하는 선수들은 대개 거기서 끝나게 됩
    니다. 성숙될 때까지 항상 인내하면서, 중간에 조금 잘 되는 일이
    있더라도 기쁨에 빠지지 않는 것. 그것이 음덕입니다.

    음덕은 자기 자신에게는 굉장히 냉정하지만 상대방에게는 상당
    히 관대합니다. 음덕은 곧 전체를 포용하는 길이며, 우주와 하나
    가 되는 길입니다. "에이 씨!" 하고 일어나는 자기 마음에는 스스
    로 냉정하되, 상대방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관대한 마음, 그것
    이 곧 우주를 나한테 끌어당기는 마음입니다. 만인을 포용했을 때
    그 사람들은 전부다 자기 가슴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성기운만으로는 결과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음성기운은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활발히 활동하는 양
    성기운을 통해서 만들어 집니다. [건위천]에서 음성기운이 구축되
    지 못한 양성기운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처럼, 양성기
    운 없는 음성기운도 결과를 나타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건]과
    [곤]은 공존하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땅이
    될 수 없고, 남자가 여자가 될 수 없듯이 서로는 경계가 분명하게
    각자의 도리로 엄연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음성기운이 좋은 결과를 이루어 낼려면 좋은 양성기운을 만나
    그 양성기운의 활동이 바르고 왕성하도록 자신의 충만된 힘을 적
    극적으로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곤위지]는 자신이 주(主)가 되
    어서 이끄는 것보다는 훌륭한 사람을 잘 보필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큰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뒤에서 잘 받쳐주는 역할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건위천]이 하늘이면 [곤위지]는 땅을, 남편
    이면 아내를, 임금이면 신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어 섬김의
    도를 잘 지켜야 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곤위지]는 황제와 같은 지위는 누릴 수 없는가? 그렇
    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섬김의 도를 통해서 자연의 이치에
    가까와질 수 있습니다. 음성기운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입니다. 하늘의 뜻을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고
    기르며, 그 음덕의 크기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음덕을 갖추
    면 우주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세계는 피조 세계입니다. 피조 세계는 하늘을 섬김으
    로서 하늘에 가까와질 수 있습니다. 피조 세계가 스스로 하늘인
    양, 하늘처럼 행동해서는 하늘의 뜻에 위배될 뿐더러, 하늘에서
    일으키는 창조를 결실로 맺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인간 또한 피
    조 세계 안에서 창조하는 창조의 주체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상. 대지의 생명력 이것이 곧 곤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덕을 후하게 하여 만민을 포용
    한다.

    大曰, 地勢坤. 君子以厚德載物.

    주역은 음덕에 대한 대상(大象)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
    다. "대지의 생명력," "음덕의 생명력." 음덕이 없으면 생성이 되
    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양성에너지로만 나가면 상대방을 이길 수
    가 없는겁니다. 소인배는 곤괘가 크게 발전한다고 하니까 좋은 것
    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왜 좋은 지를 모릅니다. 군자
    가 아니면 음덕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원래 주역은 군자 이하는
    취급을 안 합니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스스로 그 덕을 후하게 하여 만민을
    포용한다." 만민은 덕이 포용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선
    별하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숙이고 숙이면 그 다음에는 만물이
    다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런 음덕, 스스로 그 덕을 후하게 하여
    만민을 포용했을 때 그 사람들은 전부다 자기 가슴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양덕보다 더 중요한 건 사실 음덕입니다. "이를 악물고 하는
    것." 이것은 음덕이 아닙니다. 음덕은 순하게, 후하게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냉정하면서 상대방에게 관대하게 베풀어지는 것입니
    다.
    대지는 하늘을 받들고, 하늘에서 일으키는 비, 바람, ㅎ빛 등 갖
    은 조화(造化)를 다 포용함으로써 만물을 기르고 번영시켜 풍요
    한 결실을 맺게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신하가 임
    금을 섬기는 정성과 마음으로 매사를 하는 것, 그것이 곧 인간이
    자연의 지위에 오르는 길이며, 완성에 이르는 길입니다.
    땅의 목적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은 땅으로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게 되면 비로서 하늘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땅이 없는 하늘은 하늘이 아닙니다.
    씨앗이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며 음덕을 키워서 그로 인해 훌륭
    하게 하나의 열매가 되었을 때, 그때 비로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음덕을 키워나
    가지 않고 햇빛을 알겠다고 씨앗이 땅에서 나서면 스스로 말라
    죽게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뒤를 따르며 절조를 지키면서 음덕을
    갖추어 나가면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서 하늘과 같은 지위를 나란히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첫번째 음효. 서리가 내린다. 머지않아 얼음의
    계절이 오리라. 서리는 음의 기운이 엉키어 굳
    어진 것. 먼저 오는 조짐을 보고 곧 미래를 내
    다보는 마음을 가져라.

    初六, 履霜堅氷至. 象曰. 履霜堅氷, 陰始凝也.
    馴致其道至堅氷也.

    "서리가 내린다. 머지않아 얼음의 계절이 오리라." 서리는 음의
    기운이 엉커어 굳어지는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음덕은 처음부
    터 한꺼번에 쌓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근히 눈에 보이지 않게,
    그러나 점점 커다랗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서리는 나중에 얼음이
    될 수 있는 것을 징조하고 있습니다. 그 조짐을 보고 얼음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인내해야 합니다.
    얼음이 될 때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거나, 조금 되
    는 것같다고 기뻐서 날뛰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쁨이라는 것
    도 일어나는 순간 다시 차분히 가라앉혀 자제하는 마음. 그렇게
    숙연한 자세로 주위를 기울이며 인내해 나가야만 음덕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분노의 마음을 단순히 참는다고 해서 음덕이 갖춰지는 것은 아
    닙니다. 그것은 덕이 아닙니다. 덕은 뿜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음
    덕은 멀리 멀리 나가는 것입니다. 음덕이 나가지 않고, 혼자 자제
    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면서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 그것은 양성기운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한테 양성기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을 인
    (忍)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속에서 칼을 갈고 있는 것입니
    다.
    참을 인(忍)이란 칼로 자기 마음을 내리치는 것입니다. 화낼려
    는 마음이 일어나려는 순간 단호히 자기 자신을 그 마음으로부터
    격리시켜 그 마음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삭아들도록 조용히 관조
    (觀照)하는 것. 그것이 인내입니다.

    두번째 음효. 대지는 평평하여 끝없이 광대하
    다. 대지처럼 평직하고 방정하고 광대한 덕을
    갖춘자는 배우지 않아도 만사가 순조롭지 않음
    이 없다. 땅의 도리는 위대하다.

    六二, 直方大, 不習无不利. 象曰, 六二之勤,
    直二方也. 不習无不利, 地道光也.

    "대지는 평평하여 끝없이 광대하다." 덕은 품어져 나가는 것입
    니다. 음덕의 힘은 그 덕이 사방으로 넓게 미치며, 그 덕으로 만
    사를 순조로이 해결하게 됩니다. 결과를 일으키는 것은 양성기운
    이지만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음성기운입니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재벌이 된 사람들은 못 배우고도 재벌이 됐습니다. 왜 일류 대학
    을 나왔는데도 성공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음성기운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음덕을 갖춘 자는 배우지 않아도 만사가 순조롭지 않음이 없
    다."배운다 라는 것은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음성기운이
    갖추어져 있으면 하나를 배워도 쓸 수 있으나, 그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일본어, 영어, 서반아어, 독일어 등 아무리 많은 외국
    어를 알고 있더라도 써먹지를 못합니다. 자격증을 백 개 가지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그 자격증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 지를
    미처 계획하지 않고 무턱대고 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신의 자격증을 써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지식이란 음성
    기운이 갖추어진 다음에 그것을 펼쳐내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따
    라서 배움이전에 먼저 음성기운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번째 음효. 뛰어난 재능을 안으로 간직하고
    자신의 도리를 지키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비록 실력을 인정받아 영예로운 지위에 오를 지
    라도 화려한 성공을 바라지 말라. 오직 최후의
    대성을 위하여 스스로 희생하라.

    六三,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 象曰,
    含章可貞, 以時發也. 或從王事, 知光大也.

    "뛰어난 재능도 안으로 간직하고 자신의 도리를 지키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사람이 어느 정도 되다보면 "어! 이제 되는구
    나." 하고 만면에 미소가 떠오르면서 기쁨에 빠지기 시작하면 양
    성에너지가 나오게 됩니다. 음성에너지가 이제 막 굳어지려고 하
    는데 양성에너지가 나와서 풀어져 버리면 노력이 헛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좋았는데 여기서부터는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조금 잘 된다고 잘난척 하며서 방정떨면 안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지키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려라." 조금 잘 된다고 교만해
    지지 말고 겸양의 마음으로 결과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야 합니
    다. 결과가 이루어진 다음에 기뻐할망정, 벌써부터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능력을 인정받아 명예스러운 지위에 놓여질 지라도
    화려한 성공을 바라서는 안됩니다. 화려한 성공은 이루어지는 것
    이지 바라서 획득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눈에 띄어 발탁되어 영예스러운 지위에 놓여질 지라도
    화려한 성공을 바라지 말라." 바라지 말고 오직 최후의 대성, 음성
    에너지의 결실을 위하여 겸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년후
    에는 반드시 성공해야지." 하는 그러한 화려한 성공을 꿈꾸지 말
    고, 다소 힘들 때 얕은 한숨을 쉬면서 또 다소 기쁠 때 미소를 지
    으면서 자신을 희생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세번째 효가 주는 교
    훈입니다.
    음성에너지는 남의 칭찬같은 것에 치우치는 법이 없습니다. 서
    리가 껴서 얼음이 되는 날까지 꾸준히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조금 추켜 준다고 신이 나서 마구 나아가면 얼음이 될 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뛰어난 재능도 안으로 간직하고, 잘 된다
    고 기뻐하지 말고 자신의 도리를 지키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라
    고 했습니다. 얼음이 된 다음 비로소 빙긋이 미소지으며 얕은 한
    숨을 쉴 망정, 그전에 음성에너지는 "하하하"하고 크게 웃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웃음은 양성에너지입니다.
    "오직 최후의 대성을 위하여 스스로 희생하라." 바로 그렇게 음
    성에너지의 완성이 이루어 지는 날까지, 비록 음성에너지의 완성
    이 이루어지는 순간 자기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한이 있
    더라도, 겸양의 마음으로 희생하는 것, 그래서 음성에너지가 하나
    의 결정체로 되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위대한 자연의 권능입
    니다.

    네번째 음효. 주머니의 주둥이를 꽉 졸라매라.
    함부로 재능과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몸을 삼가
    한다면 재해는 없다.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을
    것이다.

    六四, 括□. 无咎无譽. 象曰, 括□, 无咎, 愼不害也

    음덕은 잘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풍요로와지는 것입니다. 효는
    역류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괘가 위로 올라가고, 외괘가 아래
    로 내려와서 부드럽게 나아가는 음성에너지의 힘이 끌어당기기
    시작합니다. 음성에너지는 나아갈 때는 유순하고 부드럽게 나아가
    지만 끌어 올 때는 엄청나게 끌어 당길 수 있습니다. 부드럽게 나
    가는 에너지가 소복히 쌓이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음성에너지
    의 위대한 힘입니다.
    기쁘고 좋을 때 특히 몸을 지키고 근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함부로 재질을 자랑하지 말고, 자기 뽐내고 싶은 마음이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주머니를 졸라매서 다시 안으로 겸양해야 합니다.
    자기가 지켜야할 위치를 저버리고 휘날리고 다니면 분별을 잃게
    되어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몸을 근심하면 허물도 없고
    영예도 없을 것입니다. 허물도 없고 영예도 없다는 것은 무사태평
    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머니의 주둥이를 졸라 매라." 주머니안에서 튀어 나가려고
    하지 말고 주머니를 졸라매라, 즉 함부로 재질을 자랑 말고 겸손
    의 미덕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여자가 잘난척하면서 자기 밑천을
    다 드러내면 매력이 없어집니다. 여성의 덕은 안으로 깊이 간직되
    어 있어야지 밖으로 튀어나와 버리면 더이상 덕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남자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음성에너지를 통해서 좀
    잘됐다 해서 뽐내고 자기 지켜야할 위치를 저버리면 큰 화가 미
    치게 됩니다. 그래서 "함부로 재질을 자랑말고 몸을 근신하면 재
    해는 없다. 허물도 없고 영예도 없을 것이다." 즉 무사 태평하다는
    것입니다.
    무사태평만큼 좋은게 없습니다. 허물도 없고 영예도 없는 이 무
    사 태평까지만 견딜수 있으면 그 가운데 여자는 위대한 어머니의
    덕을 갖추게 됩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아버지는 때리거나
    용서 못하는 경우가 있읍니다. 그러나 자식이 아무리 못된 짓을
    했더라도 받아 줄 수 있는게 어머니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모성애
    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잘못해서 감옥에 가면 감옥까지 좇아가
    서 "야 이놈아 그래서 내가 뭐라 그랬냐?" 하면 자식은 자신이 잘
    못한 것을 알지만 아버지에게 복종할 마음은 안생깁니다. 오히려
    반항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먹을 것과 옷가지를 챙겨가
    서 "얼마나 배고프겠니? 춥지는 않니?" 하고 자식 걱정에 눈물을
    흘리면 그 자식은 절대로 어머니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다섯번째 음효. 황색의 치마로 상징되는 대길한
    효상. 황색은 고귀한 색깔이고 중앙을 표시하는
    색깔이다. 치마는 아래에 두르는 것, 위를 따르
    는 것이다. 황색치마는 아름다운 곤(坤)의 덕성
    을 내포하는 것이다. 아내라면 남편을 돕고, 신
    하라면 임금을 도와서 화순하게 바르게 일하는
    모습니다.

    六五, 黃裳, 元吉. 象曰, 黃裳, 元吉, 文在中也.

    다섯번째는 '천.지.인'에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
    예로운 지위입니다. "황색의 치마로 상징되는 대길한 효상." 황색
    은 고정시킨 것이 아니고 퍼진듯 하면서 끌어 당기는 색입니다.
    검정색은 작게 보이지만 황색은 크게 보입니다. 사람이 황색옷을
    입으면은 풍요로와 보입니다. 그래서 황색은 음성에너지를 상징합
    니다.
    "황색은 흙의 심볼이며 중앙을 표시하는 빛이다. 치마는 아래에
    입는 것 위를 따르는 것이다." 황색은 중앙을 뜻하며 구심점을 나
    타냅니다. 그러면서 음성에너지는 양성에너지를 따르는 것입니다.
    따른다고 하여 무작정 쫓는 것이 아니라, 양성에너지를 너그럽게
    수용하면서 받아 들이며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른다는 것은
    모성애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황색치마는 아름다운 [곤]의 덕성
    을 내포하는 것이다." 곤의 덕이란 음성에너지의 덕을 말하는 것
    입니다. 아내라면 남편을 돕고, 신하라면 임금을 도와서 황색처럼
    화순하게 바르게 일하는 모습, 즉 음덕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음성에너지는 공을 하늘로 돌려야 하는데, 여성에너지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주가되고 싶어 양성에너지로 변해 버리면 큰
    일이 나게 됩니다. 이때일수록 군자는 더욱 더 음덕을 내포하고,
    겸양하는 태도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여섯번째 음효. 두마리의 용이 들에서 싸우니
    그 피는 검고 누르다. 음이 극성하면 반드시 양
    과 겨루어 투쟁한다.

    上六, 龍戰于野. 其血玄黃. 象曰, 龍戰于野, 其道窮也.

    그래서 여섯번째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읍니다. "두마리의
    용이 들에서 싸우니 그 피는 검고 누르다." 여성이 여성에너지를
    간직하지 못하고 교만스러운 마음에 뒤에 있는 양성에너지를 내
    보내게 되면 그 양성에너지는 외부의 모든 양성에너지들과 맞부
    닥치게 됩니다. 두마리 용이라는 것은 숨겨져 있는 양성에너지와
    외부의 양성에너지를 말합니다. "양성에너지와 숨겨 있는 양성에
    너지가 들에서 싸우니 그 피는 검고 누르다. 음이 극성하면 반드
    시 양과 겨루어 투쟁하게된다." 아내가 지나치게 잘난 체하면 남
    편과 싸우게 되고, 신하가 지나치게 세력을 가지면 임금과 투쟁하
    게 되는 법입니다. 이렇게 되면 쌍방은 모두 손상을 가져오게 됩
    니다. 흙의 색은 하늘의 빛이요 황색은 땅의 빛입니다. 검은 빛과
    누른 빛의 피는 곧 천지음양 쌍방에 모두 상해를 가져 옴을 뜻합
    니다. 결국 여자가 자기 잘난 척하면 지금까지 음성에너지로 역어
    놨던 자기 세계가 동시에 깨져 버리며 자신도 조각나버립니다.

    쓰는 뜻. 한결같이 음덕을 지키면 순조롭고 유
    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에너지는 죽는 날까지 음덕을 지켜야 합니다. 여
    성은 음덕을 지킴으로써 평생을 풍요롭게 살다가 미소를 지으며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한결같이 음덕을 지키면 유종의 미로
    끝나게됩니다. 황색의 힘, 그것은 넌지시 부드럽게 퍼져나가면서
    동시에 부드럽게 끌어 모아 오는 힘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역이라고 하는 것이 연산역과 규장역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현재 연산역과 규장역은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다 포함되어져 있는 변역이라는 사
    실도 알고 있읍니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얼
    굴빛이 황색입니다. 우리가 내일 당장 아프리카로 날라간다고 해
    서 아프리카 사람처럼 까맣게 되지는 않습니다. 최소한도 우리의
    몸안에 가지고 있는 염색체가 피부색이 황색인 염색체이기 때문
    에 당장에 아프리카에 가서 애를 낳는다고 피부가 검은 애는 나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계속 살면서 2세, 3세, 4세로
    내려갈 수록 점점 피부가 검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연산역의 장애
    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주어져 있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
    다라는 이야기 입니다. 또 아무리 환경이 그렇다 하더라도 당장
    한국사람이 아프리카에 가서 자식을 낳는다 해서 당장 검은 피부
    가 나오지 않습니다. 한 백년 내지 이 백년 동안은 황색피부의 아
    이가 나올 지 모릅니다. 그것은 규장역이 장애를 주고 있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변화라는 것은 그렇게 한번에 변화
    하는게 아닙니다 아주 적게 조금씩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 변해가
    고 있는 것에 순응해버리면 오히려 빨리 변할 수 있읍니다. 카멜
    레온이 빨리빨리 변하는 이유는 환경에 자신의 빨리빨리 순응하
    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는 항상 천천히 변화시키고 있읍니다.
    규산력과 연산력이 서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울어
    지는 가운데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음덕을 갖추는 것도 오
    늘 당장 갖추어 지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하나하나 갖추
    어지는 것입니다.

    2005. 9. 21. 유성 記..…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5086
  • 1.(周易 講義)건위천(乾爲天)
    『 조화와 균형의 창조성 』

    하늘의 운행은 머무름 없는 변화를 통해 만물의 기운을
    조율하며 항상 순화 발전하는 것입니다. 어긋남은 바르게
    잡고 정지한 것은 소멸시켜 언제나 회전하여 머무르는
    바 없이 흐르도록 함으로써 천지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항상 조화와 균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비록 쉽게 움직이고 쉽게 흩어지는 양성기운이
    지만 그 작용은 영원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이러한 자
    연의 이치를 터득하면 세상을 가장 온전하고 조화롭게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건위천(乾爲天)』

    건(乾)은 크게 발전하는 것을 상징한 괘다. 건은 위대한
    창조력의 근원이다. 근원의 그 힘으로부터 천지만물은
    생성을 비롯한다. 산이 깍여서 들이 되고 산이 상승을
    비롯하는 것이 바로 건의 괘다. 건은 하늘의 법칙을 맡
    아서 다스린다. 구름은 하늘을 날고, 비는 대지를 축이
    게 하니 이 힘을 받고 삼라만상은 제각기 형태를 나타
    낸다. 건의 법칙은 영원히 끝이 없는 후세에 이르기까
    지 항상 밝고 빛난다. 건괘는 잠에서 비약에 이르는 만
    물의 발전 과정을 효에 의하여 상징한다. 육효(六爻)는
    각각 그 순서를 따르면서 초효에서 상효에 도달하는
    상승의 과정은 용을 담고 하늘에 오르는 기상이다. 그
    리고 [건]의 법칙은 변화한다. 변화함으로써 만물은 제
    각기 천성을 바로하여 발휘하게 되어 천지 만물의 위대
    한 조화(調和)를 보전한다. 그러므로 [건]의 법칙의 운
    행은 순조롭고 영원히 한결같은 것이다. 이 도에 의해서
    임금은 만 백성위에 군림하여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려
    갈 수 있다.

    乾, 元亨. 利貞. 象曰, 大哉乾元, 萬物資
    始. 乃統天. 運行雨施. 品物流形. 大明終
    始, 六位時成, 時乘六龍, 以御天. 乾道變
    化, 各正性命, 保合大和, 乃利貞. 首出庶
    物, 萬國咸寧.

    [건] 괘는 6개의 효가 전부다 양 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건]
    은 64괘 가운데서 단 하나 전부다가 양 효로 이루어진 괘이며, 남
    성의 정기(精氣)를 뜻하는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의 변화를
    일으킴의 근본이자 작용에 가장 근본적인 고리를 말하는 괘입니
    다. 이 [건] 괘는 상.하 효가 전부 다 양괘로 이루어져서 결국에는
    삼라만상이라는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읍니다. 왜냐하면 밑에 있는 괘가 위로 상승을 하고, 위
    에 있는 3효가 밑으로 내려와도 결국은 제자리에 있게 됩니다. 물이
    변해서 수증기가 되듯이 수증기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며 물도 역
    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괘입니다. 동시에 이 [건]괘
    는 항상 멸망할 수 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은 항상 물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다른 것으로 변하며, 단단한 바위도 언젠가
    는 서로 부서져 자갈과 모래로 변할 수 있다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
    습니다.

    주역에 보면 그 첫머리에 "[건]은 크게 발전하는 괘"라고 되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만약 점을 쳐서 이 괘가 나왔다면 그 사람은 크게
    발전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주역에 맨마지막 문단에 보면 맨 6번
    째 효, 즉 위에서 맨 첫번째 효를 보면 "차면 기우는 법, 어찌 영속하
    는 것을 기다릴 것인가? 후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또 말해
    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역의 효가 왜 그렇게 말을 하는가라는
    점을 풀어나가기 앞서서 먼저 양효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할 필
    요가 있습니다.

    "[건]은 크게 발전하는 것을 상징하는 괘다." 그렇다면 이 [건]
    의 상태에 있게 되면 크게 발전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양괘가
    덮어 놓고 양괘로 있게 되면 크게 발전할 수 없습니다. 크게 발전
    한다를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이 양효 뒤에 음(陰)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효 뒤에도 음이 숨겨져 있고, 세번째 뒤에도
    음이 숨겨져 있고, 네번째 뒤에도 음이 숨겨져 있고, 다섯번째 뒤
    에도 음이 숨겨져 있고, 여섯번째 뒤에도 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양(陽) 안에 음(陰)의 구심점을 분명히 갖고 움직이는 양괘
    는 크게 발전하지만 구심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 이 양괘를
    만나면 크게 실패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뒤에 숨겨져 있는 음성에너지의 세계를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만 된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남자들
    의 양성에너지는 "항상 친절하며 쉽게 움직인다."라고 되어 있습
    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것이 뒤에 음적인 구심력을
    갖추고 움직여야지, 음적인 구심력이 없이 덮어놓고 자기 마음먹
    은 대로 움직여 버리면 크게 되어지는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어떤 남자들을 보면 매사 모든 일을 즉흥적으로
    쉽게 쉽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남자는
    쉽게 움직여서 마치 모든 것을 잘 하는 사람같지만, 실제로는 어려
    운 일과 큰 일을 잘 이루어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쉽게 이루어지
    는 것은 또한 어느순간 쉽게 사라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건]괘가 크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심력적인 세계를 분명히
    갖고 움직여야만 할 것이며, 맨 위의 여섯번째 "차면 기우나니"라고
    말하는 망하는 세계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뒤에 음성에너지의 세계
    를 분명히 구축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글도 잘 쓸 뿐더러 글 쓰는 도구인 붓도 망
    가트리지 않아야 됩니다. 그런데 양성에너지가 구심력적인 세계를
    갖추지 않으면, 열심히 자기 글씨 잘 쓴다는 것만 믿고 쓰다가 자
    칫 잘못하여 종이를 찢어버린다거나 아니면 붓을 망가트리는 경
    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양성에너지가 덮어 놓고 움직
    여서는 잘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자연은 움직이면서도 그 가운데
    '유지(維持)'라는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활동할 때는 그
    유지라는 세계를 잘 연속시킬 줄 알아야 되는데, 그 세계를 생각하
    지 아니하고 덮어놓고 원심력적으로 움직여버리게 되면 도리어 그
    유지라는 세계를 망가트리는 폐단을 일으키게 됩니다.

    남들이 이게 잘된다니까 이것도 해보고, 또 저게 잘된다니까 저것
    도 해보고, 이렇게 바깥의 흐름으로 그달려 다니는 사람은 남들 말
    처럼 잘되야 되는데 잘되지를 못하고, 오히려 가진 재산을 망가트려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지 않으려
    면 먼저 분명히 음성의 에너지로서 무의식에 "나는 어떠 어떠한 것을
    해야되겠다."라는 범위가 분명히 인지되어 있어야 되며, 그 분명한
    세계의 범위가 자신을 움직임으로써 현실로 나타날 수 있게끔 되어
    야 합니다. 마치 내가 "어떠 어떠한 그림을 그려야 되겠다." 하면 그
    림을 그리기 위한 모든 재료가 있고, 그 재료를 가지고 손을 움직여
    그림을 그림으로써 비로소 자기가 마음 먹은 것이 현실적으로 나타
    나지게끔 해야만 됩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린다고 덮어놓고 그리다
    가 보니까 다 그려놨는데 너무 세게 붓을 놀려 종이를 찢어 먹으면
    그림은 가치가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는 이 [건위천]의 세계를 주의깊게 잘 생각해야 됩니다. 뭐든
    할려면 음성에너지의 세계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음성에너지로서
    "어떻게 해야 되겠다."라는 세계를 갖추어야지만 비로서 그것이 현실
    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역은 여섯번째 효에서 항상 조심하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
    다.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에 뜻을 둔 자는 위와 친하고, 땅에 근본을
    둔 자는 아래와 친하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근본을 둔 자는 상괘에
    올라가면 자기를 과시하지 아니하고 그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고마움
    에 자신을 숙여 그 공덕을 길이 빛나게 하지만, 아래에 친해서 오히려
    이 세상에 뻐기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면 크게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
    다. 그렇게 되면 크게 발전해봐야 아무 쓸 데 없는 것이 될 뿐입니다.
    주역은 굉장히 어려운 학문이지만 세밀하게 파악을 하면, 곧 우주자
    체의 메카니즘을 얻을 수 있는 학문입니다. 주역이 우리 인간한테 주
    는 최대의 가르침은 하늘의 메카니즘을 터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
    서 주역이 말하고 있는 실랄하면서도 명쾌한 말 즉, "하늘의 근본을 둔
    자는 위와 친하고, 땅에 근본을 둔자는 아래와 친한다."라는 사실을 우
    리는 잘 들어둬야 됩니다. 때문에 자기 마음으로 할려고 하지 말고, 분
    명한 음성세계 안에 뜻을 두고, 그 뜻이 평면적으로 드러나기 위한 노
    력을 해야하며, 또 그 노력이 잘 되고 있는가 하는 깊은 반성을 통해서
    음성에너지의 착오가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큰 발전은 이루
    어지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역 64괘의 두번째는 모두가 음성으로 이루어진 괘입니다. 남자는
    쉽게 움직이지만 여자들은 남자가 쉽게 친절을 베푼다고 해서 친절에
    넘어가 버리면 안됩니다. 여성에너지는 어렵게 자기자신을 인내함으
    로써 결국에 가서 쉬운 것을 깨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여자의 생입니다. 쉽게 움직이는 남자는 어려운 것을 선뜻하지 못할
    뿐더러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구심력이 확실치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성에너지는 쉽게 움직이지만 어려운
    것을 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건위천]은 뒤에 의미 심장
    한 음성에너지를 깊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대성(大性)을 한다라는
    보장이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남자는 뜻이 움직여야 됩니다. 덮어놓
    고 감상적으로 쉽게 움직이는 사람은 크게 될 수 있는 끌어당기는 힘
    을 잃어버립니다. 나는 사실 조그만한 일을 하면서도 수없이 머리 속
    에서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약 글을 쓰면서 종이가 찢어먹지 않을까?
    붓을 망가트리지 않을까? 단순히 '쓴다.'라는 하나를 하기 위해 이것
    저것 망가지지 않을까라는 점까지 수 많은 생각을 합니다. 어찌 보면
    복잡한 생각을 자신을 괴롭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사물
    의 온전함을 살리고 대상이 원하는 바를 최적화하기 위한 방법이 되
    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그렇다." 하고 자기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이라면 대상에 현혹되어 신중히 생각함이 없이
    마음먹으면 그냥 해버립니다. 그래서 그 뒤에는 공허감이 오게됩니
    다. 잘해서 뭔가 얻었다해도 뒤에 공허감이 옵니다. 보다 나은 방법과
    보다 좋은 대상이 있음을 뒤 늦게 알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대상을 위한다는 세계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
    다. 대상을 위하려면 자기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
    부를 잘해서 석사학위도 받고 박사학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영특한 사람들이 부족한 것은 "비젼이 없다."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에서 돈많이 번 사람이라고 하면 얼마전에 고인이 된 아무게씨와 또
    아직은 현존하고 있는 저무게씨가 있습니다. 아무게씨와 저무게씨를
    비교해서 사람들은 이미 고인이 된 아무게씨가 더 냉철하고, 더 분명
    하고, 판단이 확실하고, 실수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
    금 현재 현존하고 있는 저무게씨는 생긴 것부터가 꼭 논바닥에서 굴
    러 온 촌놈같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두사람은 전부 한국 당대 제일의
    재벌이 될 수 있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
    다. 그 공통점은 위대한 비젼을 일으키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희생
    할 줄 안다."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원래 하늘에 근본을 둔 자는 땅에 내려가지 않는 법이며, 땅으로 처
    지지 않는 법이며, 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법이며, 땅으로부터 인
    한 모든 것을 스스로 인내할 수 있는 자이며, 하늘로 향한 모든 고통
    을 자기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자입니다. 또 그만한 눈이 갖추어져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줄 모르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은 분명히 음성에너지에 대한 구축을 확실하게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특히 남성에너지는 많은 인
    생을 통해서 실패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 남자는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가라는 내면의 무의식
    도 분명히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소명의식이 없이 그저 하
    루 하루를 먹고 살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고, 단지 남보다 잘되기 위
    해서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한 구심력이 작용하
    지 않기 때문에 크게 될 인물은 못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물질계입니다. 물질계에서의 음성에너지에 대한 구
    축은 바로 기운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살리는 기운이 되
    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주변의 범주가 넓어지면 그 영역권 안에
    든 가족과 가정이라는 또 더 넓게 사회라는 울타리가 보호를 받습니
    다. 이렇게 자기범주를 확장하고 울타리를 지키는 물질계의 기운 축
    적법 중 하나가 '짱'통장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벌어서 틈나는데로
    모우고 허리 띠를 졸라매는 것입니다. 짱통장을 관리하는 사람은 저
    축을 생활화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물질계의 현실 속에서
    음성에너지를 온전하게 구축하는 방법입니다.

    "[건]은 위대한 창조론의 근원이다. 근원의 힘으로서부터 천지만물
    은 생성을 비롯한다." 움직임, 움직이는 능력, 그 양성에너지를 통해서
    천지만물은 생성을 비롯한다. "[건]은 하늘의 법칙을 맡아 다스린다."
    [건]은 땅을 움직이는 능력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곳 하늘을 대신
    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건]은 [건]의 능력이 주어지는 대로 움직이
    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법칙을 맡아 다스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
    늘의 법칙을 무시하고 움직이는 것은 크게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성에너지의 구축, 구심력, 즉 글과 종이가 동시에 안전하게끔
    준비를 갖추지 않고 움직인 [건]의 움직임은 스스로 자멸하는 길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남자들은 마음이 있다 하면 일단 내손에 넣는 것으
    로서 족하려고 합니다. 원래 남성에너지는 그것으로서 먼저 시작을 합
    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남자가 자기에게 잘해준다고 해서 "그가 나를
    끔직히 사랑하나봐"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오히려 남자가 진짜
    마음에 있어하는 여자한테는 친절을 함부로 못 붙입니다. 그냥 "나는 외
    롭다."라는 이야기는 할 망정, "나는 너를 끔직히 사랑한다." 이런 달콤
    한 이야기를 함부로 못합니다. 그래서 친절하게 베푸는 사람은 경계해
    야 합니다. 남자는 쉽게 손에 한 번 넣으면 "에이! 시시해!"하면서 차버
    릴 수 있으므로 여자는 그럴때 진심으로 도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성
    에너지는 어렵게 함으로써 쉬운 것을 얻는다."라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도도하라는 것은 모든 남자에 대해 무작정 튕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러면 남자는 오기가 생겨 정말로 그 여자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여자도
    진정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좋아한다는 걸 분명하게 해야 됩니
    다. 남자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남자가 분명하게 안하고 쉽게 쉽게
    손에 넣어버리면, 이제 그런 남자들한테는 이세상의 자기를 안락하게
    해줄 보금자리 같은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는
    여자를 너무 쉽게 생각해선 안됩니다. 여자를 자기 생명같이 알고 접근
    을 해야지 그 남자는 여자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읍니다. 그렇지 않은
    남자는 여자로부터 복을 얻지 못하고, 여자로 인해서 망했다라고 하는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망하지 않더라도 여성에너지의 고마움을
    전혀 못느끼면서 사는 그런 쓸쓸하고 황폐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건]은 하늘의 법칙을 맡아 다스리기 때문에 하늘의 법칙에 맞지 아니
    하고 움직이는 움직임은 자기 자신을 다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
    니다. "그리하여 구름은 하늘을 날고, 비는 대지를 축이게 한다. 이 힘을
    입어서 삼라만상은 제각기 형태를 나타낸다." 구름이 하늘을 나는 것은
    괜히 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안에 구축하고 있는 뜻을 가지고 나는 것입
    니다. 하늘을 하는 것은 결국은 비를 이 땅에 내려서 대지를 축이게 함입
    니다. 또 대지를 축이게 하는 것은 이땅에 있는 것들을 생성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며, 그 힘을 입어 삼라만상은 제각기 형태를 나타내는 것입니
    다. 비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땅에 있는 씨앗이나 모든 만물을 생성
    하게끔 하기 위한 구심력을 갖고 내려오는 것이지, 그런 구심력이 없이
    그냥 땅이 좋아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건]의 법칙은 영원히 끝이 없는 먼 후세에 이르기까지 항상 밝고 빛
    난다." 때문에 밝고 빛나는 것이 아닌 것, 그냥 덮어놓고 움직이는 양성
    에너지는 이 우주가 흡수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흡수당하지 말고 항
    상 빛나기 위해서는 하늘의 이치를 갖고 움직여야만 됩니다. 그러면 현
    재는 허물이 있을 망정 뒤에 허물은 사라지고 그 사람의 밝고 빛나는 업
    적은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건]의 법칙은 변화한다. 변화함으로써 만물은 제각기 천성을 바로
    하여 발휘하게 되어, 천지만물의 위대한 조화를 보전한다." 즉 글을 쓰
    되 종이를 망가트리지 않게 해야 하고, 붓을 망가트리지 않게 해야 하
    며, 쓰는 글이 종이에 묻어서 창조와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 놓으면
    그것은 더 이상 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변화함으로써 만물은 제각기
    천성을 바르게 발휘하여 이제 그것은 예술로 변해버립니다. 그림을 그
    린다는 예술이 바르게 전달되어져서 천지만물의 위대한 조화를 보존
    한다, 즉 이제는 종이가 된 것이 아니고 그림이라고 하는 위대한 화폭
    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창조는 명확한 뜻을 가지고 변화를 시도하였을 때 이루어 집니다. 훌
    륭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깊이
    있게 구상한 다음, 종이와 붓, 먹을 준비하고 신중히 한획 한획 그려나
    가야 합니다. 만일 무엇을 그릴 것인가 하는 올바른 구상이 없이 무턱
    대고 종이데다 붓을 그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한 장의 낙서에
    불과하게 됩니다. 또 구상을 하였더라도 그릴려는 마음만 앞서서 차근
    차근 신중하게 하지 못하고 붓을 너무 세게 놀려 종이를 찢어버리면 아
    무런 가치가 없게 됩니다. 그림이 가치가 있기 위해서는 그림을 잘 그
    리면서도 종이도 보존하고, 붓도 망가트리지 않아야 됩니다. 그렇게 그
    려 나가면 처음에는 단순히 종이와 먹이었던 것이 이제는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를 통한 제 3의 창조입니다. 건위천
    의 모든 양성기운 뒤에는 음성기운이 숨어 있습니다. 이제 그 음성기운
    이 먼저 드러나도록 한 다음 위대한 [건]의 능력을 발휘해야 하겠습니
    다. 음성기운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명확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뜻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열심히 일했어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만히 집에서 놀고 있
    으려니까 "아! 갑갑해서 안되겠다. 어머니 돈 한 오백만원만 주쇼, 나
    그걸로 사업할테니까." 하고 사업을 한다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실패했다고 말할런지는 모르나, 사실
    은 성공한 것입니다. 무엇을 성공했느냐? "집안에 있으니까 갑갑하다.
    그래서 갑갑하지 않게 나가서 놀다 왔다." 이것은 성공한 것입니다. 다
    만 나가 노는데 오백만원이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원했던
    '갑갑'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진
    정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내면적으로 그 뜻을 확실히 세워야 합니다. 표
    면적으로만 마음 먹은 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신도 모르는 무
    의식의 세계에서 원했던 것이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뜻이 확실하
    다는 것은 무의식으로도 그 뜻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뜻
    을 세우되 그 뜻은 자연의 이치에 합일해야 합니다. 이치에 일치하지 않
    고 단지 자기 욕심으로만 일을 하면 건(乾)의 능력은 올바로 발휘될 수
    없습니다.

