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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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화로부터 실을 뽑을 때 마멸되거나 소모되지 않을 수 없는] 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도 마찬가지다.(주석 12: "상품{생산}에 직접 사용된 노동뿐만 아니라, 그러한 노동을 지원하는 기구, 도구, 건물에 투여된 노동도 또한 상품의 가치에 영향을 미친다.(리카도,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한글판, 85쪽).
그리하여 면사의 가치, 즉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결정하는 데 있어, [면화 그 자체와 소모되는 방추를 생산하는, 그리고 그 다음으로 면화와 방추로 면사를 생산하는] 여러 가지 특수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서로 분리되어 있는] 노동과정들은 동일한 하나의 노동과정의 순차적인 각각의 단계로 간주할 수 있다. 면사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은 모두 과거의 노동이다. 그리고 면사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이 마지막 과정인 방적에 지출된 노동보다 더욱 과거의 것이라는 사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한 채의 집을 짓는 데 일정한 양의 노동[예컨대 30노동일]이 필요하다면, 제30일째의 노동일이 최초의 노동일보다 29일 늦게 생산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 집에 투하된 노동시간의 총계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재료와 노동수단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은 마치 방적 과정의 어느 초기 단계에서 [즉, 방적의 형태로 최후에 첨가된 노동 이전에] 지출한 노동인 것처럼 간주할 수 있다.
요컨대, 12원이라는 가격으로 표현되는 면화와 방추라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면사의 가치, 즉 생산물의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된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만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면화도 방추도 사용가치의 생산에 실제로 이바지해야만 한다. 우리의 경우 그것들이 면사로 되어야만 한다. 가로서는 어떤 사용가치가 그것의 담지자가되건 상관없지만, 가치의 담지자는 사용가치를 가져야만 한다. 둘째, 지출된 노동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조건 하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만약 1파운드의 면사를 뽑아내는 데 1파운드의 면화만이 필요하다면, 1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하는 데는 1파운드의 면화만이 소비되어야 한다. 방추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망령이 들어 철로 만든 방추 대신 금으로 만든 방추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면사의 가치에는 여전히 철제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만이 계산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생산수단(生産手段), 즉 면화와 방추가 면사의 가치의 얼마만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그것은 바로 12원[즉, 2노동일의 체현물]이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방적공의 노동(勞動)이 면화에 첨가하는 가치부분이다.
우리는 이 노동을 이번에는 노동과정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노동과정의 경우에는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킨다는 합목적적 활동으로서만 노동을 고찰했다. 따라서 기타 사정이 동일하다면, 노동이 그 목적에 잘 맞으면 맞을수록 면사는 그만큼 더 나은 것이 생산될 것이다. 또한 방적공의 노동은 다른 종류의 생산적 노동과는 독특한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는 주관적으로는 방적이라는 특수한 목적(目的)에서,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특수한 작업방식(作業方式), 생산수단의 특수한 성질, 그리고 생산물의 특수한 사용가치(使用價値)에서 나타난다. 면화와 방추는 방적에는 필요하지만 대포 생산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방적공의 노동이 가치를 창조하는 한, 다시 말해 가치의 원천인 한, 그것은 대포의 포신(砲身)을 깎는 노동자의 노동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며,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있는 예를 가지고 말하면) 면사의 생산수단에 실현되어 있는 면화 재배자와 방추제조자의 노동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오직 이 동일성(同一性) 때문에 면화재배 . 방추제조 . 방적이 면사의 가치라는 하나의 총가치(總價値)의 단순히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부분들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이미 노동의 질 . 성질 . 내용이 아니고 오직 노동의 양(量)뿐이다. 이 양이 계산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방적노동이 단순한 노동이며, 사회적 평균노동이라고 가정하자. 이것과는 반대되는 가정을 하더라도 사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뒤에 가서 알게 될 것이다.
노동과정에서는 노동자의 노동은 끊임없이 운동(運動)의 형태로부터 정지된 존재(存存)의 형태로, 즉 노동자의 작업의 형태로부터 생산물의 형태로 전환한다. 한 시간 뒤에는 방적이라는 운동은 면사의 일정한 양으로 실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일정량의 노동[즉, 한 시간의 노동]이 면화에 첨가되었다. 우리는 방금 방적노동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노동[방적공의 생명력의 지출]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방적노동이 노동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노동력(勞動力)의 지출(支出)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방적이라는 특수한 노동(勞動)이기 때문은 아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키는 작업에서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이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정상적인 [즉, 사회의 평균적인] 생산조건 하에서 1노동시간에 a파운드의 면화가 b파운드의 면사로 바뀐f다면, 12a파운드의 면화가 12b파운드의 면사로 바뀌지 않는 한, 하루의 노동은 12노동시간으로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이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원료 생산물도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원료는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을 흡수(吸收)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사실상 이 흡수에 의해 원료는 면사로 전환되는데, 왜냐하면 노동력이 방적이라는 형태로 지출되어 원료에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산물인 면사는 이제 면화가 흡수한 노동의 계량기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1시간에 1 과2/3 파운드의 면화가 1과 2/3파운드의 면사로 바뀐다면, 10파운드의 면사는 6시간의 노동을 흡수한 것을 가리킨다. 이제 일정한[경험적으로 확정된]양의 생산물은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일정한 양의 응고된 노동시간]을 대표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일정한 시간[또는 날]의 사회적 노동의 물적 형태일 따름이다.
그 노동이 다름 아닌 방적노동이고, 그 노동의 재료가 면화이고, 그 노동의 생산물이 면사라는 사실은,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생산물[따라서 원료]이라는 사실과 꼭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가령 노동자가 방적공장이 아니라 탄광에서 일한다면 노동대상인 석탄은 천연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층에서 채굴해 낸 석탄의 일정량은 일정한 양의 흡수한 노동을 표시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노동력의 판매를 고찰할 때,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는 3원이고, 이 3원에는 6노동시간이 대상화되어 있으며, 이 노동량은 노동자의 매일 평균의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제 만약 우리의 방적공이 1노동시간에 1과2/3파운드의 면화를 1과2/3파운드의 면사(주석 13: 이곳의 숫자는 모두 임의로 가정한 것이다.)로 전환시킨다고 가정하면, 6시간에는 10파운드의 면화를 10파운드의 면사로 전환시킬 것이다. 즉, 방적과정에서 면화는 6시간의 노동을 흡수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6노동시간은 3원의 금량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이 면화에는 방적노동 그 자체에 의해 3원의 가치가 첨가된다.
이제 생산물인 10파운드의 면사의 총가치를 검토해 보자. 10파운드의 면사에는 2와1/2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다. 이 중 2일분의 노동은 소비된 면화량과 방추량에 포함되어 있었고, 1/2일분의 노동은 방적과정 중에 흡수되었다. 2와1/2노동일은 15원의 가치의 금량(金量)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이 10파운드의 면사의 가격은 15원이고 1파운드의 면사의 가격은 1.5원이다.
우리의 자본가는 깜짝 놀란다. 생산물의 가치가 투하된 자본의 가치와 똑같다. 투하된 가치는 증식(增殖)되지 않았고,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폐는 자본(資本)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10파운드의 면사의 가격은 15원인데, 상품시장에서 15원이 이 생산물의 형성요소들
[또는 같은 말이지만 노동과정의 요소들]에 지출되었던 것이다. 즉, 10원은 면화에, 2원은 방추에, 그리고 3원은 노동력에 지출되었던 것이다. 면사의 가치가 이들 각각보다 크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면사의 가치는 이전에 면화와 방추와 노동력 사이에 분산되어 있던 가치의 합계(合計)에 불과하며, 이와 같이 기존의 가치를 단순히 합계하는 것으로부터는 결코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주석 14: 이것은 [비농업노동은 모두 비생산적이라는] 중농주의의 기초로 되고 있는 근본명제인데, 전문적인 경제학자들도 이 명제를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딴 하나의 물건에 몇 개의 다른 물건의 가치를 가산(加算)한다"(예컨대 아마에 직포공의 생활비를 가산한다)"고 하는 방식, 즉 이를테면 각종 가치를 단 하나의 가치에 층층이 쌓아 올려 가는 방식은 그 하나의 가치를 그만큼 증대시킨다.....‘가산한다'는 용어는 제조품의 가격이 형성되는 방식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가격은 소비된 몇 개의 가치의 총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산은 증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메르시 드 라 리비에르[Mercier de la Riviere], ?정치사회의 자연적 및 본질적 질서?, p. 599).) 이제는 이 모든 가치들이 하나의 물건에 집중되어 있지만, 15원이라는 화폐액도 세 가지의 상품구매로 분열되기 전에는 역시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결과는 그 자체로서는 기이한 것이 아니다. 1파운드의 면사의 가치는 1.5원이므로 10파운드의 면사를 사자면 우리의 자본가는 상품 시장에서 15원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자본가가 자기 집을 이미 지어져 있는 채로 시장에서 사든 또는 자신을 위해 그것을 새로 짓게 하든, 어느 경우에도 집의 취득에 투하된 화폐액은 증식되지 않을 것이다.
속류경제학(俗流經濟學: vulgar economics)에 정통하고 있는 자본가는 아마 말할 것이다. "나는 나의 화폐를 더 많은 화폐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투하했던 것이다"라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여러 가지 선량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듯이, 그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돈벌이를 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주석 15: 예컨대 1844-1847년에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자본의 일부를 생산적인 사업에서 때내어 철도주식에 투기했다가 다 잃어버렸다. 또 미국의 남북전쟁 시대에는 그들은 공장을 폐쇄하고 공장노동자를 해고하면서 리퍼플의 면화거래소에서 투기를 했다.) 그는 위협적으로 말한다. 두 번 다시는 이와 같이 속지 않겠다고. 앞으로는 자신이 직접 상품을 제조하지 않고 시장에서 기성품을 사겠다고. 그러나 만약 그의 동료 자본가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면 그는 어느 시장에서 상품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화폐를 먹을 수는 없다. 그는 호소한다. "나의 절제(節制:abstinence)를 고려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15원을 아무렇게나 써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생산적으로 소비해 그것으로 면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옳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대가로 이제는 나쁜 양심 대신 좋은 면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폐퇴장자가 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에게 결코 좋은 일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금욕(禁欲)이 초래하는 나쁜 영향을 화폐퇴장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바이다. 더구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는 황제도 그 권력을 상실하는 법이다. 그의 금욕의 장점이 무엇이든, 생산과정에서 나온 생산물의 가치는 이 과정에 투입된 상품가치의 총액과 같을 뿐이기 때문에, 그의 금욕을 특별히 보상해 줄 만한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덕행(德行: virtue)의 보수는 덕행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수밖에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본가는 더욱 집요하게 주장한다. "면사는 나에게는 쓸모가 없다. 나는 그것을 판매하기 위해 생산했던 것이다"라고. 그렇다면 그는 그것을 팔면 될 것이다. 또는 더욱 간단하게,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만을 생산하면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자본가의 가족의사 매컬록(MacCulloch)이 과잉생산(過剩生産: over-production)이라는 유행병에 대한 특효약으로 그에게 써주었던 처방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아직도 완강하게 주장한다. "과연 노동자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자기의 손발만으로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가? 내가 노동자에게 재료를 대주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그것을 가지고 그것에다가 자기의 노동을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또한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빈털털이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생산수단, 나의 면화와 나의 방추로 사회를 위해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봉사를 하지 않았던가. 또한 내가 노동자들에게 생활수단까지도 공급해 주면서 봉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나는 이 모든 봉사에 대해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라고. 그러나 노동자도 또한 그를 위해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전환시킴으로써 답례를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봉사(奉仕)가아니다.(주석 16: "자랑하고 치장하고 꾸며도 좋다....그러나 준 것보다도 많이 또는 더 좋은 것을 취하는 사람은 고리대업자(高利貸業者)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이웃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해를 끼치는 사람으로서, 강도나 절도와 마찬가지다. 이웃사람에 대한 봉사와 선행이 모두 봉사와 선행은 아니다. 왜냐하면, 간통하는 남녀도 서로에게는 커다란 봉사와 희열을 주기 때문이다. 마부도 강도가 길가에서 약탈하고 라와 국민들을 습격하는 것을 방조함으로써 강도에게 크게 봉사한다. 교황예찬가들도 모든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불태워 죽이거나 학살하거나 옥 사하게 하지 않고 그래도 몇 사람은 살려주고 추방하거나 소유물만 빼앗음으로써 우리에게 크 게 봉사하고 있다. 악마까지도 자기에게 봉사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큰 봉사를 한다...요컨대 이 세상에는 커다란, 훌륭한, 일상적인 봉사와 선행으로 가득 차 있다"(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목사 여러분께, 고리대에 반대해 설교할 것?, 비텐베르크, 1540년).) 봉사(service)라는 것은 상품에 의한 봉사건 노동에 의한 봉사건 어떤 사용가치의 유용한 효과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주석 17: 나는 이 점에 대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37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봉사'라는 범주가 세이(J.b. Say)나 바스티아(F. Bastiat)와 같은 종류의 경제학자들에게 어떤 '봉사'를 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환가치(交換價値)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3원의 가치(價値)를 지불했다. 노동자는 그에게 면화에 첨가된 3원의 가치로 정확한 등가(等價)를, 즉 가치에 대해 가치를 반환했다. 지금까지 그처럼 자본을 가지고 뽐내던 우리의 친구는 이제 갑자기 [그가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처럼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말한다. "나 자신도 노동하지 않았는가? 방적공을 감시하는 노동을, 총감독이라는 노동을 하지 않았는가? 나의 이러한 노동도 역시 가치를 형성하지 않는가?"라고.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감독과 관리인은 어이없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자본가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본래의 표정을 되살린다. 그가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한 것은 모두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그런 말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따위 핑계와 속임수는 고용된 경제학 교수들에게 맡겨두고 있다. 그 자신은 실무적인 사람이므로 사업 이외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반드시 깊이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업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잘 알고 있다.
