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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8. 수풍정(水風井)
    『 생명의 샘 』
     
     ●     이 세상에서 제일 터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랑입니
     ○     다. 사랑은 최소한도 맨 처음에는 이성을 갖고 사랑
     ●     을 시작합니다. 이성을 통해서 사랑할  때 사람들은
            사랑을 자기한테 묶어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상대편
     ○     이 나한테 묶이느냐 하면 안묶입니다.  처음에 남녀
     ○     가 사랑할 때는 너무나 달콤하고  즐겁습니다. 그리
     ●     고 서로는 서로에게 매우 잘해줍니다.  그러다가 차
            츰 차츰 서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언성이
            높아지는 이유는 묶어둘  수 없는 것을,  들어올 수
            없는 것을 자꾸 묶어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
            다 보면 서로는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지게 됩니다.
            나 자신에게 누구를 묶어 두려고 하는 것 자체가 바
            로 스스로한테 묶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사랑을 원한다면 상대편을 묶어두어서는 안됩니다.
     
                           수풍정(水風井)
     
        정(井)은 우물을 뜻한다. 한 고을의 수도는 옮길 수
        있으나 우물은 옮기지 못한다. 땅속에 줄기차게 샘솟
        는 근원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우물은
        항상 맑은 물을 가득 담고 있어서 줄지도  않고 넘치
        지도 않는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누구나 자유롭게
        우물을 쓸 수 있다. 우물이  사람을 길러주면 제한이
        없다. 그러나 우물의 물은 저절로  사람의 입에 들어
        오는 것은 아니다. 물 속에 두레박을 넣어서 물을 떠
        올리는 것이 우물이다.
     
      오만년전에 우리 사람들 세계에는 [법]이라는  것이 사실 없었
    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법이 점점  발달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야만 국가로 가면 갈수록 법은 별로 없습니다. 이 세상
    에 존재하는 국가중 야만 국가도 아니면서  법도 없이 가장 유토
    피아적인 나라가 있다면 바로 티베트입니다. 티벳에는  법이 여섯
    개밖에 없습니다. 그곳은 법 덕 일체라고 해서 덕이 곧  법이 되
    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라고 하는 나라는 왜  법이
    점점 발달되어 가지 않으면 안되는가?  특히 미국같은 나라는 연
    방법, 지방자치법 등 하여 우리나라보다 법이 더 세밀하고, 더 많
    고, 더 까다롭고, 더 심합니다. 그 이유는 각자가 자기 주장이 강
    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강하면 강할수록 인권을 존중해  주는 대신 사회질서를
    어기며 법을 위반할 때는 인권보다 법의  집행을 더 강하게 하게
    됩니다. 즉 개인적인 인권이 강하면 강할수록 법도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 앞에는 만인이 평등합니다.  그것은 법은 거의 개인
    사정에 관계치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법은 사실 점점 약해져야만 좋은 나라입니다. 티베트는 법이  6
    개밖에 없으면서 감옥도 없습니다. 그 나라에서 가장 값비싼 금속
    은 은입니다. 금은  일반인들이 사용을 못합니다.  금은 종교적인
    의식으로만 쓰기 때문에 길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승려는 집을 수
    있지만 일반인은 거의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값어치를 따지기
    이전에 그것은 만져서는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
    이 가장 비쌉니다.
      티베트에서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의 잘못을 저지르면
    은으로 팔찌를 만들어서 채워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팔찌를 차고
    다니면 모두가 범법자로 알기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습
    니다.
      법은 약해져야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수양을  한다고
    하면 자꾸 법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흔히 "인내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가슴에다 법을 만들어서 그걸 지키는 사람이 있습
    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그 사람에게서는  덕이 흘러나오지
    를 않습니다.
      [수풍정] 괘는 우물을  뜻합니다. 상괘는 물을  뜻하는 괘이고,
    하괘는 바람을 뜻하는 괘이면서 동시에 나무를  뜻하는 괘입니다.
    그러면 [수목정]이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안하고 [수풍정]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가만히 있는 나무가  아니라 바람처럼 움직일 수
    있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즉 움직인다라는 것을  강하게 표시해
    주기 위해서 그렇게 명칭한 것입니다. 그래서 물밑에 나무가 들어
    있는 것이 [정(井)]괘의 상인데, 여기서  나무는 두레박을 뜻합니
    다.
     
      이 세상에서 제일 터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최
    소한도 맨 처음에는 이성을 갖고 사랑을 시작합니다. 이성을 통해
    서 사랑할 때 사람들은 사랑을 자기한테 묶어두려고 합니다. 그런
    데 상대편이 나한테 묶이느냐 하면 안묶입니다. 처음에 남녀가 사
    랑할 때는 너무나 달콤하고 즐겁습니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에게
    매우 잘해줍니다. 그러다가 차츰 차츰 서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
    합니다. 언성이 높아지는 이유는 묶어둘 수 없는 것을, 들어올 수
    없는 것을 자꾸 묶어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는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지게 됩니다. 나 자신에게 누구를 묶어 두려
    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스스로한테 묶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
    정으로 사랑을 원한다면 상대편을 묶어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물이라고 하는 것은 묶어둬 버리면 곪아서 썩어버립니다.  썩
    은 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퍼내어 써야  됩니다. 퍼내서
    쓰게 되면 상황이 나를 묶어 놓는 것이 아니고, 현재 묶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나로 인하여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그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수풍정]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
    리가 받은 교육은 스스로를 묶어 두느냐 못 묶어두느냐의 연습을
    주로 해왔습니다. 스스로를 풀어놓는 연습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물은 퍼내어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물은 마르지 않
    습니다. "정(井)은 우물을 뜻한다. 한 나라의  수도는 옮길 수 있
    으나, 우물은 옮기지 못한다." 우리 내부에 있는 '생명의 샘'은 옮
    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마르지도 않습니다.
      "땅속에 줄기차게 샘솟는 근원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주와 직접 연결되어져 있는 곳이며, 또  신과 직접
    연결되어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흡한  인간들이 스스
    로 자기 자신의 우물에 돌을 던지고, 자꾸 흙을 부어서 메꾸어 버
    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메꾸어진 인간들과 같이 있으면 아주 피곤
    해지게 됩니다. 그 인간들은 회의를 하면 꼭 싸웁니다.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와서 다른 문으로 나갑니다.
     
      "좋은 우물은 항상 맑은  물을 가득 담고 있어서  줄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 인간이 보통 뭔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갑자
    기 일을 할 때 우물은 넘칩니다. 보통 맨처음에 마음먹고 할 때는
    한 며칠동안 넘치도록 합니다. 그 다음에는 삼일이 지나가 버리면
    도 팍 줄어버립니다. 때문에 줄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삶을 살
    도록 해야 됩니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누구나가 자유롭게 우물을 쓸 수 있다."
    즉 누구에게나 골고루 다 혜택을 베풀 수 있으며, 모든 것에게 미
    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취미가 아닌 것은 못한다고 합
    니다. 또 자기가 아는 것이 아닌  것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
    람은 스스로 우물을 막고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취미는 있
    습니다. 그러나 취미가 같지 않더라도, 구질구질한 일일지라도 생
    명력은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물이 사람을 길러주면 제한이 없다." 우물이 사람을 길러주
    면 제한이 없지만 사람이 우물을 자꾸 제한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우물의 물은 저절로 사람의 입에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물의
    물을 퍼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레박입니다. 그 두레박은 바로
    가르침입니다. 가르침을 자기 관점에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마
    음에 드는 것은 선택하고, 들지 않는 것은 배척하는  일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우물을 뚜껑으로 막고 있는 것이며, 결국  맑은 물을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금방 떠서 마실 수 있건만 어떤 사람은 두
    레박질을 하지 않거나 두레박을 뒤집어 놓습니다.
      우물이 자기 자신한테 고정되어 있으면 [정(井)]괘는 아주 흉한
    괘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한테 고정되어져 있는 사람은 세
    상이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서울은 옛날의
    서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변해가는  것을 못 느끼는 인간이  바로
    꽉 막힌 인간입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세상이 엄청나게  빨리 돌
    아가고 있다는 것을 못느낍니다. 스스로 정지되어져  있는 사람은
    정지된 것밖에는 못봅니다.
      "믈속에 넣어서 물을 떠올리는 것이 우물이다." 그러기 위해서
    는 먼저 물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물속에 들어가지 않고 물위에다
    가 자꾸 무언가 법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나  자신의 만든 법,
    사실 그 법이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구속시키고 있습니다.
     
        대상. 나무위에 물이 있는 것이 [수풍정]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국민을 위로하고 권장하고 도
        와준다.]
     
      이것은 군자가 아닌 사람은 하지 못합니다. 군자가 아닌 사람을
    가르치면 우물을 막는 것을 도와주게 됩니다.  누군가 내게 "선생
    님 저는 도둑질 하는 것이  취미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라. 단지 도둑을 당하는 사
    람한테 피해가 되어서는 안되며, 모두에게 피해가  되어서는 안되
    며, 너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상관없다." 또 누군가 내게 "저는 누
    군가를 죽이고 싶습니다." 하고 물으면, "첫째,  감옥에 가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하라. 둘째, 그가 죽어서 기뻐하는  일이라면 하라.
    셋째, 그렇게 하여 네가 기쁘다면 나 역시 너와같이 기뻐하리라."
    하고 나는 대답할 것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두레
    박이 퍼진다면 나는 조건을 달아서 그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전
    부다 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첫 번째 음효.  우물이 흙탕물로  더러워지면 아무도
        마시지 않는다. 버려진 옛 우물에는 새도 안 오는 법.
        사람도 인격이 비열해지면 세상 사람에게  버림을 받
        는다.
     
      첫 번째는 음효로서 자기 마음 먹은데로 멋대로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샘을 내어 쓰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욕심  때문에 나오는
    에너지를 스스로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악인보다 더 나쁜
    것은 옳다고 고집하는 자입니다. 그런 인간들은  우물을 흙탕물로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도 그  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또
    그자들은 "나는 옳으니까 이것은 못한다."하고  전부 다 떠나갑니
    다. 그런 사람한테는 새도 오지 않고 세상이 버리게 됩니다. 맑은
    물은 빛이 통과하지만 흐린 물에는 빛이 투과하지 못합니다. 그러
    나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흐
    린물에서 고기가 노니는 것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인격이 비열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 여기
    서 인격은 윤리, 도덕적 인격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주역에서 말
    하는 군자는 그러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인격은 흙탕물에 들어간 인격에 불과합니다. 나의  생각을 고집해
    서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될 수 있는 일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인격은 자기 사상, 자기 옳음에 스스로 사로  잡히지 않는
    인격입니다.
     
        두 번째 양효. 아까운 우물물이 개울물처럼 흘러가서
        겨우 어린 붕어를  길러주고 있다.  두레박이 깨어져
        물이 새니 사람이 마실 수 없다. 훌륭한 인재도 등용
        하여 주는 이가 없으면 이와같다.
     
      하기 싫지만 억지로라도  에너지를 내어  쓰려고 노력을  하면
    "아까운 우물물이 개울처럼 흘러가서 겨우  어린 붕어 새끼를 길
    러주고 있는" 그 정도는 나온다는 뜻입니다. 군대라는  곳이 마지
    못해 하는 곳입니다. 군대가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
    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군대는 전부 다 요령이라고 합니다. 그
    러나 엄청나게 어려운 일을 전부 다 군대가 합니다. 과거 깊은 산
    중의 꼬불꼬불한 도로들, 거의 다  군대가 닦은 것입니다. 그것도
    불도저와 포크래인이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삽들고 닦은 것입니
    다. 우리의 생명의 샘은 쓰기만  하면 에너지가 나옵니다. 에너지
    를 내어쓰는데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못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명에너지를 내어 쓰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두레박이 깨어져 우
    물물을 퍼올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또 못하겠다고  자기 고집만
    하는 사람은 무조건 훌륭한 인재가 아닙니다.
     
        세 번째 양효. 우물을 깨끗이 쳐내어 맑은 물이 고였
        건만 먹지 못하니 내 마음이 슬프다. 이 우물을 퍼올
        려라. 왕이 현명하여  인재를 등용한다면  함께 복을
        받을 것이다.
     
      먼저 나 자신의 우물을 깨끗이 치우려면 지금까지 기존에 생각
    했던 나에 의한 나의 생각,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믿고 있는 것으
    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그래서  맑은 물이 고여 있는  것을
    내어 쓸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우물물을 퍼올려라." 즉 못한다
    고 하지 말라. 내가 판단해서 좋다고  가고, 싫다고 가지 않는 짓
    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왕이 현명하여 인재를  등용한다면 함께 복을  받을 것이다."
    훌륭한 사람은 인재를 등용하여  같이 훌륭한 일을 하게  됩니다.
    훌륭한 일이란 무엇인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을 두루 펴서 그
    것이 온 천지에 미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온 천지에 복을 줄 수
    있도록 덕을 베푸는 것, 그것이 바로 [수풍정]입니다.
      [정(井)] 괘는 위로 올라갈수록 "좋다"라는 쪽으로 나가고 있습
    니다. 많은 주역의 괘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좋지 않다"라는 요소
    가 많아지며 그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괘는  샘이 흘
    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올라가면 갈수록  좋아져서 나중에는 엄
    청나게 좋아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입니
    다. 수양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해야할 것이 바로  흙탕물을 벗겨내
    는 일입니다. 그리고 벗겨냈으면 꾸준히 밀고 나가야 됩니다.
     
        네 번째 음효. 우물의  안 벽을 벽돌로  쌓아 깨끗이
        수리한다. 탈은 없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중 '자로'가 물었습니다. "현자가 거지와 같은 소인
    배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당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우주를
    논할 만큼 현명한 석학들이었는데  생활은 겨우 세끼  굶는 것을
    면할 정도로 거지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로가  물은 것입니다.
    공자는 "현자나 소인배나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소인배는 배가 고프면 도둑질을 하거나 강도짓을  하지만, 현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우주 밑에 거지나 성자나  같은 것입니다.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같은 것입니다. 우주는 수없이 많은 삼라만상을 펼치고 있으
    나 그 모든 만물은 평등합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중심, 즉 핵이 있기 때문이며, 그 핵은 우주의 핵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핵을 우리는 영혼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현자와  소인
    배가 다른 점은 현자는 아무리 마음이 원한다고 하더라도 영혼을
    어지럽히거나 팔아서 자신의 영혼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배가 고
    프다고 해서 영혼마저 배고픔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인
    배는 핵을 소중히 여기고 핵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도적질이라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물의 안 벽을 벽돌로 쌓아  깨끗이 수리한다." 이는 핵심을
    분명히 한다는 뜻입니다. 핵심이 뚜렷해야 정신과  마음이 올바로
    쓰여져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핵이 진실로  강하게 원
    하면 마음을 통해 결심을 하게 되고  정신을 통해서 많은 아이디
    어를 만들어 내게 되며, 그 에너지가 밖으로 번져  나가면 드디어
    만물이 핵이 원하는 데로 들어오게 됩니다. 발명가들이 발명을 할
    때는 느닷없이 발명하였다고 합니다. 연구실에서 발명된  것은 거
    의 없습니다. 노벨이 고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려고 애를 썼지만,
    실험에 실패하여 공장이 파괴되고 자기 동생이 죽고, 자신도 다쳤
    습니다. 그러나 노벨의 핵은 슬픔에 젖지 않고 좌절하지 않았습니
    다. 드디어 정신과 마음이 다 지치고 몸마저 지쳐  쓰러졌다가 갑
    자기 눈을 떴을 때  액체 다이너마이트가 뚝뚝  떨어지면서 땅에
    흡수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고체 다이너마이트가 발명 되었습니
    다.
      핵을 위해 진정으로 정신과 마음이  쓰여지는 것은 "중앙을 위
    해서 마음을 쓴다."고 하여  충심(忠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핵
    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과 정신이 조금 손해 본다 싶으면
    어떻게 할 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은 충심을 지키지 못합니다. 이
    런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끌어 당기는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런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다섯 번째 양효. 우물이  맑으니 한 샘물을  먹을 수
        있다. 속에서 솟고 있는 원천이 좋기 때문입니다.
     
      "속에서 솟고 있는 원천이 좋기  때문입니다." 더렵혀 지지 않
    고 분명한 영혼을 통하여 샘솟는 원천에서 살아야 합니다. 일본이
    오늘날 저렇게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2차대전때 항복을 할
    망정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사무라이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
    니다. 과거 한국에서 전쟁이 날 것같으니까  미국으로 도망하였던
    사람들. 이제 한국이 잘살게 되니까 다시 들어오려고 하는데 그렇
    게 원천이 맑고 깨끗하지 못하면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여섯 번째 음효. 우물에 물을 긷고 뚜껑을 잠그지 말
        라. 우물은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주어야 한다.
     
      "우물에 물을 긷고 뚜껑을 잠그지  말라." 뚜껑을 잠그면 안에
    있는 물은 더 이상 옳은 물이 아닙니다.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내가 옳은 것"은 곧 잘못입니다. 눈은 항상  바깥으로 나가 있어
    야 하고, 바깥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나 뚜껑은 단단히 만들
    어 놔야 됩니다. 뚜껑을 닫지는 말아야 되지만 그래도  우물의 벽
    은 단단히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천지신명의 가호가  있을 것
    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346
  • 50. 화풍정(火風鼎)
    『 고정관념을 버린다 』
     
     ○     자식을 얻기 위해서 첩을 얻을 수 있듯이 나는 그대
     ●     들에게 얼토당토한 질문을 합니다.  "그대는 가정을
     ○     떠나서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즉 찌꺼기를  버리
            기 위해서 솥을 뒤집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
     ○     다. "예"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네  가정도 지킬 수
     ○     없는 네가 어찌 성리(性理)를 지키겠느냐?" 하고 말
     ●     합니다. 그러나 "네, 하지만 제 가정은 어찌하면 좋
            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네 가정을 지켜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
            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가정을 버리면서 어떻
            게 따릅니까?"라고 말한다면 나는 다만 빙긋이 웃을
            뿐 그대를 가정으로 돌려 보낼 것입니다.
     
                         화풍정(火風鼎)
     
        [정(鼎)]은 크게 발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괘는 솥
        을 상징한다. 나무로 불을 때서 삶고 익힌다.  성현은
        삶고 익힌 제물로 하늘의 상제를 제사하고 천하의 어
        진 사람을 돕는다. 겸손한 마음으로  남의 말과 의견
        을 존중하니 눈과 귀가 총명해 진다. 유화한 덕을 가
        진 이가 제왕의 지위에 있어서 훌륭한 신하들과 뜻이
        서로 호응한다. 그러므로 나라가 크게 발전하는 것이
        다.
     
      [화풍정(火風鼎)]은 위의 괘가 불을 뜻하는 괘입니다. 불은 활
    활타므로 양성에너지 입니다. 그런데 활활타서 날아가지 않고 지
    금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은 안으로 강하게 응집이 되어져 있기 때
    문입니다. 음성에너지는 응집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화(火)는 불
    을 뜻하면서도 안으로 응집되어 있는  상태에서 바깥을 잘  살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명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래 괘는 밑으로는  음성에너지이기 때문에 가라앉아 있으며,
    위로 퍼져 나가는데 퍼져나가는 것이 한  번 더 퍼져나가면 그것
    이 바람입니다. 또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마음은 강하게 하되, 안
    으로는 자기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다 하여 겸손을 뜻하는 괘이기
    도 합니다.
      위로는 현명하고 안으로 겸손하게 임하게  되면 하늘은 온전함
    을 그 사람에게 주게  됩니다. 그래서 [화풍정]은 크게  발전하는
    괘라고 했습니다.
      또 하괘는 밑으로는 깊이  깊이 파고 들어가서  흙을 움켜쥐고
    위로는 쭉쭉 뻗어올라가기 때문에 나무를 뜻하기도  합니다. 나무
    와 불이 모여지게 되면 무언가를 끓이고 태울 수가  있습니다. 때
    문에 [정(鼎)]괘는 "나무를 불로  때서 삶고 익힌다."라는 뜻입니
    다.
      정(鼎)은 가마솥을 나타냅니다. 솥은 무언가  담아서 그것을 끓
    여 다른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상태는  바람을 타
    고 나르듯이 굉장히 크게 발전합니다. 성현은 "삶고  익힌 재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하늘로부터의 행복에 대답해서 "천하
    의 어진 사람을 돕는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인은 무슨
    일이 크게 발전했을 때, 자기가 잘나서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아니
    하고 겸손하게 "이렇게 잘 될 수 있게  하늘이 도와주셨구나." 해
    서 그 고마움을 하늘에 돌린다라는 뜻입니다.
      옛날 예수가 말했듯이 모든 영광은  하늘로 돌린다라는 뜻입니
    다. "내가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
    문에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은 그 잘
    된 것은 하늘에 고마움을 느끼고, 하늘의 뜻에 맞추어서  모든 이
    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또 소인배가 못하겠다는 일
    을  하늘을 대신해서 정성껏 가꾸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욱 더 크게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잘되면 내가 잘했다  하고 자만심에
    차서 자기를 내세웁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는 길
    이 막힙니다. 그래서 성인은 잘될 것은 하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라고 해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낸다라고 했습니다.
      상괘는 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총명하다."라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괘는 나무를 상징하는 괘이기도  하지만 겸
    손을 뜻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크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머리
    를 총명하게 쓰는 것도 필요하고, 자기 자만에 빠지지  않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모든 영광을 하늘에 돌리고  항상 아무 것도 없는
    듯한 새로운 기분으로 해야됩니다.  그것이 바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길입니다.
     
        대상. 나무 위에 불이  있는 것이 정(鼎)괘의  괘상이
        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군주의 자리를 바르게 지
        켜 하늘의 명령이 자신에게 정착하도록 한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군주의 자리를 바르게 지켜 하늘의 명
    령이 자신에게 정착하도록 한다." 먼저 자기의 위치를 정하고  세
    상을 움직여야 합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자꾸 먼저 세계를 재패하
    려고 합니다. 대체로 정치가들은 "세계의  종"이라는 마음을 가져
    야 하는데 입으로는 국민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진실은 자기 욕
    심을 세상에 펼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을
    세상에 펼치려고 해서 세계를  재패한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또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정치를 하려면 먼저 자기의  위치를
    분명히 정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찾은 사람이  그
    위치에서 자기가 얻은 것을  베풀었을 때 그러한  사람들이 전부
    다 인류를 끌고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지배 당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피조체(被造體)
    이든지 간에 자기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사람이 세계를 움직이는
    주인공입니다.
     
        첫 번째 음효. 솥을 거꾸로 뒤집는다. 도리에 어긋나
        는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솥바닥에 있는 찌꺼기
        를 쏟아버리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찌꺼기를 버려
        야지 거기에 소중한 물건을 삶아서 익힐 수  있는 것
        이다. 첩을 두는 것이 아들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허
        물은 없다.
     
      "솥을 거꾸로 뒤집는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는 먼저 남아있는 찌꺼기를 전부 다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때에 따라서는 욕먹을 짓이  필요합니다. 솥을 뒤집어 놓는  것은
    남들로부터 비난받을 짓이지만, 그것에 대한 심지가  분명한 것이
    라면 반드시 이와같은 과정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이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찌꺼기를 버려야지
    거기에 소중한 물건을 삶아서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찌꺼기를 버
    려야 거기에 소중한 물건을 삶아 익힐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은 사실 미국보다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었는데 지금
    동양이 미국보다 뒤지고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정직한 사람들입
    니다. 동양 사람들은 의리있는 사람들입니다. 의(義)와 정직은  곧
    이 곧대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의(義)는 상당히  입체적입니다. 선생이 학생을  때리는
    것은 동양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미국사람들은 선생님이 때리면
    폭력을 휘둘렀다고 경찰에 고발을 합니다. 그러나  선생은 자제력
    을 가지고 학생이 미처 모르는 그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서 때리
    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것이 의(義)입니다. 미국사람들은 불러다가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 해줍니다. 또 들은 그대로를 이해하도록 설
    득을 시킵니다.
      이것이 정직과 의리의 다른 점입니다. 그런 식으로 정직하게 되
    면 노력한만큼 그 이상의 알파가 나올 수 없습니다.  미국 물건을
    사면 상당히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그
    래도 우리 동양에서 가장 발전된 일본은 동양의  "의(義)" 정신이
    있어서 실용적인 면이 있으면서 동시에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습
    니다. 일본 제품이  모양이 매끄럽고 이쁜  것은 몇 천년동안  의
    (義)가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발전해 봐야
    쓰기에는 이상이 없지만 그 이상의 것이 담겨있지 않듯이 정직만
    으로는 큰 발전이 없습니다. 때문에 뜻한 바를 하기  위해서는 윤
    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첩을 두는 것이 아들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허물은 없다." 부
    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부인을  얻는 것은 한 여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인권을 저버리는 것같지만, 자식을 얻기 위해
    서는 첩을 얻는 것도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옳은  것은 아
    니지만 허물될 것은 없다. 즉 그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담기 위해
    서 솥을 거꾸로 해서 엎어버릴 지라도 그것에 대해 허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양효. 솥에 물건이 담겨있다. 조심하여  다루
        어야 한다. 내 짝이 병이 있으니  내 그와 함께 하지
        못한다. 마침내 허물은 없으리라.
     
      "솥에 물건이 담겨있다. 조심하여 다루어야 한다." 솥을 엎어서
    다 떨궈낸 다음에 이제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는 처음부터 좋지
    않은 불순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첫
    번이 잘못되면 잘못이 잘못을 낳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짝이 병이 있으니 내 그와  함께 하지 못한다." 무언가 찌
    꺼기를 버리고 새로 시작할  때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병이 있는 친구를 끌어들여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나한테 현재 이
    득이 된다하여도 뇌물같은 것을 잘못받으면  그 뇌물이 보석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수갑으로  변하여 나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는 양효이므로  무언가 해낼 때  애초부터 크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넣어서 꺼림칙한 것은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
    다. 조심해서 다루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양효. 솥  귀가 변하였다. 손댈 길이  없으니
        어찌 할 길이 없다. 솥안에 삶아 놓은 기름진 꿩고기
        도 먹지 못한다. 비가 내려서 솥이 다시 식어 걱정은
        없어질 것이다. 결국은 길하다.
     
      "솥 귀가 변하였다." 찬 것이 뜨거운 것으로 변하였고 쌀이 밥
    으로 변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하고자 해서  행동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또 다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속이 거북해서 방귀를 뀌었습니다. 나는 속이 좋지 않은  것을 좋
    게 하기 위해 한 행동이지만 옆의  사람들이 냄새가 난다고 인상
    을 찡그리고 있습니다. 이 부분까지를 알아야 합니다.
      "손댈 길이 없으니 어찌 할 길이 없다." 밥이 맛있게 되었다고
    빨리 밥먹자고 솥에 달려들면  솥이 뜨거워져 있기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으므로 결국 밥도 먹을 수 없습니다. 즉 무엇인가 우리
    가 행동하게 되면 거기에는 나도 모르는 제 3의 작용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비가 내려서 솥이 다시 식어  걱정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끝내 가서는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달은 솥도 식는 것처럼 바로
    그와같은 점을 조심하면 크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정
    도에 지나치게 되면 과열이라는 상태가 되어서 기계가 망가질 수
    있습니다. 과열되기 전에는 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사
    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열되지 않게 쉬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는   그 일로 인해서 자기도  모르게
    벌어질 수 있는 것을  미리 생각하고 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 사람만이 영원히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양에너지는 번지고 번져 나가는 것이므로  무언가 생각지도 않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으므로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네 번재 양효. 솥발이 부러져서  공식 연회석에서 맛
        좋은 음식을 엎질러  버린다. 정말 어찌하면  좋은가.
        그 꼴이 수치스럽다. 흉하다.
     
      "솥발이 부러져서 공식 연회석에서 맛 좋은  음식을 엎질러 버
    린다." 맛 좋은 음식을 만들었다고 함부로 좋아하면 맛 좋은 음식
    이 엎질러져 버립니다. 아직 익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너무 큰 만
    족을 기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로부터 좋은 결실이 맺어
    질 수 있습니다. 겸손을 얻지 못하고 자만을 얻은 사람이 바로 이
    와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크게 발전을 하기 위
    해서는 자기 만족의 차원을 낮추어야 합니다. 공식 석상에서 맛좋
    은 음식을 엎질러서 공식적인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
    번째와 네 번째 효, 즉 음식이 익었다고 해서  신난다고 달려들지
    말 것이며, 좋다고 너무 만족해 하지 말고 겸손의  덕을 쌓아야겠
    습니다.
     
        다섯 번째 음효. 솥에 황금의 귀와 고리가  달려있다.
        훌륭한 솥이다. 어진  제왕이 마땅한  지위에 있어서
        그 덕행이 충실하다.  한결같이 하여  변함이 없으면
        나라의 발전은 순조로울 것이다.
     
      "솥에 황금의 귀와 고리가 달려있다. 훌륭한 솥이다." 가마솥에
    금덩어리가 달리면 훌륭한 솥이 됩니다. 금과 쇠는 성질이 다릅니
    다. 금과 쇠를 붙인다고  해서 덜커덕 붙는  것이 아닙니다. 여간
    고생해서는 서로 붙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두가지의 성질을 하나
    로 교합시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기존에  있는 질서에 자기의 창
    조물을 결합시켜 새로운 성과를 내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6효 가운데서 가장  높은 인간의 차원이면서 음효
    로 이루어져 있고 두  번째 양효와 정응관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어진 임금이라고 했습니다. 그 어진 임금이 쇠와 금을 붙일 수 있
    을 정도로 겸손한 노력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일을 돕는 신하가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나라의  발전도 순조로울 것이고,
    또한 그와같은 자세로 일을 할 때 그 사람의 덕행은 충실할 것이
    라고 공자는 풀이해 놓았습니다.
     
        여섯 번째 양효. 솥에 옥으로 만든 귀가 달렸다. 강과
        유가 서로 조화되어 크게 길하다.  순조롭지 않은 것
        이 없다.
     
      쇠하고 옥이 부딪치면 옥이 깨지는가? 쇠가 깨지는가? 옥이 깨
    집니다. 옥은 쇠보다 약합니다. 그런 약한 옥과 강한 쇠를 결합시
    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단계가 이
    루어지면 그와같은 어려운 일도 해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
    서 "솥에 옥의 귀가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쇠와 옥, 즉
    "강과 유가 서로 조화를 이루니 크게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얻기 위해서 첩을 얻을 수  있듯이 나는 그대들에게 얼
    토당토한 질문을 합니다. "그대는 가정을 떠나서 나를 따를 수 있
    겠는가?" 즉 찌꺼기를 버리기 위해서 솥을 뒤집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예"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네  가정도 지킬 수 없
    는 네가 어찌 성리를 지키겠느냐?"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네, 하
    지만 제 가정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네 가정을
    지켜라. 내가 거기에 임할 것이다."라고 나는 말할 것입니다. 그러
    나 "그럴 수  없습니다. 가정을 버리면서  어떻게 따릅니까?"라고
    말하면 나는 빙긋이 웃고 말 뿐입니다.
      그런 첫 번째 단계가  지나서 정성껏 하다보면  정성껏 했다는
    그 자체가 자기도 모르는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그 영향을
    조심하고 무언가 잘 되었을 때 너무나  마음의 만족을 찾지 말고
    겸손으로 정성을 다하면 드디어  쇠에다가 금을 장식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집니다. 또 그 뒤에는 쇠와  옥, 즉 전혀 다른 것을
    결합시킬 수 있는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길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338
  • 29. 감위수(坎爲水)
    『 곤란이 겹치다 』
     
     ●    위인이건 범인이건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겁이
     ○    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범인은 겁이  난다고
     ●    해야할 일을 안하지만, 위인은 겁이 나지만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해야할 일을 반드시 합니다. 이것이 바
     ●    로 위인과 범인의 차이입니다. 범인은 물결에  휩쓸
     ○    려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고 헤메면서 떠내려  가지
     ●    만, 위인은 물결 위에 올라서서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 보고 순서에 의해 일을 처리합니다.  위인들이
            겁이 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뜻을  저 높은
            곳에 세우고 그 뜻의 완성을 위해 두려워하고  나태
            해지는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위수(坎爲水)
     
        [습감(習坎)] 은 험난이 겹치는 상태다. 그러나 물은
        흘러가므로 차서 넘치는 일이 없고, 험난한  곳을 갈
        때도 낮은데로 흐르는 기본 본성을 잃지  않는다. 사
        람도 위난에 당면하여 성의를 변하지  않으면 난관을
        돌파하고 형통하게 된다. 마음속에 강건한 신념을 갖
        고 흔들림이 없이 전진하면 앞길에는 성공이 있어 남
        의 존경과 찬사를  받으리라. 하늘의 험난한  곳에는
        오를 수가 없거니와 땅위의 험난한 곳은 산천과 구릉
        이다. 임금과 제후들은 성벽을 쌓고 못을  파서 험난
        한 곳을 마련하여 그 나라를 지킨다.  험난을 그때에
        따라 대처하면 효용이 크리라.
       