    소명의식 없이 인생을 덮어놓고 자기 욕심으로만 살면, 나중에 인생
    이 어디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며 인생이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
    게 됩니다. 건(乾)의 능력을 통해서 조화(造化)를 이루어 낼 수 없는 사
    람은 결국 인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우리는 살았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하더라도
    어쨋든 자연은 우리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살면 거기에는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눈 앞
    에 보이는 행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림을 그릴 때 종이를
    찢어버리는 결과를 일으킬른지도 모릅니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종
    이를 잘 보존하고, 그 위에다가 조화를 부릴 수 있도록 삶을 창조해 나
    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위대한 건위천(乾爲天)이 주는 교훈입니다.

    대상. 하늘의 운행은 건전하여 순간도 쉬는 일
    이 없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않고 노력한다.

    大象, 天行健. 君子以, 自强不息

    제 3의 창조. 이것은 자연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만물은 변화함으로
    써 천지의 위대한 조화(造化)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분명한
    뜻에 의해 창조되지 못하면 그것은 '건(乾)'으로서 할 일을 못한 것이
    며, 그렇게 할 일을 하지 못한 건(乾)은 "크게 발전한다."는 [건위천]
    의 괘상(卦象)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의해서 움직이는
    위대한 양성기운의 힘은 만물에 변화를 나타내어 새로운 창조를 이루
    어 내고 있습니다. 그 창조는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을 언제나 유지
    해 나가는 하늘의 법칙을 맡아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늘의 법칙은
    변화를 통해 만물의 기운을 바르게 흐르도록 함으로써 언제나 천지 자
    연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항상 조화와 균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쉽게 움직이고 쉽게 식어버리는 양성기운이지만
    그 작용이 영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면 세상을 가장 온전하고 조화롭게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치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 욕심으로 움직이면 [건]의 능력은 발
    휘될 수 없고 스스로의 파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욕심을 버
    리고, 하늘의 뜻이 나로 하여금 펼쳐질 수 있도록 자연의 이치와 합일
    하는 뜻을 먼저 세워 명확히 한 다음 뜻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자신의 욕심으로 하는 것은 아
    닌지 다시 한 번 반성해 보는 것입니다. 양성기운은 살피는 조심성이
    없이 쉽게 움직이기 때문에 많은 실수를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서 먼저 음성기운을 구축해서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할 것인가에 대한
    철저한 상황파악과 준비를 갖춘 다음 신중히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움직이면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한 때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한결같이 해 나가는
    것. 이를 뒷바침해 주는 힘이 바로 음성기운입니다. 때문에 [건]의 능
    력이 바르고 끊임없이 쓰여질 수 있도록 군자는 먼저 음성 기운을 갖
    추고 쉬지않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양효. 물속에 잠복한 용, 함부로 날뛰지
    않고 오직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린다.

    初九, 潛龍, 勿用. 象曰, 潛龍勿用, 陽在下也.

    분명하게 음성에너지의 세계가 구축되어져 있는 사람은 함부로 뛰어
    나가지 않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고 했는데, 삐그덕 거리는
    나무다리를 보고도 "이대로 참고 여기 못있겠다." 하고 덮어 놓고 뛰어
    가는 사람은 떨어져서 죽는 법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무의식 "여기
    못있겠다."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만 그 '여기'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물속에 잠복한 용" 용이 훨훨나르지 않고 물속에
    서 때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이미 시작은 했지만 함부로 날뛰지 않고,
    비록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살펴야
    합니다. 자신 스스로 해낸다고 하는 마음을 굳건히 갖되, 주변을 살피
    지 아니하고 섣불리 나아가면 음성 기운이 구축되지 않아 쓸데없는 노
    력만 낭비하며 좌절하게 될 것이므로, "오직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린
    다." 즉 능히 해낼 수 있는 양의 힘이 충만한 용이지만 지금은 아직 아
    래의 위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실수
    를 범하게 되는 경우는 음성기운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마음
    의 욕심으로 양성기운을 함부로 쓸 때입니다. 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위태로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적을 충분히 알 때까
    지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저 사람의 약점이 무엇인지, 내가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인지, 아닌지, 충분히 살펴야 됩니다.

    두번째 양효. 땅에 나타난 용. 덕의 영향이 널리 퍼진다.
    훌륭한 군주의 신임을 받기에 적당하다.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象曰, 見龍在田, 德施普也

    "땅에 나타난 용" 이제 용이 물속에서 땅으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제는 해야할 일을 아주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큰 득을
    얻기를 바래서는 안됩니다. 무엇을 해야되겠다하고 했는데 단번에 될
    리가 있습니까? 단번에 될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단번에 될리는 없지만
    실수하고 실패하는 한이 있어도 그래도 계속해서 남의 이목에 관여치
    아니하고 자기 할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친놈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남들
    은 창피해서 못하는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뛰어 넘어 접시 닦으며 돈
    을 버는 사람들, 이런 사람은 일단 자기로부터 호응을 받게 됩니다. 그
    래서 두번째 양효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땅에 나타난 용.
    그 덕의 영향이 널리 퍼진다."남들이 용임을 알아 주지 않지만, 어쨋든
    용으로서 나타난 덕으로서의 영향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 비록 아직까
    지 실속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쉴 때 창피한 것도 참으며
    나태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은 그 덕이 널리 퍼져서 결국 상사로부터
    "저 사람만은 꼭 있어야 된다. 저 사람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라는
    이야기는 저절로 나오게 될 만큼 신임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양효. 행운을 타고 지나치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위태로운 것이다. 낮에는 온 종일 쉬임없이 노력하고 저녁에
    는 반성하여 삼가하고 조심하면 위태롭지만 허물은 없을 것
    이다.

    九三, 君子終日乾乾, 夕척若, 勵无咎.
    象曰, 終日乾乾, 反復道也.

    세번째 양효입니다. 사람이 타인에게 신임을 받을 만큼 열심히 일을
    하다보면 몸이 망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몸을 버려가면서까지 하면
    안됩니다. 이때 더 많은 신임을 받아야지 하는 욕심으로 무리를 하게
    되면 자신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그럴때는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쉴
    건 쉬어야 합니다. 이 정도로 열심히 했는데 "더 많은 신임을 받아야지."
    하는 것은 바로 허영입니다. 허영. 간신이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그것
    은 뜻이 아니라 허영입니다. 그럴때는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쉴 건 쉬
    어야 합니다. 쉬는 걸 당당하게 쉬어선 안됩니다. 쉬는 것을 아주 정성
    스럽게 내가 쉬어서는 안되지만 조금 쉬겠습니다 하는 것을 분명히 해
    야 합니다. 쉬되 아주 겸손하게, 마치 죄진 것처럼, 그렇게 쉬지 않고
    "야, 내가 이렇게 해서 이만큼 신임을 받았는데 이 정도 쉬는 것쯤이야."
    하는 식으로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멸시와 손가락질 받게 될 것입니
    다. 그래서 세번째는 "자중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온종일 쉬임없이 노력하고 저녁때는 반성하여 삼가고 조심하면 위태
    한 일이 있을 지라도 허물은 없을 것이다." 낮에는 쉼없이 노력하되 마
    치 자기가 잘난 것처럼 자랑을 아니하고, 저녁에는 "혹시 내가 너무 내
    잘난 맛에 들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점을 반성하고 삼가하여 조심
    하면, 잘못 실수라도 벌어져서 어떤 위태한 일이 있더라도 남들이 생
    각할 때 "저 사람이 여태까지 한 업적으로 봐서 그런 정도의 실수는 큰
    죄가 아니다." 라고 느껴지게 되어 허물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와같이 꾸준히 열심히 했을 때 허물이 없는 것이지, 자기 이득만 위해
    서 행하였다면 이렇게 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나가는 사람은 결국
    세번째 상태를 넘어가지 못하고 여기서 주저앉게 될 것입니다.

    네번째 양효. 비약하는 용이 뛰어 솟았다가 다시 물 속으로
    힘을 축적한다. 이와같이 때와 시를 쫓아 물러가야 할 때 물
    러가 힘을 기르면 나가야 할 때 나가도 허물이 없을 것이다.

    九四, 或躍在淵. 无咎. 象曰, 或躍在淵, 進无咎.

    이제 밑의 괘에서부터 위의 괘로 올라가는 것은 용이 단순히 물에서
    노는 것이 아니라 비약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까지 완성을 하면서
    나 자신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안으로 힘이 구축되어져 있는 사람이 이
    제 외괘를 향해 이 구축한 힘을 위로 상승시키면 어마어마하게 큰 발전
    이 있게 됩니다. 마치 연줄을 당기듯이, 연줄을 조금만 움직이면 연이
    붙게도 할 수 있고, 다른 연을 쳐서 연줄을 끊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힘
    을 구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평면적으로 잘되고 못되는 것이
    아니고 비약하여 차원을 달리하는 그런 상태가 네번째 효에서부터 이
    루어지게 됩니다. 원래 주역은 세번째 효에서 조심하라고 말을 합니다.
    밑의 괘에서 위의 괘로 옮겨갈 때는 차원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하늘의 기운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늘의 기운은 항상 공평하
    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태양 빛이 하늘에서 내려쪼일 때, "나는 식물을
    위해서 내려온다. 나는 인간들을 위해서 내려온다. 나는 해수욕을 하는
    여인을 위해서 내려온다."는 식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냥 전체적으
    로 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듯 땅에 사는 인간도 전체를 위한 의식을 갖
    고 행해야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행하면 큰 비약을 할 수 없습니
    다. 비약은 자기 욕심을 떠나서만이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저 사
    람이 나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언젠가 저 사람은
    나를 배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사람을 위해서
    가 아니고, "저 사람과 내가 함께 공존하는 이 세계를 위해서"라는 마음
    을 가지고 한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면 설사 나중에 그 사람이 배신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 구축한 세계가 조
    금 허물어 나가면 다시 하면 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의 길이 바로 건
    위천의 위대한 능력인 제 삼의 창조를 이루어 내는 길입니다.

    이 네번째부터는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해야합니다. 비약은 인간의
    마음, 인간의 욕심으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위험수위
    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역에서도 "반드시 양의 힘을 행세할 때
    는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서 겸손과 조심성이 있
    어야 된다."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나가고 물러서는 것을 아는 것,
    이는 군자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군자는 뜻으로 사는 사람이며, 음
    성 기운이 구축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중할 줄 알며 물러서서 힘을 기
    를 때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자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계속
    나아가다 '차면 기우나니' 결국 파멸하게 됩니다. 하나의 회사를 세워 기
    반을 구축하는 데는 10년 혹은 20년이 걸리며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망하는 것은 한 달이내에 도산할 수 있을 만큼 쉬운 것입니다. 비약할 때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제부터는 연산역 주변
    을 살펴야 됩니다. 여태껏 잘됐다 그래서 계속 잘된다라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잘 됐으면 이제 한 번 다시 쉬면서 맨처음에 시작했
    던 자세로 다시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살피지 아니하고 다 된 것처럼 했
    다가는 다된 밥에 재뿌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렇치 않으려면 다
    시금 처음의 시작했던 자세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의 가난했던 때
    로 되돌아가 다시금 가난을 버리지 말아라. 나는 부자였다라고 생각하
    지 말아라. 나는 잘 이루어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예전에 가난을 잊지
    말아라. 다시 가난으로 되돌아가라. 마음은 다시 가난을 사랑하도록 하
    라. 그래야만 지금껏 네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 너를 저버리지 않는다."
    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 네번째 비약한 세계입니다.

    다섯번째 양효. 나는 용이 하늘을 달린다. 건의 극치.
    덕이 높은 인물이 제왕의 지위에 오른다.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象曰, 飛龍在天, 大人造也.

    주역에 있어 위대한 효는 천지의 가운데인 둘째와 다섯번째 효이며,
    그 중에서도 제일 위대한 것은 다섯번째입니다. 인간의 차원으로 보았
    을 때 다섯번째가 완성의 결정입니다. "나는 용이 하늘을 달린다." 건
    의 극치로 용이 완전히 하늘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덕이 높은 인물이
    제왕의 지위에 오른다." 덕이 높은 인물이 제왕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지 욕심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지위에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음성에
    너지를 확실히 구축한 사람만이 비약적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
    다. 만약 이 사람이 경제인이라면 이제부터 경제는 이 사람에 의해서
    비약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필요한 걸 내가 만들어서
    바쳤지만, 이제는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만들
    게 되는 것입니다.

    건의 극치. 양성에너지의 극치. 음성에너지의 발전을 쌓은 덕이 높은
    인물은 제왕의 지위에 오르며, 훌륭한 제왕에게는 훌륭한 일꾼들이 몰
    려와 보필하게 됩니다. 덕이 찬 사람은 이제 만물을 손아귀에 쥐고 흔
    들어내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때
    에 제일 조심해야 됩니다. 인간은 높이 될 수록 외로운 법입니다. 그럴
    때 내 뜻에 의해서 살지 마시고 하늘의 뜻에서 이루어진 이 모든 것들
    을 다시 하늘의 영광으로 돌리는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용이
    하늘을 달린다. 건의 극치. 덕이 높은 인물이 제왕의 지위에 오른다."
    이제 용은 움직일 때마다 비를 마음대로 쏟게 할 수 있고, 땅은 그 용이
    나르는데 따라서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움직
    임은 덕으로 해야 합니다. 음성에너지의 발전, 음성에너지의 완성을
    위해서 나아가야지 자신이 잘났다고 스스로를 내세워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훌륭한 제왕의 곁에는 훌륭한 일꾼들이 몰려와 보필하게 됩
    니다. 수많은 사람은 그를 따르게 될 것이며, 세상은 그 사람을 그 방면
    에 있어서는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
    섯번째 가서 음성에너지로 산 사람이냐, 아니면 덮어놓고 양성에너지
    로 움직였던 사람이냐에 따라서 크게 결과가 달라지게 됩니다.

    여섯번째 양효. 절정에 오른 용. 차면 기우는 법, 어찌
    영속하기를 바라겠는가? 후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上九, 亢龍有悔. 象曰, 亢龍有悔, 盈不何久也.

    정상은 외로운 법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허무를 느낍니다. 이때 허무에
    빠져서 뜻을 망각하는 사람은 급속히 파멸하게 됩니다. 나의 욕심을 버
    리고 하늘의 뜻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이루어낸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받은 은혜가 나를 통해서 이렇게 이루어진 것"을 알고 더 계속해서 끊임
    없이 해야 됩니다. 그렇게 끊임 없이 하다가 죽었을 때, 그 사람은 죽고
    없어졌지만, 그 사람이 쌓아 놓은 업적은 바로 죽은 그 사람의 이름을 빛
    나게 해줄 것입니다. "하늘의 운행은 건전하여 순간도 쉬는 일이 없다."
    이 괘의 처음에 얘기했듯이 세상은 쉬는 일이라곤 없습니다. 때문에 우
    리도 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살아서
    도 안됩니다. 끊임없이 만물이 움직이듯이, 나 자신도 끊임없이 움직여
    야 합니다. 그 움직임 속에서 음성에너지의 세계를 확실하게 구축해야
    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발전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유지(維持)'라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만물은 항상
    변하지만, '절대유지(絶對維持)'를 결코 잃어버리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
    다. 만물이 가지고 있는 절대 유지를 개인적으로도 똑같이 누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얻은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인은 바로 그것을 얻은 사람입니다. 살피면서 나
    갈 수 있는 힘. 덮어놓고 앞의 양성 기운으로만 발전을 꾀하는 것이 아니
    라, 음성 기운의 구축을 먼저 확실하게 하고 나아가는 자세. 욕심으로 무
    조건 앞으로 나가는 사람은 수 없이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왜 나는 이루
    어진 것이 없습니까?" 하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음성에너지의 분명한 세계가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해내야 되겠다."라는 절박함이 있지 아니하면, 결코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쓰는 뜻. 뭇 용이 구름속에 그 머리를 숨겨있음을 본다. 하늘
    의 도리를 본 받은 위대한 덕행도 자신을 내세워 과시함이 없
    이 베풀어야 진실로 훌륭한 것이다.

    주역에는 이 [건위천]과 두번째 나오는 [곤위지] 두 괘에 대해서 육효
    의 설명뒤에 "쓰는 뜻"이라고 하여 양성에너지 및 음성에너지를 사용하
    는 마음가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건위천과 곤위지가 양성에너
    지 및 음성에너지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양이 힘은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 힘을 행사할 때는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는 겸손과 조심성이
    있어야 합니다. 양성에너지는 쉽게 움직입니다. 양성에너지는 움직이지
    않으면 못배깁니다. 그러나 양성에너지는 품은 뜻, 즉 자기 안의 음성에
    너지의 세계에 채워지는 밭이 있이 움직여야합니다. 채우는 밭이 움직여
    버리게 되면 도리어 밭이 멸망하게 됩니다. "나는 꼭 합격해야 한다."라
    고 하는 마음을 음성에너지로 구축하고 해야지 욕심으로 해봐야 떨어지
    기 십상입니다. 욕심과 음성에너지 구축을 구분하기가 사실 어려운 것입
    니다. 성인 군자가 아니면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인 군자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나는 군자인지 아닌지 스스로 평가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열심히 했는데 계속해서 되지 않는 사람은 군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틀
    림 없습니다. 되는 사람은 군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 자각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막에서 목이 말라 물을 찾는데 웅덩이에 물이 있다
    고 덮어놓고 먹다가 그 물이 썩은 물이어서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고 병
    에 걸려 죽었다면 그 사람은 소인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갈
    증을 해소하려는 욕심으로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목이 마르
    다 하더라도 목마른 욕심으로 하지 않고, "목마른 것으로 죽으면 안된
    다. 살기 위해서 물을 먹어야 한다." 라는 인식이 뚜렷하고 살펴서 물을
    마실줄 아는 사람은, 물이라고 해서 덮어 놓고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분간하여 먹을 수 없는 물이라면 먹지 아니하고 더 참
    고 참다가 결국 먹을 수 있는 물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의 음성에너지가
    강하게 요구하고 있으면 현상이 그런 식으로 벌어지게끔 되는 이상 야
    릇한 매카니즘을 자연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무의식이 진정으로 원
    하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자연이 그것이 이루어지게끔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바로 이와같은 자연의 힘을 끌어올 수 있
    는 사람입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만물을 살펴가면서 움직
    여야 합니다. 그렇치 아니하고 그냥 좋은데로 움직이면 실수가 벌어지
    게 됩니다. 실수가 벌어지지 않으려면 항상 살필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되며, 그 살필 수 있는 눈이 있기 위해서는 음성에너지의 뜻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 뜻이 분명한 사람은 마음의 조바심이 있는 법입니다. 그 조바
    심은 단순한 불안, 초조 등이 아니고 이뤄내기 위한 최소한의 안간힘이
    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바
    로 그것이 없이 단순한 자기 욕심으로 움직였을 때 입니다. 더더군다나
    이 괘는 남자의 괘이기 때문에 남자가 단순히 욕심으로만 이것 하고 싶
    은대로 이것 하고, 저것 하고 싶은 대로 저것 하면 결과적으로 맨 마지
    막의 "차면 기우나니"에 걸려들어가게 됩니다.

    2005. 9. 14. 유성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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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18
    공장 법의 조항을 반대하는 영국 표백업자들의 항의에서 바로 이 플라톤적 관념을 보게 된다. 그들은 사업을 노동자들의 편의에 맞출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천의 보풀태우기 .세척. 표백. 다림질. 윤내기. 염색 등 각종 작업 중 그 어느 하나도 손상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일정한 순간에 중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전체 노동자에게 동일한 식사시간을 강제하는 것은 때로는 미완성 작업으로 말미암아 귀중한 상품을 손상시킬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 플라톤주의는 다음에 어디에서 발견될 것인가!) [그의 특징적인 부르주아적 본능 때문에 이미 작업장 안의 분업에 더욱 접근하고 있는] 크세노폰(Xenophon)(주석 58: 크세노폰(Xenophon)은 페르시아왕의 식탁으로부터 음식물을 받는 것은 영광일 뿐 아니라, 그 음식은 다른 음식보다 더 맛이 있다고 말한다 " 그리고 이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도시에서는 다른 모든 기술이 특별히 발달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의 음식도 독특한 방식으로 조리되기 때문이다. 소도시에서는 동일한 사람이 침대. 문짝. 쟁기. 책상을 만든다. 또 그는 가끔 집도 지어서 판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고객만 있으면 만족한다. 그처럼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러나 대도시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많은 구매자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서는 단 하나의 수공업으로 충분하다. 심지어 하나의 수공업 전체도 필요 없고 어떤 사람은 남자용 구두만을 만들고 다른 사람은 여자용 구두만을 만든다. 가끔 어떤 사람은 구두를 꿰매는 일만으로 살아가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재단하는 일만으로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천을 재단하는 일만을 하고 다른 사람은 천조각을 꿰매는 일만을 한다. 가장 단순한 한 가지 일만을 하는 사람이 그 일을 가장 잘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요리술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다"(크세노폰, ?시로페디아?, Vlll, 제2장). 크세노폰은 분업의 정도가 시장의 크기에 의존한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오로지 사용가치의 질적 향상(質的 向上)을 강조하고 있다.)도 채택하고 있다. 플라톤의 ?공화국(共和國)?이 분업을 국가의 형성원리로 간주하고 있는 한, 이집트의 신분제도의 아테네인적 이상화(理想化)에 지나지 않았다. 이집트는 플라톤과 동시대인인 다른 저술가들[예: 이소크라테스(Isocrates)(주석 59: "그"(부시리스)"는 모든 사람을 각각 특수한 신분으로 나누어....동일한 사람은 항상 동일한 직업에 종사할 것을 명령했다. 왜냐하면, 자기의 직업을 변경하는 사람은 어떤 직업에도 숙달하지 못하지만, 항상 동일한 직업에만 종사하는 사람은 그것을 가장 완벽하게 수행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기술과 수공업에 관해서는, 이집트 사람들은 거장(巨匠)이 서투른 사람을 능가하는 정도 이상으로 그들의 경쟁자들을 능가했으며, 또한 군주제나 기타 국가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고안해 낸 제도는 너무나 훌륭해, 이 문제를 취급한 유명한 철학자들이 이집트의 국가제도를 다른 어느 나라의 것보다 찬양했다"(이소크라테스, ?부시리스?, 제8장).])에게 산업상의 모범국으로 간주되었으며, 로마제국시대의 그리스인들에게도 그러했다.(주석 60: 시쿨루스(Diodorus Siculus), ?역사문고?, 제1부.)
    진정한 매뉴팩쳐시대[즉, 매뉴팩쳐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지배적인 형태인 시대]에는 매뉴팩쳐 특유의 경향들의 완전한 발전은 여러가지 장애에 부닥친다. 비록 매뉴팩쳐는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노동자들을 숙련노동자와 미숙련노동자로 간단히 구분해 그들을 등급구조(等級構造)에 잡아넣지만, 숙련노동자의 압도적인 우세로 말미암아 미숙련노동자의 수는 여전히 매우 제한되어 있다. 비록 매뉴팩쳐는 여러 가지 부분작업들을 살아 있는 노동도구들{노동자들}의 성숙. 힘. 발전의 다양한 정도에 적응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부녀자와 아동에 대한 착취의 길을 개척하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경향은 관습과 성인 남자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딪쳐 대체로 좌절된다. 비록 수공업의 분할(分割)은 노동자의 육성비를 저하시키며 따라서 그의 가치를 저하시키지만, 비교적 어려운 부분노동은 여전히 긴 수련기간을 필요로 하며, 또 그것이 불필요한 경우에도 노동자들은 그것을 열렬히 고집한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7년간의 수련기간을 규정한 도제법(徒弟法)이 매뉴팩쳐시대의 말기까지 완전한 효력을 유지했으며, 그것이 완전히 폐지된 것은 대공업의 출현 이후였다. 수공업적 숙련은 여전히 매뉴팩쳐의 토대며, 매뉴팩쳐의 메커니즘 전체가 [노동자 자신들로부터 독립된] 그 어떤 객관적 골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자의 불복종행위(不服從行爲:insubordination)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어(Ure)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성이 가지고 있는 결함 때문에, 노동자는 숙련되면 될수록 한층 더 제멋대로 되고 다루 기 어렵게 되며, 그리고 당연히 기계적 체계의 부품으로 잘 맞지 않게 된다....그는 전체 메커니 즘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된다. "(주석 61: 유어, ?공장철학“, p. 20.)

    그러므로 매뉴팩쳐시대 전체를 통해 노동자의 규율부족(規律不足)에 대한 불평이 그치지 않는다. (주석 62: 이것은 프랑스보다는 영국에, 그리고 네덜란드보다는 프랑스에 훨씬 더 잘 들어맞는다.)
    비록 이 불평에 관한 당시의 저술가들의 증언이 없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간단한 두 가지 사실은 수많은 책 이상으로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한 가지 사실은, 16세기부터 대공업시대에 이르기까지 자본은 매뉴팩쳐 노동자들의 이용가능한 노동시간 전체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매뉴팩쳐는 노동자들의 이동(移動)에 따라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그 소재지를 바꿈으로써 수명이 짧았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해서든 질서(秩序)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가 자주 인용했던] ?산업 및 상업에 관한 연구?의 저자는 1770년에 호소했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뒤 유어는, '질서'는 '분업의 스콜라적 도그마'에 입각한 매뉴팩쳐에서는 결여되고 있었으나, 이제 "아크라이트(Arkwright)가 질서를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매뉴팩쳐는 사회의 생산 전체를 완전히 장악할 수도 없었고 사회의 생산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도 없었다. 매뉴팩처는 도시의 수공업과 농촌의 가내공업이라는 광범한 기반 위에 우뚝 선 인위적인 경제조직이었다. 매뉴팩처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자, 매뉴팩쳐 자신의 협소한
    기술적 토대는 매뉴팩쳐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상의 여러 가지 필요{예: 대량생산}와 모순되게 되었다.
    매뉴팩쳐의 가장 완전한 성과 중의 하나는 노동도구 그 자체[특히 이미 사용하고 있던 복잡한 기계적 장치]를 생산하는 작업장이었다. 유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계공장은 수많은 단계의 분업을 보여주었다. 절단기. 착공기. 선반은 각각 숙련등급(熟練等 級)에 따라 편성된 노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

    매뉴팩쳐적 분업의 성과인 이 작업장은 이번에는 기계를 생산했다. 기계는 수공업적 노동자가 사회적 생산의 규제원리로 역할하는 것을 철폐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일정한 부분적 기능에 일생 동안 얽매어 두는 기술적 이유가 사라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의 규제원리가] 자본의 지배에 가한 장애물들도 소멸되어 버린다. {노동이 자본에 형식적으로 포섭되었던 것이 이제 실질적으로 포섭된다}.

    [역자약력]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석사
    런던대학교 경제학 석사. 박사
    한신대학교 부교수
    현재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저서]
    “마르크스. 슘페터. 케인즈?(중앙신서, 1904)
    “경제변동론? (비봉출판사, 1986)
    “정치경제학원론? (한길사, 1988)
    “자본론 연구I" (한길사, 1988)
    “정치경제학 에세이?(새날, 1991)
    “정치경제학 특강“ (새날, 1993)
    “21세기 정치경제학”(새날, 1998)
    “알기 쉬운 정치경제학?(서울대출판부, 2001)

    [역서]
    “국부론? (동아출판사. 1992)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동아출판사, 1993)
    “금융자본? (새날, 1994)



    자 본 론 -정치경제학 비판- 제I권 자본의 생산과정 (상)