좀더 상세하게 이 문제를 고찰해 보자.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는 3원이었는데, 그 이유는 노동력 그 자체에는 1/2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매일 요구되는 생활수단은 1/2노동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력에 포함되고 있는] 과거의 노동과 [노동력이 제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노동(living labour)은, 다시 말해 노동력의 매일의 유지비와 노동력의 매일의 지출은 그 크기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양이다. 전자는 노동력의 교환가치(交煥價値)를 규정하며, 후자는 노동력의 사용가치(使用價値)를 형성한다.
노동자의 생명을 24시간 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1/2노동일이 필요하다는 사정은 결코 노동자가 하루종일 노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과정에서 노동력이 창조하는 가치는 그 크기가 서로 다르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할 때 이미 가치의 이와 같은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면사 또는 장화를 제조한다는 노동력의 유용한 성질은 자본가에게는 하나의 불가결한 조건일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가치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유용한 형태로 지출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즉, 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가 노동력으로부터 기대하는 독특한 봉사며, 그는 노동자와의 거래에서 상품교환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사실상 노동력의 판매자는 [다른 모든 상품의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실현(實現)하면서 그 사용가치를 양도(讓渡)한다. 그는 사용가치를 내어주지 않고서는 교환가치를 받을 수 없다. 노동력의 사용가치[즉, 노동 그 자체]는, 판매된 기름의 사용가치가 기름장수에게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속하지 않는다.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즉, 하루의 노동]은 그에게 속한다. 노동력은 하루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하루동안 유지하는 데는 1/2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본가는 이 사정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쾌활하게 웃은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작업장에서 6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의 노동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10파운드의 면화가 6노동시간을 흡수해 10파운드의 면사로 전환된다면, 20파운드의 면화는 12노동시간을 흡수해 20파운드의 면사로 전환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연장된 노동과정의 생산물을 고찰해 보자. 이 20파운드의 면사에는 이제 5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다. 즉, 4노동일은 소비
된 면화량과 방추량에 대상화되어 있었던 것이고, 1노동일은 방적과정 중에 면화에 의해 흡수된 것이다. 그런데 5노동일의 화폐적 표현은 30원이다. 따라서 이것은 20파운드 면사의 가격이며, 1파운드 면사의 가치는 전과 같이 1.5원이다. 그러나 방적과정에 투입된 상품들의 가치총액은 27원이고, 면사의 가치는 30원이다. 생산물의 가치는 그 생산에 투하된 가치보다 1/9만큼 증가했다. 그리하여 27원은 30원으로 되었으며 3원의 잉여가치(剩餘價値)를 낳았다. 요술은 드디어 성공했다.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
문제의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으며 상품교환의 법은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등가물이 등가물과 교환되었다. 자본가는 구매자로서 어느 상품(면화 . 방추 . 노동력)에 대해서도 그 가치대로 지불했다. 그 다음 그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가 하는 일을 했다. 즉, 그는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소비했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기도 한데, 30원의 가치가 있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생산물을 생산했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시장으로 되돌아가는데, 전에는 상품을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상품을 판매한다. 그는 면사를 1파운드당 1.5원에, 즉 그 가치대로 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유통에 던져 넣었던 것보다 3원이나 더 많이 유통으로부터 끌어낸다. 그의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이 전체 과정은 유통영역의 내부에서도 수행되고 또한 그 외부에서도 수행된다. 그것은 유통을 매개로 수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품시장에서 노동력의 구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통영역의 외부에서 수행된다고 달하는 이유는, 유통은 [생산분야에서만 이루어지는] 가치증식 과정을 준비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선의 세계에서는 만사가 최선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화폐를 [새로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 또는 노동과정의 요소로 역할하는] 상품들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죽은 물체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가치[즉, 이미 대상화된 죽은 형태의 과거 노동]를 자본[즉, 자기 자신의 증식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가치, '가슴속에 사랑의 정열로 꽉 차서' 일하기 시작하는 활기 띤 괴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제 가치창조과정(역자 주: 가치형성과정은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물의 가치로 '이전'되는 과정과 노동력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과 가치증식과정을 비교해 보면, 가치증식과정은 일정한 점 이상으로 연장된 가치창조과정(價値創造過程)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다. 만약 그 과정이 자본에 의해 지불된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에 의해 보상되는 점까지밖에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가치창조과정에 불과할 것이고, 만약 그 과정이 이 점을 넘어 계속된다면 가치증식과정으로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가치형성과정을 노동과정과 비교해 보면,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有用勞動)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생산의 운동은 질적으로-생산물의 종류, 그리고 생산과정의 목적과 내용에 따라-고찰된다. 가치형성과정에서는 이 동일한 노동과정이 오직 양적 측면에서 고찰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작업시간, 즉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계속시간(繼續時間)뿐이다. 여기에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는 상품들은 더 이상[노동력이 일정한 목적에 따라 가공하는]물적 요소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대상화된 노동의 일정량으로 간주될 뿐이다. 생산수단에 들어 있는 것이거나 노동력에 의해 첨가되는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노동은 오직 계속시간에 의해 계산될 뿐이다. 그것은 몇 시간 또는 며칠 등으로 계산된다.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 한에서만 계산에 들어간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노동력은 반드시 정상적인 조건하에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방적업에서 자동 뮬(mule)이라는 방적기계가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생산수단으로 되어 있다면, 노동자로 하여금 물레를 잡고 일하게 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에게 정상적인 품질의 면화 대신 자꾸만 끊어지는 부스러기 솜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1파운드의 면사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지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더 들어가는 초과시간(超過時間)은 가치 또는 화폐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의 대상적 요소들이 정상적인 것인가 아닌가는 노동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가에게 달려 있다. 또 하나의 조건은, 노동력 자체가 평균적인 능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력은 [그것이 사용되는 부문을 지배하는] 평균수준의 기능과 숙련과 민첩성을 보유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의 자본가는 노동시장에서 이와 같은 정상적인 질의 노동력을 구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노동력은 평균수준의 긴장도와 강도로 지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잠시라도 노동하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감시한다. 그는 노동력을 일정한 기간 구매했으므로,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는 도둑맞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끝으로-그리고 이 점에 대해 자본가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형법(刑法)을 가지고 있다-원료와 노동수단의 낭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낭비는 대상화된 노동의 쓸모없는 지출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생산물에 들어가지 않으며, 생산물의 가치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주석 18: 이것은 노예제에 의거한 생산을 더욱 비싸게 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노예제도하에서 노동자는 [고대인의 적절한 표현에 의하면] 말하는 도구이며, 반(半)정도 말하는 도구인 동물 및 말을 못하는 도구인 죽은 노동도구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노예 자신은 동물과 노동도구를 사용할 때 자기가 그것들의 동류(同類)가 아니고 인간이라는 것을 그것들이 느끼도록 만든다. 그는 동물을 학대하며 또 열정을 가지고 노동도구를 못쓰게 만듦으로써 자기가 그것들과는 다르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생산양식에서는 가장 조잡하고 가장 육중한 노동도구[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무디기 때문에 못쓰게 만들기도 어려운 노동도구]만을 사용하는 것이 경제원칙으로 되고 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멕시코만(灣)에 인접한 노예주에서는 [고랑을 만들 수는 없고 멧돼지나 두더지 모양으로 땅을 파헤치는] 고대 중국식의 쟁기만이 발견되고 있다(케언즈[J, E. Cairnes], ?노예력?, 런던, 1862년, p.46 이하 참조). 옴스테드 (Olmsted)는 자기의 저서 ?연안 노예주?(pp.46-47)에서 특히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이곳에서 본 도구들은, 말하자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자기가 임금을 지불하 는 노동자를 이처럼 괴롭히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의 것들이다. 그 도구들은 엄청나게 무겁고 무딘 것이므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도구에 비하면 적어도 10%이상 일을 힘들게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도 확신하게 되었지만, 노예들이 도구를 주의하지 않고 거칠게 취급하는 조건하에서는 더 가볍고 정교한 도구를 노예들에게 제공하더라도 이보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노동자들에게 늘 주고 있는[또 그것을 줌으로써 우리가 이득을 보는] 그러한 도구는 버지니아주의 옥수수밭에서는 [그 토지가 우리나라 밭에 비해 그 흙이 더 부드럽고 돌도 적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하루도 견뎌 내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어째서 농장에서는 말 대신 일반적으로 노새가 사용되고 있는가 라는 나의 질문에 대해, 첫째의 그리고 분명히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말은 노예들의 취급에 견디지 못해 금방 절름발이가 되던가 병신이 되는데 노새는 매질에도 견뎌 내고 가끔 한두 끼 굶겨도 그 때문에 치명적인 해는 입지 않으며, 또 비록 돌보는 것을 좀 소홀히 하거나 좀 지나치게 부리더라도 감기가 들거나 병이 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방의 창문가에 서 있으면 가축을 학대하는 모습을 거의 언제나 보게 되는데, 북부지방의 농장주라면 어느 누구라도 당장 이러한 마부를 해고시켜 버렸을 것이다. ")
상품의 분석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했는데, 이제 이 차이가 생산과정의 두 측면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자본가가 취득하는 노동이 사회적 평균 수준의 단순한 노동인가 아니면 더 복잡한 노동인가는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고도의, 복잡한 노동은 [단순한 미숙련 노동력보다 많은 양성비가 소요되며 그것의 생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이 드는] 노동력의 지출이다. 이러한 노동력은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고급 노동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로 대상화된다. 그러나 방적노동과 보석세공노동 사이의 숙련 차이가 어떻든, [보석세공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할 뿐인] 노동부분은 그가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추가적 노동부분과 질적으로는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방적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석세공에서도,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의 양적 초과(量的 超過)에 의해서만, 하나의 동일한 노동과정(한 경우에는 면사를 만들고 다른 경우에는 보석을 만든다)의 시간적 연장(時間的 延長)에 의해서만 생긴다. (주석 19: 고급 노동과 단순한 노동, '숙련노동'과 '미숙련노동'의 구분은 부분적으로는 단순한 환상에 근거한 것이거나, 적어도 [이미 오래 전부터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다만 전통적인 관습 가운데만 존속할 뿐인] 구분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노동자계급 중 어떤 계층의 절망적인 상태[즉, 이 계층은 빠른 계층과 달리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제대로 받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우연적인 사정들이 대단히 큰 역할을 함으로써 두 형태의 노동이 그 지위를 뒤바꾸는 경우까지 생긴다. 예를 들면, 노동자계급의 체력이 약해져 상대적으로 기진맥진한 곳[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한 모든 나라에서 그러하다]에서는, 근육의 힘이 더 요구되는 낮은 형태의 노동이 그보다 훨씬 더 정밀한 노동에 비해 일반적으로 더 높은 형태의 노동으로 간주되며, 더 정밀한 노동은 단순노동의 등급으로 떨어지게 된다. 예컨데 영국에서는 벽돌공의 노동이 비단직공의 노동보다 훨씬 더 높은 등급이다. 다른 한편, 면 빌로도 전모공(剪毛工:fustian-cutter)의 노동은 [비록 고도의 육체적 긴장을 요하고 매우 비위생적임에도 불구하고] 단순노동으로 취급된다. 더욱이 이른바 '숙련노동'이 일국의 노동 가운데서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랑(S. Laing)의 계산에 의하면, 잉글랜
드(및 웨일즈)에서 1,100만 명의 사람들이 단순노동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저서가 발간된 당 시의 총인구 1,800만 중에서 100만의 상류계급과 150만의 극빈자. 부랑자 . 범죄자 . 매춘부. 그 리고 465만의 중간계급을 빼면, 위에 말한 1,100만이 남는다. 그러나 그는 중간계급에 소(小)금 리생활자 . 관리 .작가 . 예술가 . 학교 교사 등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그 숫자를 증대시키기 위해 '공장노동자' 중 고액임금 취득자도 이 465만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리하여 벽돌공까지도 중간계급의 '고급노동자'로 되어 있다(랑[S. Laing], ?국민적 빈곤?, 1844년, pp. 49-52).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보통의 노동 이외에는 제공할 것이 없는 큰 계급이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 다"(J. 밀, “식민지” 의 항목,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부록?, 1831년).)