      "[습감(習坎)] 은 험난이 겹치는 상태다.  그러나 물은 흘러가
    므로 차서 넘치는 일이 없고, 험난한 곳을 갈 때도 낮은데로 흐르
    는 기본 본성을 잃지 않는다." 이 괘는 주역 64괘중 험난한 4가지
    괘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주역의 원리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는
    어려운 일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데, 더 분명한 사실은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앞으로도 또 벌어질 것이지만 그래도
    이 우주는 절대로 쪼개져 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험난한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우주는 스
    스로 자기 자신을 해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
    서는 안됩니다. 벼락이 쳐서 나무가  쪼개지고, 홍수가 나서 초목
    이 휩쓸려 떠내려가도 자연이 자연 스스로를 해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다 자연을 지키기  위한 것들입니다. 인간도 이빨이  덧니가
    나면 일부러 이를 빼내고  틀니를 박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들여가면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지지고  볶고하고 있습니다. 그렇
    게 자기 몸뚱아리를 일부러 해치지만 그게  다 자신을 지키기 위
    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아무리 험난한 일이 벌어진다
    고 하더라도, 그것은 곧 최대의 안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획기적인 변화라고 생각하면 틀립없습니다. 그 변화에  항상 정신
    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이 괘는 굉장히 기분 나쁜 괘이지
    만, 비가 오고 난 뒤에 차라리 맑고 깨끗한 거리가  될 수 있도록
    그와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찬스이기도 합니다.
     
      [습감]은 위, 아래 모두 물을  뜻하는 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효 모두 정응관계를 이루고 있는 효는 하나도 없고, 자석이 N
    극과 N극끼리, S극과 S극끼리 서로 밀어내듯이 대응관계에  있는
    각 효가 밀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이 흐르고 있으면  뒤에서
    또 밀어낸다는 뜻입니다. 즉 물이  밀리고 밀린다, 홍수다라는 이
    야기입니다.
      "사람도 위난에 당면하여 성의를 변하지 않으면 난관을 돌파하
    고 형통하게 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천지인 중에 인간을 나타
    내는 가운데 효가 유일하게 양의 효로 되어 있습니다.  이 양효는
    계속 밀려오는 물에 밀리더라도 밀리는 것  위에 떠 있어서 물속
    에 침몰하지만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위의 괘도 양괘고 아래 괘도 양괘입니다. 무엇인가를 해내면
    서 자기 자신을 건재시키면, 즉 물난리가 나더라도 물속에 침몰하
    지 않고 종이나 나뭇대기  처럼 물에 떠 있으면, 물속에  침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물난리가 났다  하더라도 물난리 속안
    에 자기 자신을 묻지 말아라." "아무리 고통이  온다 하더라도 그
    고통 속안에 자기 자신이 빠져 들어가지  말아라." 왜냐하면 빠져
    들어간 사람은 못헤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무슨
    난리가 됐던지 간에 그 안에 묻혀들어갈 수 없는 나, 그런 영혼과
    기상, 신념을 지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파(世波)가 존재
    한다 하더라도 세파에 밀리지  않는 영혼.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이미 군자입니다.
     
      나는 뜻이 항상 산봉우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까  중
    간에서 산봉우리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산 안에 들어가면 산
    봉우리가 안보일 때가 있습니다. 높은 산일수록 더 더욱 그렇습니
    다. 아주 높은 봉우리도  올라가다가 보면 봉우리가 많아서  어느
    봉우리가 어느 봉우리인지 잘 모르게 됩니다. 길로 걸어가다 보면
    한없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서 살다 보면  길을 잃
    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속에 강건한 신념을 갖고 흔들림이 없이 전진하면 앞길에
    는 성공이 있어 남의 존경과 찬사를 받으리라." 세상은 어렵고 무
    서운 곳입니다. 나도  무섭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무서움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산봉우리가 보이지 않더라도, 뜻을 봉우리에 두
    고, 뜻을 위해 해낸다라고 하는 기상을 갖추고  아무리 어렵고 위
    험한 일이라도 받아들이고  노력하면서 현실에  조심하면 끝내는
    어려운 과정을 무난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넘어가
    고 난 뒤에는 지난 일을 얘기하면 말하는 사람도 즐겁고 듣는 사
    람도 재미있는 아름다운 결과가 됩니다.
     
      위인이건 범인이건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겁이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범인은  겁이 난다고 해야할  일을 안하지만,
    위인은 겁이 나지만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해야할 일을 반드시 합
    니다. 이것이 바로 위인과 범인의  차이입니다. 범인은 물결에 휩
    쓸려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고 헤메면서 떠내려 가지만,  위인은
    물결 위에 올라서서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 보고  순서에 의해
    일을 처리합니다. 위인들이 겁이 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뜻을 저 높은 곳에 세우고 그 뜻의 완성을 위해 두려워하고 나태
    해지는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갈 수 있는 사람은  지평선을 보고 갑니다. 배도  멀리가기
    위해서는 수평선을 봐야 합니다. 기차 여행도 먼 데  바라보고 가
    면 지루한줄 모릅니다. 가까운데를 바라 보면  어지럽고 현기증이
    일어납니다. 배밑에서 물갈라지는 것을  보면 어지럽습니다. 수평
    선을 바라보고 가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흙먼지  무섭다
    고 나가지 못하는 바람은 바람도 아닙니다.  흙먼지가 일어나더라
    도 바람이 계속 불어나가면 흙먼지는 바람 뒤에서 따라오며 먼지
    는 먼지대로 정리되고 바람은 저 언덕을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도 무슨 일을 하다 보면 불편한 점도 많을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흙먼지가 일어날 것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저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마음에 길을 미리  잡아
    서 나아가면 흙먼지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중간에 방향을 잃고  혼미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야호! 야호!"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는 길
    을 잃어 헤매일 때 서로 위치를 확인하며 정상을 향한 방향 감각
    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정상을  향한 뜻을
    버리지 말고 수시로 자신을 점검하며 나아가면 반드시 정상에 도
    달할 수 있습니다. 백두산 천지에 뜻을 둔 사람은  중간에 어렵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올라가 천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지
    가 좋다는 말만 듣고 올라간 사람은  중간에 험한 코스를 만나면
    "아이고 힘들다." "무섭다." "못가겠다." 이렇게 되고 결국은  못올
    라가게 됩니다. 왜 못올라갔느냐? 뜻이 천지에 있지  않았기 때문
    에, 천지를 보면 재미있겠다라고 하는 자기 자신에 있었기 때문에
    못올라간 것입니다.
     
      "임금과 제후들은 성벽을 쌓고 못을 파서  험난한 곳을 마련하
    여 그 나라를 지킨다. 험난을 그때에 따라 대처하면  효용이 크리
    라." 주역은 세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험난에  빠졌을 때
    빠져 나오는 방법, 둘째 험난에 빠지지 않고  험난이 그냥 지나가
    게 하는 방법, 셋째 험난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험난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이 험난도 때에 따
    라서는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도쿠가와 이예야스는 자기 집 근처에 호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험난한 곳을 만들어  자기를 지키려 하였습니다.  고슴도치의 털,
    스컹크의 냄새 이런 것들이 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험난이라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살이가 이렇게 험난하기  때문에 세상은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험난한 물결에 휩쓸린다 해도 거기에 빠
    지지 말고 머리를 들면 물결은 그냥 지나갑니다. 그  물결을 건너
    가면 그동안 고난이었던 물결이 이제는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됩
    니다. 그 물결로 인해 자신은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방법은 단순해야 합니다. 한 통의 성냥을 높이
    쌓아 올리려면 단순해야 된다는 것. 가장 보기 좋게, 가장 견고하
    게 높이 쌓아 올릴 수 있으려면 단순해야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
    면서 복잡하게 많은 생각을 하되 결과는  단순하게 나올 수 있도
    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어진 여건하에서 가장 높이 쌓을 수 있
    는 것입니다.
      나를 높이 쌓아 올릴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되, 결과
    적으로는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 '비가 오면 안되지.' '해맑으면 눈
    이 부셔서 어떻게해.' 이러면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를 자
    기 마음에 정해서 단순하게 시작해야 합니다.  무조건 단순하게가
    아니고, "면적을 얼마만큼 잡아서,  공간을 얼마만큼 줄여서 해야
    하는가?" 하는 뒷 계산을  해놓고 단순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자꾸 반복해서 내가 어느 부분 실패했는지,  왜 내가 중간
    에서 무너졌는지, 이걸 자꾸자꾸 살아가면서 경험을 하다 보면 이
    제 곧 완벽한 방정식이 서게 됩니다.
     
        대상. 홍수가 겹쳐져서 오는 것이  습감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항상 덕행을 닦고  교육에 전
        념한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항상  덕행을 닦고 교육에 전념한다."
    "군자는 곤란을 보고 이를 옳게  수용하고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
    법을 교육하는데 전념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도덕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덕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것은 도덕이 아니라 인덕(人德)입니다. 도(道)의 덕(德)! 도
    덕은 인간의 덕이 아닙니다. 인덕(人德)은 "무엇을 주면 상대방에
    게 좋다."라고 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취하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은 인간의 입장에서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을에 햇빛이 쨍쨍 내리 쬐고 쌀이  익어 가는 것은 도덕입니
    다. 홍수가 나는 것도 도덕입니다.  땅에서 물난리가 나지 않으면
    하늘에서 난리가 납니다. 하늘이 난리가 나면 지구는 깨어져 버립
    니다. 하늘에서 날 난리를 밑에서 치루어야 합니다. 그 난리는 인
    간에게 해로울 수 있지만 지구를 보존하기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로움을 주기 위
    해서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도덕 정신을  길러야 합
    니다. 그래야만 모든 난리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모든 난리를 포
    용할 수 있으며 그 난리위에 자신을 존재시킬 수 있는 길을 터득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음효. 물이 거듭거듭 닥친다. 웅덩이에 빠져
        헤어날 길을 모른다. 흉하다.
     
      "물이 거듭거듭 닥친다. 웅덩이에  빠져 헤어날 길을  모른다."
    첫번째 음효는 양의 자리에 음이 있기  때문에 아직 확고한 자기
    자신을 굳건히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뜻이 저 높은 곳 산봉우리에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난리에 빠져 가까운데만  정신을 팔고
    있어 현기증을 느끼고 헤메고  있습니다. 빨리 뜻을 높이  세우고
    그 난리로부터 한걸음 물러나와 난리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기강이 확실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겠습니다.
     
        두 번째 양효. 웅덩이에 빠져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성의를 다하여 길을 찾아  노력하면 웅덩이를
        당장에 벗어나지는 못하나 조금은 길이 열리리라.
     
      "그러나 성의를 다하여  길을 찾아 노력하면  웅덩이를 당장에
    벗어나지는 못하나 조금은 길이 열리리라." 뜻을 산봉우리에 두고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하고 미리 산등성이를 유심히 보아둔 사람
    은 길을 잃었다 하더라도 서서히 길이 하나씩 트이기 시작합니다.
    숲에 가리어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조심하여 나아가  조금 트인
    곳이 나오면 다시 주변 산등성이와 봉우리를 보고 판단하면 자기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심하는 심정으로 성의껏 나
    아가면 조금씩 길이 나타날 것입니다.
     
        세 번째 음효. 앞에도 난관, 뒤에도 난관, 위험에 직
        면하여 있는데 또 방해하는  것까지 있어 길을  막는
        다. 구덩이 속에 빠졌으니 몸부림 치지 말라. 마침내
        아무런 공도 없으리라.
     
      "구덩이 속에 빠졌으니 몸부림 치지 말라." 보통사람이 난관이
    닥쳐 앞뒤로 꽉 막혀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느끼면 겁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두려움에  빠져버리면 못헤쳐
    나갑니다. 등산을 하다가 길을  잃어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는데
    그나마 해까지 떨어져서  주위가 칠흑같이  깜깜해지면 암담하기
    이를데 없는 것입니다. 이때  두려움에 빠져 컴컴한 산악을  이리
    헤메고 저리 헤메면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진다던가,  맹수에게 공
    격을 받든가하여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바둥거릴 필요
    없이 아예 느긋하게 그 자리에서 텐트를  치고 주위에 불을 피우
    고 하루를 그곳에서 보낼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샘에 흙탕물이 있을 때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흙이 가라앉습니
    다. 하루만 지나면 맑은 물로 됩니다. '위에는  흙탕물이지만 밑에
    서는 맑은 물이 나오니까 위의 흙탕물만 퍼내면 맑겠지.' 하고 자
    꾸 물을 퍼내봐야 물은 맑아지지 않고  밑의 흙이 계속 일어나서
    더 진한 흙탕물이 되어 버립니다.
      차라리 가만히 기다리면 상황이 바뀝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
    은 분명히 알기 주의깊게 조심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무턱대도
    아무 것도 안하고 기다리면 오히려 지금보다 나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떤 때는 호황이 오고  어떤 때는 불황이 오기
    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우리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무의식이 미리 안테나를 세우고 감지하여  만들어내는 나를 보호
    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면밀하게 눈을 초롱초롱 굴려가면서 주의깊게  봐야합니다. 아
    무리 어려운 문제라 하더라도 그 상황에서 잠깐 떨어져서 유심히
    보면 꼬여있던 문제가 다시 제자리로 자리 잡혀가게 됩니다. 그렇
    게 자리 잡혀갈 때 길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음효.  예의와 절차는 검소하고  간략하면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친애하고 협력하면  마침내는 허
        물이 없으리라.
     
      여기서 임금은 다섯 번째 양효이고 신하는 네 번째 음효입니다.
    다섯 번째 효는 중정을 지키고 있는  양성 에너지이기 때문에 지
    금까지와 같은 구렁텅이 속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예의와 절차는 검소하고 간략하면서" 급한 상황이라고 당황해
    서 튀어나가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습한 일이  생길 때는
    마음을 소박하게하여 윗사람하고 상의하여 잘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절차가 복잡하여 창고에 불이 났는데 이것을
    과장에게 보고하고, 부장에게 보고하고,  또 이사가 검토하고하여
    사장에게 보고가 되면 물건은 이미 다 타고 없을  것입니다. 그래
    서 급한 것은 급한  것대로 신속한 보고와  조치가 이루어지도록
    절차를 단순하게 하고, 또 정상적인 것은 정상적인 절차가 이루어
    지도록 해야 합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친애하고 협력하면 마침내는 허물이 없으
    리라." 다급한 일이 있어도  나의 마음은 항상  담담해야 합니다.
    헐레벌떡 급한 마음에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또 말을 해도 중요
    한 사안을 빼뜨리고 말을 하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습니다. 침
    착하게 요점만 간략히 고위 의사결정자에게  말하면 윗사람의 신
    임을 살 것이며, 상하가 서로 통하여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져 난
    관은 무난히 해결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 양효. 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험난한 상태가 극점에 이르지는 않고 나란히 이미 평
        화함에 이르리라. 교만은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다.
     
      "험난한 상태가 극점에  이르지는 않고 나란히  이미 평화함에
    이르리라. 교만은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난관이 어느정도
    해결이 되고 있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야,
    이제는 잘되고 있구나. 앞으로도 잘되겠지." 하는 기분에 빠져 있
    으면 아직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라  마지막 고비를 남기고 있기
    때문에 크게 당하게 됩니다. 설사 지금이 고난의 끝무렵이기 때문
    에 비록 고난이 끝나게 될지라도 마지막에 큰 피해를 입게 될 것
    이며, 크게 고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정성어린 마음으로
    끝까지 조심하는 고삐를 늦추지 않으면 무사히 마지막 고비도 잘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섯번째 음효. 몸이 노끈으로 묶이어 가시덩쿨에 뉘
        어진다. 삼년동안 오래 흉하리라.
     
      다섯 번째에서 교만에 빠지면 이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음
    효이기 때문에 다시 주저 앉아 노는 것을 즐긴다면 "몸이 노끈으
    로 묶이어 가시덩쿨에 뉘어진다."가 됩니다.  최고의 지위에 있으
    면서 그 도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삼년동안  오래 흉하리라." 조
    금 한 순간 넘겼다고 마치 해탈한  부처님같이 느긋한 마음을 갖
    게 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몸이  노끈으로 묶이는 그런 절망감속
    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잘된다고 마치 다된  것처럼
    생각해선 안된다는 뜻입니다.
      번 돈은 항상 모아두되 모아둔 돈에  미련을 자꾸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알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 재
    산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대비해서  오늘
    움직이고, 오늘의 움직임이 내일의 보탬이 되도록 자기 만족에 머
    무르지 말고, 자기 기분에  들뜨지 말고, 항상 애타하는 마음으로,
    긴장감으로, 그러면서도  여유를 누리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조금
    벗어났을 때 그때 더 활발히 움직여서 이 세상이 평화롭게 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홍수속안에서 밀려
    내려가는 난재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안이  온다든가, 어려운 일이  닥친다든가
    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가  뚫고 나갈 장벽입니다. 그러나  상황에
    빠져있는 사람은 불안이 오게 되면 하기가 싫어지고 스스로 안할
    려고 문제와 자신을 차단시켜 버리고 맙니다. 어차피 한  번 시비
    가 붙어야할 사람이라면 외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
    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과감히
    부딛혀 이를 극복해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273
  • 천문노트 별자리판
    http://astronote.org/bbs/board.php?bo_table=astrodraw&wr_id=104475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9-06 조회 3201
  • 20. 풍지관(風地觀)
    『 세밀한 관찰 』
            
     ○    우리는 뜻이 있는 분명한 태도와 그에 걸맞는  확고
     ○    부동한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신념과  태도가
     ●    분명하면 매듭을 지을 수 있는 눈이 갖추어 지는 법
            입니다. 그러한 안목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눈에
     ●    보이지 않지만, 이 땅에 뚜렷한 구분을 지어내듯이
     ●    우리 인생의 반경을 뚜렷이 구분해 줄 것입니다. 봄
     ●    이라해서 땅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여름이라 해서
            땅이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땅에 봄과 여
            름과 가을과 겨울은  얼었다, 풀렸다, 따뜻했다, 쌀쌀
            했다 하는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바로 창조
            는 그와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제 3의  세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풍지관(風地觀)
     
        [관]은 투철하게 관찰한다는 뜻이다. 어진 천자는 위
        에 있어서 유화하고 겸허한 태도와 중정의 덕으로 크
        게 천하를 통찰하였다. 신에 대한 제사를 올릴때 이미
        손을 깨끗이 씻고 신전에 나아갔으나 아직 재물을 바
        치지 아니한 그 순간처럼 경건하고  정성된 마음으로
        있으니 그 엄숙하고 의젓함이 모든 인민으로 하여금
        우러러보고 감화하게 한다. 신령한 하늘의 법칙을 보
        라. 춘하추동이 그 순서를 어김이 없다. 성인은 신령
        한 하늘의 법칙을 본받아 교화를 세우니 천하의 인민
        이 심복한다.
        
            觀, 관而不薦. 有孚□若. 象曰, 大觀在上,
            順而巽, 中正以觀天下. 觀관而不薦, 有孚
            □若, 下觀而化也. 觀天之神道, 而四時不
            특. 聖人以神道設敎, 而天下服矣.
           
      땅위에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을 흔들어 두루두루 스며들게 합니
    다. 이것은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관찰이라 하는가? 어떤
    사람은 방안이 더럽다고 청소하라고 하면  비로 쓰레기를 쓸어서
    쓰레받기에 받아 휴지통에 버린다음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그대로
    방에 두고 청소를 다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쓰레기는 청소
    가 되었으나, 방의 입장으로 보면 비와 쓰레받기가 어질러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관찰이라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단지 보는 것만이 관찰은  아닙니다. 관찰은 관찰한 그  대상이
    완전해지도록 매듭을 지었을 때  비로서 관찰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듭을 지을 수 있는 눈이 없으면  아무리 관
    찰해봐야 이루어지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움직여야 합
    니다. 하다보면 결과가 나타나겠지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언가 매듭을 지어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사
    람은, 본인이 원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그와
    비슷한 것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라듐을 발견한 퀴리는 무엇인가 발명을  하려고 시작했던 사람
    입니다. 그 매듭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퀴리는 라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퀴리가 처음부터 라듐을 발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
    니다. 매듭이 라듐을 발견한 것입니다.
      에디슨이 수많은 것을 발명할  수 있었던 것도  매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듭을 갖고 시작했기 때문에 훗날 우리가 에디슨 신
    세를 거의 안지고는 살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
    습니다. 그런 매듭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을 아무리  두루두루 살
    펴보았자 아무런 것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매듭이 없는 사람은 그저  남의 비위가 맞추고, 남의  비위에서
    벗어나면 일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매듭이 있는 사
    람은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남이 뭐라 하든 말든 자기
    할 일은 자기가 매듭을 지어야만 스스로 속이 편할 수 없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또 매듭이 있는 사람은 내일과 남의 일의 구별이 없습니다.  매
    듭이 분명한 사람은 손발이 닳는 것을 아끼지  않지만, 매듭이 없
    는 사람은 나를 위해서만  일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자기 손에  안묻힐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매듭도 아닌 그 매듭은 자신을 마치  쓰레기와 조금도 다름이 없
    는 그런 인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어떻게 매듭을 지을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가? 매듭을
    지을 수 있는 안목이 있으면 그 사람이 가는 인생은 곳곳이 스며
    들어서 필요한 부분을 얻고 창조하고 가꿀 수  있지만, 그렇지 못
    한 사람은 마치 땅위의 태풍처럼 그  사람 자신을 파괴해 버린다
    는 두가지 뜻을 동시에 갖고 있는 괘가 바로 [풍지관]입니다.
      "[관]은 투철하게 관찰한다는 뜻이다." [풍지관]은 하괘가 모두
    음효로 이 땅에 확고부동한 자기가 존재하지 않고 있으나, 상괘는
    양효가 둘, 음효가 하나로서 하늘의 세계에 대해 확고부동한 자신
    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괘는 군주가 백성들의  세계를 세
    심히 바라본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진 천자는 위에 있어서 유화하고  겸허한 태도와 중정의 덕
    으로 크게 천하를 통찰하였다." 이 괘의  효를 살펴보면 다섯번째
    의 양효가 중정의 위치에서 두번째 음효와 정응관계를 이루고 있
    습니다. 그리고 하괘도 음성이고 상괘도  양효가 둘, 음효가 하나
    로서 음성입니다. 따라서  다섯번째효는 최고의 위치에서  음양의
    조화를 이룬 가운데 음의 기운 안에  있으므로 어진 천자로 표현
    하였으며, 그러므로 유화하고 겸허한 태도와 중정의  덕으로 천하
    를 두루 관찰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제사를 올릴때 이미 손을 깨끗이 씻고 신전에 나아
    갔으나 아직 재물을 바치지 아니한 그 순간처럼 경건하고 정성된
    마음으로 있으니 그 엄숙하고 의젓함이 모든 인민으로 하여금 우
    러러보고 감화하게 한다." 매듭을 분명하게 볼  수 있으려면 경건
    한 상태로 엄숙하고 의젓한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에
    사로 잡히면 자기 매듭을 잃어버립니다. 또 남이 시키는데 이끌려
    서 일을 해도 매듭을 잃어버립니다.
      경건한 마음상태. 치는 것도 아니고 잡는 것도 아니며, 치고 잡
    는 것을 동시에 하는 그런 상태. 그런 상태가 되지 않으면 관찰은
    나타나지가 않습니다. 사람은 태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경건한 태
    도를 지녀야 합니다. 만물을 바라보는  눈도 경건해야 하고, 자연
    앞에서 경건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진심은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큰 인물은 태도가 다릅니다. 하늘
    로부터 자기가 분명한 사람은 땅을 굽어볼 수  있는 사람이며, 이
    런 사람은 태도를 확실히 갖춘 사람입니다. 태도는 경건해야 합니
    다. 그래야만 모든 인민들이  우러러 보고 감화하게 되는  것입니
    다.
      "신령한 하늘의 법칙을 보라. 춘하추동이 그 순서를  어김이 없
    다." 이것은 매듭이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춘하추동이 그 순서를
    어기는 법이 없는 것과 같이 분명한 매듭을  가지고, 인민을 살피
    는 성인에게 경건함과 따뜻함을 가지고 바람이 지나가면 모든 식
    물이 고개 숙여 맞이하듯이, 인민은 경애하는 것입니다.
       
        대상. 바람이 땅위를  불어가는 것이 [관]의  괘상이
        다. 옛날 어진 제왕은  이 괘상을 보고 두루  천하를
        순시하며 인민의 상처를 살피고 교화를 베풀었다.
       
            象曰, 風行地上觀. 先王以省方, 觀民設敎.
     
      "옛날 어진 제왕은 이 괘상을 보고 두루 천하를 순시하며 인민
    의 상처를 살피고 교화를 베풀었다." 어진 제왕은 인민의  상처를
    살피고, 그로 인해서 인민이 요구하고  있는 세계, 인민에게 시켜
    야 할 세계 등등을 제시해서 그들을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첫번째 음효. 유치한  관찰법. 소인이라면  그런대로
        허물은 없겠으나 군자는 비난을 받고 궁지에 빠진다.
       
            初六, 童觀. 小人无咎.  君子□. 象曰, 初
            六 童觀, 小人道也.
           
      첫번째 음효는 하늘로부터 확고부동한 신념이 없습니다. 신념이
    없는 사람이 매듭을 지을 수 있는 안목이 있을리  없습니다. 그래
    서 이 사람이 보는 안목은 유치할 뿐입니다. 유치한 눈을 갖춘 사
    람은 표면만 보지 이면을 볼 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돈도  없이 사업을 시작한다고  "저 사람은 안돼"
    하고 말하는 사람은 유치한 관찰을 하는 것입니다. 망하고 흉하는
    것은 돈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자
    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은 이 세상에  단어조차 존재하지 말아
    야 됩니다. 자수성가는 돈 가지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수
    성가 할 수 있는 사람은 가진 돈은 없지만 이 세상을 가질 수 있
    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힘이 센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을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닙니
    다. 이 세상에는 힘이 약한 사람이 힘이 센 사람의 힘을 역이용해
    서 오히려 이길 수도  있다는 법칙도 존재합니다. 자수성가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아낼  수 있는 안목이  없으면 관찰은
    되어지지 않습니다.
     
        두번째 음효. 틈으로 엿보는 것같은 시야가  좁은 관
        찰력. 가정을 지키는 여자라고 하면 그런대로 좋지만
        군자로서는 부끄러운 노릇이다.
     
            六二, □觀. 利女貞. 象曰, □觀, 女貞, 亦
            可醜也.
           
      음의 자리에 음효가 있습니다. 그저 자기 욕심만 차릴려고 하면
    확고히 움켜쥐고 앉아 있으므로  큰 손해는 없을 것이지만,  높은
    지위에서 그런 치졸한 짓을 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높은 지위에 앉은 만큼 덕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두
    루 살필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높은 지위에 앉아서  그저 자기
    것만 챙기면 매듭을 갖출 수 없으며 세상의 조소를 면치 못할 것
    입니다.
      "가정을 지키는 여자라고 하면 그런대로 좋지만 군자로서는 부
    끄러운 노릇이다." 가정주부라면  남한테는 얌체같다, 악착같다는
    욕을 먹더라도 그저 자기 것만을 잘  챙기면 그런대로 허물이 없
    을 것이나, 나라를 위해 살고, 자기  역할을 위해 사는 사람이 그
    렇게 속좁은 욕심만 차리면 크게 부끄러운  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을 할 때는 자기 몫만 챙기려 하지 말고 매듭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매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승리에 대
    해 급급해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병법가 손자의  말대로 끝내
    가서는 승리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고 단지 승리를 확인할
    뿐입니다. 그러나 매듭을 모르는  사람은 그저 자기 몸에  가까운
    것부터 챙기려 하다 보니까 오히려 갖추는  것은 하나도 없고 세
    상의 비웃음을 사는 인생을 자신도 모르게 만들게 됩니다.
     
        세번째 음효. 자신의 생에 대한 신념에  비춰보고 진
        퇴를 결정하라. 그러면 도를 잃지 않으리라
       
            六三, 觀我生進退. 象曰, 觀我生進退,  未
            失道也.
           
      "자신의 생에 대한 신념에 비춰보고 진퇴를  결정하라." 욕심에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신념에 비추어 당장  비굴하면서 작은
    이익을 취하기보다 떳떳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는 뜻이 있는 분명한 태도와 그에  걸맞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
    고 있어야 합니다. 신념과 태도가 분명하면 매듭을 지을  수 있는
    눈이 갖추어 지는 법입니다. 그러한  안목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땅에 뚜렷한  구분을 지어내듯이 우리
    인생의 반경을 뚜렷이 구분해 줄 것입니다.
      봄이라해서 땅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여름이라 해서 땅이 바
    뀌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땅에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은
    얼었다, 풀렸다, 따뜻했다, 쌀쌀했다 하는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
    습니다. 바로 창조는 그와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제 3의  세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네번째 음효. 나라의 영광을 살핀다.  그러한 인물이
        면 왕의 빈객으로 우대를 받을 것이다.
       
            六四,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象曰,  觀國
            之光, 尙賓也.
           
      "나라의 영광을 살핀다." 네번째  효는 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음이 있어 위로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하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 세상에 뿌리내리고져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살핀다고  했습니다. 즉 집안의 영광을  살피
    고, 자기가 처해져 있는 이 세계의 영광을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잘된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 이렇게  마음먹는 사
    람은 일단 나라를 살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심이 어디에 있느
    냐에 따라 그 양상은 달라집니다. "우리나라가 잘된다면,"에  액센
    트가 있는 사람은 그 나라가 잘됨과 동시에 자기도 잘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자기 잘되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
    는 죽어도 좋다"에 엑센트가 있는 사람은 얼마 안있어 죽을 사람
    입니다. 그 사람이 죽는다고 그 나라가 잘될 리도 없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나라를 위해서라
    면 이 일을 반드시 해야겠다."는  사람이지만, 두번째 사람은 "이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라면 저를 제물로 바치겠나이다." 하는 사람
    입니다. 그 제물은 쓸 가치가  없는 제물입니다. 거기에는 신념이
    없습니다. 단지 심정의 작용만이 있을 뿐입니다.
      나라의 영광을 살핀다는 것은 바로 신념에 의해 자신이 희생되
    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위한 일을 반드시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인물은 앞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며, 설사 왕이 못된
    다 하더라도 왕의 측근의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섯번째 양효. 천자가 인민의 상처를 관찰하고 자신
        을 돌아본다. 군자의  도리에 맞는 일이므로  허물이
        없으리라
       
            九五, 觀我生,  君子无咎.  象曰, 觀我生,
            觀民也.
           
      다섯번째 양효는 중정의  지위로 정응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의 모든 음효가 따라주며 인민이 받드는 형상입니다. "천자가
    인민의 상처를 관찰하고 자신을 돌아본다." 군자는 인민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관찰하는 동시에 자신도 되돌아 보는 법입니
    다. 이는 군자의 도리에  맞는 일이므로 잘못된다는 것은  절대로
    없다는 뜻입니다.
     
        여섯번째 양효. 근심하는 마음으로 천하의 민생을 관
        찰한다. 군자의 도리에 맞는 일이므로 허물이 없으리
        라.
       
            上九, 觀其生.  君子无咎.  象曰, 觀其生,
            志未平也.
           