    1989년 3월 10일 초 판 발행
    1991년 11월 5일 개역판 발행
    2001년 11월 15일 제2개역판 발행
    2003년 6월 30일 제2개역판 3쇄발행
    역 자 김수행
    발행자 박기봉
    발행처 비봉출판사 / 마포구 합정동 419-13 합정하이빌 102호
    전 화 3142-6551~5 / Fax 3142-6556
    E-mail beebooks@hitel..net / bbongbooks@hanmail..net
    등록번호 2-301 (1980. 5. 23)
    ISBN 89 - 376- 0017 - x 13320
    89 - 376 - 0015 - 3 (전5권)
    정가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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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17
    이 첫째 단계에서 각종 부분노동자들이 작업을 하는데, 그것은 마지막 단계[즉, 건조로에서 유리병을 끄집어내고, 그들을 품종별로 분류하고, 포장하는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두 단계의 중간에 진정한 유리병제조, 즉 유동상태의 유리액의 조작단계가 있다. 유리로(爐)의 아궁이마다 한 집단의 노동자('구멍'이라고 부른다)가 작업을 하는데, 이들은 1명의 병제조공 또는 마무리공과 1명의 취공(吹工: blower), 1명의 모음공, 1명의 쌓음공 또는 닦음공과 1명의 운반공으로 이루어진다. 이 5명의 부분노동자들은 단일노동유기체의 다섯 개의 특수한 기관이며, 이 노동유기체는 하나의 통일체(統一體)로서만, 따라서 오직 다섯 사람의 직접적 협업(協業)에 의해서만 활동할 수 있다. 이 노동유기체는 그 다섯 개의 기관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마비되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의 유리 로(爐)에는 몇 개의 아궁이(영국에서는 4개 내지 6개가 있는데, 그 각각의 아궁이마다 액체상태의 유리가 들어 있는 내화(耐火)도 가니가 묻혀 있고, 각 아궁이마다 5명으로 이루어진 노동자 집단이 일하고 있다. 이때 각 집단의 편성은 분업(分業)에 의거하고 있으나 서로 다른 집단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협업(單純協業)으로서 생산수단의 하나인 유리로를 공동사용에 의해 더 경제적으로 이음하고 있다. 이와같은 유리로 하나와 그에 부속되어 있는 4-6개의 노동자 집단이 하나의 유리 제조장을 구성하는데, 유리 매뉴팩쳐는 몇 개의 이러한 제조장과 준비단계 및 마지막 단계를 위한 설비와 노동자를 포괄하고 있다.
    끝으로, 매뉴팩쳐가 일부는 각종 수공업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매뉴팩쳐의 결합으로 발전해 가기도 한다. 예컨대 영국의 대규모 유리공장들은 내화도가니를 자체에서 제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도가니의 품질 여하에 파라 생산과정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매뉴팩쳐가 생산물을 생산하는 매뉴팩처와 결합되어 있다. 다른 한편, 생산물을 생산하는 매뉴팩쳐는 그 생산물 자체를 다시 원료로 쓰는 다른 매뉴팩쳐 또는 그 생산물을 자기의 생산물과 혼합시키는 다른 매뉴팩쳐와 결합할 수도 있다. 예컨대 납유리 매뉴팩쳐는 유리 가공 매뉴팩쳐 및 황동주조(黃銅鑄造) 매뉴팩쳐와 결합하는 일이 있는데, 황동은 여러 가지 유리제품의 금속장식에 필요하다. 이와 같이 결합된 각종 매뉴팩처는 하나의 전체 매뉴팩쳐의 다소 분리된 부문들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 각각은 자기 고유의 분업을 가진 독립된 생산과정이다. 매뉴팩쳐의 결합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결합은 그 자체의 토
    대 위에서는 완벽한 기술적 통일성을 달성할 수 없다. 이 통일성은 매뉴팩쳐가 기계에 의한 생산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발생한다.
    매뉴팩쳐 시대의 초기에,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원칙(주석 16: 이것은 특히 페티, 벨러즈(John Bellers), 야런튼(Andrew Yarranton), ?영국에 대한 동인도 무역의 이익?의 익명의 저자, 그리고 반더린트로부터 볼 수 있다.)이 의식적으로 공식화되고 표명되었다. 그리고 기계의 사용도, 특히 거대한 힘이 요구되며 대규모로 수행해야 하는 단순한 초보과정을 위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예컨대 초기의 제지 매뉴팩쳐에서는 넝마의 분쇄(粉碎: tearing-up)가 제지용 분쇄기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야금업에서는 광석을 분쇄하는 일이 쇄광기(碎鑛機: stamping-mill]에 의해 수행되었다.(주석 17: 16세기 말 무렵에도 아직 프랑스에서는 광석을 분쇄하며 세광하는 데 절구와 체가 사용되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물레방아의 형태로 모든 기계의 초보적인 형태를 물려주었다.(주석 18: 기계발전의 전체 역사는 제분기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에서는 지금도 공장을 mill[물방앗간]이라고 부른다. 1810년대의 독일의 기술서적들을 보면 muhle(水車)라는 용어가 자연력에 의해 움직이는 모든 기계에 대해서 뿐 아니라 기계적 장치를 사용하는 모든 공장에 대해서까지 사용되고 있다.) 수공업 시대는 나침반. 화약. 인쇄술. 자동식 시계와 같은 위대한 발명을 남겼다. 그러나 대체로 기계는 분업과 대비할 때 부차적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애덤 스미스를 보면 잘 알 수 있다.(주석 19: 이 책의 제4권{잉여가치학설사}에서 자세한 내용을 보게 되겠지만, 애덤 스미스는 분업에 관해 단 하나의 새로운 명제(命題)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매뉴팩쳐 시대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로 특징짓는 것은 그가 분업을 특히 강조한 점 때문이다. 그가 기계에 부여한 종속적 역할은 대공업의 초기에는 로더데일(Lauderdale)의 반박을, 그리고 더 나중의 시기에는 유어(Ure)의 반박을 불러일으켰다. 애덤 스미스는 또한 도구(道具)의 분화[이것에는 매뉴팩쳐의 부분노동자들 자신이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를 기계(機械)의 발명과 혼동하고 있다. 기계의 발명에서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학자, 장인(master) 심지어는 농민들(예: Brindley)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7세기에 간헐적으로 나타난 기계의 사용이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된 것은, 그것이 그 당시의 위대한 수학자들에게 근대적 역학(力學)의 창조를 위한 실질적인 토대와 자극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매뉴팩쳐 시대 특유의 기계는 바로 수많은 부분노동자(部分勞動者)들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는 집단적 노동자(集團的 勞動者) 자신이다. {매뉴팩쳐 이전에는} 노동과정에서 한 상품의 생산자가 차례차례로 수행하는 각종 작업들은 그 생산자에게 여러 가지 능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한 작업에서는 더 많은 힘을, 다른 작업에서는 더 많은 주의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이러한 모든 자질을 같은 정도로 갖추지는 못했다. {이제} 각종 작업이 분리되고 독립되고 고립된 뒤, 노동자들은 자기의 뛰어난 자질에 따라 구분되고 분류되고 편성된다. 만약 노동자들의 타고난 재능이 분업의 토대라고 한다면, 매뉴팩쳐는, 일단 도입된 뒤에는, 일면적이고 특수한 기능에만 적합한 새로운 능력(노동자의 능력)을 발전시킨다. 집단적 노동자는 이제 생산에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같은 정도로 우수하게 구비하게 되며, 그리고 집단적 노동자는 자기의 모든 기관[개별 노동자나 노동자의 집단]을 오직 그 기관의 독특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만 사용함으로써 그 자질을 가장 경제적으로 지출한다.(주석 20: "작업을 [각각 다른 정도의 숙련과 힘이 요구되는] 다수의 서로 다른 과정으로 분할함으로써, 매뉴팩쳐 경영자는 각각의 과정에 필요한 정확한 양의 힘과 숙련을 구입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작업 전체가 한 사람의 노동자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면, 노동자는 가장 섬세한 작업을 하기에 충분한 숙련과 가장 힘든 작업을 하기에 충분한 힘을 모두 가져야 할 것이다"(배비지, 앞의 책, 제19장).) 부분노동자의 일면성(一面性)과 불완전성(不完全性)조차도 그가 집단적 노동자의 한 기관일 때는 장점으로 된다.(주석 21: 예를 들면, 어떤 근육의 비정상적 발달이나 골격의 굴절 등.) 한 가지 일만을 수행하는 습관은 부분노동자를 {결코 실수하는 일이 없는} 기관으로 만들며, 그리고 전체 메커니즘과의 관련은 그로 하여금 기계의 일부와 같은 규칙성을 가지고 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주석 22: "어떻게 젊은이들을 꾸준히 일하도록 할 수 있는가?"라는 한 조사위원회 위원의 질문에 대해, 유리 매뉴팩쳐의 총지배인인 마샬(W. Marshall)은 다음과 같이 매우 정확하게 답변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일을 도저히 게을리 할 수 없다. 그들은 일단 일을 시작하면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기계의 부분품과 똑같다"(?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4차 보고서?,1865년, p.247).)
    집단적 노동자가 수행하는 각종 기능에는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 저급(低級)의 것과 고급(高級)의 것이 있기 때문에, 그 구성원인 개별노동력은 상이한 정도의 훈련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각각 다른 가치(價値)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매뉴팩쳐는 동력의 등급제(等級制: hierarchy)를 발전시키며, 이것에 임금의 등급이 대응하게 된다. 개별 노동자는 한정된 기능에 일생동안 묶이고, 등급이 매겨진 각종 작업이 선천적. 후천적 능력에 따라 노동자들 사이에 할당된다.(주석 23: 유어(Ure)는 대공업에 대한 찬양에서 매뉴팩쳐 특유의 성격을 이전의 경제학자들 [이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보다도, 또는 동시대의 학자들-예컨대 배비지[그는 수학자. 기계학자로는 유어를 능가하지만 대공업을 매뉴팩쳐의 관점에서만 고찰했다]-보다도 더 날카롭게 포 착하고 있다. 유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각의 특수작업에, 적절한 가치(價値)와 비용(費 用)의 노동자를 배치하는 것이 분업(分業)의 본질을 이룬다. " 다른 한편, 그는 이 분업을 '노 동을 상이한 개인적 능력에 적응시키는 것'이라고 묘사하며, 끝으로 전체 매뉴팩쳐 제도를 '분 업 또는 노동등급제'(勞動等級制)로, '숙련도의 차이에 따른 분업' 등으로 특징짓고 있다(유어, ?공장철학?, pp. 19-23의 여러 곳).) 그러나 어떤 생산과정에서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조작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러한 조작들도 이제는 [내용이 더 풍부한 활동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부터] 분리되어 특수한 개인의 배타적인 기능으로 굳어 버린다.
    이리하여 매뉴적쳐는 [그것이 장악하는 모든 업종에서]이른바 미숙련노동자(unskilled labourer)
    라는 하나의 부류[수공업은 그 성질상 이러한 부류를 엄격히 배제한다]를 만들어낸다. 매뉴팩쳐가 인간의 전반적인 노동능력의 희생 위에서 일면화된 전문성을 완벽한 경지로까지 발전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미숙련노동자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든 발전(發展)의 결여(缺如)를 하나의 전문성(專門性)으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등급제의 등급과 나란히 숙련공과 미숙런공이라는 단순한 구분이 나타난다. 미숙련공의 경우 수련비(修練費)가 없어지고, 숙련공의 경우 그들의 기능이 단순하게 된 결과 수련비가 수공업노동자의 경우에 비해 줄어든다. 어느 경우에나 노동력의 가치는 떨어진다.(주석 24: "각 수공인(手工人)은....한 가지 일만을 되풀이함으로써 자기 일을 더 완벽하게 할 수 있게 되므로....더 값싼 노동자로 되었다"(유어, 같은 책, p. 19).) 물론 이 법칙의 예외는 [수공업적 경영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거나 동일한 정도로는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포괄적 기능들이 노동과정의 분할로 말미암아 생기는 경우다. [수련비의 소멸 또는 감소에 기인하는] 노동럭의 상대적(相對的)인 가치저하(價値低下)는 직접적으로 자본의 가치증식의 더 높은 정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재생산에 요구되는] 필요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모든 것은 잉여노동의 영역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제 4 절 매뉴팩쳐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



    우리는 첫째로 매뉴팩쳐의 기원을 고찰했고, 다음에는 그 단순한 요소들[즉, 부분노동자와 그의 도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전체 메커니즘을 고찰했다. 이제는 매뉴팩쳐 안의 분업과 [모든 상품생산의 토대를 형성하는] 사회 안의 분업 사이의 관계를 간단히 고찰하려 한다.
    만약 우리가 노동 그 자체만을 염두에 둔다면, 농업. 공업 등과 같은 주요부문(主要部門)들로의 생산의 분할을 일반적(general) 분업, 그리고 이들 생산부문의 종(種)이나 아종(亞種)으로의 분할을 특수한(particular) 분업, 그리고 하나의 작업장 안의 분업을 개별적(individual) 분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주석 25: “분업에는 매우 다종다양한 직업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해서, 매뉴팩쳐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일한 하나의 생산물의 완성을 많은 노동자가 분담하는 것까지 있다"(슈토르히[Storch], ?정치경제학강의?, 파리판, 제1권, p. 173). "우리는 일정한 정도의 문명에 도달한 국민들 사이에서 세종류의 분업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 분업이라고 부르는 첫째 종류는 생산자가 농업생산자. 공업생산자. 상인으로 분할되는 것인데, 이것은 국민의 노동의 3개 주요부문에 대응한다. 특수한 분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둘째 종류는 각 노동부문이 종(種:species)으로 분할되는 것이다....끝으로 제3의 분업은 작업의 분할 또는 진정한 분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개별 수공 업 또는 직업 안에서 일어나며....대다수의 매뉴팩쳐와 작업장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스카 르베크[Skarbek], ?사회적 부의 이론”, pp. 84-85).)
    사회 안의 분업과 그에 대응해 개인이 특수한 직업에 속박되는 것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출발점으로부터 발전하는데, 후자의 출발점은 또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한 가족(주석 26: {엥겔스: 인류의 원시상태에 관한 그 뒤의 매우 근본적인 연구에 의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본래 가족(家族)이 종족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종족(種族) 이 혈연관계에 입각한 인간집단의 본원적인 자연발생적 형태였으며, 그리하여 종족의 결속이 느슨해지기 시작한 이후에 비로소 여러 가지 가족형태가 발전했다.}) 안에서 그리고 더욱 발전해 한 종족 안에서 성과 연령의 차이로 말미암아[즉, 순전히 생리적인 토대 위에서] 자연발생적인 분업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분업은 공동체의 확대, 인구의 증가 그리고 특히 서로 다른 종족 사이의 충돌과 한 종족에 의한 다른 종족의 예속화(隸屬化)와 더불어 확대해 간다. 다른 한편으로, 앞에서{제2장 '교환과정'} 지적한 바와 같이, 생산물의 교환(交煥)은 서로 다른 가족들이나 종족들이나 공동체들이 상호접촉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왜냐하면, 인류문명의 초기에는 독립된 단위로 상호관계를 맺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나 종족 등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공동체(共同體)들은 그 자연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들의 생산방식. 생활양식. 생산물(生産物)은 서로 다르다. 바로 이 자연발생적 차이 때문에 공동체가 서로 접촉할 때 생산물이 서로 교환(交換)되고, 따라서 이 생산물들이 점차 상품(商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교환이 생산영역들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교환은 기존의 상이한 영역들을 서로 관련맺도록 하며, 그리하여 그 상이한 영역들을 사회 전체의 총생산의 다소 상호의존적인 부문(部門)들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본래부터 상이하며 상호 독립적인] 생산영역들 사이의 교환으로부터 사회적 분업(社會的 分業: social division of labour) {사회안의 분업}이 발생한다 이와 반대로, 생리적 분업(生埋的 分業)이 출발점으로 되는 경우에는, 긴밀하게 결합된 전체의 특수한 기관들이 서로 분리되고 분할된다. 이 분해과정은 다른 공동체와의 상품교환으로부터 큰 자극을 받는다. 그 뒤 이 기관들은 상당한 정도의 독립성을 획득하게 되며, 각종 작업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유대관계는 상품으로서의 생산물의 교환이다. 한 경우에는 이전에 독립적이었던 것이 의존적으로 되며, 다른 경우에는 이전에 의존적이었던 것이 독립적으로 된다.
    [일정한 발전수준에 도달한, 그리고 상품의 교환을 통해 발생한] 모든 분업의 토대는 도시(都市)와 농촌(農村)의 분리이다.(주석 27: 제임스 스튜어트(J. Sreuart)는 이 점을 가장 잘 설명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보다 10년이나 먼저 출판된 그의 저작이 현재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즉 인구에 관한 맬더스의 저작의 초판은, 그 순전히 연설투의 부분을 제외한다면, 목사 월리스(Robert Wallace) 및 타운젠드(Joseph Townsend)로부터 표절했을 뿐 아니라 스튜어트로부터 표절했다는 것을 맬더스의 숭배자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의 경제사(經濟史) 전체는 이 대립(對立)의 운동으로 요약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동시적으로 고용되는 노동자의 일정한 수가 매뉴팩쳐 안의 분업을 위한 물질적 전제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구의 크기와 밀도(密度: density)[이것은 하나의 작업장으로 노동자들이 밀집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사회 안의 분업을 위한 전제조건이다.(주석 28: "사회적 교류를 위해 그리고 노동생산물을 증대시킬 힘의 결합을 위해 필요한 일정한 인구밀도가 있다"(제임스 밀[James Mill], ?정치경제학원리?, 런던, 1821년, p. 50).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사회의 생산력은 그 증가에다 분업의 효과가 곱해진 복비례(複比例)로 증가한다"(호지스킨, ?대중경제학?, pp. 125 -126).) 그러나 이 밀도라는 것은 다소 상대적인 것이다. 인구는 비교적 희박하나 발전한 교통수단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인구는 더 많으나 교통수단이 발전하지 못한 나라에 비해 인구밀도가 더 높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컨대 미국 북부의 주들은 인도에 비해 인구밀도가 더 높다.(주석 29: 1861년 이후 면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 결과 동인도의 인구가 조밀한 몇몇 지방에서는 면화 의 생산이 쌀생산의 희생 위에서 확장되었다. 때문에 국지적(局地的)인 기관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교통수단의 부족[따라서 물질적인 연결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한 지방의 쌀생산 부 족을 다른 지방으로부터의 반입(搬入)에 의해 보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에서는 방추의 제조가 17세기에 벌써 하나의 특수한 산업부문으로 되었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적 전제이므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이 이미 일정한 정도로 발전하고 있을 것을 필요로 한다. 또한 거꾸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적 분업에 반작용해서 그것을 발전시키며 증가시킨다. 노동도구의 분화에 따라 이 도구를 생산하는 산업들도 더욱 더 분화(分化)된다.(주석 30: 그리하여 네덜란드에서는 방추의 제조가 17세기에 벌써 하나의 특수한 산업 부문으로 되었다.) 이때까지는 동일한 생산자가 본업(本業) 또는 부업(副業)이라는 형태로 함께 경영해 오던 업종들은, 매뉴팩쳐적 경영에 의해 장악되면, 즉시 분리되고 독립한다. 매뉴팩쳐적 경영이 어떤 상품의 하나의 특수한 생산단계를 장악하게 되면, 그 상품의 다른 생산단계들은 각각 독립 산업으로 전환된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제품이 다수의 부품이 조립되어 만들어지는 경우에는, 부분작업 그 자체가 다시 독자적인 수공업으로 독립할 수도 있다. 매뉴팩쳐 안의 분업을 더욱 완전하게 달성하기 위해, 하나의 생산부문이 그 원료의 차이에 따라, 또는 동일한 원료가 취하는 형태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수많은 매뉴팩쳐[부분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매뉴팩쳐]로 분할된다. 그리하여 벌써 18세기 전반에 프랑스에서만도 100종 이상의 견직물이 생산되었고, 또 예컨대 아비뇽에서는 "모든 도제(徒弟)들은 각각 한 종류의 제조에만 전념해야 하며 여러 가지 직물의 제조방법을 동시에 배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법적으로 규정했다. 특정의 생산부문을 국내의 특정지역에 고착시키는 지역적 분업(地域的 分業)은 자연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매뉴팩쳐적 경영에 의해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주석 31: "영국의 양모 매뉴팩쳐는 각각 특정 지역에 적합한 몇 개 부분 또는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지역에서는 전적으로 또는 주로 그 부분만이 제조되고 있지 않은가? 예컨대 세포(細布: fine cloth)는 서머셋셔에서, 조포(粗布: coarse cloth)는 요크셔에서, 폭에 넓은 천은 엑서터에서, 견모교직(絹毛交織:serge)는 서드베리에서, 크레이프(crape) 천은 노리지에서, 교직물(交織物)은 켄달에서, 모포는 휘트니에서 생산되는 것 등과 같다"(버클리[Berkeley], "질문자?1750년, 제520절).) [매뉴팩쳐 시대가 존재하게 되는 일반적 조건의 일부를 형성하는] 세계시장의 확대와 식민제도는 사회 안의 분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분업이 사회의 경제영역뿐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을 장악하며, 그리고 분업이 도처에서 한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모든 능력을 희생시키면서 단 한 가지의 능력만을 발전시키도록 하는 점에 대해 여기에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후자의 사실은 이미 애덤 스미스의 스승인 퍼거슨으로 하여금 ”우리는 노예들로만 이루어진 국민이며, 우리 가운데 자유로운 인간은 하나도 없다"(주석 32: 퍼거슨(A. Ferguson), “시민사회사” 에딘버러, 1767년 제4부, 제2편, p. 285.)고 외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 안의 분업과 작업장 안의 분업은, 비록 그들 사이에 수많은 유사점(類似點)과 관련이 있기는 하나, 정도에서뿐 아니라 본질(本質)에서도 서로 다르다. 유사점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하나의 내적 유대에 의해 여러 가지 업종이 결합되어 있는 경우이다. 예컨대 목축업자는 날가죽을 생산하며, 피혁업자는 그것을 가죽으로 전환시키며, 제화업자는 그것을 구두로 전환시킨다. 이 경우 각자의 생산물은 완성품(完成品)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며, 이 마지막의 완성품은 부분노동들의 결합생산물(結合生産物)이다. 그외에도 목축업자. 피혁업자. 제화업자에게 생산수단을 제공하는 각종 산업부문이 있다. 여기에서, 애덤 스미스처럼, 사회적 분업과 매뉴팩쳐 안의 분업 사이의 차이는 오직 주관적이며 관찰자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관찰자는 매뉴팩쳐에서는 한 장소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많은 작업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지만, 사회적 분업에서는 작업이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고 각 노동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 그 상호관계이 애매하기 때문이다.(주석 33: 스미스의 말에 의하면, 진정한 매뉴팩쳐에서는 분업(分業)이 더욱 진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소수인의 작은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소한 제조업에서는 노동자수가 적을 수밖에 없어] 작업의 각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동일한 작업장에서 관찰자가 한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다수 국민의 대규모 수요를 충족시키는 큰 제조업에서는, 작업의 각 부문이 매우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동일한 작업장으로 모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의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보다 많은 숫자를 한번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큰 제조업에서는 사소한 제조업에서보다 사실상 작업이 훨씬 많은 부분으로 분할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분할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고 따라서 훨씬 덜 주목받는다. "(A. 스미스, ?국부론?, 한글판, 상, 13쪽). 같은 장(글)에 있는 유명한 단락(段落),즉 "번영하는 문명국의 가장 일반적인 수공업자 또는 일용노동자의 생활용품을 관찰해 보면"(같은 책, 19쪽)으로 시작해서, 한 사람의 보통노동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러 생산부문이 공헌하고 있는가를 묘사하고 있는 단락은, 거의 단어 하나하나를 맨더빌(Bernard de Mandeville)이 자기의 저서 ?꿀벌들의 우화, 또는 사적 죄악과 공적 이익?에 붙인 주(註)로부 터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주가 없는 초판은 1705년에 출판되었고 주가 있는 판은 1714년에 출 판 되었다).) 그러나 목축업자와 피혁업자와 제화업자의 독립된 노동들 사이의 유대를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각각의 생산물이 상품(商品)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 매뉴팩쳐적 분업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분노동자가 생산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석 34: "우리가 개인의 노동에 대한 자연적 보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벌써 아무 것도 없다. 각 노동자는 오직 전체의 부분만을 생산하며 또 그 각 부분은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유용성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손에 쥐고 이것은 나의 생산물이다, 이것은 내가 가지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자본의 요구에 대한 노동의 방어?, 런던, 1825년 p. 25). 이 탁월한 저서의 저자는 호지스킨이다.) 상품으로 되는 것은 모든 부분노동자들의 공동생산물(共同生産物)뿐이다.(주석 35: 이와 같은 사회 안의 분업과 매뉴팩쳐 안의 분업 사이의 차이는 양키 {미국 남북전쟁 때의 북부사람}에게 실제로 설명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워싱턴에서 새로 고안된 세금의 하나는 '모든 공업생산물'에 부과된 6%의 소비세였다. 질문: 공업생산물이란 무엇인가? 입법자의 답: 어떤 물건이든 '만들어지면' 생산물이 되고, 판매될 준비가 되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많은 실례 중 하나를 들어보자.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매뉴팩쳐는 이전에는 우산을 그 모든 부속품과 함께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우산은 전혀 이질적인 부품들의 합성물이므로, 이 부품들은 점차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독립적으로 경영되는] 각종 업종들의 생산물로 되었다. 이제 이러한 부품 들은 독립 상품으로 우산 매뉴팩쳐에 들어오게 되었고, 우산 매뉴팩쳐는 이 상이한 부품들을 조립할 뿐이다. 양키는 이러한 종류의 제품을 '조립상품(組立商品)'이라고 불렀는데, 이 제품은 그 명칭에 어울리게 세금(稅金)도 조립했다 즉, 우산은 우선 그 부품 각각의 가격에 대한 6%의 세금을 '조립'하고, 다음에는 그 자신의 총가격에 대한 6%의 세금을 또한 '조립'한다.) 사회 안의 분업은 서로 다른 산업부문들의 생산물의 매매에 의해 매개되고 있지만, 매뉴팩쳐 안의 여러 부분노동들 사이의 관련은 여러 노동력이 동일한 자본가에게 판매되어 그에 의해 결합노동력(結合勞動力)으로 사용된다는 것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한 자본가의 수중에 생산수단이 집적(集積)되는 것을 전제하고 있지만, 사회 안의 분업은 서로 독립된 다수의 상품생산자 사이로 생산수단이 분산(分散)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매뉴팩쳐 안에서는 비례관계의 철칙이 일정한 수의 노동자들을 일정한 기능들에 종속시키지만, 매뉴팩쳐 밖의 사회에서는 우연과 자의(恣意)가 작용해 사회적 노동의 각종 부문들 사이에 생산자와 그들의 생산수단이 분배되는 것은 제멋대로다. 물론 여러 가지 생산영역들이 끊임없이 균형(均衡: equilibrium)을 지향하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각각의 상품생산자는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해서 일정한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며(이 욕망들의 크기는 양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이 상이한 크기의 욕망들을 하나의 자연발생적 체계에 분배하는 내적 유대가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의 가치법칙(價値法則)은 사회가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전체 노동시간 중 얼마만큼을 각각의 상품종류의 생산에 지출할 수 있는가를 궁극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생산영역들이 균형으로 향하는 이 끊임없는 경향은 이 균형의 끊임없는 파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작용할 뿐이다. [작업장 안의 분업이 의거하고 있는] 계획되고 규제되는 사전적 체제는 사회 안의 분업에서는 생산자들의 규제받지 않는 변덕을 통제해야 하는] 자연적인 사후적 필연성(이것은 시장가격의 변동에서 알 수 있다)으로 변한다.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자본가에게 속하는 전체 메커니즘의 구성원에 지나지 않는]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의 무조건적 권위를 내포하지만, 사회 안의 분업은 경쟁(競爭)이라는 권위 밖에는 [즉, 상품생산자들 상호간의 이익 대립이 자기들에게 가하는 강제 외에는] 다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독립적 상품생산자들을 서로 대립시킨다. 이것은 마치 동물계에서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대체로 모든 종(種)의 생존조건으로 되어 있는 것과 같다. [작업장 안의 분업, 노동자를 평생 하나의 부분작업에 묶어두는 것,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완전한 종속 등을 노동생산성을 제고시키는 노동조직이라고 찬양하는] 바로 그 부르주아적 의식은, 생산과정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조정하려는 온갖 의식적 시도를 개별 자본가의 소유권. 자유. 자율적 '독창성' 등과 같은 신성한 것에 대한 침해라고 마찬가지로 열렬히 비난하고 있다. 공장제도의 열광적인 변호자들이 사회적 노동의 일반적 조직화를 반대하면서, 그것은 사회 전체를 하나의 공장으로 전환시킬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특징적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분업에서의 무정부상태(無政府狀態)와 매뉴팩쳐적 분업에서의 독재(獨裁)가 서로 다른 것의 조건으로 되고 있으나, 이와는 반대로 [직업의 분화가 자연 발생적으로 발전해 응고되고 최후로 법률에 의해 고정된] 이전의 사회 형태에서는, 한편으로 사회의 노동이 공인(公認)된 권위적인 계획(計劃)에 따라 조직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작업장에서는 분업을 완전히 배제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작은 규모로 간헐적 우연적으로만 발전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주석 36: "일반적 원칙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있다. 즉, 권위가 사회 안의 분업을 지배하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분업은 작업장 안에서 그만큼 더 발전하며, 한 개인의 권위에 그만큼 더 종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업의 관점에서 볼 때, 작업장 안의 권위와 사회 안의 권위는 서로 반비례한다"(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pp. 130-131).)
    예컨대 [부분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는] 인도의 매우 오래된 소공동체는 토지의 공동소유, 농업과 수공업의 직접적 결합, 그리고 고정불변의 분업에 입각하고 있는데, 이 분업은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할 때마다 주어진 계획 및 설계도로 역할한다. 이와 같은 공동체는 자급자족적(自給自足的)인 완결된 생산조직을 이루고 있는데, 그 영역은 100에이커에서 수천 에이커에 달한다. 생산물의 대부분은 공동체 자체의 직접적인 수요를 위한 것이고 상품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생산은 상품교환에 의해 매개되는 인도 사회 전체의 분업과는 무관하다. 오직 생산물의 잉여(剩餘)만이 상품(商品)으로 되며, 그리고 그 잉여의 일부는 [태고적부터 현물지대의 형태로 생산물의 일정한 양을 징수해 온] 국가의 수중에서 비로소 상품(商品)으로 된다. 공동체의 형태는 인도의
    지방에 따라 다르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공동체에서는 토지는 공동으로 경작되며 생산물은 그 구성원들에게 분배된다. 동시에 방적. 직포는 각 가정의 부업(副業)으로 경영되고 있다. 이와 같이 동일하게 노동에 종사하는 주민들 이외에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재판관과 경찰관과 징세관을 한 몸에 겸하고 있는 '공동체의 우두머리‘, 농경에 관한 계산과 이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기록하는 기장인(記帳人: book-keeper), 범죄자를 추궁하며 외부로부터 온 여행자를 보호해 그를 다른 마을로 안내하는 관리, 인접하고 있는 공동체에 대해 공동체의 경계선을 경비하는 경계선 경비원, 농경을 위해 공동저수지로부터 물을 분배하는 저수지 감시인,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는 바라문(Brahman), 모래 위에서 공동체의 아동들에게 쓰기와 읽기를 가르치는 교사, 파종이나 수확의 시기 및 기타 여러 가지 농사일에 좋은 날과 나쁜 날을 알려주는 역술(曆術) 바라문 또는 점성가, 모든 농기구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대장장이와 목수, 촌락에서 쓰는 모든 그릇들을 제조하는 도자기공, 이발사, 의복을 세탁하는 세탁사, 은 세공인, 어떤 공동체에서는 은(鎭) 세공인을 대신하고 또 어떤 공동체에서는 교사를 대신하는 시인(詩人). 이 10여 명의 사람들은 공동체 전체의 비용으로 부양한다. 만약 인구가 증가하면 새로운 공동체가 원래의 것을 본떠 미개간지에 세워진다. 이 공동체의 전체 메커니즘은 체계적인 분업을 보여주고 있으나, 매뉴팩쳐에서와 같은 분업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대장장이나 목수 등은 불변의 시장과 대면하고 있으며, 촌락의 크기에 따라 대장장이나 목수 등은 1명이 아니면 기껏해야 두세 명 있기 때문이다.(주석 37: 월크스(Mark Wilks), ?인도 남부의 역사적 개관?, 런던, 1810-17년, 제1권, pp. l18-120. 인도 공동체의 각종 형태에 대한 훌륭한 묘사는 캠벌(George Campbell)의 ?현대인도?(런던, 1852년)에서 볼 수 있다.) 공동체의 분업을 규제하는 법칙은 자연법칙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권위를 가지고 작용하지만, 대장장이나 목수 등과 같은 각 개별 수공업자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그러나 독립적으로,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작업장 안에서 자기의 모든 작업을 수행한다. [끊임없이 동일한 형태로 자기를 재생산하며 어쩌다가 파괴되더라도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명칭으로 재건되는] 자급자족적인 공동체의 생산유기체(生産有機體)의 단순성은(주석 38: "이러한 단순한 형태로....이 나라 주민들은 태고적부터 생활했다. 마을들의 경계선이 변동되는 일은 드물다. 비록 마을 그 자체는 때로는 전쟁. 기근. 전염병에 의해 훼손되며 심지어 황폐화되는 일까지 있었지만, 동일한 명칭. 동일한 경계선. 동일한 이해관계, 또 심지어 동일한 가족들이 오랫동안 존속했다. 나라의 멸망이나 분할에 대해 주민들은 거의 걱정하지 않는다. 마을이 온전하게 남아 있기만 하면, 그것이 어떤 권력의 수중에 넘어가든 어떤 군주에게 맡겨지든 그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마을의 내부 경제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전 자바의 부총독, 라플즈. [T. Stamford Raffles], ?자바사?, 런던, 1817년, 제1권, p. 285).) [아시아 국가들의 끊임없는 흥망및 왕조의 쉴 새 없는 교체와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아시아 사회의 불변성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 사회의 경제적 기본요소들의 구조는 [정치라는 상공에서 일어나는] 폭풍우에 의해서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길드의 규칙은 1명의 장인(匠人)이 고용할 수 있는 직인(職人: journeyman)과 도제(徒弟)의 수를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장인이 자본가로 전환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저지했다. 더욱이 장인은 자기가 몸소 장인으로 있는 수공업에서만 직인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길드는 [자기들과 대면하고 있는 단 하나의 자유로운 자본형태였던] 상인자본(商人資本)의 온갖 침투를 열렬히 격퇴했다. 상인은 어떤 상품이라도 살 수 있었으나 노동을 상품으로 살수는 없었다. 상인은 수공업 생산물을 매매하는 장사꾼으로서만 용인되었을 뿐이다. 사정에 의해 분업을 더욱 세분화할 필요가 생기면, 기존의 길드가 아종(亞種)들로 분열되거나, 새로운 길드를 원래의 길드 옆에 설치했지만, 여러 가지 수공업을 하나의 동일한 작업장에 집중시키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비록 길드조직이 수공업의 분리. 고립. 개선에 의해 매뉴팩쳐의 물질적 존재조건의 창조에 크게 공헌했지만, 길드 조직은 매뉴팩쳐의 특징인 작업장 안의 분업을 배제하고 있었다. 대체로 노동자(勞動者)와 그의 생산수단(生産手段)은 마치 달팽이와 달팽이집처럼 서로 긴밀하게 통일(統一)되어 있었고, 따라서 매뉴팩쳐의 제1토대-즉 노동자에 대해 생산수단이 자본으로 독립하는 것-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체사회 안의 분업은, 상품교환에 의해 매개되든 아니든, 매우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존재할 수 있지만, 매뉴팩쳐에서 수행되고 있는 바와 같은 작업장 안의 분업(分業)은 자본주의적(資本主義的) 생산양식의 전혀 독특한 창조물(創造物)이다.



    제 5 절 매뉴팩쳐의 자본주의적 성격


    동일한 자본가의 지휘 하에 많은 노동자가 있다는 것은 협업(協業) 일반과 매뉴팩쳐의 자연발생적 출발점이다. 그러나 매뉴팩쳐적 분업에서는 노동자 수의 증가가 기술상 필요하다. 1명의 자본가가 고용해야 하는 최소한도의 노동자 수는 기존의 분업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더욱 진전된 분업의 이익은 오직 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데, 이러한 노동자 수의 증가는 모든 부분집단이 일정한 비율(比率)로 배가(倍加)되는 방식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의 가변적(可變的) 구성부분의 증가는 그 불변적(不變的) 구성부분의 증가도 요구한다. 즉, 건물이나 기구 등 생산조건의 규모뿐 아니라 특히 원료[이것에 대한 수요는 노동자의 수보다 훨씬 더 급속하게 증가한다]가 증가해야 한다. 일정한 기간중 일정한 노동량에 의해 소비되는 원료량은 분업의 결과 노동생산성이 제고되는 데 비례해서 증가한다. 그리하여 개별 자본가가 수중에 가지고 있어야 할 최소한도의 자본규모가 계속 증대한다는 것, 다시 말해 사회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이 계속 증대해야 한다는 것은 매뉴팩쳐의 기술적 성격으로부터 발생하는 하나의 법칙이다.(주석 39: "수공업의 세분화에 필요한 자본"(저자는 필요한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이라고 말했어야 할 것이다)"이 사회에 현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자본이 [고용주로 하여금 그의 작업을 대규모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데 충분할 만큼] 많이 고용주의 수중에 축적되는 것이 필요하다 ....분업이 진전하면 할수록, 동일한 수의 노동자를 취업시키기 위해서도 도구. 원료 등에 대한 자본지출이 더욱 필요하게 된다"(슈토르히, ?정치경제학강의?, 파리, 제1권, pp. 250-251). "생산수단의 집중과 분업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마치 정치의 분야에서 공권력의 집중과 사적 이익의 분열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과 같다"(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파리, l847년, p. 134).)
    집단적 노동유기체(勞動有機體)는 단순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뉴팩쳐에서도 자본(資本)의 존재형태다. 다수의 개별 부분노동자로 구성되는 사회적 생산매커니즘은 자본가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각종 노동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하는 생산력은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난다. 진정한 매뉴팩쳐는 [이전에는 독립적이었던] 노동자를 자본의 지휘와 규율에 복종시킬 뿐 아니라, 노동자 자신들 사이에 등급적 계층을 만들어 낸다. 단순협업은 개개인들의 노동방식을 대체로 변경시키지 않지만, 매뉴팩쳐는 그것을 철저히 변혁시키며 개별 노동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매뉴팩쳐는 노동자의 일체의 생산적인 능력과 소질을 억압하면서 특수한 기능만을 촉진함으로써 노동자를 기형적인 q불구자로 만든다. 이것은 마치 라플라타강의 여러 나라들{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에서 가죽 또는 지방(脂肪: fat)을 얻기 위해 동물 한 마리 전체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각각의 부분노동이 서로 다른 개인들에게 분배될 뿐 아니라 재인 그 자체가 분할되어 하나의 부분노동의 자동장치로 전
    전환되며(주석 40: 듀갈드 스튜어트는 매뉴팩쳐 노동자를 '부분작업에 사용되는....살아 있는 자동장치'라고 불렀다(듀갈드 스튜어트, ?정치경제학강의?, p. 318).) 그리하여 인간을 그 자신의 신체의 일부로 묘사하는 메네니우스 아그리파(Menenius Agrippa)의 우화{귀족은 위장이고, 평민은 손발이다.}가 현실화된다.(주석 41: 산호에서는 각 개체가 사실상 전체 집단의 위(胃: stomach)이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귀족과 같이 전체 집단으로부터 영양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전체 집단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만약 처음에는 노동자가 상품생산을 위한 물질적 수단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노동력을 자본에게 판매했다면, 이제는 그의 개별 노동력은 자본에 판매되지 않는 한 소용없는 것으로 되어버린다. 개별 노동력은 오직 다른 노동력들과의 관련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는데, 이 관련은 [그것이 판매된 뒤]자본가의 작업장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독립적으로 어떤 물건을 만드는 것에 부적합해진 매뉴팩쳐 노동자는 자본가의 작업장의 부속물로서만 생산적 활동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주석 42: “하나의 수공업 전체에 숙달한 노동자는 어디서나 일할 수 있고 생활수단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노동자"(매뉴팩쳐 노동자)"는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아 자기의 동료들과 떨어져서는 어떤 능력도 독립성도 가지지 못하고 고용주가 마음대로 강요하는 규율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슈토르히, ?정치경제학강의?, 페테르스부르크판, 1815년, 제1권. p. 240).) 여호와의 선민(選民: chosen people)은 몸에 자기가 여호와의 소유물이라는 표시 {할례(割禮)}를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업은 매뉴팩쳐 노동자에게 자본의 소유물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야만인이 모든 전쟁기술을 개인의 책략으로 발휘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작은 규모에서이기는 하나 독립적인 농민 또는 수공업자도 지식과 판단력과 의지를 발휘했다. 그러나 매뉴팩쳐에서는 그러한 능력은 다만 작업장 전체를 위해서만 요구될 뿐이다. 생산상의 정신적 능력이 한 방면에서는 확대되면서 다른 여러 방면에서는 완전히 소멸된다. 부분노동자들이 잃어버리는 것은 [그들과 대립하고 있는] 자본에 집적된다.(주석 43: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얻었을 것이다"(퍼거슨, ?시민사회사“, p. 281).) 부분노동자들이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을 타인의 소유물로 또 자기를 지배하는 힘으로 상대하게 계는 것은 매뉴팩쳐적 분업의 결과다. 이 분리과정{예: 지식과 노동의 분리}은, 개개의 노동자에 대해 자본가가 집단적 노동유기체의 통일성과 의지를 대표하게 되는 단순협업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분리과정은 노동자를 부분노동자로 전락시켜 불구자로 만드는 매뉴팩쳐에서 더욱 발전한다. 끝으로, 이 분리과정은 [과학을 노동과는 별개인 생산잠재력으로 만들고, 과학을 자본에 봉사하게 만드는] 대공업에서 완성된다.(주석 44: "지식인과 생산적 노동자는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되고, 지식은 노동자의 수중에서 그의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수단으로 되지 않고....거의 어디에서나 노동자에 대립하게 되었다. " "지식은, 노동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노동에 대립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 된다(톰슨[W. Thompson], ?부의 분배원리의 연구?, 런던, 1824년, p. 274).)
    매뉴팩쳐에서는 집단적 노동자의 [따라서 자본의] 사회적 생산력은 노동자의 개인적 생산력의 빈약화를 통해 풍부해진다.