다른 한편, 어떤 가치형성과정에서도 고급 노동이 항상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환원되는 것, 예컨데 하루의 고급 노동이 X일의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환원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주석 20: "가치의 척도인 노동에 대해 말하는 경우,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특수한 종류의 노동을 의미한 다....그 노동에 대한 다른 종류의 노동의 비율은 쉽게 확정할 수 있다"(캐즈노브[J. Cazenove)] ?정치경제학개론?, 런던, 1832년, pp. 22 - 23).) 따라서 우리는 자본가가 고용하는 노동자는 단순한 사회적 평균노동을 수행한다는 가정에 의해 불필요한 조작을 생략하고 분석(分析)을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제 8 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노동과정의 여러 가지 요소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생산물의 가치형성에 참가한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구체적 내용과 목적과 기술적 성격 여하를 막론하고 노동대상에 일정한 양의 노동을 지출함으로써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한다. 다른 한편,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는 보존되어 생산물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다시 나타난다. 예컨대 면화와 방추의 가치는 면사의 가치에 재현된다. 따라서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에 이전됨으로써 보존된다. 이러한 이전은 생산수단이 생산물로 전환되는 동안, 즉 노동과정 중에 일어난다. 그것은 노동에 의해 매개된다. 그러면 어
떻게?
노동자는 동일한 시간에 이중으로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한편으로 면화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기 위해 노동하고, 다른 한편으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또는 같은 말이지만, 자기가 가공하는 면화의 가치나 자기의 노동수단인 방추의 가치를 생산물인 면사로 이전시키기 위해]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 종전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가치를 노동대상에 첨가하는 것과 종전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은 {노동자가 동일한 노동시간에 동시적으로 수행한} 전혀 다른 두 개의 결과이므로, 이와 같은 결과의 이중성(二重性)은 분명히 그의 노동의 이중성에 의해 설명될 수밖에 없다. 즉, 그의 노동은 한 쪽의 속성을 통해 가치를 창조(創造)하고, 다른 쪽의 속성을 통해 가치를 보존(保存) 또는 이전(移轉)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각 노동자는 새로운 노동시간[따라서 새로운 가치]을 첨가하는가? 그는 언제나 자기의 독특한 방식으로 생산적 노동을 함으로써 그렇게 할 따름이다. 방적공은 오직 실을 뽑음으로써만, 직포공은 오직 천을 짬으로써만, 대장장이는 쇠를 단련함으로써만 그렇게 한다. 비록 이러한 작업이 노동 일반[그리하여 새로운 가치]을 첨가한다고 하더라도, 합목적적인 노동[예컨대 방적 . 방직 . 단야(鍛冶)]에 의해서만 생산수단(면화와 방추, 면사와 직기, 쇠와 모루)은 생산물[새로운 사용가치]의 형성요소로 된다.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의 원래의 형태는 소멸되지만, 그것은 오직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위해 소멸될 뿐이다.(주석 1: “노동은 그것에 의해 소멸된 창조물 대신 새로운 창조물을 준다.” (“국민의 경제학에 관한 논문?, 런던, 1821년, p. 13).) 그런데 가치형성과정을 고찰할 때 본 바와 같이, 어떤 사용가치가 새로운 사용가치의 생산을 위해 합목적적으로 소비되는 한, 그 소비된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새로운 사용가치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로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소비된 생산수단으로부터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되는 노동시간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즉, 그것을 생산물의 가치성분으로 생산물로 이전하는]은 노동자가 노동일반(勞動一般)을 첨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첨가되는 노동의 특수한 유용성(有用性), 그것의 특수한 생산적 형태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합목적적 생산활동(방적 . 방직 . 단야)으로서의 노동은 그 손이 한 번 닿기만 함으로써 생산수단을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키고,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어 노동과정의 요소들로 전환시키며, 그것들과 결합해서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약 노동자가 수행하는 특수한 생산적 노동이 방적이 아니라면 그는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키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면화나 방추의 가치를 면사로 이전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노동자가 직업을 바꾸어 목공이 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루의 노동을 통해 그의 재료에 가치를 첨가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자기의 노동에 의해 가치를 첨가하는 것은, 그의 노동이 방적노동이나 목공노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일반,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이기 때문이며, 또 그가 일정한 가치량을 첨가하는 것은 그의 노동이 어떤 특수한 유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시간 계속되기 때문이다. 즉, 방적공의 노동은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라는 그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성질에
의해 면화나 방추의 가치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며, 방적노동이라는 그 구체적이고 유용한 성질에 의해 생산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하며 그 가치를 생산물 속에 보존한다. 이로부터 동일한 시간 안에 노동의 이중의 결과가 생긴다.
노동의 단순한 앙적(量的) 첨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며, 첨가되는 노동의 질(質)에 의해 생산수단의 원래의 가치가 생산물에 보존된다. 노동의 이중성(二重性)으로부터 생기는 이러한 이중의 효과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명백히 나타난다.
어떤 발명에 의해 방적공이 이전에는 36시간 걸려 방적하던 면화량을 이제는 6시간에 방적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의 노동은 합목적적인 유용한 생산활동으로서는 그 힘이 6배로 증가되었다. 6노동시간의 생산물은 이전의 6배[즉, 6파운드가 아니라 36파운드]로 되었다. 그러나 36파운드의 면화는 이전에 6파운드의 면화가 흡수하던 것과 같은 노동량을 흡수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1파운드의 면화에는 이전의 방법에 비해 다만 1/6의 새로운 노동이, 따라서 이전에 첨가되던 가치의 1/6만이 첨가된다. 다른 한편, 이제 생산물인 36파운드의 면사에는 이전에 비해 6배의 면화가치가 들어 있다. 6시간의 방적에서 이전의 6배의 원료가치가 보존되어 생산물로 이전된다. 물론 이때 각 1파운드의 원료에는 이전의 1/6의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지만. 이것은 분리할 수 없는 동일한 과정에서 노동이 가치를 보존한다는 속성과 가치를 창조한다는 속성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다른가를 보여주고 있다. 동일한 양의 면화를 면사로 방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길어지면 길수록 면화에 첨가되는 새로운 가치는 그만큼 더 크고, 동일한 노동시간에 방적되는 면화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산물로 이전되어 보존되는 가치는 그만큼 더 크다.
반대로 방적노동의 생산성(生産性)이 변하지 않고, 따라서 방적공이 1파운드의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키는 데 여전히 동일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면화 그 자체의 교환가치는 변해
1파운드의 면화가격이 6배로 올랐거나 1/6로 떨어졌다고 가정하자. 그 어느 경우에도 방적공은 여전히 동일한 양(量)의 면화에 동일한 노동량(勞動量), 즉 동일한 가치(價値)를 첨가할 것이며, 또 어느 경우에나 그는 동일한 시간에 여전히 동일한 양의 면사를 생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면화로부터 면사라는 생산물로 이전하는 가치는 종전에 비해 한 경우에는 6배로 되며 다른 경우에는 1/6로 된다. 노동수단의 유용성이 노동과정에서 변하지 않은 채, 노동수단의 가치가 증감하는 경우에도, 위와 동일한 결과가 생긴다.
만약 방적과정의 기술적 조건들이 변하지 않고, 또 그 생산수단의 가치에도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방적공은 여전히 동일한 노동시간에 동일한 양의 원료와 [이것들의 가치는 불변]를 소비할 것이다. 그가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가치는 그가 첨가하는 새로운 가치에 정비례한다. 2주 동안에는 그는 1주 동안에 비해 2배의 노동[즉, 2배의 가치]을 첨가하며, 또 그와 동시에 2배의 가치를 갖는 2배의 원료를 소비하고, 2배의 가치를 갖는 2배의 기계를 소모하며, 그리하여 그는 2주의 생산물에 [1주의 생산물에 보존하는] 가치의 2배를 보존한다. 주어진 불변의 생산조건 하에서는 노동과가 더 많은 가치를 첨가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가치를 이전시켜 보존한다. 그러나 그가 더 많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새로운 가치의 첨가가 [그 자신의 노동과는 독립적인] 불변의 생산조건(生産條件) 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적 의미에서는, 노동자는 언제나 새로운 가치의 첨가량에 비례해 종전의 가치를 보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면화가 1원에서 2원으로 오르든 또는 0.5원으로 떨어지든 노동자가 1시간의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면화가치는 언제나 그가 2시간의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가치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만약 노동자 자신의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이 향상되던가 저하한다면, 그는 한 시간에 이전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은 면화를 방적하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1노동시간의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면화의 가치는 이전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2노동시간에는 1노동시간에 비해 2배의 가치를 보존할 것이다.
가치는 [보조화폐에서 볼 수 있는 가치의 순전히 상징적인 표현을 도외시한다면] 사용가치로서의 물건 속에만 존재한다. (인간 자신도 노동력의 인격화(人格化)로서만 고찰한다면 하나의 자연물[비록 살아있고 의식있는 물건이지만]이고, 노동 그 자체는 노동력의 육체적 발현이다.) 그러므로 어떤 물건이 그 사용가치를 잃어버리면 그것의 가치도 또한 잃어버린다. 그러나 생산수단은 그 사용가치를 상실함과 동시에 그 가치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그 사용가치의 본래의 형태를 상실하고 생산물에서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가치에 대해서는 [자기가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사용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떤 사용가치 속에 존재하는가는 [상품의 변태에서 본 바와 같이] 아무래도 좋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듯이, 노동과정에서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물로 옮겨가는 것은 생산수단이 자기의 독자적인 사용가치(使用價値)와 함께 자기의 교환가치(交換價値)까지도 상실하는 한에서다. 생산수단은 생산수단으
로서 잃어버리는 가치만을 생산물로 넘겨준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여러 물질적 요소들은 이 점에서 동일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보일러를 가열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석탄은 바퀴의 축에 바르는 기름 등과 마찬가지로 흔적없이 사라져 버린다. 염료나 기타 보조재료들도 사라져 버리기는 하지만 생산물의 속성으로 다시 나타난다. 원료는 생산물의 실체를 형성하지만 그 형태는 변한다. 따라서 원료와 보조재료는 사용가치로서 노동과정에 들어갈 당시의 독자적인 모습을 잃어버린다. 진정한 노동수단은 이와는 다르다. 도구 . 기계 . 공장건물 . 용기 등이 노동과정에서 유용한 것은 그것들이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유지해 매일 똑같은 형태로 다시 노동과정에 들어갈 수 있을 동안 만이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동안 [즉, 노동과정에 있을 동안] 생산물에 대해 자기의 독자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도 역시 그 모습을 유지한다. 기계나 도구나 작업용 건물 등의 잔해는 [그것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생산물과는 별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제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은 노동수단이 [작업장에 들어간 날부터 폐물창고로 추방되는 날까지] 생산에 이바지한 기간 전체를 고찰한다면, 이
기간 중 그 사용가치는 완전히 소비되었고 따라서 그 교환가치는 완전히 생산물로 이전된 것을 알게 된다. 예컨대 어떤 방적기계가 10년이 되어 그 수명이 다했다면 그 기계의 총가치는 10년간의 노동과정에서 10년간의 생산물로 넘어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노동수단의 생존기간은 몇 회 반복되는 노동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노동수단도 인간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는다. 인간은 누구나 매일 24시간씩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 물론 사람을 쳐다보아 그가 얼마나 더 오래 살 것인가를 정
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러한 곤란도 생명보험회사가 평균의 이론에 의거해 인간의 수명에 관한 아주 확실하고 유리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노동수단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류의 기계가 평균적으로 얼마 동안 존속할 수 있는가는 경험상 알려져 있다. 노동과정에서 기계의 사용가치가 겨우 6일 동안만 유지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 기계는 평균해서 1노동일마다 그 사용가치의 1/6씩을 잃어가며, 따라서 그날그날의 생산물에 그 가치의 1/6을 넘겨주게 된다. 모든 노동수단의 마멸, 사용가치의 매일매일의 상실과 이에 따른 생산물로의 매일매일의 가치이전(價値移轉)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된다.