      음의 자리에 양효가 있지만 하괘가 모두  음이므로 이 효도 음
    성기운의 영향을 받아  양효지만 음성에너지를  갖춘 양효이므로
    큰 허물은 없습니다. "근심하는  마음으로 천하의 민생을  관찰한
    다." 다섯번째에 만사가 잘되었으나 혹시 인민들이 아직도 안락하
    지 못한 점은 없는가 하는 근심하는  마음으로 다시 민생을 관찰
    하면 도리에 맞아 허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은 아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사실은 알 수가 없는 나
    라입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될려면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와 경
    험이 깊어서 많은 유산이 전수되어 내려와야  하는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거의 없습니다. 또한 환경적인 입지 조건도 민
    주주의를 하기에는 불리한 상황입니다.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정착이 되려면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확고히 알고, 이 땅에 비민주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민주화된 세상
    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민주주의에  대한 안목을
    갖추고 이 나라를 세심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습
    니다. 내가 아파보았던 사람이 남의 아픔을 방관할 수  없는 것이
    며, 깔끔한 사람이 더러워질 수 있는 일을 내버려 두지 않는 법입
    니다. 또 작은 세계를 눈여겨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사람이 올
    바른 관찰을 통하여 비민주적인 요소를  제거해서 민주주의의 매
    듭을 지을 수 있습니다.
      [풍지관]은 대한민국을 예를 들면, 민주주의가 분명하게 이  땅
    에 자리잡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
    념을 가진 사람이 그  나라를 두루 살피어 관찰하는  형상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어떠한 태도로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신의 입장에서 보면 평등하지만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평등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절대로 평등하
    게 때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평등할 수 있는  힘과
    평등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평등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세심한 관찰을 하면  평등한 세상을 가꿀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속안에서 자연과 함께 더불어 나타날 수 있는
    여러가지 형태를 보면서 왜 불평등이 존재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 불평등 가운데서 평등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이 점
    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괘가 [풍지관]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3148
  • 41. 산택손(山澤損)
    『 손해보고 얻다 』
     
     ○     [손]은 손해를 감수하는  괘입니다. 손해를 본다고
     ●     해서 무작정 손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
     ●     많은 이익을 구하기 위해서 지금의 일시적인 손해를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보통  인간이 먼 곳의 이익을
     ●     보지 못하고 눈앞에 이익에만 사로잡히는 경우는 욕
     ○     심이 앞서서 잠재의식이 발동하기 전에 먼저 의식적
     ○     으로 뭔가 이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근거
            리이기 때문에 멀리가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산택손(山澤損)
     
        [손] 이란 아래 것을 덜어서 위를  늘인다는 것이다.
        즉 아래에서 위에 봉사한다는 뜻이다. 성의를 다하고
        도리를 행하면 대길하리라.허물이 없다. 성의만 있으
        면 두 개의 대나무 그릇에 곡식을 담은  간소한 재물
        만으로도 신에게 제사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대나무 그릇을 제물로 제사지내는 일도 그럴만
        한 때가 있는 것이다. 덜고 보태고, 차고 기우는 천
        지 자연의 이치는 때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은 잘했것 못했건 간에 자연의 이
    치와 법도에 맞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입장에서 나에게 주어진 처지만을 고집하게  되면 결과가 좋아지
    지 않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비록 상대방이 잘못했지만, 내가 잘
    했다라는 감정만을 앞세워서 급한 나머지  주먹으로 상대편을 치
    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법은 이상하게도  잘잘못을 가리기에
    앞서 맞은 정도에 따라 때린 사람을  체포하게 됨으로써 몹시 억
    울하다는 느낌을 그 사람에게 안겨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억울한 일들은 내마음  때문에 벌어진 실수에
    서 기인한 것들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의식과  잠재의식이 있는데
    모든 실수는 대개 의식과 잠재의식이  불일치하는 데에서 벌어집
    니다. 라디오가 고장났을때 그것을 고치려는 의식만  앞서서 무작
    정 뜯으면 나중에 어떻게 조립할 지를  몰라서 결국 버리지 않으
    면 안되게 됩니다. 잠재의식이 라디오를 꼭  고쳐야겠다고 생각하
    면 당장은 들을 수  없지만 전파사에 맡겨서 고쳐온다든가,  뜯을
    때 그 순서를 가지런히 놓아 나중에  조립할 때 혼돈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손] 이란 아래 것을 덜어서 위를 늘인다는 것이다. 즉 아래에
    서 위에 봉사한다는 뜻이다."  [손]은 손해를 감수하는 괘입니다.
    손해를 본다고 해서 무작정 손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
    많은 이익을 구하기 위해서 지금의  일시적인 손해를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보통 인간이 먼데의 이익을 보지 못하고 눈앞에 이익에
    만 사로잡히는 경우는 욕심이 앞서서  잠재의식이 발동하기 전에
    먼저 의식적으로 뭔가 이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근거리
    이기 때문에 멀리가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진흙탕이 있는 물을 뛰어서  건너려고 하면 옷을 버립니다.  눈
    쌓인데를 막 뛰어가면 발목을 삡니다. 그런데서는 오히려 힘을 빼
    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이까짓 눈"하
    면서 박차고 나갈려고 하면 눈이 발목을 부러뜨리고 맙니다. 사람
    이 성숙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이득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 스스로 버릴줄 안다는 뜻입니다. 결과를 좋게 이
    끌기 위해서는 화가 난다고 주먹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잠깐 시
    간을 갖고 다시 웃으면서 상대편을 설득하여 서로 웃으면서 결과
    가 나타나게 하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잠재의식을 움직여서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여
    실수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먼데  이익을 보고
    지금 당장의 일시적인 손해를 감수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먼 곳
    을 아는 사람은 가까운 곳부터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
    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가까운 곳을 살핀다."라는 것은 매사에 성의가  있다는 뜻입니
    다. "성의만 있다면 두  개의 대나무 그릇에 곡식을  담는 간소한
    재물만으로도 신에게 제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대나
    무 그릇을 제물로 제사지내는  일도 그럴만한 때가 있는  것이다.
    덜고 보태고, 차고 기우는 천지 자연의 이치는  때에 따라 행해지
    는 것이다." 즉, 성의를 갖고 움직인다면 조그만 일을 하더라도 신
    이 감동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의를 베푸는  것도 유효적
    절하게 시기를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뭔가 효도를 하기  위해서 효도관광을 보내
    드리는 일이 많은데, 그것도 어머니의 건강상태와 당시 상황을 잘
    고려해서 해야 합니다. 어머니 건강은 별로 좋지 않고  기력도 쇠
    한데 석굴암, 설악산 등 힘든 관광코스로 효도관광을 보내면 어머
    니는 돌아와서 병이 나게 됩니다. 또 효도관광하는 날  기상이 나
    빠져서 날씨도 너무 추운데  강이나 바닷가에 관광을  하면 몸에
    해롭습니다. 그때는 비록 손해가 있더라도 관광을  취소해야 합니
    다. 그런데 지불한 비용을 생각하고, 또 지금 보지 못하면 다음에
    언제 또 보겠는가 하는  마음이 앞서서 무리하게  성의를 베풀면
    오히려 화가 되는 법입니다. 따라서 성의는 항상 시기적절하게 사
    리를 참작하여 지나침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대상. 산밑에 물이 있는 것이 손괘의 괘상이다. 군자
        는 이 괘상을 보고 성냄, 화냄을 경계하고 욕심을 억
        제하여 이상에의 대성을 지향한다.
     
      "산밑에 물이 있는 것이 손괘의 괘상이다." 산  아래 물이 있으
    면 흙이 붕괴되어 내려가는데, 여기서는 물이 아래로 내려가 빠져
    버리면 산이 드러나서 돋보이게 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물
    이 스스로를 낮추면 산이 돋보인다."라는 뜻입니다. 또 이괘는 음
    효와 양효가 모두 대응관계를 이루어 화합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
    가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성냄, 화냄을 경계하고  욕심을 억제하
    여 이상에의 대성을 지향한다." 욕심은 근거리이기 때문에 멀리가
    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높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는  낮은 욕심
    을 억제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만이 이성을 통해서 이상의 대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우리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양효. 자신의 일을 그만두고 빨리 달려가 봉
        사하라. 그리하면 웃사람과 뜻이 하나가 되어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나를 희생하여 남에게 봉사하는 일
        도 사리를 참작하여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
     
      "자신의 일을 그만두고 빨리 달려가 봉사하라." 자신의 일을 그
    만두고 빨리 달려가 봉사하라는 것은 자기의 입장보다 자연의 입
    장에서 자연의 섭리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실질적으
    로 드러나는 결과를 좋게 하기 위해 인내하라는 말입니다. "저 사
    람과 나와의 관계를 위하여 화가 나는  나를 자제하고 봉사하라."
    입니다. "그리하면 위사람과 뜻이 하나가 되어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면 웃사람과 뜻이 합하게  되어 허물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웃사람은 자기 바깥의  모든 대상을 포함하여  그 대상과
    조화를 이루어내는 원초적인 자연의 힘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양효. 중용의 도를 지켜 변함이 없으면 만사
        순조로우리라. 함부로 앞으로 내달리면 흉하리라. 자
        신을 지키는 일은 자신의 손실을 가져오지 않고 남에
        게 보탬을 주는 것이 되리라.
     
      "중용의 도를 지켜 변함이 없으면 만사  순조로우리라." 가운데
    효가 다섯번째 음효와 정응관계를 이루어  중용을 지키고 있습니
    다. 그런데 마음이 확 변해서 "해보니까 잘되더라."하여  자만심을
    가지면 안됩니다. "함부로 앞으로 내달리면 흉하리라." 한 번 잘된
    다고 자만심이 생겨서 함부로  나아가면 흉하게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일은 자신의 손실을  가져오지 않고 남에게  보탬을 주는
    것이 되리라." 즉, 무리하게 남을 도우려 하지 않는 것이 결국 도
    와주는 결과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피곤하면 피곤한  것을 쉬도
    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어머니를 효도관광 보내 드릴 때, 어머
    니가 피곤하시면 여행비는 이미 지불하였더라도 효도관광을 취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돈 생각해서 무리하게 여행을 강행하면 어머
    니는 병이 나서 드러눕게 됩니다.
     
        세 번째 음효. 세 사람과 동행하면 그중 의심이 생겨
        한 사람을 잃게 된다.  혼자서 가면 벗을 얻어  서로
        협력할 수 있으리라.
     
      "세 사람과 동행하면 그중 의심이  생겨 한 사람을 잃게 된다.
    혼자서 가면 벗을 얻어 서로 협력할 수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
    이 끝내 따라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 혼자라도 가겠다.'는 생각
    으로 매사를 해야 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될  동안을 기다려서
    같이 가려고 하면 그중에  한 두명은 잃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때'를 아는 사람은 진짜  꼭 행하는 사
    람입니다. 사회생활을 하건  가정생활을 하건 일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남의  일이건 내 일이건 자기 일같이 성실하게
    합니다. 고로 그 사람에게는 나중에 커다란 복이 오게 됩니다. 진
    짜 중요한 핵심을 아는 사람은 남 눈치를 보지 않고 직접하는 사
    람입니다. 이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순조로운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을 알고, 중요한 것이 내 몸처럼 느껴지면  생각과 결
    과를 논하기 전에 몸이 먼저 실행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
    은 이미 만물과 하나로 연결되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 연결되어
    진 부분을 통해서 만물이 그 사람을  보좌해주고 복을 주게 됩니
    다. 자신만을 위하다 보면 만물로부터 들어오는 그러한 복의 운이
    막혀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자칫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가까운데 이
    익을 본다고 하는 것이 엄청난 손해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자각해
    야 겠습니다.
     
        네번째 음효. 병을 치료하듯이 스스로 반성하여 자신
        의 결점을 고쳐라.  옳은 일은 빨리할수록  기쁨이고
        허물이 없으리라.
     
      "병을 치료하듯이 스스로 반성하여 자신의 결점을  고쳐라." 자
    기 자신이 잠재의식적으로 성리에 가깝게  가고자하는 사람이 아
    니면 자신의 결점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결점을 자꾸 발견
    하다 보면 최상의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만족은 누
    구나 다 똑같습니다. 물론 각자  마음의 정도는 다르지만, 만족해
    하는 마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
    람은 감정대로 움직일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득 이전에 자기 만
    족을 내세울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면, 먼저 되지  않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을 앉은채로 발견해 낼려고 하면 절대로 발
    견되지 않습니다. 나는 날이 밝은 후 해도 될 것을  꼭 밤에 하다
    가 끝내가서는 결정적으로  망가뜨려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억울한 것만큼 억울한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게 내 마음때문에 벌어진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라면서 앞이 조금 고생되더라도 뒤가  명료해지도록 하는 쪽으
    로 행동하였습니다. 나는 무언가 뜯을 때보면 순서대로 놓습니다.
    뜯다보면 어떤 때는 이게 먼저인지, 저게 먼저인지  모를 때가 있
    습니다. 이미 시작할 때 벌어질 것을 미리 예상하고 내 결점을 스
    스로 줄여갈려고 노력한데서 이러한 행동이 생긴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결점을 고치기 위해 "오늘은 반성해야지." "결점
    을 고쳐야지." 하고 그렇게 마음의 굳은 결의를 갖는 것도 좋습니
    다. 그러나 결의보다는 눈을 맑게  뜨고, 어떠한 시련이 닥친다해
    도 가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면 당신은  곧 병을 치료하듯이 스스
    로 자시 자신을 반성할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그대는 비로서 기쁨이라는 것을 맛볼 것입니다.
     
        다섯번째 음효. 누군가 그를 도와  유익하게 하리라.
        어떤 영험한 거북점도 이 길조를 틀리다고는 못할 것
        이다. 하늘이 보우하시니 크게 길하다.
       
      "누군가 그를 도와 유익하게 하리라." 병을 고치듯이 자기 자신
    을 발견해 내면서 일을 행하면 만물이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이때
    부터 협력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즉 지혜가 트이게 되는  것입니
    다. 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뭐가 없어서 못한다."라고  하고, 할
    줄 아는 사람은 "뭐가 없으면  이것을 대신쓴다." 라든가 "없으면
    없는 대로 사용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사용한다" 하게 됩니다. 이
    차이는 아주 엄청난 차이입니다.  이것이 곧 지혜의 있고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보우하시니 크게 길하다." 이 정도 되면  만물을 다 쓸
    수 있습니다. 결국 만물이  모두 이 사람을  돕는 것이며, 하늘이
    보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 자
    신을 낮추는 공부를 하여 손해를 통해 곧  뒤에 큰 이익으로 돌아
    온다는 법칙을 알아야겠습니다.
     
        여섯번째 양효입니다. 크게 뜻을 얻으니 희생없이 공
        헌할 수 있다. 바른 도리를 지키면 길하리라.  제 집
        일은 돌보지 않고 나라일에만 충성을  바치는 신하를
        얻으니 만사 순조로우리라.
     
      "크게 뜻을 얻으니 희생없이 공헌할 수 있다." 이미 자기 결점
    을 계속 고쳐왔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큰 희생없이도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나  어려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길은 명료합니다. 문제는 그 명료를  인간이 받아들이느냐, 못 받
    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생활인으로서의 생각과 인간으로서의  생
    각은 다릅니다. 즉 사람이 머리가 똑똑해서 쓰는 지혜와 생활인으
    로서의 지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와 선진국 정부가 다
    른 점은, 선진국은 생활인으로서의 지혜를 짜내고 있으며, 우리는
    머리로서 지혜를 짜낸다는 것입니다. 사춘기때는  생활인으로서의
    지혜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는 감성의  지배를
    우선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지혜로 살기에 앞서서 성리(性理)의 지혜로 살아
    야 합니다. 성리의 자세로서 몰입을 해야지만 비로서 우리는 인생
    을 건질 수가 있습니다. 또 인생의 진정한 낙과 보람을 찾을 수 있
    습니다. 우리는 성리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식만 가고자 하면 잠재의식은 점점 무뎌집니다. 그렇게 되면 손
    해를 보면서 큰 이익을 얻는 산택손의 가르침을 알 수 없습니다.
    스스로 낮춘 연못이 산을 도드라지게 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을 나타나게 하는 비결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2988
  • 북두칠성은 우리의 별 (칠성을 잃어버린 우리들)
     칠성신은 우리 민족이 존재하면서부터 삼신신앙과 더불어 믿어온 신이다.칠성신이라고 하면 할머니들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다놓고 자손들의 무병장수와 복을 비는 모습을 제일 먼저 연상하게 된다.무교의 굿거리 중에서 칠성굿을 가장 큰 거리로 치고 있으며 굿 또한 웅장하다.그러나 우리 고유의 신 칠성님도 불교의 신으로 변한지가 오래 되었다.오히려 무당들이 칠성거리를 불사제석거리, 또는 불사거리로 부르고 있으니 불교가 오랫동안 조금씩 바위를 뚫듯이 무당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또 칠성이라고 하면 북두칠성을 떠올리게 된다.북두칠성은 우리 민족이 유별나게 사랑해 온 별자리다.삶의 길흉화복을 모두 북두칠성에서 시작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가(巫歌)에는 동두칠성, 남두칠성, 서두칠성 북두칠성, 이라 하여 칠성이 있는 위치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부른다.이것을 28수(28宿)라고도 말한다.그러나 대부분 칠성님이라 하면 북두칠성을 말한다.또 장소마다 칠성을 붙여 칠성신의 종류는 많이 있다.이것은 여러 칠성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인 칠성님은 어느 곳이든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물가에도 칠성신이 있고 장독대에도 칠성신이 있다.산에는 바위칠성이 있다.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믿고 있다.우리 할머니들은 자손들이 큰일을 앞두거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장독대에다 정화수를 떠놓고 칠성님께 빌었다.이는 장독대는 낮에는 빛이 잘 들고 밤에는 달빛이 바로 비추는 곳이다.이곳에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것은 정화수에 곧장 칠성이 비춰지기 때문이다.또 우물가에서 칠성을 비는 이유는 우물에 바로 칠성이 비춰지기 주므로 우물이 바로 칠성이 되기 때문이다.우리나라의 우물들은 둥근형보다는 정(井)자 형태의 우물이 많다.정(井)자가 바로 칠성의 선기옥형 즉, 칠성의 국자 모양에 해당한다. 우물 정(井)의 우물형태는 곧 사정(四政)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선기옥형은 옛날 고대 사람들이 별을 관측하는 도구를 나타내는 말이다.선기옥형을 달리 천상옥경이라고 부리기도 하는데 삼신 즉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다.그곳에서 칠정을 베풀어 하늘을 다스렸는지도 모른다.하늘의 정치를 본받아 인간들도 땅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을 칠정에 두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칠성신께 많은 공을 들였다.인간의 생명은 삼신께서 주시지만 인간들의 수명장수와 길흉화복은 칠성신이 관장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칠성신을 믿고 있으며 무교에서는 제일 큰 신으로 받들며 굿거리 중 칠성거리를 제일 큰 거리로 여기고 있다. 칠성신에 대한 우리 민족의 신봉은 불교에도 영향을 끼쳐 각 사찰마다 칠성각을 세우게 되었다.노중평의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에 「북두칠성은 항상 동북 간방(艮方)에서 떠서 서남 곤방(坤方)으로 진다. 이 방위를 귀방(鬼方), 즉 귀신의 방위라고 한다.북두칠성이 이렇게 귀신의 길을 매일 한 번씩 지나간다.귀신의 길은 신명이 활동하는 길이다. 간방은 신명이 드러내놓고 활동을 하므로 표귀방(表鬼方)이라고 하고 곤방은 신명이 숨어서 활동하므로 이귀방(裏鬼方)이라고 한다.우리나라는 간방에 속해 있으므로 표귀방에 있다.그 범위는 함경도의 검덕산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이 갈라지는 각곳산에 이른다.」고 말한다.북두칠성이 표귀방에서 떠서 이귀방으로 지므로 한밤에 귀신이 나타났다가도 닭이 울면 사라진다는 설화가 생겨났다.또한 전국 사찰의 칠성각이나 산신각의 위치를 보면 칠성이 뜨는 동북 간방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또한 대웅전이 자리한 방위도 반드시 동북 간방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의 유명한 사당을 보면 하나같이 모두 칠성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즉 간방에 앉히고 곤방을 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먼 옛날 중국 땅이 동이족의 활동무대였고 사당을 지은 주인도 바로 우리 선조인 동이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동북 간방, 즉 칠성이 떠서 지는 길은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는 방위이기도 하다.우리나라가 동북 간방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토종들이 우수하고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의 종자가 되는 것이다. 토종학회에 따르면 외국의 종자회사들이 우리나라의 수많은 종자를 수집하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한다.우리나라의 토종은 품질이 우수하고 맛이 독특한 것이 모두 동북 간방에서 칠성의 정기를 받고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북 간방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이유는 동북 간방을 지키는 신명이 곧 칠성신명이기 때문이다. 칠성신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각 별마다 하는 역할도 각각 다르다. 제1성은 천추성(天樞星) 또는 생기탐랑성(生氣貪狼)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도리를 펼치는 별로, 천제의 임무를 수행하는 별이다.북극성과 함께 하늘의 중심을 잡아준다고 하는데 이 별에서 황제를 탄생시킨다고 한다.쥐띠에 태어난 인간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2성은 천선성(天璇星) 또는 천을거문성(天乙巨門)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창고요, 복 주머니의 원천이 되는 별이다.임금의 족보를 관장하는 업무를 담당한다.왕족의 족보를 선원보(璇源譜)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천선성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또한 천선성은 인간의 식록을 주관하므로 칠성님 전에 복을 비는 이유가 바로 이 별 때문이다.우리가 설날 복 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이유와 섣달그믐에 팔았던 복조리 등은 바로 이 별의 감응을 받아 복을 받기 위함이다.소띠와 돼지띠에 태어난 인간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3성은 천기성(天璣星) 또는 화해녹존성(禍害祿存)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복을 받은 만큼 화도 함께 받게 하는 별로서, 인간이 평생을 노력하여 살 만큼 되었다고 안심할 때 일시에 재물이며 생명을 앗아가는 역할을 담당한 별이다.흔히 주변에서 “살 만하니 죽었다”는 말은 녹존성에서 장난을 친 것이다.인간이 살만큼 될 때까지는 수많은 고생도 하였지만 남에게 못할 짓도 많이 하였을 것이다.이 때 남에게 덕을 베풀지 않으면 이 별에서 그 사람을 데리고 가게 되는 것이다.즉 칠성판을 상징하는 별로서, 인간의 죽음을 관장한다. 호랑이띠와 개띠에 태어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4성은 천권성(天權星) 또는 육살문곡성(六煞文曲)이라고 하는데 육살이란 경양(擎羊), 타라(陀羅), 화성(火星), 영성(鈴星)의 네 살성과 천공(天空), 지겁(地劫)이라는 두 흉성을 합친 것을 말한다.이 별은 하늘의 권력을 잡는 별이다.이 별에 조응하면 권력은 잡으나 요절하는 수가 생긴다고 한다. 세조 때 남이장군과 중종 때 조광조가 여기에 해당되나 이 별의 정기를 타고나야만 크게 출세할 수가 있다.권세를 좌우하는 별이다.토끼띠와 닭띠에 태어 난 사람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5성은 옥형성(玉衡星) 또는 오귀염정성(五鬼廉貞)이라고 하는데 북두칠성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하늘의 형벌을 시행하는 별로서 중심을 잘 지키면 세종대왕과 같은 명군이 나와 태평성대를 이루지만 그렇지 못하면 연산군이나 스탈린 같은 사람이 나온다고 한다.민가에서 이 별에 조응하면 효자와 망나니가 나온다.용띠와 원숭이띠에 태어 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6성은 개양성(開陽星) 또는 연년무곡성(延年武曲)이라고 하는데, 자미궁의 방어를 책임지는 별로서 북두칠성 중, 힘이 가장 강력하다고 한다.또 악살과 흉성을 물리치며 오른손에 천부인을 들고 있다 한다.천둥 번개를 치도록 명하며 하늘의 모든 별을 부릴 수 있다.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서, 이 별은 인간의 수명을 무쇠에 돌 끈 단 듯 길게 늘려 주는 별이다. 특히 노인들이 이 별에다 빌면 수명이 연장된다고 하는데 칠성님께 명을 비는 이유이기도 하다.뱀띠와 양띠에 태어 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제7성은 요광성(搖光星) 또는 파군절명성(破軍絶命)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기운을 관장하는 별로서 특히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별이다.옛날 임금들과 장군들은 요광성을 군사의 신(軍神)으로 모시고 초제(醮祭)를 지냈다.초제를 가장 먼저 지냈던 왕이 14대 한웅천왕인 자오지천왕 일명 치우천왕 일 것이다.말띠에 때어 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그리고 북두칠성은 일곱 개의 별이 아니라 9개의 별이다.우리가 육안으로 잘 볼 수 없는 2개의 별이 더 존재하고 있다.이 별은 칠성의 첫째별인 천추성의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좌측에 있는 별을 보성(輔)이라 하고 우측별을 필성(弼)이라고 한다.이 두 별을 합쳐서 좌보우필성이라 한다. 이 별은 천추성을 보필하는 별인데 여기서 우리는 보필(輔弼)이라는 단어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민족은 칠성 즉 부두칠성과 오랜 세월 인연을 맺어 왔다고조선 때에는 무덤인 고인돌 뚜껑 위에 북두칠성을 그려 넣었고 그 뒤를 이은 고구려 역시 무덤 속에 북두칠성을 크게 그려 넣었다.이어서 고려도 그러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북두칠성을 새겨 넣은 칠성판이 등장하게 되었다.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는 칠성판 위에 누워야 편안히 염라대왕을 통과하고 칠성님 품으로 돌아 갈 수가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칠성은 우리에게 수명을 관장하고 복을 주기도 하지만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도 관장하고 있다. 단군 이후 우리 역사상 북두칠성을 가장 숭상했던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북두칠성을 나라의 징표로 삼았다.임금 스스로 자신을 북두칠성의 화신으로 생각하여 국강(國?)이라고 하였다.고구려 광개토대왕 시절 토기에 우물 정(井)자의 표시가 있었다고 광개토대왕의 문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광개토대왕의 문장이 아니라 칠성을 섬기는 고구려의 문장인 것이다.즉 칠성이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아마 우물 정(井)자가 들어 있는 토기들은 칠성님께 제를 지낼 때 사용하였던 토기들이 아닌가 한다.일본에서도 우물 정(井)자가 새겨져 있는 토기가 발견된다는 것은 고구려군 이 일본을 정복하여 그곳에서 칠성님께 승리에 대한 감사의 제를 올렸다고 볼 수가 있다.  북두칠성을 주술적인 말로 ‘괴강(魁?)’이라고 하는데 ‘괴강’의 괴(魁)자는 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귀(鬼)자와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두(斗)자가 결합한 문자라고 한다.즉 칠성의 신명에 잡혔다는 뜻이다. ‘괴강(魁?)’을 ‘국강(國?)’으로 고쳐 부른 분은 바로 유명한 광개토대왕이라고 말한다.북두칠성을 나타내는 괴강(魁?)의 강(?)은 사정(四政)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사정이란 자(子:정북)?오(午:정남)?묘(卯:정동)?유(酉:정서)의 네 방위를 말하는 것으로 천지를 바르게 지키고 세운다는 뜻이다. 즉 북두칠성의‘천추’‘천선’‘천기’‘천권’을 말하는 것이며 이 네 별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공간을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 하는데 이는 똑바른 정사를 의미한다. 또한 선기옥형이 자시(子時)쯤 부터 땅을 향하게 된다.이때부터 땅위의 모든 물은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게 되는데 북두칠성 정기를 많이 받고 적게 받음에 따라 물의 맛과 질이 달라진다.밤에 별과 달의 빛을 받고 새벽이슬에 젖은 물을 으뜸으로 치는 이유가 바로 북두칠성의 선기옥형의 기(氣)를 받은 물을 말하는 것으로 북두칠성의 기를 가장 많이 받는 자리를 천일생수(天一生水)하는 자리라고 한다.이물을 수정자가 내린 북극수라고 하여 가장 좋은 물로 쳤다.종가 댁에 우물이 집안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바로 북극수를 얻기 위함이다. 북두칠성을 음두성과 양두성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음두성은 남두육성을, 양두성은 북두칠성을 말하기도 한다.남두육성은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신명이고 북두칠성은 생명을 거두어 가는 신명이라고도 말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칠성신이 인간에게 복을 주는 칠복신(七福神)으로 변하였다. 칠복신의 명칭을 살펴보면 대흑천(大黑天), 혜비수(惠比須), 비사문천(毘沙門天), 변재천(弁財天), 복록수(福祿壽), 수노인(壽老人), 포대(布袋)라고 부르며 명산 입구마다 많이 모셔져 있으며 상아나 옥으로 형상을 만들어 모시는 가정도 많이 있다.어찌 보면 일본인들이 우리들보다 더 칠성신앙을 숭배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우리들은 죽어서도 칠성님에게로 돌아간다고 믿는다.시신을 안치하는 칠성판이 그렇고 송장을 일곱 매듭으로 묶는 것 또한 칠성님을 나타낸다.그러나 지금의 칠성판에는 일곱 개의 별이 없다.칠성이 없다는 것이다.이것은 인간이 죽어서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우리 조상들이 일깨워 준 칠성에서 태어나 칠성으로 돌아간다는 칠성신앙을 송두리째 까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8-25 조회 2821
  • 39. 수산건(水山蹇)
    『 험난한 산 』
     
     ●     사람은 일단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심정
     ○     을 먼저 만족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을 안게  됩니
     ●     다. 능히 많은 복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
            기 심정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은 지나가는
     ○     자연의 찬란한 질서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
     ●     다. 중요한 사실은 어떤 험난이 있을 때는 자기  혼
     ●     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반드시 조언자의 얘기를
            들어서 그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산건(水山蹇)
     
        [건]은 험난을 상징한다. 위험이 앞에  있다. 험난을
        보고 능히 가던 길을 멈추는 자는 그야말로 지혜있는
        사람인 것이다. 대지로 가면 좋으나 다시  험난한 산
        으로 가면 길이 막힐 것이다. 현명한  지도자의 의견
        을 따르면 험난을 극복하고 전진할 수  있으리라. 왕
        자의 지위에 있어서 바른  길을 지켜 변함이  없으면
        길하리라. 그리함으로써 나라를 바르게 할 수 있으리
        라. 건괘에 대처하는 일은 중대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어떤 때는 생각지도 않고 뜻하지도 않았
    던 곤경이 닥쳐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실은
    그 곤경이 마치 우리에게는 느닷없이 오는 것같지만, 그것도 어느
    하나의 질서를 가지고 찾아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 곤경을 타계할 수 있는 길은 반드시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와같은 일이 닥쳤을 때 잘  대처해 나가는 사람과 잘
    대처해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산위에서 바
    윗돌이 굴러오면 [으악]하고선  기절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돌이 그 사람을 치고 갈 것은 뻔합니다. 돌이 굴러오면
    몸을 피하기 전에 먼저 마음이 냉정해야 합니다. 마음이  이미 냉
    담한 상태로 있게 되면 아무리 급히 떨어지는 돌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피할 수 있는 찰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  찰라를 찾아서
    몸을 돌리면 무사히 피할 수 있지만 지레 겁을 먹고 허둥대는 사
    람은 피한다고 피하는 것이 돌이 구르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결국
    돌에 깔리고 맙니다.
     
      아무리 곤란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곤란함을 아는 채로 정신
    을 차리고 있으면 반드시 빠져나갈 길이 있을뿐더러, 그때가 비로
    소 우리 머리가 뚜렷하고 작용하는 때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괘가
    바로 [수산건]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먼저  놀라버리면 결국
    은 우리에게 곤란을 몰고 오는 그 질서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결
    과가 되어서 큰 곤경을 면할 수 없습니다.
     
      "[건]은 험난을 상징한다. 위험이 앞에 있다." [수산건]은 상괘
    가 음(陰)이 둘,  양(陽)이 하나로  양성입니다. 하괘도 음(陰)이
    둘, 양(陽)이 하나로 양성입니다. 양에너지와 양에너지가 같이 있
    으면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하괘는  산이고 상괘는
    물이므로 산위에서 급류가 쏟아져 내리고 있는  형상입니다. 이것
    은 굉장히 곤란한 상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매사의 모든 일은  나름대로의 질서의 흐름이라는게  있습니다.
    곤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질서의 흐
    름에 가기전에 "아!  힘들어서 못해먹겠다."  하면서 그만두는게
    보통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급류속에서도 급류에 휘말리지  않고
    급류를 타고 넘어갈 수  있는 지혜가 트여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땅속에 있는 씨앗이 올라오다가  돌을 만나면  돌을 뚫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막혀있으면 그것을 뚫는  힘은 놔두고, 위로 올라가
    려는 힘를 통해서 옆으로 살짝  빠져 나갑니다. 고구마, 감자같은
    것도 땅으로 내려가다가 돌을 만나면 옆으로 비껴서 알을 맺습니
    다. 그래서 옆으로 찌그러진 감자가  있습니다. 그건 틀림없이 돌
    밑에서 자란 감자입니다. 이렇듯 다 빠져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왜 길이 있는가? 상괘는 양효가 중간에 있어 둘째  아들입니다.
    하괘는 양효가 맨 위에 있어 막내동생입니다. 그리고 주역은 하괘
    가 상괘를 따르므로 "막내가 둘째를 따른다." 즉  나보다 더 아는
    윗사람의 방법을 따르면 길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세가
    되어져 있어야 가능합니다. 옛날의 모든 성현들은 어린아이한테서
    도 배울 건 배운다고 했습니다. 벌써 어린애 한테서도 배울 수 있
    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이미 냉담한 상태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른이라고 자기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랫사람에게
    "어린 것이 건방지게!" 이러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해박한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자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그 나은 사람의 세계를 저버리는 결과를
    일으키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수산건]이 주는 교훈을 깊이 새
    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위험한 일이 닥치면 반드시 빠져나갈
    길이 있다는 것. 둘째, 아무리  험난한 상황일지라도 그것도 엄연
    히 질서에 의해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 질서안으로 빨려들어가지
    만 않으면 그 질서를 피할 길이 있다는 것. 셋째, 그 질서에 스스
    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고  자신의 고집을 꺾고  지혜로운 자의
    가르침을 따르면 능히 피할 수 있다는 것 등입니다.
     
      "험난을 보고 능히 가던 길을 멈추는  자는 그야말로 지혜있는
    사람인 것이다." 험난한 것을 보고 능히 일어나는 마음을  자제하
    고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이 상황속 안에서 다른 길을 찾는 사람
    은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가던 길이란 고집을 떨며 스스로
    의 고집에 의해서 행하던 방식을 말합니다. "대지로  가면 좋으나
    다시 험난한 산으로 가면 길이 막힐 것이다." 그리고 험난할 때는
    험난한 쪽으로 뛰지말고 평평한 길을 택해야 합니다. 산위에서 급
    류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피하는 길은 평평한데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가는 것이지, 지금 피곤해 죽겠는데  다시 험난한 산
    으로 가면 길이 막혀 갈 수 없습니다.
     
      "현명한 지도자의 의견을  따르면 험난을 극복하고  전진할 수
    있으리라." 인간에게는 이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능
    히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자기 심정, 고집을 내세우느라고 일을 복
    잡하게 만듭니다. 또 아무것도 아닌 일에 사람들은 심정을 가지고
    싸웁니다. 운전을 배울 때는 내가 높고 운전수가 아무리  낮은 위
    치라 하더라도 운전수의 말을  존중해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이 고여 있는 곳은 피해가세요." 우리 눈에는 안보이지만 물밑
    에 구멍이 뚫려 있을 수 있습니다. "골목길에서는 빨리 가지 마세
    요." 얘들이 자전거 타고 튀어나올 지 모릅니다. "트럭 뒤에  붙어
    가지 마세요." 트럭은 바퀴가 두 개이기 때문에 사이에 돌이 끼여
    있다가 날라올 지 모릅니다. 이것들은 그 운전수가  6년간 운전하
    며 쌓은 경험입니다. 그 말을 잘 경청하면 나는 그것을 공짜로 얻
    는 것입니다.
     