    "무지(無知: ignorance)는 미신(迷信)의 어머니인 동시에 또 근면(勤勉)의 어머니이다. 숙고(熟 考)와 상상(想像)은 과오를 범하기 쉽지만, 손이나 발을 움직이는 습관은 그 어느 것과도 무관하 다. 그러므로 매뉴팩처가 가장 번영하는 곳은, 인간이 거의 정신을 쓰지 않는 곳, 그리고 작업장 이 ....[인간을 그 부품으로 하는] 기계로 간주될 수 있는 곳이다.(주석 45: 퍼거슨, ?시민사회사“, p. 280.)

    사실, 18세기 중엽 일부 매뉴팩쳐는 [단순하지만 기업비밀로 되어 있는] 일정한 작업에 반(半)백치(Semi-idiot)를 고용하기를 더 선호했다.(주석 46: 터케트긴[J. D. Tuckett], ?노동인구의 과거 및 현재 상태의 역사?, 런던. 1846년, 제1권, p. 1846년.)
    애덤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해력(理解力)은 그들의 일상적인 업무에 의해 필연적으로 형성된다. 일 생을 몇 가지 단순한 작업[그것의 결과물도 항상 같거나 거의 같다]에 소비하는 사람들은 예기 치 않은 어려움을 제거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데 그의 이해력을 발휘하거나 그의 창조력을 행사 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자연히 그러한 노력을 하는 습관을 잃게 되고, 일반적으 로 인간으로서 가장 둔해지고 무지해진다. "

    스미스는 부분노동자의 우둔성(愚鈍性)을 묘사한 뒤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그의 생활이 단조로워 변화가 없기 때문에 그는 자연히 용기도 잃게 되며, [불규칙적이고 불 안정하며 모험적인] 군인생활을 꺼리게 된다. 또한 육체의 활발한 활동이 불가능하며, 그때까지 그가 배워 온 직업 이외의 어떤 직업에서도 활기 있고 참을성 있게 그의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의 특수한 직무상의 기교는 지적. 사회적. 군사적 덕목을 희생해서 획득되는 것 같다. 발 달한 모든 문명사회에서는 정부의 방지노력이 없는 한, 노동빈민[즉, 대다수 국민들]은 이러한 상황에 필연적으로 빠지게 된다. "(주석 47: A. 스미스,?국부른“, 제5편, 제1장, 제3절(한글판, 하, 272쪽, 273쪽). 분업의 해로운 결과를 지적한 A. 퍼거슨의 제자로서 A. 스미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분업을 공공연히 찬양하고 있는 자기 저서의 서두에서 그는 다만 지나가는 말투로 분업이 사회적 불균등(不均等)의 원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왕 또는 국가의 세입(歲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제5권{제5편}에 가서야 비로소 퍼거슨의 이론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나는 ?철학의 빈곤?에서 분업의 비판에서 퍼거슨, 스미스, 르몽티(Lemontey) , 세이(Say) 사이 의 역사적 관계를 충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처음으로 매뉴팩쳐적 분업이 자본주 의적 생산방식의 하나의 특수한 형태임을 밝혔다(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p. 122 이하).)

    분업에 의해 국민 대중이 완전히 퇴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미스는 국가가 국민교육(國民敎育)을 [신중하게 최소한도로1 실시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의 저서의 프랑스어 역자이며 주석자인 가르니에(Germain Garnier)[그는 프랑스 제1제정 하에서 아주 당연하게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는 국민교육을 철저히 반대한다. 가르니에에 의하면, 국민교육은 분업의 제1법칙을 위반하며, 국민교육이 실시되면 "우리의 사회제도 전체는 폐지될 것이다. "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모든 분업들과 마찬가지로, 손노동과 두뇌노동 사이의 분업도(주석 48: 퍼거슨은 이미 ?시민사회사?, p. 281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각하는 일 그 자체가 이 분업의 시대에는 특수한 직업으로 될 수 있다. ") 사회"(그는 이 용어를 자본, 토지재산 및 [이 둘에 속하는]국가를 가리키는 의미로 옳게 사용하고 있다)"가 부유해짐에 따라 더욱 명백해지고 결정적으로 된다. 다른 모든 분업과 마찬가지로, 이 분업도 과거의 진보의 결과이며, 또 장래의 진보의 원인이다...그런데도 정부가 이 분업을 방해하고 그 자연적인 진행을 저지해야 한단 말인가? 분할과 분리를 지향하는 이 두 종류의 노동을 혼합하고 뒤섞어 놓기 위한 시도에 정부가 국고금의 일부를 지출해야 한단 말인가?"(주석 49: 가르니에(G. Garnier), 그의 ?국부론? 프랑스어 번역, 제5권, pp. 4-5.)

    어느 정도의 정신적 .육체적 불구화는 전체사회 안의 분업의 경우에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매뉴팩쳐는 노동부문들의 이러한 사회적 분할을 훨씬 더 추진시키고, 또한 매뉴팩쳐 특유의 분업에 의해 개인을 그의 생활의 근원에서 공격하기 때문에, 산업병리학(産業病理學)(주석 50: 파두아의 임상의학 교수인 라마치니[Ramazzini)는 1713년에 자기의 저서 ?수공업자들의 질병에 대해?를 발표했다. 그것은 17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또 1841년에는?의학백과사전, 제7부, 고전저자편?에 다시 수록되었다. 대공업 시대는 물론 노동자의 직업병 종류를 크게 증가시켰다. 특히 다음의 두 책을 보라. A. L. 퐁테레(Fonteret) ?대도시 일반 및 특히 리용시 노동자의 육체적. 정신적 위생?, 파리, 1858년 및 R. H. 로하취(Rohatzsch) 편, ?각종 계층, 연령 및 성에 특유한 질병?, 전6권, 울름, 1860년. 1854년에는 기예협회(技藝協會: Society of Arts)가 산업병리학에 관한 조사위원회를 임명했다. 이 위원회가 수집한 자료는“트위크넘 경제박물관”(Twickenham Economic Museum)의 목록에 들어 있다. 정부의 ?공중보건에 관한 보고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또 라이히(Eduard Reich)의 ?인류의 퇴화에 관해?(에르랑겐, 1868년)도 보라.)에 재료와 자극을 제공한 첫번째 장본인은 매뉴팩쳐이다.

    “하나의 인간을 세분하는 것은, 만약 그가 죽을 죄를 지었다면 사형에 처하는 것이며, 만약 그 가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면 암살(暗殺)하는 것이다....노동의 세분화(細分化)는 국민의 암살이 다."(주석 51: 어콰트(D. Urquhart), ?상용어?, 런던, 1855년, p. 119. 헤겔은 분업에 관해 매우 이단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교양있는 사람이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라면 무 엇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라고 자기의 ?법철학?에서 말하고 있다.)

    분업에 입각한 협업[즉, 매뉴팩쳐]은 시초에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일관성과 적용범위를 획득하자마자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의식적이고, 규칙적이며, 체계적인 형태로 된다. 진정한 매뉴팩쳐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그것에 특유한 분업은 최초에는 경험에 의해[말하자면 등장인물들의 배후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를 획득하며, 그 다음에는 [길드적 수공업과 마찬가지로] 일단 찾아낸 그 형태를 고수하려고 애쓰게 되고, 이곳저곳에서 그것을 수세기에 걸쳐 고수하는 데 성공한다. 만약 이 형태에 어떤 변화[사소한 것은 제외]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노동도구(勞動道具)의 혁명 때문이다. 근대적 매뉴팩쳐(나는 여기서 기계에 입각하고 있는 대공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는, 예컨대 대도시의 의복 매뉴팩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 존재하는 자기의 분산된 사지(四肢) {각종의 부분노동자들}를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제본업(製本業)의 경우처럼) 수공업의 각종 작업들을 개별 노동자들에게 전적으로 떠맡김으로써 분업의 원리를 쉽게 적용할 수도 있다. 위와 같은 경우 각각의 기능에 필요한 노동자 수 사이의 비율을 결정하는 데에는 1주일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하다.(주석 52: 개별 자본가가 분업에서 발명적 천재를 선험적으로 발휘한다는 소박한 신념은 오늘날에는 오직 독일 교수들 사이에만 남아 있다. 예컨대 로셔(Roscher)는 분업이 자본가의 주피터 신과 같은 두뇌로부터 완성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자본가에게 '각종의 임금'을 헌납하고 있다. 그러나 분업이 적용되는 범위의 크기는 돈주머니의 크기에 의존하는 것이지 천재의 크기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수공업적 활동의 분해, 노동도구의 전문화, 부분노동자의 형성, 부분노동자들을 분류해 단일 매커니즘으로 결합시키는 것에 의해, 매뉴팩쳐적 분업은 사회적 생산과정에 질적 편성과 양적 비례성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회적 노동의 일정한 조직을 창조하며, 동시에 노동의 새로운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킨다. 사회적 생산과정의 독특한 자본주의적 형태의 하나인 매뉴팩쳐적 분업은-주어진 조건 하에서는 그것은 자본주의적 형태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하나의 특수한 방법, 또는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흔히 사회적 부(富), '국민의 부(富)' 등으로 부르는] 자본의 자기증식을 증대시키는 하나의 특수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매뉴팩쳐적 분업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노동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더욱이 개별 노동자를 불구로 만듦으로써, 증대시킨다. 매뉴팩쳐적 분업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강화하는 새로운 조건을 조성한다. 따라서, 그것은 역사적으로 한편에서는 사회의 경제발전에서 하나의 진보이며 하나의 필연적인 단계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더 문명화되고 세련된 착취의 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매뉴팩쳐시대에 비로소 독립된 과학으로 등장한] 정치경제학은, 사회 안의 분업을 매뉴팩쳐 안의 분업의 입장에서 고찰할 수밖에 없었다.(주석 53: 스미스보다는 폐티와 ?영국에 대한 동인도 무역의 이익?의 익명의 저자 등 이전의 저술가들이 매뉴팩쳐에 칙용되고 있는 분업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더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회 안의 분업을 같은 양의 노동으로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는 수단, 즉 상품가격을 싸게 하며 자본의 축적을 촉진하는 수단으로서만 고찰했다. 이와 같이 양과 교환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오로지 질과 사용가치에만 관심을 가졌던] 고전적 고대의 저술가들의 태도와는 정반대다.(주석 54: 근대인들 가운데서도 베카리아(Cesare Beccaria)와 해리스(James Harris)와 같은 18세기의 몇몇 저술가들은 예외에 속하는데, 이들은 분업에 관해 거의 전적으로 고대인을 추종하고 있다. 베카리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손과 머리를 항상 동일한 종류의 작업과 동일한 생산물의 제조에 사용한다면, [각자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 모두를 스스로 제조하는 경우보다] 생산물을 더 쉽게, 더 많이 그리고 더 좋게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하여 인간은 다양한 계급들과 신분들로 나뉘어져 공공의 이익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게 된다"(베카리아, ?공공경제학요론?, 쿠스토디 편, 근세편, 제11권, p. 28). 나중에 맘즈베리[Malmesbury) 백작이 된 해리스는 (그가 페데르부르크 주재 공사로 있을 시절에 쓴) ?일기?로 유명한데, 그는 자기의 저서 ?행복에 관한 대화?(런던, 1741년) (뒤에 ?세개의 논문....“ , 제3판, 런던, 1772년에 재수록 되었다)에 대한 하나의 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회가 자연적이라는 것을 (직업의 분할에 의해) 증명하려는 모든 논법은....플라톤의 ?공화국?의 제2부에서 따온 것이다. ") 고전적 고대의 저술가에 의하면, 사회적 생산부문들이 분리된 결과, 상품들은 더 좋게 만들어지고, 사람들의 여러 가지 성향과 재능은 자기에게 적합한 활동분야를 선택하게 되며(주석 55: 예컨대 ?오딧세이? 제14장 제220절에는 "사람마다 제각기 좋아하는 일이 다르다"라는 구절이 있고, 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가 인용한 아르키로쿠스(Archilochus)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활동분야가 어느 정도 제한되지 않고서는 어떤 부문에도 훌륭한 성과가 얻어질 수 있게 된다.(주석 56: "그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잘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 아테네인은 자기들이 상품생산자로서는 스파르타인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스파르타인들은 전쟁할 때 인간을 사용할 줄은 알았지만 화폐를 사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예컨대 투키 디데스는 페리클레스로 하여금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여하는 아테네인들을 고무하는 연설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자급자족하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화폐보다는 자기의 몸으로 싸우려고 한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부, 제141절). 그럼에도 불 구하고 아테네인들의 이상은 물질적 생산에서 분업에 대립하는 자급자족이었다. "왜냐하면 분업(分業)이 있는 곳에는 풍요가 있지만, 자급자족(自給自足)이 있는 곳에는 독립도 있기 때 문이다. " 이것과 관련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30명의 공포정치가들이 몰락하던 시기 {기 원전 404년}에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아테네인은 5,0000명에도 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분업에 의해 생산물도 생산자도 개선된다는 것이다. 고전적 고대의 저술가들이 때로 생산량의 증가에 언급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사용가치가 더욱 풍부하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교환가치나 상품의 저렴화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용가치의 입장은 [분업을 사회의 신분적 구분의 토대로 간주하는] 플라톤이나(주석 57: 플라톤은 공동체 안의 분업을 개인의 욕망의 다양성과 자질의 일면성에 의해 설명한다. 그의 주된 관점은 노동자가 일에 적응해야지 일을 노동자에게 적응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노동자가 동시에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 [즉, 직업들 중의 어느 하나를 부업으로 수행하는 경우 일을 노동자에게 적응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이 노동자의 여가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노동자가 자기의 일을 부업으로서가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수행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연하다. "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소질에 따라 적당한 시기에 다른 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한 가지 일만을 수행한다면, 더 많은 물건이 더 좋고 더 쉽게 생산될 것이다"(?공화국?, 제1부, 제2절). 이와 비슷한 견해를 투키디데스의 앞의 저서, 제142장에서 볼 수 있다. "항해술은 하나의 기술이며 어떤 경우에도 부업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어떤 부업도 이 항해술과 함께 수행할 수는 없다. " 플라톤은, 만약 일이 노동자를 기다리게 된다면 생산상의 결정적인 순간을 때때로 놓쳐버리게 될 것이며 제품은 못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전체 동자에게 고정된 식사시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한] 공장 법의 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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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컨대 수확을 할 때 2명의 마부, 2명의 짐 싣는 사람, 2명의 던지는 사람, 2명의 갈퀴질하는 사람 및 건초를 쌓거나 곡물창고에서 일하는 몇 명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농장에서 서로 다른 조로 나뉘어 일하는 같은 수의 노동자들보다 2배나 많은 일을 할 것이다"(?식량의 현재가격과 농장규모 사이의 관계의 인구?, 한 농장주?아버스노트”저, 런던, 1773년, pp. 7-8).) 이것은 인간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것처럼 정치적 동물(주석 7: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定義: definition)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시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한] 프랭클린의 정의가 양키 나라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정의는 고전적 고대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은 아닐지 몰라도 여하튼 사회적 동물(社會的 動物)이라는 데 기인한다.
    비록 많은 사람이 동일한 작업 또는 같은 증류의 작업에 동시적으로 협동하더라도, 각 개인의 노동은 총노동의 일부로 그 노동과정의 상이한 국면을 이룰 수 있는데, 이때 노동대상은 협업의 결과 이 국면들을 더 빨리 통과하게 된다. 예컨대 만약 12명의 벽돌공이 벽돌을 사다리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운반하기 위해 열을 지어 선다면, 그들 각 개인은 동일한 일을 하지만, 그들 개개의 행위는 하나의 전체적인 작업의 연속된 부분들을 이룬다. 즉, 각자의 행위는 각 벽돌이 노동과정에
    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특수한 국면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벽돌은 전체 노동자의 24개의 손을 통과함으로써 각 개별 노동자들이 사다리를 오르내리면서 벽돌을 운반할 때보다 더 빨리 운반된다.(주석 8: “또한 지적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부분적 분업(分業)은 모든 노동자가 하나의 동일한 작업을 하는 경우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건물의 높은 곳으로 벽돌을 손에서 손으로 나르는 벽돌공들은 모두가 동일한 작업을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 각자는 벽돌을 일정한 거리만 옮겨 놓지만, 전체로 보면 그들은 각자가 벽돌을 단독으로 높은 곳에 운반하는 경우보다 훨씬 더 빠르게 그것을 옮겨놓게 된다"(스카르베크[F. Skarbek],
    ?사회적 부의 이론?, 제2판, 파리, 1839넌, 제1권1 pp. 97-98).) 노동대상은 동일한 거리를 더 짧은 시간에 통과한다. 또한 예컨대 건물을 지을 때 여러 방면에서 동시에 착수하는 경우, 비록 협업자들은 이때에도 같은 작업 또는 같은 종류의 작업을 하기는 하지만, 노동의 결합이 일어난다. 건물을 짓는 데 1명의 벽돌공이 12일간 [즉 144시간] 작업하는 것보다 12명의 벽돌공이 144시간의 집단적 1노동일에 작업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다. 그 이유는 협력해 작업하는 노동자 집단은 앞과 뒤로 팔과 눈을 가지고 있어 어느 정도까지는 전면성(全面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생산물의 상이한 부분들이 동시적으로 완성되어 간다.
    위에서 우리는 많은 노동자가 같은 작업 또는 같은 종류의 작업을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공동노동(共同勞動: common labour)의 이러한 가장 단순한 형태가 협업에서 [심지어 협업의 가장 발달한 형태에서도]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과정이 복잡하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만으로도 상이한 작업을 각각의 노동자에게 분배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그 작업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전체 작업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은 단축된다.(주석 9: "어떤 복잡한 노동을 하는 경우, 몇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람은 이 일을 하고 저 사람은 저 일을 함으로써 한 사람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성과에 모두가 함께 기여한다. 한 사람은 노를 젓고 또 한 사람은 키를 잡고 세번째 사람은 그물을 던지거나 작살로 고기를 찌르거나 한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는 이러한 협업 없이는 불가능한 성과를 얻고 있다" (데스튜트 드 트라시, 앞의 책, p. 78).)
    많은 생산부문에는 결정적인 순간[즉, 노동과정 그 자체의 성질에 의해 규정되며 그 기간에 노동의 일정한 성과가 달성되어야 하는 시기]이 있다. 예컨대 한 떼의 양의 털을 깎는다든가 일정한 면적의 곡물을 베어 거두어들여야 할 때, 생산물의 양과 질은 이 작업이 일정한 시간에 시작되어 일정한 시간에 끝나는가 끝나지 못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러한 경우 노동과정이 수행되어야 할 기간은 [예컨대 청어잡이의 경우와 같이] 미리 정해져 있다. 각 개인은 하루에 예컨대 12시간 이상의
    1노동일을 만들어 낼 수 없지만, 100사람의 협업은 1노동일을 1,200시간으로 확대할 수 있다. 작업에 허용되는 기간이 짧다는 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생산의 장(場)에 투입되는 노동의 커다란 규모에 의해 보상된다. 이 경우, 제때에 작업을 마무리짓는 것은 다수의 결합된 노동일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에 달려 있으며, 유용한 효과의 대소는 노동자의 수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노동자의 수는 [동일한 기간에 동일한 규모의 작업을 하는 데 필요한] 고립된 노동자의 수보다 언제나 적다. (주석 10: "그것"(농업노동)"를 결정적인 순간에 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아버스노트, 앞의 책 , p. 7. "농업에서는 시간이라는 요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없다"(리비히[Liebig], ?농 업의 이론과 실제?, 1856년, p. 23).) 이러한 종류의 협업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미국의 서부에서는 매년 많은 곡물이, 그리고 [영국의 통치에 의해 옛날의 공동체가 파괴된] 인도의 동부 지역에서는 매년 다량의 면화가 낭비되고 있다.(주석 11: "그 다음의 불행은 [아마 중국과 영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더 많은 노동을 수출하고 있는 나라{인도}에서 있으리라고는 거의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불행인데, 그것은 면화의 수확에 필요한 노동자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다량의 면화가 수확되지 못하고 내버려지며, 또 일부는 면화가 이미 땅에 떨어져 변색되고 또 부분적으로 썩어 버린 뒤에 땅에서 수집된다. 그리하여 바로 그 계절에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재배업자는 [영국에서 그처럼 애타게 기다리는] 면화의 많은 부분을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리게 된다"(?벵갈 통신, 격월해외정보요약}, 1861년 7월 22일자).)
    협업은 한편으로는 작업을 넓은 공간에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어떤 노동과정에서는 노 동대상의 물리적 구조 그 자체가 벌써 협업을 요구한다. 예컨대 배수공사. 제방공사. 관개공사. 운하건설. 도로건설. 철도부설 등에서 그렇다. 다른 한편, 협업은 생산규모를 확대하면서도 생산의 공간적 영역을 상대적으로 축소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산규모의 확대와 동시에 노동의 공간적 범위의 축소는 [이것은 다액의 공비(空費) {비생산적 비용}를 절약할 수 있게 한다] 많은 노동자의 밀집과 각종 노동과정의 집합(集合)과 생산수단의 집중(集中)에서 생긴다.(주석 12: 농경의 진보에 따라 "전에는 500에이커의 조방적(粗放的) 경작에 사용되고 있던 모든 자본과 노동[아마도 그 이상]이 이제는 100에이커의 한층 더 집약적인 경작에 집중되고 있다." "사용되는 자본과 노동의 양에 비해 면적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지만, 생산의 범위는 이전에 하나의 독립적 생산자에 의해 경작될 때보다 확대되었다"(존스, ?부의 분배에 관한 연구?, 제1부, 지대에 관해, 런던, 1831년, p. 191).)
    결합된 노동일은 그것과 동일한 크기의 개별 노동일의 합계에 비해 더 많은 양의 사용가치를 생산하며, 따라서 주어진 유용효과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감소시킨다. 결합된 노동일이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원인이 무엇이건 [즉, 그것이 노동의 기계적 힘을 제고하거나, 노동의 공간적 작용범위를 확대하거나, 생산규모에 비해 생산의 공간적 장소를 축소하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많은 노동을 가동시키거나, 개개인의 경쟁심을 자극해 활기를 띠게 하거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같은 종류의 작업에 연속성과 다면성을 부여하거나, 서로 다른 작업들을 동시적으로 수행하거나, 공동사용에 의해 생산수단을 절약하거나, 또는 개개인의 노동에 사회적 평균노동의 성격을 부여하기 때문이거나] 결합된 노동일의 특수한 생산력은 어떤 경우라도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 또는 사회
    적 노동의 생산력이다. 이 생산력은 협업 그 자체로부터 발생한다 다른 노동자들과 체계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노동자는 그의 개별성의 족쇄를 벗어 던지고 그의 종족(種族: species)의 능력을 발전시킨다.(주석 13: "개개인의 힘은 보잘 것 없지만, 이 보잘 것 없는 힘의 결합은 모든 부분적인 힘의 합계보다 더 큰 집단적인 힘을 창조한다. 그리하여 힘은 그것을 단순히 결합시키기만 해도 시간을 단축하고 자기의 작용범위를 확대할 수 있다"(베리, ?정치경제학에 관한 고찰“, p. 196에 대한 칼리[G. R. Carli]의 주).)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은 함께 모이지 않고서는 협력할 수 없으며, 그들이 일정한 장소에 집결하는 것이 그들의 협업의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임금노동자는 동일한 자본(資本), 동일한 자본가에 의해 동시적으로 고용되는 경우에만, 즉 그들의 노동력이 동시적으로 구매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협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노동력의 총가치[즉, 노동자들에 대한 하루 또는 1주일 등의 임금총액]가 자본가의 주머니에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노동자들이 생산과정을 개시할 수 있다. 300명의 노동자에게 단 하루분을 지불하는 데에도 소수의 노동자에게 1주일에 한 번씩 1년간 지불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본지출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협업노동자의 수(즉, 협업의 규모)는 우선 개별 자본가가 노동력의 구매에 지출할 수 있는 자본의 크기[다시 말해 각 개별 자본
    가가 다수의 노동자의 생활수단을 구매할 수 있는 정도]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변자본(可變資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불변자본(不變資本)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예컨대 3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가가 원료에 대해 지불하는 금액은 1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가가 지출하는 것의 30배가 된다. 공동으로 이용하는 노동수단의 가치나 양은 노동자의 수와 같은 비율로 증가하지는 않지만 현저하게 증가한다. 그리하여 개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대량의 생산수단이 집적(集積)되는 것은 임금노동자들의 협업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며, 협업의
    범위 또는 생산의 규모는 이러한 집적(concentration)의 정도에 의존한다. 앞의 장에서 본 바와 같이, 동시적으로 고용되는 노동자의 수, 그리고 그들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이 고용주 자신을 육체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를 소경영주로부터 자본가로 전환시킴으로써 자본관계 {또는 노자관계(勞資關係)}를 형태적으로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최소한도의 자본액이 필요했다. 이제는 자본의 이 최소한도가 다수의 분산되고 상호독립적인 노동과정들을 하나의 결합된 사회적 노동과정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물질적 조건으로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에 대한 노동의 종속도 처음에는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따라서 자본가 밑에서 노동한다는 사실의 형태적인 결과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많은 임금노동자의 협업에 따라 자본의 지휘는 노동과정 그 자체의 수행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생산의 현실적 조건으로 발전해 간다. 생산장소에서의 자본가의 지휘는 이제 전쟁터에서의 장군의 지휘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것으로 된다.
    대규모로 수행되는 모든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 또는 공동노동은, 개인들의 활동을 조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생산유기체의 독립적인 기관(器官. organ)들의 운동과는 구별되는 생산유기체 전체의 운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일반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지휘자를 필요로 한다. 바이올린 독주자는 자신이 직접 지휘자가 되지만 교향악단은 독립적인 지휘자를 필요로 한다. 지휘와 감독과 조절의 기능은 자본의 지배 하에 있는 노동이 협업적으로 되자마자 자본의 하나의 기능으로 된다. 자본의 독자적인 기능으로서, 지휘(指揮)의 기능은 자기 자신의 특수한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추진하는 동기, 그리고 그것을 규정하는 목적은 자본을 가능한 최대한도로 증식시키는 것(주석 14: "이윤은....사업의 유일한 목적이다"(반더린트, ?화폐만능론?, p. 11).)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최대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 따라서 가능한 한 최대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협업하는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자본의 지배에 대한 그들의 반항도 증대하며, 또한 이 반항을 억누르기 위한 자본의 압력도 필연적으로 증대한다. 자본가에 의한 통제는 사회적 노동과정의 성질로부터 유래하는 하나의 특수기능일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이 사회적 노동과정을 착취하는 기능이며, 따라서 착취자와 그의 착취 대상{즉, 노동자} 사이의 불가피한 적대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임금노동자에 대해 타인의 소유물로 대립하는 생산수단의 규모가 증대함에 따라 그것이 적절하게 사용되도록 초과적으로 통제할 필요도 증대한다.(주석 15: 영국의 저급신문인 “스펙테이터?(Spectator) 지는 1866년 5월 26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멘체스터 철사제조회사“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일종의 공동출자제도(共同出資制度)가 도입된 이후 "첫번째 결과는 재료의 낭비가 갑자기 감소한 사실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다른 기업가의 재산이라면 모르지만 자기 자신의 재산을 낭비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료의 낭비는 아마 악성채무 다음가는 사업상 손실의 최대의 원천이다. " 이 신문은 로치데일 협동조합 실험의 근본적 결함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그 실험은 노동자들의 조합(組合)이 매점이나 공장이나 거의 모든 형태의 산업을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또 노동자들 자신의 상태를 크게 개선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용주들을 위해 빈자리를 남겨 놓지 않았다. " 얼마나 잘못한 짓인가! ) 더욱이 임금노동자들의 협업은 전적으로 그들을 고용하는 자본에 의해 생긴다. 그들을 단일의 생산체(生産體: productive body)로 통일하고, 그들의 개별 기능들 사이에 하나의 관련을 형성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능력 밖의 일이다. 즉, 그들 자신의 행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모아 함께 일하도록 만든 자본의 행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다양한 노동 사이의 상호관련은, 관념적으로는 자본가의 계획으로서, 그리고 실무적으로는 [노동자들의 활동을 자본가의 목적에 종속시키는] 자본가의 권위, 타인의 강력한 의지로서 그들과 대립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본가의 지휘(指揮: direction)는 그 내용에서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지휘하는 생산과정 자체가 한편으로는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사회적 노동과정(勞動過程)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가치증식과정(價値增殖)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의 지휘는 그 형식에서는 독재적이다. 협업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이 독재도 자기의 특유한 형태들을 전개한다. 자본가는, 자기의 자본이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을 개시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도에 도달하자마자, 우선 육체노동으로부터 해방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가는 이제 개별 노동자들과 노동자 집단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끊임없는 감독 업무를 특수한 종류의 임금노동자들에게 넘겨준다. 군대가 장교와 하사관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자본의 지휘 하에 있는 산업노동자집단도 노동과정의 진행 중에 자본의 이름으로 지휘할 장(지배인)과 하사관(십장. 감시자)을 필요로 한다. 감독(監督: supervision)이라는 업무가 그들의 전문기능으로 확정된다. 분산된 농민이나 독립적 수공업자의 생산방식을 노예제도에 의한 농장경영과 비교할 때, 경제학자들은 노예제도의 감독노동을 생산상의 공비(空費)로 계산한다.(주석 16: 케언즈(Cairnes)는 '노동에 대한 감독'을 미국 남부주의 노예제 생산의 하나의 주요 특징이라고 말한 뒤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자기 노동의 생산물 전체를 자신이 갖는 (북부의) 자작농은 노동에 대한 다른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감독이라는 것이 전혀 불필요하다"(케언즈, ?노예의 힘?, pp. 48-49).) 그러나 그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고찰할 때에는 이와 반대로 집단적인 노동과정의 성질로부터 발생하는 지휘 기능과, 노동과정의 자본주의적, 따라서 적대적 성격에 의해 필요하게 되는 지휘기능{감독기능}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한다.(주석 17: 상이한 생산양식들 사이의 특징적인 사회적 차이점을 통찰하는 데 탁월했던 제임스 스튜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조업 대기업이 개인경영을 몰락시킬 수 있는 이유는, 대기업이 노예노동의 단순성에 더욱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정치경제원리“, 런던, 1767년, 제1권, pp. 167-168).) 산업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자본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가이기 때문에 산업의 지도자로 된다. 봉건시대에는 장군. 판사의 기능이 토지소유의 속성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의 지도력은 자본의 속성으로 된다.(주석 18: 그러므로 콩트(Auguste Comte) 및 그의 학파는 자본가들의 영원한 필요성을 실증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봉건영주들의 영원한 필요성을 실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의 판매를 위해 자본가와 흥정을 끝낼 때까지는 자기 노동력의 소유자이며, 그는 오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 즉 자기의 개인적이고 고립된 노동력만을 판매할 수 있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자본가가 1명의 노동력이 아니라 100명의 노동력을 구입하며, 그리고 1명이 아니라 서로간에 아무 관련이 없는 100명의 노동자와 계약을 체결한다는 사실에 의해 조금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는 이 100명의 노동자를 협업시키지 않고서도 일을 시킬 수 있다. 자본가는 100명의 독립적인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하는 것이지 100명의 결합된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독립한 인간으로서 노동자들은 제각각인 사람들이며, 그들은 자본가와 관계를 맺지만 자기들 서로간에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다. 그들의 협업은 노동과정에서 비로소 시작되는데, 그때에는 이미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동과정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자본에 편입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협업자(協業者)로서, 또는 하나의 활동하는 유기체(有機體)의 구성원으로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특수한 존재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협업에서 발휘하는 생산력은 자본(資本)의 생산력(生産力)이다.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은 노동자들이 일정한 조건 하에 놓일 때는 언제나 무상으로 발휘되며, 그리고 노동자들을
    바로 이러한 조건 하에 놓는 것은 자본이다. 이 생산력은 자본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는 것이고, 또 이것은 노동자의 노동이 자본에 속하기 전에는 노동자 자신에 의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생산력은 자본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생산력으로, 자본에 내재하는 생산력으로 나타난다.
    단순협업의 엄청난 효과는 고대 아시아인, 이집트인, 에트루리아인 등이 세운 거대한 건물에서 볼 수 있다.

    “과거 이 아시아 국가들은 행정비와 군사비를 충당하고도 생활수단의 잉여를 가지고 있었으므 로, 그것을 호화스러운 건축물을 짓고 유용한 토목공사를 하는 데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축조하는 테 있어 그들은 거의 모든 비농업인구의 노동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 늘날까지 그들의 위력을 과시하는) 거대한 기념물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비옥한 나일강 유역은....수많은 비농업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을 생산했고, 왕과 승려의 소유 하에 있었던 이 식 량은 국토 가득히 거대한 기념비들을 세울 수단을 제공했던 것이다....거대한 석상(石像)들과 대 량의 자재(資材)들이 운송될 때에는-그런 것들을 운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다-거의 전적으로 인간의 노동이 아낌없이 사용되었던 것이다....그것을 위해서는 수많은 일꾼들과 그들의 노력의 집중만으로 충분했다. 우리는 거대한 산호초가 대해(大海)의 깊은 물 속으로부터 솟아올 라 섬과 육지로 되는 것을 보지만, 그것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하나하나의 침전물(沈澱物)은 보잘 것 없고 미약하고 가소로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시아 왕국의 비농업일꾼들은 개인적인 육체 적 힘 이외에는 그러한 공사에 기여할 만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의 수가 그들 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 큰 무리들을 지휘하는 권력이 [오늘날 남아서 우리들을 놀라게 하고 황 홀하게 만드는] 궁전과 사원과 피라미드와 거대한 석상들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일꾼들을 먹여 살릴 만한 수입이 한 사람 또는 소수의 사람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종류의 사업이 가능했던 것이다. "(주석 19: 존스 ”국민경제학교과서“, pp. 77-78. 런던 및 기타 유럽의 수도들에 있는 고대 앗시리아, 이집트 등의 수집품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협업적 노동과정을 보 여준다.)