이로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의 소멸로 말미암아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물에 넘겨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생산수단이 잃어버릴 아무런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생산수단 그 자체가 인간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라면, 그것은 생산물에 아무런 가치도 넘겨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용가치(使用價値)의 형성에는 이바지하지만 교환가치(交煥價値)의 형성에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협력 없이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생산수단, 즉 토지. 바람. 물. 광석형태의 금속. 원시림의 나무 등은 모두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여기에서 우리 앞에는 또 하나의 흥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예컨대 어떤 기계의 가치가 1,000원이고, 그 기계는 1,000일 뒤에 마멸된다 고 가정하자. 이 경우 기계의 가치는 매일 1/1,000씩 생산물로 넘어간다. 그와 동시에 비록 기계의 활동력이 점차 감퇴하기는 하지만 그 기계 전체가 노동과정에서 기능하고 있다. 이로부터 노동과정의 하나의 요소인 어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는 전체적으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부분적으로만 참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 사이의 차이가 여기에서는 객체적 생산요소들에 반영되고 있다. 즉, 동일한 생산과정에서 동일한 생산수단이 노동과정의 요소로서는 전체(全體)로 계산되지만 가치형성의 요소로서는 오직 일부분(-部分)씩만 계산된다.(주석 2: 여기서는 기계. 건물 등과 같은 노동수단의 수리(修理: repair)는 문제로 삼지 않는다. 수리 중의 기계는 노동수단이 아니라 노동재료다. 즉, 그것을 써서 노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노동이 첨가되어 그 사용가치가 회복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와 같은 수리노동은 그 노동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본문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어떤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점차로 사망에 이르는 마멸이며, "그때그때의 수리로는 회복할 수 없는 종류의 마멸이며, 칼을 예로 든다면, 칼 수리공이 새로 날을 세울 가치가 없다고 말할 정도의 상태에 이르는 그러한 종류의 마멸"이다.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기계는 모든 노동과정에는 전체적으로 참가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가치형성과정에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참가한다. 우리는 다음의 문장에 나타난 개념의 혼동을 잘 알 수 있다. "리카도씨는 양말제조기를 제작할 때 첨가된 기계제작공의 노동의 일부가 예컨대 한 켤레의 양말의 가치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한 켤레의 양말을 생산한 총노동에는....기계제작공의 노동의 일부가 아니고 그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 대의 기계는 틀림없이 여러 켤레의 양말을 만들어 내기는 하지만, 그 양말들 중 어 한 켤레도 기계 전체의 참가없이 만들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의 용어논쟁에 관한 고찰, 특히 가치 및 수요공급에 관해?, 런던, 1821년, p. 54). 유별나게 자부심이 강하고 아는 체하는 이 저자가 자기의 혼동과 문제제기로부터 면책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은, 리카도나 그 전후의 어떤 경제학자도 노동의 두 측면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더욱이 가치형성에서 이 두 측면이 하는 역할를 분석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 문이다.)
다른 한편, 어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는 부분적으로 들어가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전체적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가령 면화에서 실을 뽑을 때, 115파운드의 면화에서 매일 15파운드의 낙면(落綿:waste)이 생기며, 이 낙면은 면사로 되지 못하고 오직 솜부스러기로 된다고 가정하자. 만약 이 15파운드의 낙면발생이 방적의 평균적 조건하에서는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라면, 이 15파운드의 면화의 가치도 면사의 실체로 되는 100파운드의 면화의 가치와 꼭 마찬가지로 면사의 가치에 들어간다. 100파운드의 면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15파운드의 면화의 사용가치가 솜부스러기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면화의 낭비는 면사생산의 하나의 필요조건으로 된다. 바
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의 가치를 면사로 이전시킨다. 이것은 노동과정의 모든 폐기물(廢棄物)에도 해당한다. 적어도 이 폐기물이 다시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따라서 새로운 독립적인 사용가치로 되지 않는 한. 폐기물의 사용은 맨체스터의 대규모 기계제작 공장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는 큰 기계에 의해 대패밥 모양으로 깎여진 쇠부스러기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고, 저녁때가 되면 그것이 큰 차에 실려 공장에서 제철소로 운반되어 그 다음날 다시 대량의 철로 되어 제철소에서 공장으로 돌아온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그 원래의 사용가치의 형태 속에 있는 가치를 상실할 때에만, 새로운 생산물로 가치를 이전한다. 생산수단이 노동과정에서 입을 수 있는 가치상실의 최대한도는 분명히 그것이 노동과정에 들어갈 당시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가치량[다시 말해, 그것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은 노동과정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물에 첨가할 수는 결코 없다. 어떤 노동재료. 기계. 생산수단이 아무리 유용하다 하더라도 만약 그 가치가 3,000원[이를테면 500노동일]이라면, 그것은 생산물의 가치에 결코 3,000원 이상을 첨가할 수 없다. 그것의 가치는 [그것이 생산수단으로 들어가는] 노동과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산물로 나온 {이전의} 노동과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노동과정에서는 그것은 오직 사용가치로서, 즉 유용한 속성을 가진 물건으로 역할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이 이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생산물에 아무런 가치도 넘겨주지 못할 것이다.(주석 3: 이로부터 세이(J. B. Say)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잉여가치(이자 . 이윤 . 지대)를 생산수단(토지 . 도구 . 원료)이 노동과정에서 그 사용가치를 통해 수행하는 '생산적 서비스'로부터 도출하려고 한다. 기묘한 변호론적 착상이 날 때마다 발표하는 로셔(William Roscher)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J. B. 세이가 ?정치경제학개론? 제1권 제4장에서, 일체의 비용을 공제한 뒤 정유공장이 생산한 가치는 어쨌든 새로운 가치이고, 정유공장 그 자체를 만들기 위해 수행된 노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정당하다"(?국민경제학원리?, 제3판, 1858년, p. 82, 주). 매우 정당하다! 정유공장이 생산한 '기름'은 정유공장의 건설에 지출된 노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로셔는 석유가 '천연적으로[비록 상대적으로 '적은 양이긴 하지만]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름'이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 '가치'를 '기름'과 같은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석유가 상대적으로 '적은 양으로' '천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자연)은 교환가치를 거의 만들어 내지 않는다"(같은 책, p.79). 로셔가 자연과 교환가치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마치 어리석은 처녀가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아주 조그마한 아이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이 '학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리카도학파는 자본까지도 '축적된 노동'이라고 해서 노동이라는 개념속에 포괄시킨다. 이것은 졸렬하다. 왜냐하면 사실 자본의 소유자는 분명히 그것의 단순한 생산및 보존 이상의 것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신의 향락을 절제했으며, 그리하여 그는 그 대신 예컨대 이자(利子)를 요구하는 것이다"(같은 책 p. 82). 단순한 '요구'를 '가치'의 원천으로 전환시키는 경제학의 이 '해부생리학적 방법'이야말로 얼마나 '기묘'한가!)
생산적 노동이 생산수단을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形成要素)로 전환시킴으로써 생산수단의 가치는 일종의 윤회(輪廻: metempsychosis)를 겪는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소모된 육체로부터 새로 만들어진 육체로 옮겨간다. 그러나 그 이전은 이를테면 현실적 노동의 배후에서 일어난다. 노동자는 원래의 가치를 보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노동을 첨가할 수 없으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첨가하는 노동은 반드시 특정의 유용한 형태이어야 하며, 생산물들을 새로운
생산물의 생산수단으로 사용해 그들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유용한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를 첨가하면서 가치를 보존한다는 것은 활동중의 노동력[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이 자연적 속성은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으나 자본가에게는 현존하는 자본가치의 보존이라는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주석 4: "농업의 모든 도구들 중에서 인간의 노동이야말로....농업자가 자기의 자본을 회수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이 의지하는 것이다. 다른 두 가지 물건-현재 보유하고 있는 역축과....짐수레. 쟁기. 삽 등-은 일정한 양의 인간노동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곡물부족에 관한 의견과 상세한 논의, 1795년 11월 W. 피트에게 제출한 것? , 런던, 1800년. p. 10).) 경기가 좋은 동안에는 자본가는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노동의 이 무상(無償)의 선물을 보지 못하지만, 노동과정의 잠재적인 중단, 즉 공황(恐慌)은 자본가로 하여금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주석 5: 1862년 11월 26일자 ?더 타임즈?지에는 어떤 공장주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는 자기의 방적공장에 800여명의 노동자를 고용해 매주 평균 150고리짝의 동인도(東印度) 면화나 약 130고리짝의 아메리카 면화를 소비하는 공장주였는데, 그는 자기의 공장이 조업중단으로 입게 되는 간접비용에 대해 개탄하고 있다. 그는 그 비용을 연간 6,000파운드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생산적 비용 중에는 예컨대 지대. 세금. 지방세. 보험료 그리고 1년 계약으로 고용한 관리인. 경리. 기사 등의 급료 등과 같은, 우리와는 관계없는 수많은 항목들이 들어 있다. 다음으로 때때로 공장을 따뜻하게 하거나 증기기관을 운전하는 데 필요한 석탄이나, 그밖에도 임시노동으로써 기계설비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을 150파운드로 계산하고 있다. 끝으로 그는 기계설비의 손상이라고 하면서 1,200파운드를 계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후와 자연적인 부식(腐蝕: decay)은 증기기관이 운전을 정지했다고 해서 그 작용을 중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1.200파운드라는 금액은 기계 설비가 벌써 대단히 마멸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처럼 낮게 평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생산수단에서 실제로 소모되는 것은 그 사용가치(使用價値)이고, 이 사용가치의 소비에 의해 노동은 생산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실상 생산수단의 가치(價値)는 소비되지 않는다.(주석 6: "생산적 소비라는 것은 상품의 소비가 생산과정의 일부로 되는 경우다....이러한 경우 가치의 소비(消費)는 없다"(뉴먼[S. P. Newman], ?정치경제학개요", p. 296).) 따라서 그것이 재생산된 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 가치는 보존된다. 그 가치가 보존되는 것은 노동과정에서 가치 그 자체에 어떤 조작이 가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가치가 원래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사용가치가 사라지기[비록 다른 사용가치 속으로이긴 하지만]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再現)되기는 하나, 엄밀히 말해 재생산(再生産)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되는 것은 [원래의 교환가치가 그 속에 재현되는] 새로운 사용가치(使用價値)이다.(주석 7: 아마 20판은 거듭했으리라고 생각되는 북아메리카의 어떤 개설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어떤 형태로 자본이 재현(再現)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자기의 가치를 생산물에 재현시키는 모든 가능한 생산요소를 장황하게 열거한 다음,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생존과 안락에 필요한 각종 식료품. 의복. 주택 등
그리하여 면사의 가치, 즉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결정하는 데 있어, [면화 그 자체와 소모되는 방추를 생산하는, 그리고 그 다음으로 면화와 방추로 면사를 생산하는] 여러 가지 특수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서로 분리되어 있는] 노동과정들은 동일한 하나의 노동과정의 순차적인 각각의 단계로 간주할 수 있다. 면사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은 모두 과거의 노동이다. 그리고 면사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이 마지막 과정인 방적에 지출된 노동보다 더욱 과거의 것이라는 사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한 채의 집을 짓는 데 일정한 양의 노동[예컨대 30노동일]이 필요하다면, 제30일째의 노동일이 최초의 노동일보다 29일 늦게 생산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 집에 투하된 노동시간의 총계가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재료와 노동수단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은 마치 방적 과정의 어느 초기 단계에서 [즉, 방적의 형태로 최후에 첨가된 노동 이전에] 지출한 노동인 것처럼 간주할 수 있다.