      "왕자의 지위에 있어서 바른 길을 지켜  변함이 없으면 길하리
    라. 그리함으로써 나라를 바르게 할 수 있으리라." 왕자의 지위에
    있다는 것은 다섯 번째 효가 제자리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효가 제자리를 지키면 아무 걱정이 없게 되는데 [건]괘는 상하가
    모두 양의 괘이므로 어떤 일이 벌어지면  다섯 번째 효가 자기중
    심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름대로  월등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다 능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보다 낫다
    고 하는 사람의 것을 귀담아서 들을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
    다. 그것이 바른 길이며 그렇게 되었을 때 진정으로  지혜라는 것
    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지혜에 의해 나라는 잘  다스려질 것입
    니다.
     
        대상. 험한 산위에 급류가 흐르는 것이  건의 괘상이
        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위난에  직면하면 멈춰서
        서 자신을 반성하고 덕을 닦는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위난에 직면하면  멈춰서서 자신을 반
    성하고 덕을 닦는다." 그런데 군자가 아닌 사람은 자신을  반성하
    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우기면서 자기 세계를  고집하여 위험에
    휩쓸려서 아주 빠른 속도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험한 산위에 급류가 흐르면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위난에 직면
    하여 멈춰서서 자신의 무엇이 부족한가 하는 점을 반성하는 것입
    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면 이미 덕은  닦여진 것입니
    다. 결국은 그 덕을 통해서 자기보다 조금 나은 사람의 세계가 자
    기의 것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음효. 나아가면 험난이 있고  물러나면 칭찬
        이 있다. 때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나아가면 험난이 있고 물러나면 칭찬이 있다." 여기는 양효가
    있어야 되는데 음효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자기를 고집한
    다."는 뜻입니다. 위험한 작용속 안에서는 스스로  뒤로 물러나면
    칭찬이 있다는 이야기는 칭찬할 일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뒤에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기약이 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음효. 임금의 신하된 몸이기에 무진 고생을
        다하지만 마침내 원망하지 않는다.  내 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을 뿐이
        다.
     
      "임금의 신하된 몸이기에 무진 고생을 다하지만 마침내 원망하
    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음효의 자리에 음효가 있으면서 다섯 번째
    양효와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효는 최고의 자리
    에 합당한 양효가 있으므로 임금을 나타내며, 두  번째 효는 신하
    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험난하고 위험하
    다 하더라도 임금의 뜻을 따르면, 즉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의 뜻
    을 따르면, 설사 무진 고생을 하더라도 원망 당할 일이 오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양효. 나가면 험난이 있다. 물러나와 여러사
        람들과 협력하면 동료들이 기뻐한다.
     
      "나가면 험난이 있다. 물러나와 여러사람들과 협력하면 동료들
    이 기뻐한다." 양효이기 때문에 나아가면  험난이 있습니다. 따라
    서 나가기에 앞서서 밑의 음효와 상의를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덜커덕 나가면 밑의 음효에게 잡히고 위의 음효에게 잡혀 들어가
    게 됩니다. 이럴 때는 자기가 협력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충분히 상의해서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하지  말고 협력된
    사람들이 말하는 쪽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일단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심정을 먼저 만
    족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을 안게 됩니다. 능히 많은  복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심정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은
    지나가는 자연의 찬란한 질서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중
    요한 사실은 어떤 험난이 있을 때는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
    고 반드시 조언자의 얘기를 들어서 그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음효. 나아가면 곤란이 있다. 물러나와 여러
        사람과 협력한다. 국가의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그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면 곤란이 있다. 물러나와 여러 사람과 협력한다." 주역
    은 기운이 밑에서 위로 올라가므로 네  번째 음효가 위로 올라가
    야 하는데 음에너지를 통해서 양에너지를  격파시키려면 무척 힘
    이 듭니다. 그래서 나아가면 곤란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럴때
    는 물러나와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사람과 협력하여 협
    력된 에너지를 통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 국가의 중요한 책
    임도 능히 해낼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양효.  크게 고난에 직면하였으나  스스로
        중용을 지켜 절도를 어기지 아니하면 벗이 와서 협력
        하리라.
     
      "크게 고난에 직면하였으나 스스로 중용을 지켜 절도를 어기지
    아니하면 벗이 와서 협력하리라." 앞뒤로 음(陰)이기 때문에 고난
    에 직면하였으나 중심을 잃지 않고 중용의 도를 지키면 대응관계
    에 있는 두 번째 음효가 와서 협력하게 됩니다.  절도는 중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음효. 나아가면 전락할 위험이 있다. 뜻이
        국내의 현명한 인재로 향하고 있으니  한걸음 물러서
        서 그들과 협력하면  큰 성과를 거두리라.  훌륭하고
        존귀한 군주에게 쫓으면 만사 순조로우리라.
     
      "나아가면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음(陰)의 자리에 음효가 위치
    하고 있습니다. 음에너지는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정상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함부로 튀어나가면 중심을 잃어 쓰러지게 됩
    니다. "뜻이 국내의 현명한 인재로 향하고 있으니  한걸음 물러서
    서 그들과 협력하면 큰 성과를 거두리라." 국내의 현명한  인재란
    세 번째 양효입니다. 자기가  직접 나서려 하지 않고  대응관계에
    있는 세 번째 양효의 뜻을 통해서 나아가면 큰 성과가 있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는데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원
    심력과 구심력이 바꾸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는데
    그 일을 물리쳐야 할 때는 원심력으로 힘을 써야  합니다. 중국집
    에 전화를 걸고, "아! 여보세요. 여기 짜장면 두 그릇이랑 짬뽕
    한 그릇만 빨리 배달해 주세요." 딸그락! 이러면 아무리 기다려
    도 식사는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디냐고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구심력이 없이 얘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장애에 부딪쳤을 때 장애를  물리칠 수 있는 원
    심력을 사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나를 지키고 상대를 통해서 나에
    게 무언가 도움이 들어오게 하는 구심력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따
    라 같은 힘을 쓰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도둑이  들었을
    때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은 원심력을 쓰는  것이고, 도둑이 도망
    갈 길을 내놓고 공갈, 협박을 해서 쫓는  것은 구심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가지 힘을 적절히 잘  배합해서 사용할 줄 알아야
    겠습니다. 무턱대고 나가는 사람은 구심력없이 원심력으로만 행동
    하였기 때문에 성과가 없이 돌아옵니다. 또 나아가서 일하라고 했
    는데 일도 못하고 돌아오는 것은 원심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유리창을 닦는데 너무 힘을 주어 박박 문대다가 유리창을 깨뜨
    리는 것은 구심력이 없이 너무 원심력만 사용해서 그렇습니다. 특
    히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구심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악세레타
    를 살살 밟고 탄력으로 주행해야지 자동차가 무리없이 잘 나아가
    지, 원심력으로 콱콱 밟으면 사고가  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사를 구심력으로 하면서 대외적인 일에  있어서는 원심력을 통
    해서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원심력과 구심력
    의 적절한 분배가 없이 무작정 사용하는 힘은 자기 딴에는 꽤 힘
    썼다고 생각할 지라도 그 힘이 실제로  작동한 것은 매우 미미하
    게 됩니다.
     
      구심력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힘입니다. 특히  상
    대방으로부터 원심력이 왔을 때 중심을  잃어버리면 쓰러지게 됩
    니다. 상대편이 말로써 나의 정곡을 한 번 찔렀을 때 당황하지 말
    고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방을  진정시키며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는 것은 구심력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상대가 기
    분이 좋아졌을 때 원심력을  사용하여 상대의 핵심을  찔러 나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 이것이 원심력과 구심력을  사용하는 협상
    의 기술입니다. 갑자기 상대가 화를  내면 일단 미안하다 그러고,
    그 다음에 다시 2단으로  중화시킨 후, 3단계에서 원심력을  써서
    상대의 마음을 바꾸어 놓는 것, 이것이 곧 자기 중심을 지키며 대
    인관계를 행하는 요령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한  번 찌른다고하여
    그저 자기 힘만 믿고 무조건 받아치면 스스로 중심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심력, 원심력조차 없
    이, 자기 중심이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단지 세월
    에 의해서 늙어만 갈뿐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2655
  • 자본론15
    잉여가치율의 증대에 의해 보상하는 것의 절대적 한계, 또는 착취되는 노동자 수의 감소를 노동력의 착취도의 제고에 의해 보상하는 것의 절대적 한계를 이루고 있다. 이 자명한 제2법칙(第二法則)은 이후에 전개되는 자본의 경향, 즉 고용하는 노동자의 수[즉,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가변적 자본부분]를 가능한 한 축소시키려는 자본의 경향-이것은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량을 생산하려는 자본의 또 다른 경향과 모순된다-으로부터 발생하는 수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중요하다. 다른 한편, 만약 고용되는 노동력의 양[즉, 가변자본의 크기]이 잉여가치율이 감소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증대하지 못한다면,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은 감소할 것이다.
    제3법칙(第三法則)은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이 잉여가치율과 투하 가변자본량이라는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만약 잉여가율[노동력의 착취도]과 노동력의 가치(필요노동시간)가 주어져 있다면, 가변자본이 크면 클수록 생산되는 가치량과 잉여가치량도 더 커진다는 것은 자명하다. 만약 노동일의 한계가 주어져 있고 또 필요노동부분의 한계도 주어져 있다면, 개별 자본가가 생산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양은 전적으로 그가 움직이는 노동량(勞動量)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노동량은 앞의 가정 하에서는 그가 착취하는 노동력의 양 또는 노동자의 수에 의해 결정되고, 이 수는 또한 그가 투하하는 가변자본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잉여가치율이 주어져 있고 또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는 경우,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은 투하가변자본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자본가는 자기의 자본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한 부분을 그는 생산수단(生産手段)에 지출한다. 이것은 그의 자본의 불변부분이다. 다른 부분을 그는 살아 있는 노동력(勞動力)에 지출한다. 이 부분은 그의 가변자본을 형성한다. 동일한 생산방식(生産方式) 하에서도 생산부문(生産部門)이 다르면 불변부분과 가변부분으로
    의 자본의 분할도 달라지며, 통일한 생산부문에서도 생산과정의 기술적 토대와 사회적 결합이 달라짐에 따라 그것은 달라진다. 그러나 주어진 자본의 불변부분과 가변부분 사이의 비율이 어떻든 [즉, 1 : 2이든 1 : 10이든 1 : x이든] 바로 앞에서 정립한 법칙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의 분석에 의하면, 불변자본의 가치는 비록 생산물의 가치 속에 재현(再現)되기는 하지만 새로 생산되는 가치[즉, 새로 창조되는 가치생산물(價値生産物)] 속에는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1,000멍의 방적공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물론 100명의 방적공을 고용할 때보다 더 많은 원료. 방추 등이 요구되지만, 이 추가적인 생산수단의 가치는 [등귀할 수도 하락할 수도 불변일 수도, 또 클 수도 작을 수도 있지만] 생산수단을 가동시키는 노동력에 의해 수행되는 가치증식과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서 확인된 법칙{제3법칙}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즉, 상이한 자본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양은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고 노동력의 착취도가 같은 경우] 이들 자본의 가변부분의 크기[즉, 살아 있는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이 법칙은 현상(現象)의 외관에 의거한 모는 경험 {평균이윤율(平均利潤率)의 형성}과는 분명히 모순된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사용되는 총자본에 대한 백분율을 고찰하면, [많은 불변자본과 적은 가변자론을 사용하는] 방적업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가변자본과 적은 불변자본을 사용하는] 빵제조업자보다 더 적은 이윤[잉여가치]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 외견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매개항(媒介項)이 필요한데, 그것은 마치 0/0이 현실적인 크기를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등 대수학(代數學)의 입장에서는 많은 매개항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고전파 경제학은 비록 이 법칙 {제3법칙}을 정식화하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이 법칙을 고수했다. 왜냐하면, 이 법칙은 가치법칙의 필연적인 귀결이기 때문이다. 고전파 경제학은 무리한 추상(抽象)에 의해 이 법칙을 현상의 모순으로부터 구해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리카도학파가 어떻게 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가는 나중에(주석 2: 이에 대해서는 제4권 {“잉여가치학설사”제20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보게 될 것이다. '사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속류경제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현상을 규제하고 설명하는 법칙(法則)을 무시하고, 그와는 반대로 현상(現象)의 외관에 매달리고 있다. 스피노자와는 반대로, 속류경제학은 "무지(無知)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신(神) 이외에는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신이 그 현상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스피노자는 "무지는 결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한 사회의 총자본이 매일 움직이는 노동은 하나의 단일노동일(單一勞動日)로 간주할 수 있다. 만약 예컨대 노동자의 수가 100만이고 한 노동자의 평균노동일이 10시간이라면, 사회적 노동일은 1,000만 시간으로 된다. 한 노동자의 평균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는 경우-그 한계가 육체적 조건에 의해 설정되건 사회적 조건에 의해 설정되건-잉여가치량은 오직 노동[즉, 노동인구]의 증가에 의해서만 증가할 수 있다. 이 경우 인구의 증가는 사회적 총자본에 의한 잉여가치생산의 수학적 한계로 된다. 반대로 인구의 크기가 주어져 있는 경우, 이 한계는 노동일 연장의 가능성에 의해 규정된다.(주석 3: "사회의 노동[즉, 경제적 시간]은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인구 100만이 하루에 각각 10시간씩 노동하면 합계 1,000만 시간으로 되는 것과 같다. 자본의 증식에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는 [어떤 주어진 시기에도] 사용되는 경제적 시간(時間)의 현실적 범위 안에 있다.(“국민의 정치 경제학에 관한 연구”, 런던, 1821년, pp. 47, 49).) 다음 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법칙은 오직 지금까지 고찰한 형태의 잉여가치 {절대적(絶對的) 잉여가치}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잉여가치의 생산에 관한 이때까지의 고찰로부터 명백하게 되는 것처럼, 어떤 임의의 화폐액 또는 가치액이 모두 자본으로 전환될 수는 없고, 일정한 '최소한도'의 화폐 또는 교환가치가 개별적인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 가변자본의 최소한도는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1년 내내 고용하는 1노동력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금액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노동자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는 자기의 생활수단의 재생산에 필
    요한 노동시간(이를테면 하루에 8시간)만 노동하면 충분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필요로 하는 생산수단도 역시 8노동시간분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 노동자로 하여금 이 8시간 이외에 이를테면 4시간의 잉여노동을 하게 하는] 자본가는 추가적 생산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추가적 화폐액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 하에서는, 자본가가 매일 취득하는 잉여가치로 노동자와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다시 말해 자기의 필수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기 위해서도, 벌써 두 사람의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 한 사람이 4시간의 잉여노동을 제공하기 문에, 노동자 두 사람은 8시간의 잉여노동을 제공하며, 따라서 8시간의 노동은 노동자의 필요노동과 동일하다.} 이 경우 그의 생산의 목적은 단순한 생활의 유지이고 부의 증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부(富)의 증가를 전제하고 있다. 그가 보통의 노동자보다 겨
    우 2배 낮게 생활하며, 또 생산된 잉여가치의 절반을 자본으로 재전환시키기 위해서는, 그는 노동자의 수와 투하자본의 최소한도를 8배로 증가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32시간의 잉여노동을 획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몸소 자기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직접 생산과정에 참가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는 경우 그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혼혈아, 즉 '소경영주(小經營主)'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자본가는 자본가로서 [즉, 인격화된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시간 전체를 타인노동의 취득과 관리, 그리고 노동생산물의 판매에 바쳐야 한다.(주석 4: "차지농업가는 자기 자신의 노동에 의지할 수 없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그는 손해를 볼 것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이다. 그는 탈곡하는 사람을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탈곡되지 않은 곡물 때문에 임금이 그의 손실로 될 것이다. 또 그는 풀을 베는 사람, 수확하는 사람 등을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항상 자기의 농장 구내를 순회해야 하며, 태만이 생기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만약 그가 어떤 한 장소에 매달려 있으면, 태만이 생길 것이다"(?식량의 현재가격과 농장규모 사이의 관계에 관한 연구?, 한 농장주?아버노스트“, 런던, 1773년, p. 12). 이 책은 대단히 흥미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본가적 차지농업가' 또는 '상인적 차지농업가'의 발생사를 연구할 수 있고, [생계유지를 주로 하는] '소농장주'에 대비한 그들의 자기 찬양을 들을 수 있다. "자본가계급은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완전히 육체노동의 필요성으로부터 해방된다"(리처드 존스[Richard Jonse], ?국 민경제학교과서?, 허트포드, 1852년, 제3강의, p. 39).) 중세의 길드제도는 개별 장인{마스터}이 고용할 수 있는 노동자 수의 최대한도를 매우 적은 수로 제한함으로써 수공업적 장인이 자본가로 전환되는 것을 강제로 저지하려 했다.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는 [생산을 위해 투하하는 최소금액이 중세의 최대한도를 훨씬 초과하게 될 때]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본가로 전환된다. 여기에서도 자연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헤겔이 자기의 ?논리학?에서 발견한 법칙, 즉 단순한 양적(量的) 차이가 일정한 점에 도달하면 질적(質的) 차이로 이행한다는 법칙의 정당성이 증명되고 있다.(주석 5: 로랑(Laurent)과 제라르(Gerhardt)에 의해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전개된 대화학의 분자설(分子 設)은 바로 이 법칙에 입각하고 있다 {엥겔스: 화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어렴풋 한 이 주(注)의 설명을 위해 다음의 것을 지적해 둔다. 마르크스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1843 년에 C. 제라르가 처음으로 명명한 탄소화합물의 '동족열(同族列)'에 관한 것인데, 각 계열은 각각 특유의 대수적(代數的) 구조식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파라핀 계열은 CnH2n+2이고, 표준 적인 알코올의 계열은 CnH2n+O이고, 표준적인 지방산의 계열은 CnH2nO2등등. 이들 예에서는 분자식에 CH2를 단순히 양적으로 추가하면 그때마다 질적으로 상이한 물체가 형성된다. 이 중 요한 사실의 확정에서(마르크스의 과대한 평가를 받은) 롤랑과 제라르의 기여에 관해서는 코프 (Kopp)의 ?화학의 발달?(윈헨, 1873년, pp. 708, 716)과 숄렘머(Schorlemmcr)의 ?유기화학의 성립과 발달?(런던, 1879년, p. 54)를 참조하라.})
    개별적인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가 자본가로 전환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가치액의 최소한도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단계 에 따라 달라지며. 또 주어진 발전단계에서도 생산분야가 다르면 각 분야의 특수한 기술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생산분야들은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의 초기에 각 개인의 수중에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의 최소한도의 자본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 때문에, 한편으로는 콜베르(Colbert)시대의 프랑스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독일주들처럼 국가가 개인들에게 보조금을 주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한 공업부문과 상업부문의 경영에 법률상의 독점권(獨占權)을 갖는 회사(주석 6: 이런 종류의 회사를 루터(Martin Luther)는 '독점회사'라고 부른다.) -근대적 주식회사의 선구자-가 설립되었다.
    우리는 생산과정의 진행 중에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상세한 내용들은 더 이상 취급하지 않겠으며, 따라서 자본 그 자체의 특성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몇 가지 요점만을 강조해 둔다.
    생산과정의 내부에서 자본은 노동[즉, 활동중에 있는 노동력 또는 노동자 그 자체]을 지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인격화된 자본인 자본가는 노동자가 자기의 일을 규칙적으로 또 상당한 강도를 가지고 수행하도록 감시한다.
    더 나아가, 자본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노동자 자신의 좁은 범위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게끔 하는] 강제적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들고, 잉여노동을 짜내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은 그 정력과 탐욕과 능률의 면에서 [직접적인 강제노동에 입각한] 종전의 모든 생산제도를 능가한다.
    자본은 우선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기술적 조건을 그대로 이용해 노동을 자기에게 예속시킨다. 따라서 자본은 즉시로 생산방식을 변경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때까지 고찰해 온 형태의 잉여가치의 생산[즉, 노동일의 단순한 연장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은 생산방식 그 자체의 어떤 변화와도 관계없이 나타났다. 이러한 잉여가치의 생산은 구식 빵제조업에서나 근대적 면공장에서나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생산과정을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노동자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을 자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합목적적인 생산활동의 단순한 수단 및 재료(材料)로 대한다. 예컨대 가죽공장에서 그는 가죽을 단순히 자기의 노동대상(勞動對象)으로 취급한다. 그가 무두질하는 것은 자본가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산과정을 가치증식과정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사정은 달라진다. 생산수단은 즉시 타인의 노동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한다.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한다.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자기의 생산활동의 소재적 요소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자기 자신의 생활과정에 필요한 효모(酵母: ferment)로 소비하는데, 자본의 생활과정은 자기증식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야간에 가동이 중단되어 살아 있는 노동을 조금도 흡수하지 못하는 용광로와 작업장은 자본가로 보아서는 '순전한 손실'이다. 그러므로 용광로와 작업장은 노동력의 '야간노동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화폐가 생산과정의 객체적 요소[즉, 생산수단]로 전환되자마자, 생산수단은 당연한 권리와 힘에 의해 타인의 노동과 잉여노동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죽은 노동과 살아 있는 노동 [즉, 가치와 가치창조력] 사이의 이와 같은 전도(inversion) 또는 왜곡(distortion)-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특유한 특징이다-이 어떻게 자본가들의 의식에 반영되고 있는가를 하나의 실례에 의해 마지막으로 보이려고 한다. 영국의 공장주들이 반란을 일으킨 1848-50년에 ‘서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역사가 길고 가장 명성있는 회사의 하나인 칼라일 부자회사[1752년 이래 1세기 동안 존속하고 있으며, 동일한 가족에 의해 4대째 경영되고 있는 페이즐리(Paisley)의 아마 및 면화 방적공장의 사장'인 매우 유식한 신사가 1849년 4월 25일자 ?글래스고우 데일리 매일?지에 '릴레이 제도'라는 제명의 한 편지를 기고했는데(주석 7: ?공장감독관 보고서. 1849년 4월 30일?, p. 59.), 거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제 노동시간을 12시간에서 10시간으로 단축하는 데서 생기는 해악을 살펴보기로 히자....그 것은 공장주의 기대와 재산에 대한 가장 중대한 손상이라는 점으로 귀착된다. 만약 그가" (즉 그의 '직공들'이) "과거에는 12시간 작업했는데 앞으로는 10시간으로 제한된다면, 그의 공장에 있는 기계나 방추의 매 12개가 10개로 축소될 것이며, 또 만약 그가 자기의 공장을 판매할 생각 을 가진다 해도 그것은 10개로밖에 평가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전국의 모든 공장이 자기 가 치의 6분의 1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주석 8: 같은 보고서, p. 60. [그 자신 스코틀랜드인이고, 잉글랜드의 공장감독관들과는 달리 전적으로 자본가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공장감독관 스튜어트는 자기의 보고서에 수록한 이 편지가 "릴레이 제도를 쓴 것이고, 특히 이 제도에 대한 편견을 제거할 목적으로 쓴 매우 유용한 편지다" 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4세대의 자본가적 속성을 물려받은 이 서부 스코틀랜드인의 자본가적 두뇌에는, 방추 등의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수단이 자본으로서 가진 성질[즉, 자기 자신을 가치증식시키며 매일 타인의 무상노동의 일정량을 흡수한다는 생산수단의 자본속성]과 구별없이 서로 엉켜 있는데 이 때문에 칼라일 회사 사장은, 그가 만약 자기 공장을 판매한다면, 그는 방추의 가치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 위에 또 방추의 가치증식력에 대해서도 대가를 지불받을 것으로, 즉 방추에 들어 있는 노동[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대해서뿐 아니라 방추의 도움을 받아 매일 페이즐리의 용감한 서부 스코틀랜드인들로부터 짜내는 그 잉여노동에 대해서까지도 대가를 지불받을 것으로 망상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노동일을 2시간 단축하면 방적기계 12대의 판매가격이 10대의 판매가격으로 축소되어 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 4 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제 12 장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
    제 13 장 협업
    제 14 장 분업과 매뉴팩쳐
    제 15 장 기계와 대공업