    아시아와 이집트의 왕들과 에트루리아의 승려 등의 이와 같은 권력은 근대사회에서는 자본가에게로 넘어갔는데, 여기서 자본가가 개별 자본가로 등장하느냐 또는 주식회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집단적 자본가로 등장하느냐는 아무래도 좋다.
    [우리가 인류문명의 초기에 수렵민족들(주석 20: 랑게(Linguet)는 자기의?민법이론?에서 수렵을 협업의 최초의 형태며 또 인간사냥(전쟁)을 수렵의 최초의 형태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맞는 말일 것이다.) 사이에서 발견하거나, 또는 인도공동체의 농업의 지배적 특징으로 볼 수 있는] 노동과정의 협업은, 한편으로는 생산조건(生産條件)의 공동소유(共同所有)에 입각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인이 [마치 개개의 꿀벌이 벌집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듯이] 씨족 또는 공동체의 탯줄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정에 입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이 협업은 자본주의적 협업과 구별된다. 고대와 중세 및 근대 식민지에서 때때로 이용되는 대규모의 협업은 직접적인 지배와 예속의 관계[대부분의 경우 노예제도]에 입각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주의적 형태의 협업은 처음부터 [자기의 노동력을 자본에게 판매하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자를 전제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적 형태의 협업은 소농민적 경영과 독립적 수공업[길드의 형태를 취하든 말든]에 대립해 발전한다.(주석 21: 소규모 농민적 경영과 독립적인 수공업경영은 한편으로 봉건적 생산양식의 토대를 이루며 다른 한편으로 봉건적 생산양식이 해체된 뒤에는 자본주의적 경영과 나란히 나타난다. 또한 그것들은 [토지의 원시적 동양적 공동소유제도가 벌서 해체되었으나 노예제도가 아직 본격적으로 생산을 장악하지 못했던 전성기의 고전적 고대의 공동체의 경제적 토대를 이룬다.) 소농민과 수공업자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적 협업이 협업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협업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특유한 그리고 독특한 역사적 형태로 나타난다.
    협업에 의해 발휘되는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나듯이, 협업 그 자체도 [분산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자 또는 소경영주에 의해 수행되는 생산과정과 대립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독특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현실의 노동과정이 자본에 종속될 때 경험하는 최초의 변화다. 이 변화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다. 동일한 노동과정에 많은 임금노동자를 동시적으로 고용하는 것이 이 변화의 전제조건이며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이다. 이 출발점은 자본 그 자체의 출현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노동과정을 사회적 과정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역사적으로 필요한 조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의 이러한 사회적 형태는 자본이 노동의 생산력을 제고함으로써 노동을 더 유리하게 착취하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은 단순한 형태의 협업은 모든 대규모 생산의 필연적인 부수물이지만, 단순협업(單純協業)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어떤 특수한 발전단계를 특징짓는 하나의 고정적인 형태는 아니다. 단순협업이 기껏해서 대략이나마 위와 비슷한 것으로 나타난 것은, 매뉴팩쳐의 수공업적인 초기에서(주석 22: “같은 일을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의 결합된 숙련과 근면과 경쟁심이 그 일을 진척시키는 방법이 아닌가? 그리고 영국은 과연 이 방법에 의하지 않고 양모공업을 그처럼 고도로 완성시킬 수 있었겠는가?"(버클리[Berkeley], ?질문자”, 런던, 1750년, p. 56, 제521절).) 그리고 다음과 같은 종류의 대규모 농업[즉, 매뉴팩쳐 시기에 상응하며 주로 동시적으로 고용되는 노동자의 수와 집적된 생산수단의 규모에 의해 농민적 경영과 구별되는 대규모 농업]에서였다. 자본이 큰 규모로 사용되기는 하나 분업과 기계가 아직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생산부문에서는, 단순협업이 언제나 지배적인 형태였으며 여전히 그러하다. {앞으로 노동분업에 의거한 협업인 매뉴팩쳐와 기계에 의거한 협업인 대공업을 다를 것이다.}
    협업의 단순한 형태는 더욱 발전된 형태들과 나란히 하나의 특수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협업은 언제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본형태다.



    제 14 장
    분업과 매뉴책쳐


    제 1 절 매뉴팩쳐의 두 가지 기원(起源)



    분업(分業: division of labour)에 의거한 협업은 매뉴책쳐(manufacture)에서 그 전형적인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하나의 특징적인 형태로 [대략 16세기 중엽에서 18세기의 마지막 1/3에 이르는] 진정한 매뉴팩쳐 시대를 통해 지배적이었다.
    매뉴팩쳐는 두 가지 방식으로 발생한다.
    (1) 여러 종류의 독립적 수공업(獨立的 手工業)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어떤 하나의 생산물이 완성되기까지는 이들의 손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 동일한 자본가의 통제 하에 하나의 작업장(作業場)으로 모이는 경우. 예컨대 이전에는 한 대의 마차는 [수레바퀴 제조업, 마구 제조공, 재봉공, 자물쇠공, 가구공, 선반공, 레이스공, 유리공, 화공, 도장공, 도금공 등] 수많은 독립수공업자들의 노동의 생산물이었다. 그러나 마차 매뉴팩쳐에서는 이들 각종 수공업자들 모두가 하나의 작업
    장에 모여 거기서 미완성품을 이 사람으로부터 저 사람에게로 이전시킨다. 마차의 제작이 끝나기 전에 마차에 도금(鍍金:gild)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여러 대의 마차가 동시에 제작된다면 어떤 것이 생산과정의 앞 단계를 통과하고 있는 동안 다른 어떤 것은 도금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우리는 아직도 단순협업[단순협업(單純協業)에 필요한 재료들이 인간과 물건의 형태로 준비되어 있데]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재봉공, 자물쇠공, 가구공 등은 이제 마차제작을 전업(專業)으로 하게 되며, 그리하여 자기들의 종전의 수공업을 그 전체적 범위에서 수행하는 습관과 능력을 점차로 잃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전적으로 일면화( 一面化)된 활동이 이러한 협소해진 활동영역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최초에는 마차 매뉴팩쳐는 다양한 독립수공업들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마차생산은 각종 부분과정들로 세분되었고, 각각의 부분과정은 특정 노동자의 전문 기능으로 고정되었으며, 전체로서의 매뉴팩쳐는 이와 같은 부분노동자들의 결합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직물 매뉴팩쳐나 다른 모든 매뉴팩쳐들도 한 자본가의 통제 하에 여러 종류의 수공업들을 결합시킴으로써 발생했다.(주석 1: 매뉴팩처의 이와 같은 형성방식의 더욱 근대적인 예를 보여주기 위해 다음의 글을 인용한다. 리용(Lyons)과 님(Nimes)의 견방적 공업과 견직물 공업은 "완전히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 성격을 띠고 있다. 이 공업부문은 많은 여성과 아동을 고용하고 있으나 그들을 과로키거나 타락시키는 일은 없다. 노동자들은 이전대로 드롬, 바르, 이제르, 보클류즈의 아름다운 계곡에 살면서 누에를 치고 고치에서 실을 뽑는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장경영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업(分業)의 원칙이 특수한 성격을 띠고 있어....여기에서는 필요한 높은 수준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곳에는 실을 감는 사람, 실을 꼬는 사람, 염색공, 풀먹이공, 또 끝으로 직물공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일한 하나의 작업장에 모여 있지도 않고, 또 동일한 한 사람의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 지도 않다. 그들은 모두가 독립적으로 일하고 있다(블랑키[J. A. Blanqui]), ?산업경제학강의?, 블레이즈[A. Blaise] 편, 파리 1838-39년, p. 79). 블랑키가 이 책을 쓴 이후 이 각종 독립노동자 들은 어느 정도 공장에 통합되었다 {엥겔스: 그런데 마르크스가 이것을 쓴 이후, 이 공장들에서 는 동력직기가 채용되어 급속하게 수직기를 몰아내고 있다. 크레펠트의 견직공업도 이와 같은 것을 체험하고 있다.}
    (2) 매뉴팩쳐는 위와는 반대의 방식으로도 발생한다. 하나의 자본가가 같은 작업 또는 같은 종류의 작업을 수행하는 [예컨대 종이. 활자. 바늘 등을 만드는] 수많은 수공업자들을 동시에 동일한 작업장에 고용한다. 이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협업이다. 이 수공업자들은 각각 (아마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의 도제(徒弟)와 더불어) 하나의 완전한 상품을 만들며, 따라서 그 상품의 제조에 필요한 모든 작업을 차례차례 수행한다. 그는 여전히 자기의 종전의 수공업적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외부사정 때문에, 동일한 장소에 노동자들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과 그들의 노동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게 된다. 예컨대 일정한 기일 안에 더 많은 양의 완성상품을 공급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고 하자. 이를 위해 작업이 분할된다. 동일한 수공업자에게 다양한 여러 가지 작업을 차례차례 시키는 대신 그 작업들을 분리시키고 고립시키고 공간적으로 병립(竝立)시켜 각각의 작업을 서로 다른 수공업자에게 할당한다. 그리하여 전체 작업이 협업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동시에 수행된다. 이와 같은 우연적인 분할이 반복되고 그 자체의 장점을 전개하면서 점차 체계적인 분업으로 고착되다. 상품은[여러 가지 작업을 수행하는] 하나의 독립수공업자의 개인적 생산물(個人的 生産物)로부터 [각자가 언제나 단 한 가지의 부분작업만을 수행하는] 수공업자 연합체의 사회적 생산물(社會的 生産物)로 된다. 독일 길드에 속하는 제지업자의 경우에는 하나의 수공업자의 일련의 순차적 작업들이, 네덜란드의 제지 매뉴팩쳐에서는 다수의 협업노동자들이 동시에 나란히 수행하는 수많은 부분작업으로 독립되어 있다. 뉴렘베르크의 길드적 제침업(製針業: needlemaker)은 영국 제침매뉴팩쳐의 토대가 되었는데, 뉴렘베르크의 제침수공업자는 아마 20가지나 되는 일련의 작업을 하나씩 차례차례로 수행하지만, 영국의 제침매뉴팩쳐에서는 얼마 전부터 20명의 수공업자 각각이 20가지의 작업중 한 가지만을 수행하되 모두가 동시에 작업한다.이러한 작업들은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한층 더 세분되고 고립되며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되어 개별 노동자들의 전문 기능으로 되었다.
    매뉴팩쳐의 발생 방식(發生 方式), 수공업으로부터의 생성은 이와 같이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각종의 독립적 수공업의 결합(結合)으로부터 발생하는데, 이 경우 독립적 수공업은 그들의 독립성을 상실해 [하나의 특수한 상품의 생산에서 상호보완적인 부분작업으로 전환되어 버릴 정도로] 전문화(專門化)한다. 다른 한편, 매뉴팩쳐는 같은 종류의 수공업자들의 협업(協業)으로부터 발생한다. 이 경우 매뉴팩쳐는 그 수공업을 여러 가지의 부분작업들로 분해하고 고립화시켜, 이 부분
    작업들이 각각 한 노동자의 전문 기능으로 될 정도로까지 독립화한다. 그러므로 매뉴팩쳐는 한편으로는 생산과정에 분업(分業)을 도입하거나 분업을 한층 더 발전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에는 서로 분리되어 있던 수공업을 결합(結合)시킨다. 그러나 그것의 출발점이 무엇이든 그 최종적 형태는 항상 동일하다. 즉, 인간을 그 기관(器官: organ)으로 하는 생산 메커니즘이다.
    매뉴팩쳐 안의 분업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생산과정을 그 특수국면으로 분할하는 것은, 수공업을 각종 부분작업으로 분할하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 작업이 복잡한 것이든 단순한 것이든, 각각의 작업은 언제나 손으로 수행하고, 수공업적 성격을 보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각각의 작업은 각 노동자가 자기의 도구를 사용할 때 발휘하는 힘과 기교와 민첩성과 정확성에 의존한다. 수공업이 여전히 그 토대며, 그 기술적 토대가 협소하기 때문에 생산과정을 그 구성부분들로 과학적으로 분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생산물이 통과하는 각각의 부분과정은 손으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의 독립된 수공업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공업자의 숙련이 여전히 생산과정의 토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각 노동자는 오로지 하나의 부분 기능만을 수행하게 되고, 그의 노동력은 이 부분 기능의 평생의 기관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둘째, 이 분업(分業)은 하나의 특수한 종류의 협업(協業)이며, 그것의 이점 중 많은 것은 협업 일반의 성질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협업의 이 특수한 형태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제2절 부분노동자와 그의 도구



    더욱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우선 명백한 것은, 일생 동안 하나의 동일한 단순작업을 수행하는 노동자는 자기의 신체를 그 작업을 위한 자동적이고 일면화된 도구(道具)로 전환시킨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작업을 하는 데 있어 그는 작업 전체를 순차적으로 수행하는 수공인(手工人: artisan)보다 적은 시간을 소비한다. 매뉴팩쳐의 살아 있는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있는 집단적 노동자는 순전히 이와 같이 일면적으로 전문화된 부분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독립적 수공업에 비해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이 생산된다. 다시 말해, 노동생산성이 제고된다.(주석 2: “다양한 작업과정들이 분할되어 서로 다른 노동자들에게 할당되면 될수록, 동일한 작업이 그만큼 더 적은 시간과 노동으로도 더 훌륭하고 빠르게 수행된다"(?영국에 대한 동인도 무역의 이익?, 런던, 1720년, p. 71).) 더욱이 이 부분노동이 한 사람의 전문 기능으로 확립되면 부분노동의 방법도 개선된다. 동일한 단순작업을 계속 반복하고 그 작업에 주의를 집중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힘을 가장 적게 들여 일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를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그런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세대들이 어떤 일정한 상품의 매뉴팩쳐 안에서 함께 일하기 때문에, 이렇게 체득한 기술과 작업요령은 확립되고 축적되며 또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주석 3: "노동이 쉬워지는 것은 이어져 내려 온 기능 때문이다"(호지스킨[T. Hodgskin],?대중경제학?, 런던, 1827년, p. 48).)
    매뉴팩쳐는 [이미 사회에 존재하던] 직업의 자연발생적 분화를 작업장 안에서 재생산하고 또 그것을 체계적으로 끝까지 추천함으로서 부분노동자들의 숙련(熟練)을 생산해 낸다. 다른 한편으로매뉴팩쳐가 부분노동을 한 사람의 평생의 직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은[이전의 사회들에서 볼 수 있는] 직업의 세습화(世襲化) 경향에 상응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직업이 카스트{인도의 세습적 신분}로 화석화되었거나, 또는 [일정한 역사적 조건이 개인에게 카스트제도와 양립할 수 없는 변화를 낳는 경우] 직업이 길드로 굳어버렸다. 카스트나 길드는 [동식물의 종(種)이나 아종(亞種)으로의 분화를 규제하는 것과 동일한] 자연법칙의 작용으로부터 발생하지만, 그 차이점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카스트의 세습성(世襲性)과 길드의 배타성(排他性)은 사회의 법칙으로 확립된다는 점이다.(주석 4: "기술도 이집트에서는....상당한 정도 발달했다. 왜냐하면, 이집트는 수공업자가 다른 시민계급들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고, [법률에 의해 세습화된] 자기의 직업에만 종사해야 하는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는 산업종사자들이 주의를 너무나 많은 대상으로 분산시키는 것을 본다. 그들은 어떤 때는 경작을 하고, 어떤 때는 상업에 종사하며, 어떤 때는 동시에 두 세 가지 일에 관계하기도 한다.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그들은 흔히 대중집 회에 참석한다....이와는 반대로, 이집트에서는 수공업자가 국가의 일에 개입하거나 한꺼번에 몇 가지 일에 종사하면 엄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그들이 자기의 직업에 열중하는 것 을 방해할 수가 없다. 더욱이 그들은 선조로부터 수많은 직업상의 비법(秘法)들을 전승받고 있 으며 또 새로운 개선점들을 발견해 내려고 열심히 노력한다"(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os Siculus], ?역사문고?, 제1부, 제74장).)

    "다카에서 생산되는 모슬린 {얇고 부드러운 모직물}은 그 섬세한 점에서, 또 코로만델에서 생 산되는 캘리코{옥양목}와 기타의 직물은 그 색채가 화려하고 오래간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최고 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본도 기계도 분업도 없이 생산되며, 또 [유럽의 제조업에 그처럼 많은 편익을 제공하는] 수단들 중 어느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생산된다. 직포공은 단독의 개인으로 고객의 주문에 따라 제조하는데, 사용하는 기계라고는 몇 개의 나뭇가지나 막대기로 엉성하게 얽은 가장 단순한 구조의 직기(織機)이다. 그 직기에는 심지어 날실을 감아두는 장치조차 없으 며, 따라서 직기는 언제나 그 전체 길이대로 늘어놓아야 하고, 생산자의 오두막 안에는 놓을 수 도 없을 정도로 크다. 따라서 생산자는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일을 해야 되는데, 날씨가 변할 때 마다 일을 중단하게 된다. "(주석 5: 머리(Hugh Murray), 월슨(James Wilson) 등, “영령인도에 관한 역사적 개관”, 에딘버러, 1832년, 제2권, pp. 449-450. 인도의 직기는 직립식(直立式)이다. 즉, 날실(經絲)이 수직으로 뻗는다).

    대대로 축적되어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진해지는 독특한 기능이 이 인도인들에게 [거미와도 같은] 기교를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도 직포공의 작업은 대다수 매뉴팩쳐 노동자들의 작업에 비해 대단히 복잡하다.
    하나의 완성품의 생산에서 여러 가지 부분과정을 혼자 차례차례 수행하는 수공인은 때로는 장소를 이동해야 하고 때로는 도구를 바꾸어야 한다. 어떤 하나의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옮기는 것은 그의 노동의 흐름을 중단시키며, 그의 노동일(勞動日)에 이를테면 틈을 만들어낸다. 그가 하루 종일 하나의 동일한 작업을 계속한다면 이러한 틈은 좁아질 것이며, 또 그의 작업 전환이 감소하는 것에 비례해 그 틈은 없어진다. 이 경우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 상승은 주어진 시간 안의 노동력 지출의 증대[즉, 노동강도의 강화]에 기인하든가, 또는 노동력의 비생산적 소비의 감소에 기인한다. 즉, 정지(停止,)에서 운동(運動)으로 이행할 때마다 필요했던 힘의 추가적 지출은 I한 번 도달한 표준속도의] 작업의 계속시간이 연장되는 것에 의해 대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
    로, 단조로운 노동의 연속은 노동자의 긴장감과 활기를 약화시키는데, 그것은 활동의 전환(轉換) 자체에 의해 조성되는 기분전환과 자극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노동생산성은 노동자의 숙련(熟練)뿐 아니라 그의 도구(道具)의 질에도 달려 있다. 칼. 천공기. 송곳. 망치 등의 도구들이 서로 다른 노동과정에서 사용되기도 하고, 또는 같은 도구들이 동일한 노동과정에서 서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노동과정의 서로 다른 작업들이 서로 분리되고 각각의 부분작업이 [부분노동자의 손에 맞는] 특색있는 형태를 취하게 되면, 이전에는 여러 가지 목적에 사용되던 도구들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도구의 이와 같은 형태변화의 방향은, 종래의 도구가 노동자에게 어떤 곤란을 주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매뉴팩쳐의 특징은 노동도구의 분화(分化)와 특수화(特殊化)인데, 노동도구의 분화에 의해 도구가 특수한 용도에 맞는 형태로 고정되며, 노동도구의 특수화에 의해 각각의 특수한 도구들은 특수한 부분노동자의 손에서만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버밍엄에서만도 약 500종에 달하는 망치들이 생산되고 있는데, 그 한 가지 한 가지가 모두 하나의 특수한 노동과정에만 사용될 뿐 아니라 가끔 여러 가지 망치들이 하나의 동일한 노동과정에서 상이한 작업들에 사용된다. 매뉴팩쳐시대는 노동도구를 각 부분노동자들의 전문적인 특수기능에 적합하게 만듦으로써 그것을 단순화하고 개량하며 다양하게 한다.(주석 6: 다윈은 그의 획기적인 저서 ?종(種)의 기원(起源)?에서 동식물의 자연적 기관(器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일한 기관이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 나의 특수한 목적에만 봉사해야 되는 경우에 비해 자연도태가 형태상의 작은 변이(變異)를 덜 세밀하게 보존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에, 그 기관은 변하기 쉽다 예컨대 여러 가지 종류의 물건을 베는 데 쓰이는 칼은 거의 온갖 형태를 가질 수 있으나, 어떤 한 가지 용도만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는 특수한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또한 이 시대는 [다수의 간단한 도구들의 결합으로 구성되는] 기계의 출현을 위한 물질적 조건의 하나를 창조한다.
    부분노동자(部分勞動者)와 그의 도구(道具)는 매뉴팩쳐의 가장 단순한 요소들이다. 이제 우리는 매뉴팩쳐의 전체 모습을 보도록 하자.