요컨대, 12원이라는 가격으로 표현되는 면화와 방추라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면사의 가치, 즉 생산물의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된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만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면화도 방추도 사용가치의 생산에 실제로 이바지해야만 한다. 우리의 경우 그것들이 면사로 되어야만 한다. 가로서는 어떤 사용가치가 그것의 담지자가되건 상관없지만, 가치의 담지자는 사용가치를 가져야만 한다. 둘째, 지출된 노동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조건 하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만약 1파운드의 면사를 뽑아내는 데 1파운드의 면화만이 필요하다면, 1파운드의 면사를 생산하는 데는 1파운드의 면화만이 소비되어야 한다. 방추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본가가 망령이 들어 철로 만든 방추 대신 금으로 만든 방추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면사의 가치에는 여전히 철제방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만이 계산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생산수단(生産手段), 즉 면화와 방추가 면사의 가치의 얼마만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그것은 바로 12원[즉, 2노동일의 체현물]이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방적공의 노동(勞動)이 면화에 첨가하는 가치부분이다.
우리는 이 노동을 이번에는 노동과정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노동과정의 경우에는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킨다는 합목적적 활동으로서만 노동을 고찰했다. 따라서 기타 사정이 동일하다면, 노동이 그 목적에 잘 맞으면 맞을수록 면사는 그만큼 더 나은 것이 생산될 것이다. 또한 방적공의 노동은 다른 종류의 생산적 노동과는 독특한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는 주관적으로는 방적이라는 특수한 목적(目的)에서,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특수한 작업방식(作業方式), 생산수단의 특수한 성질, 그리고 생산물의 특수한 사용가치(使用價値)에서 나타난다. 면화와 방추는 방적에는 필요하지만 대포 생산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방적공의 노동이 가치를 창조하는 한, 다시 말해 가치의 원천인 한, 그것은 대포의 포신(砲身)을 깎는 노동자의 노동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며,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있는 예를 가지고 말하면) 면사의 생산수단에 실현되어 있는 면화 재배자와 방추제조자의 노동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오직 이 동일성(同一性) 때문에 면화재배 . 방추제조 . 방적이 면사의 가치라는 하나의 총가치(總價値)의 단순히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부분들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이미 노동의 질 . 성질 . 내용이 아니고 오직 노동의 양(量)뿐이다. 이 양이 계산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방적노동이 단순한 노동이며, 사회적 평균노동이라고 가정하자. 이것과는 반대되는 가정을 하더라도 사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뒤에 가서 알게 될 것이다.
노동과정에서는 노동자의 노동은 끊임없이 운동(運動)의 형태로부터 정지된 존재(存存)의 형태로, 즉 노동자의 작업의 형태로부터 생산물의 형태로 전환한다. 한 시간 뒤에는 방적이라는 운동은 면사의 일정한 양으로 실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일정량의 노동[즉, 한 시간의 노동]이 면화에 첨가되었다. 우리는 방금 방적노동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노동[방적공의 생명력의 지출]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방적노동이 노동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노동력(勞動力)의 지출(支出)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방적이라는 특수한 노동(勞動)이기 때문은 아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키는 작업에서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이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정상적인 [즉, 사회의 평균적인] 생산조건 하에서 1노동시간에 a파운드의 면화가 b파운드의 면사로 바뀐f다면, 12a파운드의 면화가 12b파운드의 면사로 바뀌지 않는 한, 하루의 노동은 12노동시간으로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이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원료 생산물도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원료는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을 흡수(吸收)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사실상 이 흡수에 의해 원료는 면사로 전환되는데, 왜냐하면 노동력이 방적이라는 형태로 지출되어 원료에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산물인 면사는 이제 면화가 흡수한 노동의 계량기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1시간에 1 과2/3 파운드의 면화가 1과 2/3파운드의 면사로 바뀐다면, 10파운드의 면사는 6시간의 노동을 흡수한 것을 가리킨다. 이제 일정한[경험적으로 확정된]양의 생산물은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일정한 양의 응고된 노동시간]을 대표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일정한 시간[또는 날]의 사회적 노동의 물적 형태일 따름이다.
그 노동이 다름 아닌 방적노동이고, 그 노동의 재료가 면화이고, 그 노동의 생산물이 면사라는 사실은,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생산물[따라서 원료]이라는 사실과 꼭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가령 노동자가 방적공장이 아니라 탄광에서 일한다면 노동대상인 석탄은 천연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층에서 채굴해 낸 석탄의 일정량은 일정한 양의 흡수한 노동을 표시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노동력의 판매를 고찰할 때,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는 3원이고, 이 3원에는 6노동시간이 대상화되어 있으며, 이 노동량은 노동자의 매일 평균의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제 만약 우리의 방적공이 1노동시간에 1과2/3파운드의 면화를 1과2/3파운드의 면사(주석 13: 이곳의 숫자는 모두 임의로 가정한 것이다.)로 전환시킨다고 가정하면, 6시간에는 10파운드의 면화를 10파운드의 면사로 전환시킬 것이다. 즉, 방적과정에서 면화는 6시간의 노동을 흡수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6노동시간은 3원의 금량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이 면화에는 방적노동 그 자체에 의해 3원의 가치가 첨가된다.
이제 생산물인 10파운드의 면사의 총가치를 검토해 보자. 10파운드의 면사에는 2와1/2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다. 이 중 2일분의 노동은 소비된 면화량과 방추량에 포함되어 있었고, 1/2일분의 노동은 방적과정 중에 흡수되었다. 2와1/2노동일은 15원의 가치의 금량(金量)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이 10파운드의 면사의 가격은 15원이고 1파운드의 면사의 가격은 1.5원이다.
우리의 자본가는 깜짝 놀란다. 생산물의 가치가 투하된 자본의 가치와 똑같다. 투하된 가치는 증식(增殖)되지 않았고, 잉여가치(剩餘價値)를 생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폐는 자본(資本)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10파운드의 면사의 가격은 15원인데, 상품시장에서 15원이 이 생산물의 형성요소들
[또는 같은 말이지만 노동과정의 요소들]에 지출되었던 것이다. 즉, 10원은 면화에, 2원은 방추에, 그리고 3원은 노동력에 지출되었던 것이다. 면사의 가치가 이들 각각보다 크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면사의 가치는 이전에 면화와 방추와 노동력 사이에 분산되어 있던 가치의 합계(合計)에 불과하며, 이와 같이 기존의 가치를 단순히 합계하는 것으로부터는 결코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주석 14: 이것은 [비농업노동은 모두 비생산적이라는] 중농주의의 기초로 되고 있는 근본명제인데, 전문적인 경제학자들도 이 명제를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딴 하나의 물건에 몇 개의 다른 물건의 가치를 가산(加算)한다"(예컨대 아마에 직포공의 생활비를 가산한다)"고 하는 방식, 즉 이를테면 각종 가치를 단 하나의 가치에 층층이 쌓아 올려 가는 방식은 그 하나의 가치를 그만큼 증대시킨다.....‘가산한다'는 용어는 제조품의 가격이 형성되는 방식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가격은 소비된 몇 개의 가치의 총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산은 증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메르시 드 라 리비에르[Mercier de la Riviere], ?정치사회의 자연적 및 본질적 질서?, p. 599).) 이제는 이 모든 가치들이 하나의 물건에 집중되어 있지만, 15원이라는 화폐액도 세 가지의 상품구매로 분열되기 전에는 역시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결과는 그 자체로서는 기이한 것이 아니다. 1파운드의 면사의 가치는 1.5원이므로 10파운드의 면사를 사자면 우리의 자본가는 상품 시장에서 15원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자본가가 자기 집을 이미 지어져 있는 채로 시장에서 사든 또는 자신을 위해 그것을 새로 짓게 하든, 어느 경우에도 집의 취득에 투하된 화폐액은 증식되지 않을 것이다.
속류경제학(俗流經濟學: vulgar economics)에 정통하고 있는 자본가는 아마 말할 것이다. "나는 나의 화폐를 더 많은 화폐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투하했던 것이다"라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여러 가지 선량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듯이, 그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돈벌이를 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주석 15: 예컨대 1844-1847년에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자본의 일부를 생산적인 사업에서 때내어 철도주식에 투기했다가 다 잃어버렸다. 또 미국의 남북전쟁 시대에는 그들은 공장을 폐쇄하고 공장노동자를 해고하면서 리퍼플의 면화거래소에서 투기를 했다.) 그는 위협적으로 말한다. 두 번 다시는 이와 같이 속지 않겠다고. 앞으로는 자신이 직접 상품을 제조하지 않고 시장에서 기성품을 사겠다고. 그러나 만약 그의 동료 자본가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면 그는 어느 시장에서 상품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화폐를 먹을 수는 없다. 그는 호소한다. "나의 절제(節制:abstinence)를 고려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15원을 아무렇게나 써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생산적으로 소비해 그것으로 면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옳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대가로 이제는 나쁜 양심 대신 좋은 면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폐퇴장자가 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에게 결코 좋은 일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금욕(禁欲)이 초래하는 나쁜 영향을 화폐퇴장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바이다. 더구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는 황제도 그 권력을 상실하는 법이다. 그의 금욕의 장점이 무엇이든, 생산과정에서 나온 생산물의 가치는 이 과정에 투입된 상품가치의 총액과 같을 뿐이기 때문에, 그의 금욕을 특별히 보상해 줄 만한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덕행(德行: virtue)의 보수는 덕행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수밖에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본가는 더욱 집요하게 주장한다. "면사는 나에게는 쓸모가 없다. 나는 그것을 판매하기 위해 생산했던 것이다"라고. 그렇다면 그는 그것을 팔면 될 것이다. 또는 더욱 간단하게,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만을 생산하면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자본가의 가족의사 매컬록(MacCulloch)이 과잉생산(過剩生産: over-production)이라는 유행병에 대한 특효약으로 그에게 써주었던 처방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아직도 완강하게 주장한다. "과연 노동자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자기의 손발만으로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가? 내가 노동자에게 재료를 대주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그것을 가지고 그것에다가 자기의 노동을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또한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빈털털이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생산수단, 나의 면화와 나의 방추로 사회를 위해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봉사를 하지 않았던가. 또한 내가 노동자들에게 생활수단까지도 공급해 주면서 봉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나는 이 모든 봉사에 대해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인가?"라고. 그러나 노동자도 또한 그를 위해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전환시킴으로써 답례를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봉사(奉仕)가아니다.(주석 16: "자랑하고 치장하고 꾸며도 좋다....그러나 준 것보다도 많이 또는 더 좋은 것을 취하는 사람은 고리대업자(高利貸業者)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이웃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해를 끼치는 사람으로서, 강도나 절도와 마찬가지다. 이웃사람에 대한 봉사와 선행이 모두 봉사와 선행은 아니다. 왜냐하면, 간통하는 남녀도 서로에게는 커다란 봉사와 희열을 주기 때문이다. 마부도 강도가 길가에서 약탈하고 라와 국민들을 습격하는 것을 방조함으로써 강도에게 크게 봉사한다. 교황예찬가들도 모든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불태워 죽이거나 학살하거나 옥 사하게 하지 않고 그래도 몇 사람은 살려주고 추방하거나 소유물만 빼앗음으로써 우리에게 크 게 봉사하고 있다. 악마까지도 자기에게 봉사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큰 봉사를 한다...요컨대 이 세상에는 커다란, 훌륭한, 일상적인 봉사와 선행으로 가득 차 있다"(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목사 여러분께, 고리대에 반대해 설교할 것?, 비텐베르크, 1540년).) 봉사(service)라는 것은 상품에 의한 봉사건 노동에 의한 봉사건 어떤 사용가치의 유용한 효과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주석 17: 나는 이 점에 대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37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봉사'라는 범주가 세이(J.b. Say)나 바스티아(F. Bastiat)와 같은 종류의 경제학자들에게 어떤 '봉사'를 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환가치(交換價値)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3원의 가치(價値)를 지불했다. 노동자는 그에게 면화에 첨가된 3원의 가치로 정확한 등가(等價)를, 즉 가치에 대해 가치를 반환했다. 지금까지 그처럼 자본을 가지고 뽐내던 우리의 친구는 이제 갑자기 [그가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처럼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말한다. "나 자신도 노동하지 않았는가? 방적공을 감시하는 노동을, 총감독이라는 노동을 하지 않았는가? 나의 이러한 노동도 역시 가치를 형성하지 않는가?"라고.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감독과 관리인은 어이없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자본가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본래의 표정을 되살린다. 그가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한 것은 모두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그런 말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따위 핑계와 속임수는 고용된 경제학 교수들에게 맡겨두고 있다. 그 자신은 실무적인 사람이므로 사업 이외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반드시 깊이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업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잘 알고 있다.