    제 12 장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



    노동일 중 자본이 지불한 노동력 가치(勞動力 價値)의 등가물이 생산되는 부분을 우리는 이때까지 불변(不變)의 크기로 간주했는데, 실제로도 사회의 일정한 경제적 발전단계의 주어진 생산조건 하에서는 불변의 크기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노동자는 이러한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을 넘어 2시간, 3시간, 4시간, 6시간 등을 더 일할 수 있었다. 이 연장의 크기에 따라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과 노동일(勞動日)의 길이가 결정되었다. 필요노동시간은 불변이었지만, 1노동일 전체는 가변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노동일의 길이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의 분할이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자. 예컨대 선분 AC, 즉 A-B-C가 12시간 노동일을 표시하며, AB부분은 10시간의 필요노동(必要勞動)을, BC부분은 2시간의 잉여노동(剩餘勞動)을 표시한다고 하자. AC를 더 이상 연장하지 않고, 또는 AC의 더 이상의 연장과는 전혀 관계없이, 어떻게 잉여가치의 생산을 증대시킬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잉여노동을 연장시킬 수 있는??
    노동일 AC의 한계는 주어져 있지만, BC는 그 종점 C[그것은 동시에 노동일 AC의 종점이다]를 넘어 연장되지 않더라도 그 시발점 B를 반대방향인 A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연장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직선 A-B'- B-C에서 B'B는 BC의 절반[즉, 1노동시간]과 같다고 하자. 이제 만약 12시간 노동일 AC에서 점 B를 B'으로 이동시킨다면 BC는 B'C의 길이로 연장되어, 노동일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12시간이지만 잉여노동은 50%만큼 [즉,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잉여노동이 BC에서 B'C로 [즉,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연장되는 것은, 동시에 필요노동이 AB에서 AB'으로 [즉 10시간에서 9시간으로] 단축되지 않고서는 분명히 불가능하다. 잉여노동의 연장에 필요노동의 단축이 대응하고 있다. 즉, 노동자가 이때까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위해 쓰고 있던 노동시간의 일부가 자본가를 위해 지출되는 노동시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노동일의 길이가 아니라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의 노동일(勞動日)의 분할(分割)이다.
    다른 한편, 만약 노동일의 길이와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다면 분명히 잉여노동의 크기도 주어진다. 노동력의 가치[즉,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는 그 가치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규정한다. 만약 1노동시간이 0.5원의 금량으로 표현되며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5원이라면, 노동자는 자본이 노동력의 대가로 지불한 가치를 대체하기 위해 [다시 말해, 그가 매일 필요로 하는 생활수단의 가치의 등가물을 생산하기 위해] 하루에 10시간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활수
    단(生活手段)의 가치가 주어지면 노동력(勞梨力)의 가치가 주어지고(주석 1: 하루의 평균임금의 가치는 노동자가 '생활하고, 노동하며, 생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월리암 폐티[William Petty], “아일랜드의 정치적 해부?, 1672년, p. 64). "노동의 가격은 항상 생활수단의 가격으로 구성된다....노동자의 임금이 [다수의 노동자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가족을 노동자의 낮은 신분과 지위에 맞게 부양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 경우" 그는 적합한 임금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반더린트, ?화폐만능론?, p. 15). "자기의 팔과 근면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단순한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타인에게 판매할 수 있는 경우에만 무엇인가를 갖게 된다....어떤 종류의 노동에서도 노동자의 임금은 그가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에 국한된다는 사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튀르고, ?부의 형성과 분배의 고찰?, 데르 편, ?저작집?, 제1권. p. 10). ”생활필수품의 가격은 사실상 노동의 생산비다"(맬더스, ?지대의 성질과 성장 및 지대를 규제하는 원리에 관한 연구?, 런던, 1815년, p. 48. 주).)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지면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의 길이가 주어진다. 그런데 잉여노동(剩餘勞動)의 크기는 노동일 전체에서 필요노동시간을 뺀 것과 같다. 12시간에서 10시간을 빼면 2시간이 남는데, 주어진 조건 하에서 이 2시간 이상으로 잉여노동을 증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물론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5원 대신 4.5원을, 또는 이보다도 더 적은 금액을 지불할 수도 있다. 이 4.5원의 가치를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9노동시간이면 충분할 것이고, 따라서 이제는 12시간 노동일 중 2시간 대신 3시간이 잉여노동으로 될 것이며, 잉여가치도 1원에서 1.5원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는 오직 노동자의 임금을 그의 노력의 가치 이하로 인하함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는 9시간에 생산하는 4.5원을 가지고는 이전보다 10분의 1만큼 적은 양의 생활수단을 얻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그의 노동력의 재생산은 위축된 형태로 행해질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잉여노동은 정상적 한계를 넘어섬으로써만 연장될 수 있으며, 잉여노동의 영역은 필요노동시간의 영역을 강탈함으로써만 확대될 수 있다. 잉여노동의 이와 같은 증대방법이 현실적으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에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상품이 자기의 완전한 가치대로 매매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제되고 있는 한, 노동력의 생산[또는 그 가치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임금(賃金)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하락하는 것에 의해서만 감소될 수 없고, 오직 노동력의 가치 그 자체가 하락하는 것에 의해서만 감소될 수 있다. 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는 경우, 잉여노동의 연장은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의 결과 생기는 것이며, 그 반대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이 잉여노동의 연장의 결과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예에서 필요노동시간이 1/10 만큼[즉, 10시간에서 9시간으로] 축소되고 따라서 잉여노동이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연장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가치가 현실적으로 1/10 만큼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노동력의 가치가 10분의 1만큼 하락한다는 것은, 이전에는 10시간에 생산되던 것과 동일한 양의 생활 수단이 이제는 9시간에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 productivity)의 향상 없이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어떤 제화공이 주어진 생산수단으로 12시간 노동일에 한 켤레의 장화를 만들 수 있다고 하자. 그가 이와 동일한 시간에 두 켤레의 장화를 만들 수 있으려면 그의 노동생산성은 2배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노동수단
    이나 노동방법 또는 이 두 가지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노동의 생산조건[즉, 그의 생산방식], 따라서 또한 노동과정 그 자체에 혁명(革命)이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노동생산성의 상승이라는 말은 노동과정에 변화가 일어나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단축되며, 그리하여 주어진 양(量)의 노동(勞動)이 더 많은 양의 사용가치(使用價値)를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주석 2: "산업이 개량(改良)된다고 할 때, 그 것이 의미하는 것은 상품을 이 전보다 적은 노동자에 의해, 또는 (같은 말이지만) 이전보다 더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갈리아니, ?화페에 대해”, pp. 158, 159) "생산비의 절약은 생산에 사용되는 노동량의 절약일 수밖에 없다"(시스몽디, ?경제학연구?, 제1권 p. 22).) 지금까지 노동일의 연장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을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생산방식이 주어져 있고 불변인 것으로 전제했다. 그러나 필요노동이 잉여노동으로 전환됨으로써 잉여가치가 생산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자본이 역사적으로 전해 온 형태의 노동과정을 그대로 계승해 그 노동과정의 계속시간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노동생산성이 증가할 수 있으려면 먼저 노동과정의 기술적. 사회적 조건, 따라서 생산방식(生産方式) 그 자체가 변혁되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만 노동력의 가치는 저하할 수 있으며, 노동일 중 이 가치의 재생산에 필요한 부분도 단축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일의 연장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나는 절대적 잉여가치(絶對的 剩餘價値: absolute surplus-value)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이에 대응해 노동일의 두 부분들의 길이 변화로부터 생기는 잉여가치를 나는 상대적 잉여가치(相對的 剩餘價値: relative surplus-value)라고 부른다.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생산물[따라서 일상적 생활수단에 속하거나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생산물]이 생산되는 산업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이 상승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에 최종형태를 주는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될 뿐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수단들에 들어 있는 노동의 양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예컨대 장화의 가치는 제화공의 노동에 의해서 뿐 아니라 가죽. 왁스. 실 등의 가치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따라서 생활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불변자본의 물질적 요소들[즉, 노동수단과 노동재료]을 공급하는 산업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의 증가와 그에 상응한 상품가격의 저하도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그러나 필요한 생활수단을 공급하지도 않으며 그것의 생산을 위한 생산수단을 공급하지도 않는 생산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노동력의 가치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상품이 값싸게 되는 경우, 그것은 [그 상품이 노동력의 재생산에 참여하는 비율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예컨대 속옷은 하나의 필요한 생활수단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생활필수품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상품이 값싸게 되는 경우, 그것은 속옷에 대한 노동자의 지출을 감소시킬 뿐이다. 생활필수품의 총량은 상이한 산업부문들의 생산물인 각양각색의 상품으로 구성되며, 그러한 상품들 하나하나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의 일부를 형성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감소함에 따라 저하하는데, 필요노동시간의 총감소량은 상술한 상이한 생산부문들 전체에서 일어난 노동시간 단축의 총계와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일반적 결과{노동력의 가치 저하}를 마치 각 개별 경우{자본}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직접적인 목적인 것처럼 취급한다. 그렇지만 개별 자본가가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 예컨대 속옷의 가치를 저하시킬 때, 그는 결코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켜 그만큼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목적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이 결과에 기여하는 한, 그는 일반적 잉여가치율의 제고에 기여하게 된다.(주석 3: "기계설비의 개량(改良)에 의해 공장주의 생산물이 2배로 증가한다면....공장주는 총생산물 중 더 적은 몫으로 노동자들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그의 이윤은 증가할 것이다. 그의 이윤은 다른 방법으로 변경될 수는 없지 않은가?“(람지[Ramsay], ?부(富)의 분배에 관한 연구?, pp. 168-169).) 자본의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경향(傾向)들은 그것들의 현상형태(現象形態)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內在的 法則: immanent laws)이 개별 자본들의 외적 운동(外的 運動)에 표현되어 경쟁이 강제하는 법칙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리하여 개별 자본가를 추진시키는 동기(動機)로서 그의 의식(意識)에 도달하는 방식을 여기에서 고찰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이 점만은 분명하다. 즉, 경쟁의 과학적 분석은 자본의 내적 본성이 파악된 뒤에라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천체(天體)의 외관상의 운동은 [감각적으로 직접 인식할 수 없는] 천체의 진정한 운동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이해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얻어진 결과들만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것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노동시간이 6원으로 표현된다면, 12시간의 1노동일에는 72원의 가치가 생산{창조}될 것이다. 현재의 지배적인 노동생산성으로 이 12노동시간에 12개의 상품이 생산된다고 가정하고, 이 상품 한 개에 소비되는 원료와 기타 생산수단의 가치가 6원라고 하자. 이와 같은 사정 하에서는 상품 1개의 가치는 12원이다. 즉, 6원은 생산수단의 가치고, 6원은 이러한 생산수단을 처리할 때 새로 첨가된{추가된} 가치다. 이제 어떤 자본가가 노동생산성을 2배로 하는 데 성공하여 그 결과 그는 12시간의 1노동일에 이 종류의 상품을 12개가 아니라 24개를 생산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만약 생산수단의 가치가 변동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1개의 상품의 가치는 이제 9원으로 떨어질 것이다. 즉, 생산수단의 가치가 6원이고 노동에 의해 새로 첨가된 가치가 3원으로 될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2배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노동일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72원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다만 이 새로운 가치가 이제는 2배의 생산물(生産物)에 할당될 뿐이다. 따라서 1개의 생산물은 새로운 가치의 1/12 대신 1/24을 [즉, 5원 대신 3원을] 포함하게 된다. 또는, 결국 같은 말이지만, 생산수단이 각 생산물로 전환될 때, 이제는 상품 1개당 전과 같이 1노동시간이 아니라 1/2노동시간만이 생산수단에 첨가된다. 이 상품의 개별 가치(個別置値: individual value)는 이제 그 사회적 가치(社會的 價値: social value)보다 낮다. 즉, 이 상품에는 사회적 평균 조건 하에서 생산된 같은 종류의 대다수의 상품에 비해 적은 노동시간이 들어 있다. 1개의 상품은 평균적으로 12원이 소요되어 2시간의 사회적 노동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변경된 생산방식 하에서는 1개의 상품에는 9원만이 소요되고 1 1/2시간의 노동만이 들어 있다. 그러나 상품의 현실적 가치(現實的 價値)는 그 상품의 개별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社會約 價値)이다. 다시 말해, 상품의 현실적 가치는 각각의 개별적인 경우에 실제로 소요되는 노동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따라서 만약 새로운 방법을 채용하는 자본가가 자기의 상품을 12원이라는 사회적 가치로 판매한다면, 그는 그 상품을 개별 가치보다 3원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되며, 따라서 3원의 특별잉여가치(特別剩餘價値: extra surplus-value)를 실현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에게는 12시간 노동일이 이제는 종전의 12개가 아니라 24개의 상품으로 나타나므로, 1노동일분의 생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판로(販路)가 2배로, 즉 시장이 2배로 커져야 한다. 기타의 조건이 같다면, 그의 상품은 오직 가격인하(價格引下)를 통해서만 시장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상품을 그 개별 가치보다는 비싸게, 그러나 그 사회적 가치보다는 싸게, 예컨대 1개당 10원에 판매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그는 상품 1개당 1원의 특별잉여가치를 얻게 된다. 이러한 잉여가치의 증대는 [그가 생산하는 상품이 노동력의 일반적 가치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는 생활필수품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자본가 자신이 가지게 된다. 따라서 각 개별 자본가들은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상품가치를 저렴하게 하려는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잉여가치의 생산증대는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그에 대응하는 잉여노동의 연장에서 발생한다.(주석 4: “어떤 사람의 이윤(利潤)은 그가 타인의 노동생산물(勞動生産物)을 지배한다는 사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노동(勞動) 그 자체를 지배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만약 그가 [그의 노동자의 임금에는 변동이 없는데 자기의 제품을 더 비싸게 팔 수 있다면, 그가 이윤을 볼 것은 분명하다...그때에는 그가 생산하는 것 중 더 적은 부분으로도 이 노동을 고용하는데 충분할 것이며, 따라서 더 많은 부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게 된다“(캐즈노브[J. Cazenove], ?정치경제학개론?, 런던, 1832년, pp. 49, 50).) 필요노동시간이 10시간[즉,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60원]이고, 잉여노동이 2시간[따라서 매일 생산되는 잉여가치가 12원]이라고 하자. 우리의 자본가는 이제 24개의 상품을 생산해 그것을 1개당 10원에, 즉 합계 240원에 판매한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144원{6원 x 24개}이기 때문에 14 2/5개{=144원/10}의 상품은 투하된 불변자본의 가치를 대체한다.
    12시간 노동일의 노동은 나머지 9 3/5개 {24개- 14 2/5개}로 표현된다. 노동력의 가격이 60원이기
    때문에 필요노동시간은 6개의 생산물로 표현되고 잉여노동은 3 3/5개의 생산물로 표현된다.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비율은 사회적 평균조건 하에서는 5 : 1 {=10시간: 2시간}이었으나 이제는 5 : 3 {=6 : 3 3/5}으로 된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도 이와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12시간 노동일의 생산물의 가치는 240원{=10원 x 24개}이다. 그 중 144원은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되는 데 지나지 않는] 생산수단의 가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96원이 남는데, 이것은 1노동일 동안 새로 창조된 가치의 화폐적 표현이다. 이 화폐적 표현은 동일한 종류의 사회적 평균노동의 화폐적 표현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사회적 평균노동의 12시간은 다만 72원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노동은 강화된 노동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동일한 시간 안에 동일한 종류의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한다. 그러나 우리의 자본가는 노동력의 하루 가치에 대해 지금도 종전대로 60원만 지불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이제 이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종전의 10시간이 아니라 7 1/2 시간{96원 : 12시간=60원: 7.5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잉여노동은 2 1/2시간만큼 증가하며, 그가 생산하는 잉여가치는 12원에서 36원{=96-60}으로 증가한다. 그리하여 개선된 생산방식을 채용하는 자본가는 동일한 생산부문의 다른 자본가에 비해 1노동일 중 더 큰 부분을 잉여노동으로 취득한다. 그는 총체로서의 자본이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할 때 수행하는 일을 개별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새로운 생산방식이 일반화되고 그리하여 상품의 개별 가치와 사회적 가치 사이의 차이가 제거되자마자, 이 특별잉여가치는 소멸된다.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의 법칙은 새로운 생산방법을 채용하는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의 상품을 그 사회적 가치 이하로 판매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리고 또 바로 이 법칙이 경쟁(競爭)의 강제법칙(强制法則)으로 작용해 그의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산방법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주석 5: "만약 나의 이웃사람이 적은 노동으로 많이 생산함으로써 싸게 팔 수 있다면,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싸게 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더 적은 직공의 노동으로 [따라서 더 싸게] 생산하는 온갖 기술. 방법 ? 기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동일한 기술. 방법. 기계를 이용하거나, 그것들과 유사한 어떤 발명을 해야 할 일종의 필요성과 경쟁심을 야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에 처하게 되며, 누구도 자기의 이웃사람보다 더 싸게 팔 수 없게 된다"(?영국에 대한 동인도무역의 이익“, 런던, 1720년, p. 67).) 이러한 과정 전체를 거쳐 최후로 일반적 잉여가치율(一般的 剩餘價値率)이 영향을 받는 것은,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생활필수품의 생산에 기여하는] 산업부문에서 일어나서 [노동력의 가치를 구성하는] 상품들을 값싸게 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에 반비례한다. 노동력(勞動力)의 가치도 역시 노동생산성에 반비례한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가치는 상품의 가치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생산성에 정비례한다. 그것은 노동생산성의 증가에 따라 증가하며, 그 저하에 따라 저하한다. 화폐가치가 불변이라면 12시간이라는 사회적 평균노동일은 항상 72원이라는 동일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데, 그것은 이 가치총액이 임금과 잉여가치로 분할되는 비율 여하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만약 노동생산성이 증가한 결과 생활수단의 가치가 저하하고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가치가 60원에서 36원으로 떨어진다면, 잉여가치는 12원에서 36원으로 증가할 것이다. 노동력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이전에는 10노동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다만 6노동시간{72원 : 12시간=36: 6시간}이 필요하다. 4노동시간이 떨어져 나와(set free) 잉여노동의 영역에 편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상품을 값싸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 자체를 값싸게 하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려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며 끊임 없는 경향이다.(주석 6: "노동자의 생활비가 어떤 비율로 감소되든, 만약 그와 동시에 노동에 대한 규제들이 제거된다면, 그의 임금도 동일한 비율로 저하할 것이다"(?곡물수출 장려금의 폐지에 관한 고찰?, 런던, 1753년, p. 7). "산업의 이익은 곡물과 일체의 식료품이 가능한 한 싸게 되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비싸게 하는 모든 것은 노동을 역시 비싸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노동이 규제되지 않는 모든 나라에서는 식료품가격이 노동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의 가격은 필요한 생활수단이 싸게 될 때에는 언제나 싸게 된다"(같은 책, p. 3). "임금은 생산력이 증가하는 것과 동일한 비율로 감소한다. 기계가 생활수단을 싸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노동자도 싸게 한다" (?경쟁과 협동의 상대적 장점에 관한 현상논문?, 런던, 1834년, p. 27).)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가는 상품의 절대적 가치(絶對的 價値) 그 자체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자본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상품에 들어 있는 [그리고 판매에 의해 실현되는] 잉여가치(剩餘價値)뿐이다. 잉여가치의 실현은 투하한 가치의 대체(代替: replacement)를 반드시 수반한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반비례하지만,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정비례하여 증가한다. 바꾸어 말해, 하나의 동일한 과정 {노동생산성의 발전}이 상품을 싸게 만드는 동시에 상품에 들어 있는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기 때문에, 교환가치(交換價値)의 생산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본가가 왜 상품의 교환가치를 끊임없이 떨어뜨리려고 노력하는가라는 수수께끼가 해명된다. 이 수수께끼를 가지고 경제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케네(F. Quesnay)는 자기의 논적(論敵)들을 괴롭혔는데, 이에 대해 그 논적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케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들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공산품(工産品)의 제조에는 [생산에 해를 끼치지 않고] 노동에 대한 지출 또는 노동비용(勞動費用)을 감축하면 할수록, 그 감축은 그만큼 더 유리하다. 왜냐하 면 그것은 제품의 가격을 인하시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숙련공들의 노동 으로부터 생기는] 부(富)의 생산은 그들의 생산물의 교환가치(交換價値)의 증대에 있다고 믿고 있다. "(주석 7: 케네, ?상업 및 수공업자의 노동에 대한 대화?, pp. 188-189.)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의 발전에 의한 노동의 절약(주석 8: "그들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자들의 노동을 그처럼 절약하는 투기꾼들"(비도[J. N. Bidaut], ?공업과 상업에서 발생하는 독점에 대해?, 파리, 1828년, p. 13). "고용주는 시간과 노동을 절약하기 위해 항상 전력을 다할 것이다"(스튜어트[Dugald Stewart], ?경제학강의?, 해밀턴[W. Hamilton] 편. "저작집?, 제8권, 에딘버러, 1855년, p. 318). "그들"(자본가들)"의 관 심사는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의 생산력을 가능한 한 크게 하는 것이다. 생산력의 증진에 그 들의 주의가 집중되고 있으며 거의 전적으로 집중되고 있다"(리처드 존스,?국민경제학교과 서?, 1852년, 제3강의, p. 39).)은 결코 노동일(勞動日)의 단축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오직 일정한 양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勞動時間)의 단축이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생산성을 제고시킨 결과 1시간에 가령 종전의 10배의 상품을 생산하게 되고, 그리하여 각 1개의 상품에 이전의 10분의 1의 노동시간을 지출하게 된다는 사실은, 결코 그로 하여금 종전과 같이 하루에 12시간 노동하고 또 그 12시간 동안 120개가 아니라 1,200개를 생산하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사실 그의 노동일은 단축되기는커녕 연장되기조차 하여 14시간 동안 1,400개를 만들도록 강요되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매컬록, 유어, 시니어 등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보면, 어떤 쪽에는 생산력(生産力)의 발전에 의해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이 단축되기 때문에 노동자는 이에 대해 자본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쓰여 있고, 다음 쪽에는 노동자는 앞으로 하루에 10시간이 아니라 15시간 노동함으로써 이 감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쓰여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테두리 안에서는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해야 할 부분을 단축하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할 수 있는 나머지 부분을 연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상품을 싸게 하지 않고 이러한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달성할 수 있는가는 우리가 다음에 고찰하려고 하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여러 특수한 생산방식들을 검토할 때 밝혀질 것이다.



    제 13 장
    협 업



    이미 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은 각 개별 자본이 다수의 노동자를 동시에 고용하고, 따라서 노동과정이 대규모로 수행되어 대량의 생산물을 공급하게 되는 그때부터 비로소 실제로 시작한다. 많은 노동자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또는 같은 노동의 장(場: field)에서), 같은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같은 자본가의 지휘 밑에서 함께 일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개념적{논리적}으로나 자본주의적 생산(資本主義的 生産)의 출발점을 이룬다. 생산방식 그 자체에 대해 말한다면, 초기의 매뉴팩쳐는 동일한 개별 자본에 의해 동시적으로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더 많다는 것 이외에는 길드{동업조합(同業組合)}의 수공업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길드의 장인(匠人: master)의 작업장이 확대된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그 차이는 순전히 양적(量的)인 것이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주어진 자본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의 양은 개별 노동자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에다 통시적으로 고용된 노동자의 수를 곱한 것과 같다. 노동자의 수(數)는 그 자체로서는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 또는 노동력의 착취도(搾取渡)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으며, 그리고 상품가치 일반의 생산에서도 그것은 노동과정의 어떤 질적(質的)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집단 노동은 ‘새로운’ 생산력을 창조한다.} 만약 12시간 노동일 하루가 6원으로 대상화된다면, 그러한 노동일 1,200일은 6원 x 1,200으로 대상화될 것이다. 1,200명의 노동자의 경우에는 12 x l,200 노동시간이, 개별 노동자의 경우에는 12노동시간이 생산물에 합쳐지고 만다. 가치의 생산에서는 다수의 노동자는 언제나 개별 노동자의 단순한 합(合)으로서만 계산된다. 따라서 1,200명의 노동자가 각각 개별적으로 생산하든, 또는 그들이 동일한 자본의 지휘하에 통합되어 생산하든, 생산되는 가치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발생한다. 가치로 대상화되는 노동은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질(質)의 노동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평균적 노동력(平均的 勞動力)이 지출된 것이다. 그러나 평균량(平均量)은 언제나 [크기만 다를 뿐 종류가 같은] 다수의 개별량(個別量)의 평균일 뿐이다. 각 산업부문에서 개별 노동자는 평균적 노동자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수학에서 '오차' {편차(偏差)}라고 부르는 이와 같은 개별적 차이는 우리가 어떤 최소한도의 노동자를 함께 고용하기만 하면 서로 상쇄되어 없어진다. 유명한 궤변가이며 아첨꾼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차지(借地)농업가로서의 자기의 실제의 경험에 의거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5명의 농업노동자로 구성되는 ‘그처럼 작은 집단’에서도 벌써 노동에서의 모든 개인적 차이는 서로 상쇄되어 소멸되며, 따라서 어떤 5명의 성인 농업노동자도 동일한 시간 안에 다른 임의의 5명의 성인 농업노동자가 하는 일과 똑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주석 1: "서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가치는 힘과 숙련과 성실성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떤 임의의 5명은 전체로서는, 내가 앞에서 말한 연령에 속하는 다른 어떤 5명과도 같은 양의 노동을 제공한다는 것을 나는 면밀한 관찰에 근거해 확신하는 바다. 이것은 이 5명 중 1명은 훌륭한 일꾼의 모든 자격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1명은 서투른 일꾼이고, 다른 3명은 전자에 가깝거나 후자에 가까운 중간 일꾼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5명밖에 안 되는 그처럼 작은 집단에서 당신들은 5명의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전량(全量)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버크, ?곡물부족에 관한 의견과 상세한 논의?, 런던, l800년, pp. 15-16). 평균적 개인에 대해서는 케들레(J. Quetelet)의 의견을 참조하라.) 어쨌든, 동시적으로 고용되는 많은 노동자의 집단적 노동일(集團的 勞動日)을 노동자의 수로 나눈 것이 하루의 사회적 평균노동(社會的 平均勞動)인 것은 명백하다. 한 사람의 1노동일이 예컨대 12시간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동시적으로 고용되는 12명의 노동자들의 집단적 노동일은 144시간이다. 그리고 12명 각각의 노동은 사회적 평균노동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개개인이 동일한 작업을 하는 데 상이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각 개인의 노동은 144시간이라는 집단적 노동일의 1/12로서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질을 가지고 있다. 12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가의 입상에서 보면 노동일은 12명 전체의 노동일로서만 존재한다. 각 개별 노동자의 노동일은 [이들 12명이 서로 협력해 가면서 노동을 하건 또는 그들의 작업 사이의 관련이 단순히 동일한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는 점뿐이건] 집단적 노동일의 구성부분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만약 이 12명의 노동자들이 2명씩 나뉘어져 각각 6명의 '소경영주(小經營主)'에게 고용된다면, 이들 각 소경영주가 동일한 가치량(價値量)을 생산하는가 어떤가, 따라서 일반적 잉여가치율을 얻게 되는가 어떤가는 확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개별적 편차가 나타날 것이다. 가령 어떤 노동자가 어떤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현저하게 많은 시간을 들인다면, 그의 경우에는 개별적으로 드는 노동시간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즉, 평균적 노동시간]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의 노동은 평균적 노동으로 인정될 수 없고, 그의 노동력도 평균적 노동력으로 인정될 수 없다. 그러한 노동력은 전혀 팔리지 않든가 또는 노동력의 평균가치 이하로 팔릴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능률(勞動能率)의 일정한 최저한도가 모든 노동에 대해 전제되고 있는데,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은 이 최저한도의 설정방법을 제시하고 있다{예: 성과급제 임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최저한도는 평균과는 괴리(乖離)된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력에 대해 그 평균가치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6명의 소경영주 중 어떤 사람은 일반적 잉여가치율보다 더 많은 것을 뽑아내며, 어떤 사람은 그보다 더 적은 것을 뽑아낸다. 이 불균등은 사회 전체적으로는 서로 상쇄되지만 개별 소경영주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가치증식의 법칙은, 개별 생산자가 자본가로 생산하며 다수의 노동자를 동시적으로 고용할 때, 즉 처음부터 사회적 평균노동을 사용할 때, 비로소 그에게 완전히 실현된다.(주석 2: 로셔(Roscher)는, 자기 부인이 이틀간 일시켰던 한 재봉사는 자기 부인이 하루 동안 동시적으로 일시켰던 두 사람의 재봉사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유치원에서 또는 주연배우인 자본가가 없는 상황에서 연구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업방식에 변동이 없는 경우라도 많은 노동자의 동시적 고용은 노동과정의 객체적 조건(客體的 條件)에 혁명을 일으킨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건물, 원료를 위한 창고, 그들이 동시에 또는 번갈아 사용하는 용기. 기구. 장치 등등, 한 마디로 말해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일부가 이제는 노동과정에서 공동으로 소비된다. 한편, 이 때문에 이러한 생산수단의 교환가치가 등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의 사용가치가 더 철저하게 이용된다고 해서 등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생산수단은 공동으로 사용되며 이전보다 대규모로 사용된다. 20명의 직포공이 20대의 직조기를 가지고 일하는 방은 독립적인 1명의 직포공이 2명의 도제를 데리고 일하는 방보다는 넓어야 할 것이지만, 노동자 20명을 수용하는 작업장 하나를 건축하는 데는 노동자 2명씩을 수용하는 10개의 작업장을 건축하는 데 드는 것보다 적은 노동이 든다. 따라서 대규모의 공동사용(共同使用)을 위한 거대한 생산수단의 가치는 이 생산수단의 규모와 유용한 효과에 비례해 증
    가하지는 않는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생산수단은 재개의 생산물에 자기 가치의 더 적은 부분을 이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이 생산수단의 총가치가 더 많은 양의 생산물에 배분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생산수단은 [개별적으로 사용되는 생산수단에 비해] 비록 절대적으로는 더 큰 가치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 작용범위를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더 적은 가치를 가지고 생산과정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각 상품의 총가치에 포함되어 있는 불변자본의 일부의 가치는 저하하며, 이 저하의 크기에 비례해서 상품의 총가치(總價値)도 역시 저하한다. 그 효과는 마치 그 상품의 생산수단에 더 싸게 생산되는 것과 같다. 생산수단의 사용의 이러한 절약(節約)은 전적으로 노동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리하여 이러한 생산수단이, [고립적이고 독립적인 노동자나 소경영주가 가지고 있는] 분산되고 상대적으로 더 비싼 생산수단과는 달리, 사회적 노동의 필요조건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 일하지 않고 다만 공간적으로 한 곳에 모여 일하는 경우에도 가능하다. 노동수단의 일부는, 노동과정 그 자체가 이러한 사회적 성격을 획득하기 전에, 별써 이러한 사회적 성격을 획득한다{큰 건물 안에 많은 노동자들이 모이면 그렇게 된다}.
    생산수단의 절약(節約)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첫째, 그것이 상품을 저렴하게 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측면이다. 둘째, 그것이 총투하자본[즉, 불변부분과 가변부분의 가치총액]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윤율}을 변동시키는 측면이다. 두번째 측면은 이 책의 제3권 제1편에서 비로소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야 할 다른 많은 문제들도 서술의 적절한 내적 연관을 위해 그곳으로 미룰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대상의 분할은 분석(分析)의 진행상 불가피한 것인데, 이러한 분할은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신과도 합치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자들은 노동수단을 자기와는 독립해 존재하는 타인의 소유로 상대하며, 이리하여 노동수단의 사용상의 절약도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따라서 자기 자신의 생산성을 제고시키는 방법과도 관련이 없는] 하나의 별개의 조작(操作: operation)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동일한 생산과정에, 또는 서로 다르지만 상호관련된 생산과정에 많은 사람이 계획적으로 함께 협력해 일하는 노동형태를 협업(協業: cooperation)(주석 3:“힘의 결합”(데스튜트 드 트라시, ?의지 및 의지작용론?, p. 80).) 이라고 한다.
    기병 1개 중대의 공격력이나 보병 1개 연대의 방어력이 개별 군인이 제각기 전개할 수 있는 공격력이나 방어력의 합계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별 노동자들의 기계적인 힘의 총계는 많은 사람이 동시에 동일한 불가분의 작업에 참가할 때 [예컨대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거나 윈치(卷楊機: winch)를 돌리거나, 장애물을 제거할 때] 발휘하는 사회적 역량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주석 4:“분할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다수 노동자들의 협력 없이는 수행할 수 없는 작업이 많이 있다. 예컨대 큰 통나무를 짐마차에 들어올리는 일....요컨대 많은 사람의 손이 하나의 불가분의 동일한 작업에서 동시에 상호협조하지 않고서는 수행할 수 없는 온갖 일"(웨이크필드, ?식민화 방법에 관한 견해?. 런던, 1849년, p. 168).) 이 경우, 결합노동(結合努動: combined labour)의 성과는 고립된 개별 노동에 의해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거나 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들거나 또는 매우 작은 규모로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협업(協業)에 의해 개인의 생산력이 제고될 뿐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생산력[즉, 집단적인 힘]이 창조되는 것이다.(주석 5: "1톤의 무게를 들어올리는 일은 한 사람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며, 열 사람이면 전력을 다해야 겨 우 가능하지만, 백 사람이면 각자가 손가락 하나만을 움직여도 할 수 있다"(존 벨러즈, ?산업 전문학교의 설립에 관한 제안“, 런던, 1696년, p. 21).)
    다수의 힘이 하나의 총력(總力)으로 융합(融合)되는 데서 생기는 새로운 역량(力量)을 무시하더라도, 대부분의 생산적 노동에서는 단순한 사회적 접촉만으로도 벌써 각 개별 노동자들의 작업능률을 증대시키는 경쟁심이나 혈기(血氣: animal spirit)라는 자극이 생긴다. 그 결과 함께 일하는 12명은 144시간이라는 집단적 1노동일에, 각각 12시간씩 제각기 일하는 12명의 고립된 노동자들보다, 또는 12일 동안 계속 일하는 1명의 노동자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해 낸다.(주석 6: "이 경우에도“ (각각 30에이커씩을 가진 10명의 차지농업가들이 고용하는 수의 노동자를 1명의 차지농업가가 300에이커의 경지에 고용하는 경우) "역시 농업노동자의 수가 많아짐으로써 생기는 이익이 있는데, 이것은 실무자가 아니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1대 4의 비율이 3대 12의 비율과 같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이 명제가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확기에나 기타 긴급한 많은 작업들에서는 많은 노동자를 결합시킨다면 일은 더 잘, 더 신속하게 수행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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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산지박(山地剝)
    『 멸망의 위기 』
     
      ○    항상 잘된다라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변하는 법. 이
      ●    것을 잘 알아서 젊어서 성과와 보람을 만들어  내지
      ●    못하는 사람은 늙어서 고기 없는 연못에서 사는  늙
            은 백조처럼 그렇게 죽어갈 뿐입니다. 젊었을 때 조
      ●    금 잘된다고 펑펑 돈이나 쓰고 명동거리나 헤메이고
      ●    다니면, 결국에 가서는  음성에너지에 먹혀서 끝내
      ●    힘도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자
            연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군자는 굳이 지금이  그와
            같은 상태일 때에는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어떤
            방법이 있는지 생각하여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
            다.
     
                         산지박(山地剝)
     
        [박] 은 유(柔)가 강(强)을 변질시키려  하는 형상이
        다. 이것은 소인의 세력이 강대한 것을 의미한다. 바
        른 정치를 주도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다.  이런 때는
        타세에 순응하여 스스로 절조를 지키며  행동을 정제
        하고, 세태의 추이를 관망하며 때를  기다림이 좋다.
        군자는 번영되는 것이 어느 순간에 멎고,  잘되는 것
        이 슬픔으로 변하는, 즉 차고 기우는  자연의 현상을
        존중한다. 그것은 하늘의 운행법칙이기 때문이다.
       
      옛날 영국의 왕족 가운데 몹시 바람을  잘 피우는 사람이 있었
    습니다. 많은 신하들은 왕가의  체통을 지키기 위하여 그  사람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사람이 동생
    이기 때문에, 동생을 죽인다는 것이 매우 가슴  아픈 일이라 차마
    그리하지 못하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 어느 한 신하가
      "폐하, 그것은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방법이 있느냐?"
      "칼로 찔러 죽이거나, 목을 메달아 죽이거나, 사약을 먹여서 죽
    이는 끔직한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일 수 있는 방법
    이 있습니다. 본인도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는
    방법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보아도 그건 절대로 죽였다고  볼 수
    없는 방법입니다."
      "폐하, 한 집안에 방이 한 칸밖에 없는 곳에다  세 여인과 함께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죽느냐?"
      "틀림없이 죽습니다."
      "네 말대로라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속는  셈치고 네말
    대로 한 번 해보겠다."
      그래서 왕은 동생보고 한 집에 세 명의 여자와 함께 살도록 명
    하고 감시를 철저히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람둥이 동생은 한 달만
    에 스스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남자가 첩을 두고 있으면 행복할 것같지만, 두 여자 틈바구니에
    서 이리 뜯기고, 저리 뜯겨서 아주 힘들게 됩니다. 옛날부터 왕가
    들이 망하는 것을 보면 전부 여자들 때문에 망합니다.  그만큼 여
    자의 에너지는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끝내가서는 지탱
    할 수 있는 양성에너지를 모두 흡수해 버리게 됩니다.
      "[박] 은 유(柔)가 강(强)을 변질시키려 하는 형상이다. 이것은
    소인의 세력이 강대한 것을 의미한다. 바른 정치를 주도하려 하여
    도 되지 않는다." [산지박]은 양효가 맨꼭대기에 하나만 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음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양성 기운을 다
    섯의 음성기운이 모두 흡수하여 끝내 가서는 멸망한다는 것을 나
    타내는 것이 이 괘입니다. 그래서 이 괘는 주역  64괘중 나쁘다고
    하는 몇 개의 괘중 하나입니다. 한 집안에 여자가  다섯이고 남자
    가 하나인 꼴입니다.
      [박]은 벗겨서 떨어뜨린다라는 뜻입니다. 여자가 남자한테 바가
    지를 박박 긁는 것이 바로  이 [박]입니다. 바가지 긁는 것이  곧
    남자를 벗겨내는 작업입니다. 바가지가 심하면 결국  남자는 거기
    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이런 때는 타세에 순응하여 스스로 절조를  지키며 행동을 정
    제하고, 세태의 추이를 관망하며 때를 기다림이  좋다. 군자는 번
    영되는 것이 어느 순간에 멎고, 잘되는 것이 슬픔으로 변하는, 즉
    차고 기우는 자연의 현상을 존중한다. 그것은 하늘의  운행법칙이
    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항상 변하는 법. 차고 기우는 것이 하늘의  운행
    법칙이기 때문에 주역은 이러한 나쁜  상황속에서 어떻게 견디어
    나아가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은 "아직  늙어서
    죽으려면 멀었겠지"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큰 오산입니다. 물론 우
    리의 판단으로는 "나이를 먹어서  늙어서 죽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 사망자수를 전체적으로 보면 사고로  죽거나 병
    으로 일찍 죽는 사람과 늙어 죽는  사람이 거의 비슷한 비율입니
    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결코 연령과 상관없습니다. 연령의 끝이
    결국은 죽음이라고 하지만,  죽음은 어머니  뱃속에서 "응애"하고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살
    아있다고 해서 미래도 그러하리라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생각
    입니다. 우리는 오늘 죽을  수도 있고 내일  죽을 수도 있습니다.
    펄펄 살아 움직이는 양성기운을 우주는  항상 우리로부터 빼앗아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오늘의 성과가 내일의 보람이  될 수 있도록 사는
    길이 우리가 가장 잘 사는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과가
    없으면 결코 보람이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지식입니다.
      항상 잘된다라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변하는 법. 이것을 잘  알
    아서 젊어서 성과와 보람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람은 늙어서
    고기 없는 연못에서 사는 늙은 백조처럼 그렇게 죽어갈 뿐입니다.
    젊었을 때 조금 잘된다고 펑펑 돈이나 쓰고 명동거리나 헤메이고
    다니면, 결국에 가서는 음성에너지에 먹혀서 끝내 힘도 쓰지 못하
    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군
    자는 굳이 지금이 그와같은 상태일 때에는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
    면서 어떤 방법이 있는지 생각하여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대상. 산이 땅에 붙어  있는 것이 [박]의  괘상이다.
        군주는 이 개상을 보고 인민의 생활을 후덕하게 하여
        각자의 위치에서 생업에 안정하게 한다.
     