    제 3 절 매뉴팩쳐의 두 가지 기본형태
    이질적 매뉴팩쳐와 유기적 메뉴팩쳐



    매뉴팩쳐의 편제(編制)에는 두 가지 기본형태가 있는데, 이들은 때로는 서로 뒤섞여 있는 경우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 종류이며, 더욱이 매뉴팩쳐가 기계에 의한 근대적 공업으로 전환될때 전혀 상이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매뉴팩쳐의 두 형태는 생산되는 제품의 성질-즉, 그 제품이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부품들의 단순한 기계적 조립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또는 그 완성형태가 상호 관련된 일련의 과정과 조작에 의해 주어지는가-로부터 발생한다.
    예컨대 한 대의 기관차는 5,000개 이상의 독립적인 부품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것은 대공업의 생산물이므로 진정한 매뉴팩쳐의 첫번째 종류의 실례로 들 수는 없다. 그러나 시계(時計)라면 그 실례로 적합하다. 월리엄 페티도 일찍이 매뉴팩쳐적 분업을 설명하기 위해 시계를 예로 들었다. [옛날에는 뉴렘베르크의 한 수공업자의 개인적 생산물이었던1]시계는 다음과 같은 무수한 부분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물로 전환되었다. 즉, 큰 태엽 제조공, 지침반 제조공, 나선형 용수철 제조공,
    보석 박을 구멍을 뚫는 사람, 루비로 된 레버 제조공, 시계바늘 제조공. 시계케이스 제조공, 나사못 제조공, 도금공. 그리고 이들에 부속되어 있는 많은 세부구분이 있다. 예컨대 톱니바퀴 제조공(놋쇠 톱니바퀴와 강철 톱니바퀴는 각각 별도로 만들어진다), 시계핀 제조공, 시계추 제조공, 연동장치 완성공(톱니바퀴를 축에 고정시키고 자른 면을 간다), 추축제조공, 조립공(각종 톱니바퀴와 나사들을 제자리에 맞추어 놓는다), 끈, 태엽바퀴 완성공(바퀴에 톱니를 만들고 적당한 크기의 구멍을 뚫는다), 지동기(止動機: escapement) 제조공, 실린더 지동기인 경우에는 실린더 제조공, 지동륜(止動輪) 제조공, 평형륜 제조공, 완급침(시계의 진행속도를 조절하는 장치) 제조공, 지동기 설치공(진정한 지동기 제조공), 다음에는 태엽통 완성공, 강철 연마공, 톱니바퀴 연마공, 나사못 연마공, 문자 기입공, 에나멜공(구리에 에나멜칠을 한다), 용두(龍頭) 제조공(시계 케이스의 용두고리만을 만든다), 접철(接鐵) 완성공(시계 케이스의 접철에 놋쇠 축을 꼽는다), 뚜껑 스프링 장치공(뚜껑이 열리게하는 스프링을 시계 케이스에 붙인다), 조각공, 시계케이스 연마공 등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계 전체를 최종적으로 조립해 시계가 돌아가도록 하는 완성공(完成工). 시계의 부품 중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으며, 이 모든 분산된 부품들은 [그것들을 하나의 기계적 전체로 결합시키는] 한 사람의 손으로 집합된다. 완성된 생산물과 그 다종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의 이와 같은 외적인 관계는, 시계 생산의 경우 [이와 유사한 다른 제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부분노동자들이 동일한 작업장 안에 함께 모이는 것을 우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세분화된 작업들은 스위스의 보(Vaud)주와 누샤텔(Neuchatel)주에서처럼 개별적인 독립적 수공업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 제네바에는 대규모의 시계 매뉴팩쳐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한 자본가의 지휘 하에 부분노동자들이 직접적으로 협업(協業)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도 지침반, 태엽 및 케이스는 매뉴팩처 자체에서 만들지 않는다. 시계공업의 경우 노동자들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매뉴팩쳐적 제작방식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유리하다. 왜냐하면, 자기 집에서 일하고자 하는 노동자들 사이에 경쟁이 매우 치열하고{따라서 그들이 만드는 부품의 가격을 인하할 수 있고}, 수많은 이질적 과정으로의 작업의 분할은 노동도구의 공동이용을 허용하는 일이 거의 없으며, 또 자본가는 작업을 분산시킴으로써 작업용 건물 등에 대 비용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주석 7: 1854년 제네바는 8만 개의 시계를 생산했으나, 이것은 누샤텔주의 시계생산의 1/5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나의 거대한 시계 매뉴팩쳐라고 볼 수 있는 쇼-드-폰이 매년 제네바의 2배의 시계를 생산하고 있다. 1850년부터 1861년까지 제네바는 72만 개의 시계를 생산했다. “상공업 등에 관한 영국 공사관 서기관 보고서?, 제6호, 1863년 중의 '시계업에 관한 제네바로부터의 보고'를 보라. 부품들을 조립해 만들어 내는 제품의 생산이 여러 과정들로 분할되어 있으면서도 그 과정들 사이에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매뉴팩쳐를 기계제 대공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어렵게 한다. 그런데 시계의 경우에는 이밖에도 두개의 다른 장애가 첨가된다. 즉, 시계의 부품들이 아주 작고 섬세하다는 것, 그리고 또 시계는 사치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종류가 매우 다양해, 예컨대 런던의 최고급 시계제조소에서는 1년 내내 같은 모양의 시계가 12개도 제조되지 않는다. 기계의 사용에 성공하고 있는 바세른 앤드 콘스탄틴 시계공장은 크기와 형태에서 기껏해야 3-4종의 시계를 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비록 자기 집에서 일한다 하더라도 자본가(제조업자, 기업가)를 위해 노동하는 이 부분노동자들의 지위는 자기 자신의 고객을 위해 노동하는 독립수공업자의 지위와는 전혀 다르다. (주석 8: [이질적 매뉴팩쳐의 전형적인 예인] 시계제조업에서, 우리는 [수공업적 작업의 분할로부터 발생하는] 노동도구의 분화(分化)와 특수화(特殊化)를 매우 정확하게 연구할 수 있다.)
    매뉴팩처의 두번째 종류[즉, 그것의 완성형태]는 서로 연관된 전후 단계들을 통과하는 [즉, 일련의 과정들을 한 단계씩 차례차례 통과하는] 제품을 생산한다. 예컨대 바늘 매뉴팩쳐에서 철사는 72명, 때로는 심지어 92명의 특수한 부분노동자의 손을 통과한다.
    이러한 매뉴팩쳐가 원래는 분산되어 있던 수공업들을 결합시키는 한, 그것은 [여러 생산단계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있던] 공간적 거리를 단축시킨다. 그와 동시에 제품이 한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로 이동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단축되며, 이 이동을 매개하는 노동도 절약된다.(주석 9: "사람들이 그와 같이 밀집해 일하는 곳에서는 운반은 더 적어질 수밖에 없다"(?영국에 대한 동인도 무역의 이익?, p. 106).) 그리하여 수공업에 비해 노동생산성이 증대되는데, 이러한 증대는 매뉴팩쳐의 일반적인 협업적(協業的) 성격에서 생긴다. 다른 한편으로, 매뉴팩쳐의 특유한 원칙인 분업(分業)은 상이한 생산단계들의 고립화와 상호독립화를 요구한다. 고립화된 기능들 사이의 관련을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으로, 한 과정으로부터 다른 과정으로 제품이 끊임없이 운반될 필요가 있다. 대공업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하나의 특징적이고 비용이 드는, 그리고 또 매뉴팩쳐의 원칙에 내재하는, 약점이다.(주석 10: "손노동을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 매뉴팩쳐의 서로 다른 생산단계들의 고립화는 생산비를 매우 높이는데, 이 손실은 주로 한 과정으로부터 다른 과정으로의 운반 때문에 생긴다"(?국민의 산업?, 런던, 1855년, 제2부, p. 200).)
    어떤 일정한 양의 원료[예컨대 제지 매뉴팩쳐의 넝마나 바늘 매뉴팩쳐의 철사]에 우리의 관심을 국한시키면, 그것은 [최종적 형태로 완성될 때까지] 다양한 부분노동자들의 손을 거쳐 일련의 생산단계를 차례차례로 통과한다. 이와는 반대로 작업장 전체를 보면, 원료는 생산의 모든 단계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많은 부분노동자들의 결합으로 구성되고 있는] 집단적 노동자는 어떤 한 종류의 도구로 무장한 하나의 손으로 철사를 뽑고, 동시에 다른 종류의 도구로 무장한 다른 손으로 이 철사를 곧게 펴고, 또 다른 손으로 그것을 끊으며, 또 다른 손으로 그 끝을 뾰족하게 하는 등의 일을 한다. 이전에는 시간상 차례차례로 수행한 서로 다른 부분과정들이 이제는 공간상 병행해서 동시에 수행된다. 그러므로 동일한 기간에 더 많은 완성품이 생산된다.(주석 11: "그것"(분업)"은 한 가지 일을 서로 다른 부분작업으로 분할해 그 부분작업이 모두 동시적으로 수행될 수 있게 함으로써 시간을 절약한다....개인의 경우에는 하나씩 수행해야만 했을 상이한 노동과정 전체를 한꺼번에 수행함으로써, 혼자서 한다면 겨우 단 한 개의 핀을 절단하거나 그끝을 뾰족하게 만들 수 있었을 뿐인 시간에 수많은 완성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듀갈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 ?정치경제학강의“, 해밀턴[W. Hamilton] 편, ?저작집?. 에딘버러, 제8권, 1855년, p. 319).) 이 동시성(同時性)이 총과정의 일반적 협업형태로부터 생긴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매뉴팩쳐는 협업의 기존의 조건들을 이용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수공업적 노동을 다시 세분화함으로써 협업의 조건들을 창조해 내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매뉴팩쳐는 각각의 노동자들을 단 한가지의 세부작업에 결박해 둠으로써만 노동과정의 사회적 조직을 이룩한다.
    각각의 부분노동자의 부분생산물은 동시에 하나의 동일한 완성품의 하나의 특정의 진행단계에 지나지 않으므로, 각각의 노동자[또는 노동자집단]는 다른 노동자[또는 노동자집단]에게 원료를 공급하는 것이다. 한 노동자의 노동의 결과는 다른 노동자의 노동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하여 한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에게 직접 일거리를 주고 있다. 각 부분과정에서 원하는 효과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은 경험에 의해 확정되며, 그리하여 매뉴팩쳐의 메커니즘 전체는 일정한 노동시간 안에 일정한 결과가 달성될 것이라는 전제에 의거하고 있다. 오직 이 전제 하에서만 상호보완적인 각종 노동과정은 동시에 병행해 중단없이 수행될 수 있다. 개별 작업들 [그리고 개별 노동자들] 사이의 직접적 상호의존성이 각각의 노동자로 하여금 자기의 작업에 필요시간만을 지출하도록 강요하며, 그 결과 [독립적 수공업에서나 단순협업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노동의 연속성. 일률성. 규칙성. 질서(주석 12: “매뉴팩쳐에서 일하는 수공인(手工人)들의 종류가 다양하면 할수록....각각의 작업의 질서와 규칙성은 그만큼 더 증대하며, 동일한 작업이 더 적은 시간에 수행되고 노동은 더 적게 든다"(?영국에 대한 동인도 무역의 이익?, 런던, 1720년, p. 68).) 그리고 특히 노동의 강도(强度)가 생긴다. 어떤 한 상품의 생산에 지출되는 노동시간은 그것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은 상품생산 일반에서는 경쟁의 외적 강제로 나타나며, 이 법칙을 피상적으로 표현한다면, 개별 생산자는 누구든지 자기의 상품을 시장가격으로 판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매뉴팩쳐에서는 일정한 노동시간에 일정한 양의 생산물을 생산한다는 것이 생산과정 그 자체의 기술적 법칙(技術的 法則)으로 된다.(주석 13: 그러나 많은 산업부문에서 매뉴팩쳐제도는, 생산과정의 일반적인 화학적. 물리적 조건들을 정확히 통제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를 매우 불완전하게만 달성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작업에 드는 시간은 서로 같지 않으며, 따라서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양의 부분생산물이 생산된다. 그러므로 같은 노동자가 날마다 같은 작업을 해야 한다면, 각각의 작업에는 상이한 수의 노동자가 고용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떤 활자 매뉴팩쳐에서 주자공(鑄字工: founder)에 한 사람은 한 시간에 활자(活字) 2,000개를 주조하고, 절단공(切斷工) 한 사람은 4,000개를 끊고, 연마공(硏磨工) 한 사람은 8,000개를 연마한다면, 이 매뉴팩쳐에서는 연마공 I명에 대해 주자공 4명과 절단공 2명이 고용되어야 한다. 여기서 또다시 동일한 종류의 작업을 하는 않은 사람의 동시취업(同時就業)이라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협업원칙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이제 하나의 유기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뉴팩쳐제도하의 분업은 사회의 집단적 노동자의 질적으로 상이한 부분들을 단순화시키고 증가시킬 뿐 아니라, 이 부분들의 양적 규모를 규정하는 고정된 수학적 비율[즉, 각각의 전문 기능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의 상대적인 수 또는 노동자그룹의 상대적 크기]도 만들어 낸다. 매뉴팩쳐적 분업은 사회적 노동과정의 질적 편성과 더불어 그 과정의 양적 규칙 및 비례성(比例性)까지도 발전시킨다.
    일정한 생산규모에서 각 집단간 부분노동자 수의 가장 적합한 비율이 경험적으로 일단 확정되면, 생산규모는 오직 각 개별집단 노동자수의 배수(倍數)를 고용함으로써만 확대될 수 있다.(주석 14: "(각 매뉴팩쳐 생산물의 특수한 성질에 따라) 가장 유리하게 분할할 수 있는 작업 과정의 수 와 각 작업과정에 필요한 노동자의 수가 알려진다면, 이 숫자의 정확한 배수를 고용하지 않는 매뉴팩쳐는 제품의 생산에 많은 비용을 들이게 될 것이다....이것은 매뉴팩쳐들이 대규모로 확 대되는 원인들 중의 하나이다"(배비지[C. Babbage], ?기계의 경제에 대해?, 런던, 1832년, 제 21장, pp. 172 -173).) 여기서 덧붙여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어떤 종류의 작업은 그 규모가 크든 작든 동일한 개인에 의해 마찬가지로 잘 수행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감독(監督)이라는 노동이나 부분생산물을 한 생산단계에서 다른 생산단계로 운반(運搬)하는 노동 등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능을 분리시켜 특정한 노동자에게 할당하는 것은 사용노동자의 수가 증가할 때에만 비로소 유리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증가는 각각의 노동자집단에게 비례적으로 영향을 미쳐야만 한다.
    [어떤 특정한 전문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각각의 노동자집단은 동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메커니즘의 하나의 특수 기관(器官)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많은 매뉴팩쳐에서는 노동자집단 자체는 하나의 편성된 노동조직이고 전체 메커니즘은 이러한 기본적 생산 유기체의 중복 또는 배가(倍加)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한 예로 유리병 매뉴팩쳐를 보자. 그것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그 첫째는 준비단계로, 유리의 구성요소들을 준비하고, 모래와 석회 등을 혼합하고, 이 혼합물을 유동상태의 유리액으로 용해(溶解)한다.(주석 15: 영국에서는 용해로가 유리의 가공에 사용되는 유리로(glass furnace))와 상이하나, 벨기에에서는 동일한 하나의 노(爐: furnace)가 두 과정 모두에 사용되고 있다.) 이 첫째 단계에서 각종 부분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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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론15
    잉여가치율의 증대에 의해 보상하는 것의 절대적 한계, 또는 착취되는 노동자 수의 감소를 노동력의 착취도의 제고에 의해 보상하는 것의 절대적 한계를 이루고 있다. 이 자명한 제2법칙(第二法則)은 이후에 전개되는 자본의 경향, 즉 고용하는 노동자의 수[즉,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가변적 자본부분]를 가능한 한 축소시키려는 자본의 경향-이것은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량을 생산하려는 자본의 또 다른 경향과 모순된다-으로부터 발생하는 수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중요하다. 다른 한편, 만약 고용되는 노동력의 양[즉, 가변자본의 크기]이 잉여가치율이 감소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증대하지 못한다면,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은 감소할 것이다.
    제3법칙(第三法則)은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이 잉여가치율과 투하 가변자본량이라는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만약 잉여가율[노동력의 착취도]과 노동력의 가치(필요노동시간)가 주어져 있다면, 가변자본이 크면 클수록 생산되는 가치량과 잉여가치량도 더 커진다는 것은 자명하다. 만약 노동일의 한계가 주어져 있고 또 필요노동부분의 한계도 주어져 있다면, 개별 자본가가 생산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양은 전적으로 그가 움직이는 노동량(勞動量)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노동량은 앞의 가정 하에서는 그가 착취하는 노동력의 양 또는 노동자의 수에 의해 결정되고, 이 수는 또한 그가 투하하는 가변자본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잉여가치율이 주어져 있고 또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는 경우,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은 투하가변자본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자본가는 자기의 자본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한 부분을 그는 생산수단(生産手段)에 지출한다. 이것은 그의 자본의 불변부분이다. 다른 부분을 그는 살아 있는 노동력(勞動力)에 지출한다. 이 부분은 그의 가변자본을 형성한다. 동일한 생산방식(生産方式) 하에서도 생산부문(生産部門)이 다르면 불변부분과 가변부분으로
    의 자본의 분할도 달라지며, 통일한 생산부문에서도 생산과정의 기술적 토대와 사회적 결합이 달라짐에 따라 그것은 달라진다. 그러나 주어진 자본의 불변부분과 가변부분 사이의 비율이 어떻든 [즉, 1 : 2이든 1 : 10이든 1 : x이든] 바로 앞에서 정립한 법칙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의 분석에 의하면, 불변자본의 가치는 비록 생산물의 가치 속에 재현(再現)되기는 하지만 새로 생산되는 가치[즉, 새로 창조되는 가치생산물(價値生産物)] 속에는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1,000멍의 방적공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물론 100명의 방적공을 고용할 때보다 더 많은 원료. 방추 등이 요구되지만, 이 추가적인 생산수단의 가치는 [등귀할 수도 하락할 수도 불변일 수도, 또 클 수도 작을 수도 있지만] 생산수단을 가동시키는 노동력에 의해 수행되는 가치증식과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서 확인된 법칙{제3법칙}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즉, 상이한 자본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양은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고 노동력의 착취도가 같은 경우] 이들 자본의 가변부분의 크기[즉, 살아 있는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이 법칙은 현상(現象)의 외관에 의거한 모는 경험 {평균이윤율(平均利潤率)의 형성}과는 분명히 모순된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사용되는 총자본에 대한 백분율을 고찰하면, [많은 불변자본과 적은 가변자론을 사용하는] 방적업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가변자본과 적은 불변자본을 사용하는] 빵제조업자보다 더 적은 이윤[잉여가치]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 외견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매개항(媒介項)이 필요한데, 그것은 마치 0/0이 현실적인 크기를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등 대수학(代數學)의 입장에서는 많은 매개항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고전파 경제학은 비록 이 법칙 {제3법칙}을 정식화하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이 법칙을 고수했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가치법칙의 필연적인 귀결이기 때문이다. 고전파 경제학은 무리한 추상(抽象)에 의해 이 법칙을 현상의 모순으로부터 구해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리카도학파가 어떻게 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가는 나중에(주석 2: 이에 대해서는 제4권 {“잉여가치학설사”제20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보게 될 것이다. '사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속류경제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현상을 규제하고 설명하는 법칙(法則)을 무시하고, 그와는 반대로 현상(現象)의 외관에 매달리고 있다. 스피노자와는 반대로, 속류경제학은 "무지(無知)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신(神) 이외에는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신이 그 현상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스피노자는 "무지는 결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한 사회의 총자본이 매일 움직이는 노동은 하나의 단일노동일(單一勞動日)로 간주할 수 있다. 만약 예컨대 노동자의 수가 100만이고 한 노동자의 평균노동일이 10시간이라면, 사회적 노동일은 1,000만 시간으로 된다. 한 노동자의 평균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는 경우-그 한계가 육체적 조건에 의해 설정되건 사회적 조건에 의해 설정되건-잉여가치량은 오직 노동[즉, 노동인구]의 증가에 의해서만 증가할 수 있다. 이 경우 인구의 증가는 사회적 총자본에 의한 잉여가치생산의 수학적 한계로 된다. 반대로 인구의 크기가 주어져 있는 경우, 이 한계는 노동일 연장의 가능성에 의해 규정된다.(주석 3: "사회의 노동[즉, 경제적 시간]은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인구 100만이 하루에 각각 10시간씩 노동하면 합계 1,000만 시간으로 되는 것과 같다. 자본의 증식에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는 [어떤 주어진 시기에도] 사용되는 경제적 시간(時間)의 현실적 범위 안에 있다.(“국민의 정치 경제학에 관한 연구”, 런던, 1821년, pp. 47, 49).) 다음 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법칙은 오직 지금까지 고찰한 형태의 잉여가치 {절대적(絶對的) 잉여가치}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잉여가치의 생산에 관한 이때까지의 고찰로부터 명백하게 되는 것처럼, 어떤 임의의 화폐액 또는 가치액이 모두 자본으로 전환될 수는 없고, 일정한 '최소한도'의 화폐 또는 교환가치가 개별적인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 가변자본의 최소한도는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1년 내내 고용하는 1노동력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금액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노동자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는 자기의 생활수단의 재생산에 필
    요한 노동시간(이를테면 하루에 8시간)만 노동하면 충분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필요로 하는 생산수단도 역시 8노동시간분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 노동자로 하여금 이 8시간 이외에 이를테면 4시간의 잉여노동을 하게 하는] 자본가는 추가적 생산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추가적 화폐액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 하에서는, 자본가가 매일 취득하는 잉여가치로 노동자와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다시 말해 자기의 필수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기 위해서도, 벌써 두 사람의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 한 사람이 4시간의 잉여노동을 제공하기 문에, 노동자 두 사람은 8시간의 잉여노동을 제공하며, 따라서 8시간의 노동은 노동자의 필요노동과 동일하다.} 이 경우 그의 생산의 목적은 단순한 생활의 유지이고 부의 증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부(富)의 증가를 전제하고 있다. 그가 보통의 노동자보다 겨
    우 2배 낮게 생활하며, 또 생산된 잉여가치의 절반을 자본으로 재전환시키기 위해서는, 그는 노동자의 수와 투하자본의 최소한도를 8배로 증가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32시간의 잉여노동을 획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몸소 자기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직접 생산과정에 참가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는 경우 그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혼혈아, 즉 '소경영주(小經營主)'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자본가는 자본가로서 [즉, 인격화된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시간 전체를 타인노동의 취득과 관리, 그리고 노동생산물의 판매에 바쳐야 한다.(주석 4: "차지농업가는 자기 자신의 노동에 의지할 수 없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손해를 볼 것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이다. 그는 탈곡하는 사람을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탈곡되지 않은 곡물 때문에 임금이 그의 손실로 될 것이다. 또 그는 풀을 베는 사람, 수확하는 사람 등을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항상 자기의 농장 구내를 순회해야 하며, 태만이 생기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만약 그가 어떤 한 장소에 매달려 있으면, 태만이 생길 것이다"(?식량의 현재가격과 농장규모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 한 농장주?아버노스트“, 런던, 1773년, p. 12). 이 책은 대단히 흥미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본가적 차지농업가' 또는 '상인적 차지농업가'의 발생사를 연구할 수 있고, [생계유지를 주로 하는] '소농장주'에 대비한 그들의 자기 찬양을 들을 수 있다. "자본가계급은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완전히 육체노동의 필요성으로부터 해방된다"(리처드 존스[Richard Jonse], ?국 민경제학교과서?, 허트포드, 1852년, 제3강의, p. 39).) 중세의 길드제도는 개별 장인{마스터}이 고용할 수 있는 노동자 수의 최대한도를 매우 적은 수로 제한함으로써 수공업적 장인이 자본가로 전환되는 것을 강제로 저지하려 했다.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는 [생산을 위해 투하하는 최소금액이 중세의 최대한도를 훨씬 초과하게 될 때]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본가로 전환된다. 여기에서도 자연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헤겔이 자기의 ?논리학?에서 발견한 법칙, 즉 단순한 양적(量的) 차이가 일정한 점에 도달하면 질적(質的) 차이로 이행한다는 법칙의 정당성이 증명되고 있다.(주석 5: 로랑(Laurent)과 제라르(Gerhardt)에 의해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전개된 대화학의 분자설(分子 設)은 바로 이 법칙에 입각하고 있다 {엥겔스: 화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어렴풋 한 이 주(注)의 설명을 위해 다음의 것을 지적해 둔다. 마르크스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1843 년에 C. 제라르가 처음으로 명명한 탄소화합물의 '동족열(同族列)'에 관한 것인데, 각 계열은 각각 특유의 대수적(代數的) 구조식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파라핀 계열은 CnH2n+2이고, 표준 적인 알코올의 계열은 CnH2n+O이고, 표준적인 지방산의 계열은 CnH2nO2등등. 이들 예에서는 분자식에 CH2를 단순히 양적으로 추가하면 그때마다 질적으로 상이한 물체가 형성된다. 이 중 요한 사실의 확정에서(마르크스의 과대한 평가를 받은) 롤랑과 제라르의 기여에 관해서는 코프 (Kopp)의 ?화학의 발달?(윈헨, 1873년, pp. 708, 716)과 숄렘머(Schorlemmcr)의 ?유기화학의 성립과 발달?(런던, 1879년, p. 54)를 참조하라.})
    개별적인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가 자본가로 전환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가치액의 최소한도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단계 에 따라 달라지며. 또 주어진 발전단계에서도 생산분야가 다르면 각 분야의 특수한 기술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생산분야들은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의 초기에 각 개인의 수중에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의 최소한도의 자본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 때문에, 한편으로는 콜베르(Colbert)시대의 프랑스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독일주들처럼 국가가 개인들에게 보조금을 주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한 공업부문과 상업부문의 경영에 법률상의 독점권(獨占權)을 갖는 회사(주석 6: 이런 종류의 회사를 루터(Martin Luther)는 '독점회사'라고 부른다.) -근대적 주식회사의 선구자-가 설립되었다.
    우리는 생산과정의 진행 중에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상세한 내용들은 더 이상 취급하지 않겠으며, 따라서 자본 그 자체의 특성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몇 가지 요점만을 강조해 둔다.
    생산과정의 내부에서 자본은 노동[즉, 활동중에 있는 노동력 또는 노동자 그 자체]을 지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인격화된 자본인 자본가는 노동자가 자기의 일을 규칙적으로 또 상당한 강도를 가지고 수행하도록 감시한다.
    더 나아가, 자본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의 좁은 범위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게끔 하는] 강제적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들고, 잉여노동을 짜내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은 그 정력과 탐욕과 능률의 면에서 [직접적인 강제노동에 입각한] 종전의 모든 생산제도를 능가한다.
    자본은 우선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기술적 조건을 그대로 이용해 노동을 자기에게 예속시킨다. 따라서 자본은 즉시로 생산방식을 변경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때까지 고찰해 온 형태의 잉여가치의 생산[즉, 노동일의 단순한 연장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은 생산방식 그 자체의 어떤 변화와도 관계없이 나타났다. 이러한 잉여가치의 생산은 구식 빵제조업에서나 근대적 면공장에서나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생산과정을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노동자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을 자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합목적적인 생산활동의 단순한 수단 및 재료(材料)로 대한다. 예컨대 가죽공장에서 그는 가죽을 단순히 자기의 노동대상(勞動對象)으로 취급한다. 그가 무두질하는 것은 자본가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산과정을 가치증식과정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사정은 달라진다. 생산수단은 즉시 타인의 노동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한다.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한다.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자기의 생산활동의 소재적 요소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자기 자신의 생활과정에 필요한 효모(酵母: ferment)로 소비하는데, 자본의 생활과정은 자기증식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야간에 가동이 중단되어 살아 있는 노동을 조금도 흡수하지 못하는 용광로와 작업장은 자본가로 보아서는 '순전한 손실'이다. 그러므로 용광로와 작업장은 노동력의 '야간노동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화폐가 생산과정의 객체적 요소[즉, 생산수단]로 전환되자마자, 생산수단은 당연한 권리와 힘에 의해 타인의 노동과 잉여노동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죽은 노동과 살아 있는 노동 [즉, 가치와 가치창조력] 사이의 이와 같은 전도(inversion) 또는 왜곡(distortion)-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특유한 특징이다-이 어떻게 자본가들의 의식에 반영되고 있는가를 하나의 실례에 의해 마지막으로 보이려고 한다. 영국의 공장주들이 반란을 일으킨 1848-50년에 ‘서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역사가 길고 가장 명성있는 회사의 하나인 칼라일 부자회사[1752년 이래 1세기 동안 존속하고 있으며, 동일한 가족에 의해 4대째 경영되고 있는 페이즐리(Paisley)의 아마 및 면화 방적공장의 사장'인 매우 유식한 신사가 1849년 4월 25일자 ?글래스고우 데일리 매일?지에 '릴레이 제도'라는 제명의 한 편지를 기고했는데(주석 7: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9년 4월 30일?, p. 59.), 거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제 노동시간을 12시간에서 10시간으로 단축하는 데서 생기는 해악을 살펴보기로 히자....그 것은 공장주의 기대와 재산에 대한 가장 중대한 손상이라는 점으로 귀착된다. 만약 그가" (즉 그의 '직공들'이) "과거에는 12시간 작업했는데 앞으로는 10시간으로 제한된다면, 그의 공장에 있는 기계나 방추의 매 12개가 10개로 축소될 것이며, 또 만약 그가 자기의 공장을 판매할 생각 을 가진다 해도 그것은 10개로밖에 평가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전국의 모든 공장이 자기 가 치의 6분의 1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주석 8: 같은 보고서, p. 60. [그 자신 스코틀랜드인이고, 잉글랜드의 공장감독관들과는 달리 전적으로 자본가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공장감독관 스튜어트는 자기의 보고서에 수록한 이 편지가 "릴레이 제도를 쓴 것이고, 특히 이 제도에 대한 편견을 제거할 목적으로 쓴 매우 유용한 편지다" 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4세대의 자본가적 속성을 물려받은 이 서부 스코틀랜드인의 자본가적 두뇌에는, 방추 등의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수단이 자본으로서 가진 성질[즉, 자기 자신을 가치증식시키며 매일 타인의 무상노동의 일정량을 흡수한다는 생산수단의 자본속성]과 구별없이 서로 엉켜 있는데 이 때문에 칼라일 회사 사장은, 그가 만약 자기 공장을 판매한다면, 그는 방추의 가치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 위에 또 방추의 가치증식력에 대해서도 대가를 지불받을 것으로, 즉 방추에 들어 있는 노동[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대해서뿐 아니라 방추의 도움을 받아 매일 페이즐리의 용감한 서부 스코틀랜드인들로부터 짜내는 그 잉여노동에 대해서까지도 대가를 지불받을 것으로 망상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노동일을 2시간 단축하면 방적기계 12대의 판매가격이 10대의 판매가격으로 축소되어 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 4 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제 12 장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
    제 13 장 협업
    제 14 장 분업과 매뉴팩쳐
    제 15 장 기계와 대공업



    제 12 장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



    노동일 중 자본이 지불한 노동력 가치(勞動力 價値)의 등가물이 생산되는 부분을 우리는 이때까지 불변(不變)의 크기로 간주했는데, 실제로도 사회의 일정한 경제적 발전단계의 주어진 생산조건 하에서는 불변의 크기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노동자는 이러한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을 넘어 2시간, 3시간, 4시간, 6시간 등을 더 일할 수 있었다. 이 연장의 크기에 따라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과 노동일(勞動日)의 길이가 결정되었다. 필요노동시간은 불변이었지만, 1노동일 전체는 가변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노동일의 길이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의 분할이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자. 예컨대 선분 AC, 즉 A-B-C가 12시간 노동일을 표시하며, AB부분은 10시간의 필요노동(必要勞動)을, BC부분은 2시간의 잉여노동(剩餘勞動)을 표시한다고 하자. AC를 더 이상 연장하지 않고, 또는 AC의 더 이상의 연장과는 전혀 관계없이, 어떻게 잉여가치의 생산을 증대시킬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잉여노동을 연장시킬 수 있는??
    노동일 AC의 한계는 주어져 있지만, BC는 그 종점 C[그것은 동시에 노동일 AC의 종점이다]를 넘어 연장되지 않더라도 그 시발점 B를 반대방향인 A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연장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직선 A-B'- B-C에서 B'B는 BC의 절반[즉, 1노동시간]과 같다고 하자. 이제 만약 12시간 노동일 AC에서 점 B를 B'으로 이동시킨다면 BC는 B'C의 길이로 연장되어, 노동일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12시간이지만 잉여노동은 50%만큼 [즉,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잉여노동이 BC에서 B'C로 [즉,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연장되는 것은, 동시에 필요노동이 AB에서 AB'으로 [즉 10시간에서 9시간으로] 단축되지 않고서는 분명히 불가능하다. 잉여노동의 연장에 필요노동의 단축이 대응하고 있다. 즉, 노동자가 이때까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위해 쓰고 있던 노동시간의 일부가 자본가를 위해 지출되는 노동시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노동일의 길이가 아니라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의 노동일(勞動日)의 분할(分割)이다.
    다른 한편, 만약 노동일의 길이와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다면 분명히 잉여노동의 크기도 주어진다. 노동력의 가치[즉,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는 그 가치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규정한다. 만약 1노동시간이 0.5원의 금량으로 표현되며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5원이라면, 노동자는 자본이 노동력의 대가로 지불한 가치를 대체하기 위해 [다시 말해, 그가 매일 필요로 하는 생활수단의 가치의 등가물을 생산하기 위해] 하루에 10시간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활수
    단(生活手段)의 가치가 주어지면 노동력(勞梨力)의 가치가 주어지고(주석 1: 하루의 평균임금의 가치는 노동자가 '생활하고, 노동하며, 생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월리암 폐티[William Petty], “아일랜드의 정치적 해부?, 1672년, p. 64). "노동의 가격은 항상 생활수단의 가격으로 구성된다....노동자의 임금이 [다수의 노동자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가족을 노동자의 낮은 신분과 지위에 맞게 부양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 경우" 그는 적합한 임금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반더린트, ?화폐만능론?, p. 15). "자기의 팔과 근면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단순한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타인에게 판매할 수 있는 경우에만 무엇인가를 갖게 된다....어떤 종류의 노동에서도 노동자의 임금은 그가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에 국한된다는 사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튀르고, ?부의 형성과 분배의 고찰?, 데르 편, ?저작집?, 제1권. p. 10). ”생활필수품의 가격은 사실상 노동의 생산비다"(맬더스, ?지대의 성질과 성장 및 지대를 규제하는 원리에 관한 연구?, 런던, 1815년, p. 48. 주).)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지면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의 길이가 주어진다. 그런데 잉여노동(剩餘勞動)의 크기는 노동일 전체에서 필요노동시간을 뺀 것과 같다. 12시간에서 10시간을 빼면 2시간이 남는데, 주어진 조건 하에서 이 2시간 이상으로 잉여노동을 증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물론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5원 대신 4.5원을, 또는 이보다도 더 적은 금액을 지불할 수도 있다. 이 4.5원의 가치를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9노동시간이면 충분할 것이고, 따라서 이제는 12시간 노동일 중 2시간 대신 3시간이 잉여노동으로 될 것이며, 잉여가치도 1원에서 1.5원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는 오직 노동자의 임금을 그의 노력의 가치 이하로 인하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는 9시간에 생산하는 4.5원을 가지고는 이전보다 10분의 1만큼 적은 양의 생활수단을 얻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그의 노동력의 재생산은 위축된 형태로 행해질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잉여노동은 정상적 한계를 넘어섬으로써만 연장될 수 있으며, 잉여노동의 영역은 필요노동시간의 영역을 강탈함으로써만 확대될 수 있다. 잉여노동의 이와 같은 증대방법이 현실적으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에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상품이 자기의 완전한 가치대로 매매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제되고 있는 한, 노동력의 생산[또는 그 가치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임금(賃金)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하락하는 것에 의해서만 감소될 수 없고, 오직 노동력의 가치 그 자체가 하락하는 것에 의해서만 감소될 수 있다. 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는 경우, 잉여노동의 연장은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의 결과 생기는 것이며, 그 반대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이 잉여노동의 연장의 결과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예에서 필요노동시간이 1/10 만큼[즉, 10시간에서 9시간으로] 축소되고 따라서 잉여노동이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연장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가치가 현실적으로 1/10 만큼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노동력의 가치가 10분의 1만큼 하락한다는 것은, 이전에는 10시간에 생산되던 것과 동일한 양의 생활 수단이 이제는 9시간에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 productivity)의 향상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어떤 제화공이 주어진 생산수단으로 12시간 노동일에 한 켤레의 장화를 만들 수 있다고 하자. 그가 이와 동일한 시간에 두 켤레의 장화를 만들 수 있으려면 그의 노동생산성은 2배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노동수단
    이나 노동방법 또는 이 두 가지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노동의 생산조건[즉, 그의 생산방식], 따라서 또한 노동과정 그 자체에 혁명(革命)이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노동생산성의 상승이라는 말은 노동과정에 변화가 일어나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단축되며, 그리하여 주어진 양(量)의 노동(勞動)이 더 많은 양의 사용가치(使用價値)를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주석 2: "산업이 개량(改良)된다고 할 때, 그 것이 의미하는 것은 상품을 이 전보다 적은 노동자에 의해, 또는 (같은 말이지만) 이전보다 더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갈리아니, ?화페에 대해”, pp. 158, 159) "생산비의 절약은 생산에 사용되는 노동량의 절약일 수밖에 없다"(시스몽디, ?경제학연구?, 제1권 p. 22).) 지금까지 노동일의 연장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을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생산방식이 주어져 있고 불변인 것으로 전제했다. 그러나 필요노동이 잉여노동으로 전환됨으로써 잉여가치가 생산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자본이 역사적으로 전해 온 형태의 노동과정을 그대로 계승해 그 노동과정의 계속시간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노동생산성이 증가할 수 있으려면 먼저 노동과정의 기술적. 사회적 조건, 따라서 생산방식(生産方式) 그 자체가 변혁되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만 노동력의 가치는 저하할 수 있으며, 노동일 중 이 가치의 재생산에 필요한 부분도 단축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일의 연장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나는 절대적 잉여가치(絶對的 剩餘價値: absolute surplus-value)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이에 대응해 노동일의 두 부분들의 길이 변화로부터 생기는 잉여가치를 나는 상대적 잉여가치(相對的 剩餘價値: relative surplus-value)라고 부른다.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생산물[따라서 일상적 생활수단에 속하거나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생산물]이 생산되는 산업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이 상승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에 최종형태를 주는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될 뿐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수단들에 들어 있는 노동의 양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예컨대 장화의 가치는 제화공의 노동에 의해서 뿐 아니라 가죽. 왁스. 실 등의 가치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따라서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불변자본의 물질적 요소들[즉, 노동수단과 노동재료]을 공급하는 산업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의 증가와 그에 상응한 상품가격의 저하도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그러나 필요한 생활수단을 공급하지도 않으며 그것의 생산을 위한 생산수단을 공급하지도 않는 생산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노동력의 가치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상품이 값싸게 되는 경우, 그것은 [그 상품이 노동력의 재생산에 참여하는 비율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예컨대 속옷은 하나의 필요한 생활수단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생활필수품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상품이 값싸게 되는 경우, 그것은 속옷에 대한 노동자의 지출을 감소시킬 뿐이다. 생활필수품의 총량은 상이한 산업부문들의 생산물인 각양각색의 상품으로 구성되며, 그러한 상품들 하나하나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의 일부를 형성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감소함에 따라 저하하는데, 필요노동시간의 총감소량은 상술한 상이한 생산부문들 전체에서 일어난 노동시간 단축의 총계와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일반적 결과{노동력의 가치 저하}를 마치 각 개별 경우{자본}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직접적인 목적인 것처럼 취급한다. 그렇지만 개별 자본가가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 예컨대 속옷의 가치를 저하시킬 때, 그는 결코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켜 그만큼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목적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이 결과에 기여하는 한, 그는 일반적 잉여가치율의 제고에 기여하게 된다.(주석 3: "기계설비의 개량(改良)에 의해 공장주의 생산물이 2배로 증가한다면....공장주는 총생산물 중 더 적은 몫으로 노동자들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그의 이윤은 증가할 것이다. 그의 이윤은 다른 방법으로 변경될 수는 없지 않은가?“(람지[Ramsay], ?부(富)의 분배에 관한 연구?, pp. 168-169).) 자본의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경향(傾向)들은 그것들의 현상형태(現象形態)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內在的 法則: immanent laws)이 개별 자본들의 외적 운동(外的 運動)에 표현되어 경쟁이 강제하는 법칙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리하여 개별 자본가를 추진시키는 동기(動機)로서 그의 의식(意識)에 도달하는 방식을 여기에서 고찰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이 점만은 분명하다. 즉, 경쟁의 과학적 분석은 자본의 내적 본성이 파악된 뒤에라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천체(天體)의 외관상의 운동은 [감각적으로 직접 인식할 수 없는] 천체의 진정한 운동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이해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얻어진 결과들만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것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노동시간이 6원으로 표현된다면, 12시간의 1노동일에는 72원의 가치가 생산{창조}될 것이다. 현재의 지배적인 노동생산성으로 이 12노동시간에 12개의 상품이 생산된다고 가정하고, 이 상품 한 개에 소비되는 원료와 기타 생산수단의 가치가 6원라고 하자. 이와 같은 사정 하에서는 상품 1개의 가치는 12원이다. 즉, 6원은 생산수단의 가치고, 6원은 이러한 생산수단을 처리할 때 새로 첨가된{추가된} 가치다. 이제 어떤 자본가가 노동생산성을 2배로 하는 데 성공하여 그 결과 그는 12시간의 1노동일에 이 종류의 상품을 12개가 아니라 24개를 생산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만약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동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1개의 상품의 가치는 이제 9원으로 떨어질 것이다. 즉, 생산수단의 가치가 6원이고 노동에 의해 새로 첨가된 가치가 3원으로 될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2배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노동일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72원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다만 이 새로운 가치가 이제는 2배의 생산물(生産物)에 할당될 뿐이다. 따라서 1개의 생산물은 새로운 가치의 1/12 대신 1/24을 [즉, 5원 대신 3원을] 포함하게 된다. 또는, 결국 같은 말이지만, 생산수단이 각 생산물로 전환될 때, 이제는 상품 1개당 전과 같이 1노동시간이 아니라 1/2노동시간만이 생산수단에 첨가된다. 이 상품의 개별 가치(個別置値: individual value)는 이제 그 사회적 가치(社會的 價値: social value)보다 낮다. 즉, 이 상품에는 사회적 평균 조건 하에서 생산된 같은 종류의 대다수의 상품에 비해 적은 노동시간이 들어 있다. 1개의 상품은 평균적으로 12원이 소요되어 2시간의 사회적 노동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변경된 생산방식 하에서는 1개의 상품에는 9원만이 소요되고 1 1/2시간의 노동만이 들어 있다. 그러나 상품의 현실적 가치(現實的 價値)는 그 상품의 개별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社會約 價値)이다. 다시 말해, 상품의 현실적 가치는 각각의 개별적인 경우에 실제로 소요되는 노동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따라서 만약 새로운 방법을 채용하는 자본가가 자기의 상품을 12원이라는 사회적 가치로 판매한다면, 그는 그 상품을 개별 가치보다 3원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되며, 따라서 3원의 특별잉여가치(特別剩餘價値: extra surplus-value)를 실현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에게는 12시간 노동일이 이제는 종전의 12개가 아니라 24개의 상품으로 나타나므로, 1노동일분의 생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판로(販路)가 2배로, 즉 시장이 2배로 커져야 한다. 기타의 조건이 같다면, 그의 상품은 오직 가격인하(價格引下)를 통해서만 시장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상품을 그 개별 가치보다는 비싸게, 그러나 그 사회적 가치보다는 싸게, 예컨대 1개당 10원에 판매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그는 상품 1개당 1원의 특별잉여가치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잉여가치의 증대는 [그가 생산하는 상품이 노동력의 일반적 가치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는 생활필수품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자본가 자신이 가지게 된다. 따라서 각 개별 자본가들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상품가치를 저렴하게 하려는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잉여가치의 생산증대는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그에 대응하는 잉여노동의 연장에서 발생한다.(주석 4: “어떤 사람의 이윤(利潤)은 그가 타인의 노동생산물(勞動生産物)을 지배한다는 사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노동(勞動) 그 자체를 지배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만약 그가 [그의 노동자의 임금에는 변동이 없는데 자기의 제품을 더 비싸게 팔 수 있다면, 그가 이윤을 볼 것은 분명하다...그때에는 그가 생산하는 것 중 더 적은 부분으로도 이 노동을 고용하는데 충분할 것이며, 따라서 더 많은 부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게 된다“(캐즈노브[J. Cazenove], ?정치경제학개론?, 런던, 1832년, pp. 49, 50).) 필요노동시간이 10시간[즉,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60원]이고, 잉여노동이 2시간[따라서 매일 생산되는 잉여가치가 12원]이라고 하자. 우리의 자본가는 이제 24개의 상품을 생산해 그것을 1개당 10원에, 즉 합계 240원에 판매한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144원{6원 x 24개}이기 때문에 14 2/5개{=144원/10}의 상품은 투하된 불변자본의 가치를 대체한다.
    12시간 노동일의 노동은 나머지 9 3/5개 {24개- 14 2/5개}로 표현된다. 노동력의 가격이 60원이기
    때문에 필요노동시간은 6개의 생산물로 표현되고 잉여노동은 3 3/5개의 생산물로 표현된다.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비율은 사회적 평균조건 하에서는 5 : 1 {=10시간: 2시간}이었으나 이제는 5 : 3 {=6 : 3 3/5}으로 된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도 이와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12시간 노동일의 생산물의 가치는 240원{=10원 x 24개}이다. 그 중 144원은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되는 데 지나지 않는] 생산수단의 가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96원이 남는데, 이것은 1노동일 동안 새로 창조된 가치의 화폐적 표현이다. 이 화폐적 표현은 동일한 종류의 사회적 평균노동의 화폐적 표현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사회적 평균노동의 12시간은 다만 72원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노동은 강화된 노동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동일한 시간 안에 동일한 종류의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한다. 그러나 우리의 자본가는 노동력의 하루 가치에 대해 지금도 종전대로 60원만 지불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이제 이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종전의 10시간이 아니라 7 1/2 시간{96원 : 12시간=60원: 7.5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잉여노동은 2 1/2시간만큼 증가하며, 그가 생산하는 잉여가치는 12원에서 36원{=96-60}으로 증가한다. 그리하여 개선된 생산방식을 채용하는 자본가는 동일한 생산부문의 다른 자본가에 비해 1노동일 중 더 큰 부분을 잉여노동으로 취득한다. 그는 총체로서의 자본이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할 때 수행하는 일을 개별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새로운 생산방식이 일반화되고 그리하여 상품의 개별 가치와 사회적 가치 사이의 차이가 제거되자마자, 이 특별잉여가치는 소멸된다.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의 법칙은 새로운 생산방법을 채용하는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의 상품을 그 사회적 가치 이하로 판매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리고 또 바로 이 법칙이 경쟁(競爭)의 강제법칙(强制法則)으로 작용해 그의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산방법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주석 5: "만약 나의 이웃사람이 적은 노동으로 많이 생산함으로써 싸게 팔 수 있다면,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싸게 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더 적은 직공의 노동으로 [따라서 더 싸게] 생산하는 온갖 기술. 방법 ? 기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동일한 기술. 방법. 기계를 이용하거나, 그것들과 유사한 어떤 발명을 해야 할 일종의 필요성과 경쟁심을 야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에 처하게 되며, 누구도 자기의 이웃사람보다 더 싸게 팔 수 없게 된다"(?영국에 대한 동인도무역의 이익“, 런던, 1720년, p. 67).) 이러한 과정 전체를 거쳐 최후로 일반적 잉여가치율(一般的 剩餘價値率)이 영향을 받는 것은,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생활필수품의 생산에 기여하는] 산업부문에서 일어나서 [노동력의 가치를 구성하는] 상품들을 값싸게 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에 반비례한다. 노동력(勞動力)의 가치도 역시 노동생산성에 반비례한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가치는 상품의 가치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생산성에 정비례한다. 그것은 노동생산성의 증가에 따라 증가하며, 그 저하에 따라 저하한다. 화폐가치가 불변이라면 12시간이라는 사회적 평균노동일은 항상 72원이라는 동일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데, 그것은 이 가치총액이 임금과 잉여가치로 분할되는 비율 여하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만약 노동생산성이 증가한 결과 생활수단의 가치가 저하하고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가치가 60원에서 36원으로 떨어진다면, 잉여가치는 12원에서 36원으로 증가할 것이다. 노동력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이전에는 10노동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다만 6노동시간{72원 : 12시간=36: 6시간}이 필요하다. 4노동시간이 떨어져 나와(set free) 잉여노동의 영역에 편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상품을 값싸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 자체를 값싸게 하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려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며 끊임 없는 경향이다.(주석 6: "노동자의 생활비가 어떤 비율로 감소되든, 만약 그와 동시에 노동에 대한 규제들이 제거된다면, 그의 임금도 동일한 비율로 저하할 것이다"(?곡물수출 장려금의 폐지에 관한 고찰?, 런던, 1753년, p. 7). "산업의 이익은 곡물과 일체의 식료품이 가능한 한 싸게 되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비싸게 하는 모든 것은 노동을 역시 비싸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노동이 규제되지 않는 모든 나라에서는 식료품가격이 노동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의 가격은 필요한 생활수단이 싸게 될 때에는 언제나 싸게 된다"(같은 책, p. 3). "임금은 생산력이 증가하는 것과 동일한 비율로 감소한다. 기계가 생활수단을 싸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노동자도 싸게 한다" (?경쟁과 협동의 상대적 장점에 관한 현상논문?, 런던, 1834년, p. 27).)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가는 상품의 절대적 가치(絶對的 價値) 그 자체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자본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상품에 들어 있는 [그리고 판매에 의해 실현되는] 잉여가치(剩餘價値)뿐이다. 잉여가치의 실현은 투하한 가치의 대체(代替: replacement)를 반드시 수반한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반비례하지만,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정비례하여 증가한다. 바꾸어 말해, 하나의 동일한 과정 {노동생산성의 발전}이 상품을 싸게 만드는 동시에 상품에 들어 있는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기 때문에, 교환가치(交換價値)의 생산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본가가 왜 상품의 교환가치를 끊임없이 떨어뜨리려고 노력하는가라는 수수께끼가 해명된다. 이 수수께끼를 가지고 경제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케네(F. Quesnay)는 자기의 논적(論敵)들을 괴롭혔는데, 이에 대해 그 논적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케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들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공산품(工産品)의 제조에는 [생산에 해를 끼치지 않고] 노동에 대한 지출 또는 노동비용(勞動費用)을 감축하면 할수록, 그 감축은 그만큼 더 유리하다. 왜냐하 면 그것은 제품의 가격을 인하시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숙련공들의 노동 으로부터 생기는] 부(富)의 생산은 그들의 생산물의 교환가치(交換價値)의 증대에 있다고 믿고 있다. "(주석 7: 케네, ?상업 및 수공업자의 노동에 대한 대화?, pp. 188-189.)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의 발전에 의한 노동의 절약(주석 8: "그들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자들의 노동을 그처럼 절약하는 투기꾼들"(비도[J. N. Bidaut], ?공업과 상업에서 발생하는 독점에 대해?, 파리, 1828년, p. 13). "고용주는 시간과 노동을 절약하기 위해 항상 전력을 다할 것이다"(스튜어트[Dugald Stewart], ?경제학강의?, 해밀턴[W. Hamilton] 편. "저작집?, 제8권, 에딘버러, 1855년, p. 318). "그들"(자본가들)"의 관 심사는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의 생산력을 가능한 한 크게 하는 것이다. 생산력의 증진에 그 들의 주의가 집중되고 있으며 거의 전적으로 집중되고 있다"(리처드 존스,?국민경제학교과 서?, 1852년, 제3강의, p. 39).)은 결코 노동일(勞動日)의 단축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오직 일정한 양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勞動時間)의 단축이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생산성을 제고시킨 결과 1시간에 가령 종전의 10배의 상품을 생산하게 되고, 그리하여 각 1개의 상품에 이전의 10분의 1의 노동시간을 지출하게 된다는 사실은, 결코 그로 하여금 종전과 같이 하루에 12시간 노동하고 또 그 12시간 동안 120개가 아니라 1,200개를 생산하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사실 그의 노동일은 단축되기는커녕 연장되기조차 하여 14시간 동안 1,400개를 만들도록 강요되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매컬록, 유어, 시니어 등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보면, 어떤 쪽에는 생산력(生産力)의 발전에 의해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이 단축되기 때문에 노동자는 이에 대해 자본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쓰여 있고, 다음 쪽에는 노동자는 앞으로 하루에 10시간이 아니라 15시간 노동함으로써 이 감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쓰여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테두리 안에서는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해야 할 부분을 단축하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할 수 있는 나머지 부분을 연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상품을 싸게 하지 않고 이러한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달성할 수 있는가는 우리가 다음에 고찰하려고 하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여러 특수한 생산방식들을 검토할 때 밝혀질 것이다.