좀더 상세하게 이 문제를 고찰해 보자.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는 3원이었는데, 그 이유는 노동력 그 자체에는 1/2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매일 요구되는 생활수단은 1/2노동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력에 포함되고 있는] 과거의 노동과 [노동력이 제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노동(living labour)은, 다시 말해 노동력의 매일의 유지비와 노동력의 매일의 지출은 그 크기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양이다. 전자는 노동력의 교환가치(交煥價値)를 규정하며, 후자는 노동력의 사용가치(使用價値)를 형성한다.
노동자의 생명을 24시간 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1/2노동일이 필요하다는 사정은 결코 노동자가 하루종일 노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과정에서 노동력이 창조하는 가치는 그 크기가 서로 다르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할 때 이미 가치의 이와 같은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면사 또는 장화를 제조한다는 노동력의 유용한 성질은 자본가에게는 하나의 불가결한 조건일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가치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유용한 형태로 지출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즉, 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가 노동력으로부터 기대하는 독특한 봉사며, 그는 노동자와의 거래에서 상품교환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사실상 노동력의 판매자는 [다른 모든 상품의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실현(實現)하면서 그 사용가치를 양도(讓渡)한다. 그는 사용가치를 내어주지 않고서는 교환가치를 받을 수 없다. 노동력의 사용가치[즉, 노동 그 자체]는, 판매된 기름의 사용가치가 기름장수에게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속하지 않는다.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즉, 하루의 노동]은 그에게 속한다. 노동력은 하루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하루동안 유지하는 데는 1/2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의 사용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의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본가는 이 사정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쾌활하게 웃은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작업장에서 6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의 노동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10파운드의 면화가 6노동시간을 흡수해 10파운드의 면사로 전환된다면, 20파운드의 면화는 12노동시간을 흡수해 20파운드의 면사로 전환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연장된 노동과정의 생산물을 고찰해 보자. 이 20파운드의 면사에는 이제 5노동일이 대상화되어 있다. 즉, 4노동일은 소비
된 면화량과 방추량에 대상화되어 있었던 것이고, 1노동일은 방적과정 중에 면화에 의해 흡수된 것이다. 그런데 5노동일의 화폐적 표현은 30원이다. 따라서 이것은 20파운드 면사의 가격이며, 1파운드 면사의 가치는 전과 같이 1.5원이다. 그러나 방적과정에 투입된 상품들의 가치총액은 27원이고, 면사의 가치는 30원이다. 생산물의 가치는 그 생산에 투하된 가치보다 1/9만큼 증가했다. 그리하여 27원은 30원으로 되었으며 3원의 잉여가치(剩餘價値)를 낳았다. 요술은 드디어 성공했다.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
문제의 모든 조건은 충족되었으며 상품교환의 법은 조금도 침해되지 않았다. 등가물이 등가물과 교환되었다. 자본가는 구매자로서 어느 상품(면화 . 방추 . 노동력)에 대해서도 그 가치대로 지불했다. 그 다음 그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자가 하는 일을 했다. 즉, 그는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소비했다.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기도 한데, 30원의 가치가 있는 20파운드의 면사라는 생산물을 생산했다. 여기에서 자본가는 시장으로 되돌아가는데, 전에는 상품을 구매했지만 이번에는 상품을 판매한다. 그는 면사를 1파운드당 1.5원에, 즉 그 가치대로 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유통에 던져 넣었던 것보다 3원이나 더 많이 유통으로부터 끌어낸다. 그의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이 전체 과정은 유통영역의 내부에서도 수행되고 또한 그 외부에서도 수행된다. 그것은 유통을 매개로 수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품시장에서 노동력의 구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통영역의 외부에서 수행된다고 달하는 이유는, 유통은 [생산분야에서만 이루어지는] 가치증식 과정을 준비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선의 세계에서는 만사가 최선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화폐를 [새로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 또는 노동과정의 요소로 역할하는] 상품들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죽은 물체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가치[즉, 이미 대상화된 죽은 형태의 과거 노동]를 자본[즉, 자기 자신의 증식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가치, '가슴속에 사랑의 정열로 꽉 차서' 일하기 시작하는 활기 띤 괴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제 가치창조과정(역자 주: 가치형성과정은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물의 가치로 '이전'되는 과정과 노동력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과 가치증식과정을 비교해 보면, 가치증식과정은 일정한 점 이상으로 연장된 가치창조과정(價値創造過程)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다. 만약 그 과정이 자본에 의해 지불된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에 의해 보상되는 점까지밖에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가치창조과정에 불과할 것이고, 만약 그 과정이 이 점을 넘어 계속된다면 가치증식과정으로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가치형성과정을 노동과정과 비교해 보면,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有用勞動)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생산의 운동은 질적으로-생산물의 종류, 그리고 생산과정의 목적과 내용에 따라-고찰된다. 가치형성과정에서는 이 동일한 노동과정이 오직 양적 측면에서 고찰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작업시간, 즉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계속시간(繼續時間)뿐이다. 여기에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는 상품들은 더 이상[노동력이 일정한 목적에 따라 가공하는]물적 요소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대상화된 노동의 일정량으로 간주될 뿐이다. 생산수단에 들어 있는 것이거나 노동력에 의해 첨가되는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노동은 오직 계속시간에 의해 계산될 뿐이다. 그것은 몇 시간 또는 며칠 등으로 계산된다.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 한에서만 계산에 들어간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노동력은 반드시 정상적인 조건하에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방적업에서 자동 뮬(mule)이라는 방적기계가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생산수단으로 되어 있다면, 노동자로 하여금 물레를 잡고 일하게 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에게 정상적인 품질의 면화 대신 자꾸만 끊어지는 부스러기 솜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1파운드의 면사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지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더 들어가는 초과시간(超過時間)은 가치 또는 화폐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의 대상적 요소들이 정상적인 것인가 아닌가는 노동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가에게 달려 있다. 또 하나의 조건은, 노동력 자체가 평균적인 능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력은 [그것이 사용되는 부문을 지배하는] 평균수준의 기능과 숙련과 민첩성을 보유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의 자본가는 노동시장에서 이와 같은 정상적인 질의 노동력을 구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노동력은 평균수준의 긴장도와 강도로 지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잠시라도 노동하지 않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감시한다. 그는 노동력을 일정한 기간 구매했으므로,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는 도둑맞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끝으로-그리고 이 점에 대해 자본가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형법(刑法)을 가지고 있다-원료와 노동수단의 낭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낭비는 대상화된 노동의 쓸모없는 지출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생산물에 들어가지 않으며, 생산물의 가치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주석 18: 이것은 노예제에 의거한 생산을 더욱 비싸게 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노예제도하에서 노동자는 [고대인의 적절한 표현에 의하면] 말하는 도구이며, 반(半)정도 말하는 도구인 동물 및 말을 못하는 도구인 죽은 노동도구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노예 자신은 동물과 노동도구를 사용할 때 자기가 그것들의 동류(同類)가 아니고 인간이라는 것을 그것들이 느끼도록 만든다. 그는 동물을 학대하며 또 열정을 가지고 노동도구를 못쓰게 만듦으로써 자기가 그것들과는 다르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생산양식에서는 가장 조잡하고 가장 육중한 노동도구[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무디기 때문에 못쓰게 만들기도 어려운 노동도구]만을 사용하는 것이 경제원칙으로 되고 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멕시코만(灣)에 인접한 노예주에서는 [고랑을 만들 수는 없고 멧돼지나 두더지 모양으로 땅을 파헤치는] 고대 중국식의 쟁기만이 발견되고 있다(케언즈[J, E. Cairnes], ?노예력?, 런던, 1862년, p.46 이하 참조). 옴스테드 (Olmsted)는 자기의 저서 ?연안 노예주?(pp.46-47)에서 특히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이곳에서 본 도구들은, 말하자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자기가 임금을 지불하 는 노동자를 이처럼 괴롭히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의 것들이다. 그 도구들은 엄청나게 무겁고 무딘 것이므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도구에 비하면 적어도 10%이상 일을 힘들게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도 확신하게 되었지만, 노예들이 도구를 주의하지 않고 거칠게 취급하는 조건하에서는 더 가볍고 정교한 도구를 노예들에게 제공하더라도 이보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노동자들에게 늘 주고 있는[또 그것을 줌으로써 우리가 이득을 보는] 그러한 도구는 버지니아주의 옥수수밭에서는 [그 토지가 우리나라 밭에 비해 그 흙이 더 부드럽고 돌도 적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하루도 견뎌 내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어째서 농장에서는 말 대신 일반적으로 노새가 사용되고 있는가 라는 나의 질문에 대해, 첫째의 그리고 분명히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말은 노예들의 취급에 견디지 못해 금방 절름발이가 되던가 병신이 되는데 노새는 매질에도 견뎌 내고 가끔 한두 끼 굶겨도 그 때문에 치명적인 해는 입지 않으며, 또 비록 돌보는 것을 좀 소홀히 하거나 좀 지나치게 부리더라도 감기가 들거나 병이 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방의 창문가에 서 있으면 가축을 학대하는 모습을 거의 언제나 보게 되는데, 북부지방의 농장주라면 어느 누구라도 당장 이러한 마부를 해고시켜 버렸을 것이다. ")
상품의 분석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했는데, 이제 이 차이가 생산과정의 두 측면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자본가가 취득하는 노동이 사회적 평균 수준의 단순한 노동인가 아니면 더 복잡한 노동인가는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고도의, 복잡한 노동은 [단순한 미숙련 노동력보다 많은 양성비가 소요되며 그것의 생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이 드는] 노동력의 지출이다. 이러한 노동력은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고급 노동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로 대상화된다. 그러나 방적노동과 보석세공노동 사이의 숙련 차이가 어떻든, [보석세공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할 뿐인] 노동부분은 그가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추가적 노동부분과 질적으로는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방적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석세공에서도,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의 양적 초과(量的 超過)에 의해서만, 하나의 동일한 노동과정(한 경우에는 면사를 만들고 다른 경우에는 보석을 만든다)의 시간적 연장(時間的 延長)에 의해서만 생긴다. (주석 19: 고급 노동과 단순한 노동, '숙련노동'과 '미숙련노동'의 구분은 부분적으로는 단순한 환상에 근거한 것이거나, 적어도 [이미 오래 전부터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다만 전통적인 관습 가운데만 존속할 뿐인] 구분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노동자계급 중 어떤 계층의 절망적인 상태[즉, 이 계층은 빠른 계층과 달리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제대로 받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우연적인 사정들이 대단히 큰 역할을 함으로써 두 형태의 노동이 그 지위를 뒤바꾸는 경우까지 생긴다. 예를 들면, 노동자계급의 체력이 약해져 상대적으로 기진맥진한 곳[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한 모든 나라에서 그러하다]에서는, 근육의 힘이 더 요구되는 낮은 형태의 노동이 그보다 훨씬 더 정밀한 노동에 비해 일반적으로 더 높은 형태의 노동으로 간주되며, 더 정밀한 노동은 단순노동의 등급으로 떨어지게 된다. 예컨데 영국에서는 벽돌공의 노동이 비단직공의 노동보다 훨씬 더 높은 등급이다. 다른 한편, 면 빌로도 전모공(剪毛工:fustian-cutter)의 노동은 [비록 고도의 육체적 긴장을 요하고 매우 비위생적임에도 불구하고] 단순노동으로 취급된다. 더욱이 이른바 '숙련노동'이 일국의 노동 가운데서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랑(S. Laing)의 계산에 의하면, 잉글랜
드(및 웨일즈)에서 1,100만 명의 사람들이 단순노동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저서가 발간된 당 시의 총인구 1,800만 중에서 100만의 상류계급과 150만의 극빈자. 부랑자 . 범죄자 . 매춘부. 그 리고 465만의 중간계급을 빼면, 위에 말한 1,100만이 남는다. 그러나 그는 중간계급에 소(小)금 리생활자 . 관리 .작가 . 예술가 . 학교 교사 등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그 숫자를 증대시키기 위해 '공장노동자' 중 고액임금 취득자도 이 465만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리하여 벽돌공까지도 중간계급의 '고급노동자'로 되어 있다(랑[S. Laing], ?국민적 빈곤?, 1844년, pp. 49-52).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보통의 노동 이외에는 제공할 것이 없는 큰 계급이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 다"(J. 밀, “식민지” 의 항목,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부록?, 1831년).)