      "산이 땅에 붙어 있는 것이  [박]의 괘상이다." 산지박은 위에
    는 산을 뜻하는 괘이고,  밑에는 땅을 뜻하는 괘이므로  얼핏보면
    땅위에 산이 있어서 마치  당연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땅이 강한 음성의 힘으로 산을 끌어내리고  있기 때문에 결국 산
    이 가라앉아버리는 것이 [박]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여름이 되면 오감에  의해서 "덥다"는 것을  느끼고, 또
    가을이 되어 날씨가 쌀쌀해 지면 "춥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덥다" 혹은 "춥다"라고 하는 느낌은 결코 감각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추운 것은  날씨가 추워져야지 느끼는  것입니다. 더운
    것도 우리 자신이 더운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나 자신이 덥다면 얼
    음속안에 들어가서도 더워야 합니다. 그런데 얼음속안에 들어가면
    다시 추워지게 됩니다.
      산지박은 단 하나의 양효가 존재하고 있고, 밑에는 전부다 음효
    가 있어서, 음성 기운으로 강력히 끌어당기고  있으므로 하나밖에
    없는 양성기운은 끌어당김속에 파묻혀 들어가게 됩니다. 즉 나 자
    신이 알고 있는 자기라는 믿음은 결국 주변에 빨려들어가서 깨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서  "덥다"고 해도 얼음방
    속에 집어 넣어버리면 끝내가서는 더운  기운이 서서히 식어갈뿐
    더러 조금있으면 얼음이 요구하는 대로  몸뚱아리가 되어 버려서
    죽어버리게 됩니다.
      어느 한 순간 내가 느끼는 즐거움도, 기쁨도, 슬픔도, 주변의 빨
    아당기는 힘에 의해서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변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감각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끝내가서는
    자신은 흡수되어 없어질 것입니다.
      앞의 [산화비] 괘에서는 적당한 사치를  하여 문화를 넓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화가 사치에 빠져 계속되다 보면 소인들이 판
    을 치게 됩니다. 국가도 너무 잘살게 되면 소인이 판을 치게 됩니
    다. 제위치에서 안정되게 쉬는 것도 필요합니다.
      휴식은 일의 연장입니다. 잘쉴줄 알아야 양성에너지의 힘을  잃
    어버리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땅도 2-3년에 한
    번씩은 놀아주어야 옥토가 변질되지 않습니다. 십년이고 백년이고
    계속 거기서 갈아먹으려고 하면 십년도  못가서 옥토가 황무지로
    변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무리하게  열심히 하는 것은 퍽  위험한
    일입니다.
      군자가 되지 못하면 [산화비]에서 얻은  문화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되었을 때, 가난했을  때 고생하던 자신을 잃어
    버려서는 안됩니다. 자기 자신마저  부자가 되어 버리면 그  부는
    거기서 끝나는 부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부자가  되려
    하지 말고, 고생했을 당시의 그 고생으로부터  차곡차곡 나름대로
    소중한 번영을 가꾸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절
    대 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차고 기우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
    지만, 차고 기운다 하여도  자연은 깨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자연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이치에 가깝도록 접근해야 합니다.
      자연의 법칙을 잘 이해하여  자연의 법칙에 걸림을  받지 않게
    되면, 그 사람은 설사 세상이 산지박과 같은  지경에 놓인다 하더
    라도 관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관망하는 눈이 없으면 자
    연이 자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먼저 죽어버리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잘살고 있는 나라라면 충분히  각자가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체가 풍지박산 날  수 있는 길을 막아내도
    록 해야 합니다. 왜냐면 돈 맛이 든 사람은  1억불 수출이 대단한
    것이지만, 돈맛이 안들인  사람은, 잘산다라는 것을  마음에 갖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1억불 수
    출을 위해 인내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불만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조금 어렵다고 불만이 나오는 사람은 크게  될 수 없는 사람입
    니다. 대의적인 일을 할 때 빠져나가면 안됩니다. 이 세상은 결코
    옳고 그른게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유지하느냐, 못하느냐의 문
    제이지, 결고 생각에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은 없습니다.
     
        첫번째 음효. 침대를 파괴하는데 먼저 그  발부터 파
        괴한다. 이것은 나라가 하부로부터 파괴되는 것을 의
        미한다.
       
      "침대를 파괴하는데 먼저 그 발부터 파괴한다." 밑바닥부터 흔
    들거리면 안정을 상실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망할 때는 위로
    부터 망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위가 쓰러진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정권만 바뀔 뿐입니다.  "이것은 나라가 하부로부
    터 파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민이 기아에 허덕이고  굶
    주린 백성이 들고 일어서면  그 국가는 기반이  흔들려 무너지게
    됩니다. 위로부터는 틈이  갈라지더라도 전체가 안정되게  구축이
    되어 있으면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침상밑이  흔들리면 다
    리가 흔들리고, 몸뚱아리가 흔들려 위에 사람이 존재할 수 없습니
    다.
     
        두번째 음효. 파괴는  침상다리에 이르렀다.  위험이
        아직 잠쪽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곧  안정을 상실
        하고 말 것이다. 흉하다.
       
      "위험이 아직 잠쪽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곧 안정을 상실하
    고 말 것이다." 발목이  파괴되면 다리가 흔들리게  됩니다. 이제
    위기의 정도가 아래로부터  스며들어 다리 전체에  이르렀습니다.
    아직 쓰러지지는 않아 그 위에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이 잠에서 깨
    지는 않았으나 다리가 무너지면 사람은 다치게 될 것입니다.
     
        세번째 음효. 드디어 침상이 파괴되어  분해된다. 상
        하가 서로 잃어버리게 되므로 서로  헤어져서 관련이
        없는 상태가 된다. 군자는 소인을 멀리하고  바른 길
        을 지키면 허물은 없으리라.
       
      바른 길을 지킨다는 것은 그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
    다. 우리가 판단하는 옳고 그른 것은 결코 옳고 그른 것이 아닙니
    다. 집에 불이 났을 때  모두가 도망가면 불을 끌 사람이  없습니
    다. 소인배는 도망갑니다. 우리는 생명이 존재해서 살아있는한 그
    생명이 존재할 수 있도록 생명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기 처해있는 여건이나 환경,  자기 자신을 바쳐주고 있는  세계를
    스스로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군자는 소인을 멀리하고 바른 길을 지키면 허물은 없으리라."
    세상이 어지러울 때 영웅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영웅은 세상을 관
    망하고 소인과 같이 있지 아니하다가 드디어 때가되면 소인을 자
    비로 이끌어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음의 효가 양효를 잡아 먹으려 한다해도,  즉 여자가 남자
    를 잡아먹으려 해도, 여자들끼리만 있으면 스스로  부서지기 때문
    에 거기에 빠져 들어가지만 않으면 자신을  충분히 지킬 수 있습
    니다.
      풍지박산이 일어나려고 할 때 오히려  소인들은 마음이 약합니
    다. 스스로 막 날뛰다가 그 힘만 없으면 힘  못쓰는게 소인들입니
    다. 깡패들이 험상궂은 것같지만 조금만 온정을  베풀면 어리석도
    록 죽어라고 따르는게 또 깡패들입니다. 물론 그 충정을  믿을 중
    정은 못되지만 하여튼 그런 충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음성에너
    지는 정(精)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있으면 둔해져서
    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네번째 음효. 침대의 파괴는 드디어 그 위에 있는 사
        람의 신변에까지 위험이 절박하게 되었다. 흉하다.
       
      침상위의 세계가 안정되게 하기  위해 전 가족은  합심을 해야
    합니다. 합심은 차라리 마음을  전부다 내려놓아야 이루어집니다.
    가족이 되었거나 직장이 되었거나 구성원들이  단결이 되지 않으
    면 회사를 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고, 그저 자기 이익만 생
    각하고 일하다 보면 결국 침상이 흔들리게 됩니다.
      소인이란 그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자보고 소인배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자가 남을 위한다는 것은 실제로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좋아할 때는 좋아하는 것같지만 그
    여자를 다시 미워하게 되면  좋아했던 여자의 그  마음은 얼음이
    되어서 남자를 싸늘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여자의 가슴에
    품은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한다고 했습니다.
      "침대의 파괴는 드디어 그 위에 있는  사람의 신변에까지 위험
    이 절박하게 되었다." 소인배들이  한 집단에 4/6가 들끓으면  그
    집단은 침상이 무너지듯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한 회사도 회사원
    의 4/6가 노조를 결성해서 노사분규를  일으키면 그 회사는 빨리
    문닫아 버려야 합니다.
     
        다섯번째 음효. 고기를 꿰듯이 통솔하여 궁녀로서 총
        애하게 되면 마침내 허물을 면하고  만사가 순조롭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어느 회사에서 직원의  4/6가 분규를 일으키고  있는데 거기에
    원칙을 이야기하고 이데올로기를 설득시키려 해봐야 소용이 없습
    니다. 상황이 나쁠때 "상황이 나쁘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먼저  내 가슴속에서 "내
    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가 분명히  존재해야 합니다. 회
    사원의 4/6가 회사가 망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짓밟고 불지르
    고 있을때, 그래도 내가 이 회사를 지키고  이끌어 나아가야 겠다
    고 마음먹으면 그것을 이끌고 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나
    는 버틸 수가 없다."라고 마음먹으면 회사는 망하고 맙니다.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먼저 찾아야 됩니다.  그것이 있어
    야 토의를 해도 더 좋은 방법이 나오는 것이지, 그것이 없으면 그
    저 좋은 안건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회사가
    나의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  무슨 일
    이 벌어졌다 했을때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나오는 사람은 틀
    림없이 나중에 자기 회사를 만들어도 안쓰러지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엄청난 돈을  주고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회사를 이끌어갈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
    입니다.
      "고기를 꿰듯이 통솔하여 궁녀로서 총애하게 되면 마침내 허물
    을 면하고 만사가 순조롭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조금  좋은데가
    있으면 달라붙었다가, 조금 좋지 못하면 "나는 못하겠다." 하는 사
    람은 그만한 난관과 시련을 넘어갈 수  있는 저력이 없기 때문에
    세월은 자꾸 흘러 나이를 먹게되면 몸의 기력은 축 늘어져서 "산
    지박" 즉 박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념이 어떻든지간에
    회사가 직원의 4/6가 등을 돌리고 대들고 있다면 우리는 그  집을
    지키기 위해서 고기를 꿰듯이 한명씩 포섭해야 합니다. 하나를 이
    해시켜서 내편으로 만들고, 또 하나를 이해시켜서  내편으로 만들
    고…, 이렇게 해 나가게 되면 결국 만사가 순조롭게 될 것입니다.
     
        여섯번째 양효. 높은 나무에 카다란 좋은 과실 한 개
        가 따먹히지 않고 있다. 파괴와 혼란의  세상에서 혼
        자 남은 훌륭한 지도자는  인민의 추대를 받아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요, 소인들은 그 악덕이  세상에 용
        납되지 않아 스스로 그들의 원점으로  되돌아가 자기
        가 거주할 집을 잃어버릴 것이다.
     
      조금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 자기 몸사리는 것을 먼저하는 사람
    은 설사 자기가 얼마만큼 가졌다 하더라도 그만한 위기가 닥치면
    그 집을 다시 일으킬만한 저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소인배
    들이 집을 허물어트릴려고 하더라도  집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결국은 고기를 꿰듯이 소인배들을 꿰어 집을 지키게 됩니
    다.
      "높은 나무에 카다란 좋은 과실  한 개가 따먹히지 않고 있다.
    파괴와 혼란의 세상에서 혼자 남은 훌륭한 지도자는 인민의 추대
    를 받아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요, 소인들은 그 악덕이 세상에 용
    납되지 않아 스스로 그들의 원점으로 되돌아가 자기가 거주할 집
    을 잃어버릴 것이다." 물기고가 높이 뛰어봤자 되돌아가는게 물입
    니다. 소인배가 뛰어 봤자 결국 군자 밑에서 군자를  받드는 소인
    배일 뿐입니다. 따먹히지 않는  사람은 높은 지위를 얻을  것이며
    이제 다시 소인배들이 그를 숭상하게 됩니다.
      오늘날 알아주는 사람은 다 어려운  곡절이 있었던 사람들입니
    다. 그 어려움이 없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전하게 살려
    고 하는 사람만큼 안전하지 못하게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가슴속안에서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나오는 사람은 결국은 그와같은 리듬을 일으키는 사람,
    "못해 먹겠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오는  사람은 다
    리듬속안에서 리듬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
    국 다른 리듬한테 잡혀먹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가슴의
    핵심으로부터 생명의 힘이 뿜어져 나오는 사람은 그런 리듬을 꿰
    서 잠재울 망정 리듬에 엎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엎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이와같은 세계를 포용하고 있는 사람은
    나중에 남들로부터 높은 지위에 우러러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본이 이렇게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
    늘날의 일본이 있기 전에 사무라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
    라이에게는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무라이 정신은
    "죽음을 향해서, 죽음을 위해서, 죽음으로 걸어가는 길이 사무라이
    의 길이다."라는 정신입니다.
      사무라이는 최대의 명예를 죽음으로 알고 있었고, 항상  죽음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힘이 일본의 밑바닥에서부터  깔려있었기 때
    문에 오늘날 일본은 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2569
  • 천부경 해석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일시무시 일석삼극 무진본): 세상의 시작하나는 시작이 없는 시작한 하나이다.(하나는) 삼극으로 나누어지나 근본의 다함은 없다.*** 하나의 시작, 그 하나는 시작이 없는 시작이다. 즉 시작도 끝도 없는 것, 무극이 하나이다. 무극, 하나는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0(無)이기도 하고 태초의 1(極)이기도 하다. 있으되 무엇이라 명명할 수 없는 것 그래서 無이고 0이며, 이후의 모든 것에 父이고 母이기에 태초의 일자, 즉 태극인 것이다.무극은 절대 진리 그 자체이며 태극은 근본적인 마음의 알아차림이다. 그러나 무극과 태극은 둘이 아니며 하나이다.하나는 삼으로 쪼개지(삼태극)나 근본인 하나(무극)가 다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태극은 쪼개진 세개의 극인 천지인을 포함한다. 그렇게 삼태극이 되어도 무극의 근본은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다.***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형이상학적 세계이다) 천지인(=삼극)의 시작(삼극은)하늘 하나가 첫 번째(를 이루고),땅 하나가 두 번째(로 이루어지고),사람 하나가 세 번째(로 이루어진다).*** 삼극(태극)의 하나는 하늘이 되고 하나는 땅이 되며 나머지 하나는 사람이다. 이는 형이상학적이며 氣 너머의 세계인 것이다.우리의 감각 넘어의 세계이다. 즉 천지인(=삼극)은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세상의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것 형이상학적인 것이다.여기서의 천지인은 우리가 보는 하늘, 밟고 있는 땅, 나 자신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하늘은 一의 운동이고 펼쳐지는 기운이며 땅은 一의 멈춤이고 뭉치는 기운이며 사람은 一의 뜻이며 명령이고 생명이며 하고자함의 의지(意志)이다. 천지인은 선후를 나누어 태극에서 나와 자식처럼 보이지만 천지인이 곧 태극이고 무극인 것이다.***一積十鉅無櫃化三(일적십거 무궤화삼): 변화의 모습하나가 모여 십으로 커진다. 틀(=한계) 없이 삼(극)이 변화는 ...(이하의 내용은 삼극이 10으로 불어나는 과정의 설명이다)*** 여기의 一(하나)는 태극중의 일극, 천지인이며 태초의 1, 무극이 아니다. 따라서 천지인이 변화하여 십을 만들어가는 것이며, 십은 이 세상 전체 기운을 말하며 추후에 나올 완전수 10과 명확히 구분 되어야 한다. 이하의 내용은 삼극이 10으로 불어나는 과정의 설명이다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극의 분화 (無盡本과 연결되는 말)하늘이 음양(二三)되고.땅이 음양(二三)되고.사람이 음양(二三)이 된다.*** 삼극은 음양으로 나누어진다. 나누어진 삼극은 끊임 없이 운동하는데 그것이 음양으로 나누어지는 원동력이다. 여기에 2와 3을 음양이라 한 이유는 천지인 또한 각각이 1극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극에서 분화된 것이니 2과 3을 만드는 것이다. ( 단, 지금 이야기한 1극은 '시작의 1'과는 다른 것이다. 각각의 극을 1이라 한 것이다.) 삼극은 각각의 음양을 담고 있는 표현의 상징수로 2와 3을 사용한 것이다.***大氣合六 生七八九(대기합육 생칠팔구): 氣에서 形質(質의 세계)의 형성큰 기운 6(天:陰陽 地:陰陽 人:陰陽)이 모이서칠팔구(물질적인 7:사람, 8:땅, 9:하늘)를 만든다.*** 큰 기운 天陰, 天陽, 地陰, 地陽, 人陰, 人陽이 모여 6이 된다. 6은 가장 중요한 수이다. 이제 세상의 실질적인 사물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어머니와 같은 수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6은 7 8 9 를 낳는다. 여기서 7은 사람을 상징하고 8은 땅을 상징하며 9는 하늘을 상징한다. 이것은 우리가 실지로 보고 만지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으로 표현되는 의지이다. 이제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드디어 형이 하학의 세계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풀이하는 이유는 고대 신물에는 해당 숫자가 신물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칠지도, 팔방울, 청동거울이 9개의 표식, 九天이다. 천지 만물 중 사람이 제1인 것은 이와 같이 기의 세계 6에서 물질의 세계로 가장 먼저 7을 낳았기 때문이다. 7은 천지의 기운을 구현해 가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물론 8,9 역시 그러하다.******이미 이 과정에서 분열과 통합이 반복된다 無 즉 一이 3으로 분열하고 3은 6으로 분열하고 통합하며 다시 6은 789로 분열하고 다시 통합한다. 789는 人 地 天 인 동시에 命 精 性인 것이다. 極 1 2 3 (天 地 人)氣는 器 9 8 7 (性 命 精)을 만나 완전해진다.따라서 이 둘의 만남은 10 (1+9, 2+8, 3+7)이 되는 것이다. 하도와 낙서의 수리 체계가 10을 완전수로 만물이 이루어짐이 이것 때문이다.따라서 이 세상은 이미 완전하다는 뜻도 된다.또한 주역의 상괘와 하괘가 132과 879 인 것이다.******( 무, 시작의 1이 아버지의 역할을 하였다면 이제는 6인 어머니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 또한 6은 이런 연유로 오행에서 음수(陰水)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실제 명상이나 호흡을 하게 되면 온 세계가 물로 꽉 찬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는 6을 느끼는 것이다. ***運三四成環五十一妙衍(운삼사성 환오 십일묘연):시간 형성789 三의 움직임은 네 방향, 상태를 이루고 순환하는 5(행)이다.십은 일 태극의 오묘한 펼쳐짐이다. ** 789(인지천)를 이루고 이것들이 운행을 한다는 것은 기의 세계뿐만 아니라 이 세상 역시 음양이 나누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음양이 나누어짐은 생장소멸의 네 단계를 반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과 사가 있기에 이루어진다는 成을 쓸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삼라만상의 네가지 모습으로 운행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운행에 드디어 오(행)의 순환이 동시에 연결되는 것이다. 즉 생장소멸로 단절이 아닌 그 네 단계가 동시에 영원한 순환고리인 오행의 변화가 담겨 존재의 소멸도 소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행의 변화도 불변이 아닌 생멸이 변화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런 변화가 만물들을 완성하여 우리가 사는 코스모스가 완성되는 것이다. *** 이로써 천부경은 무극에서 6이 8상을 그리고 주역의 상괘와 하괘를 이야기하며 12지지와 10천간의 5행의 원리를 모두 이야기하는 해설서인 것이다.주역은 원자적 존재의 관점에서 관계를 설명고 있으며 5행은 그것 자체로 운동과 행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오행의 다양한 모습은 생멸 사이에 흐르는 변화의 과정이 하늘과 사람과 땅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에서는 별과 행성으로 사람에게는 차크라와 기와 혈로 땅에서는 수화목금토의 기운을 지닌 사물로 완성된다.다른 설명에서 성환오칠 十을 七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이는 잘못 옮겨 적는 과정의 실수로 사려 된다. 칠을 여러가지 기묘한 방법을 구사 하는 풀이는 수와 수사이에 논리의 비약이 있어 그 비약이 무엇인지 해석해야 하는데 1에서 10을 한줄 세워 세상을 이야기하려 하니 그런 답답한 늡에 빠져 생각의 흐름이 엉킨 것이다.천부경의 1~10의 숫자는 하나의 숫자로 다양한 표현을 하고 있고 앞 글자, 내용에 따라 뒤에 글의 해석을 달리해야만 하고 기본은 천부경이다. 하늘이 어떻게 펼쳐진 것인지, 천지 창조에 관해 증명하는 글이다. 그것을 놓치면 절대 안된다. ***萬往萬來 用變 不動本(만왕만래 용변 부동본): 인간의 모습무수하게 피어나고 사라지며쓰임은 변하나 근본(無)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혹은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은 변화하고 근원인 무극에서 와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끝없는 세계 속의 일원이지만 그 속에 변함 없음 즉 태극을 담고있고 그 태극이 변함없음을 천명한다.(만일 천지가 만왕만래한다고 생각해보면 끔찍할 것이다.) 다양한 생명뿐만아니라 무생물까지도 오고 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럼에도 근본이 변하지 않음을 이야기 한다.***本心本 太陽 昻明人中天地一(본심본태양 앙명인중천지일): 풍속과 사람의 완전성근본마음은 태양(太陽)에 바탕을 두는 것이니 밝음을 우러르는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을 하나된다.***태극의 마음, 무극은 거대한 양에 바탕을 두어 그 양이, 움직임이 이 세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 밝음을 우러러 보는 것이다. 하여 태극의 本이 곧 사람의 本이 되는 것이다. 사람 중에 천지가 하나 되었음으로 사람의 마음에도 큰 양이 바탕이라는 것이다. 즉 무극이 양이 아니였다면 만물이 세상이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여 태양의 마음을 바탕에 두어야 함은 마땅한 것이다. 허나 이미 모든 만물이 6에서 나왔고 6 역시 천지인 음양 모두가 모여 된 것이기에 먼지 하나에도 이미 태극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것은 없다. 즉 천지 만물이, 만물의 뜻이 인간과 다르지 않다. 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에서 배우라고 하였으며 자연 법칙을 도덕률, 경제률, 통치술, 관계, 도시계획, 음식등 사회, 문화, 생활 전반으로 확장하였고 그러한 자연과 같은 세상 즉 무극을 지상에 구현 하려 했던 것이다. ***一終 無終一 (일종 무종일): 세상과 근원과의 관계(만물 중) 하나는 죽거나 완성되나, (처음의) 하나, 태극은 완성할 수도 끝마칠 수도 없다.*** 천지가 하나 된 만물 각각은 그 끝이 있으나 시작의 하나 즉 태극는 영원하다. 즉 일시적인 것 속에 영원한 것이 있고 영원한 것 속에 일시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개체)하나는 끝이 있으나 (전체)하나는 끝이 없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01-28 조회 2550
  • 12. 천지부(天地否)
    『 천지의 배반 』
     
    ○     [천지부]를 이겨 나갈 수  있는 힘, 그것은 지극한
    ○     사랑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고집을 내세울 때는 [천
    ○     지부]의 현상이 일어나는 데, [천지부]는 결코 갈라
            서는 것이 아니고, 조화(調和)를 이루어낼 수 없는
    ●     자신의 문제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     조화(調和)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조
    ●     화를 외면할 수는 있지만, 이 세상이 이미 조화이기
            때문에 결코 조화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천지부(天地否)
     
        마주 의지하여 일어서는  사람 인(人)자의  형상처럼
        사람은 서로 도우며  사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부
        (否)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거부된 상태다. 사람들
        사이가 마음이 통하지 않고 막혀버린 것이다. 그러므
        로 군자가 바른 도리를 지켜 한결같이 가려하나 방해
        되어 잘 되지 않는다. 양은 위로 올라가고 음은 아래
        로 내려온다. 천지는 화합하지 아니하여 만물은 생육
        되지 못한다. 인간도 상하의 마음이 화합되지 아니하
        여 국가는 멸망한다. 내괘가 음이고  외괘가 양이다.
        이것은 내심이 유약하면서도 외면은 강한  것처럼 꾸
        미는 것이다. 핵심에는 소인이 버티고 군자는 변두리
        로 밀려난다. 소인의 도가 횡행하고 군자의  도는 소
        멸한다.
              
            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象曰,
            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則是天
            地下交而萬物不通也. 上下不交, 而天下无
            邦也. 內陰而外陽, 內柔而外剛, 內小人而
            外君子, 小人道長, 君子道消也.
      "내괘가 음이고 외괘가 양이다. 이것은 내심이 유약하면서도 외
    면은 강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천지부]는 [지천태]와는 반대
    로 외괘는 모두 양효로 이루어져 있고, 내괘는  모두 음효로 이루
    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내면은 유약한데 겉으로는 강한 것을 나타
    냅니다. 안으로는 강한 것이 있으면서 유한 것이 바깥으로 있어야
    지 바깥의 것을 끌어 당겨 오는 데, 안에서 자기  자신이 유한 상
    태로 스스로 움직이게 되면 도리어 겉으로 강해져서 밖으로 강한
    기운을 내보내게 되고, 저쪽도 역시 강한 에너지를 반발적으로 내
    보내서 서로가 밀어내는 형상을 일으키게 됩니다.
      안에 음에너지가 작용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자신이 빠져 있
    는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번민속에 빠져  있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게 됩니다. '부(否)'는 헤어지다, 갈라지다, 섞
    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늘과 땅이  갈라져 있는 상태란
    뜻입니다.
      [지천태]에서는 세 개의 양효가  밑에 있었고 위에  음효가 세
    개 있어서 양효가 일을 벌려 놓으면은 그것을 음효가 거둬들였습
    니다. 그런데 이 괘는 지금 위로는 양효가 작용하고  있지만 밑으
    로 음효가 자릴 잡아,  그런 상태로 움직이면 융합되지  아니하여
    형통하지 못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하는 걱정,  자신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고민,
    그런 따위가 전부다 [천지부] 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사귀면 처음
    에는 굉장히 친해지게  됩니다. 맨 처음에  친해질 수 있는  것은
    "나는 그와같은 사람이 좋다."라는 것을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친화하는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안있
    어 두 사람과의 관계가 [천지부]와 같은  상태가 되면 서로 멀어
    지게 됩니다.
      그런데 멀어진다는 것에 대해 자기가 자기 마음 속안에 빠져들
    게 되면 세상을 수용할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을 수용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의 사랑은 애정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진정
    한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자가  내 생일날
    도 기억해 주지 못한다고 "날 사랑하는게 아니야." 하고  자기 세
    계에 빠져버리면 그로 인해  그 사람은 [천지부]와  같은 상태가
    되어 상대방을 밀어내 버리는 현상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람은 이상한 동물이어서 살 수 없는 데를 억지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베레스트 산. 그곳은 사람 살 곳
    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사람은 꼭 거기를 올라가려고 합니다. 물론
    인간이 어려운 점을 극복하고 해냈다라는  의미에서 세상은 칭송
    을 하는 것이지만, 에베레스트 산은 대들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면
    찾아오지 않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에 찾아온 사람은 살기 좋아 간
    것이 아니고 대들려고 간 것입니다. 대들려고 갖다가 중간에 얼어
    죽거나, 눈에 파묻혀 죽거나 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에베레스트가 아니고 그저  동네에 나지막히  있는 뒷동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갑니다.  갑돌이나 갑순이도 만날데가  없으면
    거기서 만나고, 아이들이 언덕에 가서 술래잡기도 하고, 제기차기
    도 하고, 축구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언덕을 정복했다는 느낌
    을 전혀 갖지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언덕에 올랐더라도
    언덕이 좋아서 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갔다는 것입니다. 단지 언덕
    이 좋다라는 걸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진짜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은, 진짜 이 세상을 두루 살
    펴서 완전히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언덕도 아닌 맨땅과 같은 사
    람들입니다. 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높은 경지입니다. 남을  수용한다는 것은 안에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약하기때문에 자꾸  남과 타협하
    려고 하고, 남과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강
    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과 타협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남과 절충하는 것은 타협한다고  말하지 않고 수용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니꼬운 것도 다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여
    서 좋게 화합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천지부]의 상태가 되어  일이 막히고 주변과
    격리되어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수용
    하는 자세로 꾸준히 해야할  일을 해나가면 제  3의 힘에 의하여
    형통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항상 경쾌하게
    돌아가서 막힌 상태로 오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주 의지하여 일어서는 사람 인(人)자의 형상처럼 사람은 서
    로 도우며 사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부(否)는  이러한 인간의 본
    성이 거부된 상태다." 사람 인(人)자는 두  사람이 마주 의지하며
    일어서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즉 사람은 서로 도우며  사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화합하는 가운데에 우
    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천지부]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거부된 상태입니다.  서로가
    마음이 통하지 않고 막혀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자가 바른 도
    리로 지켜 나가려 하나 방해되어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심으
    로는 유약하면서 외면은 강한 것처럼 꾸미는 것으로, 핵심에는 소
    인이 버티고 군자는 변두리로 밀려난 상태입니다.
      왜 인간의 본성이 깨뜨려 지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의 옳은 것
    만을 고집하여 남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옳다고
    인정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처음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인들
    이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퇴폐라고 우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니스커트가 상식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부는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을 철칙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로 주위에는  이혼하는 부부
    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헤어진 부부들은 각자가 헤어지지 않
    으면 안되는 타당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고, "이것이 옳다"라고 스스로 규정짖고, 그
    규정을 통해서 세상을 조명해 보려는 마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
    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믿음에 스스로가 구속되어서 겉으로만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
    고 그렇게 겉으로 강해진 것은 세상과 유리되어  지며, 결국 세상
    이 그것을 멸망시켜 버리고 맙니다.
      "양은 위로 올라가고 음은  아래로 내려온다. 천지는  화합하지
    아니하여 만물은 생육되지 못한다. 인간도 상하의  마음이 화합되
    지 아니하여 국가는 멸망한다."  [천지부]는 하늘이 하늘에 있고,
    땅이 땅에 있으므로 우리가 생각하기에 바른 것인데, 그러나 이것
    을 옳다고 고집해 버리면  결국 세상은 화합하지  않고 분리되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즉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밑에  있으니까 맞
    는 얘기다 하고 주장하면 세상으로부터 거부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어떻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그 강한 것은  안으로 약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눈에 힘을 주고 어금니를 물고 있는  사람은 의지가 강한 사람
    같지만, 안이 풍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풍성하지  못한 사람이
    자기 안에 빠지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  사이는 마음
    이 서로 통하지 않고 막혀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음에너지 속안
    에 자기가 빠져있기 때문에 겉으로 강해지고, 그러므로 외부와 단
    절되어 흐르는 흐름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만물을 수
    용하고 용서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흐르는 흐름속에서 움직이게 되면 [천지부]라는 현상은 일어나
    지 않습니다. 흐름 속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충만된 에너지가 있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수
    용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이미 충만된 상태에 있지 않는 사
    람은 [천지부]의 현상을 일으킬  뿐 이 세상과  화합이라는 것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지부]는 "자기 생각에  치우치지
    말고, 자기로 인해서 판단하지 말고,  흐르는 흐름을 잘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합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
    니다.
      회사의 흐름을 아는 사장은 흐름이 막히면 자기 이익이 손해가
    나고, 그 손해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도 손해가  난다는 사실을 알
    고 있습니다. 그러나 흐름을 알지 못하고 부분적인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는 노동자 및 근로자들은 자신의 태업이 전체의 손해를 일
    으키고 결국 그것은 자기  손해가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득만
    바라보다가 스스로 손해를 입고, 그 손해가 점차적으로 또 손해를
    미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현상도 지킬 수 없습니다. 진정으
    로 자기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은 손해를 아는 사람입니다.
      
        대상. 천지가 서로  배반하는 것이 부(否)의  괘상이
        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자신의  유덕함을 숨기고
        물러나와 난을 피한다. 관록을 영화로 생각하여 뜻이
        동요되어서는 안된다.
     
            象曰, 天地不交否. 君子以儉德避難. 不可
            榮以祿.
     
      동의보감에 보면, 스스로 건강을 지키려면 100%로 채우지 말고
    80%에서 멈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때 100
    숟가락을 먹으면 꽉찰 경우, 80 숟가락 정도  먹고 멈추어야 합니
    다. 그래야만 위장이  원활히 움직여서 소화를  시키는데, 꽉차게
    먹으면 위장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위장은  망가져 버
    리게 됩니다.
      "자신의 유덕함을 숨기고 물러나와 난을 피한다."  무슨 일이든
    지 100%를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80%만 바라보고 나머지 20%
    는 뜸들이는 기간으로 놔두어야 합니다. 20%의 여유를 두었을 때,
    바로 자신이 섭취한 것을 영양으로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한
    번에 완전하게 하지 말고, 80%만 이루고 20%는 완전에 다가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괘는 자기 자신이  지금 최고의
    영화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20%의 간격을 갖고 물러서야 할 때 물
    러서서 채우지 않아야만 비로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말
    하였습니다.
      "관록을 영화로 생각하여 뜻이 동요되어서는 안된다." [천지부]
    는 상괘와 하괘가 모두 정응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잘만 처신하면
    좋게 풀려나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치 자석이
    같은 극끼기 서로 밀어내고 있듯이 비록  서로가 자기 고집을 세
    워서 팽팽히 대립하고 있지만, 자석은 다시 합칠  수도 있는 것처
    럼, 나중에 서로 양보하면 곧 화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의 욕심으로 영화를 생각해서 뜻이 동요되어서는 안된다. 물러
    설 때는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자기 고민에 빠졌을 때는  빨리
    자기로부터 물러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건져낼 수 있다."
    따라서 군자는 20% 뒤로 물러서서 자기 목전의 이익을 바라지 말
    고 자기의 상태를 지켜볼 줄 알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첫번째 음효. 띠풀 한포기를 뽑으면 뿌리가  한데 얽
        힌 여러포기가 한꺼번에 뽑힌다.  여러동지들과 함께
        하는 상징이다. 일관된 마음으로  임금에게 충성하면
        길하다. 발전하고 번영하리라.
      
            初六, 拔茅茹. 以其彙.  貞吉亨. 象曰, 拔
            茅, 貞吉, 志在君也
           
      "띠풀 한포기를 뽑으면 뿌리가 한데 얽힌 여러포기가 한꺼번에
    뽑힌다." 첫번째 음효입니다. 이 음효는 우선 세상에 확고한 자기
    주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위로
    양효의 것을 받아들여 일관된 마음으로 뜻을 위해 충성하면 주변
    의 이음(二陰), 삼음(三陰) 등  동지들이 함께하여 길하지만,  이
    세상과 유리되어져 있는 상태에서 주관도 없는 음효가 멋대로 행
    동하면 남은 두 세계도 동시에 뽑혀 나간다는 뜻입니다.
      "일관된 마음으로 임금에게 충성하면 길하다." 자기가 기분나쁘
    다고 이곳 저곳 화를 내고 다니면 이쪽 저쪽 모두가 피해를 입습
    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화난다고  핸들을 확 꺽으면, 자
    기 차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쪽 저쪽의 모든 차가 다 망가지
    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양의 자리에 있어 함부로  행동하고
    싶은 충동이 있으나, 음효의 덕으로 자신을 양보하면서 주변을 받
    아들이고 화합하려 하면 길하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음효. 임금의 말이면 덮어놓고 순종하니 소인
        들은 임금을 숭상하여 길하다. 그러나 군자는 신념을
        굽혀서까지 타협하지 않는다.
      