    제 13 장
    협 업



    이미 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은 각 개별 자본이 다수의 노동자를 동시에 고용하고, 따라서 노동과정이 대규모로 수행되어 대량의 생산물을 공급하게 되는 그때부터 비로소 실제로 시작한다. 많은 노동자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또는 같은 노동의 장(場: field)에서), 같은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같은 자본가의 지휘 밑에서 함께 일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개념적{논리적}으로나 자본주의적 생산(資本主義的 生産)의 출발점을 이룬다. 생산방식 그 자체에 대해 말한다면, 초기의 매뉴팩쳐는 동일한 개별 자본에 의해 동시적으로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더 많다는 것 이외에는 길드{동업조합(同業組合)}의 수공업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길드의 장인(匠人: master)의 작업장이 확대된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그 차이는 순전히 양적(量的)인 것이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주어진 자본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의 양은 개별 노동자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에다 통시적으로 고용된 노동자의 수를 곱한 것과 같다. 노동자의 수(數)는 그 자체로서는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 또는 노동력의 착취도(搾取渡)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으며, 그리고 상품가치 일반의 생산에서도 그것은 노동과정의 어떤 질적(質的)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집단 노동은 ‘새로운’ 생산력을 창조한다.} 만약 12시간 노동일 하루가 6원으로 대상화된다면, 그러한 노동일 1,200일은 6원 x 1,200으로 대상화될 것이다. 1,200명의 노동자의 경우에는 12 x l,200 노동시간이, 개별 노동자의 경우에는 12노동시간이 생산물에 합쳐지고 만다. 가치의 생산에서는 다수의 노동자는 언제나 개별 노동자의 단순한 합(合)으로서만 계산된다. 따라서 1,200명의 노동자가 각각 개별적으로 생산하든, 또는 그들이 동일한 자본의 지휘하에 통합되어 생산하든, 생산되는 가치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발생한다. 가치로 대상화되는 노동은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질(質)의 노동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평균적 노동력(平均的 勞動力)이 지출된 것이다. 그러나 평균량(平均量)은 언제나 [크기만 다를 뿐 종류가 같은] 다수의 개별량(個別量)의 평균일 뿐이다. 각 산업부문에서 개별 노동자는 평균적 노동자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수학에서 '오차' {편차(偏差)}라고 부르는 이와 같은 개별적 차이는 우리가 어떤 최소한도의 노동자를 함께 고용하기만 하면 서로 상쇄되어 없어진다. 유명한 궤변가이며 아첨꾼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차지(借地)농업가로서의 자기의 실제의 경험에 의거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5명의 농업노동자로 구성되는 ‘그처럼 작은 집단’에서도 벌써 노동에서의 모든 개인적 차이는 서로 상쇄되어 소멸되며, 따라서 어떤 5명의 성인 농업노동자도 동일한 시간 안에 다른 임의의 5명의 성인 농업노동자가 하는 일과 똑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주석 1: "서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가치는 힘과 숙련과 성실성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떤 임의의 5명은 전체로서는, 내가 앞에서 말한 연령에 속하는 다른 어떤 5명과도 같은 양의 노동을 제공한다는 것을 나는 면밀한 관찰에 근거해 확신하는 바다. 이것은 이 5명 중 1명은 훌륭한 일꾼의 모든 자격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1명은 서투른 일꾼이고, 다른 3명은 전자에 가깝거나 후자에 가까운 중간 일꾼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5명밖에 안 되는 그처럼 작은 집단에서 당신들은 5명의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전량(全量)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버크, ?곡물부족에 관한 의견과 상세한 논의?, 런던, l800년, pp. 15-16). 평균적 개인에 대해서는 케들레(J. Quetelet)의 의견을 참조하라.) 어쨌든, 동시적으로 고용되는 많은 노동자의 집단적 노동일(集團的 勞動日)을 노동자의 수로 나눈 것이 하루의 사회적 평균노동(社會的 平均勞動)인 것은 명백하다. 한 사람의 1노동일이 예컨대 12시간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동시적으로 고용되는 12명의 노동자들의 집단적 노동일은 144시간이다. 그리고 12명 각각의 노동은 사회적 평균노동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개개인이 동일한 작업을 하는 데 상이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각 개인의 노동은 144시간이라는 집단적 노동일의 1/12로서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질을 가지고 있다. 12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가의 입상에서 보면 노동일은 12명 전체의 노동일로서만 존재한다. 각 개별 노동자의 노동일은 [이들 12명이 서로 협력해 가면서 노동을 하건 또는 그들의 작업 사이의 관련이 단순히 동일한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는 점뿐이건] 집단적 노동일의 구성부분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 이 12명의 노동자들이 2명씩 나뉘어져 각각 6명의 '소경영주(小經營主)'에게 고용된다면, 이들 각 소경영주가 동일한 가치량(價値量)을 생산하는가 어떤가, 따라서 일반적 잉여가치율을 얻게 되는가 어떤가는 확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개별적 편차가 나타날 것이다. 가령 어떤 노동자가 어떤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현저하게 많은 시간을 들인다면, 그의 경우에는 개별적으로 드는 노동시간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즉, 평균적 노동시간]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의 노동은 평균적 노동으로 인정될 수 없고, 그의 노동력도 평균적 노동력으로 인정될 수 없다. 그러한 노동력은 전혀 팔리지 않든가 또는 노동력의 평균가치 이하로 팔릴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능률(勞動能率)의 일정한 최저한도가 모든 노동에 대해 전제되고 있는데,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은 이 최저한도의 설정방법을 제시하고 있다{예: 성과급제 임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최저한도는 평균과는 괴리(乖離)된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력에 대해 그 평균가치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6명의 소경영주 중 어떤 사람은 일반적 잉여가치율보다 더 많은 것을 뽑아내며, 어떤 사람은 그보다 더 적은 것을 뽑아낸다. 이 불균등은 사회 전체적으로는 서로 상쇄되지만 개별 소경영주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가치증식의 법칙은, 개별 생산자가 자본가로 생산하며 다수의 노동자를 동시적으로 고용할 때, 즉 처음부터 사회적 평균노동을 사용할 때, 비로소 그에게 완전히 실현된다.(주석 2: 로셔(Roscher)는, 자기 부인이 이틀간 일시켰던 한 재봉사는 자기 부인이 하루 동안 동시적으로 일시켰던 두 사람의 재봉사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유치원에서 또는 주연배우인 자본가가 없는 상황에서 연구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업방식에 변동이 없는 경우라도 많은 노동자의 동시적 고용은 노동과정의 객체적 조건(客體的 條件)에 혁명을 일으킨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건물, 원료를 위한 창고, 그들이 동시에 또는 번갈아 사용하는 용기. 기구. 장치 등등, 한 마디로 말해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일부가 이제는 노동과정에서 공동으로 소비된다. 한편, 이 때문에 이러한 생산수단의 교환가치가 등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의 사용가치가 더 철저하게 이용된다고 해서 등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생산수단은 공동으로 사용되며 이전보다 대규모로 사용된다. 20명의 직포공이 20대의 직조기를 가지고 일하는 방은 독립적인 1명의 직포공이 2명의 도제를 데리고 일하는 방보다는 넓어야 할 것이지만, 노동자 20명을 수용하는 작업장 하나를 건축하는 데는 노동자 2명씩을 수용하는 10개의 작업장을 건축하는 데 드는 것보다 적은 노동이 든다. 따라서 대규모의 공동사용(共同使用)을 위한 거대한 생산수단의 가치는 이 생산수단의 규모와 유용한 효과에 비례해 증
    가하지는 않는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생산수단은 재개의 생산물에 자기 가치의 더 적은 부분을 이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이 생산수단의 총가치가 더 많은 양의 생산물에 배분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생산수단은 [개별적으로 사용되는 생산수단에 비해] 비록 절대적으로는 더 큰 가치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 작용범위를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더 적은 가치를 가지고 생산과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각 상품의 총가치에 포함되어 있는 불변자본의 일부의 가치는 저하하며, 이 저하의 크기에 비례해서 상품의 총가치(總價値)도 역시 저하한다. 그 효과는 마치 그 상품의 생산수단에 더 싸게 생산되는 것과 같다. 생산수단의 사용의 이러한 절약(節約)은 전적으로 노동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리하여 이러한 생산수단이, [고립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자나 소경영주가 가지고 있는] 분산되고 상대적으로 더 비싼 생산수단과는 달리, 사회적 노동의 필요조건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 일하지 않고 다만 공간적으로 한 곳에 모여 일하는 경우에도 가능하다. 노동수단의 일부는, 노동과정 그 자체가 이러한 사회적 성격을 획득하기 전에, 별써 이러한 사회적 성격을 획득한다{큰 건물 안에 많은 노동자들이 모이면 그렇게 된다}.
    생산수단의 절약(節約)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첫째, 그것이 상품을 저렴하게 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측면이다. 둘째, 그것이 총투하자본[즉, 불변부분과 가변부분의 가치총액]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윤율}을 변동시키는 측면이다. 두번째 측면은 이 책의 제3권 제1편에서 비로소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야 할 다른 많은 문제들도 서술의 적절한 내적 연관을 위해 그곳으로 미룰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대상의 분할은 분석(分析)의 진행상 불가피한 것인데, 이러한 분할은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신과도 합치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자들은 노동수단을 자기와는 독립해 존재하는 타인의 소유로 상대하며, 이리하여 노동수단의 사용상의 절약도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따라서 자기 자신의 생산성을 제고시키는 방법과도 관련이 없는] 하나의 별개의 조작(操作: operation)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동일한 생산과정에, 또는 서로 다르지만 상호관련된 생산과정에 많은 사람이 계획적으로 함께 협력해 일하는 노동형태를 협업(協業: cooperation)(주석 3:“힘의 결합”(데스튜트 드 트라시, ?의지 및 의지작용론?, p. 80).) 이라고 한다.
    기병 1개 중대의 공격력이나 보병 1개 연대의 방어력이 개별 군인이 제각기 전개할 수 있는 공격력이나 방어력의 합계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별 노동자들의 기계적인 힘의 총계는 많은 사람이 동시에 동일한 불가분의 작업에 참가할 때 [예컨대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거나 윈치(卷楊機: winch)를 돌리거나, 장애물을 제거할 때] 발휘하는 사회적 역량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주석 4:“분할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다수 노동자들의 협력 없이는 수행할 수 없는 작업이 많이 있다. 예컨대 큰 통나무를 짐마차에 들어올리는 일....요컨대 많은 사람의 손이 하나의 불가분의 동일한 작업에서 동시에 상호협조하지 않고서는 수행할 수 없는 온갖 일"(웨이크필드, ?식민화 방법에 관한 견해?. 런던, 1849년, p. 168).) 이 경우, 결합노동(結合努動: combined labour)의 성과는 고립된 개별 노동에 의해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거나 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들거나 또는 매우 작은 규모로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협업(協業)에 의해 개인의 생산력이 제고될 뿐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생산력[즉, 집단적인 힘]이 창조되는 것이다.(주석 5: "1톤의 무게를 들어올리는 일은 한 사람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며, 열 사람이면 전력을 다해야 겨 우 가능하지만, 백 사람이면 각자가 손가락 하나만을 움직여도 할 수 있다"(존 벨러즈, ?산업 전문학교의 설립에 관한 제안“, 런던, 1696년, p. 21).)
    다수의 힘이 하나의 총력(總力)으로 융합(融合)되는 데서 생기는 새로운 역량(力量)을 무시하더라도, 대부분의 생산적 노동에서는 단순한 사회적 접촉만으로도 벌써 각 개별 노동자들의 작업능률을 증대시키는 경쟁심이나 혈기(血氣: animal spirit)라는 자극이 생긴다. 그 결과 함께 일하는 12명은 144시간이라는 집단적 1노동일에, 각각 12시간씩 제각기 일하는 12명의 고립된 노동자들보다, 또는 12일 동안 계속 일하는 1명의 노동자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해 낸다.(주석 6: "이 경우에도“ (각각 30에이커씩을 가진 10명의 차지농업가들이 고용하는 수의 노동자를 1명의 차지농업가가 300에이커의 경지에 고용하는 경우) "역시 농업노동자의 수가 많아짐으로써 생기는 이익이 있는데, 이것은 실무자가 아니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1대 4의 비율이 3대 12의 비율과 같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이 명제가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확기에나 기타 긴급한 많은 작업들에서는 많은 노동자를 결합시킨다면 일은 더 잘, 더 신속하게 수행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2649
  • 자본론14
    그 대신 거의 폐지되다시피 했던 성인 남자노동자의 야간노동을 부활시켰다. 그들은 10시간 노동법 하에서는 그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주장했다.(주석 113: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8년 10월 31)일?, pp. 133-134.)
    두번째 조치는 식사를 위한 법정휴식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공장 감독관들의 말을 들어보자.

    "노동시간이 10시간으로 제한된 때부터 공장주들은 [비록 아직까지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예컨대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작업하는 경우, 그 들은 아침 9시 전에 한 시간과 저녁 7시 뒤에 반 시간, 합계 1 1/2시간을 식사시간으로 제공하 기만 하면 법률의 규정을 충분히 지키는 셈이라고. 그들이 현재 점심식사에 반 시간 또는 한 시 간을 주는 경우도 있으나, 동시에 그들은 10시간 노동일의 경과 중에는 1 1/2시간의 어떤 부분 도 허용해 줄 의무는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석 114: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8년 4월 30일?, p. 47.)

    그러므로 공장주들의 주장에 의하면, 식사시간에 관한 1844년 법률의 엄격한 규정들은 노동자들에게 공장에 출근하기 전과 공장에서 퇴근한 뒤에, 다시 말해 자택에서 식사하는 것을 허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노동자들은 아침 9시 이전에 점심식사를 해서는 안 되는가? 그러나 형사재판소는 규정된 식사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반드시 작업시간 중의 휴식시간에 제공되어야 하며, 또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중단없이 10시간 동안 계속 노동시키는 것은 위법이다. "(주석 115: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8년 10월 31 일?, p. 130.)

    이처럼 유쾌한 시위운동을 한 뒤, 자본은 1844년의 법률조문에 합치되는 합법적인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진정 반란을 개시했다.
    분명히 1844년의 법률은 낮 12시 이전에 일을 한 8세 내지 13세의 아동을 오후 1시 이후에 다시 일시키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 법률은 노동시간이 낮 12시 또는 그보다 늦게 시작하는 아동들의 6 1/2시간의 노동을 전혀 규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8세의 아동들이 낮 12시에 노동을 시작한다면, 12시부터 1시까지(1시간), 오후 2시부터 4시까지(2시간), 그리고 저녁 5시부터 8시 반까지(3 1/2시간), 합해 법정시간인 6 1/2시간 일을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는 그보다도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아동의 노동을 저녁 8시 반까지 일하는 성인 남자노동자들의 노동과 합치되도록 하기 위해 공장주들은 아동들에게 오후 2시 이전에는 일거리를 주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한 다음 그들을 저녁 8시 반까지 중단없이 공장 안에 붙들어 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계설비를 하루 10시간 이상 가동시키려는 공장주들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아동들을 [미성년자들과 부녀자들이 모두 공장에서 퇴근한 뒤에] 오직 성인남자들과 함께 저녁 8시 반까 지 일을 시키는 관행이 영국에 수립되어 있다는 것은 현재 공공연한 사실이다 "(주석 116: 같은 보고서, p. 142.)
    노동자들과 공장감독관들은 위생상 및 도덕상의 이유로 이에 항의했다. 그러나 자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 행동의 결과는 감수할 테요.
    어서 재판이나 해 주시오.
    채무증서에 쓰인 대로 벌금을 받을 거요" {샤일록의 말}

    사실상 1850년 7월 26일 하원에 제출된 통계자료에 의하면, 모든 항의에도 불구하고 1850년 7월 15일 257개 공장에서 3,742명의 아동이 '관행(慣行)'에 따르고 있었다.(주석 117:?공장감독관 보고서. 1850년 10월 31일?, PP 5-6.)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자본의 교활한 눈은, 1844년의 법률이 적어도 30분간의 휴식시간 없이는 오전의 5시간 노동은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오후노동에 대해서는 그러한 규정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자본은 8세의 어린 노동자를 오후 2시부터 저녁 8시 반까지 쉴새없이 혹사시킬 뿐 아니라 그 동안 굶기기까지 하는 쾌락을 요구했고 또 얻게 되었다.

    "예, 가슴입니다.
    증서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주석 118: 자본의 본성은 자본이 발전하지 못한 형태에서나 발전한 형태에서나 변함이 없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노예소유자들 의 영향력에 의해 멕시코에 적용된 법전에는,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산 이상, 노동자는 자본가의 '화폐'라는 말이 있다. 이와 동일한 견해가 로마의 귀족들 사이에도 통용되고 있었 다. 귀족이 평민 채무자에게 대부한 화폐는 채무자의 생활수단을 통해 채무자의 피와 살로 되었을 것이므로, 이 '피와 살'은 '그들의 화폐'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샤일록과 같은 십동표( 十銅表: Ten Table)의 법률{고대 로마의 법전}이 나온 것이다. 귀족인 채권자들이 때때로 티 베르강의 건너편에서 채무자의 살코기로 향연을 베풀었다는 랑게(Linguet)의 가설(假說)은 예 수의 성찬에서 기독교도들이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다우머(Daumer)의 가설과 마찬가지로 여 전히 의심스럽지만.) {샤일록의 말}

    공장주들은 1844년의 법률이 아동노동을 규제하는 한, 그 법률의 문구에 그처럼 샤일록식으로 집착했으나, 그것이 '미성년자와 부녀자'의 노동을 규제하는 한, 그 법률 자체를 반대하는 공공연한 반란을 준비했다. 우리는 '허위에 찬 릴레이 제도'의 철폐가 이 법률의 주요 목적이며 주요 내용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공장주들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선언으로 그들의 반란을 개시했다. 즉, 1844년의 법률에는 15시간이라는 공장노동일 중에서 공장주들이 마음대로 시간을 갈라 미성년
    자와 부녀자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는데, 이것은 노동시간이 12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던 동안에는 '비교적 해롭지 않았지만', 10시간 노동법 하에서는 '매우 큰 곤란'을 준다는 것이었다.(주석 119: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8년 4월 30일?, p. 133.)

    그리하여 공장주들은 감독관들에게, 자기들은 법률조문을 무시하고 구(舊)제도를 부활시킬 것이라고 아주 냉정하게 통고했다.(주석 120: 그 중에도 박애주의자 애쉬워스(Ashworth)는 레너드 호너에게 보낸 퀘이커 교도적인 불쾌한 편지 가운데서 그렇게 말했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49년 4월?, p. 4).) 이것은 '더 높은 임금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나쁜 조언을 받고 있는 노동자들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10시간 노동법 하에서 영국의 공업상의 패권(覇權)을 유지하기 위한 단 하나의 가능 한 방안이다“ "릴레이 제도 하에서 불법행위를 적발하는 것은 다소 곤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공장감독관들과 부감독관들의 수고를 약간 덜어주기 위해 이 나라의 크 나큰 공업적 이익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도 좋단 말인가?"(주석 121: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8년 10월 31일“, pp. 138, 140.)
    이러한 모든 술책은 물론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공장감독관들은 법정에 고발했다. 그러나 곧바로 내무장관 조지 그레이(G. Gray)에게는 공장주들의 탄원서가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그 결과 그는 1848년 8월 5일자 공람(公覽)에서 공장감독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미성년자들에게 법에서 허용한 시간 이상으로 실제로 일을 시켰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없는 경우에는, 법조문을 위반했다거나 릴레이 제도에 의해 미성년자를 고용했다고 해서 공장주들을 고발하지는 말 것."

    이에 따라 공장감독관 스튜어트는 15시간의 공장노동일 범위 안에서 이른바 릴레이 제도를 스코틀랜드 전체에 허가했고, 그 결과 그 곳에서는 오래지 않아 이 제도가 옛날처럼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잉글랜드의 공장감독관들은 장관에게는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킬 독재권이 없다고 선언하고 '노예제도 옹호반란'에 대한 법적 조치를 계속 행했다.
    그러나 재판관들[이 경우에는 주의 치안판사들](주석 122: 이 '주 치안판사', 즉 코베트(Cobbett)가 말하는 이른바 '위대한 무급자'(無給者)는 각 주의 유지들 중에서 나오는 일종의 무급판사이다. 사실상 그들은 지배계급의 세습적인 사법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자본가들에게 무죄판결을 내린다면, 아무리 그들을 고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들 법정에서는 공장주들이 자기 자신을 재판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커쇼. 리즈회사(Kershaw, Leese & Co.)의 방적업자인 에스크리지(Eskrigge)라는 사람이 자기 공장에서 실시할 릴레이 제도의 계획표를 자기 지방의 공장감독관에게 제출했다. 그것을 거절한다는 회신을 받은 뒤 그는 처음에는 조용히 있었다. 몇 달이 지난 뒤 역시 방적업자인 로빈슨(Robinson)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스크리지의 충복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의 친척이었다-이 에스크리지가 고안한 것과 똑같은 릴레이 제도를 채용했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스톡포트시의 치안 판사 앞에 불려 나왔다. 4명의 판사가 참석했는데, 그 중 3명은 방적업자였고, 수석에는 바로 그 에스크리지가 앉아 있었다. 에스크리지는 로빈슨의 무죄를 선고했으며, 이제 로빈슨에 대해서 정당한 것은 에스크리지에게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합법적인 판결에 근거해 즉시 이 제도를 자기 자신의 공장에도 채용했다.(주석 123: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9년 4월 30일“, pp. 21-22. 같은 종류의 실례에 대해서는 같은 보고서, pp. 4-5 참조.) 물론 법정의 구성 자체가 하나의 법률위반이었다.(주석 124: 존 홉하우스(John Hobhouse)의 공장법으로 알려져 있는 윌리엄 4세 통치 제1년과 제2년의 법률(제24장, 제10조)에 의하면, 방적공장 또는 직물공장의 소유자 또는 그러한 소유자의 부자. 형제는 공장법에 관계되는 사건에서는 치안판사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금지되고 있었다.) 감독관 하우엘(Howell)은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재판에서 이와 같은 광대극은 하루 빨리 고쳐야 한다. 이러한 소송사건이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이러한 판결과 합치되도록 법률을 고치든지, 아니면 결함이 더 적은 법정이 재판하도록 해 서 판결을 법률에 합치시키든지 해야 한다. 유급판사(有給判士)가 절실히 요망된다. "(주석 12 5:?공장감독관 보고서. 1849년 4월 30일?, p. 22.)

    형사재판소는 1848년의 법률에 대한 공장주들의 해석을 부당하다고 선언했으나, 사회의 구제자라는 그 재판소도 공장주들의 목적을 거부하지 않았다. 레너드 호너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나는 일곱 군데의 서로 다른 재판 관할구에서 10건을 고발하여....법률을 집행하려고 했으나
    단 한 건에 대해서만 치안판사의 지지를 받았다....나는 법률위반을 이유로 더 이상 고발해도 소 용없다고 생각했다. 1848년의 법률 중 노동시간을 획일적으로 만들기 위해 제정한 부분은....나의 지역(랭카셔)에서는 더 이상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나와 나의 보조관들은 릴레이 제도를 실시하 고 있는 공장들에서 미성년자와 부녀자를 10시간 이상 일시키지 않는다고 확증할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1849년 4월 말에는....114개의 공장이 이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는데, 그 수는 지난 얼마 동안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공장들은 아침 6시부터 저녁 7시 반 까지 131/2시간 작업하고 있으며....약간의 경우에는 아침 5시 반부터 저녁 8시 반까지 15시간 작 업하고 있다. "(주석 126: 같은 보고서, p. 5.)

    이미 1848년 12월에 레너드 호너는, 이와 같은 릴레이 제도 하에서는 어떤 감독제도도 극도의 과도노동을 결코 방지할 수 없다고 한결 같이 충고하는 공장주 65명과 공장관리인 29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주석 127: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9년 10월 31일?, p. 6.) 동일한 아동들과 미성년자들이 15시간 동안 방적실에서 직포실로, 한 공장에서 다른 공장으로 교대되곤 했다.(주석 128: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9년 4월 30일?, p. 21.) 다음과 같은 제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는가!

    "그 제도는 교대제(交代制)라는 핑계 하에, 노동자들을 카드처럼 한없이 다양하게 뒤섞어 놓 고, 개개인들의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을 매일 변동시킴으로써, 동일한 작업반에 속하는 노동자 전 원이 결코 전과 동일한 시간에 전과 동일한 장소에서 함께 작업하지 못하게 만든다. "(주석 129: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8년 10월 31일?, p. 95.)
    그러나 현실의 과도노동을 완전히 무시하더라도, 이 이른바 릴레이 제도는 푸리에(Fourier)의 유머가 넘치는 '단기복무' {노동자들이 노동에 싫증을 내지 않도록 다양한 노동에 짧은 시간적 근무하게 하는 것}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자본의 망상(妄想)의 산물이다. 물론 이 경우 '노동의 즐거움'이 '자본의 즐거움'으로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존경할만한 신문'이 '적당한 배려와 순서가 달성할 수 있는 것'의 모델이라고 찬양한 공장주들의 릴레이 계획을 살펴보자. 노동자 전원은 흔히 12-14개의 부류로 나누어지고, 그 구성원은 끊임없이 교체되었다. 15시간의 공장노동일 동안 자본은 노동자를 때로는 30분, 때로는 한 시간씩 이 부류로 끌어들였다가는 밀어내고, 다시 저 부류로 끌어들였다가는 또 다시 밀어냈다 하면서, 10시간 노동이 끝날 매까지 그들을 놓아주지 않고 분산된 토막시간씩 노동자들을 이리저리로 몰아댔다. 무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인물이 번갈아 가면서 다른 막의 다른 장면에 등장하지 않으면 만 되었다. 그리나 연극이 계속되는 동안 배우가
    무대를 떠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노동자들은 공장에 오고가는 데 필요한 시간을 빼고도 15시간 동안 공장에서 떠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휴식시간은 억지로 쉬지 않을 수 없는 시간으로 변했으며, 그리하여 소년노동자들은 술집으로, 젊은 여공들은 창녀촌으로 가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본가가 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키지 않고 자기의 기계설비를 12시간 내지 15시간 가동시키기 위해 날마다 새로운 계획을 생각해 낼 때마다, 노동자는 자기의 식사를 때로는 이 자투리 시간
    에 또 때로는 저 자투리 시간에 삼킬 수밖에 없었다. 10시간 노동일 쟁취투쟁 당시 공장주들은 노동자 무리들이 10시간 노동에 대해 12시간분의 임금을 받으려고 청원하는 것이라고 외쳤다. 지금은 공장주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며, 노동력을 12시간 내지 15시간 동안 마음대로 사용하고 10시간분의 임금을 지불했다.(주석 130: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9년 4월 30일?, p. 6과,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8년 10월 31일?에 게재된 공장감독관 하우엘(Howell)과 손더즈(Saunders)의 교대제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보라. 또 l849년 봄 애쉬톤(Ahshton) 및 그 부근의 목사들이 이 제도에 반대해 여왕에게 제출한 청원서를 보라.) 이것이 문제의 요점이었고, 이것이 10시간 노동법의 공장주 판(版)이었다! 이 공장주들은 바로 인정을 쏟으면서 아양을 떨던 자유무역론자들인데, 그들은 곡물법 반대운동이 전개된 10년 동안 노동자들을 향해 곡물의 수입이 자유롭게만 된다면 영국산업의 자본력으로 자본가를 부유하게 하는 데에는 10시간의 노동으로 아주 충분하다는 것을 1파운드, 1실링, 1페니까지 계산해 가면서 증명했던 것이다.(주석 131: 예컨대 그레그(R. H. Greg), ?공장문제와 10시간 노동법안?(런던, 1837년)을 참조하라.)
    2년간에 걸친 자본의 반란은 드디어 영국의 4대 최고재판소 중의 하나인 재무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최후의 승리를 획득했는데, 이 재판소는 1850년 2월 8일에 제기된 한 소송사건에서, 공장주들은 1844년의 법률의 취지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법률 자체가 이 법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몇 개의 어구를 포함하고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10시간 노동법은 폐지된 것과 마찬가지다. "(주석 132: 엥겔스,“「영국의 10시간 노동법” (내가 편집한 ?신 라인 신문, 정치경제평론?, 1850년 4월호, p. 13). 이 '최고'재판소는 미국 남북전쟁 때에도 해적선의 무장을 금지한 법조문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하게 만드는 문구의 애매성을 발견했다.) 이때까지는 미성년자와 부녀자에 대한 릴레이 제도의 적용을 꺼리고 있던 다수의 공장주들도 이제는 그것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주석 133: ?공장감독관 보고서. 1850년 4월 30일?)
    그러나 자본의 이러한 외견상의 결정적 승리에 뒤이어 곧바로 반격이 가해졌다. 이때까지 노동자들이 해온 저항은 비록 완강하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기는 했으나 소극적인 것이었다. 이제야 그들은 랭카셔와 요크셔에서 위협적인 집회를 열고 큰 소리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즉, 10시간 노동법
    이라는 것은 단순한 사기며, 의회의 기만이며,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공장감독관들은 계급적 적대관계가 들어보지 못한 정도의 긴장상태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정부에 긴급히 경고했다. 일부 공장주들까지도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치안판사들의 모순된 판결로 말미암아 매우 비정상적인 무정부 상태가 지배하게 되었다. 요 크셔에서 시행되고 있는 법률과 랭카셔에서 시행되고 있는 법률이 서로 다르며, 같은 랭카셔 안 에서도 어떤 교구의 법률은 그 인접한 교구의 법률과 다르다. 대도시의 공장주는 법망을 피할 수 있으나, 농촌지방의 공장주는 릴레이 제도에 필요한 인원, 더욱이 노동자들을 한 공장에서 다 른 공장으로 이동시키는 제도에 필요한 인원을 구할 수 있다. "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모든 자본가들이 평등해야 하는 것은 자본의 법이 규정하는 자본가들의 기본권리이다.
    이와 같은 사정 하에서 공장주와 노동자 사이에는 타협이 성립되었고, 그것은 1850년 8월 5일의 새로운 추가적 공장법으로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미성년자와 부녀자'의 노동일은 1주일의 첫 5일은 10시간에서 10 1/2시간으로 연장되었고, 토요일에는 7 1/2시간으로 제한되었다. 작업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 사이에 수행되어야 하며(주석 134: 겨울에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로 변경해도 된다.), 식사를 위한 1 1/2시간의 휴식이 허용되어야 하는데, 이 식사시간은 전원에게 동시에, 그리고 1844년의 규정들에 따라 주어야 했다. 이것으로 릴레이 제도는 영원히 폐지되었다.(주석 135: "현행법(1850년)은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노동시간이 제한되고 있는 사람들{미성년자 와 부녀자}에게 노동의 시작과 종료를 동일하게 한다는 이익을 얻는 대신 '10시간' 노동법의 이익을 포기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공장감독관 보고서, 1852년 4월 30일”, p. 14).) 아동노동에 대해서는 1844년의 법률이 계속 효력을 유지 했다.
    한 부류의 공장주들은 이번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의 아동에 대한 특권을 확보했다. 견직물 공장주들이 그들이었다. 1833년에 그들은 협박조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만약 온갖 연령의 아동들에게 하루 10시간씩 일을 시킬 자유가 박탈된다면, 우리들의 사업은 중단될 것이다. “(주석 136: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4년 9월 30일?, p. 13.)그들은 충분한 수의 13세 이상의 아동들을 구할 수 없게 된다고 주장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바랐던 특권을 쟁취했다. 이러한 구실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 나중의 조사에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 10년 동안 [의자에 앉혀주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린 아동들의 피로 매일 10시간씩 명주실을 뽑아내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이다.(주석 137: 같은 보고서.) 1844년의 법률은 견직물 공장주로부터 11세 미만의 아동을 하루 6 1/2시간 이상 일시키는 '자유'를 '박탈'했지만 그 대신 그들에게 11세 내지 13세의 아동을 하루 10시간씩 일시킬 특권을 보장해 주었으며, 또 다른 모든 아동들에게 강제적으로 적용되고 있던 취학(就學)의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구실로 되었다.