다른 한편, 어떤 가치형성과정에서도 고급 노동이 항상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환원되는 것, 예컨데 하루의 고급 노동이 X일의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환원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주석 20: "가치의 척도인 노동에 대해 말하는 경우,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특수한 종류의 노동을 의미한 다....그 노동에 대한 다른 종류의 노동의 비율은 쉽게 확정할 수 있다"(캐즈노브[J. Cazenove)] ?정치경제학개론?, 런던, 1832년, pp. 22 - 23).) 따라서 우리는 자본가가 고용하는 노동자는 단순한 사회적 평균노동을 수행한다는 가정에 의해 불필요한 조작을 생략하고 분석(分析)을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제 8 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노동과정의 여러 가지 요소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생산물의 가치형성에 참가한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구체적 내용과 목적과 기술적 성격 여하를 막론하고 노동대상에 일정한 양의 노동을 지출함으로써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한다. 다른 한편,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는 보존되어 생산물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다시 나타난다. 예컨대 면화와 방추의 가치는 면사의 가치에 재현된다. 따라서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에 이전됨으로써 보존된다. 이러한 이전은 생산수단이 생산물로 전환되는 동안, 즉 노동과정 중에 일어난다. 그것은 노동에 의해 매개된다. 그러면 어
떻게?
노동자는 동일한 시간에 이중으로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한편으로 면화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기 위해 노동하고, 다른 한편으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또는 같은 말이지만, 자기가 가공하는 면화의 가치나 자기의 노동수단인 방추의 가치를 생산물인 면사로 이전시키기 위해]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 종전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가치를 노동대상에 첨가하는 것과 종전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은 {노동자가 동일한 노동시간에 동시적으로 수행한} 전혀 다른 두 개의 결과이므로, 이와 같은 결과의 이중성(二重性)은 분명히 그의 노동의 이중성에 의해 설명될 수밖에 없다. 즉, 그의 노동은 한 쪽의 속성을 통해 가치를 창조(創造)하고, 다른 쪽의 속성을 통해 가치를 보존(保存) 또는 이전(移轉)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각 노동자는 새로운 노동시간[따라서 새로운 가치]을 첨가하는가? 그는 언제나 자기의 독특한 방식으로 생산적 노동을 함으로써 그렇게 할 따름이다. 방적공은 오직 실을 뽑음으로써만, 직포공은 오직 천을 짬으로써만, 대장장이는 쇠를 단련함으로써만 그렇게 한다. 비록 이러한 작업이 노동 일반[그리하여 새로운 가치]을 첨가한다고 하더라도, 합목적적인 노동[예컨대 방적 . 방직 . 단야(鍛冶)]에 의해서만 생산수단(면화와 방추, 면사와 직기, 쇠와 모루)은 생산물[새로운 사용가치]의 형성요소로 된다. 생산수단의 사용가치의 원래의 형태는 소멸되지만, 그것은 오직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위해 소멸될 뿐이다.(주석 1: “노동은 그것에 의해 소멸된 창조물 대신 새로운 창조물을 준다.” (“국민의 경제학에 관한 논문?, 런던, 1821년, p. 13).) 그런데 가치형성과정을 고찰할 때 본 바와 같이, 어떤 사용가치가 새로운 사용가치의 생산을 위해 합목적적으로 소비되는 한, 그 소비된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새로운 사용가치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로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소비된 생산수단으로부터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되는 노동시간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즉, 그것을 생산물의 가치성분으로 생산물로 이전하는]은 노동자가 노동일반(勞動一般)을 첨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첨가되는 노동의 특수한 유용성(有用性), 그것의 특수한 생산적 형태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합목적적 생산활동(방적 . 방직 . 단야)으로서의 노동은 그 손이 한 번 닿기만 함으로써 생산수단을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키고,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어 노동과정의 요소들로 전환시키며, 그것들과 결합해서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약 노동자가 수행하는 특수한 생산적 노동이 방적이 아니라면 그는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키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면화나 방추의 가치를 면사로 이전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노동자가 직업을 바꾸어 목공이 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루의 노동을 통해 그의 재료에 가치를 첨가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자기의 노동에 의해 가치를 첨가하는 것은, 그의 노동이 방적노동이나 목공노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일반,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이기 때문이며, 또 그가 일정한 가치량을 첨가하는 것은 그의 노동이 어떤 특수한 유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시간 계속되기 때문이다. 즉, 방적공의 노동은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라는 그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성질에
의해 면화나 방추의 가치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며, 방적노동이라는 그 구체적이고 유용한 성질에 의해 생산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하며 그 가치를 생산물 속에 보존한다. 이로부터 동일한 시간 안에 노동의 이중의 결과가 생긴다.
노동의 단순한 앙적(量的) 첨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며, 첨가되는 노동의 질(質)에 의해 생산수단의 원래의 가치가 생산물에 보존된다. 노동의 이중성(二重性)으로부터 생기는 이러한 이중의 효과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명백히 나타난다.
어떤 발명에 의해 방적공이 이전에는 36시간 걸려 방적하던 면화량을 이제는 6시간에 방적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의 노동은 합목적적인 유용한 생산활동으로서는 그 힘이 6배로 증가되었다. 6노동시간의 생산물은 이전의 6배[즉, 6파운드가 아니라 36파운드]로 되었다. 그러나 36파운드의 면화는 이전에 6파운드의 면화가 흡수하던 것과 같은 노동량을 흡수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1파운드의 면화에는 이전의 방법에 비해 다만 1/6의 새로운 노동이, 따라서 이전에 첨가되던 가치의 1/6만이 첨가된다. 다른 한편, 이제 생산물인 36파운드의 면사에는 이전에 비해 6배의 면화가치가 들어 있다. 6시간의 방적에서 이전의 6배의 원료가치가 보존되어 생산물로 이전된다. 물론 이때 각 1파운드의 원료에는 이전의 1/6의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지만. 이것은 분리할 수 없는 동일한 과정에서 노동이 가치를 보존한다는 속성과 가치를 창조한다는 속성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다른가를 보여주고 있다. 동일한 양의 면화를 면사로 방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길어지면 길수록 면화에 첨가되는 새로운 가치는 그만큼 더 크고, 동일한 노동시간에 방적되는 면화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산물로 이전되어 보존되는 가치는 그만큼 더 크다.
반대로 방적노동의 생산성(生産性)이 변하지 않고, 따라서 방적공이 1파운드의 면화를 면사로 전환시키는 데 여전히 동일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면화 그 자체의 교환가치는 변해
1파운드의 면화가격이 6배로 올랐거나 1/6로 떨어졌다고 가정하자. 그 어느 경우에도 방적공은 여전히 동일한 양(量)의 면화에 동일한 노동량(勞動量), 즉 동일한 가치(價値)를 첨가할 것이며, 또 어느 경우에나 그는 동일한 시간에 여전히 동일한 양의 면사를 생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면화로부터 면사라는 생산물로 이전하는 가치는 종전에 비해 한 경우에는 6배로 되며 다른 경우에는 1/6로 된다. 노동수단의 유용성이 노동과정에서 변하지 않은 채, 노동수단의 가치가 증감하는 경우에도, 위와 동일한 결과가 생긴다.
만약 방적과정의 기술적 조건들이 변하지 않고, 또 그 생산수단의 가치에도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방적공은 여전히 동일한 노동시간에 동일한 양의 원료와 [이것들의 가치는 불변]를 소비할 것이다. 그가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가치는 그가 첨가하는 새로운 가치에 정비례한다. 2주 동안에는 그는 1주 동안에 비해 2배의 노동[즉, 2배의 가치]을 첨가하며, 또 그와 동시에 2배의 가치를 갖는 2배의 원료를 소비하고, 2배의 가치를 갖는 2배의 기계를 소모하며, 그리하여 그는 2주의 생산물에 [1주의 생산물에 보존하는] 가치의 2배를 보존한다. 주어진 불변의 생산조건 하에서는 노동과가 더 많은 가치를 첨가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가치를 이전시켜 보존한다. 그러나 그가 더 많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새로운 가치의 첨가가 [그 자신의 노동과는 독립적인] 불변의 생산조건(生産條件) 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적 의미에서는, 노동자는 언제나 새로운 가치의 첨가량에 비례해 종전의 가치를 보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면화가 1원에서 2원으로 오르든 또는 0.5원으로 떨어지든 노동자가 1시간의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면화가치는 언제나 그가 2시간의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가치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만약 노동자 자신의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이 향상되던가 저하한다면, 그는 한 시간에 이전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은 면화를 방적하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1노동시간의 생산물 가운데 보존하는 면화의 가치는 이전보다 더 많거나 더 적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2노동시간에는 1노동시간에 비해 2배의 가치를 보존할 것이다.
가치는 [보조화폐에서 볼 수 있는 가치의 순전히 상징적인 표현을 도외시한다면] 사용가치로서의 물건 속에만 존재한다. (인간 자신도 노동력의 인격화(人格化)로서만 고찰한다면 하나의 자연물[비록 살아있고 의식있는 물건이지만]이고, 노동 그 자체는 노동력의 육체적 발현이다.) 그러므로 어떤 물건이 그 사용가치를 잃어버리면 그것의 가치도 또한 잃어버린다. 그러나 생산수단은 그 사용가치를 상실함과 동시에 그 가치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그 사용가치의 본래의 형태를 상실하고 생산물에서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가치에 대해서는 [자기가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사용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떤 사용가치 속에 존재하는가는 [상품의 변태에서 본 바와 같이] 아무래도 좋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듯이, 노동과정에서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물로 옮겨가는 것은 생산수단이 자기의 독자적인 사용가치(使用價値)와 함께 자기의 교환가치(交換價値)까지도 상실하는 한에서다. 생산수단은 생산수단으
로서 잃어버리는 가치만을 생산물로 넘겨준다. 그러나 노동과정의 여러 물질적 요소들은 이 점에서 동일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보일러를 가열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석탄은 바퀴의 축에 바르는 기름 등과 마찬가지로 흔적없이 사라져 버린다. 염료나 기타 보조재료들도 사라져 버리기는 하지만 생산물의 속성으로 다시 나타난다. 원료는 생산물의 실체를 형성하지만 그 형태는 변한다. 따라서 원료와 보조재료는 사용가치로서 노동과정에 들어갈 당시의 독자적인 모습을 잃어버린다. 진정한 노동수단은 이와는 다르다. 도구 . 기계 . 공장건물 . 용기 등이 노동과정에서 유용한 것은 그것들이 자기의 본래의 모습을 유지해 매일 똑같은 형태로 다시 노동과정에 들어갈 수 있을 동안 만이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동안 [즉, 노동과정에 있을 동안] 생산물에 대해 자기의 독자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도 역시 그 모습을 유지한다. 기계나 도구나 작업용 건물 등의 잔해는 [그것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생산물과는 별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제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은 노동수단이 [작업장에 들어간 날부터 폐물창고로 추방되는 날까지] 생산에 이바지한 기간 전체를 고찰한다면, 이
기간 중 그 사용가치는 완전히 소비되었고 따라서 그 교환가치는 완전히 생산물로 이전된 것을 알게 된다. 예컨대 어떤 방적기계가 10년이 되어 그 수명이 다했다면 그 기계의 총가치는 10년간의 노동과정에서 10년간의 생산물로 넘어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노동수단의 생존기간은 몇 회 반복되는 노동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노동수단도 인간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는다. 인간은 누구나 매일 24시간씩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 물론 사람을 쳐다보아 그가 얼마나 더 오래 살 것인가를 정
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러한 곤란도 생명보험회사가 평균의 이론에 의거해 인간의 수명에 관한 아주 확실하고 유리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노동수단도 마찬가지다. 어떤 종류의 기계가 평균적으로 얼마 동안 존속할 수 있는가는 경험상 알려져 있다. 노동과정에서 기계의 사용가치가 겨우 6일 동안만 유지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 기계는 평균해서 1노동일마다 그 사용가치의 1/6씩을 잃어가며, 따라서 그날그날의 생산물에 그 가치의 1/6을 넘겨주게 된다. 모든 노동수단의 마멸, 사용가치의 매일매일의 상실과 이에 따른 생산물로의 매일매일의 가치이전(價値移轉)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계산된다.