            六二, 包承. 小人吉.  大人否亨. 象曰, 大
            人否亨, 不亂群也.
           
      "임금의 말이면 덮어놓고 순종하니  소인들은 임금을 숭상하여
    길하다." 두번째 음효는 마땅히 음의 자리에 음효가 위치하고, 대
    응하는 다섯번째 양효와 정응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
    변으로는 자기 세계가 분명하지 않은 소인들이 군주를 따르는 형
    상입니다. 비록 소인들이 군주를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렇다
    고 그들을 믿지는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신념을  굽혀서까지 타협하지 않는다."  군자가
    소인과 다른 점은 갖은 압박과 핍박이  온다 하더라도 자기 심정
    에 빠져 할 일을 하지 않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신하는 세계가 투철하고 명료하게 내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소
    인은 자기한테 빠지지만 군자는 자기한테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소인과 군자의 차이인데, 그게  굉장히 큰 차이입니다. 그
    래서 군자는 이러한 소인의 무리속에서  신념을 굽혀서까지 타협
    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번째 음효. 재덕을 갖추지 못한 자가  분수에 지나치는
      부귀에 눈이 어두워 부끄러움도 모른다.
     
            六三, 包羞. 象曰, 包羞, 位不當也.
           
      "재덕을 갖추지 못한 자가 분수에  지나치는 부귀에 눈이 어두
    워 부끄러움도 모른다." 세번째  음효입니다. 양효가 와야할 자리
    에 음효가 있습니다. 음의 상태에서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진정
    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마음 상태에 스스로 빠져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도취되어 사랑하는  그 사랑은 어느  순간에 서로
    밀어낼 수도 있습니다. 흔히 부부싸움을 하는 것은 바로 자기한테
    사로잡혀서 거부가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천지부]를 이겨 나갈 수 있는  힘, 그것은 지극한 사랑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고집을 내세울 때는  [천지부]의 현상이 일어나는
    데, [천지부]는 결코 갈라서는 것이 아니고, 조화(調和)를 이루어
    낼 수 없는 자신의 문제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조
    화(調和)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조화를 외면할  수는
    있지만, 이 세상이 이미 조화이기 때문에 결코  조화를 벗어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고집을 내세우는 나 자신, 그것을 자연은 나름대로 조화시켜 버
    립니다. 중요한 사실은 스스로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을 때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세상의 이치는 단순하기 때문입
    니다. 단지 단순하게 처리할 수 없는 사람이 복잡한  자기 세계에
    빠져 복잡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네번째 양효. 위에 훌륭한 군주가 있어서  명령을 내
        리니 오직 왕명에 쫓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막힌 것
        을 타파하려는 뜻이 이루어진다. 동지와 같이 지극한
        복을 받는다.
     
            九四, 有命无咎. □離祉. 象曰, 有命无咎,
            志行也.
           
      [천지부]는 일단 음양이 전부 정응관계에 있기때문에, 비록  지
    금 내외가 뒤바뀌어 형통치 못하고 있지만, 막힌 상태를 타개하려
    는 분명한 뜻을 가지면 능히 뚫고 나아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
    습니다. "위에 훌륭한 군주가 있어서 명령을  내리니 오직 왕명에
    쫓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오양(五陽)이 정당한 위치를 지키고 있
    으므로 네번째 효는 다섯번째  양효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비록
    자기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고 싶으나, 이를 숙이고  그 뜻을 쫓아
    야 합니다. 다섯번째는 의당히  양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양효가
    존재하고 있고, 또 모든 것이 대응관계로 있기  때문에 자기가 따
    르면 그 밑에 있는 것들이 함께  따라준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동
    지와 같이 지극한 복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왕명'은 절대적인
    명령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지 말고 그 뜻을
    쫓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뜻을 따라 형통되려고 하는 무리들과 함
    께 복을 누린다라는 뜻입니다.
      근심걱정, 혹은 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해야할 일을 꾸
    준히 하다보면 근심걱정과 하기  싫어 하는 것이 없어지고,  하는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조건 반사가 아닌
    제 3의 힘입니다. 그 힘이 근심걱정을 흡수해 버립니다. 근심걱정
    이 있는 사람이 신나게 춤을 추면  그것을 잊어버린다고 흔히 말
    하고 있습니다. 또 친구지간에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
    전환하러 가자고 하여 여행이라도 하면 근심걱정이 풀립니다.
      왜 근심걱정이 풀리는가? 움직이는 힘에 의하다 보면 근심걱정
    에너지가 그리로 흡수됩니다.  우리는 표현상 잊어버렸다고  하는
    데, 이것은 근심걱정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힘에 흡수
    되어져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풀릴 근심걱
    정이라면 실은 근심걱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만  자기 걱정일
    뿐이었습니다.
      사람이 근심걱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뛸  힘이 안생기는 법입니
    다. 그러나 뛸 힘만 있으면  근심걱정은 없어지게 됩니다. 양성에
    너지가 강하면 음성은 그곳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남자가 강하면
    여자는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부(否)]의 상태로 가느냐, 아니
    면 [부(否)]의 상태를 타개하느냐에  따라서 음성에너지는 그 쪽
    을 따라갑니다. 그래야만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은 그렇게 창
    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뜻으로 분명하게 하는 것은 모든 근심걱
    정을 흡수해 버립니다. 그것이  가장 최선의 해결책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옛날에 예수도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지내
    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했습니다. 그때 따라갔으면 죽은
    아버지에 대한 근심은 없어지게 됩니다. 아버지  근심을 벗어나게
    되면 이미 죽은 자에  대한 자기 근심은  쓸데없는 근심이었다는
    것을 본인이 느끼게 됩니다.
      
        다섯번째 양효. 막힌 상태가 그친다.  재덕을 구비한
        훌륭한 군자가 왕위에 있으니 길하다. 멸망하지 않을
        까 하는 조심하는 마음으로 튼튼한  뽕나무의 뿌리에
        매어두듯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라
      
            九五, 休否. 大人吉.  其亡, 繫于苞桑. 象
            曰, 大人之吉, 位正當也.
           
      "막힌 상태가 그친다."  근심걱정은 움직이면 움직이는  힘속에
    흡수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무턱대고 해버리면
    일단 하나는 해결되지만 해결된 상태가 도리어 막혀버릴 수 있습
    니다. 사소한 것 하나  떨쳐버리고 갑자기 즐거워하다가 보면  또
    다시 자기한테 빠져버리게 됩니다. 근심걱정이 있을때는  춤을 춰
    라고 하니까 한 달 내내 디스코장 가서  춤을 추면 그것이 또 근
    심걱정입니다. 아직까지 형통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이 한 번 움직
    여서 형통했다고 해서 계속  그 상태를 밀고나가면  오히려 해가
    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살펴가면서 해나가야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뜻밖의 화를 초래하는 수
    도 있습니다.
      "재덕을 구비한 훌륭한 군자가 왕위에 있으니 길하다." 재덕(才
    德)은 "재치있는 덕"입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수없는 속임수, 임
    기응변, 이 모든 것이 재덕입니다. 이 재덕을 구비한 군주가 항상
    염려하는 마음을 갖고 움직이면  뜻밖의 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므로 길하다는 것입니다. 근심걱정은 움직이면 움직이는 힘속
    에 말려 들어간다는 것이 재덕입니다.
      "멸망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하는 마음으로 튼튼한 뽕나무의 뿌
    리에 매어두듯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라." 잘  될 것이다라고 생각
    하는 것이 혹시나 잘 안될  수도 있습니다. 잘 하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뜻밖에 화를 초래하는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학생을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때렸는데  학생은 그러한 선생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선생님에게 대들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항상 살펴
    야 합니다. 즐거울 때 즐거운 자기 마음을 붙들어  매고 "혹시 잘
    못되지는 않을까?" 항상 염려하는  마음으로 움직이게 되면 길하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없이 번창하는 뽕나무  잎파리같이 많은
    장애가 온다 할지라도 뿌리가 튼튼하기 때문에 결코 멸망하지 않
    는다라는 뜻입니다.
     
        여섯번째 양효. 막혀서  잘뚫린 상태가 무너지고  있
        다. 어찌 오래갈 것인가. 처음은 막혀있는 듯하나 다
        시 뒤에는 기쁨이 있다.
      
            上九, 傾否.  先否後喜.  象曰, 否終則傾,
            何可長也.
           
      "막혀서 잘뚫린 상태가 무너지고 있다. 어찌 오래갈 것인가. 처
    음은 막혀있는 듯하나 다시 뒤에는 기쁨이  있다." 아무리 재덕을
    겸비하였다 하더라도 끝내가서는  재덕을 겸비한  군주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막힐 것이나 그 형통할 수  있었던 능력은
    계속 남아서 형통하게 할 것입니다. 옛날 석가나 예수 그리스도는
    형통했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습니다. 석가도 죽었
    습니다. 그러나 "죽었다"라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객체는  무너
    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기강과 석가의 제 3의 힘은 지금도 흐르
    고 있습니다. 즉 죽은 뒤에도 계속 형통하고 있습니다.
      [천지부]는 개인으로서 개인 상태에 머무르게  되면 일체가 막
    혀버리지만, 그러나 이 우주는 결코 막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
    무리 막혀있다고 하더라도  우주는 인정사정 없이  쓸어버립니다.
    쓸어가는 우주의 강한 에너지의 상태로 살게되면  형통하게 되고,
    끝내가서 몸은 낡아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렇게 뚫린 그 기운은
    바로 우주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영원히  형통할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세상일은 맨 처음부터 덮어 놓고 되지는 않습니다. 한 번  어려
    운 고비가 오고 이제 절망의  벼랑에 섰을 때, 그때  개의치 않고
    뚫고 나가는 저력이 있다면 바로 그 일은 형통할 수 있다고 천지
    부는 이야기합니다. "머무르지 말아라.  머무른 상태에서 너를 잃
    어버리지 말아라. 계속해라. 계속해서  뚫고 나가라. 나가다  보면
    막혔다고 생각했던 모든 부분들은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우주는
    그렇게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각가 로뎅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수심이 없습
    니다. 수심에 쌓여 있는 로뎅은  가치가 없습니다. 모나리자의 미
    소. 그것은 모든 아픔을 뚫고 넓게 퍼져나간 형통한  모습이 담겨
    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 명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지
    부]의 괘를 통해 막힌 상태의 [부]를 형통하게 하여 항상 충만된
    상태를 영원한 화합을 이루어내는 지혜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유성..…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2537
  • 25. 무위자연(無爲自然)- 천뢰무망(天雷无妄)
    25. 무위자연(無爲自然)- 천뢰무망(天雷无妄)…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2-07 조회 2459
  • 천부경 종류
     현재까지 알려진 천부경은 다음과 같이 5종이 있습니다.① 묘향산 석벽본: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가 발견② 태백일사본(太白逸史本): 이맥의 <태백일사>에 실려 있음③ 최고운(崔孤雲:최치원) 사적본(事蹟本): 최문창(崔文昌)전집에 나옴④ 노사전(蘆沙傳) 전비문본(篆碑文本): 蘆沙 奇正鎭⑤ 농은본(農隱本)   이중 ①과 ②는 완전히 일치해요. 농은본과 각본과의 차이 부분을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아요..    농은본태백일사본묘향산 석벽본최고운 사적본노사전전비문본新三極析三極碩三極析三極鉅無?鉅無?鉅無愧鉅無?從三化三化三化三大氣合大三合大三合大三合衷三四運三四運三四運三四成玄五十成環五七成環五七成環五七一妙衍一妙衍一杳演一妙衍昻明昻明仰明昻明天地一天地一天中一天中一   농은본은 태백일사본과 여섯 글자가 다르고, 최고운 사적본과는 11자가 다르고 특히 ‘成玄五十’과 ‘成環五七’의 차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작성자최고관리자 시간 10-27 조회 2451
  • 자본론12
    1836년에 시니어가 발견한 '최후의 한 시간'이라는 구호를 1848년 4월 15일의 런던 ?이코노미스트?에서 고급경제관료의 한 사람인 제임스 월슨[1843년 이 잡지를 창간했다]이 '10시간 노동법안'을 반대하기 위해 또 한 번 외쳤다.



    제 4 절 잉여생산물



    생산물 중 잉여가치를 대표하는 부분(앞의 예에서는 20파운드의 면사의 1/10, 즉 2파운드의 면사)을 우리는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이라고 한다. 잉여가치율이 자본총액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가변적 부분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에 의해 규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잉여생산물의 상대적 크기도 총생산물 중 잉여생산물을 뺀 나머지 부분{즉,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잉여생산물의 비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총생산물 중 필요노동을 표시하는 부분에 대한 잉여생산물의 비율에 의해 규정된다. 잉여가치의 생산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주된 목적이므로, 주어진 부의 크기는 생산물의 절대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잉여생산물의 상대적 크기에 의해 측정되어야만 한다.(주석 13: "20,000파운드의 자본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이윤이 연간 2,000파운드인 개인에게는, 그의 자본이 1백 명를 고용하건 1천 명을 고용하건, 또는 생산된 상품이 10,000파운드로 팔리건 20,000파운드로 팔리건, 모든 경우에 그의 이윤이 2,000파운드 이하로 감소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국가의 실질적 이익도 비슷하지 않은가? 그 순실질소득(純實質所得), 즉 그 지대와 이윤이 동일하다면, 그 국민이 1천만 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든 1천 2백만 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리카도, ?원리“, 한글판, 429쪽). 리카도보다 훨씬 이전에 [잉여생산물에 대한 광신자이고 잡담식의 무비판적 저술가이며, 의 명성이 공적에 반비례하고 있던] 아더 영(Arther Young)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주 전체가 고대 로마식으로 독립적 소농민들에 의해 분할되어 있다면, 아무리 잘 경작되더라 도, 단순히 인간을 번식시키는 목적[이 목적은 자체로서는 전혀 쓸모없다] 이외에는 근대적 왕국에 무슨 소용이 없겠는가?"(영, ?정치산술?,런던, 1774년, p. 47) 기묘하게도 "순부(純富: net wealth)는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하다고 설명하려는....강력한 경향이 있다....그러나 분명히 것은 순부 때문은 아니다"(홉킨즈(Thomas Hopkins), ?지대(地代)....에 대해?, 런던, 1828년, p. 126).)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합계[즉,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의 가치를 대체하는 시간과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시간의 합계가 노동자의 노동시간의 절대적인 크기, 즉 노동일(勞動日)을 이루고 있다.



    제 10 장
    노동일


    제 1 절 노동일의 한계


    우리는 노동력이 그 가치대로 매매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했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만약 노동자가 매일 평균적으로 소비하는 생활수단의 생산에 6시간이 필요하다면, 그가 자신의 노동력을 매일 생산하기 위해서는, 또는 그것을 판매해서 받은 가{임금}를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6시간씩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우 그의 노동일의 필요{노동}부분은 6시간으로 될 것이고, 따라서 기타 조건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주어진 양(量)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노동일(勞動日) 그 자체의 길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는다.
    이제 선분(線分) A-B는 이를테면 ?시간에 해당하는 필요노동시간(必要勞動時間)의 길이를 표시한다고 가정하자. 노동이 AB를 넘어 1시간, 3시간, 또는 6시간 등으로 연장됨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개의 서로 다른 선분을 얻게 된다.

    노동일 I . A-----B--C
    노동일 II . A-----B----C
    노동일 III. A-----B------C

    이 세 개의 선분은 각각 7시간, 9시간, 12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세개의 서로 다른 노동일을 표시하고 있다. 연장선 BC는 잉여노동(剩餘勞動)의 길이를 표시한다. 1노등일=AB+BC, 즉 AC이므로 1노동일은 가변량 BC와 함께 변화한다. AB는 주어져 있기 때문에 AB에 대한 BC의 비율은 항상 측정할 수 있다. BC는 노동일 I 에서는 AB의 16이고, 노동일 II에서는 3/6이고, 노동일 III에서는 6/6이다. 또 더 나아가 필요노동시간에 대한 잉여노동시간의 비율은 잉여가치율(剩餘價値率)을 규정하는 것이므로, 잉여가치율은 AB 대한 BC의 비율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 그것은 위의 세 개의 서로 다른 노동일에서 각각 16 2/3%, 50%, 100%다. 다른 한편, 잉여가치율만으로는 노동일의 길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가령 그것이 100라고 하더라도 노동일은 8시간, 10시간, 12시간 등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100%의 잉여가치율은 노동일의 두 개의 구성부분[즉,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크기가 같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 부분들 각각의 크기가 얼마인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이처럼 노동일은 불변량이 아니라 가변량(可變量)이다. 노동일의 두 부분 중 하나가 노동자 자신의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일의 전체 길이는 잉여노동의 길이[또는 계속시간]에 따라 변동한다. 그러므로 노동일은 결정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불확정적(不確定的)이다.(주석 1: "하루의 노동이라는 말은 애매해서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산업 및 상업에 관한 연구....조세에 관한 고찰을 포함해“, 런던, 1770년, p. 73).)
    이와 같이 노동일은 고정적이 아니고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오직 일정한 한도 안에서만 변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최소한도는 규정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연장선 BC 즉 잉여노동을 0이라고
    가정한다면, 하나의 최소한도[즉, 하루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필요노동은 항상 노동일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노동일은 결코 이와 같은 최소한도까지 단축될 수는
    없다. 다른 한편, 노동일에는 최대한도가 있다. 노동일은 일정한 한계 이상으로 연장될 수 없다. 이 최대한도는 두 가지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첫째, 노동력의 육체적 한계에 의해 규정된다. 인간은 24시간이라는 1자연일(自然日) 동안에는 일정한 양의 생명력밖에는 지출할 수 없다. 말도 날마다 일하는 경우 하루 8시간밖에 일할 수 없다. 인간은 하루 중 일정한 시간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일정한 시간 그 밖의 육체적 욕망(식사를 하거나 세수와 목욕을 하거나 의복을 입는 등)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일의 연장은 이와 같은 순전히 육체적(肉體的)인 한계 이외에 또한 정신적(精神的) 한계에 부딪힌다. 노동자는 지적.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이들 욕망의 크기나 종류는 일반적인 문화수준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므로 노동일의 길이는 육체적 및 사회적 한계 안에서 변동한다. 그러나 이 두 한계는 모두 매우 탄력적이어서 그 변동의 폭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우리는 8시간, 10시간, 12시간, 14시간, 16시간, 18시간 등 그 길이가 매우 다양한 노동일을 볼 수 있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그 하루의 가치로 구매했다. 1노동일 동안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자본가에게 속한다. 즉, 자본가는 하루 동안 자기를 위해 노동자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런데 1노동일이란 무엇인가?(주석 2: 이 질문은 로버트 필(Robert Peel)이 버밍엄 상업회의소에 제출한 유명한 질문 즉 "1 파운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필은 버밍엄의 “소실링론자”(little shilling men){정부의 채무를 금화의 금 함유량을 적게 해 청산하자고 주장한 사람}와 마찬가지로 화폐의 성질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을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 자연의 하루보다는 짧다. 얼마나 짧은가? 자본가는 이 극한[즉, 노동일의 필연적인 한계]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자본가는 오직 인격화된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혼은 자본의 혼이다. 그런데 자본에게는 단 하나의 충동이 있을 따름이다. 즉, 자신을 가치증식시키며, 잉여가치를 창조하며, 자기의 불변부분인 생산수단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잉여노동을 흡수하게 하려는 충동이 그것이다.(주석 3: "자본가의 목적은 자본을 지출하여 될 수 있는 한 많은 양의 노동을 손에 넣는 것이다"(쿠르셀-스니유[J. G. Courcelle-Seneuil], ?산업기업의 이론과 실제?, 제2판, 파리, 1857년, p. 63).) 자본은 죽은 노동{주어진 일정한 가치}인데, 이 죽은 노동은 흡혈귀(vampire)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활기를 떤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주석 4: "하루에 1시간의 노동을 잃어버리는 것은 상업국으로서는 막대한 손실이다....이 나라의 노동자들은 너무 많은 사치품을 소비한다. 특히 공업노동자들이 그러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시간까지도 소비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소비다"(?산업 및 상업에 관한 연구?, 런던, 1770년, pp. 47, 153).)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는 자본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된다.(주석 5: "만약 자유로운 노동자가 일순간이라도 휴식을 취하면, 초조한 눈으로 그를 감시하고 있는 야비한 경영자는 그가 자기의 것을 훔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랑게[N. Linguet], ?민법이론?, 런던, 1767년, 제2권, p. 466).)
    자본가는 상품교환의 법칙을 들고 나온다. 그는 다른 모든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상품의 사용가치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이익을 짜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때까지 생산과정의 질풍노도와 같은 소리에 눌려 들리지 않던] 노동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온다.

    "내가 당신에게 판매한 상품은 [그것을 사용하면 가치가, 그것도 그 자체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창조된다는 점에서] 다른 잡다한 상품들과는 다르다. 당신이 그것을 구매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당신에게는 자본의 가치증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나에게는 노동력의 초과지출로 된다. 당신과 나는 시장에서 단 하나의 법칙, 즉 상품교환(商品交換)의 법칙밖에 모른다. 그리고 상품의 소비는 상품을 양도하는 판매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들이는 구매자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나의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은 당신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매일 그것을 팔아 얻은 돈으로 매일 그것을 재생산하고, 따라서 반복해서 그것을 팔 수 있어야 한다. 연령 등에 기인하는 자연적 건강약화는 별도로 치고, 나는 내일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상태의 힘과 건강과 원기를 가지고 노동할 수 있어야만 한다.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절약’과 '절제'의 복음을 설교하고 있다. 매우 좋은 이야기다! 나는 분별있고 근검절약하는 세대주처럼 나의 유일한 재산인 노동력을 아껴 쓰고, 그것을 어리석게 낭비하는 일은 일체 삼가려고 한다. 나는 노동력의 정상적인 유지와 건전한 발달에 적합한 정도로만 매일 그것을 지출하고 운동시키고 노동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당신은 노동일을 무제한 연장함으로써 내가 사흘 걸려 회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노동력을 하루동안 써버릴 수도 있다. 그리하여 당신이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보는 것만큼 나는 노동실체를 잃어버린다. 나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과 그것을 강탈하는 것은 전혀 상이하다. 만약 평균적인 노동자가 합리적인 양의 노동을 하면서 살 수 있는 평균기간이 30년이라면, 당신이 매일 나에게 지불해야 하는 나의 노동력의 가치는 총가치의 1/(365 x 30), 즉 1/10,950 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나의 노동력 전체를 10년 동안에 소비해 버리려고 하면서도 매일 나에게 그 총가치의 1/3,650 이 아니라 1/10,950을 지불한다면, 당신은 오직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의 1/3 만을 지불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당신은 매일 나로부터 나의 상품의 가치의 2/3을 훔치는 것이다. 당신은 3일분의 노동력을 사용하면서도 나에게는 1일분의 대가를 지불하는 셈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계약에도 위반되며 또 상품교환의 법칙에도 위반된다. 그러므로 나는 정상적인 길이의 노동일을 요구한다. 더욱이 나는 당신의 동정에 호소함이 없이 그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상거래에서는 인정(人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범적인 시민일지도 모르며, 동물학대 방지협회의 회원일지도 모르며, 거기다가 성인(聖人)이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의 관계에서 대표하고 있는 그것{자본}은 가슴속에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기에서 고동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의 심장의 고동일 뿐이다. 나는 표준노동일(標準勞動日)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나의 상품의 가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석 6: 노동일을 9시간으로 단축할 것을 요구한 1859-60년의 런던의 건축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시에, 그 파업위원회는 하나의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것은 본문에서 말한 우리 노동자의 항변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성명서는, 건축업자들 중에서도 가장 탐욕적인 피토(M. Peto)라는 사람이 ‘성인(聖人)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사실을 풍자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바로 이 피토도 1807년 이후에 슈트라우스버크[Strousberg]와 더불어 몰락해 버렸다).)

    요컨대, 약간의 매우 탄력적인 제한을 가하는 것을 별도로 친다면, 상품교환 그 자체의 성질은 노동일 그리고 잉여노동에 어떤 한계도 부과하지 않는다. 자본가가 노동일을 될수록 연장해 가능하다면 1노동일을 2노동일로 만들려고 할 때, 그는 구매자로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판매된 이 상품의 특수한 성질은 구매자에 의한 이 상품의 소비(消費)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노동일을 일정한 표준적인 길이로 제한하려고 할 때 그는 판매자로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권리 대 권리라는 하나의 이율배반(二律背反: antinomy)이 일어나고 있다. 즉, 쌍방이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섰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제 2 절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 공장주와 보야르



    자본이 잉여노동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사회의 일부의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노동자는 [그가 자유로운 노동자이건 자유롭지 못한 노동자이건]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다 여분의 노동시간을 첨가해 생산수단의 소유자를 위한 생활수단을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주석 7: "노동하는 사람들은....사실상 자기 자신을 부양하는 동시에 부자인 연금생활자를 또한 부양하고 있다"(에드먼트 버크[Edmund Burke], ?곡물부족에 관한 의견과 상세한 논의?, 런던, 1800년, pp. 2-3).) 그것은 이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아테네의 귀족, 에트루리아의 신정관(神政官), 로마의 시민, 노르망디의 영주, 미국의 노예소유자, 왈라키아의 보야르{Boyar: 러시아및 발칸의 봉건적 대지주}, 현대의 지주(地主) 또는 자본가이건 다 마찬가지다.(주석 8: 니부르(Niebuhr)는 자기의 ?로마사?에서 매우 소박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에트루리 아의 건축물은 그 폐허만으로도 우리를 경탄케 한다. 이러한 건축물이 소국(!)에 있다는 것은 명백히 영주와 농노의 존재를 전제한다. " 시스몽디(Sismondi)는 이보다 훨씬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브뤼셀의 레이스(lace)'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존재를 전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산물의 교환가치(交換價値)가 아니라 그 사용가치(使用價値)가 지배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는 잉여노동은 다소 한정된 욕망의 범위에 의해 제한되며, 잉여노동에 대한 무제한의 욕망이 생산 그 자체의 성격으로부터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고대에는 교환가치를 그 독립적인 화폐형태로 획득하려고 하는 곳, 즉 금이나 은의 생산지에서만 과도노동(過度勞動: over-work)이 무서울 정도로 나타났다. 거기에서는 죽도록 일을 시키는 강제노동이 과도노동의 공인된 형태였다. 이에 관해서는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의 글을 읽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주석 9: “자기의 몸을 깨끗이 할 수도, 벌거벗은 몸을 가릴 수도 없는 이 불행한 사람들(이집트, 이디오피아 및 아라비아의 접경지역에 있는 금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그들의 비참한 운명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에서는 병자, 불구자, 노인, 연약한 여자이건 추호의 사정도 용서도 없다. 모든 사람은 채찍의 강제 아래, 죽음이 그들의 고통과 궁핍을 끝나게 할 때까지, 계속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시쿨루스, ?역사문고?, 제3부, 제13장).) 그러나 이것은 고대에서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노예노동. 부역노동 등의 비교적 낮은 형태에 의거해 생산을 영위하는 민족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세계시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가 그들 생산물의 해외판매를 주요한 관심사로 삼게 되면, 노예제나 농노제 등의 야만적인 잔학성 위에 과도노동이라는 문명화된 잔학성이 접목된다. 그러므로 미국의 남부 주들의 흑인 노동도 생산의 목적이 주로 직접적인 국내 수요의 충족이었던 때에는 온건한 가부장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면화의 수출(輸出)이 남부주들의 사활문제로 됨에 따라 흑인에게 과도노동을 시키는 것, 때로는 흑인의 생명을 7년간의 노동으로 소모해버리는 것이 계획적인 수익증대수단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제 문제로 된 것은, 흑인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유용(有用)한 생산물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剩餘價値) 그 자체의 생산이었다. 다뉴브 제후국{지금은 루마니아}의 부역노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다뉴브 제후국에서 보는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을 영국의 공장에서의 그것과 비교해 보는 것은 특히 흥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잉여노동은 부역노동에서는 하나의 독립적이고 곧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1노동일이 6시간의 필요노동과 6시간의 잉여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한 사람의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매주 6 x 6, 즉 36시간의 잉여노동을 제공한다. 이것은 그가 1주 중 3일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하고, 3일간은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직접 눈으로 알아차릴 수 없다. 잉여노동과 필요노동이 서로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예컨대 노동자가 매 1분에 30초는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하고 30초는 자본가를 위해 노동한다는 등의 형태로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부역노동에서는 그렇지 않다. 왈라키아의 농민이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수행하는 필요노동은 보야르를 위해 수행하는 그의 잉여노동과 명백히 분리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필요노동을 자기 자신의 경작지에서 수행하고, 잉여노동을 영주의 농장에서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시간의 두 부분은 독립적으로 나란히 존재한다. 부역노동에서는 잉여노동은 필요노동과 명확히 분리되어있다. 이와 같은 현상형태의 차이가 잉여노동과 필요노동 사이의 양적 비율을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1주일 중 3일간의 잉여노동은, 그것이 부역노동이든 임금노동이든, 여전히 노동자 자신에게는 아무런 등가물도 주지 않는 노동인 것이다. 그러나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은 자본가의 경우에는 노동일을 무제한으로 연장하려는 충동으로 나타나며, 보야르의 경우에는 훨씬 단순하게 부역일수에 대한 직접적인 추구로 나타난다.(주석 11: 다음에 말하는 것은 [크리미아 전쟁 뒤 일어난] 변혁 이전의 루마니아 지방의 상황에 관한 것이다.)
    다뉴브 제후국에서는 부역노동이 현물지대(現物地代) 및 농노제도의 기타 부속물과 결합되어 있었지만, 지배계급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공납(貢納: tribute)은 역시 부역노동이었다 그곳에서는 부역노동이 농노제(農奴制: serfdom)로부터 발생하는 일은 드물고 오히려 농노제가 부역노동으로
    부터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주석 11: {엥겔스: 이것은 독일 특히 엘베(the Elbe))강 동쪽의 프로이센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15세기 독일의 농민들은 거의 어디에서나 생산물과 노동으로 일정한 공납을 바칠 의무를 지고 있었지만, 기타의 관계에서는 적어도 사실상으로는 자유로운 인간들이었다 게다가 브란덴부르크, 폼메라니아, 실레지아, 동부 프로이센의 정착자들은 법률상으로도 자유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농민전쟁에서 귀족의 승리는 이러한 사태에 종말을 가져왔다. 남부 독일의 정복된 농민이 다시 농노로 되었을 뿐 아니라, 16세기 중엽부터는 동부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 폼메라니아, 실레지아의 자유로운 농민들까지도, 또 그 뒤 얼마 안 되어 쉴레스비히-홀슈타인의 자유로운 농민들까지도 농노로 전락해버렸다(마우러[Maurer], ?부역농민의 역사?, 제4권; 마이첸 [Meitzen], ?프로이센국의 토지와 농업사정": 한센(Hanssen), ?쉴레스비히-홀슈타인의 농노 제“).}) 루마니아의 지방에서도 그랬다. 이곳의 원래의 생산양식은 공동체적 소유에 의거하고 있었으나, 그 공동체적 소유는 슬라브적 또는 인도적 형태와는 달랐다. 토지의 일부는 자유로운 사적 소유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경작되었고, 다른 일부[공유지(公有地)]는 그들에 의해 공동으로 경작되었다. 이 공동노동의 생산물은 그 일부는 흉작 및 기타의 재해에 대한 예비재원으로 사용되었고, 또 일부는 전비(戰費)나 종교비 및 기타 공동체지출에 충당하기 위한 국고로 역할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사상, 종교상 높은 지위를 차지한사람들이 공유지와 함께 [그 공유지와 결부된] 노동까지 횡령했다. 자유로운 농민들의 공유지에서의
    노동이 공유지의 횡령자들에 대한 부역노동으로 바뀌었다. 이 부역노동은 곧 농노적 관계로 발전했지만, {이 지역을 점령한} 세계의 해방자인 러시아가 농노제를 폐지한다는 구실 하에 부역노동을 법제화해 버렸다. 러시아의 장군 키셀료프(Kiselev)가 1831년에 공포한 부역노동법 전은 말할 것도 없이 보야르 자신의 구술(口述)에 의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러시아는 다뉴브 제후국의 귀족들과 유럽 전체의 자유주의적 백치들의 박수갈채를 한꺼번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역노동법전은 “구성법”(構成法: Reglement organique)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에 의하면 왈라키아의 각 농민은 이른바 지주에게 일정한 분량의 상세히 열거된 현물공납 외에 다음과 같은 의무를 부담해야 했다. ① 12일의 일반노동, ② 1일의 경작노동, ③ 1일의 목재운반 노동. 이상을 합계하면 1년에 14일이다. 그러나 경제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노동일은 보통의 의미로 해석되었던 것이 아니라 1일분의 평균생산물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일이라고 해석되었다. 그런데 그 1일분의 평균생산물이란 것이 교활하게도 어떤 힘센 장사라도 24시간 안에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그러한 양이었다. 그리하여 “구성법” 그 자체도 정말 러시아식의 풍자적이고 노골적인 언어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12일의 일반노동이란 36일의 육체노동으로, 1일의 경작노동이란 3일의 경작노동으로, 그리고 1일의 목재운반노동도 역시 그 3배로 이해해야 한다고. 결국 합계 42부역일이 된다. 그러나 그 위에 또 이른바 '요바기'(Jobbagio)가 더해진다. 그것은 특별
    한 필요에 따라 영주에게 바치는 노동봉사다. 각 마을은 매년 '요바기'를 위해 그 인구수에 비례해 일정한 수의 인원을 차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추가적인 부역노동은 왈라키아의 각 농민 1인당 14일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매년 의무적인 부역노동은 56일에 달한다. 그런데 왈라키아에서는 기후가 불순하기 때문에 1년의 농경일수는 210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 중 일요일과 명절이 40일, 나쁜 날씨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날이 평균 30일, 합계 70일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 남는 것은 140일
    이다. 필요노동에 대한 부역노동의 비율인 56/84, 즉 66 2/3%는 영국의 농업노동자나 공장노동자의 노동을 규제하는 잉여가치율에 비해 훨씬 작은 잉여가치율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법률상 제정된 부역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영국의 공장법보다 그 정설에서 더 '자유주의적'인 “구성법”은 그 자체의 규정을 쉽게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 법은 14일을 56일로 만든 다음, 그 56부역일 각각의 명목상의 하루분 작업량은 그 일부를 다음 날로 넘기지 않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예컨대 하루 동안에 제초(除草)하도록 되어 있는 토지가 실제로는 그 2배의 시간이 들 정도의 방대한 면적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옥수수밭의 제초가 그러하다. 몇 가지의 농업노동의 경우에는, 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1일분 노동은 그 1일이 5월에 시작해 10월에 끝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몰다우(Moldavia) 지방에 대해서는 규정이 한층 더 가혹하다. 승리에 도취한 보야르는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외쳤다. ""구성법"에 규정된 14부역일은 1년 365일이
    다"라고.(주석 12: 더 상세한 것은 르뇨(E. Regnault), ?다뉴브 제후국의 정치. 사회사?(파리, 1855년, p. 304 이하)에서 볼 수 있다.)
    만약 다뉴브 제후국의 "구성법"이 잉여노동에 대한 갈망을 긍정하고, 그 각 조항은 이 갈망을 합법화시켜 주는 것이라면, 영국의 공장법은 이 동일한 갈망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장법은 국가가 [그것도 자본가와 지주가 지매하는 국가가] 노동일을 강제적으로 제한함으로써 노동력을 무제한 착취하려는 자본의 충동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그 위협이 증가하고 있는 노동운동을 별도로 치면, 공장노동일의 제한은 영국의 경작지에 구와노 비료{남미 바다새의 똥}를 뿌리게 했던 것과 동일한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즉, 이윤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이 한 경우에는 토지를 메마르게 했고 다른 경우에는 국민의 생명력을 뿌리채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주기적으로 전염병이 발생한 것은, 독일과 프랑스 병사들의 표준키가 작아진 것과 더불어, 이 사실을 똑똑히 말해 준다. (주석 13: "일반적으로 그리고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어떤 유기체가 자기 종류의 평균 크기를 넘는 것은 그 유기체가 번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에 대해 말하면, 자연적 사정에 의해서건 사회적 사정에 의해서건 그 성장이 방해받고 있을 때 키가 작아진다. 징병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모든 유럽 나라들에서는, 이 제도가 채용된 이래, 성인남자의 평균 키와 그들의 일반적인 병역 적합성이 감퇴했다. 혁명(1789년) 이전에는, 프랑스 보병후보자의 최저 키는 165센티미터였는데, 1818년(3월 10일의 법률)에는 157센터미터였고, 1832년 3월 21일의 법률에서는 156센터미터였다. 프랑스에서는 평균 1/2 이상이 징병검사에서 키 미달이나 신체적 결함으로 불합격판정을 받았다. 작센 지방에서는 징병검사에 합격할 수 있는 최저 키가 1780년에는 178센티미터였으나 지금은 155센터미터로 되어 있다. 현재 프러시아에서는 157센터미터다. 1862년 5월 9일자 ?바이에른 신문?에 게재된 마이어(Meyer)의 보고에 의하면, 9년간의 평균으로 볼 때 프러시아에서 징집자 1,000명당 716명의 병역 불합격자가 나왔는데, 중 317명은 키 미달 때문이고 399명은 신체적 결함 때문이었다....베를린에서는 1858년에 보충병의 할당인원을 다 채울 수 없어 156명의 결원이 생겼다"(리비히[J. von Liebig], ?화학과 그것의 농업 및 생리학에의 응용“, 제7판, 1862년, 제1권, pp. l17-118).)
    현재(1867년)까지 실시되고 있는 1850년의 공장법은 하루 평균 10시간의 노동을 규정하고 있다. 즉, 주초의 5일간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의 12시간인데, 그 중에는 아침식사에 반 시간, 점심식사에 한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노동시간은 10시간 반이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아침 6시부터 오후 2시까지의 8시간인데, 그 중에는 아침식사를 위한 반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1주에 60노동시간인데, 주초의 5일간은 10시간 반씩이고, 토요일은 7시간 반이다.(주석 14: 1850년 공장법의 역사는 이 장의 뒷부분에서 서술된다.) 이 법률의 특별 파수꾼으로 내무장관 직속의 공장감독관이 임명되어 있으며, 그들의 보고서는 반년마다 의회가 공표하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잉여노동에 대한 자본가들의 갈망에 관한 규칙적인 공식통계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제 잠시동안 공장감독관들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주석 15: 영국 근대공업의 초창기로부터 184.j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관해서는 나 자신은 몇몇 군데에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이 기간에 관해서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서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라이프치히, 1845년)를 참고하기 바란다. 엥겔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본질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었는가는 1845년 이후에 발간된 공장보고서나 광산보고서 등이 보여주고 있는 바다. 또 그가 노동자계급의 실정을 얼마나 놀랄 만큼 상세하게 묘사했는가는 그의 저서를 그보다 18-20년 뒤에 발간된 "아동노동 조사위원회"의 공식보고서(1863-67년)와 얼핏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주로[1862년까지 공장법이 아직 실시되지 않았고, 또 부분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아직 실시되고 있지 않은] 산업부문들을 취급하고 있는데, 이 부문들에서는 엥겔스가 묘사한 상태에 대해 당국이 아무런 변경도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주로 1848년 이후의 자유무역시대[즉, 자유무역의 행상인들이 학문적으로는 보잘것 없으면서도 큰소리치면서 독일 사람들에게 꿈같은 이야기를 많이 한 그 낙원시대]의 예를 인용했다. 아무튼 영국이 여기서 전면(前面)에 등장하는 까닭은 이 나라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형적 대표자며, 또 이 나라만이 지금 취급되고 있는 문제에 관해 연속적인 공식통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사기꾼같은 공장주는 아침 6시보다 15분 전에-그보다 더 빠를 때도 있고 그보다 늦을 때도 있다-작업을 시작해서, 오후 6시보다 15분 늦게-그보다 더 빠를 때도 있고 그보다 늦을 때도 있다-
    끝마친다. 또 그는 명목상 아침식사를 위해 할당된 반 시간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5분씩을 떼어내며, 점심시간에 할당된 한 시간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10분씩을 떼어낸다. 토요일에는 오후 2시보다 15분 늦게-그보다 더 빠를 때도 있고 그보다 늦을 때도 있다-작업이 끝난다. 이로부터 그가 얻는 이득은 다음과 같다.