    "섬세한 견직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손끝이 부드러워야 하는데, 그것은 어려서부터 공장에 들 어와 일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다. “(주석 138: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6년 10월 31일?, p. 20.)

    남부 러시아에서 뿔달린 가축들이 가죽과 기를 때문에 도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동들은 부드러운 손끝 때문에 도살되었다. 드디어 1850년에는 1844년에 허용된 특권이 명주실을 꼬는 부문과 명주실을 감는 부문에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를 박탈당한 자본의 손해를 보상하기 위해 11
    세 내지 13세의 아동의 노동시간이 10시간에서 10 1/2시간으로 연장되었다. 그 구실은 "견직물 공장의 노동은 다른 섬유공장의 노동보다 쉬우며 또 건강에 덜 해롭다"(주석 139: ?공장감독관 보고서. 1861년 10월 31일5, p. 26.)는 것이다. 그 뒤의 정부의 의학적 조사가 증명한 바에 의하면, 그와는 반대로

    "견공업 지방의 평균사망률은 매우 높고, 주민 중 여성들의 사망률은 심지어 랭카셔의 면공업 지방보다 더 높다. "
    (주석 140: 같은 보고서, p. 27. 일반적으로 공장법 때문에 노동자들은 육체적으로 현저하게 좋아 졌다. 의사들의 모든 증언은 이 점에서 일치하며 또 나 자신의 관찰에 의해 그것을 확신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출생 뒤 몇 년 사이의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은 것은 무시하더라도, 그린하우 (Greenhow)의 공식보고는 공장지역의 건강상태가 '표준적인 건강상태에 있는 농업지역'보다 나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증거로 1861년의 그의 보고 중에서 특히 다음 표를 보라.

    ┌───────┬──────┬──────┬──────┬──────┬─────┐
    │ 성인 남자 중│남자 10만 명│ │여자 10만 명│성인여자 중 │ │
    │ │ │ │ │ │ 여자의 │
    │공장 취업자의 │ 중 폐병 │ 지방명 │ 중 폐병 │공장취업자의│ │
    │ │ │ │ │ │직업 종류 │
    │ 백분율 │사망자의 수 │ │사망자의 수 │ 백분율 │ │
    ├───────┼──────┼──────┼──────┼──────┼─────┤
    │ 14.9 │ 598 │ 위건 │ 644 │ 18.0 │ 면 │
    │ 42.6 │ 708 │ 블랙번 │ 734 │ 34.9 │ 면 │
    │ 37.3 │ 547 │ 핼리 팩스 │ 564 │ 20.4 │ 털실 │
    │ 41.9 │ 611 │ 브랫포드 │ 603 │ 30.0 │ 털실 │
    │ 31.0 │ 691 │ 매클즈필드│ 804 │ 26.0 │ 명주 │
    │ 14.9 │ 588 │ 리크 │ 705 │ 17.2 │ 명주 │
    │ 36.6 │ 721 │스토크-어폰-│ 665 │ 19.3 │ 토기 │
    │ │ │트렌트 │ │ │ │
    │ 30.4 │ 726 │울스탄톤 │ 727 │ 13.9 │ 토기 │
    │ │ 305 │8개의 건강한│ 340 │ │ │
    │ │ │농업지방 │ │ │ │
    └───────┴──────┴──────┴──────┴──────┴─────┘
    공장감독관들의 반 년마다 반복되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악(惡)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주석 141: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영국의 '자유무역주의자들'은 비단제품에 대한 보호관세를 마지못해 단념했던 것이다. 이제 프랑스로부터의 수입을 막는 보호 대신에 영국 공장아동들을 보호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다.)
    1850년의 법률은 다만 '미성년자와 부녀자들'을 위해 아침 5시 반부터 저녁 8시 반까지의 15시간을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의 12시간으로 변경시킨 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법률은 아동들에 대해서는 달라진 것이 없으며, 비록 아동들의 총노동시간은 6 1/2시간을 초과할 수 있었지만, 앞에서 말한 12시간이 시작되기 전 1/2시간과 끝난 뒤의 2 1/2시간에는 여전히 아동을 고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법률이 심의될 때 공장감독관들은 이와 같은 변칙적인 것의 파렴치한 남용에 관한 통계자료를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경기가 좋은 해에는 아동들을 보조로 붙여 성인노동자의 노동일을 15시간까지 연장시키려는 의도가 배후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3년간의 경험은 그와 같은 시도가 성인 남자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딪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주석 142: ?총장감독관 보고서 l853년 4월 30일?, p. 30.) 그러므로 1850년의 법률은 1853년에 이르러 드디어 "아침에는 미성년자와 부녀자의 노동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고 저녁에는 이들의 노동이 끝난 뒤에 아동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보충되었다. 이때부터 1850년의 공장법은 거의 예외없이 그것이 적용되는 산업부문들에서 일체의 노동자들의 노동일을 규제하게 되었다.(주석 143: 영국 면공업의 전성기인 1859년과 1860년에 공장주들은 시간외 노동에 대해 높은 임금이라는 미끼로 성인 남자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일의 연장에 찬성하게 만들려고 시도했다. 수동 뮬방적기와 자동방적기로 일하는 방적공들은 자기들의 고용주에게 건의서를 제출함으로써 이 시도에 종말을 짓게 했는데, 그 건의서에는 특히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솔직히 말해 우리의 생명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직종의 노동자들보다 1주에 거의 2일(20)시간이나 오래 공장에 얽매여 있는 한, 우리는 스스로가 이 나라의 노예와 같다고 느끼게 되며, 또 우리 자신과 우리의 후손에게 해독을 끼치는 제도를 우리 자신이 영구화하고 있다고 느낀다....그러므로 크리스마스휴일과 새해휴일을 마치고 또다시 일을 시작할 때 우 리는 l 1/2시간의 휴식시간을 포함해 6시부터 6시까지, 주일 60시간 이상은 노동하지 않겠다 는 것을 귀하에게 정중히 통고하는 바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60년 4월 30일?, p. 30).) 최초의 공장법이 제정된 이래 이미 반세기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주석 144: 어떻게 이 법률의 문구가 이 법률을 위반하도록 하는 수단으로 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회 보고 ?공장규제법?(1859년 8월 6일)과 거기에 들어 있는 레너드 호너의 "감독관들이 현재 성행하고 있는 위법적 노동을 방지할 수 있도록 공장법을 개정하기 위한 제안"을 보라.)
    공장법이 1845년의 날염공장법(Printworks Act)에서 처음으로 자기본래의 적용영역을 넘어섰다. 자본이 이 새로운 ‘탈선행위'를 용인할 때의 불만은 이 법률의 한 자(字) 한 구(句)가 말하고 있다. 이 법률은 8세에서 13세까지의 아동과 부녀자의 노동일을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의 16시간으로 제한하면서, 그 사이에 식사를 위한 법정휴식시간은 전혀 규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그것은 13세 이상의 남성노동자를 밤낮을 통해 마음대로 노동시키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주석 146: "지난 반 년간 나의 관할구에서는 8세 및 그 이상의 아동들이 사실상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혹사당하고 있었다"(?공장감독관 보고서. l857년 10월 31일?, p. 39).) 이 법률은 의회가 낳은 기형아인 것이다.(주석 146: “날염공장법은 교육에 관한 규정으로 보나 노동보호에 관한 규정으로 보나 실패작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62년 10월 3l일?, p. 52))
    그러나 공장법의 원칙은 [현대적 생산방식의 독특한 창조물인] 대공업부문들을 지배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1853-60년의 대공업부문들의 놀라운 발전과 공장노동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재건은 아무리 아둔한 사람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반 세기 동안의 내전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투쟁}에 의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노동일의 법률적 제한과 규제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공장주들 자신이 자기들의 공업부문과 아직도 '자유로운‘ 착취가 남아 있는 공업부문들 사이의
    현저한 대조를 자랑스럽게 지적하고 있다.(주석 147: 예컨대 1863년 3월 24일자 ?더 타임즈?지에 보낸 편지에서 포터 (E. Potter)가 그러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더 타임즈?는 그에게 10시간 노동법을 반대한 공장주들의 반란을 상기시키고 있다.) '정치경제학‘의 바리새인{위선자}들은 새삼스럽게 노동일의 법적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통찰이 그들 '과학'의 특징적인 성과라고 선언했다.(주석 148: 투크의 ?가격의 역사?의 공저자이고 편집자인 뉴마치(W. Newmarch)가 그러한 견해를 표명했다. 여론에 대해 비겁한 양보를 하는 것이 과학적 진보인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대공장주들이 불가피한 대세에 체념해 순응하게 된 뒤 자본의 저항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고, 이에 반해 노동자계급의 공격력은 [공장법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사회계층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동맹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강화되어 갔다. 이리하여 1860년 이래 공장법은 비교적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염색공장과 표백공장은 1860년에(주석 149: 1860년에 제정된 표백업과 염색업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노동일은 1861년 8월 1일부터 잠정적으로 12시간으로 단축되었다가 1862년 8월 1일부터 최종적으로 10시간으로, 즉 평일에는 10 1/2시간, 토요일에는 7 1/2시간으로 단축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해 1862년에는 종전과 같은 연극이 되풀이되었다. 공장주들은 의회에 진정서를 제출해 미성년자와 부녀자의 12시간 노동을 앞으로 1년만 더 용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산업의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면화 기근) "만약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씩 노동하고 가급적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다. " 이러한 취지의 법률안이 하원에 제출되었는데, "그것이 폐기된 것은 주로 스코틀랜드의 표백공장 노동자들의 운동의 결과였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62년 10월 31일“, pp. 14-15).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체하다가 바로 그 노동자들로부터 이처럼 격퇴를 당하자, 자본은 법률가의 돋보기 안경의 도 움을 받아, 1860년의 법률도 ['노동보호'를 위한 모든 의회 법률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애매 한 문구로 쓰여 있어 ‘다림질공(calenderer)'과 '마무리공(finisher)'을 그 적용대상에서 제외시 킬 수 있는 구실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언제나 자본에 충실하게 봉사하는 영국의 사법당 국은 민사재판소를 통해 이와 같은 궤변을 승인했다. ”노동자들은 크게 실망했다....그들은 과 도노동에 대해 불평했다. 그리고 입법의 명백한 취지가 용어의 불완전한 정의 때문에 허사가 된다는 것은 유감천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같은 보고서, p. 18).), 레이스공장과 양말공장은 1861년에 각각 1850년의 공장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아동노동 조사위원회?의 제1차 보고(1863년)의 결과, 일체의 토기(도자기뿐 아니라). 성냥. 뇌관. 탄약. 카펫. 능직포의 제조공장, 그리고 '마무리 작업'이라는 이름 하에 총괄되는 수많은 과정들에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공장들도 역시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1863년에는 '야외표백업'(주석 150: '야외표백업자들'은 부녀자는 야간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에 의해 1860년의 표백공장의 적용을 면제받고 있었다. 이 거짓말은 공장감독관들에 의해 폭로되었고, 동시에 의회도 노동자들의 진정서에 의해 야외표백은 즐거운 초원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목가적인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이 야외표백업에서는 화씨 90-100도{섭씨 32-38도}의 건조실이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주로 소녀들이 일하고 있다. '냉각'이라는 말은 때때로 건조실에서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다. "건조실에는 15명의 소녀가 있고 온도는 보통 아마포의 경우에는 80 -90도{섭씨 27-32도}이고, 고급 아마포의 경우에는 100도{섭씨 38도} 이상이다. 한가운데 밀폐식 난로를 놓은 약 10평방피트의 조그만 방에서 12명의 소녀가 다림질을 하며, 또 천을 개는 일을 한다. 소녀들은 무섭게 달아 있는 난로를 삥 둘러싸고 있으며, 난로의 열은 다림질공들을 위해 아마포를 삽시간에 말린다. 이 직공들의 작업시간은 제한되어 있지 않다. 바쁠 때에는 며칠이고 계속 밤 9시 내지 12시까지 일한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62년 10월31일?, p. 56). 한 의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바람을 쐬기 위한 특별한 시간이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온도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높아지든가 여공들의 손이 땀으로 더러워질 때 몇 분간 밖에 나가는 것이 허가된다....이 여공들의 질병을 취급해 온 나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그들의 건강상태가 방적여공들의 건강상태보다 나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그런데 자본은 의회에 제출한 청원서에서 그들을 화가 루벤스 [Rubens]와 같은 수법으로 건강미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들이 가장 자주 걸리는 병 은 폐결핵. 기관지염. 자궁병. 악성 히스테리. 류마치스다. 이 병들이 발생하게 되는 직접 간 접의 원인은 공장 안의 공기가 탁하고 지나치게 덥다는 것과 그들이 겨울에 집으로 돌아갈 때 차고 습기찬 공기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줄 만한 따뜻한 의복이 그들에게 없다는 사실이다 "(같은 보고서, pp. 56, 57). 이 즐거운 '야외표백업자들'로부터 얻어낸 1863년의 법률에 관해 공장감독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법률은 외견상 제공하고 있는 보호를 노동자 에게 전혀 보장해 주지 못할 뿐 아니라....규정의 용어가 애매모호해 아동 및 부녀자가 저녁 8 시 이후 작업하는 현장이 발각되지 않는 한 결코 보호조항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으 며, 발각된 경우에도 입증방법이 어려워 법률위반자가 처벌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같은 보 고서, pp. 52). "이 법률은 인도적인 목적이나 교육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법률로서는 완전한 실패작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연령에 대한 제한이나 남녀의 구별도 없이 또 표백공장 부근에 사는 가정의 사회적 관습도 고려하지 않고, 부녀자와 아동에게 하루에 14시간[식사시간은 형
    편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또는 그보다 더 장시간 노동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허용이라기보다는 강제다) 이것을 인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공 장감독관 보고서. 1863년 4월 30일?, p. 40).)과 빵제조업이 특별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는데, 이 법에 의해 전자는 미성년자. 부녀자의 야간노동(저녁 8시부터 아침 6시까지)을 금지당했고, 후자는 저녁 9시부터 아침 5시 사이에 18세 미만의 빵제조공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아동노동 조사위원회는 농업과 광산업과 운수업을 제외한 영국의 모든 중요한 산업부문들로부터 '자유'{착취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제안들을 내놓았는데, 그것들에 대해서는 뒤에 논의하려 한다.(주석 151: 내가 이 글을 쓴 l866년 이래 또다시 반동이 시작되었다.)



    제 7 절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
    영국의 공장업이 타국에 준 영향



    노동이 자본에 예속됨으로써 생산방식(生産方式) 그 자체가 개조된다는 점 {예: 기계제 대공업}을 무시하면, 잉여가치의 생산 또는 잉여노동의 착취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독특한 내용과 목적을 이룬다는 것을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 독자는 또 우리가 지금까지 전개해 온 입장에서는 오직 독
    립적인 노동자[따라서 법률적으로 성년에 도달한 노동자]만이 상품의 판매자로 자본가와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역사적 개관에서 한편으로는 근대적 산업이,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미성년인 사람의 노동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면, 우리에게는 전자는 다만 노동착취의 특수한 분야로서, 후자는 다만 노동착취의 특히 주목할 만한 실례로서만 의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의 연구에 의거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들의 단순한 결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첫째, 노동일을 무제한으로 또 무자비하게 연장하려는 자본의 충동은, 수력. 증기. 기계에 의해 맨처음 혁명이 일어난 산업부문들[즉, 근대적 생산방식의 최초의 창조물인 면화. 양모. 아마. 비단의 방적업과 직물업]에서 먼저 충족된다. 물질적 생산방식의 변화와 이에 상응하는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주석 152: “이들 계급" (자본가와 노동자) "각자의 행동은 그들이 처해 있는 상대적 입장의 결과였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48년 10월 31일”, p.113).) 처음에는 노동일의 한계를 무제한으로 확대했고, 다음에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휴식시간을 포함하는 노동일을 법률에 의해 제한하고 규제하고 균일화하는 사회적 통제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19세기 전반기에는 이러한 통제는 다만 예외적인 입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주석 153: "제한이 가해진 업종들은 증기력이나 수력에 의한 섬유제품제조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감독을 받는 기업은 두 개의 조건이 필요했다. 즉, 증기력 또는 수력의 사용과, 특정한 종류의 섬유의 가공이 그것이었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64년 10월 3l일?, p. 8).) 그러나 공장법이 새로운 생산방식의 이 최초의 영역을 정복해 버리자마자, 그 사이에 다른 수많은 생산부문이 동일한 공장제도를 채택했을 뿐 아니라, 도자기공업, 유리공업 등과 같이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경영방식을 가지고 있던 매뉴팩쳐도, 또 빵제조업과 같은 구식의 수공업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못제조업등과 같은 분산적인 이른바 가내공업(家內工業)(주석 154: "아동노동 조사위원회"의 최근의 보고는 이른바 가내공업의 상태에 관한 매우 값진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까지도 벌써 오래전부터 공장공업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자본주의적 착취 하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공장법은 그 예외법적 성격에서 점차 벗어나거나, 또는 [영국에서와 같이 입법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결의법(決疑法: casuistry)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개개의 행위나 양심문제에 적용하는 법}의 방식을 따르는 곳에서는] 노동이 수행되고 있는 가옥을 모두 공장이라고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주석 155: "지난 회기(1864년)에 제정된 법률들은....그 작업방식이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업종을 포괄하고 있다. 기계를 움직이기 위한 기계력의 사용은 더 이상 종전과 같이 '공장'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아니게 되었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64년 10월 31일?, p.8).)
    둘째, 어떤 생산부문에서 일어났던 노동일 규제의 역사와, 다른 생산부문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규제를 둘러싼 투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단 일정한 성숙단계에 도달하면 개별 노동자[즉, 자기 노동력의 '자유로운' 판매자로서의 노동자]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굴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표준노동일의 제정은 장기간에 걸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다소 은폐된 내전(內戰)의 산물인 것이다. 이 투쟁은 근대산업의 영역에서 개시되는 것이므로 우선 근대산업의 모국 영국에서 일어났다.(주석 156: 대륙적 자유주의의 낙원인 벨기에는 이 운동의 흔적도 없다. 이 나라에서는 탄광과 금속광산에서조차 모든 연령의 남녀노동자들이 시간의 장단과 시기의 여하를 가리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소비되고 있다. 거기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 1,000명당 733명은 성인남자, 88명은 성인 여자, 135명은 16세미만의 소년, 그리고 44명은 16세 미만의 소녀다. 용광로 등에서는 1,000명당 668명이 성인남자, 149명이 성인여자, 98명이 16세 미만의 소년, 그리고 85명이 16세 미만의 소녀다. 성숙한 그리고 미성숙한 노동력에 대한 가공할 착취에 비해 지불되는 임금은 매우 낮은데, 1일 평균 성인남자는 2실링 8펜스, 성인여자는 1실링 8펜스, 소년은 1실링 2 1/2팬스다. 그 결과 벨기에는 1850-63년에 석탄. 철 등의 수출량과 수출액을 거의 배가시켰다.) 영국의 공장노동자들은, 그들의 이론가가 자본가들의 이론에 대한 최초의 도전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주석 157: 1810년 직후,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은 노동일 제한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주장했고, 10시간 노동일을 뉴 라나크(New Lanark]에 있는 자기 공장에 실제로 도입했다. 세상 사람들은 후자가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라고 비웃었다. 그의 ‘아동의 교육과 생산적 노동의 결합', 그리고 그가 창설한 노동자의 협동조합도 마찬가지로 비웃음을 샀다. 오늘날, 첫번째 유토피아는 공장법으로 되었고, 두번째 유토피아 {교육과 노동의 결합}는 모든 공장법에서 공식적인 관용구로 나타나 있고, 세번째 유토피아는 이미 반동적 사기를 은폐하는 가면으로 쓰이고 있을 정도이다.), 영국의 노동자계급뿐 아니라 근대적 노동자계급 일반의 투사였다. 그러므로 공장철학자 유어는 다음과 같이 비난하고 있다. 즉, ‘노동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 당당하게 싸우는 자본에 대항해 영국의 노동자계급이 ’공장법이라는 노예제도'를 자기들의 기치로 삼았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이라고.(주석 158: 유어(Ure), ?공장철학?(불어 번역판), 파리, 1836년, 제2권, pp. 39, 40, 67, 77, 기타.)
    프랑스는 영국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고 있다. 프랑스의 12시간 노동법(주석 159: 1855년 파리 국제통계회의의 “보고”는 특히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공장과 작업장의 매일의 노동을 12시간으로 제한하는 프랑스 법률은 이 노동을 일정한 고정적인 시간에 국한하지 않고 있다. 오직 아동노동에 대해서만 오전 5시와 저녁 9시 사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부 공장주는 [이 치명적인 침묵이 그들에게 주는 권리를 이용해]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밤낮 중단 없이 일을 시키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하기 위해 서로 다른 2개 반의 노동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중 어느 반도 12시간 이상을 작업장에서 지내지는 않으나, 공장의 작업은 밤낮으로 계속된다. 법은 준수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적 측면은 어떠한가?“ ‘야간노동이 인체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이외에 ‘어두컴컴한 동일한 작업장에서 남녀가 밤에 함께 일하는데서 생겨나는 파멸적인 영향’도 역시 강조하고 있다.)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2월혁명 {1848년}이 필요했는데, 이 법률도 그것의 원형인 영국의 12시간 노동법에 비해 결함투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혁명적 방법은 자기 특유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영국의 입법이 이런저런 사태의 압력에 마지못해 굴복한 결과 서로 모순되는 법조항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는 데 반해(주석 160: "예컨대 나의 관할구역에서는 동일한 공장건물에서 동일한 공장주가 표백업자와 염색업자로서는 표백공장법. 염색공장법의 적용을 받고, 날염업자로서는 날염공장법의 적용을 받으며, 마무리업자로서는 공장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61년 10월 31일?, p. 20에 실런 베이커(Baker)의 보고). 이 법률들의 서로 다른 규정과 그로부터 나오는 착잡한 관계를 열거한 뒤 베이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공장주들이 어떻게 해서든 법망을 피하려고 생각한다면, 이 3개의 법률의 실시를 보장하는 것이 얼마나 곤란하겠는가는 이로부터도 알 수 있다. " 그러나 이것 때문에 법률가들에게는 소송사건이 보장되고 있다.) 프랑스의 혁명적 방법은 한꺼번에 전체 작업장과 공장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노동일에 대한 동일한 제한을 부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국에서는 오직 아동과 미성년자와 부녀자의 이름으로 쟁취했을 뿐이고 또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일반적 권리로 요구하기 시작한 것을 프랑스의 법률은 원칙으로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주석 161: 그리하여 공장감독관들은 드디어 다음과 같이 과감하게 말한다. "이와 같은 반대"(노동시간의 법률적 제한에 대한 자본의 반대)"는 노동자의 권리라는 대원칙 앞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된다....자기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고용주의 권리가 정지되고, 노동자의 시간이 노동자 자신의 것으로 되는 그러한 시점이 있는 법이다. 비록 이 문제를 철저하게 규명하지 않더라도"(?공장감독관 보고서. 1862년 10월 31일?, p. 54).)
    미국에서는, 노예제도가 공화국의 일부를 병신으로 만들고 있던 동안에는 독립적인 노동운동은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다. 검은 피부의 노동자에 낙인이 찍혀지고 있는 곳에서는 횐 피부의 노동자도 해방될 수 없다. 그러나 노예제도의 폐지로부터 즉시 새로운 생명의 싹이 돋아났다. 남북전쟁의 첫번째 성과는 8시간 노동일을 위한 운동이었는데, 이 운동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뉴잉글랜드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천리마의 기세로 퍼져 나갔다. 볼티모어(Baltimore)에서 열린 전국노동자 대회(1866년 8월)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나라의 노동을 자본주의적 노예제도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필요한 최대의 급선무는 아메리 카 연방의 모든 주에서 표준노동일을 8시간으로 만드는 법률의 제정이다. 우리는 이 영예로운 성과를 달성하기까지 전력을 다할 것을 결의한다. "(주석 162: 우리들 던커크의 노동자들은 지금의 제도가 요구하는 노동시간의 길이가 너무나 길어 우리에게 휴식과 교육을 위한 시간을 남겨주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를 노예제도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예속상태로 빠뜨리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8시간이 1노동일로서 충분하며, 또 그것이 충분하다고 법적으로 승인해야 한다고 결의하며, 유력한 신문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을 호소한다....우리에게 이 도움을 거부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개혁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적으로 간수할 것을 결의한다"(1866년, 뉴욕주, 던저크[Dunjirk] 노동자들의 결의).)

    이와 때를 같이 하여 (1866년 9월 초)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자대회(The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제 1 인터내셔널의 대회}는 런던의 총무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노동일(勞動日)의 제한은, 그것 없이는 개선(改善)과 해방(解放)을 위한 앞으로의 모든 노력이 좌절되지 않을 수 없는 예비조건이라고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8시간을 노동일의 법정한도로 안한다,” {이 결의는 마르크스 자신이 기초한 것이다}.

    이와 같이 대서양의 양쪽에서 [생산관계 그 자체로부터 자연적으로 성장한] 노동운동은 영국의 공장감독관 손더즈(R. J. Saunders)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증해 주고 있다.

    “만약 노동시간이 제한되지 않고, 또 제정된 그 한계가 엄격히 준수되지 않는다면, 사회개혁의 더 이상의 진전은 기대할 수 없다....(주석 163:“공장감독관 보고서. 1848년 10월 31일”, p. 112.)

    우리의 노동자는 생산과정에 들어갈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생산 과정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장에서 그는 '노동력(勞動力)'이라는 상품의 소유자로 다른 상품의 소유자{화폐를 가진 자본가}와 상대하고 있었다. 즉, 상품소유자에 대해 상품소유자로 상대했다. 그가 자본가에게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했을 때의 계약은 그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처분한다는 사실을 이를테면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증명한 것이었다. 거래가 완결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자유로운 행위자'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 그가 자유롭게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은 그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판매해야만 하는 기간이라는 것(주석 164: "더욱이 이러한 행동"(예컨대 1848-50년의 자본의 술책)"은 그처럼 빈번하게 제기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논박의 여지없이 증명한다. 그 주장이란 노동자들은 보호가 필요없으며, 자기의 유일한 재산-손의 노동과 이마의 땀-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권리의 소유자로 간주될 수 있다. (?공장감독관 보고서. 1850년 4월 30일?, p. 45). "자유로운 노동(만약 이런 말을 쓸 수 있다면)은 자유로운 나라에서조차도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이라는 강력한 팔뚝이 필요하다 (?공장감독관 보고서. 1864년 10월 31일“, p. 34). ”식사시간도 없이 하루에 14시간....노동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 또는 같은 말이지만 강요하는 것"(?공장감독관 보고서. 1863년 4월 30일“, p. 40).) 사실상 흡혈귀는 “착취할 수 있는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주석 165: 엥겔스, “영국의 10시간 노동법안” “신 라인 신문”, 1850년 4월호. p. 5.),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된다. 노동자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는 뱀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단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자기자신이 자본과의 자발적인 계약에 의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자족을 죽음과 노예상태로 팔아 넘기는 것을 방지해 줄 하나의 법률[즉, 아주 강력한 사회적 장벽]을 제정하도록 하나의 계급으로서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된다.(주석 166: 10시간 노동법은 그 적용을 받는 산업부문들에서 "이전의 장시간 노동자들의 조기 노쇠현상에 종지부를 찍었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59년 10월 31일?, p.47). "자본"(공장에서의)"은 노동자들의 건강과 도덕을 해치지 않고서는 제한된 시간을 넘어 기계를 가동할 수는 결코 없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같은 보고서, p. 8).) '양도할 수 없는 인권(人權)'이라는 화려한 목록(目錄) 대신 법적으로 제한된 노동일이라는 겸손한 대헌장(大憲章)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노동자가 판매하는 시간은 언제 끝나며, 자기 자신의 시간은 언제 시작되는가"(주석 167: "그보다도 더 큰 이익은 노동자 자신의 시간과 고용주의 시간이 드디어 명백하게 구별되었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이제 자기가 판매하는 시간이 언제 끝나고 언제부터 자기 자신의 시간이 시작되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을 미리 정확히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시간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미리 배정할 수 없게 된다"(같은 보고서, p. 52). "그것"(공장법)"은 노동자들을 자기 자신의 시간의 주인이 되게 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을 궁극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그들에게 부여했다"(같은 보고서, p. 47). 공장감독관들은 [조심스러운 종자와 매우 신중한 표현으로] 현재의 10시간 노동법이 또한 [자본의 단순한 화신인] 자본가에게 내재하는 난폭성으로부터 자본가를 어느 정도 해방시켜 그에게 약간의 '교양'을 위한 시간을 주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전에는 공장주는 돈벌이 이외의 다른 일을 위한 어떤 시간도 가져본 적이 없고, 노동자는 노동 이외의 다른 일을 위한 어떤 시간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같은 보고서, p. 48).)를 비로소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이전과 비교해 얼마나 큰 변화인가!



    제 11 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우리는 이 장(幸)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가치[따라서 노동일 중 노동력의 재생산 또는 유지에 필요한 부분]를 주어진 불변(不變)의 크기라고 가정한다.
    이와 같이 가정하면,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은 개별 노동자가 일정 기간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잉여가치량(剩餘價値量)을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알려 준다. 만약 예컨대 필요노동(必要勞動)이 하루에 6시간이고 그것을 금량(金量)으로 표현한 것이 3원이라고 한다면, 3원은 1노동력의 하루 가치 또는 1노동력(勞動力)을 사는데 드는 자본의 가치이다. 더 나아가, 만약 잉여가치율이 100%라고 한다면, 이 3원의 가변자본(可變資本)은 3원의 잉여가치량을 생산할 것이다. 바꾸어 말해, 노동자는 매일 6시간의 잉여노동량(剩餘勞動量)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가변자본은 자본가가 동시적으로 고용하는 모든 노동력의 총가치의 화폐적 표현이다. 따라서 투하한 가변자본의 가치는 1노동력의 평균가치(平均價値)에다 고용한 노동력의 수(數)를 곱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는 경우, 가변자본의 크기는 동시적으로 고용하는 노동자의 수에 정비례한다. 그리하여 만약 1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3원이라면, 매일 100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는 300원의 자본을, 매일 n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는 3n원의 자본을 투하해야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1노동력의 하루 가치인 3원의 가변자본(可變資本)이 매일 3원의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한다면, 300원의 가변자본은 매일 300원의 잉여가치를 생산할 것이며, 3n원의 가변자본은 매일 3n원의 잉여가치를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은 개별 노동자의 1노동일이 제공하는 잉여가치에다 고용한 노동자의 수를 곱한 것과 같다. 그러나 더 나아가 재별 노동자가 생산하는 잉여가치량은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는 경우) 잉여가치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제1법칙(第一法則)이 나온다. 즉, 생산되는 잉여가치량(剩餘價値量)은 투하한 가변자본(可變資本)의 크기에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을 곱한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해, 그것은 동일한 자본가에게 동시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력의 수와 {l노동력의 평균가치및} 개별 노동력의 착취도(搾取度)의 곱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잉여가치량을 S로, 개별 노동자가 하루에 평균적으로 제공하는 잉여가치를 s로, 1노동력의 구매에 매일 투하하는 가면자본을 v로, 가변자본의 총액을 V로, 하나의 평균노동력의 가치를 P로, 착취도를 a'/a (잉여노동/필요노동)으로, 그리고 고용되는 노동자의 수를 n으로 각각 표시한다면,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는다.

    S = s/v x V
    P x a'/a x n

    하나의 평균노동력의 가치가 불변이라는 것뿐 아니라, 자본가가 고용하는 노동자들이 평균적 노동자로 환원되어 있다는 것도 항상 전제하고 있다. 생산되는 잉여가치가 착취되는 노동자의 수에 비례해 증가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으나, 그러한 경우에는 노동력의 가치도 또한 불변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일정한 양의 잉여가치를 생산할 때 어떤 한 요인의 감소는 다른 요인의 증대에 의해 보상할 수 있다. 가변자본은 감소하지만 그와 동시에 잉여가치율이 동일한 비율로 증가한다면,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은 여전히 불변일 것이다. 앞의 가정에서 자본가가 하루에 100명의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해서는 300원을 투하해야 하고, 잉여가치율은 50%라고 한다면, 300원의 가변자본은 150원[또는 3시간x100명]의 잉여가치를 생산할 것이다. 만약 잉여가치율이 2배로 되며 [즉, 노동일이 6시간에서 9시간 대신 12시간으로 연장되며], 동시에 가변자본이 절반[즉, 150원]으로 감소한다면, 이때에도 150원[또는 6시간 x 50명]의 잉여가치가 생산될 것이다. 따라서 가변자본의 감소는 그와 비례하는 노동력의 착취도의 증가에 의해 보상할 수 있으며, 또는 고용되는 노동자 수의 감소는 그와 비례하는 노동일의 연장에 의해 보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자본이 착취할 수 있는 노동(勞動)의 공급은 노동자(勞動者)의 공급과는 관계가 없다.(주석 1: 이 초보적인 법칙이 속류경제학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모양이다. 그들은 전도(轉倒:inverted)된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처럼 노동의 시장가격이 수요 .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서, 세계를 움직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정지시키기 위한 지렛목을 발견했다고 믿고 있다.) 반대로, 잉여가치율의 감소는, 만약 가변자본의 크기 또는 고용되는 노동자의 수가 그에 비례해 증가한다면,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을 변동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수[또는 투하한 가변자본의 크기]의 감소를 잉여가치율의 증대[또는 노동일의 연장]에 의해 보상하는 데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限界)가 있다. 노동력의 가치가 어떻든 [즉, 노동자의 생활유지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2시간이든 10시간이든], 한 노동자가 매일 생산할 수 있는 총가치는 [24 노동시간이 대상화되는] 가치보다 항상 적을 것이다. 만약 이 대상화된 24노동시간의 화페적 표현이 12원이라고 한다면, 총가치는 항상 12원보다 적을 것이다. 노동력 자체를 재생산하
    기 위해 [또는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 투하한 자본가치를 대체하기 위해] 매일 6노동시간이 필요하다는 앞의 가정에 따르면, 100%의 잉여가치율[즉, 12시간 노동일]로 5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1,500원의 가변자본은 매일 1,500원[또는 6시간 x 500명]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그런데 매일 200%의 잉여가치율[즉, 18시간 노동일]로 1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300원의 자본은 겨우 600원[또는 12시간 x 100명]의 잉여가치량을 생산할 뿐이다. 그리고 이 자본의 총가치생산물[즉, 투하한 가변자본 더하기 잉여가치]은 결코 매일 1,200원[또는 24시간 x I00명]에 달할 수 없다. 평균노동일의 절대적 한계-이것은 본래 24시간보다 항상 짧다-는 가변자본의 감소를 잉여가치율의 증대에 의해 보상하는 것…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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