이로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의 소멸로 말미암아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물에 넘겨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생산수단이 잃어버릴 아무런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생산수단 그 자체가 인간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라면, 그것은 생산물에 아무런 가치도 넘겨주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용가치(使用價値)의 형성에는 이바지하지만 교환가치(交煥價値)의 형성에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협력 없이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생산수단, 즉 토지. 바람. 물. 광석형태의 금속. 원시림의 나무 등은 모두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여기에서 우리 앞에는 또 하나의 흥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예컨대 어떤 기계의 가치가 1,000원이고, 그 기계는 1,000일 뒤에 마멸된다 고 가정하자. 이 경우 기계의 가치는 매일 1/1,000씩 생산물로 넘어간다. 그와 동시에 비록 기계의 활동력이 점차 감퇴하기는 하지만 그 기계 전체가 노동과정에서 기능하고 있다. 이로부터 노동과정의 하나의 요소인 어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는 전체적으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부분적으로만 참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 사이의 차이가 여기에서는 객체적 생산요소들에 반영되고 있다. 즉, 동일한 생산과정에서 동일한 생산수단이 노동과정의 요소로서는 전체(全體)로 계산되지만 가치형성의 요소로서는 오직 일부분(-部分)씩만 계산된다.(주석 2: 여기서는 기계. 건물 등과 같은 노동수단의 수리(修理: repair)는 문제로 삼지 않는다. 수리 중의 기계는 노동수단이 아니라 노동재료다. 즉, 그것을 써서 노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노동이 첨가되어 그 사용가치가 회복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와 같은 수리노동은 그 노동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본문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어떤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점차로 사망에 이르는 마멸이며, "그때그때의 수리로는 회복할 수 없는 종류의 마멸이며, 칼을 예로 든다면, 칼 수리공이 새로 날을 세울 가치가 없다고 말할 정도의 상태에 이르는 그러한 종류의 마멸"이다.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기계는 모든 노동과정에는 전체적으로 참가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가치형성과정에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참가한다. 우리는 다음의 문장에 나타난 개념의 혼동을 잘 알 수 있다. "리카도씨는 양말제조기를 제작할 때 첨가된 기계제작공의 노동의 일부가 예컨대 한 켤레의 양말의 가치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한 켤레의 양말을 생산한 총노동에는....기계제작공의 노동의 일부가 아니고 그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 대의 기계는 틀림없이 여러 켤레의 양말을 만들어 내기는 하지만, 그 양말들 중 어 한 켤레도 기계 전체의 참가없이 만들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의 용어논쟁에 관한 고찰, 특히 가치 및 수요공급에 관해?, 런던, 1821년, p. 54). 유별나게 자부심이 강하고 아는 체하는 이 저자가 자기의 혼동과 문제제기로부터 면책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은, 리카도나 그 전후의 어떤 경제학자도 노동의 두 측면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더욱이 가치형성에서 이 두 측면이 하는 역할를 분석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 문이다.)
다른 한편, 어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는 부분적으로 들어가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전체적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가령 면화에서 실을 뽑을 때, 115파운드의 면화에서 매일 15파운드의 낙면(落綿:waste)이 생기며, 이 낙면은 면사로 되지 못하고 오직 솜부스러기로 된다고 가정하자. 만약 이 15파운드의 낙면발생이 방적의 평균적 조건하에서는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라면, 이 15파운드의 면화의 가치도 면사의 실체로 되는 100파운드의 면화의 가치와 꼭 마찬가지로 면사의 가치에 들어간다. 100파운드의 면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15파운드의 면화의 사용가치가 솜부스러기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면화의 낭비는 면사생산의 하나의 필요조건으로 된다. 바
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의 가치를 면사로 이전시킨다. 이것은 노동과정의 모든 폐기물(廢棄物)에도 해당한다. 적어도 이 폐기물이 다시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따라서 새로운 독립적인 사용가치로 되지 않는 한. 폐기물의 사용은 맨체스터의 대규모 기계제작 공장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는 큰 기계에 의해 대패밥 모양으로 깎여진 쇠부스러기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고, 저녁때가 되면 그것이 큰 차에 실려 공장에서 제철소로 운반되어 그 다음날 다시 대량의 철로 되어 제철소에서 공장으로 돌아온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그 원래의 사용가치의 형태 속에 있는 가치를 상실할 때에만, 새로운 생산물로 가치를 이전한다. 생산수단이 노동과정에서 입을 수 있는 가치상실의 최대한도는 분명히 그것이 노동과정에 들어갈 당시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가치량[다시 말해, 그것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은 노동과정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물에 첨가할 수는 결코 없다. 어떤 노동재료. 기계. 생산수단이 아무리 유용하다 하더라도 만약 그 가치가 3,000원[이를테면 500노동일]이라면, 그것은 생산물의 가치에 결코 3,000원 이상을 첨가할 수 없다. 그것의 가치는 [그것이 생산수단으로 들어가는] 노동과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산물로 나온 {이전의} 노동과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노동과정에서는 그것은 오직 사용가치로서, 즉 유용한 속성을 가진 물건으로 역할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것이 이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생산물에 아무런 가치도 넘겨주지 못할 것이다.(주석 3: 이로부터 세이(J. B. Say)의 어리석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잉여가치(이자 . 이윤 . 지대)를 생산수단(토지 . 도구 . 원료)이 노동과정에서 그 사용가치를 통해 수행하는 '생산적 서비스'로부터 도출하려고 한다. 기묘한 변호론적 착상이 날 때마다 발표하는 로셔(William Roscher)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J. B. 세이가 ?정치경제학개론? 제1권 제4장에서, 일체의 비용을 공제한 뒤 정유공장이 생산한 가치는 어쨌든 새로운 가치이고, 정유공장 그 자체를 만들기 위해 수행된 노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정당하다"(?국민경제학원리?, 제3판, 1858년, p. 82, 주). 매우 정당하다! 정유공장이 생산한 '기름'은 정유공장의 건설에 지출된 노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로셔는 석유가 '천연적으로[비록 상대적으로 '적은 양이긴 하지만]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름'이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 '가치'를 '기름'과 같은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석유가 상대적으로 '적은 양으로' '천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자연)은 교환가치를 거의 만들어 내지 않는다"(같은 책, p.79). 로셔가 자연과 교환가치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마치 어리석은 처녀가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아주 조그마한 아이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바로 이 '학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리카도학파는 자본까지도 '축적된 노동'이라고 해서 노동이라는 개념속에 포괄시킨다. 이것은 졸렬하다. 왜냐하면 사실 자본의 소유자는 분명히 그것의 단순한 생산및 보존 이상의 것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신의 향락을 절제했으며, 그리하여 그는 그 대신 예컨대 이자(利子)를 요구하는 것이다"(같은 책 p. 82). 단순한 '요구'를 '가치'의 원천으로 전환시키는 경제학의 이 '해부생리학적 방법'이야말로 얼마나 '기묘'한가!)
생산적 노동이 생산수단을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形成要素)로 전환시킴으로써 생산수단의 가치는 일종의 윤회(輪廻: metempsychosis)를 겪는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소모된 육체로부터 새로 만들어진 육체로 옮겨간다. 그러나 그 이전은 이를테면 현실적 노동의 배후에서 일어난다. 노동자는 원래의 가치를 보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노동을 첨가할 수 없으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첨가하는 노동은 반드시 특정의 유용한 형태이어야 하며, 생산물들을 새로운
생산물의 생산수단으로 사용해 그들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유용한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를 첨가하면서 가치를 보존한다는 것은 활동중의 노동력[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이 자연적 속성은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으나 자본가에게는 현존하는 자본가치의 보존이라는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주석 4: "농업의 모든 도구들 중에서 인간의 노동이야말로....농업자가 자기의 자본을 회수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이 의지하는 것이다. 다른 두 가지 물건-현재 보유하고 있는 역축과....짐수레. 쟁기. 삽 등-은 일정한 양의 인간노동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곡물부족에 관한 의견과 상세한 논의, 1795년 11월 W. 피트에게 제출한 것? , 런던, 1800년. p. 10).) 경기가 좋은 동안에는 자본가는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노동의 이 무상(無償)의 선물을 보지 못하지만, 노동과정의 잠재적인 중단, 즉 공황(恐慌)은 자본가로 하여금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주석 5: 1862년 11월 26일자 ?더 타임즈?지에는 어떤 공장주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는 자기의 방적공장에 800여명의 노동자를 고용해 매주 평균 150고리짝의 동인도(東印度) 면화나 약 130고리짝의 아메리카 면화를 소비하는 공장주였는데, 그는 자기의 공장이 조업중단으로 입게 되는 간접비용에 대해 개탄하고 있다. 그는 그 비용을 연간 6,000파운드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생산적 비용 중에는 예컨대 지대. 세금. 지방세. 보험료 그리고 1년 계약으로 고용한 관리인. 경리. 기사 등의 급료 등과 같은, 우리와는 관계없는 수많은 항목들이 들어 있다. 다음으로 때때로 공장을 따뜻하게 하거나 증기기관을 운전하는 데 필요한 석탄이나, 그밖에도 임시노동으로써 기계설비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을 150파운드로 계산하고 있다. 끝으로 그는 기계설비의 손상이라고 하면서 1,200파운드를 계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후와 자연적인 부식(腐蝕: decay)은 증기기관이 운전을 정지했다고 해서 그 작용을 중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1.200파운드라는 금액은 기계 설비가 벌써 대단히 마멸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처럼 낮게 평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생산수단에서 실제로 소모되는 것은 그 사용가치(使用價値)이고, 이 사용가치의 소비에 의해 노동은 생산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실상 생산수단의 가치(價値)는 소비되지 않는다.(주석 6: "생산적 소비라는 것은 상품의 소비가 생산과정의 일부로 되는 경우다....이러한 경우 가치의 소비(消費)는 없다"(뉴먼[S. P. Newman], ?정치경제학개요", p. 296).) 따라서 그것이 재생산된 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 가치는 보존된다. 그 가치가 보존되는 것은 노동과정에서 가치 그 자체에 어떤 조작이 가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가치가 원래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사용가치가 사라지기[비록 다른 사용가치 속으로이긴 하지만]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再現)되기는 하나, 엄밀히 말해 재생산(再生産)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되는 것은 [원래의 교환가치가 그 속에 재현되는] 새로운 사용가치(使用價値)이다.(주석 7: 아마 20판은 거듭했으리라고 생각되는 북아메리카의 어떤 개설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어떤 형태로 자본이 재현(再現)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자기의 가치를 생산물에 재현시키는 모든 가능한 생산요소를 장황하게 열거한 다음,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생존과 안락에 필요한 각종 식료품. 의복. 주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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