    평일에는
    오전 6시 이전........15분
    오후 6시 이후........15분
    아침식사때 .........10분 5일간 합계 300분
    점심식사때 .........20분
    ---------------------
    합계 ..........60분 1주간 총계 340분
    토요일에는
    오전 6시 이전......15분
    아침식사 때 ........10분
    오후 2시 이후..... 15분
    ----------------------
    합계 .........40분
    이것은 1주일에 5시간 40분이나 되는데, 이것을 (공휴일이나 임시휴업의 2주간을 공제한) 50노동주간으로 곱하면 27노동일{(340분 x 5O주) ÷ (10.5시간 x 60분)}로 된다. "(주석 16: 하원의 명(命)에 따라 1859년 8월 9일 인쇄된 ?공장규제법? 중에 있는 "공장감독관 호너. (L. Horner)의 공장법개정제안", pp. 4-5.)

    "만약 노동일이 매일 5분씩 연장된다면 이것은 1년에 2 1/2노동일로 될 것이다."(주석 17: ?공장감독관 보고서. l856년 10월 31일? p .35.) "아침 6시 이전, 오후 6시 이후, 그리고 식사시간 전후에서 조금씩 떼어내어 하루에 1시간씩 추가한다면,, 1년에 13개월 노동하는 것과 같다. "(주석 18: ?공장감독관 보고서. 1858친 4월 30일? p. 9.)

    공황(恐慌: crisis) 때에는 생산이 중단되어 오직 '단축된 시간', 즉 1주일에 며칠밖에는 작업을 하지 않지만, 이 공황도 노동일을 연장하려는 충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사업의 규모가 축소되면 될수록 그 축소된 사업에서 나오는 이윤은 더 커야 하며, 따라서 작업시간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그만큼 그 중의 잉여노동시간은 더 길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57-58년의 공황기에 관해 공장감독관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이와 같이 경기가 나쁠 때 과도노동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은 모순인 듯이 보이지만, 이 불경 기는 파렴치한 사람들로 하여금 위법행위를 하도록 충동하며, 그리하여 그들은 초과이윤을 얻는 다....나의 관할지역에서 지난 반 년 동안 122개의 공장은 완전히 폐업했고 143개의 공장은 휴업 하고 있지만, 법정시간 이상의 과도노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주석 19: 같은 보고서, p. 10.) 고 호너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우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기간의 대부분을 통해 불경기 때문에 많은 공장이 완전히 폐업했고, 그보다 더 많은 공장은 조업을 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노동자들이[법률에 의해 그들에게 보장된] 식사 시간과 휴식시간을 침해당함으로써 매일 1/2시간 내지 3/4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하소연을 마찬가지로 많이 듣고 있다. "(주석 20: 같은 보고서, p. 25.)

    이와 동일한 현상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의 격심한 면화공황기에도 약간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반복되었다.(주석 21: ?공장감독관 보고서. 1861년 4월 3()일?, 부록 제2호를 보라. ?공장감독관 보고서. 1862년 10월 31일?, pp. 7, 52, 53. 법률위반은 1863년 후반부터 다시 많아진다. ?공장감독관 보고서. 1863년 10월 31일?, p. 7 참조.)

    "만약 우리가 식사시간 또는 기타의 불법적인 시간에 작업하고 있는 현장을 적발하면 우리는 그때마다 다음과 같은 변명을 듣게 된다. 즉, 노동자들이 아무리 해도 정해진 시간에 공장을 떠 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노동(기계의 청소 등등)을 중지하도록 하기 위 해서는, 특히 토요일 오후에는 강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직공들이 기계가 멈춘 뒤 에도 공장에 머물러 있다면....그 이유는 오직 평일에는 오후 6시 이전에, 그리고 토요일에는 오 후 2시 이전에 청소 등등을 하기 위한 틈을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석 22:?공 장감독관 보고서. 1860년 10월 31일?, p. 23 공장주들의 법정진술에 의하면, 그들의 공장 직공들이 열광적으로 공장노동의 온갖 중단에 반대한다고 하는데, 그들의 기만성은 다음과 같 은 기묘한 사건에서 갈 나타나고 있다. 즉, 1836년 6월 초에 듀즈버리(요크셔)의 치안관사(治 安判事: magistrate))에게 제출된 고발장에 의하면, 베틀리 부근의 8개 대공장의 소유자들이 공장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이 공장주들 중 일부는 12세 내지 15세의 소년 5명을 금요일 오 전 6시부터 다음 날인 토요일 오후 4시까지 식사시간과 한밤중의 한시간의 수면시간 이외에는 조금도 휴식을 주지 않고 혹사시켰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그런데 이 아동들은 '넝마 구덩이' 속에서 30시간을 쉴새없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곳은 모직 누더기를 찢는 곳으로, 그 안의 공기는 성인노동자라도 계속 손수건으로 입을 가려 폐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티끌과 털부스러기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고인들은 선서를 하는 대신-왜냐하면 그들은 퀘이커 교도들로서 선서를 하기에는 너무나 신중한 종교인들이었기 때문에-다음과 같이 증언 했다 즉, 그들은 크나큰 자비심을 베풀어 이 불쌍한 아동들에게 4시간의 수면을 허용하려 했 으나, 이 완고한 아이들은 아무리 해도 침대에 누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퀘이커 교
    도들은 20파운드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드라이던(Dryden)은 일찍이 이러한 퀘이커 교도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신앙심 깊은 체하는 여우,
    선서는 두려워하나 악마같이 거짓말하네.
    참회자마냥 온화한 눈초리로 주위를 살펴 행동하기도 하지만,
    기도가 끝나면 곧바로 죄를 짓는다네!")

    "그것"(범정시간을 넘는 과도노동)"에서 얻는 초과이윤은 많은 공장주들에게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너무나 큰 유혹인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적발되지 않을 것을 기대하며, 또 적발되는 경 우라도 벌금액과 재판비용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차액은 역시 그들의 이익으로 될 것이 라고 계산하고 있다. "(주석 23: ?공장감독관 보고서. 1856년 10월 31일? p. 34.) "하루 중 조 금씩 훔친 것들의 누적에 의해 추가시간이 얻어지는 경우, 감독관들이 그 위법 행위를 입증하기 가 매우 어렵다. "(주석 24: 같은 보고서, p. 35.)

    자본이 노동자의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에서 훔쳐내는 이 '좀도둑질'을 공장감독관들은 "분(分)도둑"(주석 25: 같은 보고서, p. 48.), "분 뜯어내기"(주석 26: 같은 보고서, p. 48.)라고 부르며, 노동자들의 전문용어로는 ‘식사시간 야금야금 깎아먹기'라고도 한다.(주석 27: 같은 보고서, p. 48.)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잉여노동에 의한 잉여가치의 형성은 전혀 비밀이 아닌 것은 명확하다.

    “만약 나에게 매일 10분씩만 시간외 노동(over-time)을 시킬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면, 당신은 나의 주머니 속에 매년 1,000파운드를 집어넣어 주는 셈이라고 아주 존경받는 공장주가 나에게 말했다. "(주석 28: 같은 보고서, p. 48.)
    "순간순간이 이윤의 요소다. "(주석 29: ?공장감독관 보고서. 1860년 4월 30일“ p. 56)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온종일 노동하는 노동자를 '전일공(全日工: fu11-timer)'이라 부르고, 하루에 6시간 이상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13세 미만의 아동을 ‘반일공(半日工: half-timer)'이라 부르는 것 이상으로 특징적인 것은 없다.(주석 30: 이 표현은 공장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장보고서에서도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동자는 여기에서는 노동시간의 인격화에 불과하다. 모든 개인적 차이는 '전일공'과 '반일공' 사이의 차이로 해소되어 버린다.



    제 3 절 착취의 법적 제한이 없는 영국의 산업부문



    이때까지 우리가 노동일의 연장에 대한 충동, 잉여노동에 대한 늑대와 같은 갈망을 고찰해 온 분야는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잔학성에 못지 않은] 자본의 극도의 무법성(주석 31: “공장주들의 탐욕, 이윤추구에서 그들의 잔학성은 스페인 사람들이 황금을 추구해 아메리카를 정복할 때 보인 잔학성에 결코 못하지 않다"(존 웨이드[John Wade], ?중간계급 및 노동계급 의 역사?제3판, 런던, 1835년, p. 114). 일종의 경제학개론서인 이 책의 이론적 부분에는, 그 당시로 보아서는 약간의 독창적인 것, 예컨대 상업공황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역사적 부분은 이든(F. M. Eden)의 ?빈민의 상태?(런던, 1796년)의 파렴치한 표절이 다.) (영국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말) 때문에 자본을 드디어 법적 규제의 사슬에 얽매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러한 분야였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노동력의 착취가 지금도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고 있거나 아주 최근까지도 구속을 받지 않았던 약간의 생산부문으로 돌려보자.

    "주의 치안판사 찰턴(Broughton Charlton)은 1860년 1월 14일 노팅엄시 회의실에서 열린 집 회의 의장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이 도시의 주민들 중 레이스(lace) 제조에 종사하는 사 람들 사이에는 영국의 다른 곳 또는 문명세계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할 정도의 궁핍과 고통이 지 배하고 있다....9세부터 10세까지의 아이들이 새벽 2, 3, 4시에 그들의 불결한 잠자리에서 끌려나 와 겨우 입에 풀칠만이라도 하기 위해 밤 10, 11, 12시까지 노동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데, 그 들의 팔다리는 말라 비틀어지고 신체는 패소해지며 얼굴은 창백해지고, 그들의 인간성은 완전 히 목석처럼 무감각상태로 굳어져버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우리는 말레트 (Mallett)와 기타 공장주들이 등단해 이러한 토론에 항의를 제기한 것에 놀라지 않는다....이러한 제도는 몬터규 밸피(Montagu Valpy) 목사가 발한 바와 같이 사회적, 육체적, 도덕적, 정신적으 로 [변함없는] 노예제도의 하나다....성인남자의 노동시간을 1일 18시간으로 제한해 달라고 청원
    할 목적으로 공청회를 열고 있는 이러한 도시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우리는 버지니아나 캐롤라이나의 면화재배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흑인시장과 채찍과 인 간매매가 [자본가의 돈벌이를 위한 면사포와 칼라를 제조하기 위해] 날마다 수행되고 있는 이 완만한 인간희생보다 더 흉악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주석 32: ?데일리 텔레그라프?지, 1860년 1월 17일자.)

    스태퍼드셔(Staffordshire)의 도자기 제조업은 지난 22년간 세 차례에 걸쳐 의회의 조사대상으로 되었다. 조사 결과는 '아동노동 조사위원회'에 제출된 스크리븐(Scriven)의 1841년 보고와, 추밀원 의무관의 지시에 의해 공표된 그린하우(Greenhow)의 1860년 보고(?공중위생. 제3차 보고서?, 제1권, pp. 102-l13)와, 끝으로 1863년 6월 13일자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1차 보고서? 중의 론지(Longe)의 1862년 보고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목적을 위해서는 착취당한 아동들 자신의 약
    간의 증언을 1860년 및 1863년의 보고로부터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이 아동들의 상태로 미루어 보아 성인들 특히 부녀자들의 상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데, 그들이 종사하는 도자기 제조업에 비해 면방적업은 훨씬 쾌적하고 건전한 직업으로 나타난다.(주석 33: 엥겔스,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라이프치히, 1845년, pp. 249-251 참조.)
    아홉 살 되는 월리엄 우드(William Wood)가 "노동하기 시작한 것은 만 7살 10개월 되던 때였다. " 그는 "처음부터 그릇 만드는 틀을 날랐다"(즉, 그릇 만드는 틀에 올려진 완성된 제품을 건조실로 운반하고, 빈 틀을 가지고 되돌아오는 일을 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와서 저녁 9시쯤에 일을 끝마치곤 했다. "저는 1주에 6일 동안 매일 저녁 9시까지 일합니다. 나는 최근 7, 8주일 동안 그렇게 해왔습니다" 일곱 살난 아이가 15시간 노동을 하는 것이다! 12살 난 소년 머리(J. Murray)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그를 만드는 틀을 운반하며 녹로(jigger)를 돌립니다. 내가 일하러 오는 것은 아침 6시 인데, 4시에 올 때도 있습니다. 나는 어젯밤 밤을 새워 오늘 아침 6시까지 일했습니다. 그저께 밤부터 자지못했습니다. 어젯밤은 나와 함께 8, 9명의 다른 소년들도 밤을 새워 일했습니다. 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오늘 아침에도 모두 왔습니다. 나는 1주일에 3실링 6펜스를 받고 있습니다. 밤을 새워 일해도 그 이 상은 받지 못합니다. 지난 주일에 나는 이틀 밤을 새워 일했습니다"

    10세의 소년 퍼니하우(Fernyhough)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녁식사를 위해 온전한 1시간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에는 반 시간뿐 일 때가 자주 있습니다. "(주석 34: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1차 보고서?, 1863년, 부록 pp. 16, 18, 19.)

    그린하우는 스토크-온-트렌트(Stoke-on-Trent)나 월스탠턴(Wolstanton)의 도자기 제조지역의 평균수명이 특히 짧다고 밝히고 있다. 스토크 지방에서는 20세 이상의 성인남자 인구의 36.6%, 월스탠턴에서는 그 30.4%가 도자기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이 연령에 속하는 성인남자중 폐병으로 인한 사망자 총수의 반 수 이상[스토크 지방에서]과 약 2/5(월스탠턴 지방에서)가 도자기공이다. 헨리(Henry)의 의사인 부스로이드(Boothroyd)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자기공들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점차로 체격이 작아지고 허약해지고 있다. "

    다른 의사 맥빈(McBean)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25년 전에 도공(陶工)들을 상대로 개업한 이래, 그들은 현저하게 퇴화하고 있는데 특히 키와 몸무게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

    이상의 증언들은 그린하우의 1860년 보고서로부터 인용한 것들이다.(주석 35: ?공중위생, 제3차 보고서?, pp. 102, 104, 105.)

    1863년 위원회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북부 스태퍼드셔 병원의 선임의사인 알레지(J. T. Arledge)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도자기공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육체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퇴화된 주 민을 대표하고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발육부진 때문에 체격이 좋지 않고, 가끔 가슴이 기형인 경우도 많다. 그들은 빨리 늙고 수명이 짧다. 또 그들은 무기력하며, 핏기가 없으며, 그들의 체질 이 허약하다는 것은 그들이 위장병이나 간장병, 류마티스와 같은 고질병에 잘 걸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로 걸리는 병은 폐렴. 폐결핵. 기관지염. 천식과 같은 폐에 관한 질 병들이다. 천식의 한 종류로 그들에게만 특유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도자기공의 천식 또는 도자 기공의 폐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선(腺)과 뼈 또는 신체의 기타 부분을 침범하는 선병 (腺病: scrofula)은 도자기공의 2/3 이상이 걸리는 병이다....이 지방 주민의 신체가 지금보다 더 심한 정도로 퇴화하지 않은 것은 주위의 농촌지방으로부터의 인원보충과 더 건강한 계층들과의 결혼 덕택이라고 할 것이다. "(주석 36: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1차 보고서?, 1963년, p. 24)

    얼마 전까지 이 병원의 외과의사였던 찰스 파슨스(Charles Parsons)는 위원회 위원인 론지에게 준 한 통의 편지에서 특히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통계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의 개인적인 관찰에 근거 를 둔 것이지만, 나는 이 불쌍한 아이들의 건강이 그들의 부모나 고용주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된 것을 보고 분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

    그는 도자기공의 병의 원인들을 열거하면서, '장시간노동'이라는 말로 집약하고 있다. 이 위원회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요망사항을 지적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하나의 제조공업이, 그 위대한 성공에는 [자신의 노동과 기능에 의해 그러한 성공을 가져오게 한] 노동인구의 육체적 퇴화와 각종 신체적 고통 과 조기사망(早期死亡)이 수반되고 있다는 오명(汚名)을 더 이상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석 37: 같은 책, p. 22)

    잉글랜드의 도자기업에 관해 말한 것은 스코틀랜드의 그것에도 그대로 해당된다.(주석 38: 같은 책, 부록 p. 47.)
    성냥(match)제조업은 1833년에 인(燐: phosphorus)을 나무개비에 붙이는 방법이 발명된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공업은 1845년 이래 잉글랜드에서 급속히 발전했고, 런던의 인구가 조밀한 지역으로부터 시작해서 맨체스터, 버밍엄, 리버풀, 브리스톨, 노리지(Norwich), 뉴캐슬, 글래스고우로 확대되어 갔다. 그와 더불어 파상풍(破傷風: tetanus)이 만연했는데, 이 병은 이미 1845년 비엔나의 한 의사가 성냥제조공들에게 고유한 병인 것을 발견한 바 있다. 이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반수는 13세 미만의 아동과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들이다. 이 제조업은 비위생적이고 작업조건이 나쁜 것으로 평판이 나 있었으므로, 노동자 계급 중 가장 비참한 부분인 굶주려 죽게 된 과부 등등이 그들의 아동들[즉 '누더기를 걸치고 굶어 죽어가는, 교육도 받지 못한 아동들'](주석 39: 같은 책, 부록 p. 54.)을 이 제조업에 보내고 있다. 위원회의 위원인 화이트(1863년)가 심문한 증인들 중 270명은 18세 미만, 50명은 10세 미만이었고, 10명은 겨우 8세, 5명은 겨우 6세였다. 노동일의 길이는 12시간으로부터 14, 15시간 사이였고, 야간노동이 진행되며, 식사는 그 시간이 불규칙할 뿐 아니라 대다수의 경우 인독(燐毒)이 가득 찬 작업장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단테(Dante)가 이 제조업의 광경을 보았더라면 그가 상상한 처참하기 짝이 없는 지옥의 광경도 여기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벽지(wallpaper)공장에서는 조잡한 종류의 벽지는 기계로 인쇄하고 정밀한 것은 손으로 인쇄한다. 이 공장에서 가장 바쁜 달은 10월 초부터 4월 말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중 작업은 때때로 거의 중단없이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또는 더 늦게까지 계속된다.
    리치(J. Leach)의 증언: "지난 겨울{1862년} 19명의 소녀 중 6명이 과로로 병이 나서 출근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졸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고함을 쳐야만 했다. "
    더피(W. Duffy): "아이들은 가끔 피로 때문에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사실은 우리들도 그렇게 될 때가 있다."
    라이트본(J. Lightbourne): "나는 열 세 살이다....지난 겨울 우리들은 저녁 9시까지 일했고 재작년 겨울에는 10시까지 일했다. 지난 겨울에는 발의 상처가 쑤시고 아파 거의 매일 저녁 울고 지냈다. "
    아프스덴(G. Apsden): "나는 내 아이가 7세 되던 때 매일 그 아이를 등에 업고 눈길을 왕복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보통 하루 16시간씩 일했다....그 아이가 기계 곁에 서 있는 동안 나는 무릎을 끓고 그에게 음식을 먹여준 적이 가끔 있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기계에서 떠나도 안 되고 기계를 멈추어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의 어느 공장의 공통경영자인 스미스(Smith): "우리('우리'를 위해 일해 주고 있는 '직공들'을 가리키는 말이다)"는 식사를 위해 중단하지 않고 계속 노동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10시간 반이라는 하루 노동은 오후 4시 반에 끝나고 그 뒤의 시간은 모두 시간외 노동으로 된다"(주석 40: 시간외 노동을 잉여노동과 같은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람들은 10시간 반 노동을 표준노동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표준노동일에도 표준적인 잉여노동량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 표준노동일이 끝난 뒤에 '시간외 노동'이 시작되며, 이에 대해서는 약간 더 많은 보수를 지불한다. 다음 기회 {제6편 임금}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른바 표준노동일 동안 수행된 노동도 그 가치 이하로 지불되고 있으며, 따라서 시간외 노동이라는 것은 더 많은 잉여 노동을 짜내기 위한 자본가의 책략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 이 사실은 비록 표준노동일 동안 사 용되는 노동력이 현실적으로 그 가치대로 지불되는 경우일지라도 다를 것이 없다.)(이 스미스 자신은 10시간 반 동안 전혀 식사를 하지 않는가?). "우리(스미스 그 자신을 의미한다)는 오후 6시 이전에 일을 끝마치는 경우가 드물다"(끝마친다는 것은 노동력이라는 ‘우리'의 살아 있는 노동력의 소비를 끝마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우리(이번에도 동일한 인물인 스미스)는 실제로 1년 내내 시간외 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아동도 성인도(아동들과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들을 합해 152명과 성인 140명) 똑같이 최근 18개월 동안 평균해서 아무리 적어도 1주일에 7일 5시간을, 즉 1주일에 78시간 반씩을 일했다. 금년(1862년) 5월 2일까지 6주간에는 일이 더 많아 1주일에 8일, 즉 84시간 일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처럼 좋아하는 이 스미스는 미소를 띠고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기계노동은 좋지 않다"라고. 마찬가지로 목판인쇄를 채용하고 있는 공장주들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손노동은 기계노동보다 건강에 더 좋다"라고. 일반적으로 공장주들은 ”적어도 식사시간 중에는 기계를 정지시켜야 한다.“ 라는 제안에 격분하면서 반대한다.
    런던의 어떤 벽지공장 지배인 오틀리(Otley)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의 노동시간을 허가하는 법률은 우리(!)에게 매우 적합하지만, 아 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로 정한 공장법의 노동시간은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점심 식사시간에 기계를 정지시킨다”(얼마나 관대한 일인가!). “이 기계의 정지는 종이와 물감에는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주지 않는다”[그는 부언한다]. “그러나 나는 시간의 손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다른 사람들의 불평을 이해할 수 있다.”

    위원회의 보고서는 소박하게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밟히고 있다. 즉, 약간의 ‘유력한 회사’들은 시간[즉, 타인의 노동을 취득할 시간]을 버리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이윤을 버린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13세 미만의 아동과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로 하여금 하루 12-16시간 동안 일하면서 점심식사를 잃어버리게" 해도 좋다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하고, 또한 마치 증기기관에 석탄과 물을, 양모에 비누를,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이[생산과정 그 자체가 진행되는 동안 노동수단에 보조재료를 주듯이] 그들에게 점심식사를 주어도 좋다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라고. (주석 41:?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1차 보고서“ 1863년, 부록 pp. 123-125, 140 및 별책부록 p. 64)
    영국의 어떤 산업부문도 빵제조업(우리는 최근에 비로소 도입되기 시작한 기계에 의한 빵제조는 제외한다)처럼 오래된 예수 이전의 생산방식(로마제국의 시인의 작품에서나 볼 수 있다)을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본은 처음에는 그것이 지배하는 노동과정의 기술적 성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자본은 처음에는 노동과정을 있는 그대로 접수한다.
    빵의 믿기 어려울 정도의 불순제조(특히 런던)는 '식료품의 불순제조에 관한 하원위원회(1855-1856년)와 하설(Hassall)의 ?적발된 불순품?에 의해 처음으로 폭로되었다.(주석 42: 분말로 되었거나 소금을 섞은 명반(alum)이 '빵재료‘라는 이름을 가진 정상적인 상품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폭로의 결과 1860년 8월 6일의 '불순음식료품 제조의 방지를 위한‘ 법률이 나왔는데, 이것은 불순품의 매매에 의해 '정직한 돈벌이를 하려는’ 자유상업주의자들에 대해 최대한의 너그러운 배려를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효과가 없는 법률이었다.(주석 43: 검댕은 매우 강력한 에너지를 함유한 탄소의 형태인데, 자본주의적 굴뚝청소업자가 영국의 농민에게 판매하는 비료이다. 그런데 1862년 어떤 소송사건에서 영국의 '배심원'은 90%의 먼지와 모래를 섞은 검댕이 '상업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검댕인가, 그렇지 않으면 '법률적'인 의미에서 '불순한' 검댕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사꾼의 친구들' {배심원}은 이것이 '진정한' 상업상의 검댕이라고 판결했다. 그리하여 원고인 농민은 패소했을 뿐 아니라 소송 비용까지도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위원회 자신도 자유상업이란 본질적으로 불순품[또는 영국인들의 재치있는 표현에 의하면, '세련된' 상품]의 거래를 의미한다는 자신의 확신을 대체로 소박하게 표명했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위조(僞造)'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이상으로 흑을 백으로 백을 흑으로 만들 줄 알며, 또 엘레아 학파 이상으로 일체의 실재적인 것을 가상(假像)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목전에서 실증해 보일 줄 알고 있다. (주석 44: 프랑스의 화학자 슈바리에(Chevallier)는 상품의 '위조'를 취급한 논문에서 그가 검사한 600여종의 제품 중 대다수에 대해 10, 20, 30종의 서로 다른 위조방법을 열거하고 있다. 그는 부언하기를, 자기는 모든 방법을 다 남김없이 알지도 못하며 또 자기가 알고 있는 방법을 모조리 열거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사탕에는 6종의 위조방법이, 올리브유에는 9종, 버터에는 10종, 소금에는 12종, 우유에는 19종, 빵에는 20종, 브랜디에는 23종, 곡물가루에는 24종, 초콜 릿에는 28종, 포도주에는 30종, 커피에는 32종 등등의 위조방법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 지전능한 하나님조차도 위조될 형편이다. 루아르 드 카르(Rouard de Card), ?성체(聖體)의 위 조에 대해?, 파리, 1856년을 보라.)
    어쨌든 위원회는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일용할 양식'에, 따라서 빵제조업에 주의하도록 했다. 그와 동시에, 런던의 빵제조공들은 공공집회와 의회에 보내는 탄원서에서 과도노동에 대한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이 불평불만은 상당히 절박한 것이었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1863년의 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던 트리멘히어(H. S. Tremenheere))가 칙명(勅命)조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보고(주석 45:?빵제조공의 불평에 관한 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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